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선(禪) 이야기 100가지
제3장 직지인심(直指人心)
직지인심(直指人心)―곧은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한눈을 팔지 않고 자기 마음을 잘 바라보고 그것을 곧 파악하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하거나 분석해서는 자기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직접 잦기 마음 속 깊숙이 숨어 있는 순수한 인간성에 접해야 합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모두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지도했다 하여도 여전히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한 도저히 계승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직시(直視)와 같은 말에 "별전(別傳)"이 있습니다. 별전은 별개의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가슴속을 잘 들여다보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별전(別傳)"은 앞에서 나온 "불립문자(不立文字)"와도 통합니다.
나는 전에 프로 야구의 명투수였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한심스럽다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선수들에게 야구 기술을 가르쳐 주면 실제로 해보지도 않고 '선배님, 왜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하고 까닭을 먼저 물어요. 그래서 나는 말하지요. '야구란 입으로 가르치고 귀로 들어서 아는 게 아냐. 몸으로 익혀야 해. 왜는 나한테 묻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묻게. 그러면 언젠가는 반드시 알 때가 오네. 그렇게 하지 않으� 몸에 배지 않네'하구요."
그의 이 한마디는 참으로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다만 나는 설득하는 것과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설득하는 노력은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모든 각도에서 설득하는 것이 선(禪)의 설법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본장의 제목인 "직지인심(直指人心)"인 것입니다.
그 설법은 짤막한 몇 마디로 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길게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득하는 친절이 필요합니다. 이 친절이 상대방의 가슴에 곧 전해져서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원(禪院)의 창시자로서, 선종사상(禪宗史上)에 유명한 백장(百丈) 스님이 아직 운수(雲水)의 신분으로 마조산(馬祖山)에 안거하고 있던 어느 날, 스승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풀숲에 있던 두 오리가 스님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날아갔습니다. 그를 본 마조 스님이 백장에게 "저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백장은 정직하게 "저것은 오리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마조 스님이, "어디로 날아갔는가?"
백장이, "어디라구요, 노스님. 새가 나는 데 행선(行先)이 예정되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다만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마조 스님은 백장의 말 많은 그 대답이 귀에 매우 거슬렸던 모양인지 갑자기 백장의 코를 꽉 잡아 비틀었습니다. 백장은 아픔을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이구, 아파!"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때 마조스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아니 날아가 버렸다고 했는데 여기 있었잖아! 지금 아이구, 아파, 하고 비명을 올리는 그가 아닌가."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벽암록(碧巖錄)》 제53칙의 이야기입니다. 선(禪)의 대화가 신변의 사실을 인용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습니다. 자기 주위가 모두 스승이고, 가르침이라는 선(禪)의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백장은 오리를 오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오리와 제자를 같은 초점에 맞춰서 곧 가리키고(直指) 있습니다. 백장은 자기 코를 꼬집히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렸습니다. 오리와 백장이 한 점에 집약된 것입니다. 그것이 직지(直指)입니다.
선(禪)에는 2인칭도 없고 3인칭도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언제나 현재의 제1인칭입니다. 이것은 선(禪)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친란(親鸞) 한 사람뿐이로다 라는 단가(短歌)와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지되는 것의 본체는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051.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나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 (《五燈會元》15·雲門章)
석존께서 탄생된 것은 B.C. 463년이며, 동경 83도, 북위 27도인 가비라성에서였습니다. 그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물론 갓난아기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세의 사람이 석존의 탄생이야말로 불교의 탄생이라고 하여, 석존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라고, 탄생의 시점에 기탁한 "불교의 선언"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결코 골목대장은 나 하나뿐이라거나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부심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란 이 우주를 뜻합니다. 보편적인 존재의 의미입니다. "유아(唯我)"는 절대의 자아(自我), 즉 대아(大我)를 가리킵니다. 작은 자아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한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주의 본체로서의 유일절대(唯一絶對)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전체의 뜻은 "하늘 위에서부터 땅 속까지 무엇이나 부처님의 생명을 갖고 있으므로,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존엄하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게 되면 "응애응애"하는 울음소리도 자기의 존귀함을 깨달아 외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인간만이 아닙니다. 개가 울고 새가 우는 소리도 모두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발성(發聲)입니다.
대응(大應) 선사(1308년 입적)에게 어떤 수행자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구(字句)의 설명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진리를 물은 것입니다. 선사는 "남들을 위해 힘 쓰는 것이야"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행자가 "석존께서 탄생한 사실(史實)은 별도로 하고 석존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즉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절실한 질문이었습니다. 선사는 곧 "자네 발치를 보게"하고 대답했습니다.
즉 자기에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 힘쓰라."는 부처님의 뜻을 행하려고 생각한 그때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석존의 생명과 직결된 때입니다.
석존의 탄생은 참된 의미에서 나 자신의 탄생이 됩니다.
어느 소설가는, 천상천하에 내가 있노라. 나 홀로 있노라
고 읊어 석존의 탄생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 한다는 인생관에도 이어집니다.
052. 대재심호천지고불가극야이심호출천지상(大哉心乎天之高不可極也而心乎出天之上)
-마음은 위대하도다. 하늘은 지극히 높아 헤아릴 길이 없으나 마음은 하늘 위에 서도다
영서(榮西) 선사(1214년 입적)는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 여기 인용한 글은 《흥선호국론》의 머리말에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마음(心)"이란 감정에 움직이기 쉬운 마음이 아니라 감정적인 마음의 밑바닥에 묻혀 있는 종교적 무의식의 본성을 내용으로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마음은 부처님의 생명, 즉 불심(佛心) 또는 불성(佛性)을 뜻합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그 마음은 자기의 주위에도 있고, 자기 속에도 무의식 상태에서 존재합니다. 그것을 영서선사는 "마음은 위대하도다. 하늘은 지극히 높아 헤아릴 길이 없으나 마음은 하늘 위에 서도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사는 이어서 "땅의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도다. 그러나 마음은 땅 아래 있도다."하고 공간의 무한성(無限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은 해와 달의 밖에 있다"고 말하고 시간적인 무한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의 마음을 선자(禪者)는 "반야실상(般若實相) 또는 열반묘심(涅槃妙心) 혹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애칭입니다. 애칭이 많은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증거입니다.
감정적인 마음은 언제나 변하기 쉬우므로 의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된 마음이 깃들어 있으므로 양자를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를 조절하여 고도를 유지하면 자연히 후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마음을 깊게, 마음을 넓게, 마음을 부드럽게"를 좌우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부연하여
"시끄러울 때, 골치 아픈 일을 할 때일수록 그것에 압도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할 때는 마음을 실험하는 좋은 기회이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053. 즉심즉불 즉심시불(卽心卽佛 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 (《無門關》 제30칙)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출처는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사람들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생각하는 마음 전체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게 된다. 마음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부처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부처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 시심작불(是心作佛) 즉심시불(卽心是佛)]"의 1절입니다.
그리고 중국 북조의 재가 불자로 선을 깨친 부흡(溥翕)은 그의 저서 《심왕명(心王銘)》에서 "즉심즉불(卽心卽佛) 즉불즉심(卽佛卽心)"이라고 하여 다른 데서 부처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조(馬祖) 선사도 "마음이 곧 부처님임을 믿으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조 선사의 제자인 법상(法常)은 스승의 "즉심즉불(卽心卽佛)"―마음이 곧 부처님이다―이라는 말 한 마디로 크게 깨달아(大悟) 득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깨달음이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어떤 계기가 주어져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 자아(自我)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법상은 이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대매산(大梅山)에 숨어살며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 한 마디가 법상의 일생에 큰 전환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등골에 사무치는 이 한 마디는 인간을 초월한 훨씬 깊은 데서 일어나는 소리 아닌 소리가 인간의 말이 되어 비로소 등골에 사무쳤던 것입니다. 선어(禪語)란 그런 것입니다. 후에 마조 선사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시험했습니다.
"법상, 당신은 마조 스님의 '마음이 곧 부처님[卽心是佛]'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했는데, 마조 스님은 요즘 와서 교법이 달라져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라[非心非佛]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하고 그에게 말했으나, 법상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 법상은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전해 듣고 마조스님은 크게 기뻐하며 대중 앞에서 "매자(梅子:법상)가 이미 여물었다"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의 오도가 더욱 깊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선어(禪語)의 학습도 중요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해"하고 철저하게 믿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054.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無門關》 제33칙)
마조(馬祖) 선사에게 어떤 수행자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마조 선사가 대답하기를,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대답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즉심즉불(卽心卽佛) 즉심시불(卽心是佛)"과는 모순이지만, 사실 마조는 때로는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 혹은 "마음도 불도 아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은 경제 생활이 윤택해졌으나 "의식(衣食)이 넉넉하니 공허를 느껴" 언밸런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즉 경제면과는 다른 차원의 욕구불만으로 몸과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 영원한 행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 영원한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라, 마음이 곧 부처님이니라"하고 마조 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지 않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입니다.
여기에서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마조의 의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는 말에 구애되면, 마조 스님은 논법(論法)을 바꾸어 다른 말을 할 것입니다.
대매산의 법상(法常)은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를 끝까지 고집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卽心是佛]"가 그대로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다[非心非佛]"이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이 바로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심경입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언뜻 보아 정반대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 두 가지 말을 교묘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원앙새냐 갈매기냐
파도 사이를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구나
"파도 사이를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은 원앙새인지 갈매기인지 알 수 없다. 원앙새라도 그만이고 갈매기라도 그만이다. 굳이 구분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부처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인간은 부처님도 될 수 있고 범부(凡夫)도 될 수 있습니다.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부처님이 아니다"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따질 것이 못됩니다. 우리는 다른 데 한눈을 팔지 말고 지금 이곳의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055. 직심시도량(直心是道場)
-곧은 마음이 곧 도량이니라 (《維摩經》)
도량(道場)이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원래는 석존께서 도를 깨친 보리수 아래 마련되었던 자리를 가리킵니다. 그 후에 그곳은 수행하는 신성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떤 수행자가 어느 날 행길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를 만나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도량(道場)에서 오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량은 방금 그 수행자가 떠나온 성안(城內)에 있었으므로 방향부터가 정반대였습니다.
수행자는 수행을 위해 소란한 성안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려고 했으므로 "그 도량이 어디 있는데요?"하고 유마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마는,
"곧은 마음이 있는 곳이 도량이지. 거짓이 없으니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도량(道場)은 건물이나 환경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직심(直心)이란 흩어지지 않은 유연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 마음에는 거짓이나 에누리가 없으므로 도량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유마가 도량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오면서 "도량에서 오네"하고 말한 것은 뜻깊은 발언입니다.
수행자에게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라는 태도로 말한 것입니다.
"직심(直心)"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므로 "빈(空) 마음"과도 상통됩니다. 영가(永嘉) 대사(8세기의 중국 선승)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욕구에 불타 있으면 마음은 조용해진다. 다만 마음이 조용해지기만을 바라고 진리를 구하기를 잊으면 산 속도 소란스러워진다."
파도 소리가 듣기 싫어 산에 살면,
소나무에 불어오는 소란스러운 바람 소리
이 도가(道歌)도 같은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란한 가운데서도 태평스럽게 원고를 쓰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는 몹시 부럽습니다. 그것은 단지 습관 이상의 큰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기를 잊고, 멀리 한적한 곳을 찾는 한, 아무데도 "도량(道場)"은 없습니다.
056. 오심사추월 벽담청교결(吾心似秋月 碧潭淸皎潔)
-내 마음은 가을 하늘의 달이 푸른 산여울에 비치는 것처럼 맑고 깨끗하다 (《寒山詩》)
한산(寒山)은 습득(拾得)과 함께 실재(實在) 인물인지 아닌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전부터8, 9세기경의 당나라의 선승이자 시인이라고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의 시집인 《한산시(寒山詩)》는 그가 살고 있었다는 천태산(天台山) 중의 바위벽 등에 새겨진 것을 후세 사람이 책으로 엮어 내었다고 합니다. 이 시편에 독특한 풍경과 선심(禪心)이 있어 오늘날에도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여기 인용한 구절에서도 격조 높은 정취를 느끼게 됩니다. 자기 마음은 한가을의 밝은 달이 푸른 계곡을 비추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처럼 변하기 쉬운 마음이 아니라, 그 변화 속에 깃들어 있는 본질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존재입니다.
한산이 말하는 내 마음(吾心)은 그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누구나 항상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심(佛心) 또는 불성(佛性), 즉 부처님의 생명으로 불리우는 실재(實在)입니다.
그러나 선자(禪者)는 부처님과 같은 신비적이고 초인격적인 말을 피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음을 상징하는 "가을 달"은 만인을 차별없이 비추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유일한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어떤 계곡이나 연못에도 그림자를 나타내는 평등성은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순수한 인간성"입니다. 이 순수성이 "벽담청교결(碧潭淸皎潔-푸른 산여울에 비치는 것처럼 청결하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청결(淸潔)은 불결에 대한 청결이 아니라 불결과 청결을 포함하면서 양자를 초월한 청결입니다.
한산은 "이 마음과 비교할 수 있는 충분한 대상이 없으니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無物堪比喩 敎如何說)"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일(唯一)·절대·보편(普遍)·평등의 배반성(背反性)을 모순되지 않게 포함하는 존재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탄식을 맛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면서 이 "달(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백(李白)도 달에 대해 같은 내용의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은 옛날의 달을 보지 못한다.
오늘 보는 달은 전에 옛 사람을 비추었다.
옛사람과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보는
달은 이처럼 밝기도 하여라
또 어느 노스님은,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의 달빛이여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의 달빛이란, 상대적인 지식이 생기기 전의 절대적인 '마음'과 상통합니다.
057.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구름이 무심히 산의 바위 구멍에서 온다
이 말은 도연명(陶淵明-중국 진나라의 시인. 365-427)의 전원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들어 있습니다. 백은(白隱) 선사는 자기가 쓴 《괴안국어(槐安國語)》라는 책에 "새는 날다가 지쳐야 돌아올 줄 안다[鳥倦飛而知歸]"의 대구(對句)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위 구멍에서 구름이 나온다"는 말은 선어(禪語)로 사용할 때에는 자아에 사로잡히지 않은, 다시 말해서 아집(我執)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게 된 심경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선자는 "임운무작(任運無作)의 묘용(妙用)"이라고 합니다.
"임운(任運)"은 조금도 사심(私心)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진리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무작(無作)"은 인간적인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 무심한 동작이 곧 "묘용(妙用)"입니다. 즉, 구름이 무심히 산의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雲無心以出岫]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또한 어느 시인의,
하늘을 구름이 조용히 흘러가누나
나도 이처럼 조용히 살아갈지어라
라는 시의 내용과 같은 경지입니다. 선자는 "자기를 잊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은 기억을 잊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잊는 것입니다. 무심(無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소아(小我)가 대아(大我)로 승화되어 작은 자기가 발전적으로 해소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구름이 산의 구멍을 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산시(寒山詩)의 "백운자거래(白雲自去來)"―흰 구름이 스스로 오간다―도 선자는 같은 의미의 말로 생각합니다. 흰 구름의 흰색은 모든 색깔을 잊어버린 색깔 아닌 색깔입니다. 희다는 의식을 잊어버린 무심(無心)의 색깔입니다.
"무심(無心)"은 흰 구름에 의해 잘 상징되며 흰 구름도 무심의 마음에 의해 잘 형용됩니다.
그리고 대구(對句)인 "조권비이지귀(鳥倦飛而知歸)"―새는 날다가 지쳐야 돌아올 줄 안다―에 자기를 움직이는 큰 힘이 배후에 무의식의 존재로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힘은 "지친다"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계기에 의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지치면 우리는 돌아갈 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 도연명의,
"이제 돌아가세(歸去來辭)라는 말은 지상의 집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선자는, 자기 속에서 또 하나의 자기가 "언제까지나 자기 욕구를 추구하는 방랑길을 청산하고 빨리 본심으로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라"고 이 현실의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058. 사난방견장부심(事難方見丈夫心)
-일이 어려워야 인간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다 (《虛堂錄》)
대구(對句)로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柏操-눈이 내려야 비로소 송백의 진가를 알 수 있다)"가 있습니다. 소나무나 잣나무는 따뜻한 날이나 개인 날에는 그 진가를 알 수 없으나 눈이 내리면 그 진가, 즉 강한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돋보이지 않던 사람도 어려움을 당하면 비로소 그 역량(力量)을 발휘하게 됩니다.
눈이 오지 않는 날에, 눈을 머리에 이고 너끈히 견디는 송백의 존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풍설(風雪)이나 난관의 유무를 불구하고, 송백을 송백답게 하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그 속에 깊이 묻혀 있는 것을 알고, 또한 믿고 키워야 인재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같은 뜻을 가진 말에 "팔풍취부동천변월(八風吹不動天邊月-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지만 하늘가의 달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이 있습니다. "팔풍(八風)"이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덟 가지 장애(이득·손해·명예·수치·비난·칭찬·고통·줄거움)를 가리킵니다. 이런 것에 좌우되지 않는 송백과 같은 믿음직스러운 인재(人材)는 어느 사회나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어느 유학자의 좌우명을 애송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1. 사람의 장점을 처음부터 알려고 하지 말라. 그 사람을 써봐야 비로소 장점이 나타난다.
2. 사람은 그 장점만 취하면 된다. 단점은 알 필요가 없다.
3. 자기 마음에 맞는 사라만 쓰려고 하지 말라.
4. 작은 허물을 탓하지 말라. 다만 일을 소중히 알면 된다.
5. 사람을 쓸 때에는 일을 그에게 완전히 맡기라.
6. 위에 있는 사람은 밑에 있는 사람과 재주를 겨루지 말라.
7. 인재에게는 반드시 나쁜 버릇이 있다. 그것을 각오하고 꺼리지 않는다.
8. 이렇게 하여 사람을 잘 쓰면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인물을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059. 멸각심두화자량(滅却心頭火自凉)
-마음을 조정하면 불 속도 그대로 서늘하다 (《碧巖錄》 제 43칙)
혜림사가 군사에 의해 불에 탔을 때, 쾌천(快川) 대사(1582년 입적)는 절의 누상에서, "좌선은 반드시 산이나 물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만 바로 잡으면 불소도 서늘하다"고 말하고 조용히 불 속에 몸을 던져 이 말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벽암록 제43칙·동산무한서(洞山無寒署)의 평창(評唱)을 보면 중국 6세기의 시인 두순학(杜荀鶴)의 다음과 같은 말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창 더울 때 오공(悟空) 선사는 문을 닫고,
한 벌의 헌 옷을 걸치고 있다.
방에는 그늘을 만들만한 소나무나 대나무 한 그루도 키우고 있지 않다.
좌선을 위해서는 조용한 산속이나 물가가 아니라도 좋다.
오공 선사처럼 몸과 마음을 교란하는 정신작용을 조정하면,
불 속 길은 더위도 괴로운 줄 모를 것이다."
고뇌를 피하기만 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자진하여 고뇌를 극복해야 합니다. 예컨대 추위나 더위를 고통과 즐거움의 어느 한쪽으로 정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쪽에 달려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눈이 쌓인 벌판에서 스키에 열중하거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운동장에서 야구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그 중의 좋은 예입니다.
추위나 더위(고뇌)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살아 있는 한 자기에게 닥치는 것입니다. 스키나 야구에 열중하는 동안에 추위나 더위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 것은 자기가 그 취위나 더위와 대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추위나 더위에 동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멸각심두(滅却心頭)"란 이와 같은 상대적인 인식(心)에 동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면 더워도 덥지 않고 슬퍼도 슬프지 않은 마음이 개발됩니다.
울고 있지만 울고 있지 않는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불 속도 그대로 서늘하다(火自凉)―불 그대로, 뜨거운 그대로 서늘하다는 것입니다. 불을 차게 느낀다면 이상신경(異常神經)으로 선(禪)에는 이런 기적은 없습니다. 뜨거운 그대로, 뜨거움에 지배되지 않는, 동화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상대적인 마음이 없어지므로, "무심(無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 같은 추위와 더위도
마음이 없으면 고통도 없도다
시인의 이 노래에는 이런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060.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무슨 일에나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이 소중하다 (《金剛經》)
어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기뻐도 그 기쁨에 사로잡히지 않고, 슬퍼도 그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도 쓰여 있습니다.
"구도자는 이런 청정심(淸淨心-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소리나 향기, 맛이나 손에 만져지는 것이나 마음의 대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또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마음이 한 군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여기서 "주(住)"란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즉 집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집착은 미혹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입니다.
이것은 듣거나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달마(達磨)의 선(禪)을 이어받은 6대 조사 혜능(慧能) 선사(713년 입적)는 중국 광동성의 시골 가난한 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글을 배울 처지가 되지 못하여 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심코 거리에서 스님이 "무슨 일에나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님으로부터 그 말이 《금강경》에 있으며 홍인(弘忍) 선사(당나라 고승 674 입적)가 이 경(經)을 강론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집을 나와 그 강론―견성성불(見性成佛)―을 듣고 싶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혼자 집에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웃에 살고 있는 친절한 사람이 노모를 돌봐 주겠다고 하여 안심하고 홍인 선사에게 가서 수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홍인 선사가 어느 날 밤에 그를 방에 불러,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도 소용이 없고, 이 마음을 분명히 알면 부처님이 될 수 있네."하고 선법(禪法)을 전수했습니다. 그 후로 이 말을 선(禪)에서는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이 말을,
물새는 물 위를 헤엄쳐 가도 흔적이 없지만,
길은 잊지 않나니
하고 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은,
집착을 버리면 꽃은 다 내 것이어라
하고 노래했습니다.
061.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언제나 더러움을 타지 않게 닦고 훔치다
홍인(弘忍) 선사에게는 언제나 많은 제자들이 모여 선(禪)에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홍인선사는 제자들에게, "누군가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려고 해. 누구라도 좋아. 자기가 깨달은 심경(心境)을 노래로 읊어봐. 선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에게 물려주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홍인의 제자들은 700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뜻 노래를 읊으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손꼽히는 제자 중에 신수(神秀:706년 입적)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도 정통하여 스승의 대리를 맡은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그가 노래를 읊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자기가 깨친 심경을 노래로 읊어, 스승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붙여 놓았습니다.
身是菩堤樹(몸은 보리수)
心如明鏡台(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다)
時時勤拂拭(언제나 부지런히 닦고 훔쳐서)
莫使惹塵埃(먼지가 끼지 않게 한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몸은 득도한 보리수와 같은 마음은 깨끗하여 맑은 거울과 같으므로 언제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닦고 훔쳐서 번뇌의 먼지와 티끌이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수는 이처럼 수행의 중요성을 4핼 20자로 노래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처럼 노력한 사람입니다. 이 수행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츄타판타카는 형과 함께 석존의 제자입니다. 형은 대단히 총명했는데 동생은 매우 어리석었기 때문에 "바보"라고 불리워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교단에서 추방되었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석존으로부터 "먼지와 티끌을 닦고 훔치라"는 가르침을 받고,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을 철저히 실행하여 오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도구를 가지고 청소한 것이 아니라, 청소 자체가 되어 여기에 동화하여 비로소 가능했던 것입니다. 눈썹에 붙은 하나의 먼지를 터는 것이 자기 마음 속의 먼지를 터는 일입니다. 흐트러진 신발을 정돈하는 것이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도가(道歌)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쓸면 또 다시 쌓이는 뜰 안의 낙엽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라
아무리 정교한 청소 도구를 사용해도 먼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환경도 사람의 마음도 영원히 계속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원히 청소를 계속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영원한 더러움과 영원한 청소가 대결하여 비로소 청정(淸淨)의 경지가 개발되는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이와 같은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여기에 신수의 선풍(禪風)이 있는 것입니다.
062.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다 (《六祖壇經》)
앞에서 인용한 신수의 노래를 들은 홍인 선사의 제자들은 저마다 그를 찬양했습니다. 사실 홍인 선사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전해들은 혜능(慧能)은,
"신수의 노래는 진실을 표현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비평했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이 선심(禪心)을 알 리가 없다고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날 밤에, 자기의 심경을 다른 사람에게 노래로 쓰게 하여 신수의 노래 옆에 붙였습니다.
菩提本無樹(보리수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台(밝은 거울도 있을 수 없다)
本來無一物(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何處惹塵埃(어디서 먼지를 닦겠는가)
좀 더 자세히 풀이하면, "보리수라는 나무도 없고,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없고,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먼지가 묻을 데도 없으니 털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홍인 선사의 문하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선의 절대성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홍인 선사는 이것을 보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홍인의 정통적인 선법(禪法)이 혜능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후에 혜능의 선풍(禪風)이 남방(南方)에서 성하였으므로 "남종선(南宗禪)"이라고 부르고, 신수의 선풍이 북방에서 성하였으므로 "북종선(北宗禪)"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도가(道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종선은 수행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점오(漸悟)"라고 부르고, 혜능의 남종선을 "돈오(頓悟)"라고 부릅니다. 수행을 쌓고 나서 다시 하나의 비약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수와 혜능은 홍인 선사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선(禪) 자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의 필요를 두 사람 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대응시키고, 미망과 오도를 적대시하고, 먼지와 불식을 구별하는 상대적인 인식을 보다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라고 부정(否定)한 것입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간성의 원점(原點)에서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실감은 더욱 깊어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려면 실제로는 차곡차곡 수행하는 신수(神秀)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한 정점에서 다시 비약하여 혜능(慧能)의 선심(禪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선자는 수행하고 있습니다.
063. 주인공(主人公)
-(《無門關》제12칙)
중국 서강성 서암사의 서암언(瑞巖彦) 스님(850-910)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덕산 스님의 법손이고 당나라의 선승(禪僧)으로 알려진 암두(巖頭) 선사(887년 입적)의 제자였다는 것과 다음의 일화가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 서암언은 바위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다만 말없이 앉아 있거나 혹은 마음 속으로서의 명제(命題)를 묵상하는 것이 상례이며,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암언은 미친 사람처럼 매일 밥 먹고 앉으나 서나 스스로 크게 소리내어 혼잣말처럼 "주인공"하고 부르고는 제 자신이 스스로 "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
"네."
"앞으로도 속지 말어."
"네."
하고 일련의 자문자답(自問自答)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무문(無門) 선사가 보다 높은 차원의 선의 심경에서 놀리는 듯한 말로, 사실은 감탄하여 말합니다.
"서암사의 할아범이 혼자서 장사를 하고 있네. 주인공이라고 부르는 한 사람과 여기 대답하는 한 사람,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한 사람과 여기 대답하는 한 사람……"
인간은 누구나 이 A, B 두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A는 상식적으로 말하는, 따라서 설명이 필요치 않는 자기로, 이것을 "일상적 자아(日常的自我)"라고 합니다.
B는 A에게 말을 거는 자기로, 이것을 "본질적인 자기"라고 합니다.
A는 외재적(外在的) 존재로 A속에 깊이 묻혀 있으므로 밖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요컨대 A와 B의 "동행이인(同行二人)"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길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가 많을수록 그 인품이 풍요로워지고, 대화가 적을수록 인품이 가난해집니다.
그리고 A와 B는 때로는 나란히 걸어가고 때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갑니다.
이 A와 B가 겹쳐서 마치 같은 사람처럼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인공"하고 부르는 A와 "네"하고 대답하는 B가 하나로 융합되면 "주인공"이라는 물음이 그대로 "네"라는 대답이 됩니다.
즉 양자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주인공이 제대로 주인공의 구실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064.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
-무사함이 귀인이니라 (《臨濟錄》)
"일 없는 것이 곧 이 귀한 사람이니라. 다만 조작(造作)하지 말라."하고 임제 선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사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변함이 없는 것, 건강한 것, 평온한 것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나 선에서 말하는 "무사하다"는 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나 도(道)나 구원을 다른 데서 찾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임제 선사의 말을 빌면, "구심(求心)이 없는 것이 무사(無事)"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속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순수한 인간성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이론이 아니라, 실감하는 상태가 "무사"이며, 그런 사람이 "무사한 사람"입니다. 선은 부처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속에서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만나도록 힘쓰라고 가르칩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프란클이 인간의 심층의식(深層意識)을 탐구한 결과 종교적 무의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또 한 사람의 자기"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 안에 이 귀한 자기를 감춰 놓고 있으므로, 부처님을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무사함" 자체입니다.
선에서는 이 "또 한 사람의 자기", 즉 "종교적인 무의식"을 "본래의 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본래의 인간"을 만나야 귀인입니다. 귀인이란 "존귀한 사람"으로 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임제 선사는 "부처님"이라는 기성 개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싫어하여 대개 "사람(人)"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부처님은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생을 귀히 여기는 것이 선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란 "무위진인(無位眞人-부처님은 어디나 있다)"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임제 선사의 "일 없는 것이 곧 이 귀한 사람이니라. 조작하지 말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손질을 하여 가공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065. 일무위진인(一無位眞人)
-부처님은 어디나 있다(《臨濟錄》)
어느 날 임제 선사가 설법을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에 어디나 한 지위없는 참사람(부처님)이 있다. 그는 너희 전시에서 출입하고 있나니 그를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은 빨리 보아라."
"무위(無位)"는 위치나 계급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공간적인 좌표의 부정으로 "어디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좌표도 부정하여 "언제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일(一)"입니다. "진인(眞人)은 참사람(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임제 선사는 부처님이라는 말을 신비스럽게 여기는 것을 배격하여 "진인(眞人)" 또는 단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의 육체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참된 인간성이 언제나 존재하며, 너희 전신에서 드나들고 있다. 아직 만나지 못했으면 빨리 만나 보라."
어느 철학자가 "선(禪)이란 보는 것이다"하고 말한 것은 임제 선사의 말과 상통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자기를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속의 또 한 사람의 자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려면,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들여다보는 자기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보는 자기와 자기 속의 한 사람의 자기가 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임제 선사는 제자들에게 큰 소리로, "언제 어디서나 자기 속에 잠들어 있는 또 한 사람의 자기를 깨달아야 한다." 하고 부처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을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것은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자기 안에 신이 없으면, 어떻게 하늘 위의 신을 경배할 수 있겠는가"―이것은 자기 안에 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늘 위의 신을 인정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임제 선사의 말은 괴테의 말과 대조해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어디나 그리고 언제나 있는 부처님은 우리들의 털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의 존재는 감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경험을 초월하면서도 감각적인 경험에서 떠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경험(좌선)을 필요로 합니다.
066. 몽(夢)
-꿈(도원선사)
꿈은 상식적으로는 잠을 잘 때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착각이나 환각에 의한 시각의 심리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불교의 경론(經論)에서는 "꿈이란 잠을 잘 때에 정신과 그 작용이 대상에 따라 생기며, 잠에서 깬 후에도 기억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동시에 "꿈에도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모든 현실계의 현상(現象)은 꿈과 같이 허망하고 무상(無常)하다고도 말합니다.
선자는 한 걸음 나아가서 무상(無常)과 상주(常主-무상의 반대. 존재의 불변함)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꿈을 논하여 왔습니다.
선자(禪者)가 말하는 꿈은, 구애되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심경이나 동작을 뜻합니다. 꿈에 실체(實體)가 없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것이 모두 실상(實相)이 아니다라고 실감할 수 있는 것이 꿈입니다.
선에서는 오도에서 떠나지 않고 오도를 잊은 자유, 잊어야 하는 것은 잊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꿈으로 상징합니다.
꿈을 꾸려고도 하지 않고, 꾸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꿈이지만, 선(禪)에서는 자기의 의도를 잊어버린 무심한 상태를 꿈이라고 말합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꿈이지만, 선에서는 이 꿈에서 깨어나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이 꿈이라고 평범한 결론을 내립니다.
도원선사는 "꿈속에서 꿈을 논하는 것이 부처님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시 노래로,
인생은 모두 거짓, 백발이 되도록 한낱 꿈이어라
하고 읊고 있습니다.
067. 시역몽비역몽(是亦夢非亦夢)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도 꿈,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꿈
택암(擇庵) 선사(1645년 입적)는 임종을 맞아, 제자들이 마지막 도가(偈)를 부탁받고 <몽(夢)>이라고 크게 한 글자를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시역몽비역몽(是亦夢非亦夢)"이라고 쓴 다음 73세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시역몽비역몽(是亦夢非亦夢)"은 옳고 그른 상대적인 지식이나 판단의 집착에서 벗어나 오도나 학식이나 지위등을 잊어버린 경지를 뜻합니다.
선사는 인생 행로를 꿈으로 상징하고 꿈에 대해 설법했습니다.
전란에 시달리던 한 장군이 선사에게,
"싸우지 않고도 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은 꿈입니다. 꿈속에 있기 때문에, 꿈을 꿈인 줄 모르고, 이 세상을 진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싸우는 것도 꿈속에서의 싸움으로, 꿈을 깨면 상대방은 없습니다.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입니다. 그걸 알지 못하고 이겼다고 해서 기뻐하고, 패했다고 해서 슬퍼합니다. 자기와 남이 대립하여 꿈속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다만 이겼다고 기뻐하지 않고, 패했다고 슬퍼하지 말고, 꿈속에서의 싸움을 그만두고 승패가 없는 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택암선사는 《꿈의 노래 100편》을 남겼습니다. 그 중 "물새"라는 제목의 시를 아래에 옮깁니다.
꿈과 같은 한 세상을 꿈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더러
꿈을 깨라고 물새는 밤에 저리 우는구나
그리고 도원선사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케 하는 꿈에서 깨어날지니
이 노래는 꿈과 같은 인생에서 꿈을 실감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은 또한 서행(西行) 선사의,
바람이 불어와 꽃을 떨어뜨린다는 꿈은 깨어나도 여전히 가슴 설레인다
와 상통됩니다. 《나에게는 생(生)이 있다》의 작가 에른스트 톨러의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말을 무척 좋아했던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톨러는 후에 자살을 했습니다.
그를 좋아했던 소설가는 그 소식을 병상에서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 "나는 사는 것이 역작(力作)이야"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을 꿈으로 실감하고 구김살 없이 사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068. 미풍취유송 근청성유호(微風吹幽松 近聽聲愈好)
-미풍이 소나무에 불어와 가까이서 들으면 그 소리가 더욱 좋다 (《寒山詩》)
이 구절 앞에 "욕득안신처 한산가장보(欲得安身處 寒山可長保)"―마음이 평안한 곳을 찾으려면 영원히 한산이 제일일 것이다―의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풀이하면 "몸과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고 하면 이곳 한산이야말로 영원히 으뜸일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한산(寒山)"은 지명(地名)인 동시에 인명(人名)이며,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순수한 마음을 응시하여 개발해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풍취유송 근청성유호(微風吹幽松 近聽聲愈好)"가 이어집니다.
산이라면 조용하고 나무 그늘도 있어서 서늘한 곳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이런 좋은 입지조건도 "한(寒)"이라는 글자로 부정하여 "한산(寒山)"으로서 상대적인 지식을 비웁니다. 그것이 "微風취유송)"입니다. "유(幽)"는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감각(五官)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소나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 일련의 시(詩)는 <한산시(寒山詩)>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며, 이 말에는 언어나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하여 옛날부터 선자들이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소나무에 미풍이 불어와 가까이서 들을수록 더욱 아름답게 들린다"는 것은 자기와 소나무와 미풍이 하나로 융화된 경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듣는 자와 들리는 자와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고 하여도 소나무는 소나무이고 자기는 자기입니다. 소나무와 자기는 동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대립하거나 반발하지 않는 세계를 동양인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自我)를 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다 비운 것이 "유(幽)"입니다.
여기에는 다시 다음 구절이 이어집니다.
"하유반백인 남남독황노 십년귀불득 망각래시도(下有斑白人 남남讀黃老 十年歸不得 忘却來時道)"―그늘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소리내어 경전을 읽고 있다. 벌써 10년이나 돌아가지 않고 있으나 온 길도 잊어버렸다.
그는 마음의 고향인 "한산(寒山)"에 머물러서 계속해서 도를 깨치고 있었으므로, 그 득도마저도 잊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무집착(無執着)의 의식(意識)을 비운(空)것이 "망각래시도(忘却來時道-온 길을 잊어 버렸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순수 의지(意志)입니다.
069. 백운포유석(白雲抱幽石)
-흰구름이 바위를 안고 있다 (《寒山詩》)
이 시구만 읽어도 맑고 깨끗한 산의 정기(精氣)를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백운포유석(白雲抱幽石)"은 중국 진나라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의 시에 나오는 구절인데, 한산이 자기 시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흰 구름이 이끼 낀 바위를 안고 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의 경관입니다. 정숙한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구절로써, 선자가 즐겨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상의 시끄러움을 떠난 산 속의 한적한 풍경뿐만 아니라, 시인 바교(芭蕉: 1644-1694)가 말하는 풍아(風雅)와도 상통합니다.
이 이끼 낀 바위는 완고한 인간의 마음을 상기하게 되며 그것을 안고 있는 흰 구름에 따스한 자비를 느낍니다. 또 다음의 서정시를 상기하게 됩니다.
긴 눈썹이 조용히 은빛의 작은 상자를 안고 있다
그 상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고뇌"라는 글자 하나가 들어 있을 뿐이다
여기 긴 눈썹이 흰 구름(白雲)이라면 은빛의 작은 상자는 유석(幽石)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幽)"에는 "숨긴다·숨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돌 속에 불(火)이 있으나 치지 않으면 발화되지 않는다. 마음 속에 불성(佛性)이 있으나 수행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는 옛글과 마찬가지로, 큰 가치가 숨겨져 있고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유(幽)"입니다.
"구름은 바위가 토해 내는 입김이다"는 말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는 말입니다. 고뇌하는 인간이 토해 내는 입김이 구름이 된다면, 그 구름은 이윽고 한데 뭉쳐서 비가 되어 바위를 적시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이끼가 끼는 것은 오랜 바위뿐이 아닙니다. 인간도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마음이 더러워져서 본래의 아름다운 것·참된 것이 숨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숨겨져 있을 뿐이며,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순수한 인간성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070. 간각하(看脚下)
-발치를 잘 보라(佛果園悟)
어느 날 밤에 오조(五祖) 법연(法演) 선사가 세 사람의 제자와 함께 절에 돌아오는 도중에 바람이 불어와 손에 들고 있던 초롱불이 꺼졌습니다. 그러자 법연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두운 밤에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도 초롱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불이 지금 꺼졌으니 너희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은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길을 가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팡이나 기둥으로 생각하여 의지하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의 심경을 물은 것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인생을 음미했습니다.
시인 바쇼(芭蕉)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구나
이 쓸쓸한 늦가을에
하고 읊었으며, 편조(遍照) 선사가,
내가 묵은 여인숙은 길까지 황폐했구나
무정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에
하고 읊은 것이 그 한 예입니다.
법연선사의 세 제자는 각각 자기의 의견을 말했는데 그 중에서 불과원오(佛果園悟-벽암록의 완성자)의 "발치를 잘 보라(看脚下)"는 말이, 스승 법연선사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간각하(看脚下)―그것은 평범한 말입니다. 초롱불이 꺼지면 발치를 잘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선도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도 자기를 똑바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풍요로운 일상생활도 여기서 시작됩니다. 같은 말에 "조고각하(照顧脚下)"가 있습니다. 발치를 잘 비추라는 뜻입니다.
선사(禪寺)의 현관에는 흔히 "간각하(看脚下)"니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써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을 현실 생활에 응용하여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불도(佛道)는 발치에 있는 것부터 깨닫게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단속입니다.
설사 손에 든 초롱불은 꺼져도 마음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자기 안을 비추는 초롱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초롱불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간다. 어두운 밤을 두려워 말고 오직 초롱불 하나를 의지하라"고 한 어느 유학자는 말했습니다.
선은 자기 안에 초롱불을 갖는 것입니다. 추악한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 불을 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인간의 생명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라는 가르칩니다.
"석존께서 최후로 하신 설법이 무엇입니까?"하는 물음에 "의뢰심을 버리라는 것이었지"하고 대답하는 것도, 자기 속의 빛을 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07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 (《碧巖錄》 제6칙)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말은 벽암록 제 6칙에 있는 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백은(白隱) 선사도 대단히 중요시한 말로, 이것은 흔히 말하는 "날마다가 길일(吉日)"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일진(日辰)이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날씨나 계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떠나 환경 속에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개인 날에는 개인 것을 사랑하고, 비오는 날에는 비를 사랑한다. 즐거움이 있으면 즐기고, 즐거움이 없어도 즐긴다"는 어느 작가의 말은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과 가까운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시선(唐詩選)》을 보면 "화발다풍우(花發多風雨) 인생별리족(人生別離足)"―꽃이 피니 비바람이 많고, 인생에는 이별의 슬픔이 많다―이라는 시가 들어 있습니다. 천무릉(千武陵)이라는 시인의 권주가(勸酒歌)의 한 구절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슬픔을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탄에 투철해지면 "그렇다, 그것이 진실이다"하고, 허망하면 허망할수록, 무상(無常)하면 무상할수록 꽃도 아름답고 인생도 귀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또한 선(禪)을 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천종단(千宗旦)은 시인 이휴(利休)의 손자입니다. 그는 깨끗하고 조용한 다실(茶室)을 지었으므로, 이름을 짓기 위해서 전부터 사사하던 청암(淸巖) 선사를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는 집을 비워야 하는 것을 사과하고 내일 뵙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제자에게 써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볼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자기가 집을 비운 동안에 찾아온 청암선사가 놓고 간 쪽지가 있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해태비구(解怠比丘) 불기명일(不期明日)"―게으른 중아,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이라는 단지 여덟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읽고 천종단은 곧 내덕사로 청암선사를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죄하는 뜻에서,
오늘 오늘하고 그 날을 살아갈지어다
내일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나니
하고 읊었습니다. 이런 일로 하여 다실(茶室)의 이름을 《금일암(今日巖)》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오늘이라는 지금뿐입니다. 우리는 이 오늘 하루를 소중히 알고 힘껏 살아가야 합니다.
072. 배려(配慮)
-마음을 쓴다(山本玄峯)
용택사의 산본현봉(山本玄峯) 스님(1961년 입적)은 근대 고승(高僧)의 한 사람입니다. 일화가 많은 선승(禪僧)으로 인생의 진수를 꿰뚫는 많은 말을 남겼습니다.
"심려는 하지 말라, 그러나 배려는 많이 하라."
심려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므로 무익한 일이지만, 배려는 마음을 쓰는 것이므로 유익한 말입니다.
선사는, "남에게는 친절히 대하고 자기에게는 차갑게 대하라"고도 말했습니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대하고 자기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대하라"는 어느 유학자의 말과도 비슷합니다.
진리에 접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마음을 세심하게 써야 합니다. 상심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소설가가 만년에 암 수술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병실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니 비가 내리는 중에 소년이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도 뭔가를 남에게 배달하는 심정으로 오늘까지 살아왔으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뭔가를 배달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인데
이 소년처럼 열심히
나는 무엇을 배달하고 있을까
그는 절망의 병상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실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영자에게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관계는 원활하지 못하다. 우리 회장은 몸도 건강하고 통이 크지만, 여성적인 세심한 배려를 하는 사람이다.
내가 큰딸을 출가시킬 때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어느 날 밤에 회장이 일부러 나의 집에 찾아와서 '결혼 비용으로 쓰게'하고 신문지에 돈을 싸서 넘겨주었다. 아내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경영이라는 냉엄한 비즈니스 속에 이런 따스한 마음이 경영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지 급료를 지불하거나 복지시설을 훌륭히 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인간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갖고 있는 감정의 동물이다. 그 집단을 결합하여 이끌어 가려면 역시 인간적인 애정이 경영 속에 넘쳐 있어야 한다."
073. 청풍잡지유하극(淸風잡地有何極)
-어디서나 청풍이 거침없이 불어온다 (《碧巖錄》제1칙)
"잡"자는 잡의 속자로, 돌고 돈다는 뜻이며, "잡지"는 지구상 어디에나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풍은 어디서나 불어오므로, 특별히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하극(有何極)"은 한정(限定)도 차별(差別)도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의 집에나 평등하게 불어오고 있습니다. 진리는 아낌없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져 슬퍼할 때가 적지 않지만, 구도(求道)하는 마음의 눈만 있으면 언제나 진리의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원통해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멀리 느껴집니다.
예컨대 당신이 어느 거리에 살고 있다면 자기 집에서 50미터 정도라도 좋습니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의 종류를 말해 보십시오. O상점 다음 X상점, 그 옆은 △상점 하는 식으로―.
날마다 오가는 길이라도 일일이 헤아리기가 힘들 것입니다. 상점은 주의를 끌기 쉽도록 간판이 걸려 있지만, 유심히 보지 않으면 시각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점포는 바로 "잡지"와 같아서 거리의 어디서나 자기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담배 가게의 작은 간판이 눈에 잘 뜨입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국수집 간판이 곧 시선을 끕니다.
진리도 이 간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어디나 무한(無限)히 무차별로 널려 있어 뭇사람들의 눈과 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로막는 원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자아의 인식―강한 자아(自我)가 그것입니다. 그런 건 알고도 남아, 아니 바빠서 거들떠볼 사이가 없어, 하는 거만한 아집(我執)이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극락(極樂)은 무한한 저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거리가 아니라, 아집의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무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이기도 합니다.
자아의 인식을 불식하면 최단거리가 됩니다. 이 최단거리에 부처님의 마음, 순수한 인간성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청풍이 불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에 티끌이 없는 것이 "청풍잡지유하극(淸風잡地有何極)"입니다.
074. 열반묘심(涅槃妙心)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열반묘심(涅槃妙心)은 석존께서 제가 가섭(迦葉)에게 선을 전할 때 하신 말씀의 하나입니다. "열반(涅槃)"은 번뇌의 불길이 꺼진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열반 그대로가 득도로 이어집니다. 깨달은 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므로 "묘심(妙心)"이라고 합니다. "열반"의 경지가 그대로 "묘심"인 것입니다.
석존께서는 이 마음을 가섭 존자에게 전수하셨습니다. 그러나 몰래 전수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은 마음은 본래 가섭 존자의 마음 속에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섭 존자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파문을 일으켜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그대로 전수가 됩니다.
이것을 석종(釋宗) 선사(1919년 입적)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면
우는 새(鳥)도 되고 피는 꽃(花)도 되는구나
하고 읊었습니다. 형태가 없는 마음이 전해져서 꽃이나 새에게도 전수되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에는 또한 평등(平等)과 보편(普遍)의 의미도 있습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현재·미래·언제·어디에나 충만한 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도원(道元) 선사는 "열반묘심(涅槃妙心)"에 대해,
언제나 내(我) 고향의 꽃이 아닌 것이 없어라
예전 그대로 봄(春)을 보내노니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라는 말은 일할 때나 잠잘 때나, 선한 일을 할 때나 악한 일을 할 때나 한결같다는 뜻입니다. 선악(善惡)과 옳고 그름을 떠난 그 이전의 본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고향은 마음의 근원지를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여도 선에 집착하지 않고 악을 행하여도 악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므로 "예전 그대로 봄을 맞이하고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075. 정법안장(正法眼藏)
-올바른 부처님의 가르침(釋尊)
《무문관(無門關)》의 제6칙에 "염화미소(拈華微笑)"(禪語 50)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석존께서는 청중의 한 사람이 주는 꽃을 손에 들고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이 도리를 가섭(迦葉)에게 전(傳)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올바른 불법(佛法)의 다른 호칭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지혜의 눈으로 비춥니다. 그리고 올바른 불법은 일체(一切)를 포함하고 수장(收藏)하고 있으므로 "장(藏)"이라고 합니다.
영봉(靈鳳) 선사는 "정(正)"은 정사(正邪)나 선악을 초월한 불편 부당한 부처님의 마음이고, "법(法)"은 이 부처님의 마음에 갖춰진 근원적인 진리이고, "안(眼)"은 이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장(藏)"은 부처님의 마음에는 모든 선한 불법(佛法)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는 말을 일찍이 사용한 것은 임제(臨濟) 선사입니다. 선사는 임종을 맞아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명심하기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석목흥도(澤木興道) 선사(1965년 입적)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이란 모든 불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원선사는 이 "정법안장"을 제목으로 하여
바람도 불지 않고 파도도 가라앉아 버린
조각배의 고요한 달밤이여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풍파가 사라져버린 조각배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은 그대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이 무심(無心)한 배를 비추는 달도 무심합니다. 버린 조각배이므로 그 안에는 사람도 없고 물건도 없습니다. 다만 달빛만 가득할 뿐입니다. 즉 배는 달빛으로 만선(滿船)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법안장"의 참된 모습입니다. <계속>
■ 목차 (바로가기)
제1장 공(空) - 不立文字
제2장 선(禪)을 전함- 敎外別傳
제3장 직지인심(直指人心)
제4장 지혜(知慧)- 見性成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