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중 인물들의 관계와 역할
소설은 경험적 현실을 다루기 때문에 인간이 처해 있는 구체적 상황을 중시한다. 그리고 모든 서사는 ‘나’가 아닌 ‘우리’라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흔히 소설을 인물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난 뒤에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작중인물, 그 중에서도 주인공이다. 작가는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사실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인공 이외의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건을 얽어간다. 주인공을 진정한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훌륭한 구원자도 필요하지만 적대자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는 어떤 역할을 맡는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이다. 작가는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 관계를 잘 이루어내야 하고, 그래야만 재미있고 의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주인공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행동하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독자는 주인공과 관련을 맺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한다. 작가는 이런 인물들을 적절히 끌어들여 생생한 삶의 모습과 의미있는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널드 B. 토비아스의 견해에 따르면, 주요인물(major character)들은 서로 관련을 맺어야 하므로 그 숫자는 한없이 늘어날 수가 없고 대개 삼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한 사람은 모두의 흥미를 끌기엔 부족하다. 두 명은 가능하지만 역시 흥미를 끌기에는 너무 옹색하다. 셋이 알맞다. 예측 못할 일들도 가능하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다. 작가로서 숫자 3의 덕목을 심각하게 고려하라. 삼세 번의 원칙은 너무 단순하지도 않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가장 알맞다.1)
독자가 흥미를 느끼는 한에 있어서는 등장인물이 가급적 많아야 하지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작가는 그 인물들을 그려내고 행동을 다루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주요인물은 끊임없이 들락날락 해야 한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이들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래서 이들을 다시 등장시키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억지스러워진다. 고로 아주 크게 대립하는 장면이나 클라이맥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장면은 세 사람의 관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 주인공
주인공(hero)은 모든 인물의 중심부에 있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물의 관계망의 고리가 되어 사건을 주도해 가는 능동적 인물이다. 허구의 주인공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분이 신(神)에서 영웅, 영웅에서 귀족(지도층), 귀족에서 평민, 평민에서 하층민(불구자, 백치, 정신병자)으로 점차 하락하는 현상을 드러냈다.
주인공은 작품 전체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어나가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주인공은 다른 인물보다는 남다른 욕망을 갖고 큰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는 다른 인물을 지배한다. 토비아스의 말을 빌면 “모든 게 주인공에게 연결되어 있다.”2) 소설은 궁극적으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듯 모든 부수인물들은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주인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은 남달리 권태로워하거나 남달리 욕심이 많듯이 아주 특이한 성격의 인물이어야 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주인공은 이 세계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문제아’다. 본래 아무 문제가 없는 평범한 자는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와 닮은 데가 없는 괴상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흔히 주인공이 좀 특이하게 보이는 것은 성격이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이상(李箱)의 <날개>의 주인공은 아주 이상한 인물로 보이지만, 그것은 적절한 페르소나를 갖지 못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르시스트이거나, 심한 갈등으로 말미암아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과장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전무로 막상 승진하게 되자 기분이 언짢아지고 안색이 나빠지기까지 한다. 그것은 처가의 덕으로 승진하게 된 것에 대한 남다른 자의식의 발동으로 자기동일성 상실에 빠졌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런 의식에 잠길 수 있다.
작가는 개연성 · 보편성 있는 주인공의 행동의 변화를 잘 보여 주어야 한다. 존재결여로서의 주인공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달성을 위해 부단히 움직인다. 그러나 욕망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갈등을 겪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주인공 이외의 여러 부수인물(secondary character)들이 등장하여 사랑, 경쟁, 원한 등의 감정에 의해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그런 관계 속에서 실감나는 행동과 사건들이 펼쳐지게 된다.
중심인물(1)주인공
(2)적대자
주요인물(3)구조자
부수인물(4)대비자
작중인물 (5)매개자
(6)선택적 화자
(7)대리자
미미한 인물
위의 분류표에서 보듯이 주인공이 있으면 그 주변에는 직 · 간접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 있는데, 그 부수인물은 그 역할에 따라 대체적으로 적대자(adversary), 구조자(helper), 대비자(foil), 매개자(mediator), 선택적 화자(selective narrator), 대리자(surrogate)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3) 이들이 등장하게 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욕망과 목표, 성격과 행동의 동기 등등을 잘 엮어내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능동적이라면, 부수인물은 피동적이다. 모름지기 작가는 주인공의 행동을 인과관계가 있도록 잘 이끌어 나가야 하는데, 부수인물을 둘러싼 모든 에피소드는 결국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사건(accident)’들이 되고, 이 사건으로 주인공은 감정을 상하게 되거나 어떤 행동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4) 그리고 쉬로우더(Maurice Z. Shrouder)가 지적했듯이 리얼리즘 소설에서 흔히 주인공은 세상에 대한 무지(無知)로부터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되거나 환멸이나 미망으로부터 각성에 이르게 된다.5) 이제 주인공과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부수인물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2) 적대자
소설은 간단히 말해서 갈등 구조로 짜여진 이야기다. 작가들은 이 세상을 갈등 이론의 시선으로 보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겉으로는 멀쩡히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세상 일이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고 부단히 도전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허사로 끝나버리가 일수다.
소설 속의 인물들을 대립의 관계 속에서 살펴 보면, 갈등을 겪는 주체로서 주동인물(protagonist)이 있다면 갈등을 겪게 하는 반동인물(antagonist)이 있다. 주동인물은 다른 인물과 대응하여 투쟁하는 일에 휩싸이게 되는데, 흔히 주동인물을 비극의 주인공이라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적대자는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주인공을 가로막아 더욱 갈등과 고통을 겪게 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비극에서는 주로 ‘악한’이 이에 해당하고, 희극에서는 <춘향전>의 변사또처럼 ‘방해꾼’을 가리킨다. 조연현의 지적처럼 “이들은 이 세상에 악의 존재와 그 정체를 밝히거나 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6)고 볼 수 있다.
‘변사또’는 강자로서 ‘춘향’의 욕망을 가로막는 방해꾼이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다른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그것 자체가 대립적이어서 갈등이 있게 마련이지만, 변사또 같은 부패 관리의 등장은 춘향과 심각한 대립을 보여 주면서,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을 더욱 극적으로 이끌어 가게 한다. 다시 말해서 전반에서 학대받는 주인공이 후반에서는 학대하는 사람으로 뒤바뀌는 이른바 모래시계(hour glass)적인 대칭적 패턴을 이루는 것이다.
인물들이 보여 주는 행동의 핵심은 갈등의 발생과 해소다. 주인공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적대 세력은 반드시 어떤 ‘인물’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환경이나 제도나 질병 또는 운명일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스스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하므로 심리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양심과 유혹,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 물질적인 욕망과 정신적인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이 생겨 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서 어느 편이든 승리의 결말이 쉽사리 나지 않고, 그것을 미리 예측하기 어려운 데서 독자는 긴장감(suspense)을 느낀다. 간을 조리며 기다리는 마음이 소설의 흥미를 더욱 끌게 하는데, 이러한 요소를 얼마만큼 살릴 수 있느냐가 모든 독자를 <아라비안 나이트>의 쉐헤라자드의 남편처럼 만드는 비결이 된다.
김유정의 <봄봄>은 머슴(주동인물)과 주인영감(반동인물) 사이의 대립을, 다시 말해서 총각인 머슴이 처음 약속대로 결혼시켜 줄 생각을 않는 주인영감과 투쟁을 벌려 끝내 자기 목표를 이루어낸 이야기다. 이런 성공담은 그 대립과 투쟁이 생생히 겉으로 나타날 때 더욱 재미가 있다.
황석영 작 <한씨연대기>의 주인공 ‘한영덕’은 지나칠 정도로 순박한 김일성 대학의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는 다르게 불행하게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여기에는 6.25 전쟁이 발발한 일,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는 무지, 터널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 등등이 작용한 면도 많지만, 무엇보다 그의 욕망을 가로막는 무면허 돌팔이 의사의 농간이나 약점을 이용해 돈을 빼앗는 사기꾼 같은 주변인물의 술수에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볼 때 북의 공산사회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해 온 남쪽 나라는 결코 따듯한 나라가 아니요 인정사정 없이 빼앗아 가려는 악한들로 가득 찬 무서운 세상일 뿐이다.
3) 구조자
주인공은 자신의 현명한 판단과 결단에 의해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도 있지만, 그의 곁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는 경우를 흔히 본다. <춘향전>의 ‘이도령’은 춘향의 신분 상승에 결정적 도움을 준 구조자다.
이청준의 <날개의 집>은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예술가로 성공하기까지의 한 소년의 긴 생애를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소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옆에 자식의 앞날에 대해 깊이 생각한 사려 깊은 아버지가 있었고, 밭일을 통한 자연 공부와 아울러 모방을 통한 습작 과정을 거쳐 창의적인 창작력을 길러가도록 이끈 훌륭한 선생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와 선생님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구조자다.
이청준의 <퇴원>에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지나친 억압으로 인해7)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고,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주인공 ‘나’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병원에는 나의 과거를 잘 알고 따듯하게 돌보아 주는 병원장 ‘준’이 있고, 거울을 건네주며 어머니처럼 친절히 돌보아 준 간호사, 그리고 뱀잡이의 명성을 가졌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 옆 침대의 아줌마가 있었기에, 주인공 ‘나’는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게 되고 자기도 남들처럼 뭔가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임을 깨달음으로써 자신감을 갖고 바깥 세계로 퇴원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아주 중요한 정신적인 구조자들이다.
4) 대비자(對比者)
주인공이 있으면 대화의 상대자로서 막역한 친구나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사람이 한 둘쯤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은 주인공과 닮은 면이 있기도 하지만 성격적으로나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 퍽 다른 면이 있어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면이 있다. 보색 관계의 색을 사용하면 언제나 대비가 더 강하게 되듯이, 작가는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대비를 이루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늘그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천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과 조선달,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장돌이를 한 친구 사이지만 위의 짧은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장터를 떠돈 목적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조선달이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허생원은 돈보다 성씨 처녀를 찾기 위해 20년 가까이 장터를 걸은 것이다. 이런 대조를 통해 허생원은 성씨 처녀를 남달리 사랑한 사람으로 돋보이게 된다.8)
오정희의 <別辭>는 ‘죽음’이라는 기습 때문에 몹시 불안해하는 ‘정옥’이의 내면세계를 깊이 다루고 있다. 그런 모습은 친정 어머니와 함께 김포 공원묘지를 찾아가는 데서 극명히 드러나고 있는데, 문득문득 낚시 떠난 남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차 있는 딸(정옥)과는 대조적으로 동행자인 어머니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불안에 차 있는 딸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대조적인 어머니, 다시 말해서 양산 쓰고 핸드백을 들고 피크닉을 가는 기분에 차 있는 어머니를 등장시킨 것이다.
조경란의 <불란서 안경원>에는 자신의 미(美)를 가꿀 줄 모르는, 그리하여 남편한테 버림받은 주인공 ‘나’와 퍽 대조를 이루는 인물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① 소나무집 할머니가 가게문을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숱한 생각의 편린들이 한꺼번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올해 칠순인 할머니는 여기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데 넓은 정원에 온통 소나무만 기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 집을 소나무 집이라 부르고 할머니를 소나무집 할머니라고 불렀다.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아직도 멋내는 것을 좋아하고 한시도 당신이 여자인 것을 잊지 않고 싶어한다. 립스틱 색깔도 볼 때마다 다르고 자주 가게에 들르면서 새로운 디자인의 안경테가 나오면 다음날 아들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안경을 맞추곤 하였다.
② 전교조에 연루되었다가 유치원 선생을 하게 되었다는 한 선생은 가슴골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목선이 깊이 패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 한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내게 아이가 있었더라도 그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샌들을 신은 한 선생의 발톱에는 검은 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①의 ‘소나무집 할머니’는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도 새로운 디자인의 안경테가 나오면 새로 안경을 맞추곤 하는 여인이고, ②의 ‘한 선생’은 사랑 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자기 몸을 가꾸며 멋을 낼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은 ‘목 윗부분까지 단추를 채우게 되어 있’는 불라우스만을 고집스럽게 입고 살면서 자신의 몸을 가꿀 줄 모르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나’와는 퍽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 ‘나’라는 여자는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외롭게 안경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는 주인공은 자신이 멋을 창조하는 ‘불란서 안경원’ 주인답지 않게 자기 자신을 가꿀 줄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9) 작가는 이런 주인공 ‘나’의 모습을 전경화하기 위해서 대조적인 ‘할머니’나 ‘한 선생’ 같은 인물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런 대조적인 인물은 은희경의 <그녀의 세 번째 남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제 날씨, 봤니?”
한밤 같은 대낮.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이고 대기는 으스스한 공포영화 속의 화면처럼 부옇다. 길가는 사람들의 눈 밑에는 붉은 그늘이 지고 자동차는 라이트를 켜고 느리게 지나간다. 불안해진 시민들의 전화가 폭주하여 기상청 전화는 불통이 된다…….
“봤어. 이상한 날씨라고 신문에도 났더라.”
“기분이 어떻디?”
“글쎄. 지구 종말 같던데.”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하지만 친구는 먼데를 보는 눈빛이 된다.
“붉은 필터를 끼우고 보는 세상. 짐 자무시의 화면 같지 않았어?”
“자무시?”
“그래. <천국보다 낯선>.”
친구는 유학을 갔다가 중간에서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오더니 한때 수녀를 지원하여 수녀원에도 들어갔었다.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 위세척을 하고 병실에서 깨어난 것이 두 번이고, 혼자 낳아 기르겠다고 우는 것을 겨우 달래서 산부인과의 수술대에 올려보낸 일도 세 번이다. 직업도 방송국 구성작가에서부터 여성단체 간사, 번역가, 이벤트 회사의 플래너, 출판사의 기획자 등 여러 가지를 거쳤다. 그러고도 낯선 삶을 원하는 일에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 아직 삶에 대해 기대가 많다는 것이 그녀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낯선 것은 불편하지만 매혹적이다. 삶을 익숙한 것과 낯선 것으로 채운다면 황금분할은 어떤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카페를 나온 뒤 또다시 10분 후에는 교정지를 읽고 제목 뽑기를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이 달의 문화인물’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원고를 먼저 써야 하나 결정을 내리기 위해 두 손을 맞잡고 반지를 돌리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 ‘그녀’의 성격을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온 ‘친구’와 대조시키고 있다. 친구가 자기 의지대로 변화를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녀는 변화보다 안정을, 결단적 행동보다 늘 망설이기만 하는 여자다.
어제의 기상 이변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반응은 퍽 대조적이다. 친구가 새로운 세상의 도래로 받아들인 데 반하여 그녀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부정적 느낌을 갖고 있다. 독자는 친구와 대조가 되는 이와 같은 주인공의 성격을 잘 파악해야 행동의 필연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흔히 대비적 인물은 단순히 비교 · 대조의 차원을 넘어 마치 고전적 희곡의 붙박이 인물인 알라존(alazon)과 에이론(eiron)의 희극적 대립, 자신만만한 허세꾼과 겸손한 진리 탐구자 간에 갈등을 겪는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의 갈등은 적대적 관계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화되는 경향이 짙다.
이청준의 <과녁>은 활을 처음 배우는 석주호 검사와 활터의 주인인 황노인 사이의 이런 갈등의 양상을 잘 보여 주는 소설이다. 석주호는 활이란 그저 약간의 요령과 팔 힘으로 쏘는 것 정도로 알았고, 동료들에게 하루 빨리 활솜씨를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황노인의 진지한 태도에서 보듯이 활쏘기는 인격의 도야를 위한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지 공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석주호는 자기 화살을 정해 놓고 그것을 계속 사용하여 길들여 가야 한다는 노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 수고를 줄이기 위해 새것 대신 이미 남이 쓰던 것을 골라 달라고 했다. 이처럼 이 소설은 활쏘기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 두 대조적 인물 사이의 의지적 대립과 갈등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5) 매개자
주인공과 대조적인 인물 가운데는 단순히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기능만으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중대한 깨달음과 성숙, 그리고 새로운 욕망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서 기능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현대소설에는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삶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미망에 빠진 주인공이 많이 등장한다. 이런 주인공은 ‘여로형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낯선 곳에 가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대개 그들로부터 어떤 중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며, 이 깨달음을 통해 주인공은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되는, 이른바 인격적 성숙을 이루게 된다.
이 같은 매개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르네 지라르(R. Girard)다. 그는 욕망하는 주체로부터 욕망되는 대상으로 향하는 욕망이 직접 일직선으로 일어나지 않고, ‘욕망하는 주체-매개자-욕망되는 대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삼각형적 욕망“(le desir triangulaire)이라고 명명하였다.10)
르네 지라르는 이처럼 하나의 작품이 여러 개의 삼각형적 욕망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에 관해서 주목을 했다. 예컨대 <돈키호테>에 있어서 주체(돈키호테)와 매개자(아마디스)는 동일한 세계에 있지 않다. 즉 아마디스는 전설적인 가공의 인물이어서 돈키호테와 만날 수 없는 인물이다. 주체와 매개자의 거리는 극복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다.
플로벨의 <보바리 부인>에 나타나는 욕망의 간접화는 이와 좀 다른 점이 있다.
엠마는 과거의 어느 땐가 읽었던 소설의 여주인공들을 회상했다. 그들 사련(邪戀)을 즐기는 여인들은 누구나 다 같은 형제들처럼 비슷한 음성으로 엠마의 추억 속에서 노래 부르고 그 목소리들은 엠마를 매혹시켰다. 엠마 자신도 이들 공상 속의 여인들의 일원이 되어 이같이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순수한 사랑을 하는 여인에게 자기를 비김으로써 처녀 시절의 저 길고 길었던 꿈을 이제 여기 현실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또 복수의 쾌감도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여 왔던 것이 아닌가? 그러던 것이 이제야 자기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누르고 눌러 왔던 사랑하는 마음은 길길이 뛰어 오르는 물길이 되어서 일시에 솟구쳐 나오는 것이었다.
여주인공 ‘엠마’는 자신이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런 그녀의 욕망은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삼류 소설의 여주인공에 의해 암시 받은 욕망이다. 그런데 <보바리 부인>의 삼각형의 욕망에서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는 돈키호테와 아마디스 사이의 거리보다 가깝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은 욕망의 대상을 놓고 주체와 매개자 사이에 아직 경쟁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그렇지만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은 《돈키호테》의 주인공보다 더 현대적이다. 왜냐하면 모방하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돈키호테는 자신이 매개자 아마디스를 모방하고자 한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에, 엠마는 자신이 욕망의 중개자인 ‘파리 여성’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살 듯 현대사회에서는 모방적 욕망이 더욱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모방 자체를 터부시하는, 이른바 자기 기만에 빠지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르네 지라르는 스탕달의 《赤과 黑》에서 돈키호테와 엠마처럼 허영심이 많은 사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욕망들을 자기 내부에서 끌어오지 못하고 외부의 다른 사람을 모방해서 끌어오는 삼각형의 욕망을 다시 발견했다. 이 소설의 서두에는 레날 시장이 그의 부인과 산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날은 뜰을 거닐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지금 줄리앙 소렐을 자기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아들을 잘 가르치려는 남다른 교육열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자연발생적인 것도 아니다. 두 부부가 주고 받은 다음의 대화에서 그 욕망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발레노 씨에게는 그의 아들들을 위한 가정교사가 없소.”
“그는 우리에게서 그를 뺏아갈 수도 있을 거예요.”
레날 시장과 발레노 씨는 서로 정적(政敵)이다. 재산과 지위와 영향력이 서로 비슷한 두 사람은 경쟁 관계이다. 레날이 줄리앙을 가정교사로 채용하고 싶은 것은 발레노 역시 줄리앙을 원하리라는 상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줄리앙의 아버지 소렐 영감은 “우리는 다른 데 가면 더 좋은 조건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배짱을 부림으로써 줄리앙의 값이 올린다. 여기서 주체인 레날 씨는 발레노가 줄리앙과 계약하려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욕망이 두 배로 증가하게 된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보는 것처럼, 현대 소설로 올수록 모방의 매개자는 주체와 시간적‧공간적‧신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에서 점점 더 가까운 구체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외적 매개에서 점차로 내적 매개로 이행하는 것이다. 외적 매개일 때 주체는 마치 어린애가 어른 앞에서 장래의 포부를 겁 없이 드러내듯 욕망하는 것을 거침없이 드러내지만, 매개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현대소설에서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든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윤희중’은 출세 욕망에 불타는 조(趙)와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하인숙 같은 인물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문열의 <그해 겨울>의 경우, 주인공 ‘나’는 창수령을 넘어 바다에 이르기까지 술집여자, 칼갈이 노인, 폐병장이, 사촌 누님 같은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새출발의 욕망을 갖게 된다. 이처럼 내적 매개에서는 모방의 대상인 모델이 멀리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주체와 가까이 있는 긴밀한 서클에 속하게 된다.
은희경의 <그녀의 세 번째 남자>는 주인공 ‘그녀’가 8년 가까이 관계를 맺어온 첫사랑의 남자와 관계를 끊고 새출발을 다짐하는 아주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되기까지 내적 갈등과 심리적 변화의 과정을 깊이 다룬 소설이다. 그런데 청첩장을 들고 온 ‘여자 친구’는 미망에 빠져 있는 주인공 ‘나’에게 첫 번째 남자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중대한 깨달음과 ‘욕망의 간접화’를 이루게 한 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발전적으로 이끌려고 하는 주인공은 자신과 대조적인 인물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발전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매개자가 옆에 있는데도 주인공이 교만하거나 이성적 판단력의 부족으로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 결과 주인공은 비극을 맞는다. 이청준의 <과녁>에서 석주호는 황노인의 충고를, 조경란의 <불란서 안경원>의 주인공 ‘나’는 “여자는 모름지기 자기를 가꿀 줄 알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충고를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말하자면 나르시즘에 빠져 불행해지거나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변적 인물(static character)이다.
김형경의 <금강교>에는 도벽이 심한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 버릇을 갖게 된 데에는 가난과 실연이라는 그녀만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를 패배시키고 배반한 세상과 타자에 대해서 남다른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녀가 물건을 훔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보복 또는 보상 심리에서 나온 행위다. 더러운 방법으로 부(富)를 이룬 자의 물건쯤은 훔친다고 죄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늘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잘못된 습성 때문에 고민해 왔다. 이런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아주 우연히 ‘금강교’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세상과 타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남자로서의 매개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그러나 자기와는 대조적으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이끌고 있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깨닫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하게 된 발전적 인물(developing character)이다.
6) 선택적 화자(selective narrator)
이야기가 3인칭 서술일 때 화자는 작가다. 그런데 작가가 화자로 나서지 않고 그 대신 주인공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작품 속에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다. 웨인 부우스는 이를 ‘극화된 화자’라고 불렀다. 이제 소설에서 작가는 소멸하고, 선택된 어떤 특별한 화자가 문제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상세히, 그리고 실감나게 들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에는 작중화자인 ‘나’(옥희)가 있다. 옥희는 어머니와 사랑채 아저씨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전달해 주는 메신저(messenger) 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사실 독자는 순진한 화자 ‘나’를 통해 주인공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사랑 이야기가 통속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 천진난만한 ‘나’의 등장 때문이다.
이청준의 <이어도>는 주인공 ‘천남석’의 미스테리한 행동과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는 소설이다. 그의 어떤 심리가 바다 속으로 투신하게 만들었는가를 작가가 독자 앞에 나서서 다 아는 것처럼 들려주면 이 소설은 재미가 없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과 직접 접해 보는 효과를 거두게 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천남석의 실종 사건의 전말을 실감나게 전하기 위해 군인이며 외지인인 선우 중위를 선택하여 화자로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선우중위는 천남석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양주호’나 ‘이어도 여인’ 같은 인물을 만나보는 형식을 취했다. 작가는 선우중위, 양주호, 이어도 여인 같은 특별한 화자들로 하여금 주인공 천남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도록 꾸며, 독자는 그들의 말을 직접 듣고 사건의 전말을 종합 · 추리 · 판단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소설의 화자가 서사 텍스트 속에 내포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거니와 이와 아울러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까지도 작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 도표는 채트맨(S. Chatman)의 언급처럼11) 화자와 청자만이 소설에 내재하고 실제 작가와 실제 독자는 서사적 전달의 바깥에 있음을 보여 준다.
실제 작가→선택된 화자→주인공→선택된 청자→실제 독자
그런 소설의 한 예로 이혜진의 <소인국>12)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선택된 화자인 ‘나(딸)’이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주인공)의 한맺힌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팔자를 닮은 자기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성물(聖物)을 파는 상점 주인여자(청자)에게 들려 주고 있다. 따라서 실제 작가와 실제 독자는 서사 텍스트의 바깥에 있는 소설 형태를 이룬다.
7) 대리자(代理者)
소설사가들에 따르면, 소설은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 단계는 사건 위주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시기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인물의 성격이 부각되는 시기이며, 세 번째 단계는 인물의 내면 탐구가 심화되는 시기이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주인공의 내부에 숨어 있는 생각들을 캐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가는 한 인물의 개체적 특질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내면세계를 깊이 다룬다고 볼 수 있는데, 20세기의 영국의 제임스 조이스, 독일의 카프카, 불란서의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작가들은 19세기의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면세계를 깊이 다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타인이나 외적 사물 혹은 상황이 한 인물(주인공)의 내적 자아에 미치는 충격 또는 영향을 제시함으로써 직접 내면세계를 드러내게 하면서, 그 가운데서 한 인물의 감각, 상상, 환각, 의식의 흐름 등을 표현하려 하였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경우, 주인공 ‘나(윤희중)’는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으로 나오면서 한 ‘미친 여자’가 눈에 뛰어 골똘히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조금 뒤에 알게 되지만, 내가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시절, 골방에 갇혀 지내느라 미칠 것 같은 삶을 살았던 지난날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좀더 사건이 진전되면서 이 미친 여자는 나의 대리자일 뿐만 아니라, 하인숙의 대리자로 발전한다.
무진에 잠시 내려온 나는 서울로 끌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는 ‘하인숙’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된다. 나는 이런 하인숙을 그냥 무진에 남겨둘 수가 없다. 하인숙을 그냥 내버려 두면 분명히 그녀는 광주역에서 목격했던 ‘미친여자’처럼 미치거나 그 이튼날에 목격한, 물에 빠져 죽은 ‘술집 여자’처럼 자살하고 말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친 여자나 자살한 술집 여자는 예사로운 여인이 아니고 하인숙의 대리자로 연상되고 있는 것으로, 주인공 ‘나’의 의식과 행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이런 대리자는 오정희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동경(銅鏡)>에는 4.19혁명 때 20살의 나이에 희생된 아들 ‘영술’이를 못 잊어하는 노부부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죽은 지 30년이 넘은 아들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특히 남편은 미장원집 딸 아이의 모습 하나 하나에서 아들을 꼭 닮은 짓을 보고 있는데 반하여, 아내는 수도 검침원 청년이 꼭 아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대리자의 등장은 누군가를 극도로 그리워하는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오정희의 <옛우물>에서 주인공 여자 ‘나’는 “파마 머리를 봉두난발로 불불이 세우고 두터운 겨울 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서너 가치 한꺼번에 입에 물고 길 가운데 서서 두 팔을 내두르며 교통정리를” 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차를 타고 떠난 누군가를 미친 듯이 찾고 있는 그 여자는 바로 죽은 그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주인공 ‘나’의 내면 세계를 직접 말로 설명하지 않고 나 자신을 연상케 하는 대리자로서 그녀를 등장시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 작픔에서 주인공 ‘나’는 우연히 들린 찻집에서 한 ‘남자’를 응시한다.
나는 제일 안쪽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찻잔이 놓인 탁자가 마주보이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앉았었을 남자는 카운터 옆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켠에 등을 보이고 서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유리 칸막이가 되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완연히 봄이군요, 가죽 덮개 씌운 메뉴 책을 가져온 주인 남자의 말에 여러 해 전의 내가, 스스로에게도 이상하게 들리는 낮고 쉰 목소리로 ‘블루마운틴’ 커피를 주문했다. 그와 함께였다면 찻집 남자는 그때처럼, 강물이 좋지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정말 그렇군요라고 그가 대답하면 찻집 남자는 이 고장에는 봄, 가을이 없어요. 봄인가 하면 여름이 되고 가을이 오면 곧 눈이 내리지요라고 덧붙일 것이다. 찻집 남자는 그가 혼잡한 대도시에서 왔음을 알아채었다. 이 고장 사람이라면 강물 빛이 좋군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잠시 머물고 영원히 떠나가는 나그네의 말이다.
찻집에서 주인공 ‘나’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도 하고 간질 증세를 보이는 한 ‘남자’를 오랫동안 응시하는데 이는 그 남자가 ‘그’의 대리자로 연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날 이곳에 와 전화를 걸어 나를 불러내곤 했던 것이다. 지금 나는 그가 너무나 보고 싶다. 그 남자도 아마 내가 보고 싶어 편히 죽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죽어 다시 만나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라고 연상되는 그 남자에 대한 시선이 오래 머물수록 나는 그에 대한 그리움에 차 있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이 밖에도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주인공이 길에서 잠간 스쳐 지나간 사람, 옆 식탁에 나란히 앉아 밥을 함께 먹은 사람 정도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역의 미미한 인물(insignificant character)도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된다. 이런 엑세트라적 인물이 아닌,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여러 부수인물들은 주인공 못지 않게 작가의 특별한 의도에 따라 들어오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역할에 대해 세밀히 살펴 보아야 한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 중에는 습작기의 수준을 못 벗어난 것들도 많다. 습작기의 소설에서 흔히 느끼는 인상은 이야기가 매끄럽지 못하고 너무 산만하다는 것이다. 이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여러 부수인물들을 적절히 끌어들이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중심이 서 있지 않을 때 그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작가는 무슨 이야기, 또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는 주제 의식이 없거나 서사의 인과성 결여, 특히 서사나 묘사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여 뭍별이 함께 질서있게 움직이는 천체처럼, 작중인물의 상호관계가 잘 이루어진 세계, 즉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과 연관을 맺는 여러 부수인물들이 잘 연결되어 있도록 짜 놓을 때 그 소설은 유기적이고 통일성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1)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서울 :풀빛, 2001), p.98.
2)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서울 : 풀빛, 2001), p.358.
3) 외국문학에서는 이밖에 동맹자(ally), 공모자(side-kick), 밀고자(informer), 심부름꾼(messenger), 요부(femme fatale), 파송자(sender)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는 듯하나 그런 세분화가 우리의 논의에는 별로 도움을 주고 있지 않아 생략키로 했다.
4)Theodore A. Stroud, "A Critical Approach to the Short Stroy", in Critical Approaches to Fiction, ed., Kumar &McKean (N.Y.: McGraw-Hill Book Company, 1968), p.121.
5)Maurice Z. Shrouder, “The Novel as a Genre”, in The Theory of the Novel, ed., Philip Stevick (N.Y. : The Free Press, 1967), p.14.
6)조연현, “악역의 역할과 그 의미”, 신한국문학선집-평론선집2(서울 : 어문각, 1970), p.59.
7)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닌 ‘나’의 욕구를 가로막은 전형적인 방해꾼으로서의 적대자이다.
8) 혹자는 허생원이 돈이 없어서 그렇지 그가 돈만 있었다면 벌써 딴 여자와 결혼해 버리고 성씨처녀를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말하려 하겠지만, 이는 허생원의 인간됨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허생원은 많은 물건 중에도 비단옷감을 다루는 드팀전이다. 그는 하얀 메밀꽃을 좋아한다.그만큼 순결하고 부드럽고 섬세한 면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막돼먹은 장사꾼이 아니다.
9) 동물세계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아름답다. 종래에는 이를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믿었으나, 영국 학술지『네이처』근간 호에 보면 스톡홀롬대학 동물학 교실에서 수컷이 아름다운 것은 암컷 선택에서 소외받지 않기 위한 수컷들의 필사적 적응 작업임을 입증하였다. 이를테면 공작의 경우 복수의 수컷들이 단수의 암컷 앞에서 날개를 펴고 요염한 춤을 추며 선택받기를 경쟁하는데 부채꼴로 펴든 날개에 박힌 눈깔무늬가 많을수록 선택 빈도가 높다는 것을 관찰해낸 것이다. 이걸 믿는다면 여자든 남자든 선택받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미를 가꾸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이규태, "왜 수컷이 예쁜가", 조선일보 1993.02.13일자 기사)
10)김치수, 구조주의와 문학비평(서울:홍성사,1980).PP.180-6.
11) 채트맨, 이야기와 담론, 한용환 역(서울 : 고려원, 1991), p.179.
12)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