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연 (因 緣)
“경원이가” 여기에 묻혀 있다니,
무연고자로 영락공원 가매장지에서 가매장 상태로 유족을 찾고 있다니, 왜 죽었는지 도대체가 혼란스럽기만 하고 또 아무런 연고가 없다니, 거꾸로 서있는 듯 세상이 온통 뒤집어 보일 뿐이다. 나지막한 사각 시멘트 기둥에 11이란 숫자가 적혀있고, 그 밑으로 일련번호 같은 숫자가 있다. 검은 페인트로 쓰인 숫자는 색이 바래져 잘 구분도 되지 않는다.
“경원이는” 민락동 어느 원룸에서, 죽은 지 보름 만에 백골상태로 이웃에 의해 발견되고, 119에 신고 되어 영락공원으로 왔다. 시멘트 기둥에 11이란 숫자는 2011년도에 사망한 연도이고, 밑에 숫자는 그해 가매장지로 들어온 죽음들의 숫자라 했다. 10년 동안 유족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유골들을 한꺼번에 합장해 한 봉분에 안치 한다고 한다.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영락공원 맨 꼭대기에 위치한 가매장지를 빠져나와, 긴 아스팔트 길 따라 터벅터벅 걸었었다. 꽉 들어찬 고혹적인 만추의 계절에 낙엽 하나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맥없이 스르르 떨어지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경원이의” 마지막 모습 같아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순간, 복수가 찬 병마의 고통 속에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고독사”였다고 전해주는 그 얘기, 초라하고 삭막한 시멘트기둥 앞으로 잡초에 뒤 덥힌 채 흙무더기 속에 있다고, 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커다란 슬픔을 감당 할 수가 없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냥 길가에 퍼질고 앉아 실컨 울었었다. 범어사 입구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일어섰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취하긴 싫었다.
“경원이는” 첩의 딸이었다. 동래에서 고무신 공장을 경영하던 부유하고 나이 많은 아버지는 돈의 힘으로 처녀인 엄마를 맞아들였다. 이웃이 된 우리는 명륜 초등학교를 같이 입학하면서, 지금 재개발이 한창인 구 온천시장 부근 그의 집에서, 전차종점을 지나고 온천교를 건너오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차철길을 따라 걸어 다니기도 했었지만, 신작로 따라 다니는 빈 달구지 얻어 타는 재미로 신작로 따라 학교를 오갔다.
지금의 명륜동, 소방협회와 그 인근은 연꽃이 곱게 피어오르는 널따란 자연 연못이었다. 어떤 때 운이 좋은날은 학교서부터 달구지 얻어 타고 오다, 비를 만나게 되면 연못의 잎사귀 넓은 연잎을 따서 머리에 감싸지고 집까지 뛰어가고 했었다. 그러다 “경원이는“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집 이사와 함께 전학을 가버렸다.
엄마가 같은 계원이었던 것을 몰랐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왔었던 “경원이와” 우연하게 마주쳤다.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심부름 온 물건만 전해주고, 잠깐 눈만 마주치고는 그냥 돌아서 가버렸다. 부산의 명문여고 교복을 얌전하게 입고 말없이 돌아서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런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한 미팅장소에서 같은 학교를 졸업한 친구를 알게 되어, 만나본 “경원이는” 변해 있었다,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꽉 낀 청바지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찡그린 표정으로 힐끗 쳐다보더니 그대로 담배를 입에 물고 나가 버린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멍하니 앉아 있을 뿐 이었다.
“경원이는” 말수는 적었지만 공부 잘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착한 학생이었는데, 고2때부터 갑자기 적은 말수가 더 적어지며 어두운 얼굴이었다고,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하는 친구는 얘기했다. 학교결석도 자주하게 되고 담배도 피우며 혼자서만 행동하고, 항상 우울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자리에 “경원이와” 가끔씩 만날 수는 있었지만 가깝게 다가 갈수로 그는 멀어지기만 했다. 어쩌다 술 힘으로 엄마 안부를 따뜻하게 물어오는 적도 있었지만, 항상 나에겐 냉담하기만 했었고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입대하게 되고,
제대 후, 만난 친구가 전해주는 “경원이“ 소식은 놀라웠다. 술집여자로 일하게 되면서 지금은 인기 있는 아가씨로 통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동거생활까지 한다는 소문이 친구들끼리 얘기 거리가 되고 있다며, 쳐다보는 눈초리에 애써 태연한척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나쁜 계집애“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그래도, 무심한 시간은 빨리도 지나가 나이 30을 훌쩍 넘긴 어느 날, 학장동 교도소에서 면회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대기소에서 “경원이를” 만났었다. 복잡한 일에 얽혀 편안하게 교도소행을 택한 가깝게 지내던 분에게 안부 차 왔었는데, 그는 누구를 면회 왔을까, 물어볼까, 말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악수를 하는 “경원이”손은 떨리는 듯 울림도 있었지만 그 손이 너무 따뜻했다. 성숙해지고 세련미도 있었지만, 그 모습이 초체하고 하는 행동은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날 저녁, 그가 장사한다는 사직동 조그만 주점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어릴 적 얘기로 맴돌기만 하던 대화는 5-6병의 술병이 떨어져 나가자, 작심한 듯 얘기를 시작했다.
첩의 딸이 너무 싫었지만 어린마음에도 순응하기로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 원하는 학교에도 입학했지만, 고등학교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엄마와 나이차가 별로나지 않는, 배다른 언니들과 재산문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달라붙는 배다른 언니들도 싫었지만, 순리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싸움으로만 일관하는, 엄마의 모습에 너무 실망하고 보기 싫어져 혼자 방황하기 시작했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가출도 하고 친구 집에 얹혀 지내다 집에 가보면, 도저히 그 싸움은 끝날 것 같지 않아 또 튀어나오고 여관에서 자고하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먹게 되고, 그러다 배다른 언니들에게 판정패한 엄마는 돈의 힘을 잃어버리자 무기력해지고, “경원이는” 내 팽개쳐진 첩의 딸일 뿐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경원이는” 차분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우리 어릴 적 인연은 슬픈 인연으로 기억하고 다시는 찾지도 만나지도 말자고 했다.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나는 그 도발적인 말에 할 말을 잃고, 술잔만 비우다가 일어섰다.
그렇게, 정말로 무심한 세월은 30년이란 시간을 가져가 버리고 함께 자주 가던 서면의 카페 여주인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연배이지만 마음을 열고 가깝게 지내던 분이었다. “경원이가” 민락동 한 원룸에서 죽었다고 하며, 연고자가 없어 영락공원 가매장지에 가 있다고, 고독사 분들의 유품을 정리 해주는 민간단체 직원이 친구 일 것 같은, 한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전화 해 준다고,
너무 놀랍고 가슴이 뛰고 그리고 무서워서 도저히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며, 벌써 4년전 일이라고 했다. 연락할 길이 없어 포기하고 있다가, 충무동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는 친구를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연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망설였다. 웬지 찾아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가슴 아픈 현실이 싫어서도 찾아가 보고 싶지 않아 망설이다가, 온천장 가는 전철 안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영락공원을 찾았었다.
다가갈수록 멀어져 만 간 여인,
첩의 딸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혼자서 자학만 하다 간 가엾은 여인,
병마의 고통 속에,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여인,
죽어서도 혼자인, 가엾고 불쌍한 가련한 여인,
“경원아” 이제 6년 후에는 내가 널 보듬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보듬을 수가 있다면, 오래전에 봐 두었던 금정산 나비바위 근처 하루 종일 햇살이 퍼붓는 따뜻한 곳에 묻어주고 금정산에 갈 때마다 널 찾아갈께, 그리고 “경원아”
우리 생애 못 다한 슬픈 인연, 먼 길 돌아 다시 만나는 그 때는 널 놓치지 않을께, 인연(因緣 )은 거부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끝-
첫댓글 오늘은 날이 활짝 개였으면 좋겠다.
글 쓴이의 마음에도 개인 파란 하늘처럼 싱싱해지면 좋겠다.
그런데, " 6년후에는" 라는 문구에서 뭔가 가슴이 답답해 온다.
무슨 뜻일까? 어떤 의도에서 뱉는 마음속 다짐일까? 머리를 굴려 유추해 보지만 어렵다.?
그려,
인연의 끈은 서로가 붙잡고 있을 때 성립되는 두 마음의 연결이 아닐까?
소중하고 고이 간직해야 하는 인연이라면 꼭 이루게 하소서.
댓글을 올리면서 이 아침, 뭔가 글귀가 귓등에서 바스락 거린다.
어려울것 하나도 없다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지않나?
"10년 동안 유족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유골들을 한꺼번에 합장해 한 봉분에 안치 한다고 한다."
죽은지 4년 되었으니 앞으로 6년 남았다는 뜻
그때가서 그 유골을 받아와서 나비바위 근처에 안치하겠다고 하지 않나?
6년후에 나도 그곳에가서 그 여인을 위해 잠시 상념에 잠길수도 있겠지?
아마 여포가 허락할거야
@조영남 친인척이 아닌 사람이 유골을 인수, 즉 분골되어 나오는 것을 인수하기는 어렵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처리하기 땜에..
아마 별도로 분골할려면 서류가 복잡할낀데...
지인이 아니 생전에 연모의 정을 가진 사람이 인수 한다고 하면
언론 보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을 터, 그 이후가 소름 끼칠 수 있겠다.
비밀은 존재할 수 없는 입 속의 노리개다.
암튼, 6년 후 라면 70 노인들이 함께 나비암에 오를 기운이 있어야 하는데...
그 날 번개산행 계획 세워 두어야 하는지....ㅎ ㅎ ㅎ
여포,
혹시 소설을 쓴 것은 아니겠지.
항상 그렇지만 친구는 文才가 다분한 사람일세.
현명한 이는 세상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라고 한다.
좋은 사람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고,
나쁜 사람을 보면 그렇구나,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며
세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경원이가 이 험한 세상을 건너 갈 지혜있는 여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아마도 경원이가 여포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던 것은
깊은 마음에는 애틋함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네.
하여튼 여포 얼굴 보면 이런 강물같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살아갈 로맨틱한 품성이며 얼굴이라니깐.
그러고 보니 가을일세.
그것도 만추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