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화의 선, 병통과 치유
■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해인사 강원과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등에서 수학했다. ‘왕초보 선박사 되다’ ‘무자화두 십종병에 대한 고찰’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등 많은 저술과 논문이 있다.
▒ 목 차 ▒
1. 갈등선(葛藤禪) ▲ 위로
참구 않고 지식으로만 풀이하는 것
갈등 화해시키고 하나 만드는 게 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으로는 지역간, 계층간, 빈부간의 갈등이 있고, 개인적으로는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갈등, 그리고 자신의 직업이나 하는 일에 대한 갈등 등, 갈등의 갈래는 매우 많다.
‘갈등(葛藤)’이란 칡[葛]과 등나무[藤]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반목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일이 복잡하게 뒤얽혀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 혹은 의견 충돌로 인하여 불화음이 전개되고 있는 상태다. 심리학적으로는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는 2개 이상의 욕구가 발생한 상태, 혹은 방향이 전혀 다른 두 개 이상의 욕구가 동시에 발생하여 몹시 고민하는 상태, 그리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마음이 이동하기 곤란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선(禪)에서 ‘갈등(葛藤)’이란 언어문자를 가리킨다. ‘갈등선(葛藤禪)’이란 이리저리 언어문자로 선을 풀이,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칡이나 등나무 덩굴이 뒤엉켜서 있듯이, 난해한 수사(修辭)를 동원하여 언어적으로 장황하게 풀이하는 것을 뜻한다. 즉 실제적인 참구는 하지 않고 지식과 학식을 동원하여 고칙(古則)이나 공안(公案), 화두를 풀이하는 것, 또는 그런 선승이나 납자를 깎아 내리는 말이다. 그래서 어구를 가지고 노는 것(완롱/玩弄)을 ‘한갈등(閒葛藤)’이라고 한다. 부질없이 한가롭게 말장난이나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문자선’이라고 한다.
선은 지식이 아니다. 선은 직접적인 수행과 실제적인 체험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공(空)의 진리, 본래면목을 발견, 체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실참(實參) 없이 언어적·문자적으로 고칙이나 공안을 풀이, 해석하는 것으로 선을 삼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언어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여기서 ‘실참(진실한 참구)’이란 오로지 앉아 있는 것[坐禪]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실참이란 마음을 화두나 공안에 올인(All In)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精慮, 고요히 생각함, 명상), 선정(禪定), 혹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생각하는 것[思惟修]이다.
‘임제록’의 ‘상당 1’ 끝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다.
“또 임제스님이 말했다. 오늘의 법연(法筵, 설법)은 일대사(一大事, 일생일대의 중대사, 곧 깨닫는 일)를 밝히기 위한 것이오. 더 질문할 사람이 있소? 있다면 속히 나와서 질문하시오. 그러나 그대들이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그 즉시 진리와는 멀어지게 될 것이오. 어째서 그러한가? 보지 못했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은 언어문자를 떠나 있다’라고 하셨소. 그 이유는 법은 인(因)에도 연(緣)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철저하게 내 말을 따르지(믿지) 않기 때문에, 오늘 이리저리 언어문자[葛藤]로 떠들고 있는 것이오. 이것은 왕상시(王常侍)와 여러 관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오. 도리어 여러분들의 불성을 더 어둡게 할까 걱정이 되오. 법문 그만하고 물러가느니만 못할 것 같소.”
다음은 황벽의 ‘전심법요’이다.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세간의 진리입니까?”
황벽화상이 대답했다.
“언어문자로 설명해서 무엇 하려는가? 본래 청정한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묻고 답하겠는가?
만법은 일(一), 일여(一如)이다. 일여란 곧 ‘여여(如如),’ ‘진여’로서 진리와 합일된 상태이다. 둘이 아닌 하나(一), 그것을 유마거사는 ‘불이(不二, 하나)’라고 했다. 둘은 이원론이고 이원(二元)은 갈등이고 갈등은 공이 아닌 불공(不空)이다. 갈등은 이물질이 들어가서 청정성을 상실한 상태다. 그 상태가 번뇌 망상이고,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오늘의 우리, 중생이다.
현실과 이상(理想) 모두를 갈등상태로부터 화해시켜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가 되면 속이 후련해진다.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함구는 하나지만 개구(開口)는 입이 둘이다. 언어문자(갈등)의 방해공작으로 인하여 선의 본질과 갈등상태로부터 다시 합일시켜서 부처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2. 노파선(老婆禪) ▲ 위로
노파처럼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지도
오히려 동량이 될 재목 망치는 결과 초래
‘노파선(老婆禪)’이란 노파심(心) 즉 간절하고 자상한 마음으로 선을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노파(할머니)의 마음은 아주 간절하고 자상하다. 노파의 눈에 비춰진 세상은 온통 걱정덩어리로 보인다. 하나 같이 물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애와 같아 보인다. 남의 일도 내 일 이상으로 생각한다. 고구 정녕한 마음, 그것을 노파심절(老婆心切)이라고 한다.
선어록에는 노파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할머니가 손자를 생각하듯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지도해 주는 것으로서, 이는 원래 의미 그대로 긍정적인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선의 핵심이나 고칙, 공안, 화두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너무 자세하게 알려 주는 것, 즉 너무 지나치게 많이 알려 준 결과 수행자로 하여금 실참(實參)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는 부정적인 뜻이다.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선어록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다. 즉 좋은 의미로 쓰일 때는 친절과 자상함을 뜻하지만, 반대로 비판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노파처럼 지나칠 정도로 너무 많이 세세하게 알려주어서 오히려 동량(棟梁)이 될 재목을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의미로 쓰인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는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조금은 엄격하고 냉정해야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영국의 속담처럼 잘못을 해도 지적하지 않고, 자식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다보면 자식을 망치게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숫가락질도 못하게 된다.
선승이 수행자를 교육시키는 방법도 그와 다르지 않다. 수행자로 하여금 스스로 공안이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하는데, 즉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만 알려주면 되는데, 그만 노파심이 간절한 나머지 직접 실참(實參)을 통하여 알아야 할 것까지 다 알려 주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제자는 애써 참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불로소득 무임승차로서 아무런 감동이나 느낌, 마음으로 얻은 바가 없다. 노파심이 간절하여 매우 친절하고 자상하게 알려 주었지만, 결과는 역효과가 난 것이다. 수행자 지도를 잘못한 것인데, 노파선이란 이런 선승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두 가지 공안(선문답)을 보도록 하겠다. 먼저 ‘무문관’ 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 공안 끝부분에 나오는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 1260)의 평이다.
“무문이 말했다. 육조는 이 일에 있어서, 매우 성급하게 말해 준 것이다. 노파심이 간절했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비유한다면 금방 따온 여지(支, 과일 이름)라고 하는 과일을 직접 껍질까지 벗겨 입에 넣어준 격이나 다름없다. 제자로서는 씹을 필요도 없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겨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無門曰. 六祖可謂, 是事出急家. 老婆心切. 譬如 新支 剝了殼去了核. 送在爾口裏. 只要爾嚥一嚥).”
노파심절로서 너무 자상하게 다 알려 준 결과, 수행자로 하여금 직접 참구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평하고 있다. 제자에게 과일을 따 준 것도 지나친데, 게다가 손수 과일의 껍질을 까서 입에 넣어주기까지 하였으니 훌륭한 종장(宗匠)은 못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임제록’‘보화장’이다. “보화스님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양스님은 갓 시집 온 새색시이고, 목탑스님은 노파선(老婆禪)이구만. 임제는 어린 사내 아이 같지만 탁월한 안목을 갖추고 있네(普化以手指云, 河陽新婦子. 木塔老婆禪. 臨濟小兒. 却具一隻眼).”
보화스님은 하양스님을 평하여 선을 모르는 애숭이이고, 목탑스님은 너무 고주알 미주알 말해주는 노파선승이라고 조롱한다. 이상 두 용례에서 본다면 노파선은 주로 비꼬는 말, 조롱하는 말, 비하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암증선(暗/闇證禪) ▲ 위로
검증되지 않은 알음알이를 깨달았다 착각
무식하면 용감하듯 우매하면 큰 소리만 쳐
오늘날 우리나라 참선 수행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선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이 처음부터 무작정 앉아 있기만 한다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모른 채 앉아 있는 것으로 선을 삼고 있고, 용맹정진, 장좌불와 등 무지한 방법을 수행의 척도로 삼고 있다. 적지 않은 수행자가 선병(禪病)에 걸려 무의미한 인생을 보내고 있다.
참선 수행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착각이다. 무엇이 정도(正道)이고 정각(正覺, 바른 깨달음)인지 모르는 상태로 수행한다. 신체적 정신적 신비주의나 환영(幻影), 환시(幻視) 등을 깨달음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약간 정신적 신체적 특이 현상이나 특별한 증세가 나타나면 곧 깨달았거나 또는 깨달은 것으로 오판한다.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수행 방법과 깨달음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자칭하는 것, 혹은 그런 수행자를 암선(暗/闇禪)ㆍ암증선(暗/闇證禪)ㆍ암증선사(禪師)ㆍ암증비구(暗證比丘)ㆍ암증법사(暗證蟄 )ㆍ암선자(暗禪子)라고 한다. ‘암(暗/闇)’은 어두운 것, 우매한 것, 무지한 것을 말하고, ‘증(證)’은 증득(證得)의 준말로 깨달은 것을 뜻한다. 즉 정각(正覺)이 아닌 엉뚱한 것을 깨달았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맹선(盲禪, 눈이 먼 것), 무지선(無知禪)이라고 한다.
‘암증선’이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천태지의(538-597)이다. 그는 ‘법화경’ 주석서인 ‘마하지관’ 5권에서, 무지한 채 그냥 앉아 있기만 하는 어리석은 선 수행자를 일컬어 ‘암증선사(暗證禪師)’라고 했고, 실천적인 수행은 하지 않고 경전을 외우기만 하는 교학승을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규정했다.
당시(남북조 시기) 불교계에서 이런 시사적(時事的)인 성격의 신조어를 썼다는 것은 이미 이때부터 선종ㆍ교종 할 것 없이 어리석은 수행자들이 많았음을 말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신조어가 생길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잘 고찰해 보면 그 시대의 정치ㆍ종교ㆍ문화적 상황을 알 수 있다.
천태지의 이후 선종에서는 자파(自派)가 아닌 화엄ㆍ천태ㆍ법상(유식) 등 교학승들을 지엽적인 것을 탐구하는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조롱했고, 이에 교종 쪽에서는 선승들을 일컬어 교리를 모르는 암증선사(暗證禪師)ㆍ암증맹오(暗證盲悟, 교리에 어두운 눈먼 깨달음)라고 조롱했다. 천태지의의 생몰연대(538-597)를 볼 때, 선(禪)과 교(敎)의 대립은 보리달마(346-495, ?-528)가 입적한 후 50여 년 정도 있다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암증선’이라는 말은 선종 내부에서도 상대방을 조롱, 비하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 예컨대 선지(禪旨)에 어두운 자, 정법에 대한 안목(정법안)이 없는 자, 앉아 있을 뿐 교리나 사상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 언어문자에 집착해 있는 자, 교만한 자 등을 비난할 때도 이 말이 사용되었다.
독선적인 깨달음, 또는 그와 같은 깨달음에 안주하는 무리를 ‘암효득(暗曉得)’이라고 부른다. ‘암암리(暗暗裡)에 안 것’ 등의 뜻으로, 암증선과 같은 말이다. ‘벽암록’ 38칙의 본칙과 착어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본칙> “풍혈선사가 상당하여 말했다. 조사의 심인(心印)은 그 모양이 마치 철우(鐵牛, 무쇠소)의 작용과 같아서 배척하면 심인이 나타나고 잡으려고 하면 심인이 부서진다. 그렇다면 배척하지도 잡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심인인가 심인이 아닌가? 그때 한 노파장로가 나와서 말했다. 모갑(某甲, 제가)이 철우의 작용을 갖고 있습니다”
원오극근(1063-1135)은 착어에서 “낚시로 사기꾼(暗曉得) 하나를 낚았네. 매우 기특한 놈이로다(釣得一箇暗曉得, 不妨奇特)”라고 혹평했다. ‘사기꾼’ ‘가자’ ‘엉터리’라는 뜻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어리석고 우매하면 큰 소리 칠 수밖에 없다. 진품을 본 적 없으므로 짝퉁을 진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고, 개뼉다구를 가지고 소뼉다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4. 야호선(野狐禪)-上 ▲ 위로
깨달은 듯한 태도로 남 속이는 사이비선
진실한 참구 없는 짝퉁 선승 경멸 때 사용
‘여우’, ‘들 여우’를 야호(野狐)라고 한다.
여우는 예부터 교활하고 의심이 많은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갖가지 유언비어를 만들어 여우를 미워했다.
간사하거나 약아빠진 사람을 두고 ‘여우같은 인간’, ‘백여시’라 했고, 교활한 여자를 두고 ‘여우같은 년’ 더 교활한 여자는 ‘불여우’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종종 자신을 ‘여우 00’ 혹은 ‘00여우’라고 애칭하기도 한다. 자진해서 여우가 된 것인데, ‘애교 많은 여자’, ‘센스가 듬뿍 있는 여자’라는 뉘앙스일 것이다.
여우(野狐)는 재주 많은 원숭이와 함께 선어록에 자주 출현한다.
맡은 역할은 주로 분별심과 알음알이, 잔꾀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실제 여우는 매우 꾀가 많아서 사람들이 녀석을 잡으려고 화약이나 올무를 놔두면 조심스럽게 물어서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영리한 여우가 오래되면 요괴로 둔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야호와 합성된 선어로는 ‘야호선(野狐禪)’ 외에도 ‘야호정(野狐精)’, ‘야호정매(野狐精魅)’, ‘야호견해(野狐見解)’, ‘야호연(野狐涎)’ 등이 있다.
선어록에서는 여우를 야호(野狐)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호리(狐狸)라고 한다.
‘야호선’이란 정도(正道)가 아닌 삿된 선(禪), 즉 엉터리 선(禪)을 뜻한다. 진실한 수행은 하지 않은 채 깨달은 듯한 태도로 남을 속이는 것, 즉 사이비선(似而非禪)을 이른다. 모양새는 진짜와 별 다름없어 보이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진짜를 모방한 짝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야호정(野狐精), 야호정매(野狐精魅)는 ‘여우 혼’ ‘여우 귀신’, ‘여우 도깨비’ 등으로, 주로 진실한 참구가 없는 엉터리 선승을 경멸할 때 쓰는 말이다.
야호견해(野狐見解)는 ‘들 여우의 견해’라는 말로 정견, 정법안이 없는 선승을 뜻한다. 야호연(野狐涎)은 ‘여우의 침(口液)’인데, 엉터리 선승의 잘못된 설법이나 가르침을 가리킨다.
사이비들은 대체로 여우처럼 지능지수가 높아서 남을 잘 속인다. 문장이나 말이 화려하다. 종교 사기꾼일수록 그럴싸하여 보통 사람은 좀처럼 가려내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하면서 ‘당신의 전생을 안다’느니, 또는 ‘몇 년간 장좌불와 했다’는 등 이상한 말로 상대방을 현혹한다.
주로 도교의 양생술이나 기공, 단전호흡 등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 그리고 ‘마음자리를 봐야 한다’, ‘마음은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는 등 전형적인 법문으로 선지식 행세를 하는데, 이들을 지칭하여 야호선(野狐禪)이라고 한다.
여우가 선어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백장야호(百丈野狐, 백장과 들 여우) 공안이다.
이 공안에서 야호(여우)는 노인으로 둔갑(변신)했다가 다시 여우로 둔갑하는데, 이것을 본다면 백장야호에 나오는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음은 ‘백장광록’과 ‘무문관’ 2칙, ‘선문염송’ 184칙 등에 나오는 백장야호(百丈野狐) 공안이다.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명언을 남긴 백장선사(720-814)가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할 때마다 어떤 노인이 들어와서 법문을 듣고 나가곤 하였는데, 하루는 법문이 다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백장선사가 “거기 서 있는 이는 누구인데 나가지 않고 있소?”라고 물었다.
이에 노인이 “저는 과거 가섭불 때 이 절 주지로 있었는데, 어떤 학인이 ‘대수행인(大修行人, 大悟한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하고 묻기에 ‘불낙인과(不落因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가, 뒤에 5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바라건대 화상께서는 저를 위하여 한마디(一轉語, 깨달을 수 있는 한마디)를 내려 여우의 탈을 벗겨주소서.”라고 하였다.
5. 야호선(野狐禪)-下 ▲ 위로
꾀 많은 여우처럼 분별심 가지면 깨닫지 못해
임제는 귀신 타령 수행자 여우도깨비라 비난
이에 백장선사가 “불매인과(不昧因果)니라”라고 하자, 즉시 노인은 합장하면서 “저는 이미 깨달아서 여우의 몸을 벗었습니다. 뒷산에 가면 죽은 여우의 시체가 있을 것이오니, 망승(亡僧, 죽은 스님)을 천도하는 법식대로 화장하여 주옵소서.” 이에 백장화상이 유나(維那)를 시켜 노인의 부탁대로 화장을 해 주었다고 한다.
이 공안에서 핵심은 불낙인과(不落因果)와 불매인과(不昧因果)이다. 그 차이점은 ‘낙(落)’ 자와 ‘매(昧)’ 자에 있는데 무슨 차이일까?
불낙인과는 인과응보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대수행인(大修行人, 大悟한 수행자)은 인과응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도 자기가 지은 선악의 과보는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지은 죄가 있다면 누구든 그 과보를 받게 되는데, 다만 대수행인은 받아도 흔적 없이 받으므로 받지 않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주고받는데 실물이 오고가지 않을 뿐인 것이다.
즉 ?堉置敾琯 인과에 떨어집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인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했는데, 결론적으로 이 말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인과응보설을 부정한 것이 되므로, 그 과보로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매인과(不昧因果)는 인과응보를 분명하게 인식(不昧)하고 있다는 뜻인데, 인과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므로 그 한마디에 여우의 몸을 벗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견(正見)은 불매인과(不昧因果)이고, 사견(邪見)은 불낙인과(不落因果)이다. 노인으로 둔갑한 여우가 정견도 없이 함부로 불낙인과라고 했기 때문에 야호선으로 매도된 것이다.
사실 이 백장야호 공안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픽션으로서 백장선사가 인과응보설을 믿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는 수행자들에게 교육적인 차원에서 경종을 울려 주기 위하여 만든 의도적인 것이다.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기 싫거든 언행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호리호골(狐狸狐搰)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는 의심이 매우 많아서 자기가 물건(고기 등 먹을 것)을 묻고 나서 의심이 나서 또 자기가 파본다는 것인데, 의심이 많으면 일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는 말로 쓰인다.
의심이 많으면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선의 정신에 입각하여 말한다면 부질없이 불낙(不落)과 불매(不昧) 두 글자를 놓고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꾀 많고 의심 많은 여우처럼 분별심을 가지면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임제선사는 ‘귀신을 보았다느니’, 또는 ‘유령을 보았다’고 하는 수행자 무리를 지칭하여 야호정매(野狐精魅, 여우 도깨비)라고 비난한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평상심이 곧 선이오. 이것저것 조작하고 흉내 내지 마시오. 요즘 옳고 그른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승려들이 있소. 그들은 귀신을 보았다느니, 유령을 보았다느니 헛소리하고 있소. 또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면서 ‘맑은 날이다. 흐린 날이다’라고 떠들고 있소. 이와 같은 무리들은 진정(眞正)한 견해가 없는 자들로서 모두 시주의 빚을 지고 있소. 반드시 염라대왕 앞에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게 될 것이오. 양가집 자제들이 야호정매(野狐精魅, 엉터리 선승)에게 홀리면 인생을 버리게 되오. 눈먼 자들이여, 그동안 공짜로 먹은 밥값을 지불해야 할 날이 있게 될 것이오.(‘임제록’ 시중 10)”
임제선사의 법어와 같이 정법안을 갖추고자 하는 선승이 귀신이나 유령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중병에 걸린 사람이다.
여우 도깨비에게 홀린 것이므로 선원에서는 고칠 수가 없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어봐야 소용이 없으므로 양복을 입혀서 미아리고개로 데려다 주어야 한다. 이런 수행자들은 참으로 불쌍하고 딱하기 그지없다. 잘못된 줄도 모르고 그것도 수행이라고 일평생 허송세월할 것이 아닌가? 진정 견해를 갖추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6. 유리병자선(琉璃甁子禪) ▲ 위로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박살나는 선수행
번뇌 소굴서도 마음 평온해야 참 수행자
유리는 맑고 투명해서 청정을 상징하지만 잘 깨진다는 단점이 있다. ‘유리병자선(琉璃甁子禪)’이란 ‘유리병처럼 살짝만 부딪혀도 깨지는 선(禪)’ 또는 ‘유리병처럼 툭하면 깨져 버리는 선수행’을 가리킨다. 번뇌를 만나면 부서지기 쉬운 선,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박살나 버리는 선수행을 유리병자선이라고 한다.
‘마음이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는 ‘화엄경’의 법문처럼, 마음은 갖가지 번뇌 망상을 연출해 낸다. 아직 벌어질 기미도 없는 일을 태산처럼 걱정한다거나 혹은 타인이 나를 해칠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견제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지나친 불안감으로 번민하는 등 스스로 불안 초조, 근심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마음을 닦기 위하여 조용한 산사(山寺)나 수행처를 찾는다. 그런 곳은 조용하고 한가해서 가기만 해도 금방 마음이 평온해지고, 4, 5일쯤 되면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복잡한 외부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인데, 한결같은 吠陸÷ 마음이 평온해졌다는 것이다.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고 수행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산속을 떠나 다시 세속으로 내려오면 수행의 힘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언제 수행했던가 하고 반문할 정도로 원위치로 되돌아간다. 이런 수행은 단순한 환경적 요인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아무런 힘이 없다.
현실에 부딪히면 그대로 깨져 버리는 수행, 조금만 부딪혀도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선수행, 그것이 유리선(瑠璃禪), 유리병자선이다. 특히 마약 중독자처럼 몇 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수행처를 들락거리는 이들은 모두 유리병자선을 닦고 있는 이들이다.
유리병자선이라는 말은 원오극근(1063∼1135)의 어록에 처음 나온다.
‘참으로 바른 종안(宗眼, 正眼)을 얻지 못한다면 금강처럼 단단한 밤송이를 삼킬 수 없을 것이다.’ 오조법연화상(원오의 스승)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지금(송초) 여러 선원에서 참구하고 있는 선은 마치 유리병과 같다.
아끼고 보호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 나 노승으로 하여금 보게 하지 말라. (보게 한다면) 철퇴를 가지고 부숴버릴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내가 처음 화상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곧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참구하였다(원오어록 12권)(不得正宗眼. 便是跳金剛圈栗棘蓬不得也. 五祖和常云. 諸方參得底禪, 如琉璃子相似, 愛護不捨第一. 莫老僧見. 將鐵鎚一擊爾底碎定也. 山僧初見他如此說, 便盡心參他. ‘원오어록’ 12권).
즉, 아끼고 보호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는 말은 현실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 복잡한 일을 피하여 한가하게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또 원오선사는 ‘선사(先師, 입적한 스승, 즉 오조법연)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유리병자선을 배우지 말라하셨다. 너무 가벼워서 사람들과 접촉하기만 해도 곧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先師常云. 莫學琉璃子禪, 輕輕被人觸著, 便百雜碎. ‘원오어록’ 13권).’라고 했다. 유리병처럼 현실에 부딪히면 그대로 박살나 버리는 선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대혜선사도 ‘서장’에서 수없이 “고요한 곳(靜處)에서 수행, 그것 누가 못하느냐? 관건은 시끄러운 곳(鬧處)에서도 수행의 효과가 발휘되어야 한다” “고요한 곳(靜處)에서 수행하는 것은 시끄러운 곳(鬧處)에 대응하기 위함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요즘 수행자들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나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유리전상(瑠璃殿上)’이라고 한다. ‘유리로 만든 궁전 위에 있다’는 말인데, 살짝만 쳐도 ‘쨍’하고 깨지는 궁전, 그것도 깨달은 것이라고 애지중지하는 이도 있다. 강철은 불에 들어갈수록 단단해진다. 번뇌의 소굴 속에서도 마음이 평온해야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문자선(文字禪)-上 ▲ 위로
선의 진수나 심오한 이치 문자로만 해석
문학적 수사에 치중해 언어유희 비판도
‘문자선’이란 선의 진수나 심오한 이치를 언어문자로 표출·해석하는 것, 또는 고칙·공안 등을 언어적으로 풀이·해설·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좌선을 통한 실제적인 참구보다는 선시(禪詩)나 게송 등 운문으로 선의 세계를 표출하는 것, 혹은 이론적·학문적·교학적으로 따지고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문자선의 시작은 고칙과 공안에 대하여, 게송이나 염고(拈古, 산문체 해설)·송고(頌古, 운문체 설명)·대어(代語, 대신 말함), 별어(別語, 별도로 말함)·평창(評唱, 산문체의 염송 해설)·착어(着語, 짧은 촌평) 등 주로 짧고 간결한 시적(詩的)인 언어를 통하여 표출·설명하기 시작한 송대(宋代, 북송)부터이다. 이것이 문자선이 탄생하게 된 동기인데, 여기서 출현한 것이 선문학의 백미이자 유명한 공안집인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의 ‘송고백칙(頌古百則)’과 ‘공안대별백칙(公案代別百則)’ 그리고 설두중현(980-1052)의 ‘설두송고백칙’ 등이다. 특히 대혜종고의 스승인 원오극근(1063-1135)의 ‘벽암록’은 문자선의 극치였다고 할 수 있다.
선의 세계를 게송이나 착어 혹은 선시(禪詩) 등을 통하여 에둘러 표현하는 이른바 요로설선(繞路說禪)은 때로는 말장난에 그치는 문자선을 탄생시켰지만, 긍정적으로는 ‘선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았다. 특히 송대 사대부와 지식층 그리고 문인들이 선에 깊이 매료되어 선문화를 꽃피웠던 것은 선과 시(詩)의 만남 곧 선문학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禪)은 학문적 언어적인 탐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선은 언어문자를 떠나서(不立文字) 마음으로 체득(心得)하여 진리불(眞理佛)인 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 선이다(一如). 비록 그 표현 방법과 수단은 언어문자를 쓰고 있지만(不離文字), 그 진수는 언어문자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言語道斷).
결국 문자선은 선의 이치를 드러내는 데 힘쓰기 보다는 문학적인 수사(修辭)나 기교, 시작(詩作) 등에 치중하게 되었고, 언어적 유희라는 비판을 낳게 되었다. 또 선어(禪語)의 표면적인 뜻에 가려서 정작 진실을 보지 못한다거나, 지나친 언어적 풀이나 문자적 해석으로 말미암아 선의 본질과 멀어지게 되었다. 비판은 드디어 ‘문자선’, ‘암흑두(唵黑豆)’, ‘문자법사(文字法師)’ 등 원색적인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암흑두(唵黑豆)란 문자를 읽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암(唵)은 우물우물 씹는다는 뜻이고, 흑두(黑豆)는 검은 콩으로, 문자를 가리킨다. ‘입으로 문자를 읽다’는 뜻인데, 과거 1980년대 초 운동권에서 학자나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두고 ‘먹물들’이라고 비꼬아 말한 적이 있는데, 같은 말이다. 민주화 등 현실적인 문제는 도외시한 책상 앞에서 책이나 보고 있는 답답한 친구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문자법사(文字法師)란 오로지 경전이나 논서에만 매달리는 사람, 또는 경전만 연구할 뿐, 참선에는 뜻을 두고 있지 않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교학만 하고 선수행은 하지 않는 사람, 종지(宗旨)는 모르고 말이나 언어문자에만 얽매여 있는 수행자를 비방하는 말이다. 그 밖에 언어문자로 반야지혜를 표현, 설명하는 것을 ‘문자 반야’라고 한다.
문자선에 대한 비판은 많은 선승들이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도 톱(top)은 간화선의 거장 대혜선사(1089-1163)일 것이다. 그는 ‘서장’과 ‘보설’ 등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비판했다.
특히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 주의해야 할 열 가지 사항인 ‘무자화두 십종병(十種病)’에는 ‘언어적으로 (무자를) 참구하지 말라(不得向語路上作活計)’, ‘문자를 인용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不得向文字中引證)’ 등 묵조선 비판 못지않게 문자선을 비판했다.
시대적으로 문자선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시대(북송) 시(詩)나 게송으로 선의 심의(深意)를 표출했던 선종의 송고문학(頌古文學)은 가히 르네상스를 이루었다고 할만하다.
8. 문자선(文字禪)-下 ▲ 위로
문자선 오해해 아예 책 보지 말라는 건 무지
소가 마신 물 우유 되듯 지혜롭게 쓰면 양약
‘문자선’이라고 한다면 그 범위는 매우 넓다. 직접적인 의미, 비판적인 의미로는 참선은 하지 않고 언어문자, 또는 이론적, 학문적으로만 선을 탐구하는 것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는 선어록이나 공안에 대한 해석 및 주석, 풀이도 모두 문자선에 속한다.
또 오늘날 선(禪)과 관련 글이나 논문 등도 모두 문자선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제록’, ‘벽암록’, ‘무문관’ 등 선어록도 모두 문자선이다.
간화선의 거장 대혜 선사는 문자선 비판의 최전방에 있었지만, 무려 30여 권에 달하는 어록을 남겼다(대혜보각선사어록 30권). 그는 고칙, 공안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게송과 착어를 붙였는데 그 책이 ‘정법안장’이다.
선승들이 문자선에 대하여 주의를 주는 것은 문자의 표면적인 뜻에 착(着, 집착, 매달림)한 나머지 문자 이면의 진정한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납자들 가운데는 문자선을 오해하여 아예 글자를 경시, 도외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결과 스스로 무식을 자초하여 한문 한 줄도 읽지 못하는 눈먼 맹선(盲禪)이 되어 버린다. 문자를 알되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되고, 또 선어(禪語)의 분명한 뜻을 확실하게 알면 되는데, 문자를 원수로 여긴 나머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을 어김없이 실천해 버렸으니, 이야말로 어리석음이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수행의 목적은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여 반야지혜를 성취하자는 것인데, 어리석음(무지)을 얼싸안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무사(無事)’란 ‘심중무일사(心中無一事)’의 준말로서, 일생사를 다해 마친 사람, 깨달음을 이루어서 더 이상 해야 할 과제가 없는 사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無學)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을 착각하여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조용한 곳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것이 ‘무사’라고 착각한다거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착각하여 날마다 빈둥빈둥 세월만 죽인다면 이야말로 무식의 성찬이 아닐 수 없다.
참선수행에서 교학적 이론적 바탕은 필수이다. 선(禪) 역시 ‘화엄경’, ‘유마경’, ‘금강경’,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 대승경전과 논서를 바탕으로 이론과 수행체계가 정립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론적 체계를 바탕으로 법문을 하고 납자들을 교육시키는데,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으로 혜안을 갖춘 선승이라고 할 수 없다.
좌선당에서만 보지 말라는 것이고, 또 경전을 보되 거기에 매달려 진실을 보지 못한다거나 실참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깊이 각인시켜 주면 되는데, 애시당초 보지 말라고 한다면 무지한 선지식이다. 수행자들을 망치고 있는데 이것을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 한 명의 맹인이 많은 맹인을 이끌고 구렁으로 간다)이라고 한다.
선 수행 역시 참선에 대한 지식과 교학적 이해가 없으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正)과 사(邪)를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은 분명히 정도(正道)를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사도(邪道)를 걷는 이가 적지 않다. 상당한 수행자가 도교적인 기공이나 단전호흡, 또는 타심통 같은 것을 기대하는데, 모두 무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간화선의 교과서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대혜종고의 ‘서장(書狀)’과 무문혜개의 ‘무문관’이다. 그런데 이 두 선서(禪書) 중 하나라도 읽고 화두를 참구하는 납자는 3할도 안 된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는 경전의 말씀과 같이, 수행은 하지 않고 문자나 익혀서 지식이나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 아는 척, 깨달은 척 하는 사람에겐 독이 되지만, 지혜로운 이가 쓰면 더없는 양약이 된다. 정견을 갖추자면 경전과 선어록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든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장점을 활용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자를 보지 말라고 극구 비판했던 선승치고 경전에 통달하지 않은 선승이 없다는 것이다.
9. 치선(癡禪) ▲ 위로
썩은 고목처럼 마음 개발하지 못하는 것
지식만 동원해 禪 해석하는 광선도 병통
어리석으면 심적·육체적 고생이 끊이질 않는다. 지혜롭지 못하면 노력해도 성사되는 것이 없다. 치(癡)·치선(癡禪)은 탐욕(貪)·증오(嗔)·어리석음(癡) 가운데 하나로서, 만사를 패착(敗着)으로 귀결시킨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인성(人性) 가운데 어리석음(무지)을 퇴출 대상 1호로 지목하셨다.
‘치선(癡禪)’이란 ‘어리석은 선’ ‘어리석은 선수행자’를 가리킨다. 아무런 교리적 바탕도 없이 무턱대고 그냥 앉아만 있을 뿐 지혜작용이 없는 선(禪), 썩은 고목처럼 앉아서 심지(心地, 마음)를 개발하지 못하는 선, 깨달음이 없는 선이 치선이다. 무엇이 올바른 수행이고 삿된 수행인지 모르는 무지몽매한 선객, 교학적 바탕이나 안목, 지견이 없는 선객을 치선자라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정혜결사문’에서 당시 참선자들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누어 논하고 있는데, 그것이 치선자(癡禪者)와 광선자(狂禪者)이다.
“만약 이와 같이 정과 혜를 함께 닦아나간다면(정혜쌍수) 만 가지 행이 깨끗하게 닦아질 것이다. 어찌 쓸데없이 묵(黙)을 지키는 치선과 그저 다만 글자나 찾는 광혜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若能如是, 定慧雙運, 萬行齊修, 豈比夫空守默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也).”
무지한 채 앉아서 졸기만 하는 것은 치선자이고, 유식한 척 지식이나 자랑하는 것은 광혜자(狂慧者=狂禪者)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선과 광선에서 벗어나 올바른 수행을 하자면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보조지눌이 주장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인데, 치선도 문제지만 지식을 동원하여 선을 해석하는 광선(狂禪)도 큰 병통이라는 것이다. 또 ‘선림보훈음의’에서는 “치선이란 그저 선을 탐미하기만 할 뿐, 지혜가 개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수주대토 등과 같은 유이다(癡禪, 耽味禪而未發慧曰癡禪. 如守株待兔等)”라고 말하고 있다.
수주대토(守株待兔)란 ‘한비자’에 나오는 우화적인 고사로서,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어떤 농부가 우연히 나무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혀 죽은 것을 잡게 되었는데, 농부는 그 후에도 또 그와 같이 토끼를 잡을까 하여 일도 하지 않고 매일같이 그루터기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밭은 풀이 무성하여 황폐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치(癡)와 합성된 단어 가운데 좋은 말은 별로 없다. 치골(癡骨)은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고, 치행(癡行)은 어리석고 못난 행동을 뜻하고, 치정(癡情)은 어리석은 사랑으로 무지의 극치이다.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을 음치(音癡)라고 하고, 지능지수가 모자라는 바보를 천치(天癡), 백치(白痴)라고 하고, 책에 미친 사람, 책벌레를 서치(書癡)라고 하는데 때론 독서가의 애칭으로 쓰기도 한다. 정상적이던 지능이 대뇌의 질환으로 저하된 상태를 치매(癡)라고 하는데, 치병(痴病) 중에서도 가장 몹쓸 병이다.
선어록에는 ‘치인면전 부득설몽(痴人面前 不得說夢)’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가능한 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꿈은 사실이 아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찰떡처럼 믿기 때문이다.
임제선사는 자신의 법어집인 ‘임제록’에서 어리석은 수행자를 가리켜 ‘할려변(瞎驢邊)’ ‘할루생(瞎屢生)’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할려(瞎驢)는 눈먼 나귀로 정법의 안목이 없는 바보 같은 선승, 어리석은 선승을 비유하고, 할루생은 눈먼 사람으로 역시 안목이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임제선사가 임종 직전에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저 눈먼 나귀(수행자)에게서 사라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을 마치자 단정히 앉아 입적하셨다(師云, 誰知吾正法眼藏, 向這瞎驢邊滅却, 言訖, 端然示寂. ‘임제록’21단).
치선의 치료법은 반야지혜이다. 반야지혜를 갖추자면 경전과 어록, 그리고 교학과 문자를 알아야 한다. 다음에는 그것을 사유하여 자기화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선승은 무조건 경전은 보지 말라고 하니 치선에서 벗어나기란 금생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10. 구두선(口頭禪) ▲ 위로
입으로 선 참구하고 말로만 선 공부하는 것
말이 많은 사람치고 실천하는 경우 드물어
‘구두선(口頭禪)’이란 입으로만 선을 참구하는 것, 말로만 선(禪) 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에서도 ‘구두선’이라는 말은 자주 쓴다.
간혹 신문에 보면 ‘법적인 장치도 마련하지 않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은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사퇴는 구두선에만 그치지 말고 제발 실행하길 바란다’, ‘동반성장위가 아무리 동반성장을 목 아프게 외친들 대기업들이 동참하지 않는다면 구두선일 뿐이다’ 등등.
이처럼 구두선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말이다.
‘구두(口頭)’란 말·언어를 뜻하고, ‘두(頭)’는 어조사로 앞 글자를 명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염두(念頭, 생각), 몰두(沒頭)처럼 동사에 붙어서 추상명사를 만들기도 한다.
구두선이란 실제적인 수행, 실제적인 참구는 하지 않고 단지 입으로만 공부한 척하는 것, 말로만 깨달은 양 “선이 어쩌니 도(道)가 어쩌니” 하고 떠드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런 납자를 꾸짖는 말이 구두선인 , 다른 말로는 ‘구두삼매(口頭三昧, 입으로만 삼매)’라고도 하고 또는 상양호호지(商量浩浩地)라고 한다.
호호(浩浩)는 물이 넘치는 모양을 가리키는 형용사인데 주고받는 선문답이나 법담, 법거량이 매우 화려한 것, 부처나 조사 선지식도 혀를 내두를 언어의 성찬을 말한다.
그 밖에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선시(禪詩) 등 선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것, 화려한 문학적 수사로 선을 논하는 것, 혹은 옛 선승들의 말을 그대로 복창하는 것도 모두 구두선이다. 신심(信心) 없이 입으로만 염불하는 것을 ‘공염불(空念佛)’이라고 하는데, 같은 뜻이다.
중국에서는 교우(交友)가 두텁지 않은 것을 가리켜 ‘구두교(口頭交)’라고 하는데, 립서비스로만 교우한다는 뜻이다.
황벽선사는 구두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평소에 다만 구두선만 익혀서 선(禪)을 설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는다. 그러나 여기(本分事)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平日, 只學口頭三昧, 說禪說道, 呵佛罵祖, 到這裏, 都用不著. ‘선관책진’)”
‘백장청규증의기(百丈淸規證義記)’ 7권 ‘공주규약(共住規約, 공동생활 규약)’ 항목에는 추방에 대하여 여러 가지 조목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속에는 선원에서 구두선을 일삼는 자도 들어가 있다.
‘근본 대계(살생, 도둑질, 음행, 망어, 음주)를 범하는 자는 선원에서 추방하라. 선은 진실한 참구와 진실한 깨달음을 가장 중시한다. 그러므로 입으로 선을 희롱하는 자(弄口頭禪者)는 추방하라. 삼삼오오 모여서 산문 밖에 나가서 떠들면서 노는 자, 한가하게 앉아 있기만 하는 자도 벌을 주되 불복하면 추방하라(犯根本大戒者, 出院. 禪貴真參實悟, 弄口頭禪者, 出院. 三五成群, 山門外遊戲雜話, 并閑坐者罰, 不服者, 出院)’
여기에서 입으로 선을 희롱하는 자란 진실한 수행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말로만 ‘선에 대하여 어쩌니 저쩌니 하고 떠드는 자, 깨달은 척 떠들고 다니는 자를 뜻한다.
또 ‘경률계상포살궤의(經律戒相布薩軌儀)’ 1권에서는 수행자들에게 ‘도(道)를 배우는 자가 구두선을 배워 가지고 함부로 망령되게 반야를 말하여 그 결과 스스로 허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學道, 莫學口頭禪, 妄談般若, 自招愆)’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말이 많은 사람치고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언행일치는 성인이라야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얼 비슷 동행은 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경우도 드물다. 그러므로 말 수는 가능한 적어야 한다. 말이 많으면 허튼 말, 실언이 있게 마련이다.
두 번째 실언은 더욱 인격을 손상시킨다. 수행자라면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수행의 척도는 말 한마디로도 알 수 있다.
11. 나복두선(蘿蔔頭禪) ▲ 위로
철저하지 못한 선으로 인가 남발하는 선승
깨달음을 팔아먹는 머리좋은 장사꾼 일 뿐
나복두선은 매우 희귀한 선(禪)이다. 아마 처음 들어본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희귀한 선이 많지만 나복두선은 그 가운데서도 더 희귀하다. ‘나복(蘿蔔)’ 또는 ‘나복두(蘿蔔頭)’란 밭에서 자라는 ‘무’ ‘큰 무’를 가리킨다. ‘무’의 한자표기이다.
무는 첫째가 색이 희고 미끈해야 한다. 또 무는 물이 많아야 하는데 칼로 잘랐을 때 물기가 뭉실 솟아올라야 한다.
그러지 않는 무는 좋은 무가 아니고 바람이 들어간 무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 무 가운데서도 조선무는 전라도 항아리처럼 짧고 통통하고 왜(倭)무는 긴 데 주로 단무지(다꾸앙, 닥꽝)을 담글 때 쓴다. 무를 채로 썰어서 나물로 만든 것을 나복채(蘿蔔菜)라고 하고, 흰쌀에 무를 썰어 넣어 쑨 죽을 나복죽(蘿蔔粥)이라고 한다.
무(蘿蔔)의 강도는 배추보다는 단단하지만 나무나 돌에 비하면 단단하지 못하다. 채소류로서 바닥에 떨어뜨리거나 던지면 마치 소형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박살난 무 조각이 낭자(狼藉)를 이룬다.
‘나복두선’이란 무와 같이 야물지 못한 선(禪), 단단하지 못한 선, 철저하지 못한 선을 나복두선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인가(認可)를 남발하는 선승, 수행자 지도를 잘못하는 선승도 나복두선이라고 한다.
‘벽암록’ 98칙 천평양착(天平兩錯, 천평의 두 번 실수) 공안에는 나복두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인즉슨 천평(天平)이라는 스님이 철저하지 못한 엉터리 선(禪), 야물지 못한 나복두선을 수행한 후 깨달았다는 자만심에 도취하여 가는 곳마다 함부로 지껄인다는 것이다.
“천평은 일찍이 진산(進山) 주(主) 선사를 참방한 이래, 제방(諸方)의 여러 선원을 다니면서 (엉터리 禪인) 나복두선을 배웠다. 그리하여 깨달았다는 생각이 뱃속(머릿속)에 가득 차서 가는 곳마다 함부로 큰소리 치고 있다.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天平, 曾參進山主來, 他到諸方, 參得些蘿蔔頭禪, 在皮裏. 到處便輕開大口道, 我會禪會道).
나복두로 만든 도장, 인장(印章)을 ‘나복인(蘿蔔印)’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뜻을 갖고 있는 ‘동과인자(冬瓜印子)’라는 말이 있다. 동과(冬瓜)란 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덩굴성 식물로서 여름에 노란 꽃이 피며 가을에는 호박과 같은 것이 달린다. 그것으로 만든 인장(印章), 도장이라는 뜻인데, 호박으로 만든 도장(冬瓜印子)과 무로 만든 도장(蘿蔔印)이 얼마나 단단하겠는가? 찍으려고 누르면 으스러질 것이다.
원오극근은 ‘벽암록’ 98칙 평창에서 깨달았다고 큰 소리 치고 있는 천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조롱하고 있다.
“천평은 여기저기 선원에서 호박도장을 가지고 인가해 주는 선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아가지고는 ‘나는 이제 불법의 기특한 곳을 알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고 있구나.”(只管被諸方, 冬瓜印子, 印定了. 便道, 我會佛法奇特, 莫敎人知 ‘碧巖錄98評唱’)
간화선의 거장 대혜 선사는 장사인(張舍人)에게 답한 편지(‘서장’ 張舍人 章)에서, “절대로 동과(冬瓜)로 만든 도장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면서 깨달았다고 인가해 주는 엉터리 선승들을 따르지 마십시오(切忌被邪師, 順摩, 將冬瓜印子印定) 이런 자들은 도마죽위(稻麻竹葦, 벼, 삼, 대나무, 갈대)처럼 아주 많습니다. 당신은 총명하고 식견이 있으므로 이런 악독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즉 투철하게 깨닫지 못한 자들이 무나 호박에 새긴 도장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인가해 주는 데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가 받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도 동광인자나 나복두인을 가지고 인가도장을 남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깨달음을 팔아먹는 머리 좋은 장사꾼들이다.
12. 사선(邪禪) ▲ 위로
달콤한 것이 입맛 당기기에 邪쪽에 몰려
신통·타심통·축지법은 불교아닌 도교
사(邪)는 정(正)과 항상 반대에 있다.
정(正)과 사(邪)의 싸움은 인류가 생긴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공맹(孔孟)은 의(義)를 정(正), 불의를 사(邪)로 규정했고 붓다는 희생제와 번제(燔祭)를 올리는 바라문교도(힌두)들을 어리석다고 하여 사(邪)로 규정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邪) 쪽으로 몰린다. 달콤한 것이 입맛에 당기기 때문인데 정의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용어에서 ‘사(邪)’자가 들어가면 일단은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때론 타인을 매도하기 위한 야비한 방법으로 ‘사(邪)’자를 쓰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맹종은 고래로 치자(癡者)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선(邪禪)’이란 ‘잘못된 선(禪)’, ‘삿된 수행법’, ‘삿된 선승의 가르침’을 말한다. 선의 정의에 어긋나는 선, 목적과 방법, 방향이 올바르지 못한 선이 사선이다.
사선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썼던 선승은 간화선의 거장 대혜선사(1089∼1163)이다. 그는 같은 시대, 같은 지역(항주, 영파)에서 활동하고 있는 굉지정각의 묵조선을 혹평하여 ‘묵조사선’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문제는 간화선, 대혜선사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이므로 놔두고, 여기서는 진정으로 삿된 선은 어떤 것인지 규명해 보고자 한다.
선(禪)의 목적, 참선 수행의 목적은 어리석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있다. 욕망에 오염되어 있는 이 마음을 세탁, 청정하게 하는 데 있고, 고정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해탈인이 되자는 데 있다.
교리적으로는 무상·무아·연기·중도·공(空)의 이치를 깨달아서 존재의 실상을 확실하게 파악해 보자는 데 있다(如實知見). 머릿속에 들어 있는 번뇌 망상을 비워버리는 것, 그것이 곧 공(空)이다.
선의 목적이 이와 같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엉뚱한 삿된 것을 가지고 선 수행의 목적, 또는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지도 않은 신통술 타심통 같은 것, 혹은 장생불사·신선술·기공·축지법 등 도교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또 요즘에는 귀신을 본다느니, 전생을 안다느니, 남의 운명이나 미래를 훤히 안다는 등 혹세무민의 통속적인 것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또 자나 깨나 한결같이 일심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오해하여, 실제 꿈속에서도(夢中一如), 깊은 숙면 속(寤寐一如)에서도 화두 참구가 되어야만 깨달은 것,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왜곡한다.
이런 것은 사실 육체적 신비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도교수행파(道敎修行派)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불교나 선에서 이런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삿된 가르침으로 깨달음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 ‘불성=영혼’으로 오해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고, 환영(幻影)이나 환시(幻視)가 나타나야만 깨닫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만일 영혼을 곧 불성으로 본다면 불교나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결국 영혼의 세계를 깨닫자는 것인데, 영혼의 유무(有無), 영혼의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을 알고 싶다면(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차라리 무속인을 찾아가는 것이 더 첩경일 것이다.
그 밖에 주력 수행도 이상한 신비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그 역시 삿된 것이다. 선 수행의 목적과는 180도 다르다.
13. 황양목선(黃楊木禪) ▲ 위로
오래 앉아 참선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현재에 안주하면 정신 썩고 타락해 퇴보
황양목(黃楊木)은 나무 이름이다. 회양목과(―楊木科 Buxaceae)에 속하는 관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회양목’이라고 한다. 한국의 산지에서 많이 자라는데 특히 석회암지대의 산기슭과 산중턱에서 많이 자란다. 키는 작은 것은 50센티, 큰 것은 7m 정도. 상록수라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회양목(황양목)은 나무 재질이 매우 단단하고 견고하다. 도장(인장)을 새길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일명 ‘도장 나무’라고도 한다. 또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를 황양목패(黃楊木牌)라고 하는데, 초시(初試)에 합격한 진사(進士)나 생원(生員)들이 차고 다녔다. 회양목의 용도(조각용도 등)가 매우 다양하여 공물(貢物)로 바치던 황양목계(黃楊木契)도 있었다.
나무 애기는 그만하고, ‘황양목선(黃楊木禪)’이란 근기와 자질이 매우 둔해서 오래 참구(공부)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황양목의 장점은 매우 단단한 대신, 단점은 자라는 속도가 아주 더뎌서 1년에 겨우 1촌(一寸, 약 3센티) 정도 자란다. 그런데 윤달이 든 해(閏年)는 도리어 1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빗대어 ‘진촌퇴척(進寸退尺, 한 촌 전진하고는 한 자=30센티 퇴보)’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리에 정체되어 전혀 발전이 없는 사람, 또는 아무리 오래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황양목선이라고 한다.
운허 스님 편 ‘불교사전’에는 “깨달은 곳에 주저앉아서 활용하는 솜씨가 없는 사람을 꾸짖는 말.” 그리고 ‘선학사전’에는 “수행에 정진하지 않아 퇴보한 선승(禪僧)을 가리킴”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모두 진취가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선어 가운데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100척(약 33미터)이나 되는 장대 끝(竿頭)에서 과감하게 한발 더 내 딛으라’는 뜻인데,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면 그 역시 자신을 구속하는 올가미,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내 딛었을 때(進一步)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법은 없다. 그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최고의 깨달음)라고 한다.”는 ‘금강경’의 법문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든 학자든 정권(政權)이든 간에 현 위치에서 안주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특히 정신세계는 더욱 더하여 그 자리에 안주하면 정신이 썩고 타락해 버린다. 썩으면 정화 능력을 잃고 퇴보할 수밖에 없는데,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백척간두 진일보에 대하여 ‘깨달은 이후에는 다시 중생 속으로 내려와서(진일보)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십우도에서 맨 마지막 그림인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으로 내려와 손을 내 밀라)와 같은 뜻으로, 부처가 되었다면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다시 세속으로 들어와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이다. 안주, 집착은 선의 핵심이자 목표인 공(空), 중도, 무집착의 세계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선사(1089∼1163)도 황양목선을 조롱했다. ‘대혜어록’ 17권 ‘보설’에, 단칠(斷七)이라는 시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여러 관원들과 함께 방장실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손에 젓가락을 든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화두삼매). 그때 노화상(대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자는 황양목선을 하여 도리어 쭈그러들었군”이라고 하였다. 즉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일에 열중하라는 것이다.
은나라 탕왕은 매일 같이 세수하는 대야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고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인데,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한자리에 정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4. 상사선(相似禪) ▲ 위로
관념적으로 깨달아서 무늬만 비슷한 선
오늘날 ‘할’ 남발도 여우소리만 만들뿐
가짜가 없는 나라는 없지만 중국만치 짝퉁이 많은 나라도 드물다. 심지어 소고기, 계란 같은 것도 만든다고 하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이 없을 정도다. 몇 년 전부터 중국정부는 가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대국 기질이 있어서, 혹 그 조차도 짝퉁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대체로 진실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나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상품도 짝퉁이나 가짜는 대체로 고가품에 집중되어 있다. 싼 물건에는 짝퉁이 별로 없는데 노력과 대비해 보았을 때 경제적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무형적인 경우는 종교계에 많이 분포해 있다.
선에도 짝퉁선이 있다. 이를 상사선(相似禪)이라고 한다. ‘상사선’이란 참된 선(禪)이 아닌 가짜 선, 사이비 선, 엉터리 선승을 가리킨다. 진실한 깨달음이 아닌 가짜 깨달음, 지식적 관념적인 깨달음, 또는 무늬만 비슷한 선이 상사선이다. 곧 짝퉁선으로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깨달은 척하는 경우(사기)와, 또 하나는 자기는 분명히 깨달았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엔 아직은 깨닫지 못한 것(자기도취 혹은 착각), 또는 덜 깨달은 것을 말한다.
상사선의 어원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상사각(相似覺)에서 비롯되었다. 아직 완전히 대승의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 상사각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거친 분별과 집착하는 모습은 떠났기 때문에 상사각이라고 한다(以捨麤分別執着相故 名相似覺)’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거친 분별과 집착하는 모습(麤分別執着相)’이란 아직 미세한 것까지는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지만, 큰 것들은 제거된 상태, 혹은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에서는 ‘대승기신론’의 해석보다 훨씬 더 낮추어 사용하고 있다. 즉 사이비선, 짝퉁으로 보고 있는데, 대혜 선사(1089∼1163)는 ‘서장’에서 고산체 장로에게 답한 편지(答鼔山逮長老)에 다음과 같이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근래 불법(佛法)을 아주 헐값으로 팔고 있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도처에서 한 무더기 한 짐씩 상사선을 배워가지고 팔고 있는데, 잠시라도 종사(宗師)들이 방치해 두면 마침내 주거니 받거니 헛소리를 이어받아서 서로 인가해 주며 후학들을 호도하고 속여서 점점 바른 종지를 사멸시키고 있습니다. 직지인심의 선풍을 쓸어버리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불법(佛法)을 아주 헐값으로 팔고 있다’는 말은 사이비 선승들이 짝퉁선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깨달았다고 인가(認可)를 해 주는 것을 말한다. 깨닫지도 못한 자들이 상사선(相似禪)을 가지고 인가증명서를 남발하여 선의 값어치 없는 물건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고봉 원묘의 제자 천목 중봉 화상(1243~1323)은 “만약 깨달은 것도 없이 함부로 자의적으로 선을 말한다면 이것은 모두 업식을 희롱하여 생사의 업을 맺게 되는 것이니, 그는 윤회의 그물로 들어가 고해에서 죄과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선원에서는 상사선을 공부한 이들이 많은데, 그들은 단지 문장을 줄줄 해설하는 것을 가지고 최고로 삼고 있다. 번뇌 망상이 흘러 마르지 않는데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잘못된 앎, 잘못된 깨달음이라고 하나니, 옛 선승들은 이것을 일러 ‘들여우의 침(타액)’이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서 선을 하는 이들 가운데는 종종 불립문자의 미명 하에, 조사어록도 읽지 않고 자의적으로 선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이 많다. 올바른 선지(禪旨)나 지혜, 안목, 정법안장도 없으면서 통속적인 법문과 무용(武勇) 같은 수행담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할(喝)을 남발하여 사자 소리(獅子吼)를 여우 소리로 만들고 있다.
15. 잔자선(剗子禪) ▲ 위로
空 잘못알아 일없이 세월만 보내는 선승
선승의 밥 값은 본래면목을 제시하는 것
평소 ‘조사선·간화선·묵조선’ 이런 말은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잔자선(剗子禪)’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금시초문. 필자 역시 최근에 들었다.
‘잔자(剗子)’란 풀을 뽑거나 김을 맬 때 사용하는 호미를 가리킨다. 아주 작은 농기구로 그 능력은 삽이나 괭이에 못 미치지만, 흙을 굵어내는 등 섬세한 작업에는 아직 호미를 당할 농기구가 없다.
잔자선(剗子禪)이란 호미가 흙을 긁어내고 땅을 파내듯이, 모든 것을 파내고 깎아 내려서 일체를 허무로 보는 선(禪), 즉 일체를 공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일체개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좋은데, 공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 허무, 허무주의에 빠져서 전혀 노력, 정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이야. 다 쓸데없는 것이야’하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세월만 보내는 선승,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선승을 가리킨다. 철학적인 용어로는 니힐리즘(nihilism), 즉 허무주의가 잔자선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낙공(落空, 공에 떨어지다)’ 또는 ‘공망(空亡, 공해서 없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공(空)의 논리 속에 수장(收藏), 매몰시켜 버리는 잘못 된 선을 가리킨다.
공(空)의 정의는 ‘나(我)’라고 하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을 공한 것으로 보는 아공(我空)과, 일체 사물, 즉 객관적인 것들도 모두 공으로 보는 법공(法空)이 있다. 이 두 가지를 합한 말이 일체개공인데, 초점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리적인 현상을 공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번뇌 망상과 분별심 등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지 말고 공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 인식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마음 작용, 곧 생각(의식)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유심조이며, 착시현상, 또는 아지랑이 현상으로, 자성이 없는(無自性) 공한 것(空)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았을 때 비로소 집착하는 마음에서 해탈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잔자선에 대해 묘심 거사에게 행한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서 항상 묵묵히 비춘다(黙照, 진리와 하나가 됨)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 원숭이(번뇌 망상)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그놈이(번뇌 망상) 날뛸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옛 선승들은 이것을 공망(空亡, 허무)에 떨어진 외도이며, 혼(魂)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살아 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진실로 마음의 생사(분별심)를 끊고 마음의 때를 씻고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원숭이(분별심, 중생심)를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야만 합니다. 만일 오로지 원숭이 목줄을 꽉 붙잡아 마음을 조복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집착이 정도를 지나친 것이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정안(正眼)으로 본다면 이들은 모두 천마외도이고 망량(魍魎, 도깨비 즉 망념)이며 요정(妖精, 망상)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불교의 것들이 아닙니다’ (‘대혜어록’ 22권 示妙心居士)
사실 우리나라에도 의외로 공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이 많다. 공의 진정한 뜻은 번뇌 망상을 비우라는 것인데, 100프로 오해하여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空亡, 허무주의)인데, 뭐 할 것(노력 등을 말함)이 있느냐?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빈둥빈둥 밥이나 축내면서 허송세월하는 이들이 많다. 불제자로서 사명감이나 역사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날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왔다갔다 놀기만 하는데, 밥값은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선승의 밥값은 본래면목을 제시하는 것이다.
16. 광선(狂禪) ▲ 위로
경전·계율 무시 마구잡이 행동 일삼는 납자
공부도 않는 자들의 경허 스님 흉내는 안돼
무엇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언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가지 용어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말을 썼는지 그 의미와 의도, 그리고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나 인식, 사상이나 철학은 언어문자를 통해서 표출된다. 그러므로 언어문자를 제쳐놓고 해석, 풀이한다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광선(狂禪)이란 ‘미친 선’이라는 뜻이다. ‘광선’이라는 두 자(字)에서 주어는 ‘미칠 광(狂)’이다. 미쳤다는 것은 정상에서 이탈한 정신 상태, 정신착란 혹은 그런 상태를 말한다. 이에 대해 중국 남조(南朝) 제나라의 역사를 적은 책인 ‘남제서(南齊書)’에는 ‘태만교자 위지광(怠慢驕恣 謂之狂)’이라고 말하고 있다. ‘태만하고 교만, 방자한 것을 광이라 한다’는 것인데, 매우 옳은 정의이다.
광선 혹은 광선자(狂禪者)는 ‘비정상적인 언행을 하는 선승’ ‘광대 같은 미치광이 납자’를 가리킨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경전, 계율, 교학 등을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행동을 일삼는 납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음주(飮酒)와 식육(食肉), 그리고 섹스가 반야지혜를 수행하는데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손이 닿는 대로 먹고 마시고 껴안고 발이 닿는 대로 ‘갈 지(之) 자’ 걸음을 한다. 그 밖에 선정(禪定)은 하지 않고 문자나 지식만을 탐독한 결과 오만방자한 것도 광선이고, 지혜만 있고 선정력(禪定力)이 없는 광혜(狂慧)도 광선의 일종이다.
천태종 출신 적진(寂震)은 ‘금강삼매경 통종기(通宗記)’에서 다음과 같이 광선을 비판한다.
“달마의 선종은 오직 명심견성(明心見性)만 최고로 여긴 나머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대 장교(一大藏敎, 경전)를 부질없는 군소리로 여겨서 무엇 때문에 장황하게 49년 동안 말할 게 있느냐고 한다. 아! 말세의 광선자들은 교학을 내팽개치고 망령되이 반야를 말하며, 그 행동은 범부와 같은데도 곧 제불(諸佛)과 견주어 같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또 여래께서 말씀하신 경전과 가르침은 다 문자에 불과하다고 하니 어찌 언어문자를 떠나서 이치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상에서, 광선승(狂禪僧)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장경 등 경전을 아주 하찮게 여긴 나머지 종잇조각이나 휴지조각, 또는 쓸데없는 말, 부질없는 말을 수록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와 조사는 성스러움의 대상이지만 성스러움에 갇히면 진면목, 실체를 볼 수 없다’는 말을 곡해하여 예불도 하지 않고 존경심을 나타내도 않는다. 이런 행동은 주로 문자를 모르는 무식한 납자, 참선도 하지 않는 건방진 납자들이 깨달은 척 그런 짓을 한다.
광선승은 한때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1920∼30년대) 불교잡지를 보면 “선승이라고 하는 자들이 너도나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가리켜 ‘구린내 나는 똥 무더기’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비판하고 있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특히 해방 후 선이 다시 일어나던 1960∼70년대는 이런 말이 더욱 유행했다.
근래 광선의 대표적인 인물은 경허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허화상은 기질이 매우 호탕하여 술과 고기는 다반사(茶飯事)로 여겼다. 마을에서나 저잣거리에서나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드셨는데, 여색(女色)에도 무애자재했다.
윤리와는 거리가 먼 광선을 일삼았는데, 무애자재한 세계, 깨달음의 세계라는 미명 하에 윤리 도덕을 무시한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윤리 도덕을 경시하고 몰인격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광기(狂氣)에 지나지 않는다.
무애자재란 욕망과 번뇌, 망상으로부터 자재함을 뜻하는 것이지, 주색잡기를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경허 스님의 경우 깨달음이 있어서였는데, 공부도 하지 않은 자들이 너도나도 흉내 내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17. 약홍은선(藥汞銀禪) ▲ 위로
수은이 순은 아닌 것처럼 내용없는 짝퉁선
환영을 깨달음인양 착각하여 날뛰는 경우
문제가 있는 선(禪)을 찾다보니 정말 별난 선도 다 있었다. 약홍은선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그 명칭이 하도 특이해서 되래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먼저 ‘약홍은’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아야 할 것 같다. 약홍은(藥汞銀)은 수은(水銀, mercury)을 가리킨다. ‘홍(汞, 수은 홍)’이라고도 하고 ‘약홍은’이라고도 한다. 수은은 넓은 의미에서는 은(銀)의 일종이긴 해만 순도가 낮은 은(銀)으로 순은(純銀)은 아니다.
고대 중국의 천자들은 장생불사를 위하여 수은을 먹기도 했는데, 진시황은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고 한다. 수은은 주로 진사(辰砂)를 불에 녹여 만드는데, 온도계 등 열(熱) 전달 용도로 많이 쓴다.
약홍은선(藥汞銀禪)은 ‘짝퉁선(禪)’ ‘가짜선(禪)’ ‘사이비선(禪)’을 가리킨다. 수은이 은의 일종이긴 해도 순은(純銀)은 아닌 것처럼, 약홍은선 역시 진정한 선이 아닌 짝퉁선, 사이비선을 가리킨다. 겉모양새, 행태는 선(禪)인 것 같은데 내용물 없는 엉터리 선으로, 다른 말로는 상사선(相似禪, 사이비선)이라고도 한다.
요즘 유명 메이커의 짝퉁 상품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초심자로서는 이런 짝퉁선, 가짜선, 사이비선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로 가짜나 짝퉁일수록 말이 거창하고 요란해서 빨려 들어가기 쉬운데, 문제는 불확실한 지식,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수행법, 얼치기, 엉터리 깨달음을 가지고 다 알았다고 하면서 도인 행세, 큰스님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언론이나 인터넷 등에 그럴싸한 글이나 수행담, 체험담을 올려서 마치 자신이 도인(道人)인양 포장한다. 이미 열반하신 어느 선승으로부터 사사했다느니,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느니, 몇 년 동안 장좌불와, 용맹정진 등을 했다고 하면서 장막을 친다. 심지어는 전생을 안다느니, 미래를 훤히 내다본다느니 하는 등 그럴싸한 말로 초심자를 홀린다.
또 이들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면서 상대를 카리스마로 제압하여 믿도록 하는데, 그런 다음에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서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금전을 요구한다. 당연히 많이 내면 빨리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이런 엉터리, 짝퉁 수행법, 약홍은선 등이 적지 않다.
운서주굉(1535∼1615) 선사가 편찬한 ‘선관책진’에는 초석범기(1296∼1370) 선사의 법문이 실려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약홍은선(짝퉁선, 엉터리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약홍은선자들은) 입만 열면 자신이 곧 진짜 선승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것이 선입니까’하고 물으면 어름어름 하다가 마침내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 어찌 부끄럽고 딱한 노릇이 아니겠소. 버젓이 부처님 밥을 처먹고 있으면서 본분사(本分事, 선의 핵심)는 모르고 너도나도 세속적인 지식이나 글을 가지고 큰 소리 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소.
또 어떤 자는 부모 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과 같은 뜻임) 소식은 규명하려고 하지 않고 방아나 찧으면서 복이나 짓기를 바라며, 업장을 참회한다 하니, 참으로 도(道)와는 너무도 멀구나. (…) 이와 같은 선(禪)을 약홍은선이라고 칭하나니 이 은(銀)은 진은(眞銀)이 아니다. 불에 한번만 들어가도 곧바로 녹아 흘러내리고 만다(恁麽參的 是藥汞銀禪, 此銀非眞, 一鍛便流. ‘선관책진’ 초석범기 법문)
엉터리 선사들은 선의 핵심, 선의 진수(眞髓)가 뭐냐고 물으면 이런 말 저런 말로 얼버무린다.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진정견해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다른 경계 즉 환영(幻影)이나 환시(幻視) 혹은 마음이 조금 평온해 진 것을 가지고 곧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날뛰는 경우가 허다하다.
18. 하마선(蝦蟆禪) ▲ 위로
두꺼비·청개구리가 팔짝 뛸 줄만 알 듯
관념에 사로잡혀 역량이 전혀없는 선승
‘하마’라고 하면 우리는 언뜻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동물로, 입과 머리 등 몸집이 매우 큰 하마(河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하마(蝦蟆)는 양서류, 파충류의 하나인 두꺼비와 청개구리를 함께 가리킨다.
두꺼비는 우리나라에도 많다. 야행성이라서 주로 밤에 활동하는데, 후미진 곳에 있다가 작은 동물이나 곤충 등이 나타나면 번개같이 잡아먹는다. 두꺼비는 혓바닥이 매우 길고 또 혀에는 강력 본드 같은 끈적끈적한 액이 있어서 ‘쭉’하고 내밀면 10센티 거리에 있는 먹잇감도 순식간에 딸려 들어간다.
두꺼비가 혓바닥을 내밀어 먹잇감을 잡아채는 속도가 0.5초 정도라고 한다. 특히 두꺼비는 여름날 밤에 전깃불을 켜 놓고 있으면 날아드는 날파리나 불나방, 하루살이 등을 잡아먹기 위해 나타나는데, 필자는 처음 그 광경을 보고 섬뜩할 정도로 놀랐다. 마치 내가 딸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두꺼비(蝦蟆)는 행동이 매우 느리다. 굼벵이와 같은 속도라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답답할 정도이다. 청개구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 녀석들의 행동반경이 약 1.5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이 녀석들도 비장의 무기를 하나 갖고 있는데, 상황이 급하면 ‘팔짝’ 하고 뛸 줄은 안다. 그런데 그 기술이 단발성으로서 연거푸 뛰지도 못하고 멀리 뛰지도 못한다. 간혹은 착지 기술이 부족해서 전복사고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몸뚱이를 바로 하는 데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마선(蝦蟆禪)이란 두꺼비나 청개구리가 행동할 때 한갓 팔짝 뛸 줄만 알고 다른 행동은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처럼, 하나만 고집하여 다른 것은 전혀 모르는 선승, 자유자재한 살림살이가 없는 선승,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선승, 역량(力量)이 전혀 없는 선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깨달아도 수행자들을 지도할 능력이 없는 선승을 가리키는데, 이는 오로지 좌선만 했고, 학문이나 교학 등 지식을 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맹꽁이 같은 천성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사 임용고시에는 합격했으나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선생과 같다. 이런 이들이 학인들이나 납자들을 제접, 지도하게 되면 편협한 지도를 하게 되어 결국 납자들을 망치게 된다.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선(禪)처럼 경전이나 어록은 일체 보지 말고 오로지 앉아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는 교학적, 학문적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견(正見)과 정법안(正法眼)이 없어서 맞지도 않는 말을 마구잡이로 지껄이고 있다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선어에 ‘하마구(蝦蟆口)’라는 말이 있다. ‘두꺼비 입’이라는 뜻으로 하마선과 같은 말이다. 한두 가지 법문만 할 줄 알고 다른 법문은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 판에 박은 대로 법문하는 것, 또는 알맹이 없는 말을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또 ‘사하마(死蟆蝦)’라는 말이 있다. ‘죽은 두꺼비’라는 뜻인데, 역량이 충분하지 못한 선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살아 있는 두꺼비도 걸어가는 것을 보면 답답한데 한여름 죽어 누워 있는 두꺼비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雲門) 或云 佛法兩字拈却成 得箇是麽. 代云 死蝦蟆’(雲門錄 中)
선은 집착, 주의(主義) 등 고정관념을 부정하고 무집착, 중도를 추구한다. 집착이나 고정관념은 해탈이 아닌 구속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구백비(四句百非, 모든 것을 부정함) 곧 중도의 논리이다. 또 선은 어떤 실체를 부정하고 무실체(공, 무아)에서 진리를 찾는다.
그래서 ‘몰저선(沒底禪, 밑 없는 배)’, ‘무영탑(無影塔, 그림자 없는 탑)’, ‘몰종적(沒蹤迹 자취가 없다)’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하마선(蝦蟆禪)은 얼치기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조차 미혹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혼자 깊은 산속에서 살아야 한다.
19. 맹선(盲禪) ▲ 위로
법문도 못하고 수행자 지도도 못하는 선
선수행 핵심은 장좌아닌 법안 갖추는 것
맹(盲)은 눈이 먼 것,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글자를 낱낱이 해체하여 풀이하는 것을 ‘파자(破字, 글자를 쪼개다)’라고 하는데, 맹(盲)’ 자를 파자하면 ‘죽(亡)은 눈(目)’, 혹은 ‘눈(目)이 사망한 것(亡)’을 뜻한다.
파자는 주로 필자처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데, 한자가 상형문자이므로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맹목(盲目)은 앞뒤를 가리거나 사리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맹신(盲信)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고 무작정 믿는 것을 말하고, 맹점(盲點)은 어떤 일에 결경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을 말한다. 멍청한 것을 ‘맹하다’고 하듯이 ‘맹(盲)’ 자 속에는 무지와 멸시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맹선(盲禪)’이란 소견(所見), 지견(知見), 정견(正見)이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어리석은 선승, 안목 없는 선승을 가리키는 말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지만, 아직 눈이 열리지 못한 것, 개안(開眼)하지 못한 것을 폄하하는 말이다. 맹선은 교학적, 학문적인 바탕 없이 무작정 앉아 있기만 했기 때문인데, 절구통처럼 앉아 버티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나 정견, 정법안이 전혀 열리지 않아서 법문도 맹꽁이처럼 한 가지 외에는 못하고 수행자를 지도할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천태지자대사는 ‘관심론’에서 “와서 법을 구하는 모든 이들을 보면 삼매를 닦아서 선정(禪定)을 얻는 데만 힘쓰고, 관심에 대하여 물으면 전혀 모른다. 맹선으로 소견이 없다(諸來求法者, 修三昧得定. 不知問觀心, 盲禪無所見)”라고 하여 좌선, 선정제일주의를 비판하고 있는데, 마음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목 또는 지견(知見)이 없는 선승을 ‘미려마라(瞇黎麻羅)’라고 한다. ‘미려’는 애꾸눈, 사팔뜨기이고, ‘마라’는 색맹(色盲)으로, 식견이 없는 자, 안목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벽암록’ 51칙 평창을 보도록 하겠다.
선의 근원(宗教)을 확립하고자 한다면 안목 있는 사람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진(前進)과 후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하고, 죽이고(殺, 把住) 살리고(活, 放行), 사로잡고(擒, 把住) 놓을 줄(縱, 放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애꾸눈이나 사팔뜨기, 색맹(色盲)처럼 안목이 없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마구잡이로 묻고 아무렇게나 답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콧구멍(본래면목)이 자신에게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손 안에 있는 격이나 마찬가지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大凡扶豎宗教, 須是辨箇當機, 知進退是非, 明殺活擒縱. 若忽眼目瞇黎麻羅, 到處逢問便問, 逢答便答. 殊不知 鼻孔在別人手裏. ‘碧巖錄’ 51則)
또 안목이 없는 것을 ‘당착노주(撞著露柱)’, ‘사한(死漢)’이라고도 한다. ‘당착노주’란 눈앞에 노주(露柱, 기둥)가 있는지도 모르고 가다가 머리를 부딪히는 것을 말하고, ‘사한(死漢)’이란 ‘죽은 놈’이라는 뜻으로, 참선학도(參禪學道)에 눈이 뜨이지 않은 선객, 즉 맹선(盲禪)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의 여러 선어에서도 본다면 선수행의 핵심은 고목처럼 오래 앉아 있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지견, 안목, 정안(正眼), 법안(法眼)을 갖추는데 있다. 그래서 임제의현은 올바른 견해 즉 진정(眞正)한 견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척도는 좌선의 다소(多少) 여부를 가지고 판가름해서는 안 되고 정법안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어리석게도 절구통처럼 오래 앉아 있는 것, 맹선(盲禪)을 가지고 수행의 척도로 삼고 있다. 주로 과거 어느 선승 밑에서 두들겨 맞으면서 열심히 참구했다는 것만 강조한다. 유명한 선승을 등에 업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고하지 말고 자기의 법력, 능력으로 설 자리를 찾아야 한다.
20. 일두피선(一肚皮禪) ▲ 위로
제구실 못하는 어리석은 선승 얕잡는 말
깨달았다 착각해 아만심만 가득한 납자
‘일두피선(一肚皮禪)’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이 네 자의 뜻(字意)을 정리한 다음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일(一)은 본래는 수사(數詞)인데, 여기서는 부사로 ‘한낱’, ‘그저’를 뜻한다. 두(肚)나 두피(肚皮)는 위(胃), 배(腹), 뱃가죽으로, ‘밥통’ 또는 ‘한낱 밥이나 축내는 사람’이라는 뜻하고, 같은 말로 두리(肚裏, 뱃속), 두피리(肚皮裏, 뱃가죽 속)가 있는데, 심중(心中), 즉 마음속을 뜻한다. ‘벽암록’ 51칙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이 납자(스님)는 암두가 짚신을 신은 채 그들의 뱃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녔는데도 조금도 모르고 있구만.” 타인이 짚신을 신고서 자기의 뱃속을 휘젓고 다녔는데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매우 딱한 사람이다. 알아차리자면 제3의 눈 즉 통찰력과 지혜의 눈(慧眼)이 있어야 한다.
결국 ‘일두피선’이란 우리말로 표현하면 ‘밥통선’이라는 뜻이다. 즉 밥만 축내고 성과는 없는 것, 제구실을 못하는 어리석 선승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아둔한 이나 안목이나 지견 또는 정안이 없는 이를 가리킨다. 또 알기는 많이 알고 있어도 자유 자재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두피선과 비슷한 말로는 죽반승(粥飯僧), 반대자(飯袋子)가 있다. 죽과 밥을 축내는 선승(당송시대 선종사원에서는 아침에는 죽, 점심은 밥을 먹었다)이라는 뜻인데, 이를 밥자루, 밥통이라고 빗대기도 했다.
원오 극근의 ‘심요(心要)’ 한 단락을 보도록 하겠다. “황룡(黃龍) 혜남선사가 지난날 자명석상(慈明石霜)선사를 뵙기 전에는 한낱 밥통선((一肚皮禪)만 알고 있었다(正眼이 없었다는 뜻). 취엄(翠巖)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그로 하여금 자명선사를 찾아가도록 했다. 그는 거기서 오로지 현사가 ‘영운선사가 아직 투철하게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 곳을 끝까지 참구했는데,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기왓장 부서지듯 얼음 녹듯 화두가 풀려 마침내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30년 동안 이 도장으로 뭇 납자들의 알음알이(지식의 잔꾀)를 제거해 주었다. 병을 낫게 하는 데는 많은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을 찌르는 긴요한 곳에는 한 방이면 된다. 어찌 많은 가르침(불법)이 필요하겠는가?”
훌륭한 한의사는 여기저기 침을 놓는 것이 아니다. 혈맥의 중요한 곳에 한두 방을 놓을 뿐이다. 유명한 정비사는 엔진 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고장 난 것인지 100% 안다. 깨닫게 하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정신을 차리게 하는 한마디면 된다. 방장이나 조실의 역할은 바로 그 한마디이다.
일두피선이라는 말 속에는 앞에서 말한 뜻 외에도 ‘뱃속에 가득 처넣다’, ‘잔뜩 처넣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저것 잔뜩 들어서 아만심, 자만심이 부처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것, 스스로 깨달았다고 인정 한 결과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된 것이다.
‘벽암록’ 20(龍牙西來意 공안) 본칙 평창에 나오는 선화(禪話)를 보도록 하겠다.
“용아(龍牙)는 타고난 기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항상 일두피선(一肚皮禪), 뱃속에 자기가 최고라는 자만심이 가득한 것)을 메고 행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장안에 있는 취미선사를 찾아갔다.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취미가 말했다. ‘나에게 선판(禪板, 방선 시간에 등을 기대고 쉬는 판)을 건네주게.’ 용아가 선판을 건네주자 취미는 그 선판을 받자마자 용아를 후려쳤다.”
취미선사가 선판으로 용아를 친 것은 용아의 육체를 친 것이 아니고, 용아의 자만심을 친 것이다. 요즘도 한낱 밥통이나 짊어지고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결제가 되면 선원을 찾고, 해제가 되면 어디론지 사라진다. 아무런 생각도, 문제의식도 없이 이곳저곳 선원을 순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가지고는 백날을 다녀도 지견, 정안이 열리기는커녕 자만심만 쌓여가게 된다. 커리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운 시키는 한방이 중요하다.
21. 골동선(骨董禪) ▲ 위로
오래되고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는 선
선은 과거 가치관과 기존 관념도 거부
골동품(骨董品)은 오래되어서 희소가치가 있고 또 예술적 가치도 높다. 고완(古玩)·고동(古董)이라고도 하며, 요즘은 ‘골동’이라는 말 대신 주로 ‘고미술품’이라고 부른다. 한편 ‘골동(骨董)’이라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쓸모없는 낡은 것이나 그런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처음에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문화 유물들만을 지칭했으나 점차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오래된 장식품들을 모두 가리키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중국에서 ‘골동’ 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송대(宋代)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골동품 수집과 완상(琓賞)이 교양의 하나였다. 명대(明代)의 문인 동기창(董其昌)도 골동을 매우 좋아했고, ‘부생육기’의 작자 심복과 비운의 아내 운이는 둘이서 매일 같이 시장에 나가 싼 공동품을 사다가 매만지는 것이 낙이었다.
이렇듯 골동품은 적어도 100년 이상은 지나고 예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물건이라야 한다. 반면 ‘골동선(骨董禪)’이란 ‘오래되고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는 선’이라는 뜻이다. 낡고 닳아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들끓는 번뇌 망상과 변화된 현실의 삶에 조금도 대처하지 못하는 선, 옛말이나 되풀이하는 무력한 선을 이른다.
선은 응고되어(執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을 스스로 거부한다. 과거의 통속적인 사고나 생각에 고착화되어 본드처럼 붙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과거의 가치관은 물론 기존의 관념도 거부한다(無執着). 선은 항상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日日是好日). 그것이 자신을 고정된 틀에 매어 있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空, 中道). 선에서는 그것을 ‘깨어 있다(惺惺着)’라고 한다.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운허 편 ‘불교사전’ 에서는 골동선에 대해 ‘경심(輕心,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과 만심(慢心, 아만)으로 기운 없이 참선하는 모양을 꾸짖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경심과 아만심이 가득차서 활발발하게 참선을 하지 못함을 꾸짖는 말’이라는 뜻인 것 같다.
운문선사는 골동선에 대하여 ‘운문광록’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선을 도둑질 하는 놈들(掠虛漢, 사기꾼 등)은 남이 뱉은 침이나 먹고(남의 말, 남의 법문) 한 무더기 골동(낡아빠진 옛말)이나 기억하여 가는 곳마다 ‘나는 선문답을 다섯 번, 열 번 이해했다고 자랑하고 떠들어 댄다.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물어서 이런 식으로 겁(劫)을 지나도록 논해보았자 꿈에서도 도(道)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러 선어록의 갖가지 법문 방식을 졸졸 외워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법문이나 하고 선승인 척 삼배(三拜)를 받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천 년 전 당송시대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시대만 다를 뿐 사람의 심성은 불변인 것 같다. 운문선사는 이들을 가리켜 ‘남이 뱉은 침이나 핥아 먹고 낡은 골동이나 복창(復唱)하여 팔아먹는 자들이라고 평한다.
‘선문염송’ 1419칙에도 골동선에 대한 공안이 나온다.
오조 법연(五祖法演)이 외출했다가 들어와 법문을 하였다.
“밖에 나간 지 반 달 동안 눈으로 콧구멍(본래면목)을 보지 못했다. 조사선(祖師禪)을 잃고 골동품(骨董品) 하나를 주워왔다. 자, 말해 보라. 어디에 둘까? 한몫은 석가부처님께 바치고, 한몫은 다보불탑에 바치리라.”
골동품, 고미술품은 한인(閑人)이 쳐다보는 완상(玩賞)의 대상이다. 그러나 선은 완상의 대상은 아니다. 선은 맑디맑은 가을날이다. 안개 낀 날의 아련한 감상적 풍조가 아닌, 청아한 가을날 저녁이다. 티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날, 번뇌 망상이 확 걷혀버린 만리무운(萬里無雲)이다. <끝> ▲ 위로
[출처: 법보신문]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