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두개인들의 공격적인 질문(27-33)
‘무지(無智)’는 교만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무지하게 되면, 자기 속사람을 감추고, 조금 아는 것을 모든 진리를 아는 것처럼 오만하고 조금 밖에 모르는 진리에 만족하고 태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죄악으로 달려가기 쉽니다. 항상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27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27-33)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납세 논쟁으로 공격을 이후에 멈추지 않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또 다른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 논쟁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1) 사두개인들의 존재(27)
당시 사두개파는 유대교에 바리새파, 에센에파와 더불어 세 종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색체가 강하지만, 사두개인들은 정치적인 색체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의 구성원은 대부분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적인 인기는 없었지만, 정치적 종교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제의(祭儀)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율법의 권위를 최우선적으로 받들었습니다.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던 그들은 오경에 부활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내세’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관 또한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나 영(靈)을 믿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사고에 입각해서 ‘부활’에 대해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 ‘부활’은 유대분파들 사이에서 치열한 신학적인 논쟁하던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해 인정하는 편이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진리를 주장하는 그들의 삶은 치열한 논쟁 만큼에 비례해서 고상하고 신실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그릇된 믿음은 그릇된 해석을 낳습니다. 세속적인 탐욕 때문에 진리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언약과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 사두개인들의 공격(28-33)
예수님께서 그 동안 여러 번 스스로 자신은 죽고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공격할 기회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공격은 예수님께 부활에 대한 비합리성을 인정하도록 하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오류를 발견하도록 억지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름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주 얄팍한 성경 상식을 기초로 억지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능력은 성전 중심과 제의(祭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갈릴리 시골 출신 예수보다는 자신들의 성경 지식이 한수 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형사취수제’를 근거로 부활에 대한 비합리성을 공격합니다. 이 제도는 형이 아들 없이 죽었으면 형을 대신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후손을 이어 상속자를 세우는 제도였습니다(신 25:5-10).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존경스럽게 부른듯하지만, 방심하도록 한 후에 허점을 공격하기 위한 호칭이었습니다. 이 ‘형사취수제’를 통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부활에 대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을 제기합니다. 그 가상적인 내용을 설정합니다. 그들은 ‘첫째 형이 결혼한 자녀가 없이 죽고, 일곱 형제들도 모두 아내로 취했지만 아들이 없이 죽은 경우에, 부활의 날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날에, 이 여인은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도 상반(相反)되는 다부일처(多夫一妻)의 상황이 발생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원하신 뜻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활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속으로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겉으로 진지해 보이는 질문 속에 종교와 신앙의 탈을 쓴 탐욕과 성공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부활의 허점을 지혜롭게 공격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의 글을 인용하여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십니다.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은 성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만 해석해야 하고, 성경 전체의 조명으로 살피며 해석해야 합니다.
이처럼 때로는 사람들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논리력으로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과 논리가 아니라 겸손과 열린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삶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명백한 진리를 눈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34-38)
땅의 지혜로 하늘의 일을 모두 이해할 순 없습니다. 특히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두 다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다시 살아날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이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34-38)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자신을 책잡기 위해 던진 논쟁을 적극적으로 하늘의 교훈을 가르쳐 주신 기회로 삼으십니다. 이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오해를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추론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서 논박하는 대신, 그들의 전재를 반박하시면서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부활 이후 인간 존재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수는 땅의 지혜와 경험으로 하늘의 일을 이해하려다 보니 이런 오해를 하게 된 것이라 지적하십니다.
(1) 부활 후 생활(34)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 대한 첫 번째 지적은 그들의 모세오경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독선적인 해석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형사취수제’를 근거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제도는 특정한 지역과 상황에 적용되는 되는 것이지 천국에서까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관점으로 이 제도를 논박하신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라고 이 땅에서의 율법이나 관습은 영원히 유효한 것이 아니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2) 부활 후 존재(35-36)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이후 인간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부활 이후에는 현 세상의 생활처럼 지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한 인간은 불멸의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부활 이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 자녀와는 다르게 존재합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한 하나님의 자녀는 결혼할 필요도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으며, 천사와 동등한 영적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활하지만 부활 후 상태가 똑같지 않습니다(다니엘 12:2).
(3) 부활에 대한 증거(37-38)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모세오경을 통해 증거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건을 통해 부활의 증거를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모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6)라고 모세오경에 소개했습니다. 구약의 족장들이 이 땅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 조상들이 죽은 상태라면, 이것은 의미 없는 호칭일 뿐이며,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이 효력이 상실했을 것입니다. 그 조상들과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명령하실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은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회중을 향하여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고 강력하게 선포하십니다. 모세의 오경을 통해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부활에 대한 확증하는 말씀을 제시하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탐욕스런 사두개인처럼 결코 이 땅이 전부인 듯 재물을 쌓고 호사를 누리는 데만 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안에서 살아날 것이고 예수님이 그 첫 열매가 되실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내일도 반드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줄 믿으면서 천성을 향한 믿음의 순례를 중단 없이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말문이 막힌 사람들(39-40)
하나님의 말씀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발견하고 찌르고, 아름다운 말과 멋진 논리에 가려진 허위의식을 폭로합니다. 기독교는 거창하고 화려한 허례허식의 종교가 아니라 단순한 생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39-40)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논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동의와 지지를 표합니다. 그 서기관이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동조(同調)한 것뿐이지, 그 사실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다투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행 23:6-10).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활에 대해 가르침을 베푸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이든지 사두개인이든지 예수님의 해박(該博)하고 권위 있는 성경 해석을 듣고 감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이든지 생명의 부활이든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사두개인처럼 얄팍한 지식이나 선입관으로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서 부활 신앙을 놓쳐서는 큰일 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의 날에 부활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놓치지 않길 원합니다. 그때까지 믿음을 지키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