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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은 다윈의 탄생 날이고 1859년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의 초판 발행년도이다. 2009년도를 전후로 전 세계 과학계는 이를 기념하며 진화와 진화론에 대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했었다고 한다. 진화론은 단지 과학의 영역 뿐 아니라 문화와 인문,우리의 경제활동 영역까지 영향을 끼치며 수 많은 파생학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진화심리학이 그 예이다. 그러나 정작 진화라는 개념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물음이다. 이 책은 그 진화론을 정확히 풍부하게 이해해주는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자~ 진화론의 대가들이 모여든 식탁으로 가 보자. 도대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나 보자.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윌리엄 도널드 해밀턴박사의 장례식에 세계적인 대가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이 언제 제대로 모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획했다. 일주일간 시간을 내서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점을 가지고 토론을 해 보자고. 그래서 모였다. 장소는 중요치 않다.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의 대표 주자는 하버드 대학교 고생물학 스티븐 제이 굴드교수와 옥스퍼드 대학교 동물행동학및 과학대중화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 이 둘을 양 편의 좌장으로 삼고 몇 몇의 학자가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첫날. 주제는 강간도 적응인가? 자연선택의 힘이 어디까지인가하는 질문이다. 다윈은 진화(evolution)라는 말을 처음부터 쓰지 않았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말도 싫어했다. 당시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두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윈의 이론을 소개하는 바람에 '진화'는 6판부터,적자생존은 5판부터 사용했다. 다윈은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란 말을 썼다. 생물계에서는 생명이 살아 남는 수 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데,이들에게는 형질character의 변이가 존재하며, 그 중 하나의 변이가 생존환경에 유리하여 선택되고, 이 것이 다시 자손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즉, 변이-선택-대물림.전제조건으로 자손의 많은 수 존재가 다윈이 이야기하는 자연선택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자연 현상이 모두 자연선택의 결과인가? 우리가 자연선택의 산물을 '적응adaptation'이라 하는데 강간을 적응이라 볼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과학계는 첨예한 논쟁을 한 적이 있다.(랜디 손힐의 강간의 자연사natural history of Rape:The biological basis of sexual coercion.2000).
과학에서 논쟁은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무엇이냐에 있다. 주장은 결국 근거의 결과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근거들을 나열하긴 어렵다. 또한 그 근거들이 완벽한 것이냐?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주장이 뭔지 들어보기는 하자. 적응주의자들은 강간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자연선택된 것이다. 남성들이 생식에 더 많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응 행동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윤리적으로 이러한 행동이 정당하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가치문제와 별도로 사실의 문제로 이 문제를 다루자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반적응주의자들은 강간은 '폭력이며 학습된 문화적 행동일 뿐'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적응주의자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만약 강간이 적응이 아니라면 '과잉된 남성들의 성적 행동의 부산물'이라도 될 것이라 한다. '폭력적 행동'이냐? '성적인 행동'이냐? 이 것이 핵심이 된다.
적응의 힘,혹은 정도에 대한 논쟁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특히 언어 능력에 집중되어 있다. 19세기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는 지적 설계자로서 신의 존재와 역할을 주장했다. 그 예로 시계를 들었다. 이렇게 정교한 구조는 숙련된 시계공만이 만들 수 있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이라는 책에서 그 시계공은 눈 먼자일 것이고 수 많은 시행착오 끝에 우연히 조립된 시계가 우리가 보는 시계라고 주장한다. 소위 적응이란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그 복잡성이 바로 증거라고 한다.
이에 대해 굴드는 '수 많은 형질이 자연선택이 아닌 다른 경로로도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게 적응이라는 주장에 산마르코 대성당의 스팬드럴 구조물을 비유하여 '부산물'이론을 내세운다. 79년에 나온 굴드의 부산물론으로 인해 70~80년대에 양산된 적응주의 남발에 경종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적응주의 논쟁은 보다 세련되어져 갔다. 종교와 예술이 인간의 자연선택에 의해 직접적으로 진화한 인지적 적응이 아니라 다른 적응들로 인해 생겨난 부산물(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mind works 1997)이다. 딸기 치즈케이크를 좋아하는 것은 그 것을 좋아하는 미각을 진화시켜서가 아니라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해 주는 뇌 속의 그런 회로들이 진화되면서 생긴 부산물이다. 이런 주장이 그 예라 할 것이다.
도킨스는 철학자 데닛이 쓴 '다윈의 위험한 생각 darwin's dangerous ideas 1995'을 인용하면서 스팬드럴도 적응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양 건축 양식중 하나인 코벨corbel구조를 예로 든다.
통섭의 대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 문화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한 자신의 작업이 인문적 윤리적 가치를 등한히 했다는 취지로 자기 반성을 하기도 한다. 적응이냐 부산물이냐는 기준이 애매하다. 또한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거기에 윤리적 가치 문제가 개입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인간의 언어 능력이 적응인가? 부산물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먼저 언어학자 촘스키는 언어는 '기본적으로 두뇌가 커졌다거나 일반 지능이 발달하는 가운데 그 부산물로 생긴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해 핑커는 언어는 '정보 소통 때문에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언어본능 language instinct 1994) 인간의 발성기관이 적응이라는 증거, 언어능력과 일반 지능이 항상 같이 발달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병들을 분석해 보면 뇌 안에 언어만을 위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그리고 최근 발견된 FOXP2 유전자를 설명한다. 7번 염색체에 존재하는 이 것은 말하기와 문법 능력을 관장하는 유전자로 영장류,쥐에게도 관찰된다고 한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보니 두 곳에서 유전자 변이가 있다. 이를 분석하니 종의 분화가 12만 년전 쯤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 시기는 고고학자들이 인간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 반적응주의자인 르원틴이 묻는다. "누군가가 이런 언어 능력을 갖춘 변이를 가지게 되었다 치자. 어떻게 개체들 사이로 이러한 문법능력이 퍼지게 되었는가?" 이에 도킨스는 일본 짧은 꼬리원숭이중 하나인 이모imo라는 원숭이의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는 행동을 통해 다른 원숭이가 배우는 과정을 예로 든다. 초기의 문법능력자의 행동을 동료들이 배워나갔을 거라고 주장한다. 촘스키는 언어능력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으로 다른 동물들의 행동으로 비유되어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그 자체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윌슨이 한마디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밀접한 연관은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신을 대상으로 탐구할 때, 지구를 바라보는 외계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지능이 발달된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지구의 생물들을 탐색하고 돌아가 보고서를 쓴다면 아마 인간의 언어 행위를 새의 노래,벌들의 댄스,개미의 페로몬 작용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고할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인간의 그 무엇은 각 동물들의 독특한 의사소통 방식들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글쎄 인간의 언어 능력이 뇌용량이 커지면서 발생한 부산물인지, 그 자체가 적응의 결과인지 칼로 두부 베듯이 명쾌하게 증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뇌용량의 변화와 언어능력의 발달은 공진화되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이 중 어느 것이 주도성을 갖느냐하는 찰나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의 차이는 언어에 대한 다룸의 차이를 불러 일으킨다. 적응으로 본다면 언어의 진화를 연구하는 과학의 탄생을 예고할 것이고 부산물로 본다면 언어는 단지 수단이니 활용에만 관심을 가지면 될 일이다.
둘쨋날.주제는 이기적 유전자로 테레사 수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자연선택의 단위문제에 해당된다. 즉, 자연선택의 주체가 유전자인가,개체인가,개체군(집단)인가?이다. 다윈은 동물과 인간 집단에서 보이는 개체의 이타성 문제에 대하여 곤혹스러워했다. 다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집단을 위하여 개인이 희생하는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생존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인간의 도덕성이 진화되었다는 취지로 설명한다. 이른바 '집단 선택론group selection'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개리 라슨의 만화 한 컷으로 파탄이 났다.(103쪽) 개인 희생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이는 이기적인 개체일 것이고 집단을 위한 희생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가장 이기적인 것들만 남게 되는 데 어떻게 그 집단이 개인희생의 메커니즘을 유지할 수 있는겠는가?라는 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해 해밀컨은 혈연 선택론(109쪽)을 수식으로 제시했다. r*b>c c= 자신의 희생 b=상대방의 이득 r= 자신의 유전자를 상대방이 가질 확률.유전 연관도. 이 것이 바로 유전자가 진화의 단위라는 혁명적 발상을 내 놓은 수식이다. 이 것을 근거로 우리가 익히 아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이 나온 것이다. 이런 관점을 유지하는 것을 신다윈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재일유학생 이수현은 왜 죽었나? 아무 혈연 관계도 없는 일본인을 살리고 도쿄지하철에서 죽지 않았는가? 이에 트리버스가 1971년에 '호혜적 이타성의 진화'를 주장한다. 남을 도우면 그도 후에 나를 도울 것이기에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give and take진화. 해밀턴은 액셀로드와 함께 1981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협동의 진화'라는 논문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논한다.(112쪽) 결국 이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협동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기전은 일단 내가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 난 다음 그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배신을 하면 바로 응징을 하고 상대방의 이전 배신에는 눈감아주는 전략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 가설도 결국 유전자의 보존과 전달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유전적 진화설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한동안 집단선택설은 학계에서 비주류에 서 있었다. 그러던 차 소버와 데이비드 윌슨은 1998년 '타인에게로unto others'라는 책을 낸다. 거기에서 개체군안의 유유상종을 통해 이타성이 있는 놈은 있는 놈들끼리 이기성이 있는 놈은 있는 놈들끼리 번식하고 상호작용을 한다고 한다면, 이타성이 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단지 유전자 단위에서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굴드는 집단 선택론이라는 말보다 다수준 선택론multi-level selection theory이라고 개념을 쓰자고 제안한다.
소버는 암컷 편향적 성비의 집단이 많은 것도 집단선택의 증거라고 주장한다(기전설명은 생략). 윌슨은 점액종 바이러스가 토끼에 감염된 사례를 든다. 바이러스입장에서는 독성이 강한 변이가 복제를 잘하기 때문에 기세를 떨칠 것이고 토끼는 독성이 덜한 바이러스를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이러한 반대되는 선택압으로 초기에는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다가 몇 년이 지나 독성이 약한 바이러스 감염이 더 많아 지더라. 이것이 집단 선택이 작용한 것이라 주장한다. 도킨스는 바이러스가 독성이 강하면 숙주도 죽지만 결국 바이러스도 죽으니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독성이 약한 쪽으로 변이가 일어난 것일 수 도 있다고 반격을 한다. 논쟁이 뭐 거의 영국 프리미엄 리그 수준이다. 빠르고 거칠면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학자들의 이 입심의 원천이 어딘지 정말 궁금하다.
다수준 선택론자들은 진화는 하나의 선택압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 수준에서의 선택압이 작용해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결과라고 주장한다. 유전자론은 환원주의 오류에 빠질 위험에 있다고 경고한다. 도킨스는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장담한다. 유전자론으로 상대방의 이론을 설명해 낼 수 있다. 유전자론에서 친족.비친족으로 나누어 설명하나 집단 내/집단 간 구분이나 결국 다 똑 같은 나누기 일 뿐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어느 것이 더 쉽냐는 차이 밖에 없다. 다수준 선택론의 주장은 결국 유전자론으로 치환해서 설명이 다 가능하다!!
굴드는 인간에게 문화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 유전자론으로 재단하려 하느냐. 인간의 특성인 종교성과 도덕성은 집단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유아살해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유아를 엄청난 양육비를 투자해가며 기를 수 없다는 부모의 유전자가 벌이는 비극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의 주장은 이렇게 불편한다. 그래서 인문적인 것을 중요시 하는 굴드가 싫어하는 가 보다. 도킨스는 이러한 굴드의 자세를 경험적 사실을 탐구하는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를 이념적인 사람으로 본다. 자기 맘에 안 드니 그 것이 근거가 있든 없든 반대하고 보는 그러한 태도는 분명 이념적일 수는 있다.
세쨋날. 유전자란 무엇인가? 오늘날 대세는 유전자다. 진화론자가 보는 유전자의 실체는 무엇인가? 근데 놀라지 마라. 개념이 명확치 않다. 그래도 정리되는 바를 보면 이렇다. 생물철학자 키처는 유전자를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DNA 서열'이라 한다. 그러나 이 유전자의 발현이 복잡한다. 결론은 몇 단계의 편집과정과 조절장치의 통제를 받으며 전달된다. 세포 내 환경도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되면 진화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의 정체가 애매모호해 진다.
이러한 분자생물학적 관점의 문제에 대해 도킨스가 진화의 관점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개체의 한 DNA서열에 다른 서열의 비슷한 DNA서열을 갈아 끼운다고 했을 때 그 유기체의 적합도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게 만드는 DNA서열을 유전자로 부르자. 예를 들어 어떤 유전자 서열에 교체가 일어나서 독서 능력이 커졌다. 그렇다면 그 서열은 독서에 대해 '표현형적 효과phenotypic effect'를 나타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표현형적 효과를 내고 있는 DNA서열이 바로 유전자다. 이 정의도 만족스럽지 않다. 유전자의 발현은 여전히 복잡하고 다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것의 발현으로 생명의 복잡성을 어떻게 하나로 정의한단 말인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정의가 있을 뿐. 그 것의 총합과 통섭으로 정의는 정의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환경과 유전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결론은 환경과 유전자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데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상식이다. 도킨스도 진화하는 환경,공진화라는 개념을 들어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변화성을 이야기 한다. 그만큼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결국 핵심은 그러한 과정에서 누가 남느냐는 것이다. 도킨스는 결국,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자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거다.
유전자가 발생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정보는 유전자와 환경에 모두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진화의 단위는 유전자가 아니라 발생계developmental system로 봐야 한다고 오야마가 주장한다. 그러나 발생학에 있어서 유전자의 지위는 워낙 압도적이다. 도킨스는 유전자와 표현형간의 복잡한 관계는 유전자사이의 상호작용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다인자발현polygeny,다면 발현pleiotropy이라 한다.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이보디보(진화발생생물학 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다.
마스터 조절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 미분화된 세포의 운명을 조절하는 것이다. Pax6유전자가 있다. 눈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로 척추동물에 있다. 이에 해당하는 유전자로 초파리에는 아이리스eyeless가 있다. pax6유전자를 초파리 배아의 eyeless에 삽입하면 초파리 눈으로 발생하게 한다. 역으로 하면 아이리스 유전자가 생쥐의 눈을 발생하게 한다. 이 만큼 유전자의 역할은 압도적이다. 이에 대해 반대측은 오늘날 연구비 투자의 경향성을 논하면서 환경 연구에 투자를 집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즉, 과학의 지배 이념의 도구화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리라. 도킨스는 발생계 과학자들이 해 논게 뭐냐고 반문한다. 아직 유전자 연구는 쿤의 용법으로도 아직 위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주장한다. 진화에 있어 환경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발생계 지지자들의 입지가 좁아 보인다.
네쨋날. 진화의 속도에 대한 논쟁이다. 다윈이 살았던 당시에는 프랑스 지질학자 퀴비에가 주장한 격변론catastrophism이 대세였다. 그에 반해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도 있었다.(171쪽) 다윈은 비글호를 타면서 가지고 간 책이 영국 지질학자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였다. 라이엘은 지질의 역사가 후자 였을 것이라 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다윈도 생명의 역사가 점진적 변화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진화론자는 다윈의 생각을 계승했다. 그러나 굴드와 엘드리지는 단속 평형론을 주장했다. 어떤 이끼벌레는 수백만년 동안 변화가 없다가 10만년의 중간 정도를 거쳐 새로운 종이 나타났다고 한다. 도킨스는 출애급기 예를 들어 단속평형론이 비판하는 등속설 자체를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고 한다. 데닛은 시간에 대한 척도의 차이를 이야기 한다. 중간종이 존재하는 10만년도 인류 역사에서 보면 엄청 긴 시간이리라. 변화하기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단속평형설이 맞다면 정체기와 도약기의 메커니즘과 근거를 들어야 한다. 굴드는 지리적 격리를 이야기 한다. 이소적 종분화allopatric speciation가 그렇게 발생했다는 것이다.(187쪽) 이 중에 작은 규모의 개체군에서 발생하는 유전적 부동이 매우 빠른 종분화를 유발한다는 대목에서 마이어교수는 창시자 원리founder principle이라 명칭했다. 도킨스는 그러한 사례는 인정하나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굴드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거대 돌연변이macromutation을 주장한다.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혹스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면 엄청난 개체의 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결국 이 방식은 기적에 의존하는 것이며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역사를 이야기하면, 자연선택론이 20세기 초반 까지 설득력이 없었나 보다. 1920년대 이후 집단유전학이 발전하면서 적합도의 조그마한 차이가 세대를 거쳐 엄청난 변화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자연선택론이 힘을 받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유전학과 자연선택론을 종합한 것을 근대적 종합이라 일컫는다. 다윈이 진화론을 연구할 때 발생학의 연구 성과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전학이 발달하면서 1980년대까지 발생학은 진화론 캠프에 발을 들여 놓지 못 했다. 골드 슈미트는 진화를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들의 대물림 가능한 변화'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발생학을 아우르는 이러한 '비근대적 종합unmodern synthesis'이 부활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80년대 이후 발견된 호메오박스유전자 때문이다. 이어 발견된 혹스유전자들은 일종의 마스터 스위치 역할을 하는 유전자로서 여기에 변이가 일어나면 거대 돌연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날. 진화의 진보성에 대한 논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생명은 무생물-식물-동물-인간이라는 일직선상에 놓고 인간을 자연세계의 최고 단계로 설정했다. 여기에 천사-신의 단계를 얹어 종교성을 추가했다. 진화와 관련해서도 이 개념이 받아들여 사다리를 올라가는 방향으로 진화가 되어 진보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은 생명의 나무라는 개념으로 변이는 우연하게 발생하고 선택되며 대물림되면서 생명이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진화evolution라는 단어는 허버트 스펜서가 유행시킨 용어다. evolution은 unfolding펼침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명이 어떠한 목표로 진화한다는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다윈은 이 용어를 꺼려했고 6판에 가서야 할 수 없이 사용하였다 한다.
도킨스와 굴드는 다윈의 이론을 지지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그 안에 복잡성의 증가라는 원리가 있다고 보고,그 것을 진화의 경향성,진보성으로 판단했다. 굴드는 단지 변이의 폭만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굴드는 술꾼 모형(214쪽)을 예로 든다.왼쪽에 벽이 있고 오른쪽에 도랑이 있는 길을 술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걷다 보면 언젠가는 도랑에 빠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마치 도랑으로 빠질려고 행동한 것 같지만 사실 왼쪽 벽이 그 사람의 이동 방향을 결정해 줬기 때문이다. 진화의 입장에서 왼쪽 벽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를 만드는 물리.화학적인 제약이고 이 때문에 진화가 복잡성이라는 경향성을 가지는 듯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거다. 지금도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단계가 지구상에 가장 많은 존재이며 변이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영역이다. 진화에서 최빈값은 여전히 박테리아 변이에 있다.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 굴드의 결론이다. 도킨스는 복잡성이나 지능 등의 증가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진보를 해석하자고 주장한다. 이 것이 인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냐고 한다. 굴드는 이 주장이 결국 진화를 진보로 보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진화에 우연이 분명 존재한다. 백악기 말 공룡의 대멸종이 소행성 충돌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만약 지구역사를 되돌려 진화테이프를 돌리면 지금의 행성에 사는 존재는 인간과 전혀 다른 종일 것이다. 그만큼 진화에는 우발성이 존재한다. 굴드는 이점을 주목한다.
도킨스는 적응론에 덧붙여 진화능력 자체의 진화성으로 진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복제자에서 염색체-원핵세포-감수분열과 성-진핵세포-다세포동물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면 각각이 진화의 분수령(226쪽)에 해당하고 각각의 단계가 하나의 장벽이 되어 진화가 이전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비가역적인 진보적 혁신'을 몰고 왔다고 본다. 우발성 vs 적응성 최빈값 vs 최대값 우연성 vs 트렌드 한방에 훅 간다 vs 변이의 공간을 채우는 경향성. 이렇게 쟁점을 더해가는 가운데 양 진영 모두 우리 인간이 역사속에서 실수를 저지른 진화에 대한 인간중심성 인식을 경계하는 듯 하다. 그러나 결국 생태계의 최고 정점은 인간이 아니던가. 진화와 진보는 治水와 같다. 막자니 넘치고 넘치자니 막아야하는 관계. 전문가와 지식인의 인식 영역도 그 이중성에서 혼란스러워하니 일반인인 우리는 어디 오죽하겠는가. 선동가와 정치인이 함부로 진화론을 끌어 들일 때 그 저의를 꼭 의심해 봐야 한다. 진화론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분야여서 어디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성에 대한 평가에 진화의 개념을 이용할 때 진화의 분수령들이 변이의 장벽을 치듯이 나름 차이를 분명히 하고 받아들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윈이 살았던 빅토리아시대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경쟁을 통한 진보를 사회문화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삼았던 때이다. 경제적으로 자유방임이 지배이념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 중심의 진보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당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이 스펜서의 사회적 진화론으로 오용되어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였고 우생학등에 악용되었다. 굴드나 도킨스는 진화론의 이러한 역사적 악용사례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는 사회구성주의 해석이다.)이라는 측면에서는 굴드는 지지,도킨스는 반대한다. 이는 '과학이론의 진화'라는 주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킨스는 과학은 본질적으로 진리탐구의 영역으로 시대적 제약이 있든 없든 결국 발전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쿤과 칼 포퍼의 대리전이 지금도 우리 의식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섯째날은 진화와 종교에 대한 것이다.
먼저 도킨스. 9.11테러가 일어났다. 만약 사람이 죽으면 모든게 끝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이러한 테러가 일어났을까? 없다. 종교가 그렇게 가르쳤다. 테러는 젊은 청년들이 주동했다. 누가 시켰는가? 시켰다. 그들의 어른,부모가. 기독교 사회에서 아이들은 기독교를 믿는다. 회교도 사회에서 아이들은 회교를 믿는다. 종교는 바이러스다. 살인 무기가 되어 9.11테러를 발생시킨 것이다.
도킨스는 유전자를 포괄하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 복제자replicator를 말한다. 그 것은 우리가 아는 유전자 뿐 아니라 사상,관습,책의 몇 구절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밈meme(기억memory이나 모방immitation의 mr과 유전자gene에서 따온 eme의 합성어 )이라는 문화유전자개념을 창안했다. '대물림 가능한 정보의 기본 단위','문화와 관련된 복제의 기본 단위'이다. 인간만이 밈을 유전자 뿐 아니라 후손에게 전달한다. 종교도 그러한 것 중 하나이다. 그런데 도킨스는 한발 더 앞선다. 종교는 기생밈이라고 한다. 정신바이러스인데 트로이목마나 웜같은 컴퓨터 바이러스로 종교를 판단한다.
굴드는 종교와 과학은 각자 자기만의 탐구영역과 방법론,그리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사실에 대한 경험적 탐구인 반면 종교는 의미와 가치,그리고 도덕에 관한 담론(247쪽)이라는 거다. 역사 속에 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그 시대의 개혁과 변혁에 과도하게 이용된 측면이 있다. 갈릴레오 재판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다왼의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으로 해석된 것은 당시 영국 사회의 보수층인 성공회의 영향력을 악화시키기 위해 된 바도 있는 것이다. 굴드는 과학과 종교를 '중첩되지 않은 앎의 권역들 non-overlapping magisteria(NOMA)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굴드는 종교와 과학의 합집합과 교집합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도킨스는 종교는 과학의 여집합일 뿐이며 배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굴드는 전통적인 다윈주의는 세 가지 토대를 갖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연선택이 개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자연선택이 진화적 변화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점진적 변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유전학이 발달되어 신다윈주의,근대적 종합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 원칙은 계승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굴드는 자연선택이 유전자,개체,개체군,종등의 다양한 수준에서 작동되며,발생적 제약이 진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또한 운석론,거대돌연변이등 우발성이 진화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 종교의 진화성에 대한 소개는 최재천선생님이 쓰신 <다윈지능>에 잘 나와 있다.그의 책 22장 종교의 진화:굴드,윌슨,도킨스 그리고 데닛에 글을 정리해 본다.
먼저 저자의 생각. 종교와 과학은 융합은 어렵지만 통섭은 가능하지 않을까-바람이기도하겠다-기대한다(245쪽) 도킨스와 굴드의 생각은 이미 정리. 한마디로 도킨스에게 종교는 배척의 대상이며,굴드에게는 분리주의자이며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도킨스의 철학파트 동지인 데닛은 자신이 중한 병에서 살아 나온 것에 신에 감사할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과 의료진의 선함에 감사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연구할 대상은 신의존재에 대한 믿음belief in god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belief in belief in god이라고 했다.
종교의 진화성에 대해 윌슨(통섭의 학자)은 서열이 높은 자에게 복종하는 의례화된 행동ritualized behavior이 인간 사회에서 종교 행동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적응주의적 관점에 비해 대부분의 진화심리학자들은 다른 적응 현상들에 의한 부산물로서 종교의 발생을 주장한다. 즉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서 인류가 채집,수렵생활을 할때 형성된 본능의 영역, 즉 행위자 탐식agent detection의 과민한 반응장치에 의해 종교가 생겨 났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가는 위협적 현상과 순간에 초월적인 존재의 상정은 자신의 공포와 불안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엔진belief angine이 있다고 한다. 우연과 불확실성의 세상에 인관관계를 밝히려는 두뇌메커니즘을 얻게된 인간은 그 덕을 본 만큼 쉽게 소문,미신,비과학,종교라는 부작용도 함께 얻었다고 주장한다.
# 이번 네팔여행에 3권의 진화론 책을 가지고 갔다. 교회가 주최하는 봉사활동에 진화론 책이라니! 사회학관련 인문서적들을 보면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면서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당위와 원칙,요구이다. 주장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나는 의무를 느낀다. 그래~ 그래야지! 암 그렇고 말고. 진화생물학은 인간과 동물의 다름보다 연관,상관성을 더 중시한다. 동물의 세상을 가지고 인간 세상을 증거하려 한다.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나는 그렇군 그러네~한다. 나는 인간계의 당위성도 거부하고 싶지만 동물계의 사실과 같음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사이 적당한 어딘가가 나의 위치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들의 욕망을 나에게 요구하는 인간계의 음흉함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결의이기도 하고, 복제자로서의 초라한 역할만은 아닐 것이라는 의지이기도 할 것이다.
네팔 의료활동을 하면서 내가 meme인지 NOMA인지 헷갈려 해 보기도 하고 자유의지의 전사로서 활동하는 것 처럼 들떠 보기도 했다. 이번 여행이 책을 읽으며 자유로운 상상을 해 본 즐거운 지적 활동이기도 했다. 독후감을 마친다.
첫댓글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 다 읽은 후엔 질문거리가 막 생겼으면 좋겠는데요 질문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주는 책인듯합니다 용어가 생소해도 생각할 부분이 많아 재미있습니다.
독후감을 통해 구성과 해체의 이중성을 본듯하다면 맞을라나요 하이데거가 지금까지의 인간은 몇세기동안 이미 너무 많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더니..~ㅎ 동양의 기론과 합해서 읽으면 시야가 더 넓어지겠는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