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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대로 430년이라는 긴 노예 생활을 끝내고 해방되었습니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자유를 위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막다른 홍해 바다 앞이었습니다. 그들의 좌우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산맥으로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앞에는 깊고 푸른 바다가 놓여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마음이 바뀐 바로가 그들을 잡겠다며 맹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몇 세기만에 주어진 자유를 미처 누리지도 못한 채 졸지에 막다른 골목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디로도 갈 수 없었습니다. 질겁했습니다.
숨이 멎을 정도로 크게 놀랐습니다. 두려움 속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를 향해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느냐? 우리가 이럴 줄 알고 이집트에서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더냐?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편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출14:11-12)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불신과 원망이 섞인 불평을 서슴없이 내뱉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습관처럼 튀어나오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뿌리 없는 것인지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자유를 위한 역경보다는, 안일을 위한 굴종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약속과 은혜를 잊었습니다. 일시적인 편리와 안락을 위해서 노예근성에 젖은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나의 영광을 보고도 내가 이집트와 광야에서 보여 준 이적을 보고도 열 번이나 거듭 나를 시험하고 내 말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민14:22)라는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광야를 행진하는 동안 무려 열 번씩이나 자신들을 구속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긍휼과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지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출14:2-4)라는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을 절체절명의 위기 속으로 집어넣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아득하게” 보이게 하셨습니다. 이는 “당황하여, 혼돈하여” 등의 뜻입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목적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바로가 자신의 주관적으로 판단한 이스라엘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실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 속에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또 이스라엘이 광야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노예민족으로서 오합지졸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잃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은 바다요, 양 옆은 산이며, 뒤는 사막인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려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정예 부대를 이끌고 쫓아가면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오판하여 움직이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③ 또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습니다. 이는 바로가 원래는 선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고의로 악하게 만드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원래부터 악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그를 방임하셨음을, 일부러 막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④ 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여셨습니다. 마른 길을 내셨습니다. 비록 불순종과 원망과 불평으로 찌들어 있지만,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셔야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길을 보셨습니다.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잡다한 우상들과는 다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시는 참된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당신이 받으실 영광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때를 회상한 시인은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양 떼처럼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습니다.”(시77:19-20)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길을 보십니다. 길을 만드십니다. 방법을 아십니다. 방법을 만드십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 방법으로 이끄십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이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물론,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길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제시해 주신 방법으로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힘겨운 고난처럼 느낄 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이들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제시해 주신 길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하나님도 언제나 함께 동행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지혜자는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잠3:5-6)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심지어 한 목회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해하기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 가운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고 계시는 일들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아십니다. 우리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최종 결과까지도 아십니다. 당신이 친히 그 결과를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문제들, 골칫거리들, 어려움들. 지체하신 일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왜, 무엇 때문에”라고 물었던 질문들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당신의 때가 이르렀을 때, 우리로 하여금 정확하게 알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막다른 순간과 상황과 조건 속에 버려졌을 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힘겨운 인간관계 속에 던져졌을 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십니까? 신뢰하십니까? 참고 견디십니까?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나사렛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세 번째 전도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성경 해석을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바른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각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던 각종 질병과 연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평행본문인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마9:36)라는 말씀에 따르면, 이때 주님은 목자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은 거짓 목자들로 인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지도자인 헤롯은 전통적으로 왕족인 유다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사악했습니다. 늘 불안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로마 황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친 로마 정책을 폈습니다. 권력을 지키기에 바빴습니다.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타락한 종교 권력 역시 헤롯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 직분을 샀습니다. 지불한 만큼 챙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제수 용품 판매와 환전을 독점했습니다.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거기다 율법 교사인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쳤습니다. 율법과 전혀 상관없는 수없이 많은 조례와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살찌고 기름진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양털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습니다.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습니다. 병든 양을 고쳐 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리가 부러지고 상해도 싸매 주지 않았습니다. 양들이 흩어져도 모으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약한 양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습니다. 목자가 없어 흩어진 양떼들은 모든 산과 높은 언덕에서 헤맸습니다. 세계 각처로까지 흩어졌습니다. 온갖 들짐승의 먹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양떼를 찾으려는 목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로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7b-38)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모든 귀신들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부어주셨습니다. 각종 병들을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합법적인 권위와 권리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미 임해 있었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평행본문은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9:35)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께서 행하셨던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진정한 사도로 서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파하고, 고치는” 일은 언제나 병행되어야 합니다. 전파만 해서도 안 되고, 고치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고치고 치료하는 역사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또 이 일은 결코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해서는 최소한 지팡이와 배낭과 양식과 돈과 두벌 옷 정도는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까지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철저히 하나님 한 분만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그들로 하여금 일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동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팡이와 가방과 양식과 돈과 두벌 옷 등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일군들이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세상의 가치와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아예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명하고 합리화하면서까지 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까지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전도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것도 가지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당신과 같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집을 나서던 그는 사모가 못 보던 치마를 입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여보, 치마가 예쁘네!”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사모는 당황했습니다. “아, 예...”라며 얼버무렸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그를 초조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맞았습니다. 용서를 구할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허락 없이 치마를 샀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냐고 묻자 삼천 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인 그는 늘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가 삼천 원짜리 치마를 샀다고 용서를 구할 정도로 돈에 민감했습니다. 돈에 대해 결코 낙관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써야 더 많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썼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면 여지없이 스스로를 정죄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재정이 마르면 즉각 뒤돌아보았습니다. 혹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은 지출은 없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출을 자기 마음대로 제한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더욱 예민해졌습니다. 우울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후원 계좌를 관리하고 있던 사모에게 잔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습니다. 사모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그는 그런 사모에게 조용히 “왜? 재정에 대해서 잘못 말하면 하나님께서 돈을 주시지 않을까봐 그래요?”라고 물었습니다. 사모는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놀란 듯 했습니다.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재정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시간이 있었잖아요. 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고 생각해요. 설사 우리가 돈을 잘못 관리하고 돈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가졌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을 봐주실 것 같아요. 우리가 이제까지 당신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실 테니까요.”라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사모는 그의 변화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연신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는 그런 사모를 위로하며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셔...”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새”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새들은 어떤 형편과 상황과 조건에 놓일지라도 미래의 생존을 위해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거두지도 않습니다.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새들도 하나님께서 먹이를 눈앞에 떨어뜨려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염려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근심에 빠져 힘들어 하지도 않습니다. 내일을 위해 쌓아두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허락하신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창조 세계를 질서 있게 경영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간섭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기르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한낱 미물임에도 불구하고 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피조물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피조물들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버지이십니다. 특히 “보다”(μᾱλλον)는 “더욱, 매우, 몹시, 훨씬 더 자신해서, 더욱 즉시, 더 곧” 등의 뜻을 가진 비교급 부사입니다. 또 “귀하다”(διαφέρετε)는 “항상 따로 놓다, 능가하다, 보다 낫다, 더욱 뛰어나다” 등의 뜻으로,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새와 들풀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우리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염려합니다. 걱정합니다. 근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마6:30)라고 꾸짖듯 책망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모든 종류의 염려는 단호하게 버리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홀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것 같은 현실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마6:31-32)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여기서 “하지 말라”(μὴ)는 “하나님께서 금하다, 결핍하다, ....도 아니다, 하지 않도록” 등의 뜻을 가진 불변사입니다. 부정 과거 시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하나까지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염려하거나 걱정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곧 혹 굶게 되지는 않을까 헐벗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염려를 온전히 떨쳐버려야 합니다.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새와 들풀까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필요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인 염려는 우리의 필요를 미리 다 아시고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물질만 추구하는 삶은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3)라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해놓고 추구하는 세속적인 욕망과 세상적인 노력은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먼저 해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크고 원대한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비전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에게 영혼의 참된 만족과 평안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류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리겐(Origen)은 본 절을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라고 해석했습니다. 사실 모든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돈을 채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일한 만큼 버는 것 같아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돈을 주시는 원칙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도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아십니다. 우리의 능력과 수고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주십니다. 언제나 조금 더 넉넉하고 풍성하게 챙겨주십니다. 그런 하나님과는 돈을 매개로 관계를 맺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친밀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앙입니다.
배은망덕한 불효입니다. 한편, 염려해서 삶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염려해도 됩니다. 그러나 염려로는 절대로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먹고 입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입니다. 오직 믿음을 빼앗아갈 뿐입니다. 물론 염려를 없앤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조건 없이 맺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모든 경우와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흔들리지 않는 깊은 신뢰 관계를 구축해야합니다. 이 신뢰 관계를 통해 조금만 더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의 뜻 없이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밑이 빠져버린 독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밑이 없도록 만들어진 독입니다. 이 독은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십시일반 하는 마음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지만 짧게는 1년, 길어야 2년 정도 지나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거의 다 떨어져 나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이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선교 예산을 줄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서는 결코 외롭고 고독하고 힘겨운 순간들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견뎌낼 수 없습니다.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 번째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마음에 품고 출발하는 제자들에게, 인간적인 그 어떤 조건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순간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던 주님의 정신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나 신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라고 물으셨다. 사도들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눅22:35-36)라는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며 전도 여행을 떠난 제자들은 부족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환영했음을 의미합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당신 한 분만을 의지하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필요를 채워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역시 제자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많은 짐을 실은 경비행기 세스나(Cessna) 206기가, 막 비로 젖은 정글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조종사는 조종간을 방화벽이 있는 곳까지 쭉 밀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그렇게 했습니다. 커다란 나무들과의 충돌을 피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순간, 조종사 바로 옆 좌석에 앉아있던 승객은 빠르게 달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비행기와 충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떻게든 조종사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종사가 정신이 나갔지. 왜 조종간을 잡아당기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밀어두었던 조종간을 빼앗듯 잡고 앞으로 힘껏 당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조작이었습니다. 비행기는 일정한 속도를 얻은 후에야 상승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조종간을 잡아당기면 속도가 줄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행기는 갑자기 속도가 줄었습니다. 뒤뚱거렸습니다. 정글 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습니다. 조종간을 다시 낚아챈 조종사가 수평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습니다. 비행기는 양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땅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처참하게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승객 전부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조종사는 심한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 승객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여행을 할 때 너무 자주 그와 똑같은 짓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조종간을 낚아채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절대 영적인 비행기를 띄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처참하게 땅에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물론 많은 애매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비행기를 띄울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한한 달인이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영적인 조종 장치를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중학생 때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이후 각종 교회 모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다 고2가 되었을 때, 대학진학과 봉사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특히 열심이던 선배들이 고3이 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사건은 그를 더욱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그에게 배신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은 그들처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에 전념해야 된다는 생각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계속 교회에 남아 있더라도 성적이 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떠나갔던 선배들에게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외면하셨습니다. 적어도 그에게 만큼은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정에서는 계속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풍랑 속에 던져진 요나 같았습니다.
그 사이 교회를 외면했던 선배들은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교회에서 밤을 새워가며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동기들은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재수생이 되었습니다. 지방대의 설움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너무 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면, 하나님은 고리 대금 업자처럼 돈을 빌려 줄 때와 받아 갈 때의 얼굴이 다른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절망과 회의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들에 대하여 주먹을 움켜쥐고 항의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느덧 중년이 된 그에게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던 선배들의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들이 결국 불행해져서 자신의 선택이 훨씬 좋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유치한 생각도 없었습니다. 다만 몇몇 동기들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들려왔습니다. 한 자매는 젊은 날의 기도를 밑천 삼아, 특수교육을 전공했습니다. 장애우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람 없는 일을 보람 있게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는 복지 센터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며 나름 의미 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며 믿음을 잘 지키고 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함께 생활했던 시절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목사가 되어 소외되고 상처 받은 영혼들을 섬기고 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젊은 날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을 이루어주셔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답을 하나님만 모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왜 대학과 직장과 돈과 명예라는 행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고함을 치고 고집을 부려도 잠잠 하십니다. 우리의 주장과 외침과 푸념과 상관없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부어주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 현장에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영혼을 구원해 주시는 것은 물론 각종 질병까지 치료해 주십니다. 묵묵히 우리를 향한 당신의 비전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평안과 함께 안식과 쉼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십니다. 놀라우십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거절되는 것처럼 보이고, 의도한 진로가 열리지 않고, 도무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끄실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가장 선하고 옳고 풍성함을 믿으십시오. 끝까지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당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까지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