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0] 윤영태(尹泳泰) - 고생과 축복 3. 40일 전도에서 느낀 감회
1 1961년 7월 20일 하계 전도 기간이 다가왔다. 마침 안동교회를 이전해야 하는데 김 지역장님께서 2천 원이 부족하시다기에 전도비로 준비하고 있던 2천 원 전부를 털어 보태고 나니 한 푼도 없었다.
2 다행히 같은 방향인 서후면으로 임지를 배정받아 내려온 서울대학교 학생인 이재구 씨를 교회에서 만나 같이 출발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반대하던 형수가 500원을 동생 편으로 보내주어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풍산면으로 일단 두 사람이 같이 갔다.
3 도착하여 짐을 맡겨 놓고 안동, 예천, 영주군 내에서 제일 높은 학가산으로 기도부터 하기 위해 올라가기로 하고 인내력을 기르기 위해 중간에서 물을 먹지 말고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 약수물을 마시자고 약속을 하였다.
4 7월의 불볕더위에 갈증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5시간 쯤 들길을 걸으며 산정을 향해가다가 8부 능선까지 올라가면서 물을 찾아도 물은 없었다. 더 이상 올라가도 바위밖에 없고 물이 나오지 않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5 나는 정신없이 산 아래로 뛰어 내려와 습기 있는 곳을 찾아 나뭇잎을 대고 조금씩 나오는 물을 빨아먹고 난 후 정신을 차려 산을 쳐다보니 이재구 씨가 산정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다시 올라가기는 해야 할 텐데 힘이 빠져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6 그러나 억지로 나뭇가지와 풀포기를 잡고 올라가니 처음 올라갈 때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다. 나는 그때 생각하기를 한 번 실수한 것을 재탕감복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절대로 뜻길에서 후퇴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후퇴하기는 쉽고 순간적이지만 복귀하기란 어렵고 몇 배의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7 산 최고봉은 큰 바위로 되어 있었는데 그 바윗돌 밑에서 맑고 시원한 물이 펑펑 솟아나고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참고 전진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8 해가 지자 추워서 도저히 밤을 지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여동생이 준비해준 옥수수를 나누어 먹고 힘껏 소리 지르고 기도한 다음에 어두운 밤길을 더듬으면서 하산했다. 도중에 산 중턱 절에 들어가 밤새워 스님들과 말씀을 나누고 아침식사를 같이했다.
9 면 소재지에 내려와서 재구 씨는 서후면으로 가고 나는 혼자서 며칠간이나 방을 구하고자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인사를 드리고 청년들을 사귀었다. 며칠간은 밖에서 잠을 자고 큰 방을 한 칸 구한 뒤에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10 식사는 밀 소두 1말을 준비하여 껍질째 가루를 만들어 한 끼에 밀가루 몇 숟가락을 물에 반죽해 놓은 다음 멸치 한 마리를 비벼서 넣고 감자 한 개를 넣어 물을 끓이다가 숟가락으로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고 파 한 뿌리를 곁들여 끓여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11 순회사님이 오셨을 때도 내가 끓인 밀가루 수제비를 대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도 떨어져서 3일간 금식을 하고 열무 줄기를 된장에 찍어 먹기도 하였다.
12 청년 식구가 고구마 1관 정도를 가져 와서 며칠간 먹고 나니 힘이 없어 쓰러질 것만 같았다. 40일 전도 기간이 끝날 무렵 풍천면 이종철 씨 전도 임지에서 개최한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청송에 전도나가셨던 서울 식구 정현숙 여사께서 오셔서 내 생활을 보시고 쌀을 사다가 밥을 짓고 생선을 구워 손으로 집어 먹여 주시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13 40일 전도 기간에 열심을 다한 결과 김종원, 송상열, 정진수 등 10여 명의 청년들이 전도되어 교회로 인정을 받게 됐다. 그러나 방세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40일이 끝나고 귀가하려고 짐을 다 꾸려놓고 있었는데 그날 밤 꿈에 갓 쓰고 흰옷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많이 나타나서 “돌아가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라고 붙잡는 것이었다.
14 그런 꿈을 꾸고 나서 일단 철수를 포기하고 청년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 변두리로 방을 옮겨 2개월을 지나게 됐다. 그 후 다시 권 씨댁으로 옮겼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아침 일찍 그 집 마당을 쓸었다.
15 옆집에 전오순 아주머니가 있는데 그날 밤 그분의 꿈에 자기 친정어머니가 쌀 3말을 자루에 부어 주면서 옆에 있는 자기 동생을 먹여 살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동생이 바로 청소하고 있는 나였다고 식구가 된 다음에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16 그분은 나를 먹여 살려야 할 사명감을 느끼고 떡장사나 묵장사를 하면서 식생활을 협조했으며 회의에 갈 때마다 여비까지 준비해 주셨다. 그해 늦가을에 그 옆집 송상열 청년을 협회 40일 수련회에 보내고 대신 그 집 일을 보살피며 예배 장소를 그곳으로 옮겼다.
17 철저한 유교 가정이었지만 그 어머니와 16세 된 누이동생 송영순 양을 전도하여 2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