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9. 찬란한 중국의 석굴 - 둔황, 윈강, 룽먼
간절한 발원…거대한 석굴 속에 꽃피운 佛心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된 이래 불교석굴은 중요한 수행처이자 기도처였다. 본래 석굴은 고온다습한 기후를 피해 최적의 수행환경을 찾기 위해 비롯됐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2세기 경 부터 인공적인 석굴사원을 개착하기 시작했고, 이는 서역을 거쳐 중국에까지 이어졌다. 물론 인도 석굴은 중국에 들어와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5~8세기 전성기 … 중국불교 변화 드러내며 다양하게 분포
‘최초’ 둔황석굴 북조부터 명나라 때까지 조성 ‘문화용광로’
사진: 윈강 석굴 20굴의 노사나불
3세기경에 시작된 중국석굴은 5~8세기경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중국의 석굴은 다양한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분포되므로 이를 다 이야기 한다는 것은 지면 관계상 어려운 일이다. 서쪽의 둔황(敦煌)석굴에서 출발해 란저우(蘭州)의 빙링스(炳靈寺)석굴, 톈수이(天水)의 마이지산(麥積山)석굴, 산시(山西)의 윈강(雲岡)석굴과 텐롱산(天龍山)석굴, 허난(河南)의 룽먼(龍門)석굴과 공센(鞏縣)석굴, 스촨의 다주(大足)석굴 등의 유명한 석굴뿐 만이 아니라 무수한 중형 소형의 석굴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중국 최초의 석굴은 허시후이랑(河西回廊, 중국 간쑤성(甘肅省) 서부의 치롄(祁連)맥 북록에 동서로 이어져 있는 오아시스 지대로 중국본토와 서역을 잇는 통로)서쪽 둔황지역에 있는 둔황석굴이다. 둔황석굴은 막고굴(莫高窟, 모카쿠)이라고 불린다. 막고굴은 본래 막(莫)자가 한자의 사막을 뜻하는 막(漠)자였다고 한다. 사막의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는 뜻으로 사막에 솟아 있는 명사산(鳴沙山)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막고굴은 ‘이군막고굴불감비(李君莫高窟佛龕碑)’에 전진 건원2년(366) 건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막고굴을 개착한 이는 낙준(樂)인데 명사산에 이르렀을 때 그 찬란한 금색 빛이 마치 천불의 형상과 같아 석굴을 팠다고 한다. 이러한 석굴은 선수행 도량으로 건립되었을 것이다. 둔황지방은 지금도 그렇지만 서역과의 가장 중요한 교역통로였다. 때문에 서역으로부터 전해진 석굴의 양식이 둔황에 소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둔황석굴은 흔히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북량시기를 시작으로 북위 등 북조왕조와 수, 당으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끊이지 않고 석굴불사가 이뤄졌다. 벽화를 떼어 5m 높이의 벽으로 이어 놓는다면 25Km나 되는 방대한 규모의 벽화와 1000여개의 석굴, 2415개나 되는 채소(彩塑)조각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굴은 북조 때 36개, 수대의 110개, 당대에는 247개, 오대에서 명대까지 100여개의 석굴이 조성돼 전해지고 있다. 석굴은 승원굴(차이티야형 석굴, 승려들의 수행의 장소)과 예배굴(차이티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굴)이 복합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인도와는 달리 승원굴의 경우에도 기도처를 겸한 양상이 나타난다.
둔황석굴에서 가장 놀라운 곳은 16번 굴 안에 위치한 17번 굴이다. 장경동(藏經洞)이라고 불리는 이 석굴에서는 ‘둔황문서’라고 불리는 수많은 중국어, 티베트어, 기타 소수민족의 문서 사본이 발견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둔황석굴에 각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은 채소라고 하는 독특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둔황석굴이 개착된 명사산의 암질은 역암질로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바위다. 여기에 조각을 하기 위해 나무로 틀을 세우고 풀을 묶어서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다시 색을 입힌 방식이 채택됐다. 이렇게 해서 화려한 색채로 가득 찬 둔황의 조각이 나타난 것이다.
초기에 만들어진 굴 제일 뒤편에 감실을 파고 불상을 안치한 272번 굴, 275번 굴과 중심에 탑주(塔柱)를 세운 254.427.332굴, 우물형의 도안을 배치한 249.305.294.220.172번 굴을 비롯해 무수한 석굴들이 각 시기의 찬란한 문화를 뿜어내고 있다. 둔황석굴은 서역지역의 양식을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또 각 시기를 대표하는 둔황 지배세력의 영향을 받은 무수한 양식의 석굴이 혼재해 수많은 양식적 특징과 문화적 특성이 어우러져 사막에 나타난 문화의 용광로 구실을 하고 있다.
▶룽먼석굴 빈양동(賓陽洞)은 북위시대 때 인부 80명이 동원대 조성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둔황석굴에 비해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위치한 윈강석굴은 위진 남북조시기에 북방을 지배한 북위(北魏, 386~534)의 유산이 새겨진 석굴이다. 윈강석굴은 북위 태무제의 폐불(廢佛)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 수도였던 평성부근의 무주산에 개착한 석굴이다. 〈위서〉 ‘석로지(釋老志)’에 의하면 폐불이 끝난 흥광(興光, 454) 이후 태화원년(太和 元年, 477)에 이르기까지 수도 내의 사찰은 100곳에 달했고 스님의 수는 2000여 명이나 됐으며, 지방 사찰은 6478곳으로 늘어나고 스님의 수는 77만7258명이나 됐다고 한다.
남조(南朝)에서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양나라(梁) 시기에도 사찰이 2846곳, 스님의 수가 8만2700여 명이었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사찰의 수가 두 배 이상이고 스님의 수는 비교도 안 된다. 활발한 불교활동을 기반으로 당시의 북위불교계의 대표였던 담요(曇曜)는 거대한 불사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윈강석굴이다. ‘담요(曇曜)는 황제에게 아뢰어, 수도의 서쪽 무주색(武州塞)의 산 석벽을 개착하여 다섯 개의 굴을 여니, 각각 불상 1구씩을 새겼다. 높은 것은 70척이나 되고 다음은 60척이며 조각의 기위(奇偉)함은 일세에 으뜸이라 하였다.’ 라고 〈위서〉 ‘석로지(釋老志)’에 기술돼 있다.
윈강석굴 거대 불상 특징…‘北魏 불교의 팽창’반영
룽먼석굴은 불상만 14만존…새로운 표현기법 눈길
대체적으로 윈강석굴이 개착되는 시기는 460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석굴은 양식상 세 시기로 구분된다. 1기에 해당되는 담요오굴(曇曜五窟)은 16굴에서 20굴까지다. 담요오굴에는 굴 안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상이 조각돼 있다. 석굴조상의 거대한 규모는 북위불교의 팽창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는 불상조상도 그대로 반영됐다.
2기의 석굴 조영은 1기에 비해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안정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북위의 천도 시기와 연관돼 불상이 변하는데, 북위의 정책변화와 맞물린 중국화 된 불상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불상은 〈법화경〉이나 〈유마경〉 같은 불경에서 전거했다. 가늘고 길면서 우아한 모습과 불의(佛衣)에 나타난 포의박대(褒衣博帶, 중국식 의복으로 넓은 소맷자락과 허리띠를 두른 복장) 등은 화화양식(華化樣式, 북위 시대 중국화 된 불상의 양식)이 현저히 진행됐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담요오굴에 이어서 조영된 것은 7, 8굴 및 9, 10굴로 각각이 쌍을 이룬다. 이 네 굴의 조형에는 이전 시기와 같은 박력은 없다. 그러나 고졸(古拙)한 미소를 띠고 있는 폭이 넓고 둥글며 생기 있는 얼굴은 이 세상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밝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늘로 날아오르며 합장한 천인(天人)들은 얇은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데 옷을 통해서 풍만한 신체의 선이 보인다. 3기의 석굴은 북위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뒤 조성되어진 석굴들인데 규모는 작지만 이 시기의 중.소 굴실의 총 수는 약 150굴 이상이며, 1 . 2기의 굴의 내부와 굴 입구에 조영한 작은 감실 또한 약 200실 이상이나 된다. 또한 장식화가 더욱 진행되어 번잡해질 정도로 형식화되기도 한다.
북위의 낙양천도 후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불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룽먼(龍門)석굴의 개착이다. 북위황실의 낙양천도 이후 평성의 불교문화를 옮김으로써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선비족들의 정신적인 의지처를 만들고자 국립사찰인 영녕사(永寧寺) 이전과 국가불교를 상징하던 윈강석굴을 닮은 석굴을 조성했다.
룽먼은 이궐(伊闕)이라고 불렸는데, 이 뜻은 이수(伊水)가 산사이로 흘러 궁궐과 같은 모양을 띄고 있다는 뜻이다. 용문석굴의 조영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선무제(宣武帝) 즉위 해인 경명원년(景明 元年, 500)이었는데, 이미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494년경부터 석굴조영은 일어나고 있었다. 용문석굴은 이수강가를 중심으로 양쪽 편에 조성돼 있다.
룽먼석굴의 굴과 감실의 숫자는 2100여개이며 불상은 14만2289존 정도가 있다고 한다. 또한 2780여개의 조상기(造像記)를 통해 룽먼석굴을 조성한 이들의 생생한 발원이 후대에 전해진다. 윈강석굴의 조상은 중국의 중심지였던 고도 뤄양답게, 중국적 양식이 발현한 북위시대 석굴부터 관능미가 넘치는 당나라의 불상까지 시대별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북위시대의 고양동(高陽洞)과 빈양동(賓陽洞)을 필두로 하여 당나라 시기 봉선사동(奉先寺洞)에 이르는 석굴은 각 시기의 양식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당나라 시기 조성된 불상들은 각각의 종파적 특성이 나타나 중국불교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봉선사동이 개착된 측천무후 당시 화엄경이 뤄양지역에서 번역되었다는 사실과 측천무후가 주관한 봉선사동의 주불이 화엄경의 주불인 노사나불이라는 연관을 지닌다고 하겠다.
중국의 석굴은 각 시대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생생한 숨소리가 실려 있다. 경전이나 사서에서 느껴보지 못한 황실로부터 서민에 이르는 그들의 간절한 기원이 석굴을 개착하게 했다. 이러한 기원은 거대한 석굴과 그 속에 다시 새겨진 자그마한 불감에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문무왕 /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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