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보다 의롭다(창37::26-30).
마 13장에서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하신다. 즉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뜻이고, 이런 비유는 예수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구약도 역시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라는 단어는 ‘옆에 놓는다’는 두 단어의 합성어인데 그 뜻은 ‘속담, 비교, 수수께끼.’라는 뜻이다. 비유를 수수께끼의 의미로 생각해 보자. 전에 이런 수수께끼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수수께끼로 괴롭혔는데, 태어나서는 네 발로, 자라서는 두 발로, 늙어서는 세 발로 가는 동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답은 사람이다. 이렇듯 수수께끼란 문장을 문장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을 통해 답을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비유로 되었다는 것은 사건을, 말씀을 단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말씀을 통해 답을 얻도록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주에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그런데 그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창37장은 요셉의 이야기로서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리는 장면이이다. 그렇다면 38장은 당연히 애굽에서의 요셉의 이야기로 진행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갑자기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인 유다와 그의 자부인 유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9장에서 다시 요셉의 이야기로 전개한다. 왜 성경은 이런 구조로 기록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성경에서 야곱의 장자는 육신적으로는 유다이지만 영적으로는 요셉이라고 한다. 따라서 요셉의 행적은 하나님의 맏아들, 장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요셉과 형제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행7:9절에 의하면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심으로 애굽으로 팔렸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마27:18절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넘겨 준 것을 알았다. 그렇다. 요셉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 즉 형제들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고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형제들의 시기심에 고난을 당한 요셉은 후에 총리에 올라 형제들을 기근에서 살린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고난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명의 양식으로 살리고 계신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요셉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점에서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는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분리해 보라는 뜻이 아니라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통해 미리 요셉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즉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와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가 같다는 뜻이다. 그럼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알아보자.
38:1절을 보자. 유다는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 형제에게로 이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세속적인 길로 내딛는 인간의 발걸음을 묘사한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는다. 이것은 그의 선조들의 신앙과 다르다. 아브라함은, 이삭은 모두 동족을 취해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유다는 선조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고 있다. 그 때 두 아들은 그들의 악함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셋째도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여 다말에게 주지 않는다.
성경에는 한 남자가 그의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18:16, 20-21). 그러나 율법의 예외로 형제가 아들이 없어 죽었을 경우 시형제 결혼법을 말씀하고 있다(신25:5-10). 그러나 유다는 다말을 통해 대를 이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말을 친정으로 내어 좇는다. 그는 유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이다.
후에 불륜으로 고발되어 유다에게 끌려온다. 그 때 그는 의롭다고 한다. 26절 왜 그런가? 다말은 가나안 사람이지만 야곱의 집안에 시집갔으므로 야곱 집안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야곱 집안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가문의 임을 알고 되고, 유다는 장자로서 언약의 대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들이 악함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고 형사취사법에 의해 막내인 셀라를 통해 대를 이어야 하지만 유다는 막내가 장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를 잇게 하지 않는다. 유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은 없고 오직 자신의 욕망과 사고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여인 다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여 가장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자리로 내려간다. 그것은 창녀(여사제)로 변장하는 것이다. 즉 당시 사람들은 추수가 끝날 즈음 축제를 벌였다. 우상을 섬기며 복을 비는 것인데, 그 때 남자들은 여사제와 행음을 했던 것이다. 다말은 그 사실을 알고 변장하여 유다의 앞길을 막아서고 그와 관계를 맺는다(신25장의 형사취사법에 의하면 유다가 다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므로 율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는 유다가 여사제와 관계를 맺음으로 부정한 자손의 탄생을 막으려는 생각인 동시에 언약의 후손을 이르려는 헌신이었다! 그러므로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다말이 의롭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베레스와 세라가 탄생하고 베레스의 후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다. 즉 언약의 후손이 태어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탄생, 창조,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구원에 감격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요셉의 형제와 유다와 같은 우리들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받고 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자신을 낮고 천한, 고통스런 자리로 내려가는 헌신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런 글을 읽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을 보고 싶다면, 그분의 사랑을 공짜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가지 마라. 영혼의 고뇌 속에서 죄의 추악함을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로 가라. 그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나 영원하심 성자가 자기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