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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있습니다/갈 2:20
성경본문: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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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종철목사(빛과생명의 교회)
예수를 믿는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다, 곧 나는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내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것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또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그것을 세례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기독교에 가입하는 의식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세례, 정확히는 침례가 맞은데 세례 받을 때 우리는 완전히 우리 몸을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다시 일으킴을 받습니다. 물에 잠기는 순간은 마치 우리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삽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분이 있었는데 바로 김익두 목사님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일제시대 대표적인 부흥사로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이분을 통해 주기철 목사, 김재준 목사, 이성봉 목사가 회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깡패였습니다. 안악골 호랑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사람들이 김익두만 보면 슬슬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한 후 지난날의 삶이 부끄러워 자기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공적으로 알리기 위해 부고장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김익두는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가 죽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김익두가 까만 성경책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정말 김익두가 죽었는지 시험하기 위해 사람들이 실수한 척하며 구정물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구정물 세례를 받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툴툴 털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만일 그가 살았다면 당신은 성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과는 다른 새로 태어난 사람이라오.”
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는 죽었다고 하는 말씀할 때 그 의미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2장 19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서 항상 이것이 문제가 되었고 율법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율법 중 정결례법 때문에 유대인들은 부정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합니다. 바로 앞에는 안디옥 사건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 크리스천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아마 성만찬 식사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보더니 그들의 눈을 피해서 그 자리를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방 크리스천들은 부끄러워졌고, 복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도 지켜야 되는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던 것이 안디옥 사건의 전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율법에 매여 살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더라도 그 사람이 죽으면 기소중지가 됩니다. 그것처럼 죽은 사람은 율법의 유무죄를 다툴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처럼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고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율법의 저주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얽매던 모든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죄나 사망이나 양심이나 운명에 매여 살던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오늘 말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정과 욕심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감정과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도 십자가에 목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정과 욕심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예수 믿고 우리는 얼마나 변했습니까? 가끔 드는 회의인데 우리는 수많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 말씀을 읽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변화되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은 오래하고 나이는 먹었는데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 조금만 내 감정을 건드려도 우리는 참지 못하고 분노합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거나 대접해주지 않아도 곧 섭섭해 합니다. 여전히 인색하고 자기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어떤 사람이 수술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마취제를 놓고는 좀 있다가 무언가로 꾹 찌르더랍니다. 마취가 완전히 되지 않았던지 ‘아야!’ 하고 소리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하는 말이 ‘아직 안 죽었네’ 하더랍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내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내 욕심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우리는 여전히 죽지 않은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양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그의 감정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에는 사람을 죽이던 증오와 폭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며 멀리는 다메섹까지 가서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폭력적이고 매우 교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자 증오는 이제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해함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로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은 과거의 옛사람은 죽고 새로 거듭난 사람임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서도 여전히 죽지 못합니다. 여전히 세상의 권력과 물질과 쾌락과 명예를 좇아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들보다 목회자들의 욕심이 더한 것 같습니다. 큰 교회를 이루어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이 강합니다. 교회가 어찌되건, 교회가 분열이 되어 망신창이가 되어도 상관없이 자기 권력을 놓지 않고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죽이고 자기는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빌3:7-9)고 하였는데 우리는 사도 바울이 배설물, 곧 똥처럼 여기던 것들을 마치 신주단지 끌어안듯이 안고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우루과이 한 성당 벽에 적혀 있다는 ‘반성하는 주기도문’은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과 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하지 마라. 너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마라. 온 천지가 네 뜻대로 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두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원한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지 마라. 호시탐탐(虎視眈眈)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지 마라. 그 모든 것들이 온통 네 것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의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맨발의 성자 이현필
이번에 저는 남원에 있는 동광원 수련회에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프로그램들 중에 십자가의 길 묵상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올라가며 팔복과 십자가의 말씀들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 해당하는 정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압축한 말씀이요, 신앙인의 삶을 요약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이 동광원을 창시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현필 선생입니다. 맨발의 성자라 불렸던 이현필 선생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만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일대기는 엄두섭 목사님이 쓴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라는 책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그분의 생애를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1940,50년대에 주로 활동을 하셨는데 이분은 자기를 죽이는 금욕적인 생활로 유명합니다. 결혼을 하였지만 예수님을 믿고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을 육체적으로 금욕하는 순결의 삶을 살았습니다. 도시의 쾌락이나 문명을 벗어나 주로 산속에서 기도하며 수도하였습니다. 맨발의 성자라 불리듯이 추운 겨울에도 산속을 맨발로 다니며 고행을 하였습니다. 수사복 없이 단 벌의 무명옷과 겨울에도 불을 떼지 않고 거적데기 같은 이불만 덮고 잤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생식하며 살았으며 죄인이라 하여 밥도 상 위에서 먹지 않고 땅바닥 에서 먹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을 흠모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 여자들은 평생을 처녀로 지내며 순결을 지켰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오늘날 동광원이라는 곳에서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결혼했던 사람들은 가정을 포기하고 순결의 삶을 살았기에 한 때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중세의 성 프란체스코와 그 수도회를 보는 듯 했습니다. 엄두섭 선생의 책에서는 이현필 선생을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탁발하며 정말 거지 같이 살았는데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이 선생의 정신은 ‘예수 잘 믿으려면 거지의 오장치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던 만큼 이들을 훈련시킬 때도 고운 옷을 못 입게 하고 굵은 무명에 검은색 물을 들여 치마저고리를 해서 입게 하고 맨발 벗고 다니게 하고 쓰레기통을 줍게 했다. 거지 훈련을 시킨 셈이다. ... 동광원 수녀들을 연상할 때 담으로 둘린 수녀원 안에 고요한 수실에서 깨끗한 너울을 쓰고 제대 앞에 촛불을 켜놓고 꿇어 앉아 로자리오를 굴리며 경을 읽는 맑은 얼굴을 한 그런 수녀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동광원의 수녀들은 쓰레기 뒤지는 거지훈련을 해야 했다. 오물 리어카를 밀고 다니는 똥통 인부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남자들보다 더 중노동을 하는 농부들이다.
그 수녀들은 방구석에 앉아 똥오줌을 싸며 헛소리치는 백 명 가까운 정신병 환자를 종일 시중하기에 지친 보모들이다.” 지금도 동광원에는 이렇게 오랜 세월 주님의 길을 따르다 8,90세에 이른 할머니 수녀님들이 30여 명 살고 있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기에 이분들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깨끗함을 느낄 수 있고, “밥 먹었어요” 하는 말 한마디에서도 사랑이 묻어나옵니다.
사실 이들은 자기 고행과 수양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는 야보고서 1장 27절의 말씀을 붙들고, 전쟁과 기근으로 발생한 고아들 6백여 명을 돌보았습니다. 무전 걸식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하룻밤 제우고 따뜻한 밥을 지어주는 운동도 벌였습니다. 이들 수녀들은 당시 위험하고 전염성이 있었던 폐병 환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기도 하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서 길을 걸을 때도 지렁이를 밟을까 생명을 해할까 조심조심했으며 이현필 선생은 몸에 붙은 이도 죽이지 않고 다만 쫓아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누가 낚시를 하여 고기를 잡은 것을 보면 자기 돈을 주어 그 고기를 사서는 다시 놓아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만물은 내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다”라고 하며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들이 금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단지 육체적 수련을 위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하여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길을 좇고자 하는 열망에서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다음과 같은 기도문들은 그 의도를 잘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옵소서. 죄인된 것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행복된 것은 구주가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저의 약함을 기억케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복된 것은 크신 권능 물밀 듯이 찾아주신 까닭이로소이다.” “언제나 언짢은 일을 좋아하게 하소서. 궂은 것을 즐겨하게 하소서. 쓴 것을 달게 여기게 하소서. 대접받는 일을 중심으로 싫어하고 핍박과 수치와 천대를 꿀처럼 달게 여기고 악평과 훼방을 금싸라기같이 여기는 맘을 주시옵소서.” “주님! 주님만을 사랑케 하소서. 제 마음을 빼앗아 가소서. 온전히 빼앗으사 주님 수중에 두소서.”
이현필 선생은 그렇다고 하여 성 프란체스코처럼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적적이고 신비적인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에 병이 있어 기도를 받으려고 오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오.” 하며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어디가 아프다는 이에게 “아프게, 더 아프게 해주십시오.”라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으라. 내가 이승에서 겪어야 할 병이거나 고통, 불구라도 될 수 있으면 다 당하고 가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가 함께 추운 겨울 탁발 걸식하다가 어떤 야박한 집의 하인으로부터 맞고 모욕을 당해 쫓겨나면서 “이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했던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력과 약함이 드러나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을 그들은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라 고백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평생 동안 폐결핵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병을 보내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며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오 축복하신 이 결핵병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마옵소서.”
이분의 자기 부정의 모습은 자신이 세웠던 원칙을 스스로 파기하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평생 힘썼던 것 중에는 살생을 금하여 육식을 먹지 않으며 아파도 약을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은 자기 죽음이 가까워오자 이것을 스스로 파기합니다. 이현필을 우상화하거나 그 제자들이 어떤 교조적인 율법주의자가 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그는 신촌의 한 거지굴에서 굴비로 국을 끓여 그 국물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을 찾아가 약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때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해왔던 고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는 53세의 나이로 오랜 영양실조와 고행과 병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 의복을 헐벗은 사람에게 주고, 관을 쓰지 말며 거적 대기에 싸서 평토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오 기쁘다, 오 기뻐”하며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스도만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이현필 선생의 삶을 본받으라고 하면 무리일 것입니다. 당시 시대적 삶이 못 먹고 못 살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행동과 순종이 없이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도, 예수를 따른다는 것도 헛것이요 실제적인 자기 변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청빈, 고행, 순결, 순명을 통하여 자기 부정의 길을 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자기 것 중 스스로 부정하거나 포기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정하거나 모든 것을 버리는 이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신 분,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속한 헛된 욕심들을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농부가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이유는 그 안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인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산 이유는 그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극히 값진 진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예수가 그만큼 소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분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유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시험은 세상이 너무 좋아 보이고 하나님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갈수록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꽃이 더 피고 신앙의 위대한 인물도 고난과 역경 가운데 탄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핍박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의 편안함이 우리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물질과 그 편안함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여전히 허무와 소외,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정의나 사랑이나 어떤 보람된 가치를 추구하려 합니다. 명상이나 전원생활을 통하여 평화를 맛보려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힘과 그리스도의 가치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내가 죽는 자기부정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신앙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시 우리 사회를 가난하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할까요? 저는 그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자신에게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안전과 번영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어려움이나 몸의 약함이나 사회적 어려움으로 오지 않고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필요를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육체의 필요를 줄여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육체를 좀 불편하게 하는 작은 금욕이 필요합니다. 좀 더 검소하고 좀 불편하게 사십시오. 좀 덜 먹고 가려 먹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들 하는 대로 다 좇아가지 말고 한 템포 늦추거나 돌아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의 느낌대로 분노하지 말고 한 번 더 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좀 더 버리고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을 가진 대로 사용하지 말고 섬기며 겸손하게 사용하십시오. 작지만 의식적인 행동들이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데 유익하며, 내가 죽은 만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살아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배하는 만큼 우리는 행복하며, 우리의 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