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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출생, 담양읍 남촌마을 거주
목포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지역개발전공/석사)
전라남도 문화관광재단 대표이사(전)
담양부군수(전)
전라남도 대변인·인재양성과장·농업정책과장(전)
담양군 문화관광과장·대나무자원연구소장
<수상 소감>
조용익
누군가 내게 물었다. 담양에서의 예술부흥을 꿈꾼다면?
담양의 예술 역사나 흐름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술융성 시기나 찬란한 정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부흥하려면 융성했던 예술이 어느 지점까지 쇠퇴했는지를 가늠해야 부흥의 목표나 기준을 헤아려 다시 일으켜 세우든지 아니면 일어나게 하는 방도를 찾아볼 수 있으련만 쉽지 않다.
차라리 부흥이 아닌 지금보다 더욱 더를 가리키는 도약을 한다면 더 낫지 않을지 조심스레 뜻을 전달하고 싶다.
예술은 기예와 학술을 함께 아우르는 평범한 명사다. 때문에 포괄하는 영역은 무한히 넓다. 조형예술이나 순수예술, 전위예술 등 이 모두를 전체적으로 도약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물론 도약의 주체는 기획자(주체), 작가(예술인), 관객(주민)을 토대로 전문가적 관측자, 관심 높은 후원자, 방향을 설정하고 장기적·단기적 세심한 협력자인 관련 기관 등이 각각의 제 역할을 나눌 때 더욱 다양한 분야가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공간이나 시각의 의미를 표현하는 예술 중 미술은 대중화의 정도가 높다.
담양은 카페가 많은 도시다. 이는 인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적 현상이다. 교통망이 아주 잘 정돈되어서 동선이 편리해 어디든 들러서 맛있는 디저트를 곁들인 차 한잔과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덤으로 쉼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카페가 많고 적음은 단순한 숫자 개념보다 그 많음의 척도는 그 지역 문화예술의 선진화와 비례한다고 한다.
담양은 문화가 꽃피는 예술의 도시이다. 이런 문화가 지속되는 것은 대부분의 카페에서 제공되는 차의 맛과 향이 보통 이상으로 고급화되어 있어 다시 찾는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쉼을 누리는 시간에 여느 지역과 차별되는 담양만의 정취를 무한리필 제공받을 수 있는 것도 한몫한 셈이다.
이러한 인위적, 자연적, 지속적 카페 문화가 형성된 것은 담양만이 갖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담양인들 특유의 인정과 후덕함 덕분이다. 이를 기반으로 카페 아트페어를 정착시키면 담양 전 지역의 카페는 그림 시장의 점포가 되고 미술 갤러리를 겸비한 예술 카페가 될 것이다. 또한 예술 카페의 집중 지역은 카페 갤러리 거리로 자리매김할 가능성도 높다.
한 지역 또는 일정 구역 내에서 유명 작가 그림 시장이 연중 열리는 카페가 집중되어 있다면 그곳은 작가 거리로 이름지어질 것이고 작가들이 모여 사는 예술촌 이름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작가 거리, 작가 예술촌이 형성되면 국내는 물론 세계의 예술인, 관광객이 넘실거리고, 또 다른 제2, 제3의 작가 거리, 작가 예술촌이 담양 죽순처럼 솟아나지 않을까 꿈을 꾼다. 이러한 생각들이 현실화된다면 담양은 또 다른 예술 도시로의 변화와 정착으로 활기를 띠며 예술 자체가 큰 도약을 이루지 않겠는가? 담양을 찾는 사람 중 글을 써 보고 싶은 이는 없을까? 이들을 맞이하는 예쁜 메모지와 펜을 탁자 위에 놓아둔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의 표정으로 예술 감각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작품을 감상하면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기만 해도 담양은 햇살 연못다운 따뜻함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예술은 일반 주민과 차별화된 소수 엘리트 예술인만의 잔치가 아니다. 철학, 과학, 문학과 더불어 고급 문화로 가는 길이 예술 활동이라지만 그래서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편견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부정적 시각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고 긍정적 시각이 모두 맞는 것도 아니다. 각각 나름의 설득력과 단점을 갖고 있다. 두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각도의 이해가 필요하다.
예술인을 따로 정해놓고 그들 예술인만의 활동이 예술의 전부라는 편견을 일단 버려야 한다. 삶의 영역 어디든 예술 공간이 되고 누구든 창조적으로 움직일 때 그가 바로 예술인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예술 활동의 기본이 된다. 예술은 고독한 창작이라고 하지만 궁극에선 서로 이해하며 돕는 사랑의 결과물이다. 모두가 예술인이 되자. 예술에 한 걸음 다가서 보자. 예술은 남의 것이라는 관념을 허물고 내 것으로 만들어 가자.
위 글은 담양 예술지와 인터뷰에서 담양예술의 부흥을 묻는 질문지에 보낸 답글이다. 이 글을 구태여 수상 소감으로 대신하는 것은 나의 다짐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고 기회에 담양을 자랑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공연히 목소리만 높이기보다 우선 나부터 글쓰기에 열정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마침 담양예총 박성애 회장의 권유로 에세이스트에 등단하게 되었다. 박성애 회장님과 에세이스트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모두가 자기 서사를 완성해가는 수필가가 되자!
<당선작 >
일상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조용익
내가 사는 집 2층의 구조는 독특하다. 3평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사방에 방이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물론 천장의 높이도 각각 다르다. 그중 가장 작은 방은 엎어지면 남산 중턱에 코가 닿을 정도이다. 이 방은 동향과 북향에 자그마한 창문이 있어 종종 두 창문을 번갈아 가며 내다보곤 한다. 동창은 동창대로 북창은 북창대로 색다른 풍경이다.
그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고 있으면 문득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창문 너머로 사계절이 고즈넉하게 흘러간다.
초여름에 접어든 요즘은 산새들이 부지런해졌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몰려나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비탈에 붙박여 서 있는 고목들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경쾌한 노래를 불러댄다. 마치 절박하고 처절한 고독을 달래주려는 듯, 아주 작은 입술로 고목의 투박한 가지를 비비며 아양을 떨면 고목은 힘없이 손사래를 치듯 가지를 흔든다. 뒤틀리고 괭이가 박힌 둥치는 지친 표정이다. 그래도 새들은 지치지 않고 한 옥타브 높여 더욱 청아하게 재잘거린다.
이게 남산에서 매일 순간순간마다 이루어지는 자연 생물체의 일상적인 문화다. 또 이러한 산간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감상하며 글로 담아보는 것은 산문 예술이다. 예술은 나의 서정과 감동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노력이다. 즉 벗을 부르는 일이다. 지금 인연을 맺은 벗이든 아직 만나지 못한 벗이든, 그 벗들을 믿고 함께하자고 불러보는 행위이다. 그래서 예술은 일상에서 싹이 트고 일상을 통해 승화한다. 그것이 모이고 모여서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일상은 곧 문화이며 역사다. 문화와 역사의 모태는 예술이다. 예술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서정과 관조가 어떤 형태로든 표현되어 타인에게 전해지는 일이다. 세상에 잘 알려진 예술인도 있고 나처럼 그저 노력만 하는 범인도 있다. 어떤 예술이 더 탁월하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당대 무명인이 사후에 엄청난 예술가로 찬양받는 경우는 동서고금에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굳이 예술의 가치 기준을 묻는다면, 나는 법고창신 중에 창신에 방점을 찍겠다. 예술은 결국 모사보다 독창성에 있다. 독창성은 개개인의 일상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나는 예술의 결과물 중 기초화장만 한 새색시의 미모 같은 작품을 감성적 으뜸으로 평가하고 선호한다. 나만의 공감 가치는 은은하고 무덤덤하며 그저 약간의 세심함이 깃든 작품을 우선한다. 선호의 기준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나의 우둔한 고집스러움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예술의 부분적 공감 능력을 갖는다. 나의 공감 능력은 어쩌면 이해가 쉬운 작품을 가까이하고 싶은 데서 비롯된 듯하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소리가 되고, 해독할 수 없는 글은 낙서나 그림이 되어 버린 격이 될 수도 있다. 예술 작가의 독창성과 신비로움을 소리나 낙서가 되지 않게 조금 더 동화하고 싶은 취향이 예술을 맞이하는 내 일상이다.
일상의 삶을 파고드는 예술인과 관객의 동화는 쉽기도 하고 극히 어렵기도 하다. 동화되어가는 조건은 삶의 조건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안정, 각자의 경제 상황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관객의 동화가 없이 예술만 발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창작자와 관객의 하모니가 곧 문화 융성의 길이다.
나에게 예술은 여운이다. 무생채 비빔밥을 먹고 나서 한참 동안 가시지 않는 듯한 참기름 향기와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살아생전 어머니의 말씀처럼 시간이 갈수록 생생해지는 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안부 전화를 드리면 늘 한결같이 당부하셨다.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몸 성히 잘 살어.”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점점 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일상에서의 예술이란 곧 개인의 서정이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거대 담론의 시대는 가고 미시 담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심사평> 조용익의 「일상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조정은
일상이 어찌 예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은 수필에서 무수히 던져지곤 한다. 수필가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심각하게 고민해본 명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체로 뻔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일상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별것 아닌 평범한 일이란 의미가 내포된 탓도 있을 것인데 그보다 동양의 오랜 학문적 전통이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든가 법고창신(法古創新) 또는 함여유신(咸與惟新) 등등 늘 새로워지라는 명령을 내포한 채 흘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새롭다는 말, 새로워진다는 말 자체가 이미 새로울 수 없을 만치 남용 또는 오용되고 있다. 사실 일상에서 새로운 발견이란 한 존재가 새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큰 고통과 충격이 동반된다. 그런데 우리 삶이란 아픔과 충격을 피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즉 이 말은 새롭지 않기 위한 노력,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조용익이 이 글에서 말하는 새로움은 무엇일까. 2층의 가장 작은 방에서 남쪽으로 난 작은 창으로 내다보면 남산자락에 수십 년 수백 년 비탈에 붙박여 서 있는 고목들이 있다. 때는 초여름이고 잎들이 무성해지기 시작했겠지. 거기에 작은 새들이 깃들어 재잘거린다. 작은 방―작은 창―작은 새까지 ‘작은’이란 수사로 연결된 소재에는 작가의 모태 회귀적 본능이 투영되어 있다. 특히 저 뒤틀린 고목 나무에서 재잘대는 새들의 무리는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의도가 내포된 듯하다.
날이 밝기도 전부터 몰려나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비탈에 붙박여 서 있는 고목들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며 경쾌한 노래를 불러댄다. 마치 절박하고 처절한 고독을 달래주려는 듯, 아주 작은 입술로 고목의 투박한 가지를 비비며 아양을 떨면 고목은 힘없이 손사래를 치듯 가지를 흔든다. 뒤틀리고 괭이가 박힌 둥치는 지친 표정이다. 그래도 새들은 지치지 않고 한 옥타브 높여 더욱 청아하게 재잘거린다.
산의 대표 격인 고목나무지만 그를 위로하며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작은 새들이다. 위 문장은 “세상에 잘 알려진 예술인도 있고 나처럼 그저 노력만 하는 범인”과 만나서 동일화를 이루며 이야기의 맥락을 환기한다.
이 글은 작가의 예술론을 피력한 글이지만 그 주장이 부드럽고 은유적이어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생채 비빔밥을 먹고 난 뒤 입안에 맴도는 참기름 향이라든가 어머니의 자식 걱정하는 목소리처럼 여운을 남기는 바로 그게 예술이 아니냐는 것, 여운을 남기는 멋진 반전이다. 범상치 않은 작가의 출현에 기대가 크다.
―심사평 조정은 baramandgurm@hanmail.net
첫댓글 조용익 선생님, 신인상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조용익 선생님, 등단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