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서명별 저자별 간행처별 주제분류 성재집(省齋集) 성재집 부록 연보(年譜) 자료제목 번역문 원문 교감표점 이미지 확대축소 [이동 완료시 자료내용이 출력됩니다.] 연보〔年譜〕 번역문 원문 교감표점 이미지 확대축소 선생은 휘가 중교, - 초휘(初諱)는 맹교 - 자가 치정(穉程), 성이 유씨이며 본(本)은 고흥(高興)이다. 임진년(1832, 순조32), 황명 영력황제(永曆皇帝) 186년(청(淸) 도광(道光)12) - 조선 순조대왕 32년 - 2월 4일 신사일에 선생은 서울 대평동리(大平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8대조 나월당(蘿月堂)이 서울에서 춘천 관호(冠湖)로 옮겨와 살았다. 백조부(伯祖父) 참판공이 벼슬살이를 하게 되자 서울과 춘천 집을 왕래했으며 아버지 낙은공(洛隱公)이 부인 이씨(李氏)와 서울 집에 살았다. 계사년(1833, 순조33) - 2세 - 갑오년(1834, 순조34) - 3세 -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을미년(1835, 헌종 원년) - 헌종대왕 원년○4세 - 병신년(1836, 헌종2) - 5세 - 여러 연장자를 따라 화서 이항로선생 문하에서 공부했다. 여러 연장자가 참판공의 명에 따라 화서 선생께 가서 배웠는데, 선생이 따라가서 배우게 해 달라고 졸랐다. 장자(長者)가 선생을 말에 태우고 유삼대(油衫帒)로 단단히 묶은 후 출발했다. 말이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자 장자(長者)가 다급하게, “놀라지 않았냐?”고 묻자, 선생은 웃으면서 “이 정도로 어찌 놀라겠습니까?”라 말했다. 증조 첨추공(僉樞公)은 평소 자손에게, “문장(文章)과 절의(節義)는 진실로 우리 집안의 가업이다. 내 자손이 정학(正學)을 공부하는 것이 나의 지극한 바람이다.”라 가르쳤다. 참판공은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비판한 말 때문에, 권문귀족에게 미움을 받아 멀리 귀양 갔는데, 돌아온 후 가족을 이끌고 양근(楊根) 잠강(潛江)으로 들어가 살았다. 화서 선생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는데 만나자마자 그가 당대의 대유(大儒)라는 것을 알아보고 배항(輩行)을 낮추어 경서를 들고 가서 가르침을 청했다. 이는 마치 송 대에 이초평(李初平)이 염계(濂溪)선생에게 배움을 청한 일과 같았다. 근처에 공부방을 지어놓고 자손과 인척자제에게 쉼 없이 배우게 했다. 매년 봄가을에는 향음주례를 열어 한 번씩 돌아가면서 빈(賓)과 주(主)가 되어, 사서삼경과 주자(朱子), 송자(宋子)의 책을 윤강(輪講)했다. 순계(醇溪) 이정리(李正履) 공 형제, 구암(龜巖) 권희(權曦) 공, 수옹(睡翁) 남계래(南啓來) 공 같은 분은 모두 덕을 갖춘 사(士)와 원로로서 자리에서 경전을 펼쳐 놓고 주제를 오르내리면서 토론했다. 또 화서 선생의 장자 괴원(槐園) 이준(李埈), 금천(錦川) 임규직(林圭直), 단구(丹邱) 이인귀(李寅龜), 중암 김평묵 등도 참여했는데, 모두 당대의 훌륭한 선비로서 나이에 따라 순서대로 앉아 거듭 익혔다. 낙은공도 화서 선생보다 여섯 살 적어, 처음에는 벗을 대하는 도(道)로 대했지만, 존경하고 사모함이 지극해지자 공손하게 제자의 예를 행하면서 평생 따라 배워 깊이 덕을 이루었다. 성재선생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순수한 자질을 가지고, 어려서부터 그 속에서 가르침에 젖어들었으며, 이후의 성취는 대개 이러한 훈습(薰習)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정유년(1837, 헌종3) - 6세 - 선생의 어머니는 자상하면서도 엄격하여 여사(女士)의 풍모를 지녔다. 자손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법도(法度)에 따랐다. 선생이 예닐곱 살 때 어머니가 예복(禮服)〔上服〕을 입히자, 선생은 곧 옷자락을 걷어잡고 섬돌에 오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섭자승당(攝齊升堂)’이란 것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어른들이 선생을 기특하게 여겼다. 무술년(1838, 헌종4) - 7세 - 선생은 총명하여 잘 깨우치는 것이 마치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다. 동무와 공부하면서 놀이는 좋아하지 않고, 오직 경전과 도서(圖書)만 좋아했다. 《하도(河圖)》, 《낙서(洛書)》 따위는 직접 따라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펼쳐 보았다. 또 《중용(中庸)》의 ‘미발(未發)’설 같은 것은 어른에게 듣고서 또박또박 외워서 말할 수 있었다. 기해년(1839, 헌종5) - 8세 - 경자년(1840, 헌종6) - 9세 - 신축년(1841, 헌종7) - 10세 - 당시 참판공이 동호(東湖)의 임한정(臨漢亭)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읽으라고 명했다. 선생은 매일 한 권 혹은 반 권을 과제로 하였는데, 한 번 보고는 바로 외웠으며 이렇게 한 질을 끝 마쳤다. 매번 글을 읽을 때면, 그만 읽으라고 명하지 않으면 감히 그만두지 않았다. 한 여름 달 밝은 저녁에 참판공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선생은 침실 밖에 앉아서 밤이 깊도록 글을 읽었다. 하인〔御者〕이 그만 읽도록 권했지만 듣지 않았다. 공이 잠에서 깨어, “아직도 읽느냐? 이제 그만 쉬어라.” 말한 후에야 그쳤다. 당형 추재공(推齋公) 유중진(柳重鎭)이 〈서명(西銘)〉, 〈심잠(心箴)〉, 〈경재잠(敬齋箴)〉 그리고 송자화상찬(宋子畫像贊) 등을 베껴다가 조그만 종이에 써서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은 정중히 받아서 귀하게 간직하여 늘 읊으면서 경계로 삼았는데 늙도록 잃어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추재공의 조카 봉석에게 주어 익히게 했다. 여기서 한 번 품은 뜻은 끝까지 지키는 선생의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임인년(1842, 헌종8) - 11세 - 계묘년(1843, 헌종9) - 12세 - 벽계(蘗溪)에 가서 강회(講會)에 참여했다. 화서 선생은 주자가 정한 독서 차례에 따라 공부 과정을 정하고 매월 한 번 모였다. 선생은 늘 장자(長者)를 따라 강회에 참여했다. 갑신년(1844, 헌종10) - 13세 - 을사년(1845, 헌종11) - 14세 - 중암 김 선생께 배우다. 중암 선생은 집안은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하여 명성이 높았다. 참판공은 서실〔舘〕을 마련한 후 중암 선생을 맞이하여 여러 자식을 가르치게 했다. 선생은 《맹자》를 배우면서 크고 작은 문장의 의미에 대해서 반복해서 질문하여 고금의 전고에 이르기까지 들은 설명이 많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덕을 쌓았다. 11월 7일, 관례를 치렀다. 화서 선생이 자설(字說)을 지어 격려해 주었다. 12월 3일, 부인 이씨를 맞이하였다. 이씨는 왕실 혈통으로서 학생(學生) 이정후(李鼎厚)의 딸이며, 선조의 아들 영성군 계(㻑)의 후손이다. 병오년(1846, 헌종12) - 15세 - 4월, 화서 선생께 편지를 썼다. 선생은 품은 뜻을 더욱 독실히하여 날마다 강학에 힘썼다. 중암 김 선생을 모시고 맹자를 배우다가 상의해서 바로잡을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또 이것을 화서 선생께 질문하여 해결했는데, 학문과 예를 함께 닦는 공부로 삼았다. 이로부터 20여 년간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서적, 인륜과 사물의 의리(義理),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이치(理致)에 이르기까지 마음껏 공부하고 질문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수용(受用)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이 생기면 부지런히 애써서 끝을 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침내 전에 없던 탁월한 유학자〔通儒〕가 되었는데, 또한 화서, 중암 두 선생의 가르침을 더욱 발휘하여 그 찬란함을 드러낸 것이 많았다. 정미년(1847, 헌종13) - 16세 - 하루는 참판공을 뵈러 갔다가 해 저물 무렵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종숙모가 어린 여종에게 반찬을 가지고 따라가게 했다. 선생은 찬물(饌物)을 다음날 보내 달라고 하고는 혼자서 와버렸다. 어릴적부터 의심받을 일을 분별하는 철저함이 이와 같았다. 무신년(1848, 헌종14) - 17세 - 선생은 한 노유(老儒)를 따르면서 수개월간 과거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문장에 큰 진보가 있어 노유가 도리어 질문하기도 했다. 이후 과거응시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경전을 공부하여 도를 구하는 공부에 마음을 다했다. 기유년(1849, 헌종15) - 18세 - 6월, 헌종대왕께서 승하하자 망곡례(望哭禮)를 행했다. 얼마 후 〈승통고(承統考)〉를 편집했다. 국상(國喪) 후 축식(祝式)에, 유신(儒臣)의 주장에 따라 대행(大行)〔헌종(憲宗)의 혼전(魂殿)〕을 황질(皇姪)이라 칭하고 휘정전(徽定殿)을 황질비(皇姪妃)라 칭했다. 대신의 논의에 따라 금상(今上 철종)을 사왕신(嗣王臣)이라 칭했다. 화서 선생과 중암 선생은 그 예를 의논하고, 제왕가는 형이 아우를 잇고 숙부가 조카를 이었다 해도 선후(先後)를 잇는 것은 부자간의 도리로 하고, ‘본래의 친속관계〔本屬〕’라 칭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황질(皇姪)이라는 비속(卑屬)의 호칭으로 선군(先君)을 칭하고 사왕신(嗣王臣)이라 자칭했으니 더욱 어지러워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또 교교재(嘐嘐齋) 서충보(徐忠輔)에게 답장하면서, 임금이 낳아준 아버지에 대해 ‘고(考)’라 칭하는 것은 예에 맞지 않는다고 논했다. 선생은 《춘추좌전》 ‘제희공(躋僖公 희공(僖公)의 묘를 민공(閔公)의 묘 위에 올려놓은 것)’조와 《주자대전》의 〈주칠묘구묘도(周七廟九廟圖)〉 그리고 우리나라 사계(沙溪), 우암(尤庵) 선생의 글과 ‘한(漢) 선제(宣帝)가 인륜을 어지럽히고 예를 어그러뜨렸다’고 논한 정자와 주염계(周濂溪 주돈이(周敦頤))의 글을 편집하여, 《제왕승통고(帝王承統考)》라 제목 붙였다. 선생은 중암 김 선생과 희공(僖公)의 묘를 민공(閔公)의 묘 위에 올려놓은 일에 대해 토론하면서, “태묘에는 오직 위아래로 정통직계만 있어야 하며 방계〔貳〕를 두거나 위아래가 거꾸로 되거나〔倒〕 결손〔缺〕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방계를 두거나 위아래가 거꾸로 되면 ‘바르다〔正〕’고 할 수 없고, 결손이 있으면 큰 줄기〔統〕를 이루었다 할 수 없습니다. ‘이(貳)’란 선군을 방계로 대하는 것이고, ‘도(倒)’란 선군을 비속으로 대하는 것이고, ‘결(缺)’이란 선군을 명분 없는 자로 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9월, 종숙부 우하공을 곡하였다. 공의 휘(諱)는 갑()이며, 참판공의 장자이다. 성품이 충신(忠信), 관후(寬厚)하고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동생 낙은공(洛隱公)과 함께 화서 선생께 배웠다. 공경하는 예가 매우 엄중한 것을 보고, 선생은 유행록(遺行錄)을 지었다. 겨울, 홍암(弘菴) 박경수(朴慶壽)와 함께 화서 선생을 따라 고달산(高達山) 절에서 독서했다. 경술년(1850, 철종 원년) - 철종대왕 원년○19세 - 여름, 낙은공(洛隱公)과 중암 김 선생, 이괴원(李槐園) 등 여러 공과 함께 호남(湖南)을 유람하고 〈남유연구(南遊聯句)〉를 지었다. 신해년(1851, 철종2) - 20세 - 6월, 효정전(孝定殿)의 대상(大祥)에 망곡례(望哭禮)를 행했다. 헌종(憲宗)의 담사(禫祀) 후, 진종(眞宗)의 신위 조천(祧遷)이 옳은지를 의논하게 했다. 대신과 유신(儒臣)은 모두 조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만이 이를 반대했다. 결국 ‘조천해야 한다’는 주장이 채택되어 권공이 유배당했다. 이때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왕가의 승통(承統)은 엄중하다. 그래서 형이 동생을 잇고 숙부가 조카를 이어도 ‘제(弟)’나 ‘질(姪)’로 칭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른 이치이다. 다만 이렇게 미루어 올라가면 고조와 증조도 조천해야 하는데, 사은(私恩)을 다 하지 못했다면 사친(四親) 범위 밖에서 임시로 계속 받들 수 있다. 이는 정자(程子)가 제시한 예법이다. 권공이 ‘진종의 신위를 조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견지했는데, 사은(私恩)을 다 하지 못해 임시로 받든다는 뜻에 대해 분명히 말 할 수 없었으니, 이 점이 안타깝다.” 임자년(1852, 철종3) - 21세 - 화서 선생의 명을 받아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을 편수했다. 화서 선생이 주자서(朱子書)에서 주석(注釋)과 차자(箚子)를 모아 송원사(宋元史)를 수정(修整)하고자 했는데, 그 말씀이 이랬다. “공자의 도가 주자에 이르러 크게 밝아졌는데, 한 글자 한 문장이라도 혹 어두운 부분이 있으면 그 폐해가 백성에게 흘러 화(禍)가 후세에 미친다. 또 황명(皇明)이래 천하의 학술이 삼분오열되었는데, 우리나라의 학술은 오로지 주자(朱子)를 위주로 하여, 그 책에 주석한 학자가 십 수가에 이르렀다. 이는 수집하고 표장(表章)하여 후세에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공자가 《춘추》를 짓고, 주자가 《강목(綱目)》을 지었는데 그 뜻은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 보다 큰 것이 없다. 이적(夷狄)이 중원에 들어와 천위(天位)를 점거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몽골이 세운 원(元)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서법(書法)을 세워, 이것이 바름〔正〕이 아니라 참람되었음을, 참이 아니라 거짓임을,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임을 분명히 하여 만세의 큰 원칙〔大防〕을 엄밀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서(朱書)》에 대한 주석(注釋)은 퇴계(退溪) 선생에서 시작되어 송자(宋子 송시열)에 이르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로 확대되었고, 몽골 원(元)이 정통을 탈취한 사실은 구문장(丘文莊) 공에서 시작되어 송자에 이르러 다시 힘써서 밝게 드러났으니, 이 두 책을 짓는 것은 실로 송자의 뜻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주자서(朱子書)를 집차(輯箚)하는 일은 괴원(槐園)에게, 화동(華東)의 역사를 합편(合編)하는 일은 선생에게 맡겼다. 선생은 명을 받들고 편수에 착수했는데, 송 태조 건륭(乾隆)원년에서 시작하여 우리 태조황제가 북으로 중원을 평정한 해에서 마쳤다. 기년(紀年)의 형식은 중국(中國)을 위주로 하고 고려(高麗)를 주석으로 달았다. 그 내용 역시 연, 월의 순서에 따라 차례로 드러내었다. 이는 정장암(鄭丈巖)이 《사략보요(史略補要)》에서 남긴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서법은 한결같이 주자가 쓴 《강목》의 옛 체제를 따랐는데, 이전에 없던 사변(事變)이 생겨 포폄(褒貶)을 달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득이 다른 사례에 비추어 새로운 예를 만들었다. 예컨대, 몽골 우두머리가 참람되게 천위(天位)를 차지한 이후에는 기년(紀年)을 큰 글자로 쓰지 않고 쌍행으로 주석을 한 것, ‘제(帝)’라 칭하지 않고 ‘주(主)’라 칭한 것, ‘붕(崩)’이라 쓰지 않고 ‘조(殂)’라 쓴 것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편(篇)’을 명명하고 ‘연(年)’을 쓰는 뜻은,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서 《춘추》가 노나라 역사를 근본으로 하지만 천하일까지 거론한 것에서 취했다. ○ 선생의 수사(脩史)는 지원(至元) 25년(1288)에서 그치고, 그 다음부터 끝까지는 김 선생〔김평묵〕이 이어서 수찬(修撰)했다. 아마 먼 조상인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淸臣)의 후손으로서 붓을 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계축년(1853, 철종4) - 22세 - 갑인년(1854, 철종5) - 23세 - 을묘년(1855, 철종6) - 24세 - 병진년(1856, 철종7) - 25세 - 정사년(1857, 철종8) - 26세 - 아들 의석(毅錫)을 낳다. 화서 선생께 편지를 써서 양학(洋學)을 비판하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양학이 겉만 번드르르하고 장황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으로, 교묘한 술수와 정교한 기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른바 저들의 ‘술(術)’이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행인유의(行仁由義 인을 행하고 의를 따른다)’의 술(術)이 아니라 형기(形氣)와 상수(象數)의 말단에서 나왔고, 이른바 예(藝)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제도보덕(濟道輔德 도를 구하고 덕을 돕는다)’의 예가 아니라 소리, 색, 냄새, 맛〔聲色臭味〕의 말류(末流)에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오직 그 교묘하고 정교하다는 것들도 오로지 형기에만 있고 성명(性命)에 있지 않아서, 그 말류가 군부(君父)의 큰 인륜을 저버리고 재화와 여색의 큰 제방(隄防)을 무너뜨리면서도 죄가 하늘에 미치고 땅을 뒤덮는〔滔天沆陸〕 재앙을 근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대개 요순(堯舜)의 옛 강토에 정일심법(精一心法)이 오랫동안 어두워진데다 황명(皇明) 말기에 기이함을 자랑하고 겨루는 습속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설(邪說)이 기회를 타고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후에 또 논설을 지었다. “저 무리는 천지(天地)에 신령(神靈)이 없어 공경할 수 없다고 말하고 따로 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한 물건을 두어 ‘천주(天主)’라고 부른다. ‘천주’에는 성부(聖父), 성자(聖子)의 이름이 있는데 성부는 곧 진천주(眞天主 하나님)이고 성자는 야소(耶蘇)이다. 예배당을 세우고 받들어 모시는 것이 모두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상(像)이다. 또 천주가 처음에 흙으로 남녀 각각 한 명을 만들어 부부로 삼았는데, 이들이 시조이며 만세 인류는 모두 이들의 자손이라고 한다. 대개 저들이 사는 땅이 중국과 멀리 떨어져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이라곤 단지 기술자가 물건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술자의 견식으로 헤아려 생각한 것을 설(說)로 만들고,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깨닫지 조차 못한다. 유독 중국 사람은 선생의 유택(流澤)에 무젖었기 때문에 저들이 천지를 욕하고 만인의 부조(父祖)를 욕하는 것이 이와 같음을 보고, 시골에 사는 부부도 발연히 분노하여 토벌할 생각을 하는데 오히려 저들의 설을 믿고 저들을 그리워하여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니 왜 인가? 그래서 나는, ‘중국 사람이 자신의 올바른 본성을 상실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 ‘저들은 낳아준 부모를 육신(肉身)의 부모라 하고 천주(天主)를 영혼(靈魂)의 부모라 하여 아끼고 공경하고 받들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천주에게만 두고 낳아준 부모에게는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모자(母子) 관계를 물을 담은 항아리에 비유하여 ‘잠시 붙어사는 것이니 덕(德)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라고 말한다. 저들은 또 교황(敎皇), 신부(神父), 주교(主敎)의 직임을 세웠는데, 교황은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고 나머지는 재보(宰輔)로서 자처하니 임금과 아버지, 형과 어른이라도 모두 신자(臣子)로서 ‘너’라고 부른다. 저들은 또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을 ‘정덕(貞德)’이라 하고, 거처할 때는 남녀 상하가 구별 없이 잡처(雜處)한다. 대개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정해진 배우자를 두지 않아 거리낌 없이 잡처하고자 한 것이니 ‘정덕(貞德)’에 가탁하는 것은 속임수다. 저들이 삼강(三綱)을 허물고 끊은 것이 이와 같으니 곧 금수(禽獸)이다. 금수라면 금수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사람이면서 금수가 하는 짓을 하면 금수만 못하다. 사람 모습을 하고 천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면 몸을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 무오년(1858, 철종9) - 27세 - 한포(漢浦)에 정착했다. 한포(漢浦)는 잠강(潛江)에서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새 집을 지으면서 옛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왼쪽 협실을 책 읽고 손님맞이 하는 방으로 삼았다. 농토를 마련하여 직접 농사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써 보기도 했지만 겨우 한 해 만에 방해되는 일이 적지 않다고 여겨, 노복에게 맡기고 다시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김 선생〔김평묵〕에게 편지를 써서 아버지와 스승에 대한 소윤(少尹)의 경중(輕重)설을 논평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와 스승에 대한 윤리에는 본래 경중(輕重)의 차이가 없는 곳이 있고, 경중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사람〔윤증〕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 이 사람이 앞뒤로 처신한 것에서, 그 마음 쓴 것을 살펴보면 전적으로 화(禍)와 죽음을 두려워하여 변신을 통하여 자신을 보전할 계책에서 나온 듯하기 때문에 의리로써 책망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입장을 인정하여 그렇게 처신한 의미를 논하려면, 그 아버지〔윤선거(尹宣擧)〕의 허물이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와 그 스승〔송시열〕이 그를 배척한 것이 공(公)인지 사(私)인지를 논해야 옳습니다. 만약 과연 그 아버지에게 허물이 없고 그 스승이 그를 배척한 것이 사적인 처사였으면, 위(魏) 문제(文帝)가 왕부(王裒)의 아버지를 죽이자 왕부가 평생 문제의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듯이 임금에 대하여 신하도 감히 원한을 숨기고 섬기지 않는데, 스승에 대한 처신도 그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아버지에게 허물이 있어서 그 스승이 그를 배척한 것이 공정하였다면, 고요(臯陶)가 순(舜)의 아버지를 잡으려 할 때, 순은 아버지를 몰래 업고 달아날지언정 고요가 법을 감히 집행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임금도 신하에 대하여 감히 사적으로 원망하지 못하는데, 그가 스승에 대하여 처신한 것이 더욱이 어떠합니까? 만약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허물이 있는지 여부를 감히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은 천하의 공리(公理 공적인 도리)입니다. 존경과 친애는 부자간의 사정(私情 사적인 정)입니다. 천하의 공리는 공리이고 한 사람의 사정은 사정일 뿐입니다. 어찌 그 사(私)로써 공(公)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성인이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그 죄를 숨긴다.”고 했습니다. ‘숨긴다.’고 했으니, 그 숨길만한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아버지를 위하여 그 죄를 숨긴다.〔爲親者諱〕”고 했습니다. ‘숨긴다.’고 했으니, 그 숨길만한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예(禮)에 “부모에게 허물이 있을 때 아들이 세 번 간곡히 충고해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따른다.”고 했고, “향당(鄕黨)과 주려(州閭)에서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간곡하게 말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부모의 허물에 대하여, 처음에는 완곡하게 충고하여 오직 그 허물이 이루어질까 두려워하고, 완곡하게 말려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말려 그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고, 울면서 말려도 미치지 못하면 단지 자신의 몸으로만 그 허물을 덮을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효도의 지극함입니다. 어찌 그 허물을 덮고 그릇됨을 꾸미며, 또 자신의 허물은 면하면서 아버지를 벌주는 향당과 주려(州閭)의 사람에게 도리어 깊은 원한을 품고 해독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기미년(1859, 철종10) - 28세 - 경신년(1860, 철종11) - 29세 - 신유년(1861, 철종12) - 30세 - 임술년(1862, 철종13) - 31세 - 참판공 대신 삼정대책문(三政對策文)을 지었다. 당시 전부(田賦), 군적(軍籍), 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의 폐해가 더욱 심했다. 상(上 철종)께서 이를 개혁하고자 하여, 조정대신에게 관청(官廳)을 설치하여 모여 논의하게 했다. 또 전정(殿庭)에서 사대부와 유자(儒者)에게 직접 책문(策問)하고 이어 이 책문(策文)을 군현과 방곡(坊曲)에도 두루 공포하여 크던 작던 어떤 의견이라도 구애받지 말고 각자 의견에 따라 진대(陳對)하게 했다. 이에 참판공께서 왕의 책문에 충성스런 마음을 한 번 개진하기를 바람에 따라, 선생이 막힘없이 물 흐르듯이 긴 글을 써 내려가면서 시종일관 임금에게 중점을 두어 어진 마음을 미루어 넓히는 것으로 법제의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의 명(命)을 구제하는 근본으로 삼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학문을 익히는 것으로 착한 단서를 개발(開發)하고 기질을 함양(涵養)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삼정(三政)을 논하면서 조선의 역대 연혁에서 전거(典據)로 삼을만한 일〔故實〕과 당시 폐해의 근원, 백성의 곤궁한 상황을 모두 거론하고, 이어 바로잡고 구제하는 방법을 서술했는데, 문사가 좋고 내용이 자세했다. 요지는 세수(稅收)를 줄여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고 공론을 넓히고 사치풍조를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아마 채택하여 시행하였다면 국가 중흥의 치적을 이루었겠지만 조정의 논의가 흐지부지되어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했다. 식자(識者)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설을 지어 중국의 지세(地勢)에 관해 논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구 전체로 말하면, 중국은 앞면의 위쪽에 가까운 곳, 즉 위로 북극에서 55도 떨어지고 아래로 적도까지 36도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에게 얼굴이 있는 것과 같다. 전에 청나라 학자 이광지(李光地)가 ‘중국은 정해진 곳〔定處〕이 없다’는 서양인의 설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당했다. 서양인이 지구를 계란에 비유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계란이 비록 둥글지만 그 속에는 장래의 머리, 날개, 등, 배가 될 일정한 위치가 있으니, 어찌 모호하게 앞뒤가 없겠는가? 게다가 중국의 지형이 어떠한지도 논하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심장을 중심으로 삼는다. 따라서 세상에 처음 성인을 낳은 곳이 바로 천지의 심(心)이 있는 곳이다. 서양인이 해외 모든 나라를 다녀봤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어느 곳 어느 나라의 또 어떻게 생긴 사람이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다섯 가지 일을 설명해 내었는가? 또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오직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고 한 16자를 설파했는가? 단지 이것만으로도 그들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하다. 중국의 서북은 산악지대이고 동남은 바닷가이다. 제왕의 기운이 강하지 않으면, 산악지대에는 산족(山族)이 맹렬히 쳐들어올 걱정이 있었고 바닷가에는 수족(水族)이 침범할 근심이 있었다. 이것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대개 북쪽 오랑캐가 산족이다. 산족은 강경(剛梗)한 기운을 타고 나서 힘이 센데, 호랑이, 표범, 곰, 큰곰 등의 무리와 같은 것이 그들이다. 해적이 수족이다. 수족은 맑은 기운을 타고 나서 기술이 많은데, 교인(鮫人)이 비단을 짜는 것과 신(蜃)이 기운을 토하여 누각을 짓는 것 같은 것이 그들이다. 힘이 세기 때문에 활 쏘고 말 타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기술이 많기 때문에 기술자로서 생존한다. 중국은 중화(中和)의 기(氣)를 타고나서 덕을 숭상한다. 덕을 숭상하기 때문에 예의로써 생활하는데, 이것이 인도(人道)다. 덕(德)과 기술 및 힘〔巧力〕은 언제나 자라고 쇠퇴하는 것이 상반된다. 덕이 성하면 교력을 지배하여 각기 제 자리를 잡아 천하가 안정되고, 덕이 쇠하면 힘에 눌리고 기술에 현혹되어 모자와 신발이 뒤바뀌어 천하가 어지럽다. 그러므로 내정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큰 요점으로 덕을 중시하고 교력을 천시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계해년(1863, 철종14) - 32세 - 참판공을 여의었다. 참판공은 늙어서도 배우기를 좋아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대질(大耋)에도 날마다 경전을 읽으며 후배를 이끌었다. 화서 선생이 크게 공경하고 존중하여, 이 해에 돌아가시자 글을 지어 애도했다. 선생이 행록(行錄)을 쓰고, 김 선생〔김평묵〕이 행장을 지었다. 12월, 철종대왕이 승하하자 망곡례(望哭禮)를 행했다. 갑자년(1864, 고종 원년) - 금상(今上 고종) 원년○33세 - 만동묘(萬東廟)가 철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감회를 썼다. 만동묘(萬東廟)가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있는데, 우옹〔우암 송시열〕께서 수암(遂菴) 권(權) 공으로 하여금 처음 세워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제사 지내고 은덕을 추모하고 보답하는 곳으로 삼게 한 곳이다. 이 곳은 참으로 중국이 외적에게 망한 이후 대통(大統)의 일맥(一脈)이 보존된 곳이다. 이 해에 만동묘를 철향하라는 조령(朝令)이 내려왔다. 영장(營將) 양주석(梁柱石) 공이 통곡하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김 선생과 화서 선생의 둘째 아들 황계(黃溪) 이복(李墣) 공이 각기 시 한수를 지어 그를 장하게 여겼다. 선생은 그 시에서 차운(次韻)하여 “초(楚)의 들판에는 제사 올릴 초가집 간데없는데〔楚野因無茅屋享〕, 조(曹)의 백성이 차가운 샘물의 시를 차마 읽으랴〔曹民忍讀冽泉詞〕”라는 시구를 지었다. 을축년(1865, 고종2) - 34세 - 겨울, 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전자명(田子明) 우(愚)를 방문했다. 자명(子明)은 전재 임 공의 문인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었다. 선생이 서울에 일이 있어 갔다가 방문하여 그와 함께 심성(心性), 이기(理氣), 태극(太極), 명덕(明德) 설을 토론했다. 이 때부터 십여 년간 주고받은 편지가 다소 있다. 병인년(1866, 고종3) - 35세 - 정월, 수호(壽湖)에 가서 구암 권 공을 곡했다. 권공은 충렬공 순장(順長)의 후손으로 견식이 바르고 성품이 관대하여 군자(君子)와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화서 선생과 사이가 좋아서 선생이 늘 공경하고 감복했다. 돌아가시자 제문(祭文)을 지어 들고 가서 곡을 했다. 3월, 독대곡(篤大谷)에 김 선생을 모셨다. 독대곡은 한포(漢浦)에서 남쪽으로 몇 리 떨어져 있다. 김 선생〔김평묵〕이 가평(加平) 화양(華陽)에 계실 때 외아들의 참상(慘喪)을 당했다. 장례를 치른 후, 선생은 사우(士友)와 의논하여 전택을 사서 김 선생을 모셨다. 몇 년 전부터, 화서 선생이 늙고 기력이 쇠하여 더 이상 강석(講席)에 임하지 못하게 되자, 제자들에게 각자 공부방에서 공부하게 했는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화서 선생께 직접 가서 질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선생이 강회(講會)를 열고 김 선생에게 고과(考課)를 부탁했다. 열흘 마다 반드시 모였으며, 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쉬지 않았다. 8월, 서양 함대가 서울 한강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벽계로 화서 선생을 뵈러 갔다. 7월, 청나라 사람이 본국에 자문(咨文)을 보내 프랑스와 사이가 벌어진 연유를 고했다. 이 때, 프랑스 함대가 갑자기 서울 한강에 들어오자 도성 사람이 크게 놀라, 난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이 좁은 길에 가득했고, 적의 선봉이 벌써 도성을 범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화서 선생이 급히 달려가 임금의 안부를 여쭈려고〔奔問〕 했는데, 적의 공세가 멈추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이 날, 선생이 화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화서 선생이 웃으면서, “자네가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는 화서 선생이 평소 선생에게 ‘분문(奔問)’의 의리에 대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9월, 화서 선생을 따라 서울에 갔다가 한 달 쯤 머물다가 돌아왔다. 당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자, 유수(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또 시시각각 서울이 침범 당하는 상황이 치계(馳啓)로 올라오자 조정은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자는 화친을 청하자고 했고, 어떤 자는 파천(播遷)해야 한다고 했다. 좌상(左相) 김병학(金炳學)이 이모(李某 화서 이항로)를 불러서 쓰자고 청하여, 유지(有旨)를 내려 화서 선생을 일소(馹召)했다. 화서 선생이 소식을 듣자마자 궐로 달려가 사직(辭職)소를 올리고 이어서 ‘화친의 논의를 물리치고 싸워 지키자〔斥和戰守〕’고 주장하는 의론을 개진하였다. 한 달쯤 지나, 양헌수(梁憲洙) 공이 적을 물리치자, 관원에게 소(疏)를 남겨 황묘(皇廟)의 복구를 청하고 그날로 돌아왔다. 이 때 선생이 모시고 다녀왔다. 정묘년(1867, 고종4) - 36세 - 여름, 《화서선생아언》을 편찬했다. 화서 선생께서 병이 더욱 위독해져서 여러 제자에게 더 이상 강설할 수 없었다. 선생은 김 선생과 함께 화서 선생의 수고(手稿)를 모으고, 대체(大體)에 관계되면서도 일상생활에 절실한 말씀을 얼마간 베꼈다. 또 문인이 기록해 둔 것으로 제자 수십 명과 문답한 말도 함께 취하고 필요한 부분을 요약했다. 서른여섯 편(篇)으로 엮어 서사(書社)에서 강습하는 자료로 삼고, 《화서선생아언(華西先生雅言)》으로 제목을 붙였다. 책이 완성되자, 낙은공(洛隱公)께서 읽고 완미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책은 우리 조선의 또 하나의 경전이다. 도(道)를 밝히고 사물의 은미(隱微)한 뜻을 드러낸〔明道發微〕 공(功)은 성인의 사당에 배향하기에 충분하다.” 무진년(1868, 고종5) - 37세 - 3월 18일, 화서 선생을 곡하였다. 화서 선생께서 병세가 악화되어 위중해지자, 선생이 김 선생과 함께 황급히 달려가 임종(臨終)하고, 주자(朱子) 문하의 고례(故例)에 따라 흰 두건에 환질(環絰)을 두르고 상사(喪事)를 주관했다. 심상(心喪) 3년을 행하고 〈선사이선생상지복의절(先師李先生喪持服儀節)〉을 지었다. 윤4월, 화서 선생의 장례식에 갔다. 사림장(士林葬)의 예를 치렀는데 선생이 집례(執禮)가 되어 제문(祭文)을 쓰고, 문인(門人)과 함께 상가(喪家)를 돌아가면서 지키는 법식을 행했다. 가을에, 미원서원(迷源書院)에 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당시 사액을 받지 않은 서원을 철폐하라는 조령(朝令)이 내려와 미원서원 역시 훼철(毁撤)해야 했다. 고을의 사(士)와 여섯 선생의 후예가 서원에 모여 훼철을 면할 방도를 의논했다. 참판 김기찬(金基纘)이 와서 사관(私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 서원의 유생(儒生)에게 이렇게 전했다. “오늘 저도 공회(公會)에 참석하겠소. 유 모(柳某 유중교)를 불러 함께 의논 하면 좋겠소.” 제유(諸儒)가 맞다고 여기고 공회를 열게 된 사유(事由)를 갖추어 선생을 초대했다. 선생이 급히 가자 김참판은 감역(監役) 이재로(李載魯)를 서원에 보내어 선생을 불렀다. “이 몸이 직접 가서 만나야 하는데, 몸이 아파 일어나지도 못하오. 혹시 나를 방문해 주시겠소? 아니면 내가 가서 만나야 하오.” 선생이 사양하면서 말했다. “이 모임에 어른과 원로가 많아, 감히 저만 나가서 만나 뵙지 못합니다. 또 오늘 모임은 공회(公會)입니다. 어떻게 감히 공회는 내버려 두고 사사로이 면회를 가겠습니까? 사적인 만남은 다른 날 가져도 늦지 않습니다.” 이재로가 끝까지 강권했지만 선생은 듣지 않고 돌아갔다. 기사년(1869, 고종6) - 38세 - 정월, 친족 할아버지 참판공 유영하(柳榮河)의 장회(葬會)에 달려갔다. 공은 호가 보산(甫山)이며, 고결하고 문채있는 덕행(德行)이 있어 동료관리에게 존중을 받았다. 언젠가 참판공〔유영오(柳榮五)〕과 서울에 살면서 벼슬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 각기 향리로 돌아가서도 계속해서 교유했다. 그 정의(情誼)가 마치 동당(同堂) 형제 같았다. 선생에 대해 더욱 아끼고 존중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가서 배우게 하고 곡진하게 부탁했다. 공이 죽어 장례를 치르자 선생이 달려가 곡을 하고 제문을 지었다. 2월, 미원서원이 철향(撤享)되어 고을 사람과 함께 서원 터에 가서 단(壇)을 설치했다. 미원서원이 훼철되자 명궁(明宮 사당)의 유지(遺址)에 터를 닦아 큰 단(壇)을 쌓았다. 단에 정암 조선생〔조광조〕 신좌(神座), - 위판(位版)은 교궁(校宮, 향교)에서 받들어 왔다 -김대사성(金大司成), 남동강(南東崗), 이청강(李淸江), 김잠곡(金潛谷), 김삼연(金三淵) 등 다섯 선생의 위판을 묻고, 각각 흙을 북돋아 작은 단(壇)을 만들고 돌에 새겨 표시했는데, 훼철 전 서원의 위차(位次)대로 하여 공경하고 사모하는 곳으로 삼았다. 단이 완성되자, 글을 지어 연유를 신명(神明)에게 고했는데 주자(朱子)가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거행한 석채례(釋菜禮) 의식을 따랐다. 수복(守僕)을 일정하게 두어 청소와 제초를 하고 그 곳에서 초동(樵童)이나 목동(牧童)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매 월 삭망(朔望) 때면, 단 아래에 사는 장보(章甫 유생(儒生))가 돌아가며 분향례(焚香禮)를 행했고, 춘하추동 각각 첫달〔四孟朔〕의 강회일(講會日)에는, 모든 구성원이 일제히 전알례(展謁禮)를 거행하고, 신문(神門) 밖으로 나가 무리〔隊〕를 나누어 마주보고 읍을 하게하며, 한 사람에게 〈백록동(白鹿洞) 학규(學䂓)〉를 낭독하게 한 연후에 물러나 강례(講禮)를 행했다. 3월, 벽계에 가서 화서 선생께 내려온 은유(恩侑)를 공손히 맞이했다. 이어 연사(練祀)에 참여했다. 4월, 서사(書社)를 세우고 선성(先聖)에게 고했다. 고을 사람과 함께 정사(精舍)에서 동쪽으로 수십 걸음〔武〕 떨어진 땅에 숙사(塾舍) 세 칸을 짓고, 한포서사(漢浦書社)라고 명명했다. 그 정당(正堂)은 ‘주일(主一)’이라 이름 지었다. 양쪽 협실은, 왼쪽은 ‘박약(博約)’으로 오른쪽은 ‘극복(克復)’으로 이름 지었다. 또 ‘영백(咏栢)’과 ‘산앙(山仰)’으로 동쪽 협실의 동쪽 창(窓)과 서쪽 협실의 서쪽 창을 각각 명명했다. 아울러 기문(記文)을 짓고 명문(銘文)을 새겨 배우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여러 생도를 거느리고 자리〔位〕를 마련한 후 고했다. 선생은 주자(朱子)가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남긴 의례를 대략 모방하여 작년부터 순강(旬講)과 사맹삭(四孟朔) 강회를 행했고, 벽산(蘗山)의 유규(遺規)를 그대로 따라 새로 홀기(笏記)를 정했다. 이 때 김 선생〔김평묵〕을 상석(上席)에 청하여, 경전과 예(禮)에서 의심스러운 뜻을 시대를 오르내리며 토론하고 질문했는데 매우 절도가 있는데다 자세하고 문채가 있어 사람을 감동케 했다. 이에 먼 곳에 있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학도 가운데 강회(講會)에 응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자 모든 생도(生徒)에게 주자의 〈경재잠(敬齋箴)〉 수필(手筆)을 모사하고, 율곡 선생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쓰고, 또 화서 선생이 직접 쓰신 유훈(遺訓)인 “중화를 받들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은 천지가 다하도록 변함없는 법칙이며, 자신의 사사로움을 물리치고 상제가 내려준 성품을 받드는 것은 성현이 간직해온 긴요한 법도이다.” 등의 어록을 베껴 벽에 걸게 했다. 김진수(金晉壽)에게 관향대(觀鄕臺)를 짓게 했다. 관향대는 한포서사(漢浦書社)의 동쪽에 있다. 매년 봄가을에 생도(生徒)와 사우(士友)를 모이게 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익혔는데, 괴원(槐園)이 편집한 《음례고정(飮禮考訂)》을 이용하여 덜거나 더해서 홀기(笏記)를 만들고, 또 거기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온 세상이 다 머리를 풀어 헤치는데 / 九有被髮 나 홀로 장보(章甫)를 쓰네 / 我獨章甫 사방의 나라가 다 대포를 쏘아대는데 / 四國砲射 나 홀로 제기(祭器)를 진설하네 / 我獨罇俎 성실하고 공경하며 / 克誠克敬 천근(天根)을 보호하리니 / 保護天根 극도로 쌓아서 통하면 / 蓄極而通 온갖 문호에 이르리라 / 萬戶千門
6월 8일, 송자(宋子)의 책을 읽었다. 이 날은 송자(宋子)께서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아 돌아가신 지 세 주갑(周甲) 되는 날이다. 선생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여러 생도를 데리고 서사(書社)에 가서 함께 송자의 유서(遺書)를 각각 한 편씩 읽었다. 이어 김 선생〔김평묵〕께서 편찬한 《사실기(事實記)》를 읽었다. 화서 선생의 유집(遺集)을 교정했다. 황계(黃溪) 이복(李墣) 공, 김 선생〔김평묵〕과 함께 두 세 차례 돌려가며 교정했다. 남길 것은 남기고 삭제할 것을 삭제하면서 간결하면서도 정밀하게 정리하는데 힘썼다. 부록(附錄)을 합쳐서 22권으로 엮었다. 경오년(1870, 고종7) - 39세 - 정월, 《사친삼의(事親三儀)》를 짓고, 참알례(參謁禮)와 상수례(上壽禮)를 행했다. 낙은공(洛隱公)과 이씨(李氏) 부인은 늘 선생에게 봉양을 받았다. 선생이 부모를 섬기면서 경애(敬愛)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조석(朝夕)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예절〔晨昏定省〕 등은 오래 전부터 실천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과 여러 현자가 남긴 옛 의식(儀式)을 참고하여 그 의절(儀節)을 짓고, 삭망(朔望)에 참알(參謁)하는 예(禮)와 계절마다 장수를 축원하는 의식을 책으로 엮어 “사친삼의(事親三儀)”라 이름 지었다. 정월대보름에 집안사람을 모이게 하여 부모의 장수를 축원했는데, 위차(位次)와 절도가 질서정연하여 화락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했다. 와서 구경한 친척 가운데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낙은공의 명으로 집안사람을 경계하는 글을 짓고, 예를 마친 후, 한 사람을 시켜 읽어서 경계시키게 했다. 글의 큰 제목은 명분을 잘 지키고〔謹名分〕, 사랑과 공경을 숭상하고〔崇愛敬〕, 직무에 힘쓰고〔勤職事〕, 예절을 높이는〔尙禮節〕 네 가지 일이다. 2월, 어머니를 여의었다. 5월, 《화서선생유실조치의(華西先生遺室措置儀)》를 지었다. 선사(先師 화서 이항로)의 상제(祥祭)와 담제(禫祭)를 마친 후, 생전에 사시던 집으로 가서 북쪽 벽 아래에 탁자 하나를 놓고 영정을 봉안하고, 향안(香案)을 설치했다. 동쪽과 서쪽 벽 아래에는 유고(遺稿)와 유묵(遺墨) 그리고 유의(遺衣)와 목침, 안석, 지팡이, 신, 거문고, 잔 따위를 늘어놓았다. 손때가 남아있는 것으로 후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진열했다. 문인 가운데 서사(書社)에 머무르는 사람은 매일 아침 섬돌 사이에 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고, 삭망 때나 신진(新進)이 처음 온 경우 영정을 펼쳐 걸어 놓고 향을 태우며 배알했다. 매년 하루를 정하여 영정을 포쇄(曝曬)하면 문도가 일제히 모여 채소와 과일을 갖추어 술 한 잔을 올리는 예를 행했는데, 이는 대략 창주정사에서 전해온 의절을 따른 것이다. 9월, 이겸하(李謙夏)에게 시집간 장녀를 곡했다. 후에 제문을 썼다. 윤10월, 낙은공을 여의었다. 낙은공은 평소 격화(膈火)를 앓았는데, 늙어서는 더욱 심해져서 사람이나 물건의 목소리나 소음이 산란하거나 어지러우면, 접하는 것 마다 흥분하여 더욱 심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선생은 몇 년 동안 모시면서 정성과 효성을 다했다. 약물이나 음식은 좋다는 방법을 모두 써 보았고, 늘 온화한 기운과 부드러운 태도로 고금의 명언을 말씀드렸다. 작은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결코 그 마음을 거스르지 않았고, 집안사람에게는 떠들거나 웃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다. 이웃 사람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스스로 조심했으며 감히 높은 소리로 이야기하여 소음이 들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낙은공이 돌아가시자 몹시 슬퍼했으며, 장사(葬事)의 의례와 거상(居喪)의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 다만 상의(上衣)는 유명(遺命)에 따라 유상(帷裳)을 썼다. 그 상세한 제도는 선생이 지은 《양복통해(兩服通解)》에 보인다. 묘소가 십 리 거리에 있고 중간에 큰 강과 높은 재로 막혀 있었지만 눈보라가 몰아쳐도 반드시 매일 묘소를 살폈다. 12월, 외숙 이기재(李璣在) 공을 곡했다. 이 공(李公)은 가세(家勢)가 몹시 빈한하여 한 때 선생에게 의지했다. 이 때 병이 들어 달포 정도 병에 시달리자, 선생이 주야로 잠도 이루지 못하고 지성으로 간호했다.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돌아가셨는데, 시신이 부패하고 문드러져 손대는 곳마다 떨어지고 찢어져 나갔지만 손수 염습(斂襲)하고 조금도 난색(難色)을 보이지 않았다. 장례에 필요한 물건도 모두 예에 의거하여 갖추고 빠짐이 없었다. 신미년(1871, 고종8) - 40세 - 여름, 황고(皇考)와 황비(皇妣)의 유사(遺事)를 짓다. 유사(遺事)는 문집에 보인다. 김 선생〔김평묵〕께서 묘지(墓誌)를 지었다. 김 선생에게 〈논왕양명연보변(論王陽明年譜辨)〉을 올리다. 왕양명(王陽明)은 명나라 때 치우치고 지나친 학설을 멋대로 주장하여 주자(朱子)를 욕하고 업신여겼으며, 이로써 천하의 학자를 오도하여 사문(斯文)의 화(禍)가 되었다. 화서 선생께서 몹시 엄하게 배척한 적이 있다. 김 선생〔김평묵〕이 그 연보(年譜)에 대해 변설(辨說)한 바가 있는데, 선생이 김 선생의 글을 읽고 조목마다 첨지를 붙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씨가 주자의 격물(格物)설을 비난할 때는 본래 성심(誠心)으로 도(道)를 구한 것은 아니라 실로 못마땅한 바가 있어 등을 돌렸습니다. 고작 새로운 설 하나를 세워 세상 사람의 이목(耳目)을 흔들고, 큰 명성을 훔치려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본심입니다. 격물설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세운 것은 한 때 남의 손을 빌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대개 그 본성이 총기가 있고 민첩하며 교묘한 일을 잘 꾸몄고 또 오랫동안 병법을 익혀 기량이 귀신같이 숙달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유가의 문하에 들어와 붉은 깃발〔赤幟 우두머리를 상징함〕을 손쉽게 세우고 마음껏 호령하며, ‘아무도 그 시작과 끝〔端倪〕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맹자가 말한 ‘부끄러운 것이 없는 자’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왕씨가 평생 주력한 것이 ‘치양지(致良知)’ 한 마디이지만, 세상에서 양지(良知)를 박해하고 떨어뜨린 것이 왕씨보다 심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왕씨가 ‘성인의 도(道)가 나의 본성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도리를 밝히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소위 ‘나의 본성〔吾性〕’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사악하고 그릇된 것과 섞여 바른 본체를 볼 수 없고, 한편으로는 편협하고 정체되어 커다란 전체를 다할 수 없으니, 그 ‘본래 갖추어져 있음〔自足〕’이 어디 있습니까? 도리를 밝히는 공부를 논하자면, 사물과 나에게 있는 이(理)는 원래 둘이 아니니 오로지 마음 안에서 구하려는 것 또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안에서 구하면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고 밖에서 구하면 드러나 밝히기가 쉬우며, 마음에서 구하면 사사로움에 가려지기 쉽고 밖에서 구하면 공공연하여 속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히 하고 감히 사사로운 견해를 내세우지 않으며 일상의 변함없는 윤리를 거듭 연구하고 고금의 사물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음미하고 연역하여, 그것을 많은 성현이 절충한 말로 꿰고 내 마음이 운용〔發用〕할 때 증명함으로써, 작은 꾀와 그릇된 견해의 가림을 제거하고 마침내 크게 적중하고 지극히 바른〔大中至正〕 본체(本體)로 돌아가면, 앞에 이른바 ‘나의 본성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왕씨의 치양지(致良知)설이 본래 간편한 것을 좋아하고, 빠른 것을 즐기며, 새로운 주장에 힘쓰고, 신기한 것을 숭상하는 병에서 나왔으나, 실제 견해의 잘못은 바로 그가 이런 이치를 보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성인이 예를 만든 것은 천리의 자연스러운 절도를 따라 인사의 당연한 준칙을 드러낸 것입니다. 날줄에 해당하는 예〔經禮〕 삼백과 씨줄에 해당하는 예〔緯禮〕 삼천이 각기 변하지 않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왕씨가 애초에 성인이 예를 만든 뜻을 몰라, 한결같이 자기 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따르고 하나의 사념도 갖지 않는 것을 ‘양지(良知)’라고 하며 천연의 잣대라고 스스로 믿고 그것으로써 스스로 행동하고 그것으로써 사람들을 인도하니, 천하를 이끌어 예의를 해치는 데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임신년(1872, 고종9) - 41세 - 상복을 벗다. 큰 형 가족이 서울과 고향을 왔다갔다하여 경비가 부족했는데, 그 때마다 선생이 가산을 나누어 도와주었다. 조상의 사판(祠板 신주)과 돌아가신 부모의 궤연(几筵)도 임시로 받들었다. 이 해에 신주를 제자리로 옮겨 모셨지만, 계속해서 시제(時祭)와 기제(忌祭), 묘제(墓祭) 때에 물품을 빠짐없이 갖추고 농토를 마련하여 예(禮)에 따라 제례(祭禮)를 도왔으며, 인재를 기르고 손님을 접대하고 강회를 열고 예를 익히는 비용까지 썼는데, 각각 실정(實情)에 걸맞게 하려고 힘썼다. 대개 선생의 집안 살림은 참판공이 특별히 내려 준 독서량(讀書糧)으로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는데, 안팎으로 쓰는 경비가 이와 같아서 결국 궁핍해졌다. 자신의 살림은 매우 부족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계유년(1873, 고종10) - 42세 - 2월, 아들 의석(毅錫)의 관례를 치렀다. 김 선생〔김평묵〕이 관례를 주관했다. 여름, 〈화서선생연보〉를 편찬했다. 9월 초하루 아침에, 낙은공(洛隱公) 영정에 작헌례(爵獻禮)를 올리고 계사(戒辭)를 읽는 옛 의식을 행하였다. 선생이 상복을 벗은 후, 사당이 조금 멀어서 매일 신성(晨省)하는데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주자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유상(遺像)을 거처하는 집 안당〔正堂〕에 봉안하고 신알례(晨謁禮)와 삭망참례(朔望參禮)를 행했으며, 음력 9월 초하루에는 간략하게 일헌례(一獻禮)를 진설하였다. 삭망(朔望) 때면, 참알을 한 후 부인과 나란히 앉아 자녀에게 절을 받고 계사(戒辭)를 읽게 했다. 계사는 곧 낙은공이 살아계실 때 지은 것이다. 11월, 최면암(崔勉菴) 익현(益鉉)과 유기일(柳基一)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崔)공은 선생과 함께 화서(華西) 선생을 섬겼다. 유생(柳生) 역시 화서 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 모신 적이 있었고, (성재)선생에게 배웠다. 당시 최 공이 대관(臺官) 신분으로 올린, 국정을 논한 소(疏) 때문에 국문(鞠問)을 당하고 하옥되었다. 유생은 상소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같은 날 체포되었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두 벗이 모두 병든 몸으로 차디찬 옥중에 갇혀 있는데 차마 따뜻한 방에서 뒹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요와 이불을 치웠다. 갑술년(1874, 고종11) - 43세 - 봄, 조종암(朝宗巖)에 들어가 대통단(大統壇)에 엎드려 절했다. 조종암은 가평(加平) 조종천(朝宗川) 가 대보산(大報山) 기슭에 있다. 처음에 창해(滄海) 허격(許格) 공이 군수(郡守) 이제두(李齊杜), 그 지역의 사(士) 백해명(白海明)과 함께 열황제(烈皇帝 명 의종)의 글씨 ‘사무사(思無邪)’ 세 글자와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 여덟 자를 새겼다. 그리고 송자(宋子 우암 송시열)가 쓴 효종대왕의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이라는 말도 새겼다. 효종을 따라 동쪽으로 온 명나라 아홉 의사(義士)가 있었는데 왕상생(王庠生) 이문(以文)이 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후손 덕일(德一), 덕구(德九) 두 공(公)이 그 아래에 단을 쌓아 대대로 지키면서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를 제사 지냈는데 그 단을 대통행묘(大統行廟)라 하였다. 또 아홉 의사를 제사 지냈는데 그 단을 구의행사(九義行祀)라 하였다. 이 때 선생이 여러 생도를 데리고 와서 절하고 임금의 글씨를 살핀 후, 화서(華西) 선생의 유지에 따라 언덕 아래 큰 바위 위에 정자를 지으려고 ‘견심(見心)’이라고 미리 이름 지어, 문인(門人) 김영록(金永祿), 이재성(李在成)을 시켜 그 바위에 새기게 했다. 이 이름은 복괘(復卦) 단전(彖傳)에 나오는 글에서 취했다. 또 문인 김생〔金永祿〕에게 앞뒤의 문적(文籍)을 편집하게 하여 《조종암지(朝宗巖誌)》라 명명하고 선생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천지 사이에 ‘왕자(王者)의 대일통(大一統)’보다 엄정한 것은 없다. 주(周)나라 말에 열국이 ‘왕(王)’을 참칭하자 사람들이 존비(尊卑)에 대해 의혹을 가졌으나 공자가 《춘추》를 지어 ‘천왕(天王)’이라 큰 글씨로 쓰고 ‘왕 정월(王正月)’을 쓴 연후에야 대통(大統)이 강대하다 하여 둘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촉한(蜀漢) 때, 한(漢) 황실의 종통(宗統)이 끊어지고 중국의 판도가 모두 조씨(曹氏)에게 돌아가자 소열제(昭烈帝)가 황실의 먼 친족으로 한 구석진 땅에 몸을 붙여 살았고, 당(唐) 무후(武后) 때는, 무후가 황제의 자리를 참람하게 차지하고 국호를 고치자 중종(中宗)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초야에 묻히고 말았다. 이는 《춘추》에 없던 변고라서 사람들은 대통(大統)이 그들에게 이전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이 때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지어 ‘장무 원년(章武元年 촉한 소열제의 첫 연호)’이라 큰 글씨로 쓰고 ‘황제〔당 중종〕가 방주(房州)에 있다’고 쓴 연후에야 대통이 미약하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원(元), 청(淸)의 시대에는, 이적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황제의 대통이 한 줄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또한 《강목》에는 없는 변고여서 사람들은 결국 대통을 이적(夷狄)이 차지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송자(宋子 우암 송시열)가 ‘참람한 것이지 올바른 것이 아니며, 거짓이지 참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쳐, 원(元)에 대해서는 ‘타환첩목이(妥懽帖睦爾 원 순제) 5년’이라 하고, - 포은(圃隱) 선생 비(碑) - 청(淸)에 대해서는 ‘숭정후(崇禎後) 몇 년’이라고 칭하였다. 그 후 나의 스승 이 선생(李先生 화서 이항로)이 다시 그 의리를 펼쳐 예(例)에 따라 《화동합편강목(華東合編綱目)》에서 명분을 바로잡은 연후에야 천지간에 양기(陽氣)가 다 사라지는 날도 없고 대통(大統)을 바꿀 수 있는 날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오호! 이 설을 아는 자는 천지(天地)의 마음을 알 것이다. 원조(遠祖) 영밀공(英密公)의 신단(神壇)을 설치하다. 공의 묘〔衣履藏〕는 원래 풍덕(豊德) 미륵산(彌勒山)에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공의 아들 판밀직공(判密直公)의 묘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선생이 묏자리를 바라보고 단을 쌓아 제사 지낸 옛 예법의 사례에 의거하고 호남의 여러 종가와 두루 의논하여, 공〔영밀공〕의 손자 충정공(忠正公)의 묘 곁에 위 아래로 단 두 개를 쌓고 비(碑)를 세워 표시했다. 매년 10월마다 세일제(歲一祭)를 행했다. 충정공 묘는 같은 군(郡) 해정촌(海井村)에 있다. 4월, 호남으로 가서 전재(全齋) 임(任)선생 헌회(憲晦)께 인사하다. 전재 선생은 독실하게 학문하고 맑게 수양하는 데다 높은 덕과 지극한 행실을 가졌다. 선생이 항상 경모했는데, 가서 배알하고 격언(格言)과 정론(正論)을 듣고 돌아와 〈서신잠(書紳箴)〉을 지었다. 또 주고받은 편지도 많다. 이 행차에 안성(安城)을 지나다가 유심재(柳心齋) 시수(始秀)와 홍대심(洪大心)을 방문하여 강회(講會)를 열고 향사례(鄕射禮)를 익혔다. 이현성(李玄成), 이장우(李長宇), 황익진(黃益鎭) 등이 함께 했다. 7월, 며느리 신씨(申氏)를 곡하였다. 신씨는 부덕(婦德)이 있었고, 자식 없이 죽었다. 선생이 몹시 슬퍼 며느리를 위해 광지(壙誌)를 지었다. 겨울, 《화서선생아언(華西先生雅言)》을 간행하였다. 선생이, 선사의 전집(全集)을 즉시 간행하여 널리 알려야 하나 일의 형세와 자금 문제에 얽매여 엄두를 낼 수 없지만, 《아언(雅言)》은 소편(小編)이니 그나마 힘을 쏟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동문 사우와 한 해 정도의 일정으로 계획했다. 목재를 한성(漢城)으로 운반하고, 양공(梁公) 헌수(憲洙)와 김생(金生) 영록(永祿)에게 부탁하여 공인을 불러 모아 일을 주관하게 했다. 일이 끝나자 목판을 벽산(蘗山) 유택(遺宅)에 보관하고 사방 학자에게 마음대로 찍어가게 하여 널리 배포 했다. 을해년(1875, 고종12) - 44세 - 4월, 선부연(仙釜淵)을 유람하다. 연못은 청화산 자락에 있다. 홍대심 등 여러 사람이 따랐다. 〈화서선생을사유상(華西先生乙巳遊賞)〉을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는데, 유기일(柳基一)이 때마침 와서 선생이 또 시 한 수를 지었다. 병자년(1876, 고종13) - 45세 - 정월,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자 소장을 올려 벼슬자리를 내 놓고 물러났다. 홍재귀(洪在龜) 등 여러 사람이 소를 올려 왜와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를 배척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해에 왜노(倭奴)가 군대를 몰고 와서 오랜 우호관계를 회복하자고 요구하자, 조정의 논의가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 “이제 서양 놈이 따라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으니, 우리는 머지않아 공자의 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이는 다른 정사(政事)의 득실에 비할 것이 아니다. 조정에는 어째서 간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선생의 외사촌 동생 윤정구(尹貞求)는, “유생에게 원래 수신(守身)의 의리가 있어서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에 대해 자신의 직분을 벗어나 진언(進言)하면 안되지만, 이 일은 융통성 없이 상법(常法)만 지키면서 무심하게 좌시해서는 안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그 뜻이 옳다고 여겨 김 선생(金先生)〔김평묵〕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김 선생은, “주부자(朱夫子)께서는 나라의 존망과 관계된 것이라면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해도 말할 수 있는 의리가 있다고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일은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제만이 아니다.”라 말했다. 이에 생도와 사우 쉰 명에게 그 날로 소장을 쓰게 하고, 궐 아래에 엎드려 바치게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 당시 면암(勉菴) 최공(崔公)이 도끼를 들고 궐 아래에 엎드렸다가 결국 유배당하고 말았다. 선생이 통곡하며 여러 문하생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나라에 깃들어 있던 화하(華夏)의 인도(人道)가 모두 무너져버리고 천지가 어둡고 혼란한 곳으로 빠져들 것이다. 어느 청산에 우리가 스스로를 깨끗이 지키고 도리를 다 할 곳을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5월, 식구를 데리고 가릉(嘉陵)에 들어가다. 처음에는 옥계리(玉溪里)에 집을 정했지만 사정이 맞지 않아 군(郡) 소재의 경화관(景華舘) 부근에 임시로 살다가 이듬해에 자니대(紫泥㙜)에 정착했는데, 한적하고 넓으며 뒷 편에 조종암(朝宗巖)을 품었다는 점을 취했다. 재종질 인석(麟錫)과 봉석(鳳錫), 족생(族生) 중악(重岳)과 중룡(重龍)이 이재성(李在成)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근처에 와서 살았다. 김 선생〔김평묵〕은 자니대의 동남쪽 귀곡리(龜谷里)에 정착했다. 귀곡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족형 신재공(信齋公) 중식(重植)이 살았는데 그 아버지 보산공(甫山公)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면서부터 이미 산중(山中)의 주인이었다. 이 곳에 온 후로 사우(士友)를 초대하고 후진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열흘 마다 김 선생 문하에 모여 강학(講學)했다. 단(壇)을 설치하여 예를 익히기도 하고, 개울가에서 술잔을 주고받기도 하며, 사방의 사(士)로서 참석한 사람과 함께 했다. 매년 열황제께서 사직을 위해 돌아가신 기일(忌日)에는 대통단(大統壇)에 가서 참배했다. 〈옥계산수기(玉溪山水記)〉를 짓다. 선생이 정착한 후, 김 선생〔김평묵〕을 모시고 친구와 문하생을 데리고 옥계동(玉溪洞)에 갔다. 숨겨진 절경을 샅샅이 찾아 ‘구곡(九曲)’을 얻었는데, 각각 와룡추(卧龍湫), 무송암(撫松巖), 탁영뢰(濯纓瀨), 고슬탄(鼓瑟灘), 일사대(一絲臺), 추월담(秋月潭), 청풍협(靑楓峽), 귀유연(龜遊淵), 농원계(弄湲溪)라 이름 붙였다. 풍호대(風乎㙜), 광영담(光影潭), 장인암(丈人巖), 삼수오(三秀塢), 백운벽(白雲壁), 우록천(友鹿川), 필동천(必東川)도 모두 빼어난 절경이지만 구곡의 부속으로 삼았다. 이름을 정한 후 바위에 새겨 강기(綱紀)로 삼고, 또 시문(詩文)을 지어 아름답게 드러내었다. 매년 따사로운 봄이나 서늘한 가을에 꽃 피고 물 맑을 때마다 아래 위를 소요(逍遙)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오면 한가롭게 증점(曾點)과 함께하고픈 생각이 든다. 또 구곡(九曲)의 발원지에서 봉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줄기 물이 수백 장 푸른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데 무봉폭(舞鳳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곳 또한 선생께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 곳이다. 정축년(1877, 고종14) - 46세 - 정월, 큰 형 학생공(學生公)을 곡하다. 6월, 홍대심(洪大心)의 부고를 듣고 자리를 만들어 곡하다. 대심(大心)은 유심재(柳心齋)와 함께 가학(家學)이 모두 남인(南人)의 맥을 이었다. 대심은 처음에 심재에게서 과거공부를 배우다가 방향을 바꾸어 함께 경학(經學)을 공부했다. 또 개연히 뜻을 분발한 후 사방을 떠돌다가 화서 선생을 만나 주자(朱子)와 송자(宋子)의 도를 듣고 몸을 의탁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또 선생과 김 선생을 모시고 자신이 화서 선생께 들은 내용을 거듭 토론한 후, 미련 없이 정학(正學)으로 돌아섰으며 또한 선생과 김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심재와 원근의 벗과 함께 학문방향과 나아갈 길을 바로잡았는데, 일취월장하여 거침없이 대성(大成)할 기세가 있었다. 그러나 중년(中年)이 되기도 전에 죽어 선생이 몹시 가여워했다. 가마(加麻)를 한 채로 제문(祭文)과 묘표(墓表), 행장(行狀)을 지었다. 전재 임 선생의 부고를 듣고 자리를 만들어 곡하다. 삼 개월 가마(加麻)하고 제문을 썼다. 〈홍무향음례(洪武鄕飮禮)〉의 유전(遺典)을 살펴 바로잡고, 고을의 어른께 잔치를 베풀었는데, 인석(麟錫)에게 행사를 주관하게 했다. 무인년(1878, 고종15) - 47세 - 정월, 유기일(柳基一)의 편지에 답했다. 기일(基一)이 선생에 대해 매우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여 “중화(中和)하신 대덕(大德)이 안연(顔淵)과 명도(明道)에 비교할 만 하다”라고까지 말했다. 또 선생이 지은 《삼서연의(三書衍義)》를 읽고서 “백수(百獸)가 모두 춤출만하다”라고도 했다. 항상 화서(華西) 선생과 선생을 똑같이 우러르고 따랐다. 선생은 기일의 지향(志向)이 한창 새롭고 문사(文辭)에도 능해서 깊이 보살피고 아꼈으며, 모질고 괴팍하고 허명을 좋아하고 쉽게 의심하고 잘 성내는 성격에 대해서는 만날 때마다 주의를 주어 고치게 했다. 병자년(1876, 고종13),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릴 때, 선생은 김 선생〔김평묵〕께 말씀드려, 연명 상소문 맨 앞에 기일(基一)의 이름을 쓰고 글은 인석(麟錫)이 쓰도록 했다. 그런데 제생(諸生)이 궐 앞으로 갈 때가 되자 모두 기일의 이름을 맨 앞에 쓰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도 있어, 선생은 결국 인석을 소수(疏首)로 정했다. 기일이 서운해 하며 성을 내자 선생은 곧 사과했다. 그러나 기일은 줄곧 으르릉 대며, 그가 하는 ‘척양(斥洋)’은 천리(天理)에서 나왔고, 선생이 하는 ‘척양(斥洋)’은 인욕(人欲)에서 나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김 선생〔김평묵〕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 통렬하게 꾸짖었다. 사우(士友)도 모두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기일은 듣지 않고 오히려 김 선생이 참언을 듣고 자신을 미워한다고 말했다. 결국 중암, 성재 두 집안과 오랫동안 관계를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 이 해 선생의 큰 형 탈상(脫喪)일에 위장식(慰狀式)을 베껴 보내면서 “칩거하면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어 위문드릴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나는 사과했는데 오히려 처벌을 기다린다고 하니, 이는 나와 관계를 끊고 싶은데 차마 먼저 끊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답장을 보내 절교를 고했다. 오랜 뒤에야 최면암이 그와 함께 와서 사죄하도록 권했다. 기일이 억지로 사죄한다고 말했지만 성이 풀리지 않아 불만이 가득한 듯 했다. 갑신년 훼복(毁服)령이 내려오던 날에, 선생은 면암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옛 것을 지키면서 변치 않는 그의 태도를 칭찬했다. 이에 선생에게 와서 인사하고, 동문(同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스스로 다시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3월, 유심재의 부음을 듣고 자리를 만들어 곡하였다. 심재(心齋)는 대심(大心)과 함께 선후로 세상의 논의를 바로잡았다. 화서 선생을 뵙지 못한 것을 몹시 한스럽게 여겨, 화서 선생의 영연(靈筵)에 뒤늦게 술을 한 잔 올리고, 김 선생과 선생을 따르며 주자(朱子), 송자(宋子)의 학문을 강학했다. 선생은 심재의 심법(心法)이 공정하고, 덕행이 고결하다고 여겨 매우 깊이 공경하고 아꼈다. 이 해에 죽자 그를 위해 가마(加麻)하고 제문과 행장을 지었다. 전자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재 임공께서 돌아가시고, 김 선생이 쓴 제문에 “맑은 수행과 꼿꼿한 절개는 속수옹(涑水翁)을 닮았고, 한 겨울의 송백처럼 기개를 잃지 않으니 강후(康侯)의 기풍을 지녔다. 화정(和靖)처럼 자신을 엄격히 지키고, 부옹(涪翁)처럼 원칙이 있었다. 연잎 옷 입고 난초 허리띠 하고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개 훌륭함을 더할 수 없이 칭찬한 글이다. 전우(田愚)는 터무니없게도 의혹을 제기하고 억지 해석을 달아 그의 스승을, 북위(北魏)를 정통으로 삼은 온공(溫公)과 진회(秦檜)에게 우호적이었던 강후(康侯), 채경(蔡京)에게 너그러웠던 화정(和靖), 만주족에게 절한 미촌(美村) 등과 비교했다고 하여 제문(祭文)을 돌려보냈다. 또 화서 선생의 ‘명덕주리론(明德主理論)’과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달려가 임금의 안부를 물었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멋대로 비난하고 배척했다. 선생은 편지를 써서 사실을 밝히고 의(義)에 따라 절교를 고했다. 대개 병자년(1876, 고종13) 강화(講和)하던 날 임공의 작명(爵名)이 거듭 더해져 좨주(祭主)에 이르자, 김 선생이 좨주가 된 것을 계기로 척화론을 올리자고 권했다. 그 말이 자못 절실했으나, 전우에게 미움을 받아 욕을 당하고, 무고하는 말이 위로 사문(師門)과 사마광, 호안국, 화정 등 여러 대현(大賢)에게까지 미쳤기에, 선생이 이렇게 의(義)에 따라 처신했던 것이다. 4월, 양구(楊口) 해안산(亥安山)에 들어가다. 선생이 평소 허증(虛症)을 앓았는데, 의원이 사슴피를 마시라고 권해서 이러한 행차가 있었다. 인석과 이진응, 이소응, 이재성이 따랐다. 5월, 철종왕비(哲宗王妃)가 승하하여 망곡례를 행했다. 가을, 서경당(徐絅堂) 응순의 부음을 들었다. 서공은 위엄 있고 굳센데다 관대하고 마음이 넓었다. 견식이 밝고 몸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나라 일에 임해서는 자애롭고 은혜로웠다. 늘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을 임무로 여겼다. 선생은 서공과 사이가 좋아 문(文)과 도(道)의 본말(本末)에 관한 설과 일본과 서양을 토벌해야 하는 의(義)를 논한 적이 있었다. 이 해에 죽자 선생이 몹시 마음 아파하며 제문을 써서 족생 중룡(重龍)을 보내 술 한 잔을 올리게 했다. 족보 제작소의 여러 종친에게 편지를 보내다. 이 해에 여러 종친이 족보를 만들었는데, 선생이 범례를 마련해 둔 터였다. 그 범례에 따라 편지를 써서, 족조(族祖) 어우공(於于公)의 간세입후(間世立後)가 잘못되었고, 또 계파(系派)를 바르게 정리해야 된다는 의리를 철처 하게 논했다. 겨울, 옥계정사(玉溪精舍) 당(堂)과 실(室)의 명(銘)을 짓다. 자니대에 거처하면서도 ‘옥계(玉溪)’로 정사의 이름을 지은 것은, 대체로 선생이 이 계곡이 아름다워서 이 산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헌(軒)에 ‘강극당(剛克堂)’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어릴 때 김 선생에게 받은 가르침이었다. 오른쪽 실(室)을 ‘성재(省齋)’라 했는데, 이는 화서 선생께서 써 주신 것이다. 왼 쪽 실을 ‘존재(存齋)’라 했는데, 이는 맹자(孟子)의 ‘존양(存養)’ 설에서 취하여 직접 이름 붙인 것이다. 내당(內堂)은 ‘충효당(忠孝堂)’이라고 했다. 명나라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 공이 남긴 글씨를 모사한 것이다. 왼쪽 두 방은 부인이 쉬고 길쌈하는 곳인데, 하나는 ‘빈경실(賓敬室)’이라 하고 하나는 ‘부갈실(賦葛室)’이라고 했다. 오른쪽 두 방 중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지 초상화를 봉안하고 ‘여재합(如在閤)’이라 하고, 하나는 여러 부녀자가 함께 거처하는 곳으로 ‘무상유실(無相猶室)’이라고 했다. 글을 지어 이름을 정한 뜻을 기록하고 하나하나마다 현판을 새겨 걸어 항상 스스로 경계했다. 기묘년(1879, 고종16) - 48세 - 느낀 것이 있어 지은 시 한수를 문인에게 보여주었다. 시(詩)는 다음과 같다.
참된 근원은 진실로 멀지 않으니 / 眞源諒無遠 어떤 만물이든 즐거움을 얻지 못하랴 / 何物非自得 이제 화병과 어항을 / 甁花與盆魚 책상 옆에 두지 않으리라 / 不復置案側
선생이 화병과 어항을 곁에 두고 자주 완상(玩賞)했다. 이 해에 화병과 어항을 치우고 이 시를 지었다. 이범오(李範五)가 읽고, “선생께서 오랫동안 도에 나아가셔서 좌우 어디로 나아가든 그 근원을 만나는 경지가 되셨구나!”라며 감탄했다. 9월, 자양서사(紫陽書社)를 짓기 시작했다. 선생이 한포(漢浦)에 계실 때부터, 회암, 우암, 화서 세 선생의 유상(遺像)을 정사(精舍)에 보관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폭건(幅巾)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흑대(黑帶)를 두르고 제생(諸生)를 거느리고 유상에 엎드려 절했다. 절을 마친 후 제생의 절을 받고, 제생에게 서로 읍한 후 앉게 하여 〈백록동서원학규(白鹿洞書院學䂓)〉를 읽게 했다. 한포로부터 북쪽으로 옮겨 살았는데, 옥녀봉 자니대 남쪽이 회옹이 살던 곳과 일치하고, 또 조종암에는 우암의 필적이 있으며 와룡추에는 화서(華西)의 시가 있어서였다. 선생은 그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정사 동쪽에 서사(書社)를 지어 문도(門徒)와 사우(士友)가 강학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 자니대 북쪽 절벽 아래에 감실(龕室)을 설치하여 세 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시고자 했는데, 집을 지은 후 수년 간 세상 일 때문에 동악(東岳 금강산)으로 도피하여 이룰 수 없었다. 선생은 중악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주자는 열성(列聖)에 대한 제사를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행하면서 연평(延平)도 배향했다. 내가 주자, 송자 두 선생에 대해 그리는 마음을 펼치고, 선사(先師)에 까지 미친 것은 본래 그 근거가 없지 않다. 선사의 학문이 성(誠)과 경(敬)에 근본을 두고 이(理)와 기(氣)를 각각 수(帥)와 역(役),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공사(公私)와 대소(大小)로 구분하려 힘을 쏟았으니 성학(聖學)과 비교해 보아도 분명히 큰 종지(宗旨)를 얻었다. 《송원화동사합편강목》을 편수하면서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통서(統緖)를 삭제했고, 《주자대전차의집보》로 주자의 학문을 밝혔다. 우옹을 지극히 높여 공자, 주자의 공(功)과 짝 지웠고, 서양 오랑캐를 성토하여 사람과 짐승을 엄밀하게 구별했다. 이러한 일 몇 가지는 옛 가르침을 다시 세워 성문(聖門)을 빛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을진대 공의(公義)에 따라 두 현자(賢者)에게 배향해도 잘못은 아니다.” 선월대를 짓다. 정사의 뜰 가장자리에 동향으로 누대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머물고 예를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겨울, 《삼서연의(三書衍義)》를 펴냈다. 선생은 《중용(中庸)》에 대해 공부가 가장 깊었다. 《중용장구(中庸章句)》와 《중용혹문(中庸或問)》에 의거하여 충분히 익히고 거듭 연구하여 심조자득(深造自得)한 것으로 설을 짓고, 또 삼대(三代)의 기록까지 소급했는데, 특히 요(堯) 임금이 순(舜)에게 선양하고 순 임금이 우(禹)에게 선양한 이야기와 홍범(洪範)의 황극설(皇極說)에 대해 채침의 전을 바탕으로 부연(敷衍)하여, 요 임금이 말한 ‘집중(執中)’이 인도(人道)의 지극함이고, 순 임금이 말한 ‘위미정일(危微精一)’ 설이 중(中)을 잡는〔執中〕 공부이고, 기자가 조술한 ‘대우황극(大禹皇極)’ 설이 중(中)을 잡는 효용임을 밝혔다. 그 논설이 지극히 타당하고 밝았는데, 글 가운데서 잘못된 이해와 어지러운 주장으로 세상에 화를 불러일으킨 한나라 유자(儒者)를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제목을 《삼서연의》라 하였는데, 이 때에 좀 더 가다듬고 후서(後序)도 간략하게 덧붙였다. 경진년(1880, 고종17) - 49세 - 석강(夕講)을 행했다. 선생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한참을 정좌(靜坐)하고 나서 〈경재잠(敬齋箴)〉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의 글을 읽었다. 저녁이 되면 선생은 북쪽 벽 아래에서 남쪽을 향해 자리를 잡고, 제생(諸生)은 일렬로 북쪽을 향해 읍을 하고 앉는다. 선생이 고금(古今)의 명(銘)과 잠(箴) 등을 한두 편 읽으면 제생도 읽었는데, 나이 순서대로 읽거나 제비를 뽑아 읽기도 했다. 읽기를 마치면, 제생 두 사람이 서쪽 벽으로 가 동쪽을 향하여 〈관저(關雎)〉 등 주남(周南) 시 몇 편과 〈녹명(鹿鳴)〉등 소아(小雅) 시 몇 편을 불렀고, 한 사람은 동쪽 벽으로 가 서쪽을 향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노래와 연주가 끝나면 일제히 읍한 후 석강(夕講)을 파했다. 신사년(1881, 고종18) - 50세 - 정월, 김 선생〔김평묵〕과 함께 연명(聯名)하여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遜)에게 편지를 썼다. 앞서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와 기괴한 책을 안팎에 배포하였고, 조정은 미국과 연합하여 서양 군대를 불러들이려 했다. 이 해에 이르러 기무영(機務營)을 설치하고 현판을 크게 걸어두고는 날마다 서양과 교통할 방법을 강구했다.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遜) 등 만 여명은 궐로 달려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상소문을 올렸다. 선생과 김 선생〔김평묵〕은 그 소본(疏本)을 읽고, “오늘 이 거사(擧事)는 우리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후세(後世)에게 할 말이 있게 해주었다. 이만손(李晩遜)은 선정(先正)의 후손으로서 이 일을 앞장서서 이끌었으니 더욱 귀하다.”라며 함께 칭찬했다. 만독재(晩讀齋) 이호(李浩)가 조심스럽게 한 번 가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하자,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이 뜻도 좋습니다. 우리는 평소 자신의 도리를 지키는 것을 의(義)로 삼았으니, 급히 가서 함께 상소문을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그 뜻이 같다는 것은 속일 수 없습니다. 글을 한 통 보내어 옛사람이 태평을 외쳤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김 선생이 허락하자 글을 지었는데, 먼저 산속에 사는 우리가 애초부터 도리를 지키는 것을 의(義)로 삼았던 뜻을 말하고, 다음으로 영남 유생이 앞장서서 상소문을 올린 공로를 말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목숨을 바쳐 앞으로 나아가 멈추지 않는다면 팔도 사민(士民)도 반드시 메아리처럼 호응할 이치가 있을 것이라 말했다. 글의 기운과 억양이 곳곳에 준엄하고 격렬한 곳이 있었다. 선생과 모임을 같이하는 몇 사람이 글 끝에 이름을 덧붙였다. 만독은 김 선생 손자 춘선(春善)과 선생 아들 의석(毅錫) 등 몇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다. 서울에 도착할 무렵, 이만손은 함께 상소문을 올린 사람의 말에 따라 곧장 안동으로 돌아갔다. 만독은 편지를 소매에 넣은 채 돌아오려다가 부본(副本)을 그 곳에 남은 사람에게 보여주며 여기까지 오게 된 뜻을 알려주었다. 편지 내용이 전해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이를 비난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은 옳고 그름의 판단은 후세의 군자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 뜻이 깊이 생각한 것이 있어서이지 공연한 것은 아니었다. 또 선생을 걱정하는 자도 있었는데,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화(禍)와 복(福)은 하늘에 달렸다고 여기며 끝까지 개의치 않았다. 8월, 의금부 앞으로 가서 소장(疏狀)을 올리고 죄를 청했다. 당시 영남 유생이 재차 상소문을 올리자, 경기(京畿), 호서(湖西), 관동(關東), 호남(湖南)의 유생이 잇달아 상소문을 올렸는데, 모두 가릉(嘉陵)에서 쓴 글을 인용하고 중요하게 여겼다. 여러 지역에서 올린 상소문이 조정에 들어가자 사형(死刑)과 유배가 이어졌는데 관동(關東)에서 올린 상소문의 배후로 또 가릉 산 속에 사는 사람을 지목하였다. 세상이 흉흉해지자, 대사간(大司諫) 이원일(李源逸)이 상소하여 김 선생이 투서한 죄는 먼 곳으로 유배 보내는 엄벌에 해당한다고 논했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또 합계(合啓)하여 준엄하게 조사하여 실정을 밝히기를 요청하자 결국 외딴섬에 안치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김 선생이 옥에 갈 때, 선생은 행렬을 따라 의금부(義禁府) 앞 까지 와서, 글을 올려 연명(聯名)하여 투서한 실정을 직접 진술하고, 연유를 갖추어 계달(啓達)하여 무거운 처분을 함께 받고자 청했다. 그러나 판당(判堂) 신헌(申櫶) 공은, 본 부(本府)에 정장(呈狀)을 받들어 입계(入啓)하는 법은 없다며 소장을 돌려보냈다. 선생이 다시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이 “소장이 금당(禁堂)에 올라갔을 터인데 금당 또한 조정회의에 참여한다. 조정에서 죄를 주려고 하면 의거할 것이 없어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니 두 번 올릴 필요는 없겠다.”고 하였다. 이에 집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렸다. 다음 날 김 선생이 유배지로 떠났다. 선생은 남쪽 교외까지 전별하고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처신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선생이 대답했다. “저는 중암 선생과 비교하면 죄는 같으나 처분이 달랐습니다. 조정에 있어서는 협박에 못 이겨 부득이 죄를 같이 지은 경우 다스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하였겠지만, 제 분수와 의리에 있어서는 어찌 차마 저만 편안히 지내면서 제 스승만 홀로 험난한 유배 길의 고통을 감수하게 하겠습니까? 의금부에 가서 그 죄를 나누어 받기를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산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자처한 것은, 함께 물러나고 폐기되고자 하는 의리에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홍재학(洪在鶴)을 곡했다. 재학(在鶴)이 관동의 소수(䟽首)로서 사형(死刑)을 받았다. 선생이 듣고 크게 통곡했다. 이어 김 선생이 유배형을 받자, 선생은 처벌을 기다리다 떠나는 김 선생을 전별하고 돌아와 즉시 글 몇 줄을 써 가지고 가서 술을 한 잔 올렸는데, 대체로 주자가 채계통(蔡季通)에게 한 일과 같았다. 후에 다시 제문을 썼다. 11월,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품계가 오른 뒤 관직의 물망에 올랐으나, 즉시 설악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시 사림(士林)은 거듭 참벌(斬伐)을 당하였지만 강화(講和)하는 일은 날로 심해만 갔다. 팔도의 군민(軍民)이 모두 기운을 잃고 실망했으나 조정은 인심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래서 선생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관직을 제수하려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나는 내 스승과 ‘척사척화(斥邪斥和)’의 의리를 함께 가졌는데, 스승에게는 유배라는 처벌을 씌우고 나에게는 영화로운 명예로 얽어매려 하니, 이는 결코 조정이 나를 절조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여러 동지(同志)에게 작별을 고한 후 곧장 설악산으로 향하며 길이 은둔하려고 생각했다. 이재성(李在成)과 서상범(徐相範)이 따라 나섰다. 도솔산방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대(外臺)의 직첩이 자니대(紫泥臺)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태극도설대지(太極圖說大指)》를 저술했다. 《소학설(小學說)》을 다시 수정하고 또 《대학설(大學說)》을 지었다. 《대학》과 《소학》에 대해 쓴 글이 있었는데, 합도(合圖)를 거기에 붙였다. 또 《논어》와 《맹자》 까지 확대하여 지은 글이 있다. 임오년(1882, 고종19) - 51세 - 봄, 병이 들어 춘천 가정(柯亭)으로 돌아와 살았다. 산에 들어간 지 수개월간 물과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병이 났다. 선생은, “나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 경기도를 떠나 관동(關東)으로 들어왔는데, 이는 금강산(金剛山)과 설악산(雪嶽山) 사이에서 스스로 도리를 다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병에 걸려 오래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이 곳 관동 경내를 생각해 보니 두 산을 빼면 그 다음으로는 오직 춘천〔壽春〕에 산이 있는데, 조상의 무덤이 있어서 몸을 의탁하고 스스로를 수양하며 천명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가정으로 돌아와 작은 집을 빌려 그 곳에 살았다. 선생이 여기에서 멈추고 다시 기내(畿內)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바로 초심을 바꾸려고 하지 않아서이다.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저술했다. 선생은, “사람이 사람이 되는 까닭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큰 도(道)를 가져서이다. 오늘날의 사람이 이적과 금수의 화(禍)에 빠지는 것은 그 도가 지극히 크다는 것을 참으로 알지 못해서이다.”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설(說)을 지어 통렬히 이를 밝히고, 사방의 사(士)를 모아 강론의 자료로 삼아 부끄러움을 알고 상도(常道)로 돌아오게 하여 사특한 세상의 혼란함에서 모두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9대조 취흘공(醉吃公)의 유집을 간행했다. 취흘공의 초고 약간이 여러 자손 집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선생이 정리하여 남길 것은 남기고 뺄 것은 빼서 두 권으로 편집하고, 여러 종친과 상의하여 출판한 후 나누어 보관했다. 6월, 황계 이공의 부음을 듣고 자리를 설치하여 곡을 하였다. 3개월 간 가마(加麻)하고 제문(祭文)을 썼다. 난군(亂軍)이 궐을 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때, 나라 재정이 고갈되어 각 영이 군인에게 지급할 봉급을 몇 개월 동안 지급하지 못했다. 영에 소속된 군인이 어느 날 밤에 부대를 조직하고 갑자기 궐내로 진입하여 멋대로 난리를 일으켰다.중전(中殿)의 국상(國喪)이 공포(公布)되자 선생은 가평(加平) 관아로 달려가 망곡례를 행했다. 얼마 후, 국상이 와전되어 사실이 아님을 알고, 군중을 따라 상복을 입지 않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8월, 김 선생〔김평묵〕을 맞이하였다. 임오군란 후, 전후의 모든 죄수 가운데 신사년(1881, 고종18)에 상소한 유생(儒生)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다. 중전이 복위한 것도 이달의 일이다. 김 선생도 사면 대상에 속했다.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선생을 만나 탄식했다. “지금 살아 돌아왔으니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 그러나 사면의 은전(恩典)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으니, 내가 상소를 올릴 때 먹었던 마음은 아직 세상에서 결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것이 한스럽구나.” 9월,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소장을 올려 사정을 아뢰고 사적(仕籍)에서 영원히 삭제해 줄 것을 청했다. 관직에 제수된 지 수십일 만에 비로소 정목(政目)을 보았다. 선생이, “그 동안 시일이 오래 지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나라가 강화(講和)할 때부터 나의 의논이 구차하게 같지 않았고, 스승과 벗이 잇달아 화를 당하자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함께 쫓겨나 골짜기에서 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지난겨울 이후, 작명(爵名)이 거듭 올랐는데, 이는 이전에 임금에게 한 마디 말도 올리지 않고 다만 거취(去就)로써 뜻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내 뜻을 드러내기에 부족하여 조정의 잘못된 조치를 부르고 말았다.”라고 말하였다.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천지를 주관하고 만물을 기를 수 있는 까닭은 단지 하나의 도(道)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펼쳐 놓으면 삼강(三綱)이 되고 모아 놓으면 오상(五常)이 되어, 하늘이 내려 준 본성에 근본하고 성인(聖人)이 닦은 가르침에서 드러납니다. 중국(中國)에 행해져 효과를 이루었고, 만세에 드리워져 뒤탈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도에 때때로 굴신(屈伸)과 흥망(興亡)이 있는 까닭은 오직 사방 이적(夷狄)의 풍속이 정교(政敎)를 어지럽혀서 중국과 함께 쇠하거나 성했고, 이단(異端)과 음사(淫邪)의 학설이 그 심법(心法)을 무너뜨려서 정학(正學)과 서로 경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지으신 《춘추》의 뜻은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맹자(孟子)께서 지으신 일곱 편(篇)의 뜻은, 선성(先聖)의 가르침을 지키고 음사를 내쫓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 모두는 《주역》의 양을 부추기고 음을 억누르는 도에 근본하며, 대우(大禹)가 홍수를 막고 무왕(武王)이 맹수를 몰아낸 것과 그 공로가 같습니다. 공자와 맹자 이후, 이적의 화(禍)는 날마다 심해지고 음사의 폐해는 그 단서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송나라의 주자(朱子)와 우리나라의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각기 자신이 당한 변고를 바탕으로 《춘추》와 《맹자》의 의리를 잘 밝혀서 한번 크게 다스리는 공을 이루었습니다. 근래에 세상에 괴상한 짓을 일삼는 양이(洋夷)는 또한 이적에서 다시 떨어져 금수가 된 자들이며, 음사가 극에 달해 도깨비가 된 자들입니다. 가령 성현이 계셨다면 토벌하는데 전보다 백 배는 더 힘을 쓰셨을 것입니다. 양이가 상도(常道)에 반하고 정도(正道)를 어기는데, 천지(天地)에 있어서는 천지를 모욕하고 오행을 어지럽히며 사람과 귀신을 혼란시키는 세 가지 죄를 다 갖추었고,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떳떳한 인륜을 끊어 없애고 재물과 여색을 어지럽혀 모든 악행을 갖추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중국에 행하였으니 위 아래 모두에게 용납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전쟁 기술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 벌이나 전갈의 독과 같아, 자강(自强)하여 강토(疆土)를 지키지 못하는 세상의 군주가 모두 머리를 숙이고 그들의 명령을 받습니다. 기욕(嗜慾)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 자신의 성정(性情)을 보존하지 못하는 세상의 백성은 모두 침을 흘리며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민첩한 재주와 정교한 술수로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케 하는 것이 또 마치 신기루처럼 허망하여, 새롭고 신기한 것만을 숭상하고 정학(正學)을 버리는 세상의 유생(儒生)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부러워하고 책상을 치면서 기이하다고 소리치며 싫증을 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이적을 물리치는 일을 바라겠습니까? 우리 동방만이 조선이 천명을 받고부터 교화가 크게 밝아져 전장문물(典章文物)은 모두 화하를 따랐고, 학문의 길은 한결같이 낙민(洛閩)을 따랐습니다. 명(明)나라가 멸망할 때에는 곧 이른바 ‘주(周)나라의 예법이 노나라에 있다〔周禮在魯〕’는 말과 상황이 같았습니다. 정조(正祖)대왕 이후, 사교(邪敎)가 처음 들어오는 때를 맞아 공개 성토를 단행하여, “몰래 들어온 양이나 그들에게 전염된 우리 백성을 막론하고 모두 대역부도(大逆不道)와 같은 죄로 다스려, ‘다 죽이고 자식도 남겨 두지 않겠다〔劓殄滅之無遺育〕’”는 조칙을 팔도에 알려 따르거나 미혹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 공이 우(禹) 임금이나 무왕보다 못하지 않아 만세토록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셨을 때, 저들의 군함과 군대가 재차 우리 국경을 침입하자, 또한 온 나라 사람을 움직여 그들을 막아 의로운 명성이 천하에 진동했습니다. 저들은 일본인과 몰래 결탁하여 앞잡이로 삼아 우리나라에 수호(修好)를 청하게 하였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우리와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의리가 있었지만 이후 평족(平族)은 다 멸족되었고 또 두 죄인을 잡아 보내며 공개 처형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은 대충 너그럽게 대하며 말고삐를 잡고 제어하듯이 그들을 다스렸으니, 지금 그들이 와서 수호를 요청하는 것은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 양교(洋敎)를 숭상하고 믿는 것이 모든 나라 가운데 으뜸인데다 자신들의 복색(服色)까지 아울러 다 바꾸었으니, 중국사람 또한 그들을 옛날의 일본이 아니라 새로 생긴 양국(洋國)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군대를 보내 죄를 묻고 대의(大義)를 밝히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그들과 우호를 맺어 국체(國體)를 욕되게 하고, 서양인들에게 따라 들어오는 길을 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조정이 이를 걱정하지도 않고 편리한 대로 그들의 뜻을 따랐습니다. 이로부터 큰 법도가 무너지자, 짐승의 발굽과 새의 발자국이 나라 안에 종횡으로 가득 하였고, 진기한 물건이 사람의 안목(眼目)을 망치고 폐간(肺肝)을 바꾸기에 족하고, 천지를 뒤집고 밤낮을 바꿀 온갖 이단의 서적이 사대부 사이에 가득히 퍼졌습니다. 예전에 바른 말로 배척하던 이가 지금은 도리어 몸을 돌려 따르고, 아침에는 종적을 숨기며 돌아보고 꺼리던 자가 저녁에는 얼굴을 드러내고 떠들어댑니다. 이렇게 육칠년 지나, 올 봄에 이르러 저들이 서양〔泰西〕이라는 이름을 보란 듯이 드러내더니, 그 한 통속인 여러 나라를 이끌고 기세를 떨쳐 우리 국경에 들어왔는데, 조정은 도리어 술과 안주로 맞이하여 우호를 맺고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저들은 시원하게 뜻을 이루었다고 자부하여 ‘온 세상이 하나가 되었다〔宇內大同〕’라는 말을 책(策)에 썼습니다. 이 일은 천지가 개벽한 이후 가장 큰 변고입니다. 유자의 옷과 관을 입거나 쓰고, 선왕의 예의(禮義)를 읽고 본받아 천지의 바른 본성을 잃지 않은 자라면 누군들 한심하고 기가 막혀 온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삼키면서 곧장 칼에 엎어져 죽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안으로 반드시 서양의 군대를 맞이하고 기술을 전수받은 후에야 부국강병을 할 수 있고, 밖으로 반드시 서양과 연합하여 동맹을 맺은 후에야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 이같이 하면 국가를 하루라도 보전할 수 있으나, 이같이 하지 않으면 큰 화(禍)가 아침저녁으로 일어날 것이다. 전일에 엄히 세웠던 방비책도 시대가 지나고 정세가 변하면 고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아! 생각이 너무나 모자랍니다. 선왕의 정치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데에 방도가 있으니 근본에 힘쓰고 말단을 억누르며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내보내는 것일 뿐입니다. 군대를 강하게 하는데에 방도가 있으니 충효(忠孝)를 기르고 절의(節義)를 장려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면서 자기 어른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무기가 날카롭지 못하고 기예가 정교하지 못해도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어찌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으며 극도로 사치하고 지극히 음란한 무리에게 전수받아 부유해 지며, 의리를 등지고 사욕을 따르며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무리에게 가르침을 받아 강해지겠습니까? 외이(外夷)를 방어하는 도(道)에 대해서는, 곧 강상(綱常)을 붙들어 세우고 예의(禮義)를 닦아 밝혀 종국(宗國)을 보전하는 명맥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력이 있으면 또한 비상시의 대비책을 강구하여, 위에서 말한 ‘근본에 힘쓰고 용도를 절제하고 백성을 아끼고 윗사람을 친근히 여기게 한다’는 말과 같이 하면, 저 이적이 비록 강하고 사납다고는 하지만 또한 사람의 본성도 갖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서 순리를 범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설령 어리석고 완악한 승냥이나 범 같은 자가 이를 살피지 않고 온다 해도, 내가 저들을, 주인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고, 지킴으로 싸움을 대비하고, 바름으로 간사함을 제어하고 곧음으로 굽은 것을 제어하듯이 응대하면 온갖 신령이 돕고 만백성이 떨쳐 일어날 것이니, 어찌 하루아침에 저들에게 꺾이겠습니까? 불행히 형세 상 대적하지 못할 경우, 군신상하(君臣上下)가 또한 티 없이 깨끗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켜 마침내 온 나라가 도를 따르게 하면, 당장의 형편에 굽힘이 있더라도 나중에 곧게 펴져서 일월과 그 빛을 함께 하고 천지와 그 장구함을 함께 할 것이니, 또한 큰 불행은 아닐 것입니다. 안으로 정사를 닦는 근본에 힘쓰지 않고 밖으로 이적을 물리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찌 미래의 실체 없는 이적을 미리 근심하여 당면한 흉악한 이적과 먼저 결탁하여 저들의 도당이 되기를 구하겠습니까? 천하의 일은 이름을 바로잡는 일이 우선입니다. ‘양이(洋夷)의 도당’이라고 이름이 붙으면 그 영토를 아직 바꾸지 않고 의관을 아직 고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는 옛날과 같은 소중화(小中華)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큰 근본이 한 번 어긋나 훗날 임금과 나라를 팔아먹을 무리들이 염치를 모두 잃어버린다면, 의관을 찢어버리자는 요청이라도 또한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춘추(春秋)》의 법도는 난신적자(亂臣賊子)라면 그 패거리를 먼저 다스립니다. 훌륭한 왕이 일어나서 양이(洋夷)의 죄를 드러내서 성토한다면 우리나라는 토벌을 받는 쪽이겠습니까? 왕자와 함께 토벌을 하는 쪽이겠습니까? 먼저 토벌을 받겠습니까? 나중에 받겠습니까? 아! 요순으로부터 4천년 동안 전해진 중화의 한 맥(脈)이 우리 동방에 깃들었고, 공자와 맹자 이후 2천년 간의 도학의 정통 또한 우리 동방에 깃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온 나라를 금수(禽獸)와 귀매(鬼魅)의 당여로 만들며, 또 이런 백성을 몰아서 금수와 귀매의 교도(敎徒)로 만들려 한단 말입니까. 위로는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맡긴 막중한 임무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만세의 강상(綱常)에 끝없는 재앙을 끼치는 것입니다. 6월 이후로 나라에 온갖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동방사람 가운데 떳떳한 인륜과 예의를 가지고서도 외이(外夷)에게 손을 빌렸던 자는 그들이 근근이 보존하고 있던 명목(名目)까지도 모조리 상실했습니다. 진실로 그 까닭을 찾아보면, 실로 강화(講和) 이후에 대의(大義)가 무너져 폐기되고 인심(人心)이 떠나 등을 돌려서 초래된 일입니다. 그 모습을 말하면 선왕의 백성이 모두 금수로 변한 것이 대개 여기에 드러났고, 그 말류(末流)를 헤아려보면 금수가 된 나머지 또 장차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될 것이니 이 얼마나 참혹합니까. 여기까지 말씀드리니 애통하고 절박하여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으나, 말씀 드리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신의 평소 지론으로서 이를 논한 글도 한 편 썼습니다. 시론(時論)과는 다른 의견이지만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성인(聖人)의 문도로서 스스로 몸을 맡겼으니, 장의(張儀)와 소진(蘇秦) 같은 종횡가(縱橫家)의 변설이나 이업(李鄴)의 장황한 논설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어서 말했다. “사(士)의 처세는 마땅히 도(道)와 굴신(屈伸)을 함께 해야 하니, 지금은 오로지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도를 지켜 목숨을 바쳐 도를 구해야지, 은혜를 탐하여 분별없이 나아가 천하의 법도를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 또 이렇게 말했다. “김 선생〔김평묵〕의 투서(投書)는 영남 유생이 그 일을 함께 했고, 홍재학(洪在鶴)의 상소의 대의(大義)는 전해 받은 바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처벌 받기도 하고 영예로운 이름을 받기도 하여 피차간 적용되는 법 조항이 달랐으니, 실정과 의리가 합당하지 않은 것이 더더욱 심합니다.” 계속해서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영원히 깎아내고 해당 법률로 다스려 달라고 청했다. 봉소(封疏)를 현도(縣道)를 통해 바쳤는데, 관찰사가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그 때, 김 선생이 다시 임금의 엄한명을 받고 다시 유배지로 떠났다. 선생은 상소문이 든 봉투가 돌아오자, 소첩자(小帖子)의 예(例)를 써서 말미에 몇 마디를 덧붙여 앞서 올렸던 청을 거듭 하고, 가동(家僮)을 시켜 곧장 궐로 가서 바치게 했다. 그러자 비답이 내려왔다. “그대는 스스로 서주의 호걸에 비기고 있는가. 글을 읽은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유언비어에 동요하는 것을 어찌 괴상하게 여기겠는가.” 10월, 선조의 묘제에 참석했다. 선조의 묘하(墓下) 자손 가운데 제사에 참여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선생은 이전부터 예의(禮儀)를 잃을까 걱정하여, 홀기(笏記)를 수정하고 제사 드리는 인원을 분배하여 각각 성(誠)과 경(敬)을 다하게 했다. 이에 제수와 제기는 그 수가 정해지고 정결해 졌으며, 위차(位次)와 예의는 질서정연하고 정숙해졌다. 여러 부형(父兄)이, “이제부터 우리 조고(祖考)께서도 기쁘게 흠향하시겠지”라며 흐뭇해했다. 계미년(1883, 고종20) - 52세 - 9월, 고흥유씨종법(高興柳氏宗法)을 짓고, 회족례(會族禮)를 행했다. 선생은, 종족이 모여 사는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말한 ‘관속(管束 잘 단속하다)’과 ‘수습(收拾 거두어들이다)’을 하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여겼다. 마침내 종법(宗法)을 정하여 밝히고 문중의 웃어른〔門長〕의 명에 따라 장의(掌議)와 집례(執禮) 각 한 명을 정하여 종중(宗中) 일을 맡게 했다. 《종법》의 큰 항목 넷은, 족보를 밝히는 것〔明譜系〕, 조상 묘를 받드는 것〔奉先墓〕, 종족을 거두는 것〔收宗族〕, 후진을 가르치는 것〔敎後進〕이다. 또 경계하는 글을 한 부 썼는데, 큰 모임이 있을 때 마다 문중의 어른을 뵙는 예를 마치면, 장의가 목청 높여 이렇게 경계했다. “우리 종중의 모든 사람이여, 부모를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고 조상을 받들면서 정성을 다하라. 남편은 화합하고 아내는 순종하며, 형은 우애롭고 동생은 공손히 하라. 종법의 취지에는 통서(統緖)가 있어야 하고, 적서(嫡庶)에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 정학(正學)으로 자손을 가르치고, 은의(恩義)로 종족을 화합하게 해야 한다. 집에 있을 때는 맡은 일을 성실히 하면서도 예법(禮法)을 높이고, 고을로 나가서는 풍속을 도탑게 하면서도 법을 두려워해야 한다. 사림 가운데 있으면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지향을 엄격히 지키며, 조정에 서면 충(忠)과 직(直)을 견지하고 명예와 절조를 무겁게 여긴다.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흔들리지 말고, 외이(外夷)의 음란한 풍속에 물들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삼가고 힘써서 너를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또 족질 의석(義錫)에게 종친과 관련된 지(誌), 장(狀) 등 모든 글을 수집하게 하고, 이를 모아 책으로 엮어 제목을 돈효록(敦孝錄)이라 하였다. 갑신년(1884, 고종21) - 53세 - 정월, 부사(府使) 이도재(李道宰)가 연말에 선물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서사강규(書社講䂓)를 다시 수정했다. 신사년(1881, 고종18), 사우가 화를 입은 이후 사맹삭회(四孟朔會)를 멈추었는데 얼마 후 단속이 해이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별도로 3월과 9월의 두 보름날을 정하여 제생(諸生)을 모아 세 선생의 유상(遺像)에 절을 한 후 강회(講會)를 열었다. 의식(儀式)은 평소보다 약간 간략하게 하여 변고가 있음을 보였다. 강규(講䂓)는 주자(朱子)의 독서 차례와 벽문(蘗門)에서 경서를 강(講)하던 규칙을 참고했다. 강회 때마다, 제생에게 경전 하나를 함께 공부하게 했다. 경서와 제자백가를 정규 과목으로 삼고 《가례》와 《근사록》 등의 책도 함께 공부했다. 또 과제로 삼은 책에 대해 의심스러운 뜻을 제기하고 문제를 만들어 질문하면, 답안을 써서 토론하게 하고 비평(批評)을 작성하여 득실을 판가름 했다. 강학을 시작할 때, 알리는 글을 한 통 써서 강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통렬히 알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삼강오상(三綱五常)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사서육경(四書六經)을 학문의 공구로 삼고, 거경(居敬), 치지(致知), 역행(力行)을 학문을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삼고, 존화양이(尊華攘夷)와 한성벽사(閑聖闢邪 성현을 지키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다)를 학문의 큰 효용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경계하면서 이렇게 썼다.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진 것을 슬퍼하여 진실로 자포자기 할 수 없고, 상제의 밝은 명령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안일할 수 없다. 사람이 적다고 말하지 말라. 한 마음으로 함께 힘쓰면 귀신도 움직일 수 있다. 힘이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정신을 가다듬고 힘쓰고 떨쳐 일어나면 쇠와 돌도 뚫을 수 있다. 삼가 걱정하고 부지런하며 두려워하고 격려하는 뜻을 가지고, 확고히 돌아보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버리면, 안으로 지키는 것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상(象)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밖으로 막는 것은 사나운 호랑이가 산에 있는 형세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열락대(悅樂㙜)를 지었다. 선생이 가정정사(柯亭精舍)의 문미(門楣 문 위에 가로 댄 나무)에 손수 ‘동악산인연식지소(東岳山人宴息之所)’라고 쓴 후, 또 뜰 공터에 작은 대(㙜)를 지었다. 대 위에 오동나무 두 그루를 심어 예를 익히고 학문을 이루는 곳으로 삼고, 이 대를 ‘열친척락금서지대(悅親戚樂琴書之臺)’라고 명명했으며, ‘우리 사문을 열심히 절차탁마하지 않으면, 다시 무슨 수로 음사를 물리치겠는가.〔不向斯文勤切琢, 更將何術放淫邪〕’라는 구절을 썼다. 3월 19일, 조종암 대통단에 참배했다. 이 날은 열황제(烈皇帝)가 사직을 위해 돌아가신 지 사주갑(四周甲) 기일이다. 선생이 여러 동지를 모아 대통단(大統壇)에 가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풍(風)’ 자와 ‘천(泉)’ 자를 운을 삼아 뜻 가는 대로 감회를 적기로 하였다. 선생은 ‘풍’ 자를 뽑아 50운 장편을 지었다. 6월, 변복령(變服令)을 들었다. 당시 조정은 온 나라 사람에게 의복을 변경하여 소매를 좁게 하는 제도를 쓰라고 명했다. 선생이 변복 령의 절목을 보고 몹시 슬퍼하면서, “이는 선왕의 법복(法服)을 훼손해서 이적을 따르는 것이다. 옛날 이적(夷狄)은 반드시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左袵〕 옷을 입었다. 그러므로 오른쪽 옷섶을 위로 여미느냐 왼쪽 옷섶을 위로 여미느냐를 가지고 이적과 화하(華夏)를 구별했다. 오늘날 이적은 복식은 정해진 제도가 없지만 좁은 소매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므로 소매를 넓게 하느냐 좁게 하느냐에 따라 이적과 화하를 구별한다. 이것이 큰 구별이 비교적 쉽게 드러나고 마땅히 죽음으로 지켜야 할 명의(名義)이니, 지행(志行)과 의복이 내외(內外)가 된다는 설로 이하(夷夏)의 구별을 어지럽혀서는 안되고, 임금이 명하면 신하가 따르는 상식적인 도리로 이하(夷夏)의 구별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복식을 훼손하고 머리카락을 깎는 것에 경중(輕重)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하(夷夏)의 구별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장편의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제생(諸生)의 뜻을 정해주었다. 10월, 손자 제함(濟咸)이 태어났다. 몇 년 후, 선생이 명하여 인석(麟錫)의 후사로 삼았다. 의복제도는 편리함을 따르라는 명을 들었다. 선생이 문인에게, “의복제도를 복구하여 바른 제도로 되돌린다고 하지 않고 편리한 대로 따르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류(士類)를 잠시 무마하려는 계책으로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라 말하며, 시름에 빠져 기뻐하지 않았다. 을유년(1885, 고종22) - 54세 - 3월, 김 선생〔김평묵〕께 문안하러 가다. 이 때, 김 선생께서 막 섬에서 풀려나 연천의 이사한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선생이 문안을 갔다. 19일에 길을 나서서 조종암에 이르러 황단(皇壇)에 참배하고 오언 고시 한 수를 지었다. 길을 돌려 영평(永平)창옥병(蒼玉屛)으로 들어가 이승응(李承膺) 등 여러 사람과 박사암(朴思庵) 유상(遺像)에 절한 후 산천의 명승(名勝)을 두루 감상하고, 선조(宣祖)께서 사암 선생을 높이 기리어 내려주신, ‘松筠節操水月精神〔소나무 대나무 같은 절조, 물에 비친 달 같은 맑은 정신〕’으로 여러 사람이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지었다.연천(漣川)에 도착하여 김 선생을 뵈었는데, 얼굴빛을 보니 평소 보다 좋아 시를 한 수 지어, 슬프면서도 기쁜 마음과 면려(勉勵)하는 뜻을 전했다. 돌아오는 길에 양주(楊州) 서산(西山)에 들러 선조 사간공(司諫公) 묘를 배알하고 오언 고시 장편을 지었다. 윤석봉(尹錫鳳)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집안 조상인 어우공(於于公)의 유허(遺墟)를 방문했다. 또 정암(靜菴) 선생을 모셨던 도봉서원(道峰書院) 옛 터를 살펴보고 우암(尤菴) 선생의 운(韻)을 써서 감회를 썼다. 포천(抱川)을 지나다가 유향하(柳香下)를 방문했는데 이 분이 곧 유기일(柳基一)의 아버지이다. 기일 등 몇 사람이 광릉천(光陵川)까지 따라와서 글을 읽고 시를 지었는데, ‘산 밖을 나서면 오늘 일을 말하지 말라. 술 잔 앞에서 잠시 옛 친구의 정을 즐기네.〔山外勿言當日事 樽前且喜故人情〕’라는 구절을 썼다. 가정(柯亭)에 머물 때 동문(洞門) 석벽에 ‘기봉강역홍무의관(箕封疆域洪武衣冠)’이란 여덟 자를 전각(篆刻)하여 남겨 두었는데, 이 때 선생이 삼가 그 전각(篆刻)을 주제로 글을 짓고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기자가 분봉 받은 강역은 하늘과 함께 오래고, 홍무의 의관은 태양과 함께 빛나네. 〈황극해〉가 완성되니 한없이 감격스러운데, 조종가를 부르고 나니 참으로 감탄스럽네.〔箕封疆域天同久洪武衣冠日共華皇極解成無盡感朝宗歌罷可堪嗟〕’라는 구절이 보인다. 또 가정 앞 강 상류에 큰 바위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데, 강 속으로 들어가 열을 지어 앉아 술을 마시고 노래를 읊조리기 좋아 ‘천근암(天根巖)’이라 이름 지었다. 조만간 전각하려고 시 한 수로 기록했다. 병술년(1886, 고종23) - 55세 - 겨울, 김 선생〔김평묵〕에게 편지를 보내 화서 선생의 심설(心說)을 보완할 것을 논했다. 선생이, 명덕(明德)을 이(理)로 말한 선사〔이항로〕의 논(論)은 성문의 종지(宗旨)에 부합하여, 덕(德)을 폄하하여 기(氣)로 여긴 근세(近世)의 폐단을 고쳤으니 진실로 천지에 내세우고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심(心)을 설명할 때 역시 이(理)를 주로 삼아 명덕(明德)과 함께 ‘형이상자(形而上者)’에 속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깊이 믿었으나 문득 합당하지 않은 곳이 있음을 깨달았다. 선사께서 돌아가시기 전 여쭈어 본 적이 있었으나 결론을 정하지 못했다. 이 때, 글 한편을 지어서, 심과 명덕은 분별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으로 한 가지를 만들고, 명덕은 형이상자(形而上者)에 속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 가지를 만들고, 심은 형이하자(形而下者)에 속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 가지를 만들었다. 대개 모두 주자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어 정리하고 설을 만들어 선사께서 말씀하신 주리(主理)의 큰 뜻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했고 위치를 분변하고 명목을 바로잡을〔辨位正名〕 때에는 평실(平實)함으로 나아가 후에 폐단이 없었다. 또 선생은 “선사께서 만년에 늘, ‘지금 미치지 못한 것은 뒷사람과 함께 바로잡아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선생께서 직접 고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올바른 것을 구하는 선사의 공심(公心)이라서 맑은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만약 이런 마음을 먹는다면, 지금 이렇게 논의 하는 것이 오직 마땅하지 못할까만을 염려해야 한다. 만약 마땅하다면 어찌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추후에 보충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 이치를 동문(同門)의 여러 공에게 두루 질문하고자 하여, 먼저 김 선생〔김평묵〕에게 여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선사께서는 심(心)과 성(性)을 논하며 오로지 하나의 이(理)에 나아가 주재(主宰)와 준칙(準則)을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거듭 생각해보니, 결국 물(物)과 칙(則)으로써 심(心)과 성(性)을 나누는 것은 본분상의 형세가 되어야 마땅하며, 심(心)의 주재를 말하자면 곧 심(心)의 본직(本職)입니다. 심(心)의 지각에는 그 본직을 얻었을 때가 있고, 그 본직을 잃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본직을 얻었을 때가 바로 이 심(心)의 이(理)가 주인이 된 때이니, 주리(主理)로 말하는 것이 실로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심(心)을 형이상(形而上)이라고 간주하여 성(性)과 동등하게 보는 것은 결국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 ‘형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도리(道理)의 본연으로서 물(物)이 준칙으로 삼는 바가 되어 이름을 얻습니다. ‘도(道)’, ‘이(理)’, ‘성(性)’, ‘덕(德)’ 따위가 바로 그 큰 조목〔大目〕이고, 그 세목〔細目〕은 ‘중정(中正)’, ‘인의(仁義)’, ‘효제(孝弟)’, ‘충신(忠信)’ 등입니다. 무릇 ‘형이하(形而下)’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드러나서 조리지워진 것으로써 이름을 얻었습니다. ‘인(人)’, ‘물(物)’, ‘신(身)’, ‘심(心)’ 따위가 바로 그 큰 조목이고, 그 세목은 ‘지각(知覺)’, ‘호오(好惡)’, ‘시청(視聽)’, ‘언동(言動)’ 등입니다. 이것은 그 면목(面目)과 형용(形容)이 원래 같지 않습니다. 이른바 ‘도리(道理)’는 ‘아직 발현되지 않은 것〔未發見〕’과 ‘이미 발현된 것〔已發見〕’으로 구분 합니다. 이미 발현되어 모양과 상태가 있는 것은, 실로 그 사물에 나아가서 말할 수는 있으나 바로 ‘형이하’의 조목에 넣어서는 안 됩니다. 이른바 ‘사물(事物)’은 아직 변별〔간별(揀別)〕되지 않은 것〔未揀別〕과 이미 변별된 것〔已揀別〕으로 구분합니다. 이미 변별되어 준칙이 있는 것은 실로 ‘주리(主理)’로 말할 수 있으나 ‘형이상’의 조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 경계를 다투는 것으로 얼마 되지 않으나, 그 구분은 끝까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병술년(1886, 고종23) - 56세 - 《현가궤범(絃歌軌範)》을 짓다. 선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성인의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도를 배우는 도구는 현가(絃歌)에 있었으나 후세에는 고악(古樂)이 없어지고 속악(俗樂)은 규범 삼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이 현가에 종사하고자 하더라도 근거할 바가 없다. 이것은 대단히 한탄스럽다. 그러나 음악의 큰 근본은 뜻〔志〕일 뿐이다. 시(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고, 노래는 말을 노래하는 것이고, 소리는 노래에 의탁하는 것이고, 음률은 소리를 조화하는 것이며, 팔음(八音 여덟 가지 악기의 재료)은 사람의 소리를 도와서 악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지금 성률(聲律 음악)의 법과 팔음의 악기가 비록 선왕의 옛 것을 전할 수 없었지만 이른바 시가(詩歌)라는 것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배우는 사람이 그 가사에 의거하여 찾으면 저절로 옛 사람의 뜻을 얻을 수 있고 음악의 근본이 설 것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노래로 표현하면 성음(聲音)의 절도는 비록 시대에 따라 적당한 방식을 제정하여 대강(大綱)을 대략 간직하고 있지만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고 풍속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에 주자(朱子)가 고찰하여 제정한 율려제(律呂制)와 금율설(琴律說)을 뽑아 고금(古今)의 악장(樂章) 몇 편과 배합하고 끝에는 곡조를 빌어 응용하여 쓰는 예(例)를 붙여,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여 《현가궤범》이라고 하였다. 또 그 법도에 따라 거문고를 만들어 항상 곁에 두고 학도들과 함께 다니면서 먼저 삼백편(三百篇 《시경(詩經)》)에 힘을 쏟아 본원을 세우게 하고, 한가한 날에 거기에 깊이 잠기어 그 흥취를 도와 드러내었다. 7월에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을 짓다. 선생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순서대로 배열하고 종합하여 논해 말하기를, “하도는 하늘과 땅이 개벽하여 인간 세상의 일이 처음 어슴푸레할 때에 나타났는데, 늘어세운 숫자에는 홀수와 짝수가 서로 엇갈려 배열된 형상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를 본받아 《역》을 지어 개물성무(開物成務)하는 용(用)을 다하였다. 낙서(洛書)는 땅이 평평해지고 완성되어 위엄과 교화가 사방으로 미칠 때에 출현하였는데, 만들어진 자리에는 중(中)과 외(外)가 서로 감응하는 형상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를 본받아 법(法)을 만들어 표준을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체(體)를 드러내었다.”라고 하였다. 또 “하도가 전체 형상을 든 것은 참으로 완전히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처음과 끝을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숫자로써 미루어보면 1부터 10까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쌓아가는 순서가 있다. 하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고유한 순서에 따라 몇 층으로 나누어 그것을 절차에 따라 연구한 뒤에야 그에 담긴 정미(精微)한 뜻을 다 드러낼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홀수와 짝수가 처음 나누어지는 형상〔奇偶肇判之象〕로부터 두 개의 홀수와 두 개의 짝수가 나뉘어 펼쳐진 형상〔二奇二偶分布之象〕, 숫자 5가 중앙에 자리를 정한 형상〔五數定位中央之象〕, 숫자 열 개의 자리를 전부 갖추어 모은 형상〔十位大全之象〕, 하늘과 땅이 서로 끌어안고 사람과 만물이 함께 길러지는 형상〔天地交抱人物並育之象〕, 사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짝을 짓는 형상〔四時始終相配之象〕까지 하나하나 그림을 만들고 해설을 붙였다. 또 낙서 중에 하도와 다른 것은,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음과 양이 정(正)과 우(隅)에 나뉘어 놓이고〔陰陽之分處正隅〕, 오행(五行)이 역행(逆行)하고 상극(相克)하는〔五行之逆行相克〕 것이 바로 그 큰 것인데, 인사(人事)로써 비기면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고 임금은 만민의 표상이니 양자의 형상이 모두 여기에서 크게 드러났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네 가지 그림으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첫째는 음양정우도(陰陽正隅圖)이고 둘째는 오행역극도(五行逆克圖)이고 셋째는 인위천지지심도(人爲天地之心圖)이고 넷째는 군위만민지표도(君爲萬民之表圖)로, 그림에 따라 해설을 붙이고 또 이어서 대연국설(大衍局說)에까지 미쳤다. 대체로 하늘과 땅의 음양과 오행과 만물의 상수(象數)에 대해 궁극에까지 미루어 나가면 반드시 대중(大中), 건순(健順), 오상(五常), 오륜(五倫)의 도를 귀결로 삼게 된다. 이 때문에 인품의 선과 악의 나뉨 및 고금의 다스림과 어지러움의 원인과 결과가 별자리나 밝은 햇빛처럼 찬란하게 빛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이것으로 선생의 학문이 성인의 은미한 뜻을 잘 풀어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월에 김 선생을 가서 뵙다. 이 때 김 선생은 연천(漣川)에서 영평(永平) 운담리(雲潭里)로 옮겨가서 살았다. 선생이 안부를 묻고 또 모시고 완의대(玩漪㙜)에 가서 노닐었다. 농암(農巖) 선생의 유실(遺室)을 살펴보았다. 〈지감(志感)〉절구 2수를 지었다. 〈유씨가전(柳氏家典)〉을 짓다. 정윤리(正倫理), 봉선(奉先), 사친(事親), 어가(御家), 거향(居鄕) 5개로 나누어 항목을 세웠는데 규범의 안배가 잘 갖추어져 있다. 처세하는 방법에까지도 언급하고자 하였으나 다 마치지 못했다. 무자년(1888, 고종25) - 57세 - 4월에 족생 유중악(柳重岳)에게 편지를 보내, 홍재귀(洪在龜)에게 편지를 보낸 일을 꾸짖었다. 재귀(在龜)는 바로 김 선생의 사위이다. 사람됨이 게으르고 괴팍하면서 거만하고 허풍떠는 습성이 있었다. 매번 당시 사람들이 두 선생〔김평묵과 유중교〕에 대해서 함부로 우열을 논하여 비평하는 사람이 있으면 깊이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중암에게 크나큰 명망을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여 선생과 맞서 대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김 선생에 대해서 전후로 규간(䂓諫)하는 편지를 쓴 일을 가지고 과실을 드러내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고, 또 심설(心說)을 다시 바꾸는 일을 대변(大變)이라고 생각하여 장문의 편지를 써서 무례하게 으르렁거리며 조금도 꺼리는 마음이 없었다. 선생은 부드러운 말로 대답하고 그와 깊이 따지지 않았다. 중악이 이근원(李根元), 송민영(宋敏榮), 김영록(金永錄), 이소응(李昭應)과 연명(聯名)하여 편지를 보내 성토하였다. 김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손자 춘선(春善)으로 하여금 와서 묻게 하였다. 선생이 비로소 그 일을 알고 나서 크게 놀라 서본(書本 재귀에게 보낸 편지)을 가져다가 손으로 찢었다. 또 편지를 중악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신음하고 있다. 인중(仁仲)이 왔다 돌아간 뒤로는 병도 아닌 병이 더욱 깊어져서 이 때문에 잠자리와 음식이 달지 않다. 평일에는 매번 나의 동생이 신중하고 너그러워 거의 과실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사백(思伯)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 것은 어찌하여 깊이 헤아리지 않은 것인가. 아침저녁으로 나를 고쳐주어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를 그대에게 바랐는데 지금은 도리에 어긋나게 당습(黨習)을 저질러서 한 시대 사람에게 비웃음을 남겼다. 선비들을 조정하고 보호하여 화목하지 못한 사람들을 안정시키기를 그대에게 바랐는데 지금은 분규를 야기하여 격렬하게 평지풍파를 만들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이것이 무슨 꼴인가. 늙은 내가 사우들에게 몸을 맡긴 지 50년이 되었으나 조금도 사문(斯文)에게 보탬되는 일이 없었는데, 동문(同門)들이 나 때문에 분열하는 기미가 있는 것을 보게 되니,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설 수 있으며, 죽어서는 무슨 말로 우리 선사에게 가서 아뢰겠는가.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고통스럽고 고통스럽다. 편지 속에 연명(聯名)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몰랐으나 편지가 그대 손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조카 인석(麟錫)을 호되게 꾸짖었고 또 이런 말로써 김 선생에게 말씀드렸다. 지나간 일은 탓할 수 없고, 앞으로의 일은 고칠 수 있다. 반드시 깊이 생각하라. 편지에 함께 연명한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라. 만약 앞으로 다시 이러한 변고가 생긴다면 일에 따라 신중히 처신해야 하고 다시 전철을 밟지 말라고.”라고 하였다. 김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스승의 가르침을 조정하여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 선생은 스승의 가르침을 조정하여 보완해야 한다는 선생의 주장을 어렵게 보고 신중히 하여 엄격하게 말렸다. 두 번 세 번 왕복하는 동안에도 어투가 모두 단호했다. 선생이 또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제가 근래에 강설한 것 중에서 ‘태극에 주재(主宰)가 있다.’는 논(論)이 이전과 같고, 또 ‘명덕이 이(理)를 위주로 한다.〔明德主理〕’는 논도 이전과 같으며, ‘심(心)은 이(理)로써 말한 것이 있고 또 기(氣)로써 말한 것도 있다.’고 한 것도 이전과 다름없습니다. 오직 ‘심의 본체를 통째로 들어 그 본분과 명위(名位)를 논단할 경우에 잠시 형이하(形而下)에 의거하여 사물로써 지목하여야 간명하여 후일의 폐단이 없다.’고 한 것만이 이전과 조금 다릅니다. 논평하신 가르침을 읽어보니, 옛날의 주장을 지킨 것에 대해서는 차이를 말할 만한 것이 없고, 다시 고친 곳에 대해서도 차례대로 의견을 보여주시면서 불가하다고 여긴 것은 없으니, 강설의 요지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해도 됩니다. 다만 이 심의 명위가 당연히 형이하에 속한다는 것은 선사의 평소 견해가 원래 이러하여 특별히 세상이 이미 다 아는 것만을 들었을 뿐 새로 밝히는 것을 일삼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이니, 지금 선사의 유지를 발휘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지, 선사의 구설(舊說)을 추후에 고친다는 말로 핑계를 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또 ‘현인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보완한다.〔諱賢陰補〕’고 하는 뜻을 슬쩍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선사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진심어린 아름다운 마음을 알겠습니다만, 어리석은 제가 이 문제에 관해 시종일관 반대하면서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는 것에도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선배들은 섬기는 분에 대해 스승의 말이 편중되거나 지나쳐서 폐단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보면, 간혹 그 책에서 말을 빼버리고 ‘현자(賢者)에 대해 잘못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뜻을 담기도 합니다. 만약 빼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면, 그대로 두되 그 글을 널리 알리지 않고 따로 스스로 설(說)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미진한 뜻을 보충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가만히 보완한다.〔陰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리로 볼 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기존의 말을 그대로 두면서 가리키는 뜻을 바꾸고 스승이 전에 그르다고 한 것에 대해 ‘이것이 유지(遺旨)’라고 하여 그것을 발휘한다면 마음속에 깊이 불안한 점이 있습니다. 대개 모든 강설에는 사람에 따라 각기 진면목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씩 있기 마련입니다. 선사의 심설(心說)을 가지고 말하면, 이(理)로써 심을 단정한 것이 바로 그 진면목입니다. 지금 감히 따로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습니다만 단지 〈형기신리설(形氣神理說)〉한 편만으로도 분명히 이 심의 지위를 밝히고 이름을 바로잡는 공안(公案)입니다. 이 설에서는 ‘화장(火臟)을 심의 형(形)’이라 하고, ‘정상(精爽)을 심의 기(氣)’라 하고, ‘신명을 심의 신(神)’이라 하고, ‘인의를 심의 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이상과 형이하로 크게 나누어 ‘형(形)이 음이고 기(氣)가 양이니, 형이하의 기(器)다. 이(理)가 체(體)고 신(神)이 용(用)이니, 형이상의 도(道)다.’라고 했습니다. 또 ‘형과 기(氣)가 국한되어 둘이 되고, 신과 이(理)가 통일되어 하나가 된다. 하나란 무엇인가? 태일(太一)이 그것이다. 둘이란 무엇인가? 양의(兩儀)가 그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형에 대해, 기에 대해, 신에 대해, 리에 대해 모두 ‘심’을 말할 수 있으나, 심 그 자체인 ‘신명(神明)’ 두 자는 단지 형이상에만 속하지 형이하에 속할 수 없습니다. ‘신명이 기에 속한다.’고 하는 설을 따져 말하기를, “지극히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칭호를 폄하하여 노복과 졸개의 대오에 넣어 편성하였으니, 명칭이 바르지 않고 말이 순리에 맞지 않다. ‘신(神)’ 한 글자가 자기의 직책을 잃고 더불어 형, 기, 리 세 글자도 똑같이 자기 직책을 잃어 천지와 만물이 해를 입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엄격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화서아언》에 실린 ‘심은 기(氣)이고, 물(物)이다.’라고 말한 한 단락은 대개 화장(火臟 심장)과 정상(精爽 혼백)을 가리킨 것이지, 신명 자체를 가지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말을 꼭 붙들고 “선사께서도 일찍이 ‘이 심의 명위(名位)는 형이하에 속해야 마땅하다.’는 설을 말씀하셨다.”라고 하면, 선사의 영혼이 어찌 받아들이겠습니까. 만약 ‘선사께서 이(理)로써 심을 단정했다고 여기면, 기를 이(理)라고 인정한 혐의가 있고, 또 고자(告子), 석씨(釋氏), 육구연(陸九淵), 왕수인(王守仁)의 견해와 서로 가까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여 타인들의 의심을 멀리 피한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선사께서 심을 말할 때, 심이라고 가리킨 것은 원래 경전(經傳)에서 말하는 심과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것은 대개 이 심의 형이하의 자리에 존망(存亡)과 진망(眞妄)이 있다는 것에 의거하여 입론(立論)하고 그 중에서 오로지 그 본원(本源)과 진체(眞體)를 가리켜서 이(理)라고 하였습니다. 주자가 말한 ‘천리의 주재(主宰)’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선사께서 말한 ‘심(心)’은 원래 본원(本源)과 진체(眞體)만을 가리켜서 말하고, 형이하라는 것은 줄곧 심 자체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맹자가 재(才)를 말할 때 오로지 성(性)에서 발현된 것만을 가지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에 ‘기로써 말하는 심은, 군자는 심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고, ‘석씨(釋氏)가 말한 심은 우리 유자(儒者)가 말한 형이하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理)로써 심을 단정하는 것이 비록 지위를 밝히고 이름을 바로잡는 데에 혹 평실(平實)함이 부족하더라도, ‘이것이 기를 리라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하면 요지와 크게 맞지 않습니다. 또 우리 유자(儒者)가 고자(告子)와 석씨(釋氏)를 심하게 배척하는 까닭은 그들이 형기(形氣)와 성명(性命)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섞어 성(性)이라 하고 섞어 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선사께서 평생토록 도를 연구하면서 그 종지(宗旨)는 오로지 이 두 갈래를 구별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육구연과 왕수인이 육구연과 왕수인이 된 것은 그들이 마음에 의지하여 천하의 이(理)를 도외시했기 때문입니다. 선사가 평생토록 학문을 하면서 큰 법도는 바로 마음을 보존하면서 천하의 이(理)를 궁구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 귀결점이 어찌 단지 연(燕)나라와 월(越)나라처럼 서로 멀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강설을 외워 전하는 사람이 비록 견해가 서로 달라 따를 수 없는 사람이더라도, 주리(主理) 하나만을 붙잡고 고심한 것은 깊이 체찰(體察)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공평한 정서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속에 선입견을 지닌 채 본뜻은 연구하지 않고 오직 강제로 억누르는 짓만을 일삼는 사람을 또 어찌 깊이 비교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대, 오늘날 선사의 문도(門徒)가 된 사람은 마땅히 선사께서 평소 강설하신 본뜻에 의거하여 마음을 다해 상세히 연구함으로써, 그가 심을 설명할 때 본래 ‘이(理)로써 말한 것’이 있고 또 ‘기로써 말한 것’도 있으나 실제로는 ‘이(理)로써 말한 것’이 결론이며, 비록 ‘이(理)로써 심을 단정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기를 이(理)라고 인정하는 것’과는 털끝 같은 차이지만 천 리처럼 거리가 멀다는 점을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요점입니다. 하지만 선생은 이 문제에 대해 혹 두루두루 생각하지도 못하고 단지 피상적으로 명목에만 힘을 쏟고 질질 끌며 시간을 보내어 타인들의 의혹을 멀리 피하려는 계책으로 여겼습니다. 그 중에 머뭇거리며 선뜻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스승을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하는 영역에 넣었다고 생각하여 무거운 죄를 주거나, 심지어 ‘스승을 위하여 신원(伸冤)한다.’는 따위의 말로 여러 번 글을 쓰기도 했으니, 도리어 숨기고 꺼리는 혐의가 있어 타인들의 의혹을 더욱 키운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10월 김 선생을 찾아뵙고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품정(稟定)하다. 선생이 스승의 설에 대해 조정하고 보완하고자 한 것은 심(心)과 명덕(明德), 물측(物則)의 구분 및 사람의 신명(神明)의 이기(理氣)와 명위(名位) 두 부분에 있었다. 김 선생은 이 심의 본분과 명위는 선사께서 본래 형이하에 소속시켰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아언(雅言)》에 실린 ‘심(心)은 기(氣)이고 물(物)이다〔心氣也物也〕’라고 하는 말을 들어 그것을 증명하였다. 선생은 선사가 ‘심은 기이고 물이다.’라고 한 것은 화장(火臟)과 정상(精爽)을 가리킨 것이지 신명(神明)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명을 말하면 모두 형이상으로만 간주하였고 형이하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간혹 이기(理氣)와 합하여 말할 경우에는 마치 장자(張子 장재(張載))가 ‘허(虛)와 기(氣)를 합하여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合虛與氣, 有性之名〕’라고 한 말과 같았다. 이와 같은 견해를 수년 간 견지해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생각을 바꾸어 선사께서 신명이 ‘이와 기가 합한 것이다.’고 한 말은 이미 주자(朱子)의 요지와 합하는 면이 있는데, 후학(後學)이 나중에 그 말의 많고 적음과 주의(注意)의 가볍고 무거움에 유의하여 주자(朱子)와 다르다고 의심하는 일은 감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김 선생이 가르친 뜻에 따라 선사의 설 중에 심과 명덕, 물칙의 구분에 대해 만족할 만한 글 두 조목 그리고 신명을 이와 기와 합하여 말한 것 두 조목을 뽑아 해설을 붙이고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입론하니 명덕의 진체(眞體)가 더욱 밝고 뚜렷해졌으며, 심에 이로써 말한 것이 있고 또 기로써 말한 것이 있다는 설도 또한 글에 따라 뜻을 풀이할 수 있었다. 신명의 본분(本分)과 명위(名位)가 자연스럽게 되었으며, 참되고 올바른 것을 간별(揀別)해 낼 경우에 바로 천리(天理)의 주재(主宰)에 해당시킬 수 있었다. 전집(全集) 중에 여러 항목들 간에 간혹 한두 가지 편중된 것이 있을 경우에도 이 정안(正案)에 준하여 보완한다면 스승의 설로써 스승의 설을 보완하여 말썽 없이 매우 말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을 김 선생에게 드리고 문의하니 김 선생이 반복하여 살펴보고 유쾌하게 윤허해 주었는데, 본문에서 한 항목을 추가하여 그 취지를 지극히 하고, 해설에서 자구를 수정 윤색하여 그 뜻을 다 표현하였다. 그 후 며칠 지나서 편지를 선생에게 내렸는데, ‘〈심설정안(心說正案)〉은 이동(異同)이 없으니 다시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말이 있었다. 기축년(1889, 고종26) - 58세 - 봄에 〈송원화동사합편서법(宋元華東史合編書法)〉이 완성되다. 선생은 《합편(合編)》의 원서(原書)에 여러 해의 정력을 들여 최종 교정(校訂)이 정정(訂正)되자 이에 근거하여 한 편의 〈서법(書法)〉을 썼다. 그 법도(法度)와 의리(義理)는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의 〈범례(凡例)〉에 따르고 또 19문(門)으로 배열하여 조목마다 그 말미암은 대체(大體)를 들었으며 한두 가지 의리에 근거하여 변례(變例)로 처리한 경우를 붙였다. 예를 들어 호원(胡元)이 정통을 빼앗은 것과 허형(許衡)의 죽음을 ‘사(死)’라고 기록한 부류와 같다. 시대가 바뀌고 일이 달라져서 연습(沿襲)과 변혁(變革)이 작은 곳에서는 지난날의 오류를 바로잡아 원서의 끝에 붙여 놓았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어서 마땅히 논설을 해야 할 것은 김 선생이 지은 발명편(發明篇)에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4월에 이종설(李鍾卨)에게 시집간 막내딸을 곡하다. 제문(祭文)이 있다. 8월에 거처를 제천(堤川) 장담(長潭)으로 옮기다. 장담(長潭)은 구학산(九鶴山) 아래에 있다. 선생은 춘천이 경성(京城)과 자못 가까워 날마다 소인배들이 왕래하는 것을 보고 매우 불쾌하게 여겨서 네 군(郡) 중에서 산천이 매우 깊은 장소를 골라 거처를 옮겼다. 이에 청풍(淸風)의 서상렬(徐相烈), 포천(抱川)의 홍순항(洪淳恒), 양구(楊口)의 주용규(朱庸奎), 강릉(江陵)의 정화용(鄭華鎔)이 차례대로 와서 거주하고 아침저녁으로 학업을 연마하니, 호남(湖南) 선비들 중에 분발하여 따라 배우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경인년(1890, 고종27) - 59세 - 봄에 네 군(郡)의 산수를 유람하다. 이 유람 길에 단구(丹邱) 이인귀(李寅龜) 공과 정재(正齋) 지운상(池運象)의 집을 방문하였다. 4월에 신정왕비(神貞王妣)가 승하하여 망곡례(望哭禮)를 행하다. 현정(縣庭)에 들어가서 성복(成服)하다. 〈역설(易說)〉을 짓다. 선생은 육경(六經)에 대해 이미 큰 요지를 종합적으로 말한 것이 있고 또 경(經)마다 설을 짓고자 하였으나 《역》에는 착수하지도 못했다. 〈선천팔괘(先天八卦)〉와 〈64괘횡도원도(六十四卦橫圖圓圖)〉는 소씨(邵氏 소옹(邵雍))가 전한 것과 주자(朱子)가 말한 것에 의거하면서도 간혹 주자가 말한 것에 근거하여 새로 설정한 것도 있다. 〈64괘방원합체도(六十四卦方圓合體圖)〉에서는 괘마다 각각 괘이름을 쓰고, 원도(圓圖)는 가느다란 선으로 여덟 칸을 만들어 팔괘의 본래 자리를 표시하고 또 방도(方圖)는 네 겹의 네모 테두리를 만들어 건(乾)과 곤(坤)을 마주보게 하여 첫 번째 자리에 놓고, 간(艮)과 태(兌)를 마주보게 하여 두 번째 자리에 놓고, 감(坎)과 리(離)를 마주보게 하여 세 번째 자리에 놓고, 진(震)과 손(巽)을 마주보게 하여 중앙의 자리에 놓았다. 또 두 도에는 각각 열두 달의 위치를 적어 놓았다. 또 〈후천팔괘(後天八卦)〉에 〈오행순서도(五行順序圖)〉와 〈인륜정위도(人倫正位圖)〉 두 도를 새로 설정하고, 오행본질(五行本質)과 인륜본체(人倫本體)가 이미 선천(先天)에 갖추어진 것과 선천이 바뀌어 후천(後天)이 된 것을 마련하였다. 또 〈상하분경도(上下分經圖)〉를 마련하였는데, 상경(上經)에는 18궁(宮)을 설정하여 건(乾), 곤(坤), 이(頤), 대과(大過), 감(坎), 리(離) 여섯 정괘(正卦)가 각각 하나의 궁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 반대(反對)인 24괘는 두 괘를 하나의 궁에 놓았으며, 하경(下經) 또한 18궁인데 중부(中孚), 소과(小過) 두 정괘가 각각 하나의 궁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 반대인 32괘는 두 괘를 하나의 궁에 함께 놓았으며, 모두 36궁으로 후천(後天) 64괘에 해당시켰다. 시초를 세어 괘를 얻고 변화를 살펴서 점을 판단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또한 도를 마련하여 각각 해설을 붙였는데, 큰 의리와 숨은 뜻을 환히 밝혀 가리키고 늘어세운 것이 왕왕 옛사람이 발휘하지 못했던 점을 드러낸 것도 있어서 모두 《역》을 배우는 데에 나침반이 된다. 다만 후천64괘에 괘마다 효마다 붙이는 설은 다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배우는 사람의 천고의 한이 되었다. ○선생이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 “사람이 8괘에 선천과 후천이 있다는 것만 알고, 64괘에도 선천과 후천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문왕(文王)이 64괘를 상, 하로 나누어 순서를 정하였는데, 대의(大義) 수십 가지가 여기에 보존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후천64괘이며, 선천64괘와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 또 말하였다. “공자가 《역》을 밝혀 드러내었는데 단전(彖傳), 소상(小象), 문언(文言) 등은 모두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뜻에 의거하여 해석한 것이고, 오직 대상전(大象傳)만은 문왕과 주공의 뜻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직접 하나의 의리를 세워 《역》을 이용하는 방법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공자역(孔子易)이다. 독자는 마땅히 별도의 한 예로 간주하여 봐야 한다.” 〈문행충신설(文行忠信說)〉을 짓다. 공자의 문하에서 행한 네 가지 가르침의 항목에 의거하여 치지(致知), 천실(踐實 실천), 입본(立本)하는 일을 대략 풀이하였다. 《논어》의 여러 가르침들을 인용하여 밝히고 또 《중용》, 《대학》, 《맹자》 그리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및 우리나라의 율곡과 우암의 가르침을 두루 뽑아 천고의 세월 동안 성현들이 하나의 궤적으로 전하고 지켰던 중요 요지를 증명하였다. 종적으로나 횡적으로 전부 다 궁구하여 명백하고 간절하니 후생과 초학자들이 그 크고 바른 길을 모두 알게 된다면 천덕(天德)에 통달한 군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진심을 다하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뜻이 지극하도다! 9월에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 가서 한수재(寒水齋) 권선생(權先生 권상하(權尙夏))의 영정에 절하고, 다시 길을 돌려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에 들어가서 만동묘의 모습을 돌아보고 송자(宋子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에 절하다. 문하생 몇 사람이 따라와서 송자의 영정에 절하고 나서 환한 달빛을 틈타 암서재(巖棲齋)에 앉아 남기신 글을 차례대로 읊고, 또 이 기회를 빌려 72운(韻)의 시를 지어 감회를 술회하였다. ○선생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금일 우리나라가 명(明)나라 황제를 제사 지내는 데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분수로는, 이적을 임금으로 삼을 수 없고 또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다. 마땅히 옛 임금을 우리 임금으로 삼아 천하의 의로운 군주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여전히 남아있고 바뀐 것이 없는 데에 더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것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 설 중의 첫 번째이다. 은혜로는, 우리나라는 본래 바다 멀리 황복(荒服)에 있는 땅으로 비록 일찍이 부사(父師)의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지만 그 후 천여 년 동안 어리석은 모양으로 사는 오랑캐였다. 우리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明太祖))에 이르러서 내복(內服)과 동일하게 간주하여 예교(禮敎)를 도탑게 베풀고 나서야 이전의 더럽고 비루한 모습을 한 번 씻어내고 위풍당당한 화하(華夏)의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우리 현황제(顯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서 보호하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거의 칠치(漆齒)의 나라가 다시 되었을 것이니,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보존된 것은 오히려 사사로운 일에 속한다. 병자호란 때에는 열황제(烈皇帝 명 의종(明毅宗))가 또 진홍범(陳洪範), 김일관(金日觀), 초계공(楚繼功) 등에게 명령하여 산동(山東)의 병력을 다 징발하여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누어 군대를 출병시켜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우리나라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여러 장수들에게 때에 맞게 도착하지 못한 죄를 엄중하게 꾸짖기도 하였으니, 그 속마음에는 어찌 우리나라가 밝음을 향하는 정성이 있다고 여겨 우리가 개와 양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우리나라가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어서 황제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가 된다는 것은 임진년의 일과 차이가 없다. 대체로 이 세 가지 은혜는 가령 먼 훗날 우리나라가 중화(中華)의 의주(義主)를 얻어 복종하여 섬기더라도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는 심정은 만세토록 바뀌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 설 중의 두 번째이다. 의리로는, 역대로 창업(創業)하신 군주는 모두 폭도를 제거하고 난세를 구원하는 것으로 천명을 받았지만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중화로써 만이를 변모시킨 공로가 있는데, 이것은 거의 탕(湯) 임금과 무(武) 임금에게도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제후의 나라이면서 왕국(王國)에 충성을 다 바친 경우는 많았지만 천왕(天王)이면서 제후의 나라에 인(仁)을 다 바친 예는 현황제(顯皇帝)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신하이면서 국가를 위해 순국한 사람은 많았지만 나라의 임금이면서 사직을 위해 순절(殉節)한 경우로는 오직 열황제(烈皇帝) 한 사람뿐이다. 한 나라와 한 고을에서 모범이 되는 학사(學士)와 대부(大夫)에게도 오히려 무궁하게 제사를 올려야 하거늘, 하물며 만세의 표준이 되어야 할 제왕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것은 우리나라가 제사를 올려야 할 뿐 아니라 설령 천하의 사람과 함께 제사를 올리더라도 옳다. 이것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 설 중의 세 번째이다.” 신묘년(1891, 고종28) - 60세 - 봄에 〈장담리사강신의(長潭里社講信儀)〉를 짓다. 장담리 사람들과 함께 봄과 가을에 강신(講信)했다. 또 민사제(民社祭)를 거행했다. 별도로 살펴 정하신 의절(儀節)이 있다. 4월에 시냇가의 단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다. 정사(精舍) 앞의 시냇가에 단을 쌓고 봄과 가을에 강습(講習)하였다. 모인 사람이 매 번 백여 인에 이르렀다. 옛날에 정했던 홀기(笏記)를 한층 더 윤색하였다. 또 〈음례약속(飮禮約束)〉을 지었다. 11월에 김 선생을 찾아뵙다. 이 때 김 선생은 풍병(風病 중풍)을 앓고 있었다. 선생이 여러 달 동안 병환을 앓은 뒤에 추위를 무릅쓰고 찾아뵈었다. 인석(麟錫)과 이근원(李根元), 이소응(李昭應)이 따라갔다. 이 때 선생이 품목문자(禀目文字)를 올렸다. 무자년(1888, 고종25) 가을에 심설(心說)이 하나로 귀결된 뒤로는 주고받은 편지에서 더 이상 서로 제기하여 말하지 않았다. 올 봄에 이르러서는 김 선생의 편지에 심설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꾸지람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품목을 갖추고 정안(正案)을 보고하면서 그 글귀에 다시 상의할 만한 내용을 요청하였다. 김 선생이 자세히 살펴보고 말하기를, “대의(大意)가 단지 이러하다면 다시 상의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칙(物則)의 설법과 존성(存省)의 방법을 이용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가르치고 이끌었는데, 말의 어조가 정성스러워서 옆에서 모시던 제자(諸子)들이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물러났다. 며칠 지난 뒤에 김 선생이 유기일(柳基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성재 노인이 나를 보러 와서 심설이 하나로 귀결되었으니 죽음을 앞에 두고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심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하였다. 임진년(1892, 고종29) - 61세 - 정월에 김 선생의 부고(訃告)를 듣다. 상(喪)이 난 것은 작년 12월 20일인데 부고를 들은 것은 올해 26일이었다. 성복(成服)하기 전 조석곡(朝夕哭)을 올리고 심상(心喪)을 9개월 동안 행하였다. 즉시 제문을 마련하여 아들 의석(毅錫)을 보내어 영연에 올렸다. 3월 김 선생의 장례일에 자리를 마련하여 곡하다. 6월에 홍재귀(洪在龜)의 심설(心說)에 답하다. 이 기회에 그가 유기일(柳基一)과 함께 패거리를 짓고 악행을 일삼은 죄를 논하였다. 재귀(在龜)는 선생의 스승의 설을 조정하고 보완하는 논의〔調補師說〕에 대해 밑바탕의 순수한 정성과 표현된 언어의 함의를 살피지 않고, 단지 제목만을 가지고 억지로 무고를 일삼으며 잇달아 비난하는 편지를 쓰는 일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또 김 선생을 장례하는 날에 유기일과 함께 괴이한 일을 꾸며서 심지어는 “중옹(重翁)의 유교(遺敎)가 있어, 부고하지 않으려고 하였다.”라고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선생이 답장에서 대략 이를 논하여 말하였다. “대체로 그대의 애쓰는 마음과 순수한 정성은 오로지 화서선사(華西先師)가 말한 주리(主理 이를 위주로 함)의 종지(宗旨)를 받들어 준수하는 데에 있다. 내가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어찌 감히 한 마디라도 바꾸어 평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설을 제기한 것은 선사가 말한 주리(主理)의 종지(宗旨)에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단지 그 가지와 마디 사이에 조금이라도 엉성한 점이 있기라도 하면 혹시 훗날 사람이 기(氣)와 뒤섞어버리는 단서를 열어 놓을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비된 가르침을 뽑아 정안(正案)을 확정해서 배우는 사람이 준수할 바탕으로 삼아서 스승이 말한 주리의 종지가 영원토록 전해지고 폐단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진실로 나의 견해에 득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애쓰는 마음과 순수한 정성과 같은 것은 나 스스로도 그대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근심의 깊이와 생각의 원대함은 도리어 그대보다 훨씬 벗어난 점이 있다. 강설하여 의견을 주고받을 때에는 먼저 본령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낸 뒤에야 비로소 지엽의 같고 다름을 논의하는 것이 옳다. 보내온 편지에서 말하기를, ‘내가 상제(上帝)를 형이하(形而下)로 여기고, 신(神)을 형이하로 여기고, 심(心)을 형이하로 여기고, 도심(道心)ㆍ양심(良心)ㆍ인의지심(仁義之心)을 형이하로 여겨서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것이 모두 형이하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이 한 말을 논의할 때에는 시비와 득실을 불문하고 모름지기 본연의 사실에 의거하여 제목을 만들고 난 뒤에야 이를 구별하여 밝히는 사람에게는 근거가 생기게 되고 이를 듣는 사람에게도 실효가 있는 것이다. 나는 상제(上帝)를 논할 경우에는, ‘주자(朱子)가 「제(帝)라는 것은 하늘의 신이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람에게 있는 심과 짝을 지어 말한 것이다. 다만 사람의 마음에는 바름과 바르지 않음이 있는데 상제는 한결같이 바를 뿐이다. 그러므로 심은 반드시 바른 것을 가려낸 뒤에야 이를 위주로 말할 수 있지만, 제(帝)는 가려내는 일 없이도 바로 이를 위주로 하여 제(帝)를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신(神)을 논할 경우에는, ‘신묘한 작용을 신(神)이라고 말할 때에는 마땅히 리로써 말해야 한다. 공효(功效)의 작용을 귀신이라고 말할 때에는 리로써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기로써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심의 신명(神明)과 같은 경우에는 바로 귀신이 사람 속에 있는 것이고 그 운용의 본연의 순수한 곳은 신묘한 작용을 거기에 해당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심을 논할 경우에는, ‘심의 지각은 반드시 리와 기가 합해야 이러한 운용이 생긴다. 단지 ‘심’이라고만 말하면, 이는 단지 형이하자(形而下者)에 근거하여 사물로만 지목한 것일 뿐이지만, 한층 더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노력을 더하여 ‘본심(本心)’, ‘양심,(良心)’, ‘도심(道心)’, ‘인의지심(仁義之心)’과 같이 특수한 이름을 붙이는 데에까지 이르면, 이것은 이 마음에 근거하여 참되고 바른 것을 가려낸 것이다. 그 지위를 말하자면 형이하자인 것은 똑같지만, 그 위주(爲主)로 하는 바를 논하자면 바로 천리의 본연이지만 배양하고 확충하는 노력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위주로 하는 것을 좇아 ‘이(理)’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 주장으로, 모두 앞서 올린 〈심여명덕형이상하설(心與明德形而上下說)〉에 잘 갖추어져 있다. 주된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한 번 검토하고 주제를 만들어 연구하는 것도 무방하다. 중옹(重翁)의 유지(遺旨)와 같은 경우는 당초에 정안(正案)을 확정할 때에 이미 자세히 살피시고 즐겁게 윤허하시어 뜻이 서로 합하여 꼭 맞는 듯하다는 가르침이 있었고, 이로부터 4년 동안에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더 이상 심설이 없다가 작년 봄에 편지를 줄 때에 이르러 다시 헤아려보자는 뜻을 은근히 보이셨다. 11월에 나아가서 모실 때에 정안(正案)의 글을 바치고 다시 그 설(說)을 물어 보았지만 오히려 한 글자도 의아하게 여기는 일 없이 말씀의 어조에는 두터운 정의(情誼)가 흘러서 한결같이 무자년 가을과 똑같았다. 며칠이 지나서 김 선생이 성존(聖存)에게 편지를 내리고서 말하기를, ‘성재 노인이 나를 보러 와서 심설을 하나로 귀결시켰으니 죽음을 앞에 두고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는 심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 요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이 기간에 이 사람들이 김 선생의 옆에서 억지로 떠들어대어 간혹 덮어 막은 것도 있어 아마도 한두 가지 헤아려 보겠다는 말씀도 있었을 터인데, 이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환하게 풀리어 마치 한 칼에 베어 자르는 듯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강설에 대한 마지막 글이며 심설에 대한 최종결론이다. 그대의 경우는 바로 즉시 계획을 바꾸어 뜻을 받들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략 의심하는 말을 남겨두는 것도 또한 근엄하여 과실을 적게 하는 도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보내온 편지를 읽고 또 관(棺) 옆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논한 바를 들어보니, 선생이 말로 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붓 하나로 ‘혼모(昏耗)’라며 단정해 버리고, 손으로 쓴 편지에 대해서는 똑같이 한 마디 말로 ‘난명(亂命)’이라고 한다. 아아, 어찌 그리 무엄(無嚴)한가! 임종하실 때의 명령을 정말로 ‘혼모(昏耗)’라는 말로 단정하였는데, 무자년(1888, 고종25)에 무양(無恙)하실 때의 가르침 또한 ‘혼란(昏亂 혼모와 난명)’이라는 말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인가. 그대는 단지 자기가 받은 명령이 엄중하다는 것만 알고 다른 사람이 받아들인 가르침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단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좇지 않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자기가 한 행위를 다른 사람이 또 어떻게 여길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심하다, 사람이 돌이켜서 살피지 못 함이여! 한 가지 좀 물어 볼 일이 있다. 운담(雲潭 김평묵(金平黙))의 양례(襄禮) 때 조도(祖道)하던 저녁에 어떤 사람이 유치경(兪致慶)과 최영설(崔永卨)의 이름을 수마적(受麻籍)에서 삭제하였는데 무슨 까닭인지를 모르겠다. 유군(兪君)이 만약 전날 올린 편지에 면재(勉齋 황간(黃榦))가 스승의 설을 의심하였던 것을 인용한 적이 있어서 이러한 배척을 받았다면 벌이 죄보다 커서 그는 반드시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최군(崔君)의 경우에는 또 이러한 일이 없었다. 만약 개인적인 서운함을 품고 때를 틈타 기분 나는 대로 행동하였다면 좌석에 있었던 모든 동문들이 그 방자함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터인데 한 마디 말로 그를 구해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무엇 때문인가. 그대가 이 일을 처리를 할 때에 그에 대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터이니 그 말을 듣고 싶다. 이것은 인륜에 있어서 매우 특수한 절목(節目)이 있는 곳이고 관계된 것이 대단히 막중하니, 구차하게 인정에 쏠려 계속 애매모호하게 내버려두지 말아야 한다. 그대는 평소 생활할 때, “사군자(士君子)가 자신을 세우고 세상에 처신하는 데에는 착한가〔淑〕 악한가〔慝〕, 찬성하는가〔向〕 반대하는가〔背〕가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라고 하였다. 모르겠지만, 그대가 근래에 마음을 합해 일을 함께 하고서 외부사람에게 연명(聯名)으로 배척당한 자들이 과연 군자다운 사람인가 아니면 소인같은 사람인가. 만약 군자여서 조금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면 참으로 훌륭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혹시라도 소인이라면 어찌 오싹하고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자신이 한 패거리가 되었고 또 선사의 먼 고손(孤孫)을 맡겨서 사문(師門)의 모든 뒷일들이 하나같이 그 손에 결정되는 데도 좌우의 사람이 한 마디 말을 하여 감히 그릇됨을 바로잡는 사람이 없다. 그대의 마음에는 아무일 없는 듯 편안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괴팍하게 속임수를 일삼고 방자하게 꺼리는 바가 없으면서 길(吉)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경우는 없고, 또 불길(不吉)한 사람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주선(周旋)하면서 큰 낭패를 면할 수 있었던 경우도 없었다. 그대는 이를 유념하라. 병이 들어 깊은 산에 머물고 있어선지 온갖 걱정들이 식은 재처럼 차갑다. 오직 사문의 뒷일들이 마음 깊은 데서 왔다 갔다 하여 이렇게 불안한 심사를 품지 않을 수 없는데, 단지 칼날과 살촉을 꺼리어 그대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다면, 이것은 나의 스승을 져버리고 내 마음을 져버리는 것이어서 부득이 하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그대가 내 말을 알아서 들어라.” 대체로 기일(基一)은 신사년(1881, 고종18) 이후로 집 뒤에 단을 쌓아올려 당요(唐堯)와 고황제(高皇帝)를 4월에 제사 드리고 또 공자와 주자(朱子)를 10월에 제사 드리며 그 단을 향축단(香祝壇)이라고 하였다. 김 선생은 의기(義起)라고 여기고 크게 칭찬하였다. 선생은 혹 의심스러울 수 있다고 여기고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기일은 이미 묵은 서운함도 있었고 또 이것 때문에 크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또 한두 가지 의심하고 원망하는 일이 있었다. 선생이 사훈(師訓)을 조정하고 보완하려는 논의를 하여 김 선생의 의론과 차이가 있게 되자, 그는 바로 기이한 재화를 얻은 것처럼 드디어 화옹(華翁 이항로(李恒老))을 받들고 지킨다는 말로 명호(名號)를 가탁(假托)하여 장편의 편지를 쓰기도 하고 또 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이름을 몰래 빌기도 하면서 무고를 일삼고 꾸짖으며 책망하여 도무지 끝이 없었다. 또 선생이 정안(正案)의 글을 짓고 김 선생의 의견이 글의 내용과 꼭 맞게 되자 좌우에서 거짓말을 일삼으며 번복시키고자 하였는데 결국 서신을 올려 법의(法義)의 시행을 드러내놓고 청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탕(湯)과 무(武)가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을 징벌한 대권(大權) 및 안자(顔子)와 맹자(孟子)가 스승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도를 위해 죽은 대의(大義)를 자처(自處)하였다. 김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는 방자하게 기괴한 짓을 일삼아 못하는 일이 없을 지경이었다. 재귀(在龜)는 그 취향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즐거워하여 그와 함께 합심하여 악행을 함께 저질렀다. 그러므로 선생이 대략 이와 같이 논하였다. 〈논인물성동이변(論人物性同異辨)〉을 짓다. 대략 말하면 다음과 같다. 근세에 호락(湖洛) 지방의 여러 선배들에게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변론이 있다. 그 가운데에 ‘이(理)는 같은데 성(性)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호론(湖論)의 핵심내용이다. 또 ‘성(性)은 같은데 기(氣)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낙론(洛論)의 핵심내용이다. 내가 선사 이 선생(李先生)에게 들으니, “단지 성(性)의 분수 안에서 같음〔同〕과 다름〔異〕의 두 측면을 갖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천명(天命)으로부터 말하면 하나의 근원 속에 만 가지의 다름을 함유하고 있으며, 물성(物性)으로 말하면 만 가지의 다름에서 하나의 근원이 보이고 하나의 근원이 만 가지 다름을 함유하고 있다. 정자(程子)가 말하지 않았던가. “공허하고 광막하여 아무 조짐도 볼 수 없지만〔冲漠無眹〕, 온갖 물상이 빽빽하게 다 갖추어져 있다.〔萬象森然已具〕” 주자(朱子) 또한 “상(象)과 수(數)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그 이(理)는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象數未判而其理已具〕”라고 하였다. 대체로 혼연하고 일체(一體)인 가운데에 온갖 물상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유행(流行)하고 변화(變化)하게 되어서는 사물에 따라 형체를 부여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세워 미묘(微妙)하고 정미(精微)하게 하여 이르는 곳마다 알맞았다. 예부터 지금까지 옮기고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와 같았다. 위에 말한 한 가지 일은 원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모두 뼈대라는 것이 없고, 만물을 낳을 때가 되어서는 기질(氣質)에 따라 형체를 부여하고 형체에 따라 성을 완성하여 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성(性)이 각각 바르게 되는 것은 하늘〔天〕로 말미암지 않고 사물〔物〕로 말미암아 본연(本然)이 되기에 부족하고 단지 우연일 뿐이니, 그것이 옳겠는가. 이것은 성(性)을 말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장 먼저 강구해야 한다. 만 가지 다른 것에서 하나의 근원이 본다는 것에 관해 말하면, 일반적으로 성이 다름〔異〕을 말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리(道理)의 면목(面目)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분수(分數)의 많고 적음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종합하여 말하면, 만 가지로 다르다. 그러나 그 면목이 각각 서로 달라도 사실은 하나로 관통되어 지선(至善)으로 똑같이 귀착되고, 많고 적음이 같지 않지만 사실은 서로 빌지 않으면서 자체로 전체가 아닌 것이 없으니, 바로 이것이 만 가지로 다른 것에서 하나의 근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개 하나이면서 만 가지로 되지 않으면 애초부터 이른바 성(性)이란 것은 없다. 만 가지이면서 하나가 되지 않으면 또한 이른바 성이란 것이 아니다. 지금 둘이 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둘로 만들어서, 성이 다르다는 설〔性異之論〕을 주장하는 사람은 단지 그것의 다름만을 이야기하면서 통체(統體)인 하나의 근원으로서의 이(理)에 그 같음을 밀어 놓았으며, 성이 같다는 설〔性同之論〕을 주장하는 사람은 단지 그것의 같음만을 이야기하면서 형이하의 구속하고 가려 막는 기(氣)에 그 다름을 전부 덮어씌우는 것이니, 아마도 모두 정론(定論)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에게는 본연성(本然性)과 기질성(氣質性)의 논(論)이 있다. 태극(太極)을 위주로 말하면 태극의 체(體)가 혼연히 완전무결하여 온갖 물상이 다 갖추어지는 것은 대원(大原)의 본연이지만, 물이 태어날 때 각각 하나의 성(性)을 전유(專有)하고 서로 겸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기질(氣質)이 제한한 것이다. 만물에 의거하여 나누어 말하면 인성(人性)이 대중지정(大中至正)한 것은 태극의 본연을 얻은 것이고, 만물이 단지 하나의 부분만을 얻은 것은 바로 기질에 구속된 것이다. 또 하나의 사물을 들어 그것만을 말하면 사람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한 것은 사람의 본연의 성〔本然之性〕이지만 그가 불인불의(不仁不義)하고 불예부지(不禮不智)한 것은 바로 기질에 연루(連累)된 것이다. 범과 이리의 효성 그리고 벌과 개미의 충성은 범, 이리, 벌, 개미의 본연의 성이지만 그 중에 혹시 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바로 기질에 ;연루된 것이다. 인삼(仁蔘)의 열기와 대황(大黃)의 한기는 인삼과 대황의 본연의 성이지만 그 중에 우수하거나 열등한 등품이 있는 것은 바로 기질에 연루된 것이다. 8월에 운담(雲潭 영평(永平)에 있음)으로 분곡(奔哭)하러 갔다. 이번 길에 면암(勉菴) 최공(崔公)을 방문하였다. 최공은 선생에게 전에는 심설에 관한 장문의 편지를 쓴 일이 있고, 나중에는 김 선생의 제문(祭文)을 지어 크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대개 유기일에게 현혹되어 그렇게 한 것이다. 선생은 모두 깊이 따지지 않고 그의 집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최근 노형이 나를 박하게 대우한 까닭은 서로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옛 우정을 잊지 못해 방문하러 온 것이오.”라고 하였다. 또 이 자리를 빌어 만절(晩節 늦게까지 지키는 절개)로써 격려하였다. 최공은 부끄러워하고 복종하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9월 1일 가정(柯亭)의 옛 정사에서 《대학》을 강연하였다. 선생이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봉석(鳳錫)과 종족(宗族) 사우(士友)들이 옛 집을 지키고자 도모하여 옛 관례에 따라 모여 강습하였다. 바로 이 날에 선생이 이곳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온 사람이 대단히 많아 이 기회에 《대학》을 강연하였다. 또 이 때 평산(平山) 신석원(申錫元), 신석(申), 조규문(趙奎文), 채상열(蔡相說), 우종하(禹鍾夏) 등이 왔다. 홍암(弘菴) 박공(朴公 박경수(朴慶壽))과 우하(雩下) 이삼영(李三永, ?~1893) 공은 선생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통해 마을 선비들을 불러 모으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여니, 선생이 그 자리에 갔다. 다음날 제생(諸生)을 인솔하여 미원서원(迷源書院)의 육선생(六先生) 신단(神壇)에서 전배(展拜)하였다. 여강(驪江 경기도 여주)을 지나가다 대로사(大老祠)에서 전배하였다. 전배례(展拜禮)가 끝나고 나서 강한루(江漢樓)에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강연하였다. 함께 강습하는 제자(諸子)에게 고하는 글이 있다. 문인 이필희(李弼煕)의 집에 묵었다. 이근원(李根元), 주용규(朱庸奎) 등이 함께 따랐다. 12일에 장담으로 돌아왔다. 26일에 아들과 조카와 문생(門生)들이 헌수례(獻壽禮)를 올렸다. 선생의 회갑날은 2월 4일이지만 정부자(程夫子 정이(程頤))의 유훈(遺訓)이 있고 또 김 선생(金先生)의 심상(心喪)을 만났기 때문에 집안사람에게 술을 마련하지 말도록 경계시켰다. 이날에 이르러서 맏아들 의석(毅錫)이 뒤늦게 수의(壽儀)를 거행하고, 또 문하의 제자들도 일렬로 서서 절하며 축하하였다. 다음날 강회(講會)를 행하였다. 손자 제항(濟恒)이 태어났다. 겨울에 문인 주용규(朱庸奎)가 홍재귀(洪在龜)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무고(誣告)를 분별하여 밝혔다.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心)ㆍ성(性)과 이(理)ㆍ기(氣)에 관한 논(論)은 예로부터 유문(儒門)에 갑론을박하는 쟁론이 있었다. 이것은 정미하고 복잡한 문제여서 그 견해가 저절로 모순이 생겨서 구차하게 똑같게 할 수 없으니, 애시당초 사정(邪正)이나 숙특(淑慝)이 나뉘는 원인이 아니다. 내가 그대를 미워하는 것은 단지 강설이 다르냐 같으냐 하는 것 이외에도 그대가 전후로 마음을 쓴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대에게 크게 근거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재노인은 화서 선생의 심설에 대해 이리저리 잘 짐작하여 조정하고 보완하는 논의를 하였는데, 면밀한 의리와 오묘한 요지가 담겨있다든가 심오한 인식과 원대한 사려가 미치는 데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구구한 천학(淺學)이 엿보아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게다가 환히 볼 수 있도록 심(心)의 대체(大體)를 세운 점에 근거하여 말하면, 한결같고 정성스러우며 고심어린 충정은 진실로 스승을 끝없이 사랑하여 진선진미(盡善盡美)하게 하는 데에서 나왔으니, 이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귀신이 반드시 미워할 것이다. 대체로 어리석고 좁은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와 독실한 믿음이 이와 같을 뿐 아니라 먼데나 가까운데 사는 사우(士友)들 중 지자(智者)와 우자(愚者) 및 현자(賢者)와 불초자(不肖者)를 막론하고 모두 깊이 인정하는 것이 이와 같다. 집사(執事)는 40년이나 오래도록 따라 배운 사람으로, 마음 깊은 곳까지 진실로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마땅히 다른 사람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구차하게 좇을 수 없다면 자기 견해에 의거하여 공평하게 펼쳐내어 설(說)을 만들어 서로 질정(質正)하여 정성스럽고 너그럽고 애정 어린 가운데서 도리(道理)의 진면목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해야 할 터인데, 대저 어찌하여 그러한 도(道)는 전혀 없이 단지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만 갑자기 일으키고, 험악하고 괴탄스런 말을 힘써 만들어 그 근본을 들추어내고 비난하여 하지 못할 말이 없는 듯이 하는가. 이미 선사를 배반하고 버린 진상(陳相)으로 지목하고 또 선사에게 상처를 내고 해친 이윤(尼尹)으로 배척하더니 급기야는 사문(斯文)에 재앙을 끼친 흑수(黑水)에까지 견주고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 말을 입에까지 올릴 뿐 아니라 또 그것을 편지에 쓰고, 사사로이 자기 무리와 함께 헐뜯고 배척할 뿐 아니라 또 사자(使者)에게도 큰소리로 욕질을 했다. 오호 괴롭도다!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참을 수 없겠는가. 무릇 같은지 다른지를 논의할 즈음에 올바른 것을 고수하는 사람은 승리하고자 하는 데에 급급히 서두르지 않고 항상 편안하고 진중한 태도를 가지며, 올바르지 않으면서도 승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상당히 힘을 들여 물리치면서도 그것이 평상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집사의 최근의 기상(氣象)은 외부에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도 항상 무언가 놀라운 낌새가 등 뒤에 다가와 있는 듯이 허둥거리고 두려워하며 자신을 안정시키지 못한다. 혹은 운담(雲潭 김평묵(金平黙))과의 수십 조목의 문답을 나열하고 기록하여 알든 모르든 사류(士流)들에게 널리 뿌리기도 하며, 혹은 성재노인의 일곱 가지 죄목을 날조하여 젊은이들에게 사방으로 퍼뜨려 전하도록 하면서도 부끄러운 모습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도 하며, 혹은 화서 선생의 강설(講說) 및 동문들과 주고받은 문적(文籍)을 거두어 모아 오로지 조령(鳥嶺) 밖의 취향이 다른 문하에 보내어 제판(題判)하는 말을 받으면서 사문(師門)에 욕을 보인 죄가 하수(河水)를 끌어당겨서도 씻어낼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는 집사의 살림집에 상량식(上梁式)을 할 때에 성재노인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바로 육위(六偉)의 글에 오로지 성재노인을 추악하게 헐뜯는 내용만을 큰 주제로 삼아 향리사람들이 전하고 외는 자료로 만들었는가. 이와 같은 조처는 모두 어른거리고 흐리멍덩하여 그 일을 환히 밝힐 수 없지만 한결같이 사람을 빠뜨리고 사람을 억누르는 비밀스럽고 흉악스러운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군자의 진실하고도 너그러운 흉금과 닮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이것은 모두 그대의 마음씀이 매우 형편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비록 그대가 논한 성리(性理)가 구구절절이 모두 정당(正當)하더라도 결코 군자가 취해야 할 것이 아니다. 하물며 예부터 큰 근본이 이와 같이 근거 없으면서도 사리(事理)를 완전하게 환히 밝힐 수 있었던 사람은 없지 않았는가. 집사는 단지 문장과 재변(才辨)이 능하지 않은 바가 없다는 것만을 알 뿐이고 실리(實理)와 진체(眞體)가 그 자체로 일정한 모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단지 눈앞에 있는 6,7명의 수재를 기만할 수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고 죽은 뒤에 백대 동안의 공평한 시선(視線)은 벗어나서 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단지 후대에는 선비의 기상이 시들시들해져서 북을 울리고 죄를 묻는 형벌이 꼭 그 몸에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만을 믿을 뿐이고 황천의 상제께서 하늘 위에 계시면서 옆에서 질책하여 저절로 번개같은 눈과 천둥같은 위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심하도다, 두껍게 덮여 가려진 모습이여!” 계사년(1893, 고종30) - 62세 - 정월에 병이 들다. 선생은 타고난 기질이 대단히 마르고 허약하며 어린 시절에는 또 큰 병을 앓기도 하였지만 심지를 보전하고 섭생(攝生)하는 것은 반드시 그 도에 맞게 하였다. 평소에 말을 빨리하거나 갑자기 화를 내지도 않았고 또 발걸음도 황급하게 걷지 않았으며, 음식은 싱겁게 드셨고 잠자고 일어나는 시각은 항상 일정하였다. 성실함과 경건함을 철저하게 실현하고 도리와 의리를 가득 채워 조화롭고 순수하며 바르고 커다란 기상이 면모에 다 드러나서 비록 병들어 아프고 괴롭고 지칠 때에도 눈썹을 찡그리거나 낯빛을 바꾸지 않았다. 사지와 관절 및 손과 발은 상한 데가 없고 또 빠진 이와 빠진 머리털까지도 모두 거두어 모아두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설사 증상이 여러 달 동안 멎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잠시 누웠다가 금방 일어나서 의관을 정돈하고 단정하게 앉아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고서 어깨와 등을 곧게 세우고 가지런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긴 듯하였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반드시 기꺼이 받아주어 마치 평시와 다름없었으며 임종하는 날에도 역시 이와 같았다. 3월에 문인(門人)에게 명령하여 빌려온 서적들을 되돌려주게 하고, 저술한 원고들을 수습하게 했다. 18일에는 화서 선생이 태어나신 날이어서 이른 아침에 애도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으며 정안문자(正案文字)를 환수하도록 명하였다. 선생은 매번 이 날이 되면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애도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날에 이르러서 병이 위독하였지만 겉옷으로 몸을 감싸고 온 힘을 다해 견디면서 곡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석(麟錫) 등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곧음〔直〕 하나뿐이다. 내가 선사의 심설(心說)에 대해 함부로 의심을 품었고 또 구구하게 조정하고 보완한 것도 내가 곧음을 행하는 도를 잃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직 정안문자(正案文字)만은 중옹(重翁)이 가르치신 뜻에 따라 한 것이다. 근래에 다시금 생각해보니 체면과 도리로 볼 때 심히 옳지 않은 점이 있다. 지금부터 그 글을 환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문(告文)을 구술하고 선사의 유상(遺像)에 고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또 이러한 뜻은 나중에 중옹(重翁)의 영연(靈筵)에 고해야 하고, 여러 사우(士友) 간에도 그렇게 된 까닭을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선생이 생각하기에는, 화옹(華翁 이항로(李恒老))이 이(理)로써 심(心)을 단정한 것은 바로 그 본원(本源)과 진체(眞體)를 직접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진실로 그 가르침을 준수해야 하지만, 그 유명한 언론에 대한 억양(抑揚)은 좀 편중된 것이 있어서 후일의 폐단이 있을까 두려웠다. 이에 명목(名目)을 내용으로 삼아 주리론(主理論)을 간별하고 그에 대해 조정하고 보완하여 선사께서 말씀하신 주리(主理)의 종지가 자세한 단계로 한층 더 훌륭하게 펼쳐지게 하였다. 그런데 정안문자(正案文字)의 경우에는 당초에 위로는 중옹의 엄중한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으며, 아래로는 내가 조정하고 보완하는 본의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차근차근하며 따뜻하고 자상한 도(道)가 되기 때문에 이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년 동안 그 설을 힘써 주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화옹이 고심하여 넓히고 밝힌 강설(講說)에는 진실로 한 부의 진면목이 들어 있어서 나중에 그 구절의 말을 마디마디 잘라 특별한 모양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타당하지 않으며, 결국 옛날의 진면목에 따라 자연스럽게 유행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보완하여 말한〔補說〕 것은 명백하고 솔직하여 구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 환수하는 명이 있었다. 19일 신축(辛丑)에 정사(精舍)에서 고종(考終)하였다. 이날 호흡이 매우 미미하였으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하고 어둡지 않아 턱으로 가리켜서 시중드는 사람을 부려 그 잠자리를 바르게 하도록 시켰다. 부인 이씨(李氏)가 부녀(婦女)를 거느리고 나와 작별하였다. 조금 있다가 손을 내저어서 물러가게 하고 나서 기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4월에 같은 군에 있는 달리산(達理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문인으로 건질(巾絰)을 착용하고 모인 사람이 백여 인이고 사림장례(士林葬禮)를 행하였다. 제주(題主)에 관함(官啣)을 쓰지 않은 것은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갑오년(1894, 고종31) 3월에 유상(遺像)을 그려 보관하였다. 문인의 추모가 그치질 않아 화가 조모(趙某)로 하여금 유상을 그리게 하고 잘 보관해 두었다가 때에 맞게 전배(展拜)하였다. 다만 화가가 선생이 건강하실 때에 자세하게 살펴보질 못하고 거의 병이 위중하던 날에야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정성을 다해 그렸지만 2~3분도 닮지 못했으니, 실로 소상(塑像)을 모시고 그리움을 기탁하는 것과 서로 멀지 않았다. 을미년(1895, 고종32) 여름에 처음으로 유집(遺集)을 간행하였다. 유치경(兪致慶), 주용규(朱庸奎)가 동문인(同門人)들과 서로 의논하여, “선사(先師 柳重敎)가 도를 연구한 글은 권질(卷帙)이 적지 않아 간행하고 유포하는 데에 진실로 겨를이 없다. 우리들은 스승의 자리가 비어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으니 활자로 약간 권을 인쇄하여 나누어 보관하고 연구하는 자료로 삼지 않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장담(長潭)에 장소를 마련하고 간행하는 일이 반쯤 되었을 때 세상의 변고로 인하여 정지하였다가 정유년(1897, 광무1) 여름에 이르러서 평산(平山) 절곡(節谷)에서 일을 마무리하였다. 간행하는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애를 쓴 사람으로는 오인영(吳寅泳), 변석현(邊錫玄), 홍승의(洪承義) 등이다. [주-D001] 나월당(蘿月堂) : ?~? 본명은 우한(于垾)이다. 부제학 유숙(柳潚)의 아들로 진사(進士)를 지냈다. 스무 살 때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죄를 논하였으며, 의정공 유몽인이 화를 당한 후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춘천 산 속으로 들어가 글을 읽었다. [주-D002] 관호(冠湖) : 지금의 춘천시 남면 관천리(冠川里) 부근을 말한다. [주-D003] 참판공 : 성재선생의 조부 유영오(柳榮五, 1777~1863)이다. 유영오는 자가 숙도(叔陶), 호가 율리(栗里)이다. [주-D004] 집안의 가업 : 원문은 기구(箕裘)이다. 대를 이어 부조(父祖)의 업(業)을 잇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한데서 유래했다. [주-D005] 잠강(潛江) : 지금의 가평군 설악면 부근을 흐르는 강이다. [주-D006] 이초평(李初平)이 …… 일 : 이초평(李初平)은 송대(宋代) 사람으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 그의 상관이었는데, 염계가 현인이라는 것을 알고 후대하였다. 염계에게 독서의 요령에 대해 물었는데, 염계가 “공은 연세가 많아 무리가 있으니, 그저 제가 해 드리는 말만 들으십시오.”라고 하므로, 초평이 매일같이 그 말을 들어 2년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주-D007] 이정리(李正履) : 1783~1843.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심부(審夫), 호는 순계(醇溪)이다. 이보천(李輔天)의 손자이며, 이재성(李在誠)의 아들이다. 유은(柳憖)의 외손자이다. 1835년(헌종1) 의령 현감으로 있으면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춘추관기주관으로 《순조실록》의 편찬에도 참가했다. [주-D008] 이준(李埈) : 1812~1853.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자는 백흠(伯欽), 호는 괴원(槐園)이다.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檗溪)에서 출생했으며 이항로(李恒老)의 아들이다. [주-D009] 임규직(林圭直) : 1811~1853. 자가 용숙(容叔)이다. [주-D010] 이인귀(李寅龜) : 1809~189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장여(長汝), 호는 완이(莞爾)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81년 경학으로 천거되어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임명되었고, 1888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으나 망국의 소식을 듣고 호서 단양으로 물러나 은거하여 격치(格致)를 주로 공부하였다. 저술로 《완이만록(莞爾漫錄)》이 있다. [주-D011] 섭자승당(攝齊升堂) : 옷자락을 걷고 당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論語 鄕黨》 [주-D012] 유중진(柳重鎭) : 1820~1874. 자는 치선(穉善), 호는 진추재(盡推齋)이다. [주-D013] 대행(大行) : 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이다. 왕은 ‘대행 대왕’이라 하고 왕비는 ‘대행 대비’라고 한다. [주-D014] 한(漢) …… 어그러뜨렸다 : 한나라 선제(宣帝)가 그 생부를 높여 ‘황고(皇考)’라고 칭호한 일을 말한다. [주-D015] 희공(僖公)의 …… 토론 : 이에 관한 논의는 《성재집》 권5의 〈상중암선생 신미(上重菴先生 辛未)〉와 《성재집》 권6의 〈상중암선생 신미(上重菴先生 辛未)〉에 보인다. [주-D016] 유행록(遺行錄)을 지었다 : 《성재집》 권42에 〈우하유공행록(禹下柳公行錄)〉이 보인다. [주-D017] 박경수(朴慶壽) : 1824~1897.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선경(善卿), 호는 홍암(弘庵)이다. 이항로의 제자이다. [주-D018] 고달산(高達山) 절에서 독서했다 : 〈화서선생연보〉에 따르면 이 때 《역경(易經)》을 읽었다고 한다. [주-D019] 남유연구(南遊聯句) : 《성재집(省齋集)》 권1 〈시(詩)〉에 보인다. [주-D020] 효정전(孝定殿) : 헌종(憲宗)의 혼전(魂殿)을 말한다. [주-D021] 대상(大祥) : 죽은 지 두 해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D022] 담사(禫祀) : 상복을 벗는 제사이다. 대상(大祥)을 지낸 다음에 지내는 제사로, 초상 후 27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D023] 진종(眞宗) : 영조(英祖)의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이다. 그는 영조 원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 뒤 정조(正祖)가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었을 때 이 효장세자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므로 정조 즉위 후 진종(眞宗)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주-D024] 권돈인(權敦仁) : 1783~1859.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彝齋)ㆍ우랑(又閬)ㆍ우염(又髥)ㆍ번상촌장(樊上村庄)ㆍ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과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 판서와 우의정ㆍ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祧遷禮)에 관한 주청으로 인해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주-D025] 대신과 …… 반대했다 : 대신과 유신(儒臣)은 소목(昭穆)의 차례를 중시하여 헌종을 부묘(祔廟)하는 날에 진종을 5세(世)로서 조천하는 것이 상례(常禮)라고 주장한 반면, 권돈인은 진종이 철종에게 황증조(皇曾祖)에 해당하는데 만약 조천한다면 이는 친등(親等)이 다하지 않았는데 조천하는 것이 되므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권돈인은 또 횡거 장재가, “고조(高祖)에서부터 아버지까지를 모두 제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만약 형제 몇 사람이 대를 이어 즉위했을 경우 묘(廟)의 수로 확정하여 소목 이외의 묘를 제사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한 말과, 세종(世宗) 때 ‘5묘 6실’의 사례를 들어 진종의 조천을 반대했다. [주-D026] 사친(四親) : 부(父), 조(祖),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가리킨다. [주-D027] 예법 : 원문은 ‘義起’이다. 예에 관한 해당 조목이 없을 경우 도리나 이치에 따라 새로운 예법이나 기준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D028] 정자(程子)가 제시한 예법이다 : 정자는, “형제가 자리를 계승하면 모두 종묘에 들이게 되는데, 오나라 태백 형제처럼 형제 네 명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다면 마침내 선조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묘가 많아진다고 해도 조천하는 원식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曰兄弟相繼, 如何? 曰此皆自立廟. 然如吳太伯兄弟四人相繼, 若上更有二廟不祧, 則遂不祭祖矣. 故廟雖多, 亦不妨祧, 只祧得服絕者, 以義起之可也.〕”라고 말했다. 《二程遺書 卷22》 [주-D029] 구문장(丘文莊) : 명(明)나라 구준(丘濬)을 가리킴. 자는 중심(仲深), 호는 경산(瓊山), 문장은 시호이다. 주자학(朱子學)에 정통하고 벼슬은 태학사(太學士)에 이르렀으며, 저서에는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ㆍ《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이 있다. 《明史 卷181》 [주-D030] 주자서(朱子書)를 집차(輯箚)하는 일 : 괴원(槐元) 이준(李埈)이 지은 《주자대전집차 朱子大全集箚》 20책을 가리킨다. [주-D031] 우리 태조황제 :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킨다. [주-D032] 정장암(鄭丈巖) : 1648~1736. 정호(鄭澔)로, 자는 중순(仲淳)이며, 장암(丈巖)은 호이다. 정철(鄭澈)의 현손으로, 감찰 정경연(鄭慶演)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로 매우 촉망받았으며, 1675년(숙종1)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에 힘썼다. 저서로 《장암집》 26권이 전하고, 편서로 《문의통고(文義通攷)》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D033] 아마 …… 것이다 :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유청신은 1323년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심왕당(瀋王黨)에 가담하여 조적(曺頔) 등과 함께 심왕 고(暠)를 고려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략을 꾸며냈으나, 심왕옹립운동과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고려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 9년간 머물다가 죽었다고 한다. 후손으로서 붓을 들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D034] 정일심법(精一心法) : 정(精)으로 도심(道心)을 존양(存養)하고, 일(一)로 인심(人心)을 성찰(省察)하는 법이다. 형기(形氣)에서 나오는 인심은 사(私)로 빠지기 쉽고, 의리(義理)에서 나오는 도심은 어두워지기 쉽기 때문에 정밀(精密)하게 살펴 형기에서 나오는 사사로운 마음을 배제하고, 전일(專一)하게 지켜 의리에서 나오는 바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인데, 송유(宋儒)는 이를 요(堯), 순(舜), 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라고 하였다. [주-D035] 한포(漢浦) : 자장나루의 옛이름으로, 지금의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에 있다. [주-D036] 소윤(少尹) : 윤증(尹拯, 1629~1714)을 가리킨다.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활동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ㆍ유봉(酉峰)이다. [주-D037] 경중(輕重)설 : 윤증은 스승 송시열이 부친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비판하자 절교했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와 스승 중 누가 중(重)한가하는 ‘부사경중론(父師輕重論)’이 일어났다.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과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은 숙종이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숙종은 초기에는 윤증의 손을 들어주었다가 말년에는 송시열의 손을 들어 주었다. [주-D038] 아버지〔윤선거(尹宣擧)〕의 허물 :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강화도〔江都〕로 피난했다가, 강도가 청군(淸軍)에게 함락되자 윤선거는 자기의 두 친구와 아내에게 자살할 뜻을 밝혔는데, 윤선거의 처 이씨(李氏)는 목매어 자살했으나 윤선거는 미복(微服)으로 강화도를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한 일을 말한다. [주-D039] 위(魏) …… 않았듯이 : 진(晉) 왕부가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진왕(晉王) 사마소(司馬昭)에게 억울하게 죽자, 원한을 품고 조정에서 벼슬을 주며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주-D040] 아들이 …… 숨긴다 : 《논어》 〈자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41] 아버지를 …… 숨긴다〔爲親者諱〕 : 《춘추공양전》 閔公 元年조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42] 부모에게 …… 따른다 : 《예기》 〈곡례〉에 보인다. [주-D043] 향당(鄕黨)과 …… 낫다 : 《예기》 〈내칙〉에 보인다. [주-D044] 아버지와 …… 있겠습니까 : 《성재집》 권4의 〈무오년 중암선생께 올린 편지〉에 수록되어 있다. [주-D045] 참판공 : 성재선생의 조부 유영오(柳榮五, 1777~1863)이다. 유영오는 자가 숙도(叔陶), 호가 율리(栗里)이다. 유중교의 아버지 유조(柳鼂)는 유영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영오의 아우인 유영구(柳榮九)의 양아들로 들어갔다. 따라서 명목상의 할아버지는 유영구이지만, 혈연상의 친할아버지는 유영오이다. [주-D046] 상(上)께서 …… 했다 :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게 했다. 널리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철종이 직접 삼정책문(三政策問)을 내려, 개선방안과 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응시인들은 시험장에서는 제목만 받고 열흘 내에 글을 지어 태학(太學)에 내게 했고, 시험장에 나오지 못한 지방 사람들에게는 삼정책문을 전국 각 도에 보내, 각 군현에서 상소문을 모아 감영을 통해 서울로 보내게 했다. [주-D047] 이광지(李光地) : 1642~1718. 청(淸) 안계인(安溪人), 강희 진사(康熙進士), 대만(臺灣)을 평정하고 직예순무(直隷巡撫)가 되었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었다. [주-D048] 중국은 …… 없다 : 동아시아 사람의 인식속에서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 세상의 머리로 정해져 있었지만, 서양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정해진 곳이 없다는 말이다. [주-D049] 인심은 …… 잡아라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50] 교인(鮫人)이 …… 것 : 남해 물속에 사는 교인(鮫人)이 비단을 잘 짰는데, 물 밖으로 나와 인가에 머물면서 매일 비단을 짜다가, 작별할 무렵에 눈물을 흘려서 구슬로 만들어 주인에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太平御覽 卷803》 [주-D051] 신(蜃)이 …… 것 : ‘신(蜃)’은 교룡의 일종인데 그 모습이 뱀과 같으면서 크고 용처럼 뿔이 있다.……기운을 토하여 누대와 성곽의 형상을 만드는데 비가 오려할 때 보인다. 그것을 신루(蜃樓)라고 하고 해시(海市)라고도 한다.〔蛟之屬有蜃 其狀亦是蛇而大 有角如龍狀……能吁氣成樓臺城郭之狀 將雨即見 名蜃樓 亦曰海市〕 《本草綱目 鱗一ㆍ蜃》 [주-D052] 지구 …… 없다 : 《성재집》 권36 〈燕居謾識〉에 수록되어 있다. [주-D053] 만동묘(萬東廟) :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 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 1865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을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11) 다시 세웠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주-D054] 수암(遂菴) 권(權) 공 : 권상하(1641~1721)로,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은 노론 계열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지지하는 호론(湖論)의 입장을 취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ㆍ한수재(寒水齋)이다. 1661년(현종2) 진사가 되었으며, 1663년에는 송시열을, 2년 뒤에는 송준길(宋浚吉)을 만나 두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학문에 몰두했다. 이단하(李端夏), 박세채(朴世采), 김창협(金昌協) 등과 교유했다. [주-D055] 차가운 샘물의 시 : 《시경(詩經)》 〈하천(下泉)〉을 가리킨다. 〈下泉〉은 임금이 포악하여 백성을 해롭게 하므로 현명한 임금을 사모하여 지은 시이다. [주-D056] 선생은 …… 지었다 : 시는 《성재집》 권(卷)1에 보인다. [주-D057] 전자명(田子明) 우(愚) : 전우(田愚, 1841~1922)로,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ㆍ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ㆍ간재(艮齋)이다. 아버지는 재성(在聖)이다. 21세에 당시의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로 아산의 임헌회(任憲晦)를 직접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그의 학문 성향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였다. [주-D058] 수호(壽湖) : 경기도 양평 서종면 소재. ‘수대울’이라고도 불렀다. 북한강의 가루재 남동쪽에 있는마울로 안동 권씨가 정착하여 개척했다고 한다. 족보에는 ‘수대곡(水大谷)’이라 되어 있다. [주-D059] 구암 권 공 : 권희(權曦, 1782~1866)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인백(寅伯)이다. [주-D060] 순장(順長) : 권순장(權順長, 1607~1637)으로, 권희의 조부(祖父)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효원(孝元), 아버지는 형조 참판 권진기(權盡己)이다. 1624년(인조2) 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로 피란을 갔으며, 동지와 단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순사(殉死)할 것을 맹세했다. 성이 함락되자 상신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화약고에 불을 질러 분사했다. 이튿날 그의 처와 누이동생이 그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자결했으며, 아우 권순열(權順悅)과 권순경(權順慶)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지평에 이어 좌찬성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주-D061] 독대곡(篤大谷) : 가평군 설악면 도곡리(陶谷里) 부근이며 속칭 ‘독골’이라 부른다. 1866년, 성재선생이 이 곳에 대곡서당(大谷書堂)을 개설했다. [주-D062] 자문(咨文) : 같은 등급의 관청 사이에서 주고 받은 공문서를 말한다. [주-D063] 일소(馹召) :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부를 때의 한 가지 방법으로, 역마(驛馬)를 타고 빨리 올라오라고 부르는 일을 말한다. [주-D064] 낙은공(洛隱公) :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본명은 조(鼂)이다. 성재 유중교의 아버지이다. [주-D065] 환질(環絰) : 한 가닥의 삼줄을 바탕으로 하고 다시 그것을 다른 삼줄로 감아 상복의 허리나 머리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禮記 雜記》 [주-D066] 선사이선생상지복의절(先師李先生喪持服儀節) : 《성재집》 46卷 〈가하산필(柯下散筆)〉에 수록되어 있다. [주-D067] 여섯 선생 :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동천(東泉) 김식(金湜),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잠곡(潛谷) 김육(金堉),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여섯 사람을 가리킨다. [주-D068] 김기찬(金基纘) : 1809~?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緖), 호는 석거(石居)이며, 주묵(周默)의 아들이다. 1835년(헌종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집의(執義)를 거쳐 1852년(철종3) 대사간이 되고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저서로는 《석거집》이 있다. [주-D069] 유영하(柳榮河) : 1787~1869.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춘천에 거주했다. 생부(生父)는 유관(柳瓘), 조부(祖父)는 유정한(柳鼎漢), 증조부(曾祖父)는 유건(柳謇), 외조부(外祖父)는 이인수(李寅壽)이다. 유서(柳瑞)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819년(순조19) 식년시(式年試)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했다. [주-D070] 김대사성(金大司成) : 김식(金湜, 1482~1520)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ㆍ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1519년 4월 조광조ㆍ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올랐다.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자결하였다.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그뒤 선조 때에 이조 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주-D071] 남동강(南東崗) : 남언경(南彦經, 1528~1594)으로,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 알려져 있다. [주-D072] 이청강(李淸江) : 이제신(李濟臣, 1536~1584)으로, 본관은 전의,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병마사 이문성(李文誠)의 아들이며, 영의정 상진(尙震)의 손자사위이다. 저서에 《청강집》, 《청강소설》, 《진성잡기(鎭城雜記)》 등이 있다. [주-D073] 김잠곡(金潛谷) : 김육(金堉, 1580~1658)으로, 본관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실학(實學)의 선구적 학자로서, 천문ㆍ지리ㆍ병서(兵書)에 정통하였으며, 율학의 대가로서 1653년부터 새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실시하였다.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주-D074] 김삼연(金三淵) : 김창흡(金昌翕, 1653~1722)으로,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이고,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의 아우이며,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경기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주-D075] 창주정사(滄洲精舍) : 주희(朱熹)가 1194년에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에 거처할 때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뒤에 창주정사로 고쳤다. 그러다가 이종(理宗)이 주희를 높여 제사하기 위해 1244년에 이 정사에 고정서원(考亭書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사액(賜額)하였다. 공자를 종주로 하여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모시고,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사마광(司馬光), 장재, 이동(李侗) 등 일곱 사람을 종사(從祀)하였다. 《朱子大全 附錄 卷6 別本年譜》 [주-D076] 석채례(釋菜禮) : 서원(書院), 또는 서당(書堂)에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석(釋)은 ‘올린다’ 또는 ‘바친다’는 의미이다. 석전(釋奠)은 양(羊) 따위를 제물(祭物)로 하고 석채에는 오직 빈(蘋)과 조(藻)만 제물로 바친다. 《禮記 王制》 [주-D077] 춘하추동 각각 첫달〔四孟朔〕 : 음력 1월, 4월, 7월, 10월을 말한다. [주-D078] 전알례(展謁禮) : 사당에 참배하는 예를 말한다. [주-D079] 백록동(白鹿洞) 학규(學規) :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등 대인 관계의 요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朱子大全 卷74 白鹿洞書院揭示》 [주-D080] 은유(恩侑) : 임금이 내린 은사(恩賜)를 말한다. 이 때 제수(祭需)를 하사하였다. [주-D081] 연사(練祀) :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곧 연제(練祭)를 말한다. [주-D082] 걸음〔武〕 : 반 보(半步)를 가리키는 단위이다. [주-D083] 그 정당 …… 명명했다 : 《성재집(省齋集)》 권38 〈가하산필(柯下散筆)〉에 “한포서사(漢浦書社)의 당(堂)과 실(室)에 이름을 붙인 기(記)〔漢浦書社名堂室記〕”가 보인다. [주-D084] 홀기(笏記) : 의식(儀式)의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한다. [주-D085] 중화를 …… 법도이다 : 《화서집(華西集)》 권15 〈계상수록 2(溪上隨錄二)〉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86] 김진수(金晉壽) : 1815~? 호는 만회재(晩悔齋)이다. [주-D087] 머리를 풀어 헤치는데 : 《논어》 〈헌문(憲問)〉의 “관중이 아니었다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왼쪽으로 옷을 여몄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에서 나온 말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 중화의 문화를 버리고 이민족의 습속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주-D088] 장보(章甫) : 유학자들이 머리에 쓰는 관(冠)을 말한다. [주-D089] 천근(天根) : 보통 별자리에서는 저성(氐星), 64괘에서는 복괘(復卦)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근본이 되는 하늘의 도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주-D090] 김 선생께서 편찬한 사실기(事實記) : 《중암집(重菴集)》 별집 〈우암송선생사실기(尤庵宋先生事實記)〉를 말한다. [주-D091] 사친삼의(事親三儀) : 《성재집(省齋集)》 권46 〈사친삼의(事親三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92] 삭망(朔望)에 참알(參謁)하는 예(禮) : 《성재집(省齋集)》 권46 〈삭망참알의(朔望參謁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93] 계절마다 …… 의식 : 《성재집(省齋集)》 권46 〈시절상수의(時節上壽儀)〉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94] 집안 …… 짓고 : 《성재집(省齋集)》 권46 〈경제황고계가중사후(敬題皇考戒家衆辭後)〉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95] 화서선생유실조치의(華西先生遺室措置儀)를 지었다 : 《성재집(省齋集)》 권46 〈선사유실조치(先師遺室措置)〉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096] 상제(祥祭) : 돌아가신 후 2년 만에 지내는 제사이다. [주-D097] 담제(禫祭) : 담제(禫祭)는 대상(大祥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을 지낸 뒤 두 달 뒤 혹은 백일이 다가오는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택일하여 지낸다. 담사(禫祀)라고도 한다. [주-D098] 격화(膈火) : 울화병의 일종이다. [주-D099] 유상(帷裳) : 조회나 제사 때의 정복(正服)을 말한다. [주-D100] 양복통해(兩服通解) : 《성재집(省齋集)》 권30 〈강설잡고(講說雜考)〉에 보인다. [주-D101] 유사(遺事)는 문집에 보인다 : 《성재집(省齋集)》 권43에 〈선고낙은부군유사초(先考洛隱府君遺事草)〉와 〈선비이유인유사(先妣李孺人遺事)〉가 보인다. [주-D102] 묘지(墓誌)를 지었다 : 《중암집(重菴集)》 권47 〈묘지명(墓誌銘)〉에 〈성균진사낙은유선생묘지명(成均進士洛隱柳先生墓誌銘)〉이 보인다. [주-D103] 김 선생에게 왕양명연보변(王陽明年譜辨)을 올리다 : 《성재집(省齋集)》 권5 〈왕복잡고〉에 〈상중암선생논왕양명연보변(上重菴先生論王陽明年譜辨)〉이 보인다. [주-D104] 부끄러운 …… 자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임시변통으로 기교를 부리는 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쓰는 바가 없다.〔爲機變之巧者 無所用恥焉〕”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D105] 궤연(几筵) : 삼년상 동안 신주(神主)를 모셔두는 곳이다. [주-D106] 독서량(讀書糧) : 얼마동안 독서하는 기간에 먹을 식량을 말한다. 지금의 학비에 해당한다. [주-D107] 계사(戒辭)를 …… 의식 : 낙은공 생전에 매월 삭망(朔望)에 가묘(家廟)의 행사가 끝나고 나서 계사를 읽게 한 의식을 말한다. ‘계사’는 《성재집》 권43 〈선고낙은부군유사초(先考洛隱府君遺事草)〉에 보인다. [주-D108] 신성(晨省) : 아침 일찍 부모의 잠자리에 가서 밤새의 안부를 살핀다는 뜻이다. [주-D109] 신알례(晨謁禮) : 새벽에 사당에 배알(拜謁)하는 일을 말한다. [주-D110] 삭망참례(朔望參禮) :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참배(參拜)하는 예를 말한다. [주-D111] 복괘(復卦) …… 글 :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단전(彖傳)에 “복에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復 其見天地之心乎〕”라는 내용이 보인다. ‘견심(見心)’이란 이름을 여기서 가져왔다. [주-D112] 영밀공(英密公) : 유청신(柳淸臣, ?~1329)으로, 고려 충렬왕 때의 역관(譯官)ㆍ재상이다. 본래 이름은 비(庇)이다.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개명하였다. 1310년(충선왕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주-D113] 공의 묘〔衣履藏〕 : 유골이 없을 경우 옷이나 신발 등을 가지고 장례를 지내는 것을 의리장(衣履葬)이라고 한다. 유청신은 원나라에서 죽어, 국내에서 시신을 안장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옷과 신발을 대신 묻고 무덤을 만든 것이다. [주-D114] 풍덕(豊德) : 현재 황해북도 개풍군에 속해 있다. [주-D115] 판밀직공(判密直公) : 유유기(柳有奇)이며, 유청신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주-D116] 호남의 …… 의논하여 : 《성재집(省齋集)》 권22 〈왕복잡고(往復雜稿)〉에 호남의 여러 종친에게 보낸 서신이 보인다. [주-D117] 충정공(忠正公) : 유탁(柳濯, 1311~1371)으로, 자는 춘경(春卿)이다. 1369년 안극인(安克仁), 정사도(鄭思道)와 함께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마암(馬巖)에 크게 신축하는 데 대하여 극력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시중에서 파면되었다. 1371년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그의 일당으로 노국대장공주의 장사(葬事)에 박례(薄禮)를 주장한 것이 헌사(憲司)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청교역(靑郊驛)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조선개국 후 보국고흥백(輔國高興伯)에 추증되었다. [주-D118] 세일제(歲一祭) : 1년에 한 번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D119] 전재(全齋) 임(任)선생 :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ㆍ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이다. 홍직필의 제자이며, 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고산집(鼓山集)》이 있다. [주-D120] 서신잠(書紳箴) : 《성재집》 권39 〈가하산필〉에 보인다. [주-D121] 유심재(柳心齋) : 유시수(柳始秀, ?~1878)로, 자는 희원(羲元), 호는 심재(心齋)이며, 이항로의 문인이다. [주-D122] 홍대심(洪大心) : 1837~1877. 초명은 대헌(大憲), 자는 여장(汝章), 호는 확재(確齋)이다. 이항로의 문인이다. [주-D123] 며느리를 …… 지었다 : 《성재집》 권41 〈가하산필〉에 며느리를 위해 지은 광지가 보인다. [주-D124] 화서선생아언(華西先生雅言) : 김평묵이 1867년(고종4)에 이항로의 원고 중에서 가려 뽑아 《화서아언》을 편집하고, 1874년(고종11)에 유중교와 함께 《화서아언》을 간행하였다. 김평묵은 1887년(고종24) 〈화서선생아언심설고증(華西先生雅言心說考證)〉도 지었다. [주-D125] 양공(梁公) 헌수(憲洙) : 양헌수(梁憲洙, 1816~1888)로, 자는 경보(敬甫), 시호는 충장(忠莊)으로, 이항로의 문인이다. 무예를 익혔으며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의 수성장이 되어 공을 세웠다.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강화도조약 당시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주-D126] 김생(金生) 영록(永祿) : 김영록(金永祿, 1849~1900)으로, 자는 사수(士綏), 호는 충재(充齋)이다. [주-D127] 선부연(仙釜淵) : 지금의 가평군 동방산〔옛이름은 청화산〕에 있다. [주-D128] 유기일(柳基一) : 1845~1904.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이다. 출신지는 경기도 포천이다. 부친은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D129] 홍재귀(洪在龜) : 1845~1898.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백(思伯), 호는 손지(遜志)이다. 이항로의 문인이자 김평묵의 사위이다. [주-D130] 중악(重岳) : 유중악(柳重岳, 1843~1909)으로, 본관은 고흥, 자는 백현, 호는 항와, 부친은 유호(柳晧)이다. 1868년부터 1875년까지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금계 이근원, 의암 유인석과 함께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과 함께 척양(斥洋)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5년 민비가 시해되자 통탄하여 남면 가정리(柯亭里) 주산(周山)에서 통곡문을 지어 발표하였다. 1896년 1월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 김경달(金敬達) 등과 함께 춘천에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창의포고문(春川倡義布告文)을 지어 선포하고 의거하였다. 저서로는 《항와집(恒窩集)》, 《척양설(斥洋說)》, 《유씨선세유행록(柳氏先世遺行錄)》 등이 있다.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주-D131] 증점(曾點)과 …… 생각 :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각자 너희들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모두가 세상에 나가서 벼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증점(曾點)은 “늦은 봄 날씨 따뜻한 때 봄옷이 마련되면 대 여섯 명의 어른과 예닐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나가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제단 터에서 바람 쏘인 다음, 시를 읊조리다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이에 “나는 증점과 함께 하려 한다”라고 하면서 증점의 뜻에 찬동하였다. ‘증점과 함께 하고픈 생각’이란 이를 말한다. 《論語 先進》 [주-D132] 큰 형 : 유중학(柳重學, 1819~1877)으로, 자는 치공(穉孔)이다. [주-D133] 유기일(柳基一) : 1845~1904.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이다. 태어난 곳은 경기도 포천이다.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저서로 《용서고(龍西稿)》, 《척양록(斥洋錄)》 등이 있다. [주-D134] 유기일(柳基一)의 편지에 답했다 : 《성재집》 권17 〈왕복잡고〉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35] 명도(明道) : 정호(程顥, 1032~1085)로,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 시호(諡號)는 순공(純公)이다. 명도선생(明道先生)으로도 불렸다. 정이(程頤, 1033~1107)가 그의 동생이다. [주-D136] 병자년 …… 때 : 병자년(1876, 고종13)에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주-D137] 위장식(慰狀式) : 모범적이고 형식적인 위문 편지를 말한다. [주-D138] 답장을 …… 고했다 : 《성재집》 17卷 〈왕복잡고〉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39] 유심재 : 유시수(柳始秀, ?~1878)로, 자는 희원(羲元), 호는 심재(心齋)이다. 이항로의 제자이다. [주-D140] 영연(靈筵) : 영좌(靈座)로, 시신을 떠난 혼령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이다. [주-D141] 속수옹(涑水翁) : 사마광(司馬光, 1019~1086)으로, 북송의 유학자이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자(字)는 군실(君實)이다. 섬주 하현(陝州 夏縣) 사람으로 호(號)는 우수(迂叟), 또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정(文正). 온국공(溫國公)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자치통감의 저자이며, 신법(新法)과 구법(舊法)의 다툼에서 구법파의 영수로서 왕안석(王安石)과 논쟁을 벌였다. [주-D142] 강후(康侯) : 호안국(胡安國, 1074~1138)으로, 중국 송나라의 학자. 자는 강후(康侯), 호는 무이선생(武夷先生)이다. 정이천(程伊川)을 사숙하여 거경 궁리의 학문을 중히 여겼다. 저서에 《춘추전》, 《통감거요보유(通鑑擧要補遺)》 등이 있다. [주-D143] 화정(和靖) : 화정(和靖)은 송대(宋代)의 학자인 윤돈(尹焞)을 가리킨다. 낙양(洛陽) 태생으로 자가 언명(彦明) 또는 덕충(德充)이고 정강(靖康) 연간에 황제가 ‘화정처사(和靖處士)’라는 아호를 내렸다. 정이(程頤)에게 배웠고 종신토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소흥(紹興) 연간에 포의(布衣)로서 태상 소경(太常少卿), 예부 시랑(禮部侍郞) 등을 지냈다.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에 반대하여 벼슬을 내놓았고, 저서에 《화정집(和靖集)》이 있다.《宋元學案 卷27 和靖學案》 [주-D144] 부옹(涪翁) : 조정에서 쫓겨나 부주(涪州)로 귀양 간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킨다. [주-D145] 북위(北魏)를 …… 온공(溫公) : 온공(溫公)은 사마광을 가리킨다.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祭文)에서 “맑은 수행과 꼿꼿한 절개는 사마광과 비슷하다”라고 썼다. 사마광이 북위를 정통으로 기록한 적이 있는데, 전우는 스승 임헌회를 이런 사마광과 비교하는 것을 모욕으로 보았다. [주-D146] 진회(秦檜)에게 우호적이었던 강후(康侯) : 김평묵은 제문에서 “한 겨울에도 송백처럼 기개를 잃지 않으니 호안국의 기풍을 지녔다”라고 하였다. 호안국은 간신으로 알려진 진회와 사이좋게 지낸 인물이다. 전우는 스승 전재를 간신 진회와 사이좋게 지낸 호안국과 비교하는 것을 모욕으로 보았다. [주-D147] 채경(蔡京)과 …… 화정(和靖) : 김평묵이 제문에서 “윤화정처럼 엄격히 자신을 지킨다”고 했다. 전우는 간신 채경과 스승을 비교하는 것을 모욕으로 보았다. [주-D148] 만주족에게 절한 미촌(美村) : 미촌은 윤선거의 호이다. 김평묵은 제문에서 “연꽃 옷과 혜초 허리띠를 하고 티없이 맑고 깨끗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원래 우암 송시열이 윤선거의 제문에서 한 말이다. 김평묵이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전우는 미복으로 탈출하고 만주족에게 절한 윤선거를 스승과 비교하자 이를 모욕으로 여겼다. [주-D149] 서경당(徐絅堂) : 1824~1880. 본명은 서응순(徐應淳)이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심(汝心), 호는 경당(絅堂)이며, 달성부원군 종제(宗悌)의 후손이다. 간성군수 재임기간(1874~1878)에는 성긴 베옷을 입었고, 4월에는 보리밥으로 백성과 생활을 같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저서로는 《경당유고》 4권 2책이 있다. [주-D150] 족보 …… 보내다 : 《성재집》 22卷 〈왕복잡고〉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51] 간세입후(間世立後) : 후사가 없이 죽었을 경우, 몇 세대가 지난 후에 후사를 세움을 말한다. 유중교는 《성재집》 권36 〈연거만지(燕居謾識)〉에서 “임진왜란 때 전사한 박지(朴篪)는 후사 없이 죽었다. 정조가 가상히 여겨 시대가 지났으나 후사를 두라고 하였다. 뜻은 좋지만 정법(正法)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D152] 무상유실 : 《시경》 〈홍안지십(鴻鴈之什)〉 ‘사간장(斯干章)’의 “서로 좋아하고, 나쁜 점을 닮지 말지어다.〔式相好矣 無相猶矣〕”라고 한 데서 따온 말.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한 것이다. [주-D153] 어항 : 송유(宋儒) 정명도(程明道)가 어항에다 송사리 몇 마리를 키우면서 때때로 관찰하였는데,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만물이 자득하는 뜻을 보려고 한다.〔欲觀萬物自得意〕”라고 대답했던 고사를 말한다. 《宋元學案 卷14 明道學案下 附錄》 [주-D154] 좌우 …… 만나는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55] 연평(延平) : 송(宋)나라 학자 이통(李侗, 1093~1163)을 말한다. 연평은 호이고 자는 원중(愿中),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양시(楊時)의 제자인 나종언(羅從彦)에 수학하였고 주자(朱子)의 스승이다. [주-D156] 삼서연의(三書衍義) : 《성재집》 권26 〈강설잡고〉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57] 심조자득(深造自得) : 학문을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 깨닫는 경지를 말한다. [주-D158] 위미정일(危微精一) : 순(舜)이 우(禹)에게 일러 준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자(朱子)는 이 16자가 성인들이 도통을 전수한 요결(要訣)이라고 하였다. 《書經 大禹模》 [주-D159] 김홍집(金弘集) : 1842~1896. 온건개화파의 거두로 중도개혁노선을 견지하면서 갑신, 갑오년 개화정책을 주도했다. 특히 외교정책의 책임자로서 대외교섭을 담당했으며, 격동기 민심수습과 근대적 제도개혁에 힘썼다. [주-D160] 기괴한 책 : 1880년 김홍집은 윤웅렬(尹雄烈), 이용숙(李容肅), 지석영(池錫永) 등과 함께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과 정관응(鄭觀應)의 《이언 易言》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 책을 말한다. [주-D161] 이만손(李晩遜) : 1811~1891. 이황의 후손으로, 영남 유생들을 이끌고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면서 민씨의 개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치자, 1882년 강진규 등과 함께 〈만인소〉를 올려 당시의 정책을 비난하다가 유배되었다. 임오군란 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석방되었다. [주-D162] 이원일(李源逸) : 1842~?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경원(景元)이다. 1867년(고종4) 유학으로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사간 재임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사건으로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는 상소를 통한 위정척사운동을 벌였을 때, 특히 영남유생 중 이만손(李晩孫)의 상소를 패륜적이며 조정을 헐뜯고 기만한다 하여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D163] 신헌(申櫶) : 1810~1884.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ㆍ금당(琴堂)ㆍ동양(東陽)ㆍ우석(于石)이다. 1876년 판중추부사로 강화도에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미국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주-D164] 도당(都堂) : 의정부(議政府)의 별칭이다. [주-D165] 김 선생이 유배지로 떠났다 : 당시 김평묵은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를 떠났다. [주-D166] 채계통(蔡季通) : 채원정(蔡元定, 1135~1198)으로, 송(宋)나라 건양(建陽) 사람이다. 자는 계통(季通), 호는 서산(西山)이다. 주희(朱熹)와 교유하였는데 주희는 제자의 대열에 넣지 않고 노우(老友)로 여겼다. 한탁주(韓侂胄)에 의한 위학(僞學)의 금고가 있자 도주(道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채원정은 유배(流配)의 명을 받고는 집에 하직도 하지 않고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났다. 주희 등 종유자 수백 인이 소사(蕭寺)에서 전송하면서 모두 탄식하고 더러는 눈물을 흘린 자도 있었으나 채원정은 평시와 다르지 않았다. 3천 리 길을 도보로 걸어가느라 다리에 피가 흘렀으나 조금도 말과 안색에 나타내 보임이 없었다. 《宋史 卷434 儒林列傳》 [주-D167] 외대(外臺) : 지방의 각 도(道)에 있는 도사(都事)의 통칭(通稱)이다. [주-D168] 태극도설대지(太極圖說大指) : 《성재집》 권30 〈강설잡고〉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69] 나에게 …… 있어 : 원문은 ‘處義之端’이다. 이는 《맹자》 〈공손추〉의 “羞惡之心義之端也”에서 따온 말이다. 김평묵과 같은 죄를 받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의롭지 못한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주-D170] 취흘공(醉吃公) : 유숙(柳潚, 1564~?)으로,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이다. 부정(副正) 유몽표(柳夢彪)의 아들이다. 대사간과 형조 참판 등을 지냈으나, 1623년 인조반정 직후 광해군 때 역신(逆臣)의 심복이었다는 죄로 청하(淸河)에 위리안치되었고, 뒤에 숙부 유몽인(柳夢寅)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다시 위리안치되었다. [주-D171] 제문(祭文) : 《성재집》 권40 〈가하산필〉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172] 난군(亂軍)이 궐을 범했다 :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가리킨다. [주-D173] 영에 …… 일으켰다 :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말한다.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19)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으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이 일으킨 사건이다. [주-D174] 중전(中殿)의 국상(國喪)이 공포(公布)되자 : 당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 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는데,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상을 공포하였다. [주-D175] 정목(政目) : 관직의 임명 또는 면직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주-D176] 맹자(孟子)께서 …… 편(篇) : 《맹자》는 총 7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주-D177] 낙민(洛閩) : 염낙관민(濂洛關閩)을 줄인 말이다.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閩)의 주자를 통칭한 것으로, 곧 송대의 성리학을 가리킨다. [주-D178] 주(周)나라의 …… 있다 : 주나라의 예법이 노나라에 보존되어 있듯이, 중화의 예법이 조선에 보존되어 있어, 조선이 중화의 명맥을 이었음을 말한다. [주-D179] 다 …… 않겠다〔劓殄滅之無遺育〕 : 이 말은 《서경(書經)》 〈반경(盤庚)〉에 “선한 마음 없이 도(道)를 배반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등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중형에 처하여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하고 그 자손도 길이 존속하지 못하도록 처분할 것이다.”라는 은왕(殷王) 반경의 말에서 왔다. [주-D180] 평족(平族)은 다 멸족되었고 : 임진왜란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일족을 몰아내고 일본을 장악한 사실을 말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성을 ‘평(平)’으로 고쳤다. [주-D181] 두 …… 요청하였습니다 : 두 죄인이란 임진왜란 당시 선릉(宣陵 성종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의 능)을 파헤친 자를 가리킨다. 왕릉을 파헤친 자를 잡아 보내도록 요구한 조선에 대해 대마도주는 마고사구(麻古沙九)와 마다화지(麻多化之)를 바쳤다. 이들을 조사한 결과 임진년에 각각 13세와 23세였으며, 조선으로 들어오지 않았음이 밝혀졌지만 결국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하여 사형에 처하고 일을 마무리지었다. [주-D182] 윗사람을 …… 것입니다 : 이 말은 《맹자》 〈양혜왕 하〉에 “임금께서 인정을 행하시면 백성이 윗사람을 친근하게 여기면서 자기 어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다.〔君行仁政 斯民親其上 死其長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183] 이름을 바로잡는 일 : 《논어》 〈자로〉에 나오는 말이다. [주-D184] 이업(李鄴) : 이업은 송 휘종(宋徽宗) 시대에 급사(給事)로서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금나라 사람은 말을 타는 데는 용과 같고 걷는 데는 호랑이와 같으며, 물을 건너는 데는 물개와 같고 성에 올라가는 데는 원숭이와 같다.”고 하며 금의 형세를 장황하고 과장해서 말했다. [주-D185] 봉소(封疏) : 밀봉한 상소문을 말한다. [주-D186] 현도(縣道)를 통해 바쳤는데 : 시골에 있는 신하가 직접 승정원에 소(疏)를 접수시키기 거북할 경우에는 지방의 현이나 도에 소를 접수시켜 대신 올리게 하였다. [주-D187] 서주의 호걸 : 황보규(皇甫規)를 가리킨다. 황보규는 스스로 ‘서주의 호걸’이라 여겼다.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나 세상의 이름난 사람들이 대부분 연루되었으나 자신만 죄에서 면하자 부끄럽게 여겨 자신도 연좌되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주-D188] 홀기(笏記) : 의식의 진행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한다. [주-D189] 고흥유씨종법(高興柳氏宗法) : 《성재집》 권45에 〈고흥유씨종법(高興柳氏宗法)〉이 보인다. [주-D190] 장의(掌議) : 제사 등 예식을 주관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191] 집례(執禮) : 제사 등 예식을 집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홀기(笏記)를 읽는다. [주-D192] 세 선생 : 주희, 송시열, 이항로를 가리킨다. [주-D193] 그 내용 : 《성재집》 권32 〈가하산필〉에 〈갑신중수강규후고동강제자문(甲申重修講規後告同講諸子文)〉에 보인다. [주-D194] 석과불식(碩果不食) : 《주역》 〈산지박괘(山地剝卦)〉 상구(上九)에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섯 개의 효(爻)가 모두 음(陰)인 상태에서 맨 위의 효 하나만 양(陽)인 것을 석과로 비유한 것으로, 하나 남은 양의 기운이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주-D195] 가정정사(柯亭精舍) : 성재는 1882년(51세)에 춘천시 남면 가정리로 이거하여 가정서사(柯亭書社)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주-D196] 학문을 이루는 : 원문은 ‘고업(考業)’이다. 고업(考業)이란 남의 학문과 덕행을 취하여 나의 학문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D197] 열친척락금서지대(悅親戚樂琴書之臺) : 도연명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친척들과의 정겨운 이야기를 즐거워하고, 거문고와 책 즐기면서 시름을 푼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 [주-D198] 풍(風)자와 …… 삼아 : 두 글자를 운으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은 《시경(詩經)》과 관계가 있다. 회풍(檜風) 비풍(匪風)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한 것에 대하여 현인(賢人)이 이를 근심하고 탄식하는 내용이고, 조풍(曹風) 하천(下泉)은 왕실이 무너지자 소국이 고생스럽고 살기 어려워서 주나라의 서울을 생각하는 것인데, 풍천은 이 두 시의 편명을 합한 말이고 모두 나라가 쇠미하거나 망한 것에 대한 슬픈 감회를 말한 시이다. [주-D199] 오언 …… 수 : 《성재집》 권1 〈시(詩)〉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00] 영평(永平) :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과 이동 지역을 말한다. [주-D201] 창옥병(蒼玉屛) : 조선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은거했던 곳으로 경기도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있는 봉우리이다. 이곳에 그의 위패를 모신 옥병서원(玉屛書院)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복구되었다. [주-D202] 박사암(朴思菴) :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명종(明宗) 8년(155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장원급제한 후, 선조(宣祖) 5년(1572)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했는데, 동서(東西) 당쟁이 격심할 무렵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편들다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은거했다. [주-D203] 운(韻)을 …… 지었다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성재 선생은 ‘松筠節操水月精神’ 여덟 글자 가운데 ‘神’ 자를 뽑아 시를 지었다. [주-D204] 연천(漣川)에 …… 지어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05] 돌아오는 …… 지었다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06] 어우공(於于公)의 유허(遺墟) : 유몽인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의 사건에 휘말려 양주(楊州)로 도피하는데, ‘어우공의 유허’란 바로 이 곳을 말한다. [주-D207] 도봉서원(道峰書院) : 1573년(선조6)에 창건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의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함께 사액을 받았으며,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다. 1775년(영조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다시 받았다.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2년에 복원되었다. [주-D208] 우암(尤菴) 선생의 …… 썼다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09] 유향하(柳香下) : 유병철(柳秉喆, 1807~1899)로,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소(季昭), 호는 향하(香下)이다. 나이 팔십에 동몽교관(童蒙敎官)과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주-D210] 유기일(柳基一) : 1845~1904. 자는 성존(聖存), 호는 용계(龍溪)ㆍ용서(龍西)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동지돈녕부사 문녕군(文寧君) 유병철(柳秉喆)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주-D211] 광릉천(光陵川) :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 장현리 인근으로 흐르는 하천 이름이다. [주-D212] 기일 …… 지었는데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13]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14] 홍무 : 명나라 홍무 황제를 가리킨다. [주-D215] 조만간 …… 기록했다 : 《성재집》 권1 〈시〉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16] 편지의 내용 : 《성재집》 권7 〈왕복잡고〉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17] 개물성무(開物成務) : 만물의 도리를 깨달아 그 이치에 따라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易)은 개물성무하고 천하의 일체 도리를 포괄하니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夫易開物成務 冒天下之道 如斯而已者也〕” 하였다. [주-D218] 정(正)과 우(隅) : 정(正)은 동서남북 정방향을 말하고 우(隅)는 동서남북 사이의 네 모서리의 방향을 말한다. 정방향에는 홀수가 놓이고 우방향에는 짝수가 놓인다. [주-D219] 당습(黨習) : 패거리를 짓는 습속을 말한다. [주-D220] 지나간 …… 있다 : 《논어》 〈미자〉에 그 내용이 보인다. [주-D221] 이(理)로써 …… 것이 : 심(心)은 이(理)로 말하는 것이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것이 있는데 단지 이(理)로 말하는 것만이 단안(斷案)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주-D222] 품정(稟定) : 윗사람에게 여쭙고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중암 선생의 결재를 받아 정했다는 뜻이다. [주-D223] 허(虛)와 …… 되었다〔合虛與氣, 有性之名〕 : 《장자전서(張子全書)》 권2 〈태화편(太和篇)〉 제1에 나온다. 《맹자집주(孟子集註)》 〈진심 상(盡心上)〉 1장의 해설에도 이 말이 인용되어 있다. [주-D224] 네 군(郡) : 단양, 청풍, 영춘, 제천을 가리킨다. [주-D225] 이인귀(李寅龜) : 화서(華西) 선생의 문하생이다. [주-D226] 지운상(池運象) : 호는 정재(正齋)이고 생평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성재집(省齋集)》에 〈방지정재장인소제(訪池正齋丈人小題)〉라는 시가 보인다. [주-D227] 신정왕비(神貞王妣) : 1808~1890. 익종의 비(妃)로 헌종(憲宗)의 어머니이고 풍양 조씨(豊壤趙氏)이다. [주-D228] 상하분경도(上下分經圖) : 《성재집》에는 “육십사괘분편서위도(六十四卦分篇序位圖)”라고 하였다. [주-D229] 정괘(正卦) : 《성재집》에는 불역괘(不易卦) 즉 바뀌지 않는 괘라고 말하였다. [주-D230] 반대(反對)인 24괘 : 반대라는 것은 괘의 위치를 상하로 뒤집었을 때 생기는 괘를 말한다. 예를 들어 태괘(泰卦)를 상하로 뒤집으면 비괘(否卦)가 되고, 비괘를 뒤집으면 태괘가 되는 것과 같이, 이 두 괘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 [주-D231] 암서재(巖棲齋) : 《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암서재중수기(巖棲齋重修記)〉에는 “화양동(華陽洞) 수석(水石)의 훌륭한 경치가 호남ㆍ영남 가운데 으뜸인데, 우암 선생이 병오년에 정사(精舍)를 그 시내 남쪽에 지으니, 참으로 세속 밖의 그윽한 지경이다.……금년 봄에 김진옥(金鎭玉)이 화산백(花山伯)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강(黃江) 가로 나를 찾아와서 나로 하여금 암서재(巖棲齋) 세 글자를 쓰게 하여 이를 목판에 새겨서 문 위에 걸고 또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라고 하였다. [주-D232] 72운(韻)의 시 : 《성재집》 제1권 〈화양동. 우암 선생의 운을 받들어 지음〔華陽洞. 敬次尤菴先生韻〕〉을 말한다. [주-D233] 황복(荒服) : 왕기(王畿)에서 멀리 떨어진 2천 리에서 2천 500리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주-D234] 부사(父師)의 팔조(八條)의 가르침 : 부사는 기자(箕子)를 가리키고 팔조의 가르침은 여덟 가지 가르침을 말한다. 기자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정한 법금(法禁)이라고 전하는데, 지금은 살인(殺人), 상해(傷害), 투도(偸盜) 등 세 가지만 전한다. [주-D235] 내복(內服) : 천자 직할의 지역으로서 기복(畿服)과 같다. [주-D236] 칠치(漆齒) : 오랑캐의 풍속으로, 이를 검게 만들고 이마에 무늬를 새기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주-D237] 산동(山東) : 태항산(太行山)의 동쪽으로 하북(河北) 지역을 말한다. [주-D238] 개와 양 : 만주족의 청나라를 낮추어서 말한 것이다. [주-D239] 강신(講信) : 향약(鄕約)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며 약법(約法)이나 계(契)를 맺는 것을 말한다. [주-D240] 품목문자(稟目文字) : 윗사람에게 고하는 글로, 여기서는 심설(心說)과 관련된 질문 항목을 말한다. [주-D241] 물칙(物則) : 사물과 법칙을 말한다. 《시경(詩經)》 〈증민(烝民)〉에 “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내실 적에, 사물과 법칙을 그 속에 깃들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게 되어,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彛 好是懿德〕”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242] 존성(存省) : 존양(存養), 성찰(省察)의 준말로, 본성을 함양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악(善惡)의 기미를 살핀다는 뜻이다. [주-D243] 혼모(昏耗) : 사람이 늙어서 정신이 흐리고 기운이 쇠약한 것을 말한다. [주-D244] 난명(亂命) : 죽음에 임박하여 정신이 어지러울 때의 유언을 말한다. [주-D245] 양례(襄禮) : 고대에 혼례나 상례를 거행할 때 주관자를 도와 의식을 마무리 짓는 것을 말한다. 또 이 일을 책임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D246] 조도(祖道) : 길 떠나는 사람을 위해 길신〔道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또 주연을 마련하여 전별하는 것을 말한다. [주-D247] 수마적(受麻籍) : 문인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리본을 붙이는데, 그 삼베 리본을 받을 사람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장부를 말한다. [주-D248] 운담(雲潭)으로 분곡(奔哭)하러 갔다 : 중암은 신묘년(1891, 고종28) 12월 20일에 영평(永平)의 운담정사(雲潭精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성재는 제천 산중에 있었고 질병이 심하여 걸을 수가 없어 때에 맞게 분곡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9개월이 지난 뒤에 운담으로 분곡하러 간 것이다. [주-D249] 심설에 …… 있고 : 면암(勉菴)은 무자년(1888, 고종25)에 성재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 이항로의 학설에 이론(異論)을 가진 잘못을 논하였다. [주-D250] 김 선생을 …… 하였다 : 《면암선생문집》 제24권 〈중암(重菴) 김공(金公)에게 올리는 제문〉을 말한다. [주-D251] 육선생(六先生) : 미원서원은 1661년(현종2)에 창건되었으며,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김육(金堉), 남언경(南彦經), 이제신(李濟臣), 김창옹(金昌翁)을 배향하였다. [주-D252] 진상(陳相) : 《맹자》 〈등문공 상〉에 보이는 진량(陳良)의 제자인 진상(陳相)을 가리킨다. 진상은 농가(農家)의 학자인 허행(許行)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이전에 배운 학문을 모두 버리고 허행을 따라 배웠다고 한다. [주-D253] 이윤(尼尹) : 이산(尼山)에서 살았던 윤증(尹拯)을 가리킨다. [주-D254] 흑수(黑水) : 여강(驪江)을 바꾸어 일컫는 말로서, 전하여 여강 가에 살았던 윤휴를 가리킨다. [주-D255] 제판(題判) : 백성이 올린 소장(訴狀)에 대해 관청이 쓰는 판결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취향이 다른 문하가 내리는 판결을 가리킨다. [주-D256] 육위(六偉) :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의 여섯 방향으로 들보를 들기 때문에 육위(六偉)라고 말한다. 또 들보를 여러 사람들이 ‘어영차’ 하고 힘을 모아 들 때 나는 의성어로서, ‘아랑위(兒郞偉)’라는 말도 있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하영휘 박해당 노재준 권민균 (공역) | 2015 자료제목 번역문 원문 교감표점 이미지 확대축소 [이동 완료시 자료내용이 출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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