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여성 CEO : 김만덕
▣ 제주도의 기녀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거상이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도왔던 김만덕(1739-1812)
김만덕은 김해 김씨로 영조 15년(1739년) 김응열의 삼남매 중 외딸로 태어났다. 만덕이 13세 되는 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게 되니, 오라비 만석과 만재는 친척집에 목동으로 가고 만덕은 기방에 의탁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총명하였으므로 자라면서 타의로 기적(妓籍: 기생 등록대장)에 오르게 되었다. 몇 해를 지나다가 만덕이 나이 20여 세가 되었을 때 본의 아니게 기생된 사연을 들어 양녀로 복귀시켜 줄 것을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을 찾아가 양녀 환원을 호소하였다. 관에서는 전후의 사정을 인정하여 기적에서 삭제하였으므로 양녀로 복귀되었다.
만덕은 집안 형편이 가난하였으나 지체 있는 사람으로부터 청혼도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식산에만 전념하였으며 축재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녀가 살던 18세기 중엽 내륙에서는 각지에서 5일장인 장시(場市)가 섰고, 해안과 강가의 포구(浦口)도 흥청거렸다. 장시와 장시, 장시와 포구, 포구와 포구가 서로 연계되면서 전국이 하나의 상권으로 편제되어갔다. 내륙에서는 마필(馬匹)에 의한 육운(陸運)이, 연해안 또는 수로에서는 선박에 의한 수운(水運)이 상품을 유통시켰다.
만덕은 제주의 포구가 지닌 이런 가치에 주목해 포구에 객주(客主)를 차렸다. 객주는 여관 구실도 했지만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중간상 역할도 했다. 기생 출신이었던 그녀의 객주는 곧 번성했다. 그녀는 객주를 중심으로 기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에게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고, 제주 특산물인 녹용과 귤 등은 육지에 팔아 많은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는 관가의 물품도 조달하게 되었고, 포구의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주인권(浦口主人權)을 획득한 것으로 추측된다. 만덕은 자신의 포구에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했고 그 자신의 선박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앞장서 이룩한 빛나는 성취였다. 물자의 귀천을 팔아 때로는 헐값으로 사두었다가 철을 맞추어 비싸게 방출하기도 하니 수십년 사이에 부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정조 18년(1794년) 8월 27일과 28일에 태풍이 불어 닥쳤는데 당시 제주에 왔던 심낙수 어사가 보고하기를 '온 섬을 비로 쓸어버릴 것 같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도 본주 78리 중에서 32리가 가장 심하고, 정의 대정도 다 같이 심합니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 19년(1795년) 봄에 큰 기근이 일어나게 되자 동년 윤 2월에 이우현 목사는 치계하여 진곡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진곡 수송선 5척이 침몰하였으므로 재차 1만 1천석의 진곡을 긴급히 요청하였다.
이 때 김만덕은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게 하였다. 선원들도 때에 늦지 않게 운곡하였으며 이렇게 사온 곡물이 모두 500여 석, 만덕은 이중 1/10을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450여 석을 모두 진휼미로 관에 보내어 기민을 구하게 하였다.
제주목사 이우현(李禹鉉)은 만덕의 이 기부에 크게 놀랐다. 당시 제주도인 중에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 장교(將校) 홍삼필(洪三弼)과 유학(幼學) 양성범(梁聖範)이 각각 1백석을 낸 것이 고액기부의 전부였다. 고한록의 기부에 대해 목사 이우현이 ‘무려 300석을 냈다’고 보고할 정도였으니 만덕의 기부에 놀란 것은 당연했다.
정조는 고한록을 특별히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임명했다가 군수(郡守)로 승진시키기로 하고, 홍삼필과 양성범을 순장(巡將)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정조가 ‘이들이 1백 석을 자원 납부한 것은 육지의 1천 포(包)와 맞먹는다.’고 말한 것은 이들의 기부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알 수 있다. 관에서는 완급을 가리어 나누어 주니 구호를 입은 백성들이 거리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구휼이 끝나자 목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다. 임금이 회유하기를 '만덕의 소원을 들어 난이를 불문하고 특별히 시행하라' 하였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서 소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다른 소원은 없으나 오직 한가지 서울에 가서 임금님 계신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의 명산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 때 제주의 여자는 국법으로 육지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때이었으나 목사가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이를 허락했고, 상경하는 데 필요한 역마와 식사는 관에서 특별히 제공하도록 하였다.
김만덕이 상경한 것은 정조 20년(1796년) 가을이었다. 상경하여 두어 차례 영의정 채제공을 뵈었고 임금에게 아뢰어 선혜청에서 숙식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수일 후에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의 벼슬을 내렸고 내합문으로 들어가 임금을 배알하였다. 이 때 임금이 전교하기를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를 내어 기아자 천 백여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로다' 하시고 상을 후하게 내리셨다.
만덕은 그 해 겨울을 서울에서 체류하고 다음 해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이 있는 곳과 기향 명승지를 두루 탐방했고 처음으로 금불상을 보고 배례 공양하였다. 이 때 제주에는 불사가 없었으므로 만덕이 나이 58세에 처음으로 사찰과 불상을 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안문령을 넘고 유정을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선유하고, 다시 통천의 총석정에 오르니 천하의 괴관을 두루 본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서 며칠 후에 내원에 들어가서 귀향의 뜻을 아뢰자 임금은 전일과 같이 상을 내렸다. 이 때 김만덕의 이름이 온 장안에 퍼져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만덕의 얼굴을 한번 보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지체높은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러 찾아들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실학자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朴齊家)입니다.
박제가는 당시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석학이었습니다. 만덕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박제가는 숙소로 직접 찾아와서 시를 넉 수 써주었습니다.
넓은 천지 바다밖에는 못나가니
넓다한들 뉘라서 시집장가 끝내랴
제주라 섬나라 이웃은 일본
사또는 천년세월에 귤만 바쳐왔네
귤밭 깊은 숲속에 태어난 여자의 몸
의기는 드높아 주린 백성 없었네
벼슬은 줄 수 없어 소원을 물으니
만이천봉 금강산 보고 싶다네
의젓이 다듬은 몸매에 돛대도 높이
남쪽별은 빛나 임금님도 기쁨을
바삐 말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하니
햇빛도 바람결도 노리개에 찬란타
정녕 깨달았으리 신라와 마음은 하나
생김도 달라 여자 몸 눈동자가 겹이라
이제사 알겠노라 바다 건너온 뜻은
잣다란 세상일에 있지 아니했음을.
김만덕의 선행을 보고 느낀 대석학의 감회가 잘 우러나는 시문입니다. 만덕은 출발에 앞서 영의정 채제공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몸이 다시는 상공의 얼굴을 우러러 볼 수가 없겠습니다.' 하며 울먹였다. 채제공이 타이르기를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한라산을 영주산,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한다. 너는 탐라에서 성장하여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편답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수많은 남자들도 다 못하는 일이다.
이제 작별이 임하여 어린애처럼 척척거리니 그 몸가짐이 마땅하지 못하구나' 하시면서 영의정 채제공이 웃으면서 김만덕의 일을 적은 만덕전 서책을 꺼내 손에 안겨주었습니다. 때는 정조 21년 하지일 이었고 채제공의 나이 78세였다. 이 책이 정비석이 감탄해 마지않은 채제공이 쓴 <만덕전>(萬德傳)입니다. 김만덕은 순조 12년(1812년) 10월 12일에 74세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한 눈에 보이는 '가운이 마루' 길가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30년 후에 추사 김정희가 옥사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년) 대정현에 유배되었습니다. 만덕의 덕행이 그 때까지 사람들의 입을 떠나지 않은 것을 보고 추사는 감탄해서 만덕의 양아들에게 현판을 써 주었습니다.
1960년경부터 제주 시가지가 팽창하여 김만덕 묘소 있는 곳에 공장시설이 들어서므로 1977. 1. 3 도민의 이름으로 모충사로 이묘하고 제주도에서는 그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만덕상을 제정, 해마다 한라문화제 때 모범 여인에게 수여하고 있습니다.
김만덕의 무덤 묘비는 사라봉 모충사 경내에 있다. 제주도민들의 성금으로 사라봉 공원 내에 세워진 모충사는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직한 열사와 의녀 김만덕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세웠으며 모충사 입구에 건립문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KBS 역사 저널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