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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영화 매트릭스는 알려준다.
"의존한다는 것은 지배받는다"는 거라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지배의 본질을 투시한다.
"사람들의 공포를
지배하는 자가
그들 영혼의 주인이 된다."
우리는 늘 질문해야 한다.
나의 두려움은 실체인가?
내가 아는 게 다일까?
나는 지금 나의 것인가?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너 자신을 알라" ㅡ소크라테스ㅡ
얼마 전 유튜브에서 어느 정치평론가가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쏠림의 정치현상과
자기 정치신념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정치가의 독선을 두고
"자기객관화(메타인지)의 부재"를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메타인지'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지과정을 한차원 높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능력인데,
이것이 높다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메타인지가 낮다면
무엇을 자기가 모르는지도 몰라서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듭니다.
게다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입니다."
<<정신의학신문(정두영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칼럼)>>
자기객관화 즉 메타인지의 부재는
무지에 의한 자아의 의존, 집착, 지배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십자군 전쟁'이나 '나치의 2차 세계대전'과 같은,
오직 폭력의 광기만이 존재하는 '전쟁' 아닐까...
작게는 사소한 일상의 습관에서
크게는 인터넷을 바이러스처럼 떠도는 인포데믹(가짜뉴스)이나 이념과 정치 프로파간다까지...
내가 의존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이든 인터넷이든 정치든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건만,
혹시 에고의 미혹과 두려움 때문에 내가 그것들을 광신하거나
혹은 그것들에 종속되어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얽매인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 옳았던 것이 내일은 틀린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저기서 빌려 온 지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삶은 그대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반대로 그대가 삶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
삶은 논리를 초월한다.
삶은 이성적 추론을 따르지 않는다.
삶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삶의 행로는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살아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유유하게 흘러가는데,
그대의 행동 패턴은 고정되어 있다.
삶이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대는 바윗덩어리처럼 한 장소를 고수하고 있다.
의식적인 삶을 살아라."
─ 오쇼 라즈니쉬의 《이해의 서》
우리는 자신이 누군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한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는
무지의 영역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고,
데카르트는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으며,
베이컨은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게 힘"이라고 말한 걸까...
무지한 나를 아는 것이 깨어있는 의식이요, 현존의 힘이요, 곧 구원의 길이다.
소크라테스와 데카르트, 베이컨이 말씀하신 것처럼,
깨달음은 무지를 알아차리는데서 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질문이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거나
자기가 아는 세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여기는
중독적, 독선적, 광신적 태도이다.
"독선은 '무식'의 상징이다.
무식은 학교에 다니지 않아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조그만 지식이
최고라고 보는 착각이자 성급한 열등의식이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종교 이전의 시대(632년)를 '무식의 시대'라고 불렀다.
무식은 고전 아랍어로 '자힐리야(jahiliyyah)'다.
자힐리야는 기원후 7세기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 아랍사회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자힐리야에는 다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성급한 분노'다.
무식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낸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이 구축한 이상적이며 이성적인 세계관에
상대방이 쉽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당면한 문제를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수련을 해본 적이 없어
성급하게 판단하고,
자신의 협소하고 치졸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편협한 독선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연대해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에게 '정의'란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행위를 일삼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무식한 폭력을 '정의'라고 말한다.
'공정'과 '정의'를 들먹이는 사람은 대개 정의롭지 못한다.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사람이 정의롭다."
─ MoneyS <배철현의 월요묵상> '타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 노력하십니까' 중에서
"경계에 서라.
그래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산 자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21세기적 열광 ─ 무엇엔가 고착된듯 중독되거나
바윗덩이처럼 마비(그야말로 마니아 또는 덕후 열풍이랄까)된 듯 보이고,
또 그렇지 않으면 잠시도 못 견뎌하는 것 같다.
먹방, 부자, 인터넷, 게임, SNS, 홈쇼핑, 과소비, 마약, 흡연, 음주, 성형, 도박, 포르노그래피, 다이어트, 명품, 심지어 이데올로기까지... 중독의 코드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지금 "무한 탐색 모드(피트 데이비스의 책 <전념>)" 속에 살고 있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포모 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포모(FOMO)'는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 가,
나만 그게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실체 없는 두려움을 말한다.
이제, 극과 극으로 치달릴 뿐인 고루한 '이분법의 만리장성'이 아닌,
광기어린 '절대긍정성 칼'이 아닌
모든 가능성의 활짝 열려있는 '다양성과 부정성의 경계'에 서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귀기울여 보자.
□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창가의 남자 (1875)>
: 스틱스강은 생과 사의 경계다.
스틱스강에 담가졌던 아킬레스는 불사신이 됐다.
창window도 긍정성 vs 부정성과 획일성 vs 다양성이라는 변화의 경계다.
스틱스는 우리에게 단호한 한마디를 전한다.
"경계에 서라! 그래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산 자다!
그래야 강하다!
(최진석의 <경계에 흐르다>에서 인용)"
언제 어디서 무얼하든,
나의 진정한 주인은 코나투스(스피노자에 따르면,
삶에 대한 근원적 욕망 혹은 자기보존의 욕망이 코나투스)하는 나 자신이다.
불교에서 "일체유심조"로 일컬어지는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란 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나는 마음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니까.
즉, 일체유심조는 자신의 인지과정을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능력인 메타인지력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깨달은
"내적 선택의 결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계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는 신기하게도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을 "내적 선택의 결과"라는 말로 쉽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지옥에서 조차...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
빅터 프랭클은 개인의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강제수용소라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지는
그 개인의 "내적 선택(마음먹기 나름, 즉 일체유심조=메타인지)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즉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알았다."
빅터 프랭클이 말한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기가 자기로 실존하는 자각이자 성찰이자 의지이다.
즉, 이미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인 행세를 하는 두려움이라는 마음(에고)의 헛된 환영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자기가 자기로 사는 길이요,
내가 기존의 이념이나 낡은 가치, 가짜뉴스 등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나의 것으로 현존하는 길이며,
자본을 절대 긍정하는 리바이어던의 세계에서
무지한 종속을 벗어나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길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서
두려움이라는 광기를 멈추게 하는,
지금 이 순간을
자기가 자기로 사는 '현존의 힘 (메타인지에 의한 깨달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뭔가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미래 상황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마음과 동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 상황과 맞서 싸울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환영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자기가 자기로 사는) 현존의 순간을 받아들인다면
건강을 해치고 삶을 좀먹는 그와 같은 광기를 간단하게 멈출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악의 평범성이 만든
무간지옥無間地獄을 경험한 빅터 프랭클도
마음의 환영에 불과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난 후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도 그의 책 《이해의 서》에서
두려움이 사라진 경이로운 느낌을 갖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꽃피우는 것,
생각의 각성을 이루고 깨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첫번째 의무라고 강조한다.
"꽃봉오리를 열고 있는 장미가 이기적인가? 활짝 피어난 연꽃이 이기적인가?
따스한 햇볕을 비춰주는 태양이 이기적인가?
왜 이기심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가?
그대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의 기회이다.
탄생은 출발점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그대는 꽃을 피워야 한다.
어리석은 봉사로 삶을 낭비하지 말라.
그대에게 주어진 일차적인 책임은
그대 자신을 꽃피우는 것이다.
의식의 각성을 이루고 깨어나는 것이
그대에게 부여 된 첫번째 의무이다.
그렇게 의식이 깨어나면 자신이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들 중에
99퍼센트는 우리 손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아마 1퍼센트는 미해결로 남을지 모르겠다. 그때에 우리는 문제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먼저
그대가 나누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은 심리학자로서 정신과 의사로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을 토대로
마음의 문제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의미치료 (Logotherapy)'를 확립하는 데 헌신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았다.
°MEMO
이번 총선에서 국가와 국민에게 헌신하는, 깨어있는 빅터 프랭클들이 봄꽃처럼 만발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해봤습니다^^;
첫댓글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살다보면
누구나 좋아하고 인기가 있는 사람인데
직접 오랜동안 자세히 지켜보지 않으면
잘 알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본연의 모습을 철처히 감추고
때로는 지적인듯
때로는 유머스러운 듯
때로는 감상적인 듯
현란하고 다양한 모습의 페르소나 놀이.
그리고 그런 삶의 생활....
세상은 늘 물 흐르듯이 살아라 말한다
굳이 누가 여우인지를 알아서 뭐하냐
사람은 이중성은 필연적이지 않는가
''모두에게까지 좋은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
그리고
''착하고 사람좋다고 평판이 자자한 이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이런 개똥철학도 눈여겨 접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