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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90권
80. 실제품(實際品)을 풀이함
【經】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을 마침내 얻을 수 없다면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실제(實際)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수보리야, 실제와 중생제(衆生際)가 다르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실제와 중생제는 다르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실제의 법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중생을 실제 가운데에 세우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실제가 곧 중생제라면 보살은 곧 실제를 실제에 세운[建立] 것이 되며,
세존이시여, 만일 실제를 실제에 세운다면 곧 제 성품[自性]을 제 성품에 세우는 것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제 성품을 제 성품에 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실제에 세우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실제는 실제에 세울 수 없고 제 성품도 제 성품에 세울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실제에 세우는 것이니라.
실제는 또한 중생제와 다르지 않으니, 실제와 중생제는 둘[二]이 없고 분별[別]도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모든 보살마하살의 방편의 힘이기에 이 방편의 힘으로써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실제에 세우면서도 또한 실제의 모양을 파괴하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가령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보시에 세운 뒤에는,
보시의 전후제(前後際)의 모양을 설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보시는 전제(前際)도 공하고 후제(後際)도 공하고 중제(中際)도 또한 공하며,
보시하는 이[施者]도 공하고 보시의 과보[施報]도 공하고 받는 이[受者]도 또한 공하다.
선남자들이여, 이 온갖 법은 실제(實際) 가운데서 얻을 수 없나니, 그대들은
〈보시가 다르고 보시하는 이도 다르며 보시한 과보도 다르고 받는 이도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만일 그대들이
〈보시가 다르고 보시하는 이도 다르며 보시한 과보도 다르고 받는 이도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때에 보시는 감로의 맛[甘露味]을 취하면서 감로 맛의 과보를 얻을 것이오.
그대들 선남자여, 이 보시 때문에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에도 집착하지 마시오.
왜냐 하면, 이 보시는 보시의 모양이 공하고, 보시하는 이는 보시하는 이의 모양이 공하며,
보시한 과보는 보시한 과보가 공하고, 받는 이는 받는 이의 모양이 공하기 때문이니,
공한 가운데서는 보시도 얻을 수 없고, 보시하는 이도 얻을 수 없으며, 보시한 과보도 얻을 수 없고 받는 이도 또한 얻을 수 없소.
왜냐 하면, 이 모든 법은 마침내 제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오’라고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교화하여 계율을 지니게 하며,
중생들에게 말하기를,
‘그대 선남자들이여, 살생(殺生)하는 법을 버리고 없애며 나아가 삿된 견해[邪見]의 법을 버리고 없애시오.
왜냐 하면 선남자여, 마치 그대들이 분별하는 법과 같이 이 모든 법에는 그러한 성품이 없기 때문이오.
그대 선남자들이여, 자세히 생각하기를,
〈어떤 것이 중생이기에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어떠한 물건으로써 목숨을 빼앗는가〉라고 해야 하나니,
이에 삿된 견해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오’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성취시키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곧 중생들을 위하여 보시와 지계(持戒)의 과보를 말하지만, 이 보시와 지계의 과보는 제 성품이 공하느니라.
보시와 지계의 과보의 제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안 뒤에는 이 가운데에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아서 능히 지혜를 일으키니,
이 지혜로써 온갖 결사(結使)와 번뇌를 끊고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느니라.
이것은 곧 세속의 법이요 으뜸가는 진실한 이치가 아니니,
왜냐 하면, 공한 가운데서는 사라지는 것도 없고 사라지게 하는 이도 없으며, 모든 법의 필경 공한 것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중생의 성내는 마음을 보면 교화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느니라.
‘그대 선남자여, 어서 와서 인욕을 수행하시오.
인욕하는 사람은 마땅히 인욕하기를 좋아해야 하나니, 그대가 내고 있는 성은 제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오.
그대는 어서 오시오. 선남자여, 그대는
〈나는 어떤 법 가운데서 성을 내고 있는가?
그 누가 성을 내는 이며, 성을 내게 하는 이는 누구일까〉 하고 이와 같이 생각하시오.
이 법은 모두가 공이요 이것은 성품이 공한 법이어서 공하지 않는 때가 없는 것이오.
이 공은 모든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과 성문이 만든 것도 아니며,
보살마하살이 만든 것도 아니고 모든 하늘ㆍ귀신ㆍ용왕ㆍ아수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이 만든 것도 아니며,
4천왕이 만든 것도 아니며, 나아가 타화자재천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범중천(梵衆天)이 만든 것도 아니며, 나아가 정거천(淨居天)이 만든 것도 아니고,
무변공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의 모든 하늘들이 만든 것도 아니오.
그대들은
〈성을 내게 하는 이는 누구고 그 누가 성을 내는 이며 어떤 것이 성을 내는 일일까〉 하고 생각해야 하나니,
이 온갖 법은 성품이 공하고 성품이 공한 법 가운데는 성을 낸다는 것이 없는 것이오.’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런 인연으로써 중생을 성품이 공한 데에 세워 차례대로 점점 보여주고 가르쳐주며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나니, 이것은 세속의 법이요 으뜸가는 진실한 이치가 아니니라.
왜냐 하면, 이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는 얻는 이도 없고 얻을 법도 없으며 얻을 곳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곧 실제의 성품이 공한 법이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위하여 이런 법을 행하면서도 중생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중생의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 때문에 중생들이 게으른 것을 보면,
교화하여 몸[身]으로 정진하고 마음[心]으로 정진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느니라.
‘선남자들이여,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게으름의 법도 없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도 없으며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는 것이오.
이 온갖 법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여서 성품이 공한 것을 넘어서는 것이 없나니,
그대들은 몸의 정진과 마음의 정진을 내어 착한 법을 낳기 위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야 하오.
선남자들이여,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인욕을 닦고 정진을 행하며 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행하며,
모든 선정ㆍ해탈ㆍ삼매와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공해탈문과 무상ㆍ무작의 해탈문 내지는 18불공법을 행하는 가운데서 게으름을 피우지 마시오.
선남자들이여, 이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서 마땅히 장애 없는 모양[無礙相]을 알아야 하나니,
장애가 없는 법 가운데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이도 없고 게으름을 피우는 법도 없는 것이오.’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들을 교화하여 성품이 공한 데에 머물러서 둘의 법[二法]에 떨어지지 않게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성품이 공한 데에서는 둘이 없고 분별도 없기 때문이니, 이 둘이 없는 법인지라 성을 낼만한 곳이 없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성품이 공한[性空]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교화하여 정진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느니라.
‘선남자들이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와 선정ㆍ해탈ㆍ삼매와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공해탈문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과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과 대자대비에 부지런히 정진하며,
이 모든 법에 대하여 그대들은 둘이라는 모양[二相]도 생각지 말고 둘이 아니라는 모양[不二相]도 생각지 말아야 하오.
왜냐 하면, 이 법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며 이 성품이 공한 법에서는 둘이라는 모양으로 생각하지도 않아야 하고 둘이 아니라는 모양으로 생각하지도 않아야 하기 때문이오.’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 중생들을 성취시키고 중생들을 성취시킨 뒤에는 차례로 교화하면서,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지위를 얻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의 마음이 산란한 것을 보면 방편의 힘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느니라.
‘선남자들이여, 마땅히 선정을 닦아야 하며, 그대들은 산란한 생각을 내지 말고 한 마음[一心]을 내어야 하오.
왜냐 하면, 이 법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며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는 산란해지거나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니,
그대들은 이 삼매에 머무르면서 몸과 입과 뜻의 모든 업(業)을 짓되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며, 인욕을 행하고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며, 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닦으며,
4념처를 행하고 나아가 8성도분을 행하며, 모든 해탈과 차제정을 행하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과 대자대비와 32상과 80수형호를 행할 것이오.
또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도와 부처님의 도를 행하고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일체종지와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것에 대해 그대들은 모두 소원대로 얻어야 하나니, 성품의 공[性空]을 행하기 때문이오.’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끝내 게으름을 피우거나 그만두지 않으며,
항상 착한 법을 구하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한 부처님의 국토에서 다른 한 부처님의 국토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고 몸을 버리거나 몸을 받거나 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망실하지 않으면,
이 보살은 언제나 모든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모든 감관 즉 몸의 감관[身根]과 말의 감관[語根]과 뜻의 감관[意根]을 완전하게 갖추느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일체종지를 닦기 때문이니, 일체종지를 닦기 때문에 성문의 도와 벽지불의 도와 보살의 도와 보살의 신통의 도(道) 등 일체의 도를 닦느니라.
신통의 도를 행하면서 보살은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하고 끝내 망실하지 않나니,
이 보살은 과보로 얻은[報得] 신통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되 나고 죽고 하는 5도(道)에 들어가면서도 끝내 없어지거나 줄어지지 않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성품이 공한 데에 머물러 선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성품이 공한 데에 머물러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들 선남자들이여, 온갖 법은 성품이 공하다고 관찰하시오.
선남자들이여, 그대들은 모든 업인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으로 감로의 맛을 취하고 감로의 과보를 얻어야 하오.
성품이 공한 가운데서는 물러나는 어떤 법도 없는 것이오.
왜냐 하면, 성품이 공한지라 물러나지도 않고 또한 물러나는 이도 없기 때문이니,
성품이 공하면 법도 아니고 또한 법이 아닌 것도 아니거늘, 있는 바 없는 법[無所有法] 가운데서 어떻게 물러나는 것이 있겠소’라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와 같이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항상 게으름을 피우거나 그만두지 않나니,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이 10선(善)을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10선을 행하게 하며, 5계(戒)와 8계(戒)에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자기 자신의 초선(初禪)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초선을 행하게 하고 제4선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며,
항상 자기 자신이 인자한 마음[慈心]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인자한 마음을 행하게 하고 이에 버리는 마음[捨心]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자기 자신이 무변공처(無邊空處)를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무변공처를 행하게 하고 이에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常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며,
자기 자신이 4념처를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4념처를 행하게 하고 이에 8성도분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80수형호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자기 자신이 수다원의 과위에서 지혜를 내면서도 또한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도 교화하여 수다원의 과위를 얻게 하면서 이에 아라한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 하며,
자기 자신이 벽지불의 도 가운데서 지혜를 내면서도 또한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도 교화하여 벽지불의 도를 얻게 하며,
자기 자신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내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 때문에 끝내 게을러지는 일이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의 성품이 항상 공하다면 항상 공한 가운데서는 중생을 얻을 수 없고 법과 법이 아닌 것도 얻을 수 없거늘,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일체종지를 구하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다면 공한 가운데서는 중생도 얻을 수 없고 법과 법 아닌 것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보살마하살은 성품의 공한 데에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거나 중생들을 위하여 성품이 공한 법을 설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물질의 성품이 공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성품이 공하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5음(陰)의 성품이 공한 법을 설하고 12입(入)과 18계(界)의 성품이 공한 법을 설하며,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의 성품이 공한 법을 설하고,
3해탈문과 8배사와 9차제정과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과 대자대비와 32상과 80수형호의 성품이 공한 법을 설하며,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일체종지를 설하여,
번뇌를 끊고 성품이 공한 법을 익히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내공(內空)의 성품이 공하지 않고 외공(外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의 성품도 공하지 않다면 곧 공한 성품이 파괴되나니, 이 성품이 공하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不常] 단절 되는 것도 아니니라[不斷].
왜냐 하면, 이 성품이 공하면 머무르는 곳도 없으며 또한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이름하여 법이 머무르는 모양이라 하나니,
이 가운데에는 법이 없어서 모이는 것도 없고 흩어지는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으며,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느니라. 이것이 곧 모든 법의 모양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 머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되 일으키는 것이 있는 어떤 법도 보지 못하며 일으키는 것도 없고 머무르는 것도 없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이 머무르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을 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보살은 장애되는 어떤 법도 보지 않거늘 어디에서 의심을 내게 되겠느냐?
이것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성품이 공하다면 중생을 얻지 못하고 나[我]도 얻지 못하고 사람도 얻지 못하며,
수(壽)도 얻지 못하고 명(命)도 얻지 못하며 나아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도 얻지 못하며,
성품이 공한 가운데서는 물질도 얻을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80수형호도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부처님이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사부대중을 변화로 만들어 놓고, 항상 그 중생들을 위하여 천만억 겁 동안 끊이지 않고 법을 설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변화로 된 대중들은 당연히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를 얻게 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授記)를 얻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이 모든 변화한 대중은 근본과 진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니, 온갖 법도 성품이 공하여 역시 근본과 진실한 일이 없거늘,
어떻게 이런 중생들이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를 얻겠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얻겠습니까?”
“수보리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을 위하여 성품이 공한 법을 말하면서도 이 중생은 실로 얻을 수 없으니, 중생이 뒤바뀜[顚倒]에 떨어지기 때문에 중생들을 구출하여 뒤바뀌지 않는 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뒤바뀌는 것은 곧 뒤바뀜이 없는 것이라 뒤바뀌는 것과 뒤바뀌지 않는 것이 비록 하나의 모양이라 하더라도 뒤바뀌는 것은 많고 뒤바뀌지 않는 것은 적나니,
뒤바뀌는 것이 없는 가운데에는 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나아가 아는 이ㆍ보는 이도 없느니라.
뒤바뀌는 것이 없는 가운데에는 또한 물질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없으며 12입(入)도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없느니라.
이것이 곧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함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에 머물러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의 모양이 뒤바뀐 가운데서 중생들을 구출하느니라.
이른바 중생이 없는데도 중생이 있는 모양 가운데서 구출하고 나아가 아는 이ㆍ보는 이의 모양 가운데서 구출하며,
물질이 없는데도 물질의 모양 가운데서 구출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없는데도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 의 모양 가운데서 구출하나니,
12입ㆍ18계 내지는 온갖 유루(有漏)의 법에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보리야, 모든 무루(無漏)의 법, 즉 4념처와 4정근과 4여의족과 5근과 5력과 7각분과 8성도분의 이와 같은 법들은 비록 무루라 하더라도 제일의(第一義)의 모양보다 못하느니라.
제일의의 모양이란, 짓는[作] 것도 없고 하는[爲] 것도 없으며 나는[生] 것도 없고 모양[相]도 없으며 언설[說]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제일의라 하고,
또한 성품이 공하다[性空]고도 하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도[諸佛道]라고도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는 중생을 얻지 못하고 나아가 아는 이ㆍ보는 이도 얻지 못하며,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얻지 못하고 나아가 80수형호를 얻지 못하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도법(道法)을 위하여 일부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법의 실상의 성품이 공한 것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이 성품이 공한 데서는 전제(前際)도 또한 이 성품이 공하고 후제(後際)도 또한 이 성품이 공하고 중제(中際)도 또한 이 성품이 공하며, 언제나 성품이 공한 것이라 성품이 공하지 않은 때가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 성품이 공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이 중생의 모양에 집착하는 것을 구출하기 위하여 도종지(道種智)를 구하며,
도종지를 구할 때에 성문의 도ㆍ벽지불의 도ㆍ보살의 도의 온갖 도를 두루 행하나니,
이 보살은 온갖 도를 완전히 갖추고 중생을 삿된 생각과 집착에서 구출하며,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한 뒤에 그의 수명에 따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느니라.
수보리야, 과거 세상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도(道)는 성품이 공하고 미래ㆍ현재의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도도 또한 성품이 공하며,
성품이 공한 것을 여의고 세간에는 도도 없고 도의 과위도 없나니,
반드시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하여 이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법을 듣고 이 법을 행하여야 살바야(薩婆若)를 잃지 않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성품이 공한 법을 행하면서 또한 성품이 공한 모양을 파괴하지 않으니, 이른바
‘물질은 성품이 공한 것과 다르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성품이 공한 것과 다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품이 공한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물질이 곧 성품의 공함이요 성품의 공함이 곧 물질일 뿐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곧 성품의 공함이요 성품의 공함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만일 물질과 성품의 공한 것이 다르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성품의 공함과 다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성품의 공함과 다르다면 보살마하살은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제 물질이 성품의 공함과 다르지 않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성품의 공함과 다르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을 알고 뜻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이 가운데에는 진실하다거나 항상 있다거나 하는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니라.
다만 범부는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에만 집착하며,
범부는 물질의 모양을 취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을 취해서,
나[我]라는 마음으로 안팎의 물건에 집착하기 때문에 뒤에 생겨나는 몸의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받나니,
이 때문에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고ㆍ근심하고ㆍ괴로워하는 데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다섯 세계[五道]를 왕래하느니라.
이런 일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성품이 공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 등 모든 법의 모양이 공한 것과 공하지 않은 것을 파괴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물질의 성품이 공한 모양은 물질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른바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공이다.’라고 하는 그것이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은 허공을 파괴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안의 허공은 바깥 허공을 파괴하지 않으며 바깥 허공도 안의 허공을 파괴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물질은 물질의 공한 모양을 파괴하지 않고 물질의 공한 모양도 물질을 파괴하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두 가지 법은 이른바 ‘이것은 공이다, 이것은 공이 아니다.’라고 파괴할 수 있는 어떤 성품도 없기 때문이니,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이 공하여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다’고 하는 서원을 내겠는지요?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에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보살은 발심하여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다’고 말하겠는지요?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을 분별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두 가지 모양을 행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으며,
만일 분별하면서 두 가지 갈래를 짓지 않는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지만,
만일 둘이 아니어서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곧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 보리 그것은 둘이 아닌 모양이요 파괴되지 않는 모양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리는 물질 가운데서 행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보리도 또한 보리 가운데서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물질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물질이어서 둘이 아니고 분별되지 않기 때문이니,
나아가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이 보리는 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도 아니고 버리기 위하여 행하는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보리를 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리기 위하여 행하는 것도 아니라면, 보살마하살은 보리를 어느 곳에서 행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치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은 어느 곳에 있으면서 행하는 것이더냐?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며,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의 보리도 또한 이와 같아서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은 꿈속에서 보리를 어느 곳에서 행하는 것이더냐?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더냐?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끝내 잠을 자지 않거늘, 어떻게 꿈속에서 보리를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며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겠는지요?”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이와 같아서 취하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버리는 가운데서 행하는 것도 아니니, 이른바 물질 가운데서 행하고 나아가 일체종지 가운데서 행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장차 보살마하살이 10지(地)를 행하지 않고 6바라밀도 행하지 않으며,
37조도법(助道法)도 행하지 않고 14공(空)도 행하지 않으며,
모든 선정ㆍ해탈ㆍ삼매도 행하지 않고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80수형호도 행하지 않는다면,
다섯 가지 신통에 머물러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일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네가 말한 것과 같아서 지금 보살은 비록 보리가 처소와 행(行)이 없다고 하더라도,
만일 10지와 6바라밀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과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80수형호를 두루 갖추지 못하며,
항상 버리는 법[常捨法]과 착오하지 않는 법[不錯謬法]의 이러한 모든 법을 두루 갖추지 못한다면,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물질의 모양 가운데에 머무르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 가운데에 머무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10지를 두루 갖추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얻나니,
이 모양은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寂滅] 능히 늘어나거나 덜하거나 나거나 없어지거나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도를 얻거나 과위를 얻거나 하는 어떠한 법도 없느니라.
세속 이치[世諦]의 법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지, 으뜸가는 진실한 이치[實義]에 의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으뜸가는 진실한 이치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는 이도 없기 때문이니,
이 온갖 법은 모두다 세속의 이치 때문이요 으뜸가는 이치에 의한 것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할 적에 보리도 또한 늘어나지 않고 중생도 또한 줄어들지 않으며, 보살도 또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사람이 처음에 도를 얻을 때에 무간삼매(無間三昧)에 머물러서 무루근(無漏根)을 얻어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를 성취하면,
너는 그때에 꿈이나 마음이나 도나 도의 과위에 대하여 얻을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얻을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아라한의 도를 얻은 이인 줄 알 수 있더냐?”
“세존이시여, 세속 이치의 법 때문에 분별하여 아라한의 도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세속의 이치 때문에 보살이라 이름하고 물질ㆍ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 내지는 일체종지라고 이름 하느니라.
이 보리 가운데에는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나니, 모든 법은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초지(初地)의 마음 내지는 10지의 마음과 6바라밀과 37조도법과 공삼매ㆍ무상삼매ㆍ무작삼매 내지는 온갖 부처님의 법이겠느냐?
얻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論】 해석한다.
앞의 품(品) 가운데서 수보리는 갖가지 인연으로 따지면서,
“만일 모든 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다섯 세계[道]에서 나고 죽는 것과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법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중생에 대하여 따지면서,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을 끝내 얻을 수 없다면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반야를 행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앞에서는 법에 대하여 따져서 중생을 위하고, 여기에선 중생에 대하여 따져서 법을 위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대답하시길,
“실제(實際)를 위하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수보리의 생각은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여기는 것이요,
부처님의 생각은
‘중생은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거짓이므로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보살은 온갖 진실한 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 진실한 법[實法]이 곧 실제(實際)이다.’라고 여기신 것이다.
【문】 온갖 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워함을 보고 그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大悲心]을 내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실제를 위해서이다.’라고 하시는가?
【답】 처음 뜻을 낸 보살은 다만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킬 뿐이다.
괴로움이라 함은 이른바 늙고ㆍ병들고ㆍ죽는 것 등과 몸과 마음의 쇠퇴와 번뇌를 말한다.
어떻게 이런 괴로움을 없애는가?
괴로움의 인연(因緣)을 찾아보면 그것은 태어남[生]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12인연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인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는가?
그것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온갖 중생들도 모두 태어남의 인연이 곧 괴로운 것인 줄 알고 있거늘, 보살로 인하여 어떤 특별한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답】 중생들은 이 태어남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가령 괴로운 일을 만난다 해도 그때에는 다른 사람만을 원망할 뿐 자신에게서 찾지를 못하나니, 애초부터 태어남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결사(結使)가 더욱 자라고 거듭거듭 태어나는 법만 늘릴 뿐 진실한 괴로움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를 맞는다거나 전쟁[刀兵] 등의 모든 근심이나 고통은 없으면서도 죽음의 고통만은 있는 것이니, 이런 죽음이 어디서 온 것인가?
바로 태어남에서부터 있게 되는 것이다.
또 매를 맞는다거나 전쟁 등의 근심과 고뇌는 모두가 태어남 때문에 있게 되지만, 그 밖에 다른 법은 혹 괴로움이 있기도 하고 혹은 괴로움이 없기도 한다.
그러나 이 태어남의 법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가령 큰 지혜를 지닌 이나 모든 하늘들이라 해도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이 때문에 태어남은 반드시 괴로움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
마치 풀과 나무는 생겨났기 때문에 반드시 불을 만나 타게 되지만,
만일 생겨나지 않았다면 비록 사나운 불이나 큰 바람이 있다 하더라도 불에 타서 해를 입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보살은 괴로움의 인연을 이미 얻고 있었기에 그 태어남의 인연을 다시 추구(推求)하는 것이다.
태어남의 인연[生因緣]은 존재[有]이다.
이 존재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이다.
이 세 가지의 존재에 집착하여 착하거나 나쁜 업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이 곧 태어남의 인연이다.
존재의 인[有因]은 네 가지 취함[四種取]이다.
취함의 인연[取因緣]은 갈애[愛] 등의 모든 번뇌이다. 작은 것 이어서 아직 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갈애라 하며, 더욱 자라서 업을 일으키면 그 때문에 취함[取]이라 하나니,
욕취(欲取)와 견취(見取)와 계견(戒見)와 아어취(我語取)의 이 네 가지 일을 취하고 집착[取著]하기 때문에 갖가지 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갈애의 인연[愛因緣]은 세 가지의 느낌[受]이요,
느낌의 인연은 안(眼) 등 여섯 가지의 접촉[觸]이다.
접촉[觸]은 느낌[受] 등의 모든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일컬으니, 정(情)ㆍ진(塵)ㆍ식(識)의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느낌 등 마음에 속한 법을 낸다.
근본은 비록 세 가지 일의 화합 때문에 접촉을 생겨나게 한다 하더라도 6정(情)이 의지하고 머무르는 곳이므로 다만 6입(入)이라고 말할 뿐이다.
6입의 인연은 이름[名]과 물질[色]이다.
6입은 비록 그것이 이름과 물질의 영역[分]이라 하더라도 다 이루어졌으면 6입이라 하고,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그것을 이름과 물질이라 한다.
물질이 다 이루어지면 다섯 개의 입[五入]이라 하고.
이름이 다 이루어지면 한 개의 입[一入]이라 한다.
이것은 태(胎) 속에 있을 때의 인연의 차례이다.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바로 의식[識]이다. 만일 의식이 태에 들지 않으면 그 태는 처음부터 문드러져 있을 것이다.
의식을 중음(中陰)이라 하며, 그 가운데에 5중(衆)이 있는데, 이 5중은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다만 의식이라고 할 뿐이다.
만일 의식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태가 성립되어 있다면, 온갖 화합이 있을 때에도 태는 모두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문】 의식은 어떤 인연 때문에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가?
【답】 행(行)의 인연 때문이다.
행은 곧 그것이 과거 세상의 세 가지의 업이니, 업이 의식을 가지고 태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바람이 불어 아지랑이를 날리면 공중으로 가서 아지랑이는 바람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전생에 사람 몸이었을 적에 그러한 6식(識)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마칠 때 업이 의식을 가지고 태(胎)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문】 앞에서는 업을 무엇 때문에 존재[有]라 하고, 여기서는 업을 무엇 때문에 행이라 하는가?
【답】 위의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의 업이다.
미래 세상에서 있게[有] 되기 때문에 존재라 했고, 지금의 업은 과거 세상이 이미 사라져 다하고 이름만이 있을 뿐이므로 행이라 한다.
[천축(天竺)의 말로는 산가라(刪迦羅)라 하고, 진나라에서는 행(行)이라 한다.]
이 행의 인연은 무명(無明)이라 한다.
온갖 번뇌는 비록 그것이 과거의 업의 인연이라 하더라도 무명이 근본이 되기 때문에 다만 무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금 현재의 세상에서는 갈애[愛]와 취함[取]에 대한 집착이 많기 때문에 갈애와 취함이라는 이름을 받지만,
과거 세상에서는 그것은 의심[疑]과 삿된 소견[邪見]이 있었던 곳이므로 무명이라고만 이름한다.
지금 온갖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무명이다.
【문】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나고 죽고 하면서 그런 일은 아주 많이 있었거늘, 무엇 때문에 무명이라고만 한정시키는가?
【답】 이런 일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대답했었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고통에서부터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하여 괴로움의 인연을 구할 적에, 중생이 겪는 과거와 현재의 늙어 죽는 등의 괴로움을 제거시킬 수 없지만,
미래 세상에 있어 늙어 죽는 등의 괴로움을 제거시키기 위하여 그 상속(相續)을 끊어서 다시는 더 나지 않게 한다.
마치 용한 의사가 과거의 병은 치료할 수 없고 현재의 병도 낫게 할 수 없을 때는 약을 먹이고 다만 앞으로 생겨날 병만을 치료하면서 그 냉(冷)과 열(熱)을 파괴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또 잘못하여 불이 나서 집이 탈적에 이미 과거의 불이기 때문에 끄려고 힘쓰지 않고 또한 현재 불이 타고 있는 것도 끄려고 하지 않되, 다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것만은 더 타지 않도록 힘써 끄는 것과 같다.
이 용한 의사와 불 끄는 사람이 힘써 행하는 방편은 역시 헛된 것이 아니듯이 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없애려는 것도 이와 같다.
과거의 괴로움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다시 작용할 바가 없고,
현재의 괴로움은 전생의 인연으로 성취한지라 물리칠 수 없다.
다만 미래 세상에 늙어 죽는 등의 괴로움의 인연만을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니, 이런 태어남의 법과 늙어 죽는 등 괴로움을 파괴하고 나면 저절로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미래 세상에 있을 늙어 죽는 등의 괴로움의 인연이 생기는 것을 소멸시키려고 현재에 존재[有] 등의 여덟 가지 인연을 얻는 것이다.
첫째는 유루의 업[有漏業]이라 하고,
둘째는 현재 세상의 모든 번뇌[現在世諸煩惱]이니, 이른바 4취(取)와 1애(愛)라 한다.
이 두 가지 번뇌는 두 개의 마음에 속한 법으로부터 생기나니,
이른바 느낌[受]과 접촉[觸]이다.
접촉은 온갖 마음에 속한 법을 내는데 느낌 이전에 생기는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다.
접촉은 바로 느낌의 인연이다.
느낌은 비록 3독(毒)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중생들은 이 옛 번뇌를 애착한다.
접촉의 인연은 바로 안[內]의 6입(入)이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비록 바깥[外]의 6입이 있다 하더라도 안의 6입은 없기 때문에 접촉 등의 마음에 속한 법은 생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안의 6입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이름과 물질[名色]은 바로 6입의 인연이다.
이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아서 처음에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은 바로 이름과 물질의 인연이다.
의식과 그리고 이름과 물질은 태에 있을 적에 이 안에서도 비록 6입은 있다 하더라도 아직 성취하지 못하고 아직 작용할 수도 없으므로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다.
이미 태어난 젖먹이는 아직 어떤 동작을 할 수도 없고 다만 6입만 있을 뿐이며, 점차로 커가면서 여섯 가지 접촉[六燭]이 있게 된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불을 밟고 얼음을 밟는다 해도 다만 그 접촉만이 있을 뿐, 아직 고통과 쾌락을 잘 모르지만 점차로 커가면서 고통과 쾌락을 느끼되 아직은 깊이 애착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어린 아이는 비록 성을 낸다 하더라도 아직 살생(殺生) 등의 나쁜 업은 일으킬 수 없으며, 비록 기뻐한다 하더라도 아직 보시 등의 착한 업은 일으킬 수 없지만,
나이가 들고 성인(成人)이 된 뒤에 괴로움을 만나면 성을 내고 즐거움을 얻으면 사랑을 내는 것과 같다.
쾌락거리를 구하는 까닭에 욕취(欲取) 등의 4취를 취하며, 취하는 때에 선악의 업을 일으키게 된다.
만일 전생의 한 세상 동안의 무명에 대한 업의 인연을 알게 된다면 억만 세상 동안의 일도 알 수 있을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현재의 불이 뜨거운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불도 또한 그러한 것과 같다.
만일 무명의 인연의 그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끝이 없는 것이므로 곧 치우친 견해[邊見]에 떨어지고 열반의 도를 잃게 되나니, 이 때문에 구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다시 구한다 하면 곧 희론에 떨어질 것이요 그것은 부처님의 법이 아니다.
보살은 그 무명을 끊게 하려고 무명의 체상(體相)을 구하는데, 구하는 때에는 곧 필경 공한 데에 들어간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명의 모양은 안의 법으로도 알지 못하고 바깥 법으로도 알지 못하며 안팎의 법으로도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살이 내공(內空)으로써 안의 법을 관찰하면 안의 법은 곧 공하고, 외공(外空)으로써 바깥 법을 관찰하면 바깥 법도 곧 공하며, 내외공(內外空)으로써 안팎의 법을 관찰하면 안팎의 법도 곧 공하다.
이와 같은 온갖 것은 바로 무명의 모양이니,
마치 앞에 품(品)의 『덕녀경(德女經)』 가운데서 무명을 파괴하는 데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같다.
또 보살이 무명의 체성을 구하면 즉시 그것은 명(明)이 된다.
이른바 모든 법의 실상을 실제(實際)라 하니,
모든 법을 관찰하면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인데도,
중생들의 뒤바뀐 인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켜 나쁜 죄업을 짓고 다섯 세계[道]를 바퀴 돌 듯 돌아다니면서 나고 죽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내어 제 몸을 둘러싸 감은 뒤에 끊는 물속에 들어가 삶아지는 것과 같다.
범부의 중생도 이와 같아서 처음에 태어날 때는 아직 모든 번뇌가 있지 않다가 뒤에 스스로가 탐욕과 성냄 등의 모든 번뇌를 내는 것이니,
이런 번뇌의 인연 때문에 진실한 지혜를 가리게 되며 몸을 바꾸면서 지옥의 불에 타고 끊는 물에서 삶아지게 된다.
보살은 이런 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공한데도 다만 중생들이 뒤바뀌고 착각한 까닭에 이러한 고통을 받게 됨을 안다.
보살은 이런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의 마음을 내어 이런 뒤바뀜을 깨뜨려 주려고 짐짓 진실한 법을 구하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실제(實際)를 통달하고 갖가지의 인연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실제에 머무르게 되나니, 이 때문에 머무른다 해도 허물할 것은 없다.
또 경에서 말하기를,
“만일 중생과 실제가 다르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없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다르다’고 함은 실제는 바로 필경 공한 것이고 중생제(衆生際)는 결정코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모든 법의 실상이 공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중생들을 위하여 이 실제를 닦겠는가?
만일 중생이 필경 공하고 실제가 반드시 있다면 중생은 없으므로 이롭게 할 것도 없거늘, 누구를 위하여 실제를 행하겠는가?’라고 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생제는 실로 실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사리분별 못하고 뒤바뀐 범부를 깨우쳐 주려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실제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면서도 실제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에 수보리는 또 묻기를,
“만일 중생제와 실제가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실제로써 실제에 집착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제 성품은 제 성품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해야 함은 마치 손가락 끝은 제 손가락 끝을 만질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보살은 방편으로써 중생을 실제에 세우면서도 중생과 실제가 동일하다거나 다르다는 것을 또한 얻을 수 없다.”라고 하셨다.
만일 동일하다고 한다면 곧 실제의 모양을 파괴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동일한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 두 가지의 법이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또한 하나가 아닌 것도 아니요, 둘이 아닌 것도 아니며, 마침내 고요히 사라진[寂滅] 것이어서 희론의 모양도 없는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보살은 대비의 마음을 내어 다만 중생들을 구출하면서 뒤바뀐 데서부터 여의게 하려는 까닭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또 묻기를,
“어떠한 것을 방편이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단(檀) 가운데에 세우고 이 단을 설하면서
‘선제(先際)와 후제(後際)도 공하며 중제(中際)도 이와 같다’고 하느니라”라고 하셨으니,
경 가운데서 자세히 말씀한 것과 같다.
보살은 이 실제를 알기 때문에 중생의 곁에 이르게 되니, 앞의 「단품(檀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중생은 이런 말씀을 들은 뒤에 발심하여 번뇌를 꺾으면서도 깊이 보시에 집착하고,
보살은 중생을 가엾이 여겨
“나는 간탐 가운데에서 그를 구출했다.”라고 하면서,
이제는 다시 보시에 집착하게 된다.
중생이 만일 보시를 받았어도 복이 다하면 모든 괴로움을 받게 되고,
또 복덕과 부귀의 인연을 받으면서 큰 죄를 짓게 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나니라.
이 때문에 이 중생은 잠시 동안만 즐거움을 얻을 뿐이요 괴로움은 오랜 세월동안 받게 됨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들을 위하여 보시의 실상(實相) 즉 필경 공을 설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보시가 지나가고 나면 이미 소멸하는 것이므로 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으며 수용할 수도 없고 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어서 마치 꿈에서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있지 않아서 필경 공하다. 이 보시는 선제와 후제도 없기 때문에 중제도 또한 없다.”라고 한다.
6진(塵)을 파괴한 곳과 색법(色法)을 타파한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아서, 현재의 보시가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갈래갈래 부수고 쪼개어 작은 먼지에 이르면 얻을 수가 없으며, 보시는 3세(世) 동안 다 공하나니,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와 과보도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은 보시하는 이에게 말하기를,
“보시 등의 법은 바로 맨 처음 부처님의 법에 들어가는 문이다.
실제(實際) 가운데에는 실제의 모양조차 없거늘 하물며 보시이겠는가?
그대는 보시 등의 법을 생각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
만일 생각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보시의 체상(體相)과 같아진다.
이와 같은 보시는 감로의 맛[甘露味]과 감로의 열매를 얻는다.”라고 하는데,
감로의 맛이란 곧 8성도분이며, 감로의 열매란 곧 열반이다.
보살은 비록 실제 가운데에 머무른다 하더라도 방편의 힘인 보시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나니,
그 밖의 다른 바라밀에서도 또한 이와 같다.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하다면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는 법과 법이 아닌 것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거늘 보살은 어떻게 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일체종지를 구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이 보시 등의 모든 법을 행하게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성품이 공하면 온갖 법을 파괴하여 모두 다하고 남는 것이 없겠거늘 어떻게 보살은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보시 등의 모든 착한 법을 행하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면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을 알므로 이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모든 법의 실상은 곧 그것이 성품의 공[性空]이니, 만일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보살은 이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지 않으니라.
이미 중생들을 위하여 성품이 공한 법, 즉
‘물질의 성품이 공하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성품도 공하다’는 것을 설명했고,
나아가 중생들을 위하여 일체종지로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도 성품이 공한 법임을 설명했다.”라고 하셨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18공(空)이 만일 성품이 공하지 않다면 이것은 공의 체성을 파괴한 것이 된다. 왜냐 하면 18공은 온갖 법을 공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스스로 공하지 않다면 거짓이 되며, 또 만일 공하지 않다면 항상 있다 하는 소견[常邊]으로 집착하는 곳에 떨어지면서 번뇌를 낸다.
성품이 공하면 실로 머무르는 곳도 없고 어디서부터 온데도 없으며, 가도 어디에 이르는 데가 없나니, 이것을 바로 항상 머무르는 법 모양[常住法相]이라 한다.
항상 머무르는 법 모양은 성품이 공한 것[性空]의 다른 이름[異名]이며, 또한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이라고도 한다.
이 모양 가운데에는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보살은 이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을 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장애가 되는 어떤 모든 법도 보지 않으며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방편의 힘’이란 필경에는 법도 없고 또한 중생이 없는데도 중생을 제도하는 그것이다.
【문】 만일 중생과 법이 본래부터 무위(無爲)라 하면, 그 누가 방편을 짓고 그 누구를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는가?
【답】 성품이 공한 것을 공한 성품이라 하고 또한 없다고 하거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 공한 성품의 모양을 취하면서 따지는가? 만일 성품에 공한 모양이 있다 한다면 따져야 될 것이다.
또 모든 법의 실상을 얻은 이는 바로 성품이 공한 줄을 알며,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하여 법도 없고 중생도 없는 줄 알겠지만,
범부는 아직 실상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갖가지로 기억하고 생각하며 분별한다.
마치 미친 사람이 망령되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에 범부와 미친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미친 법 가운데는 이런 모든 법의 분별이 있지만 진실한 법 가운데는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보살은 본원을 만족시키려 하고 또한 성품이 공한 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함이 있는 것이니, 이런 일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아야 한다.
또 이 경에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성품이 공한 가운데서는 중생도 얻을 수 없고 아는 이[智者]ㆍ보는 이[見者]도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나아가 80수형호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도 보살은 이 법을 세워 중생들을 위하나니, 이것은 세속의 이치로 말하는 까닭이요 이것은 진실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비유로써 말씀하시기를,
“만일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과 또 변화로 사부대중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법을 설하면 도를 얻는 이가 있느
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하기를, “없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일정한 근본과 진실한 일이 없거늘 어떻게 수다원을 얻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는 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보살이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중생은 정해진 진실이 없지만 다만 뒤바뀐 가운데서 중생을 구출하여 뒤바뀐 것이 없는 가운데에 놓아두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뒤바뀐 것이 없는 법은 역시 처소도 없으며 이 가운데에는 중생도 없고 나아가 아는 이ㆍ보는 이까지도 없다.
비록 공한 성품이 하나의 모양이라 하더라도 뒤바뀐 것은 많고 뒤바뀌지 않은 것은 적나니, 이 때문에 이 성품이 공한 것[性空]과 뒤바뀌지 않는 법[不顚倒法]을 귀하게 여긴다.
보살은 이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다만 중생의 허망한 생각만을 파괴할 뿐이요 중생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또 무루(無漏)의 법에서 8성도분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비록 무루의 법이라 하더라도 나고 없어지고 하기 때문에 으뜸가는 이치보다는 못하다.
이 성품이 공한 것은 온갖 부처님께는 이 도(道)만이 있을 뿐이요 또 다른 도가 없어서이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모두가 진실한 지혜의 파괴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 법을 구하기 때문이다.
비록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의 여러 가지 다른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도[一道]라 하지 못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이 모두는 바로 유위(有爲)의 법이어서 옮아가고 변하면서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 성품이 공한 가운데에는 중생도 없고 또한 물질 등의 모든 법도 없다.
보살은 보살의 도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고 다만 성품의 공한 것만을 위하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이 성품의 공한 것[性空]이며, 어떤 것이 보살의 도[菩薩道]인가?
【답】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는 분별이 없지만 세속의 이치 가운데는 분별이 있나니, 모든 법의 실상을 성품의 공이라 하고 그 밖의 보시 등에서 80수형호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보살의 도이다.
비록 이런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 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품의 공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이 때문에
“보살의 도를 위해서가 아니요, 이 성품의 공을 행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한 것이다.
앞에서도 또한 성품이 공하고 중간과 나중에도 또한 성품이 공하다.
본래부터 항상 공한 것이라 짓는 이가 없다.
이것은 복덕의 힘 때문에 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지혜의 힘 때문에 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니, 다만 성품이 저절로 그러할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큰 복덕과 지혜와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의 마음속의 뒤바뀜을 파괴하여 성품이 공한 것을 알게 하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여 더러운 것과 어두운 것이 달라붙지 않는 것인데 간혹 바람이나 구름이 끼어 어두워지면,
세상 사람들은 곧 말하기를,
“허공이 깨끗하지 못하구나.”라고 하고,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서 그 어두운 구름을 걷어 없애면 곧
“허공이 깨끗해졌다.”라고 하지만,
허공에는 실로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설법의 맹렬한 바람으로 뒤바뀐 번뇌의 구름을 걷어 없애서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나 모든 법의 성품에는 항상 스스로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이 보살은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줄 알기 때문에 능히 온갖 종류의 도를 행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고 온갖 도를 두루 갖추며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는 뜻대로 수명(壽命)을 누린다.
‘뜻대로 수명을 누린다’고 함은,
보살은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어 환과도 같은 보살의 도에 들어가 일시에 변화하여 천억만의 몸이 되어서 시방에 두루하여 온갖 보살의 도를 두루 갖추어 행하되, 곳곳의 그 국토마다 그 안에 사는 중생의 수명이 길고 짧음에 따라 그 형상을 받는 것이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국토에서는 수명이 백세뿐이었으나, 장엄불국(莊嚴佛國)에서는 수명이 7백 아승기겁인 것과 같다.
이는 부처님 법의 다섯 가지 불가사의[五佛可思議] 중에서 바로 첫 번째 불가사의이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다. 만일 이 법을 얻으면 곧 부처님이라 하고, 만일 이 법을 설하면 중생을 제도한다 하나니, 3세(世)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다.
이 성품이 공한 것을 여의면 도(道)도 없고 도의 과위[道果]도 없다.
도는 8성도분이요, 과위는 일곱 가지의 과위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성품의 공을 여의어 따로 일정한 법이 있다면 곧 모양을 취하여 집착을 내게 되기 때문이니,
집착하기 때문에 또한 욕탐을 여의는 일도 없고,
욕탐을 여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곧 도의 과위도 없다.
만일 성품이 공한 것을 여의면 비록 보시와 지계를 행하고 자비 등을 행한다 하더라도 착한 법의 힘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나기는 하지만,
그 과보가 다하면 도로 악도에 떨어져 본래대로요 다르지 않게 된다.
성품이 공한 법을 행하고 또한 성품이 공한 데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 밖의 다른 법을 행하면 집착하는 마음을 내고 물러남이 있지만,
만일 이 법을 행하면 물러나거나 잃는 일이 없다.”라고 하셨다.
수보리가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보살은 이 성품이 공한 법을 행하면서도 역시 성품이 공한 모양을 파괴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물질 등의 법이 성품의 공한 것과 다르다면 보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공한 법이 있으면 여읠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지금 물질 등의 모든 법은 실로 성품이 공하니, 보살은 이 법을 알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는 결코 그것은 항상 있다[常] 하는 어느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니,
다만 범부가 나[我]라 하는 마음을 내는 까닭에 안팎의 법에 집착하게 되고,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는 데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니라.
이 때문에 보살은 이 성품의 공한 것을 행하여 6바라밀에 화합하고 물질 등의 모든 법 모양을 파괴하지 않느니라. 이른바
‘공하다, 공하지 않다, 공하기도 하고 공하지 않기도 하다, 또는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와 같이,
모든 법의 모양이 보이지 않나니, 이것을 곧 파괴하지 않는다[不壞]고 하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물질의 실상이 곧 성품의 공한 것이기 때문이니, 성품이 공하거늘 어떻게 스스로 성품이 공한 것을 파괴하겠느냐?
이에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라고 하셨고,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되,
”마치 안의 허공이 바깥 허공을 파괴하지 않는 것과 같나니, 체성이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수보리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성품이 공하여 달라짐이 없다면 보살은 어느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그의 뜻을 인가하면서,
“그러하느니라, 만일 분별하여 두 모양[二相]이 있다고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진실한 지혜[實知慧]라 이름하여 물질의 법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집착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지혜는 물질을 취하기 위하여 행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물질 가운데서 행하지 않느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만일 보리를 취하는 것 가운데서 행하지 않고 버리는 것 가운데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취하는[取] 것을 실제의 법이라 하고 버리는[捨] 것을 공한 법이라 하며,
취하는 것을 집착하는 행이라 하고 버리는 것을 집착하지 않는 행이라 하며,
취하는 것을 둘의 행[二行]이라 하고 버리는 것을 둘이 아닌 행[不二行]이라 하나니, 이
와 같이 분별한 것이다.
부처님은 반문(反問)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은 어느 곳에서 행하겠느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하기를,
“이 변화로 된 사람은 행하는 곳이 없습니다.
변화한 사람은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법도 없기 때문이니, 보리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물으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은 꿈속에서 보리를 그 어느 곳에서 행하게 되더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하기를,
“아라한은 오히려 잠도 자지 않거늘, 하물며 꿈속에서 보리를 행하는 곳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문】 보리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아라한의 보리와 벽지불의 보리와 부처님의 보리이다.
아라한의 보리는 유루(有漏)의 마음과 무기(無記)의 마음에서 행하지 않고 다만 무루(無漏)의 마음에서만 행할 뿐이거늘,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아라한이 꿈속에서는 보리를 어느 곳에서 행하느냐?”라고 물으셨는가?
【답】 아라한은 온갖 번뇌가 다한 성인이어서 꿈이 없다.
부처님은 반드시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행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밝히시려고 물은 것이다.
【문】 나아가 부처님조차도 오히려 잠을 주무신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부처님은 일찍이 아난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네 번 접어서 우다라승(優多羅僧)을 펴라. 나는 잠시 동안 잠을 자고 싶구나. 너는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해 주어라”라고 하셨다.
또 살차니건(薩遮尼乾)이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께서는 낮에 주무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는 날이 더웠기 때문에 잠깐 동안 자면서 쉬었다. 식곤증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느니라”라고 하셨다.
살차니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낮잠을 자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모양[癡相]’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너는 어리석은 모양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구나.
모든 번뇌로 다시 몸을 받고 태어나면서 그 상속(相續)을 끊지 못하는 것을 바로 어리석은 모양이라 한다.
비록 항상 잠을 자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어리석은 것이요,
만일 이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남음이 없다면 비록 잠을 잔다 하더라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느니라”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경의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거늘,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라고 말하는가?
【답】 잠을 자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것이요,
둘째는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아라한은 안온하기 위하여 쾌락에 집착하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며, 다만 4대(大)의 몸을 받았기에 당연히 먹고 쉬고 잠자고 깨는 법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잠시 동안 쉬는 것을 잠을 잔다고 하지만 꿈을 꾸는 잠이 아니다.
따라서 수보리는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탐을 여읜 이는 선정을 얻어 색계(色界)에 매인 4대(大)가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몸과 마음이 기뻐지므로 잠자는 일이 없지만,
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은 색계의 4대가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잠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수보리는
“아라한은 오히려 잠을 자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잠을 자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기도 하지만,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는 법을 받아 짐짓 잠자는 일을 보이신 것이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만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살은 첫 번째 지위[地]로부터 10지(地)까지 이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보리는 비록 행하는 곳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직 6바라밀의 모든 법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이 보살은 물질의 모양에 머무르고 나아가 보리의 모양에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만, 물질 등의 법을 버리지도 않고 또한 보리의 모양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물질 등의 법이 곧 보리요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寂滅] 더한다거나 줄어든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도를 얻는다거나 과위를 얻는다거나 하는 어떤 법도 없는 줄 알고,
다만 세속 이치 때문에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할 뿐이요,
으뜸가는 이치 안에는 물질에서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없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어 이 일을 밝히시려고 짐짓 반문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번뇌를 끊고 도를 얻었을 때에 얻을 것이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이른바 꿈과도 같은 5중(衆)이 도(道)나 도의 과위[道果]로서 결정코 어느 한 법이라도 얻겠느냐는 것이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얻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모양 없는 문[無相門]에 머무르면서 도에 들거늘 어떻게 모양을 취하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만일 미세한 조그마한 법까지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너는 아라한이라고 말하겠느냐?”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세속 이치의 법 때문에 아라한이라 말하는 것이니, 범부의 뒤바뀐 법 가운데에는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으며 중생도 있고 법도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보리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세속 이치의 법 때문에 보살이 있다고 말하고 물질 등에서 보리에 이르기까지가 있다고 말하지만,
보리 가운데에는 정해진 법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보리도 없다.
보살은 이 보리의 법을 관찰하되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보살도 또한 이 모든 법의 성품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최초의 발심이 있겠으며,
나아가 10지(地)와 6바라밀과 37품(品) 내지는 18불공법이 있겠느냐?
얻는 바가 있어야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곧 온갖 법의 근본인데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이 짓는 법이자 정해진 실체로서 있어야 할 6바라밀 등이겠느냐?
이와 같이 보살은 이 모든 법의 성품을 행하여 부처님이 될 때에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