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계절 변화에 더 애민해지고, 달력 하나 넘어가는 데도 한 숨이 먼저 나온다. 세월에 대한 애착이 더해지는 게다. 세월 보내는 것에도 이력이 났을만 하건만, 저물어가는 인생에게는 떳다 지는 햇살만 봐도 섬짓해진다. 해가 다 넘어가기도 전 풀잎에는 이슬이 맺혀 촉촉하다.
아침에 거실 바닥으로 깔리는 햇살의 태클도 점점 깊어진다. 그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쑤욱 들어오면 겨울이 되는 게고, 한 해는 그렇게 훌쩍 지나쳐 갈 게다. 가을이면 지레 앞질러 간다. 9시 뉴스에는 신종 인플루엔자로 오늘 또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삶에 애착이 많은 사람에겐 낯모를 사람의 낯선 죽음도 공포다.
시간이 느리게 가기론 국방부 시계만한 것이 없고, 빨리 가기론 모텔 시계만한 것이 없지만, 12 눈금 대신 아침, 점심, 저녁, 밤의 4 눈금 밖에 없는 시골 시계는 시간이 계절 단위로 지난다. 그래서 가을 농촌의 밭에서 느끼는 1년은 더욱 덧없다.
땅을 갈고 씨 뿌리고 밭 매던 계절엔 온 몸이 땀과 피곤으로 범벅이 돼 하루가 수고로이 길게 지나갔지만, 그에 비해 수확하는 시간은 어찌나 짧은지 들녁의 가을이 마냥 풍족한 기분에 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먹는 양념용이나 할까 하고 익은 고추를 짬짬이 따 말린다. 나름 무농약 유기농 천연 태양초. ^&^ 올해는 잊고 비 맞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가을이면 욕심을 덜어낸 만큼 한가해진다. 인생을 일하는 데만 쏟아붓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되돌아 보며 음미하는 시간도 인생이라는 생각이 울컥 든다. <가을 햇살을 즐기는 다육식물들........>
올해로 시골 생활 4년째. 이젠 질리지 않느냐, 그래도 농촌이 좋으냐고 묻는 사람이 아직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햇살이 직접 내 피부에 닿는 농촌이 좋다. 이리 저리 머리 쓰며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농촌이 좋다. 보는 각도를 달리 할 필요도 없이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인 농촌이 좋다. 어쩌면 이것 저것 내가 가꾸고 싶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선택해 가꿀 수 있어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가지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츄어다. 내게 어떤 식물이 있고, 그 식물이 얼마만큼 귀하냐, 가치있는 것이냐를 따지는 것도 아마츄어들이 하는 짓이다. 오로지 기르는 재미다. 내가 살아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내가 주관했던 것이 얼마나 됐던가. 그래서 어쩌다 특별히 가꾸지 않았어도 제 스스로 피는 꽃들을 보면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흐뭇해지기도 한다.
<붉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후 잎이 나는, 그래서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날 수 없어 그립기만 하다는 상사화. 사람들이 그리 의미를 부여해서인지, 다들 피고 진 후 가을에 멋적게 홀로 피는 꽃이라 그런지, 붉은 빛이 슬퍼 보인다>
농촌에서의 노동은 사실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하는 육체 노동에 비하면 노동이라 할 것도 아니다. 소음에 시달리지도 않고, 공기에 맞춰 꼭 마쳐야 하는 압박도 없고, 한가지 일만 반복하는 지겨움도 없고, 무엇보다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위험하지도 않다.
오히려 내게 가능한 한 가장 맑은 공기와 깨끝한 햇살 아래서 요술로도 흉내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을 직접 만지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으니 그만큼 행복한 게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정 큰 돈이 필요하게 되면 로또 한 장 사면 될 게 아닌가. 소재지까지 나가는 게 번거로우면 다음에 나갈 때까지 참으면 되고.ㅋㅋ <에키네시아>
나는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한가지 일을 하면 다른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는데 풀 뽑을 때는 비록 힘들긴 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해 볼 여유가 있어 좋다. 내가 살아온 일이며, 내 가족, 친지들과의 일들이며, 어제 본 9시 뉴스에 대한 생각 소회며, 내게 있었으면 좋은 것들 같은 것을 이리저리 짜맞춰 가며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게 생각에 그칠 뿐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생각하는 동안 행복해진다. 삶이란 이런 자잘한 것들도 채워지는 것이고, 인생도 이렇게 그렇게 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다.
<밭에서 일하다 고개를 들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갑자기 나타난 이 동물은 뭐지? 어디서 본 녀석 같은데...... 오호라. 이놈들이... 집단 탈출해 나왔다. 내 몸 씻기도 힘든데 4마리를 씻어 줄 일이 심난하다> <올 여름에 3번째로 갈아 끼운 방충망. 이런 걸 개구멍이라 한다. 자주 해 보니 이젠 지들이 문을 밀고 나온다>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 품종은 모른다. 걍~ 국화>
계절을 알기론 식물이 더 빨리 안다. 식물은 햇살의 흐름으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고,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해지면 예외없이 열매나 종자를 만든다. 때를 놓치고 장마철에 뒤늦게 싹을 낸 풀들도 제 키가 다 자라기도 전 운명의 계절이 닥치면 서둘러 종자를 맺는다. 알고 보면 이 기특한 것들은 꽃을 피울 때부터 종자를 품에 안고 있었던 게다.
<늦게 심어 이제야 핀 리시안서스> 오늘 풀을 뽑다 문득 그런 생각들로 부끄러웠다.
정작 내가 거두는 것은 무엇일까? 마땅한 답이 아직까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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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구라도 한 번 쯤 그려 보는 전원 생활
그리 살고 싶다 하면서도 품은 꿈만 생각 속에 맴돌고 선뜻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데......
한낭님 멋지십니다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