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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1장 14절, 빌립보서 2장 6-7절
① 말씀이 육신이 되어 (Sarx)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Skenoo)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요 1:14)
여기서 '육신'은 헬라어로 **'사르크스(Sarx)'**입니다. 이는 고상한 영적 몸이 아니라, 피와 살과 뼈가 있는, 베이면 피가 나고 걸으면 피곤한 **'연약한 육체'**를 뜻합니다.
3강에서 배웠던 '거하시매(스케노오)'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텐트(성막)에 계셨던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사람의 몸'이라는 텐트를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② 자기를 비워 (Kenosis)
바울은 이를 **'자기 비움(Kenosis)'**이라고 표현합니다(빌 2:7). 온 우주를 밟고 계신 거대한 발이, 유대 베들레헴의 작은 구유에 담길 만큼 작아지신 겸손. 성육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보폭을 갓난아기의 보폭으로 줄이신 **'위대한 축소'**입니다.
2. 구속사적 발자취: "먼지 묻은 발 (The Dusty Feet)"
본문: 요한복음 4장 6절, 마가복음 6장 48절
①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으시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요 4:6)
이 장면은 전율 그 자체입니다. 시편 121편에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니 **'피곤'**을 느끼십니다.
예수님의 발은 항상 먼지투성이였고 부르텄습니다. 그분은 구름 타고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먼 거리를 뚜벅뚜벅 걸으셨습니다. 왜요? 우리가 겪는 인생의 고단함을 '몸소 체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② 보이지 않던 발자취가 보이다
"바다 위로 걸어 제자들에게 오사..." (막 6:48)
5강에서 우리는 "주의 길이 바다에 있으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구약의 보이지 않던 섭리의 발자취가, 이제는 제자들의 눈앞에 실체가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발자취'**이십니다.
3. 하나님의 섭리와 메시지: "체휼하시는 대제사장"
본문: 히브리서 4장 15절
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sympathize)..." (히 4:15)
여기서 '동정하다(체휼하다)'는 것은 단순히 "불쌍하네"라고 느끼는 감정이 아닙니다. **'함께(Sym) 고통을 겪다(Pathos)'**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자격은, 그분이 전능자여서가 아니라, 그분이 배고파 보셨고, 울어 보셨고, 발이 아파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발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우리를 위로하는 자격증입니다.
② 땅의 흙을 거룩하게 하시다
죄로 인해 저주받았던 땅(창 3:17)을 창조주가 직접 밟으심으로, 이 땅은 다시 회복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가 닿은 곳마다 땅의 저주가 풀리고 생명이 돋아났습니다.
✝️ [성도를 위한 묵상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꼭대기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피곤함을 주님이 아십니다.
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갈 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도 그 피곤함을 아십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아플 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도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지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아픔을 '글'로 배우신 분이 아니라 '몸'으로 아시는 분입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십시오.
하나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의 마구간으로 내려오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자존심을 세우며 높은 곳만 찾겠습니까? 성육신의 영성은 **'내려감의 영성'**입니다. 오늘 내가 낮아져서 섬겨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삶의 현장을 귀히 여기십시오.
예수님은 수도원에 숨어 계시지 않고 시장통, 우물가, 장례식장을 걸어 다니셨습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 그 치열한 삶의 터전이 바로 예수님이 걷고 싶어 하시는 거룩한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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