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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은사는 지금도 존재하는가?
호바트 프리먼은 하나님이 자신의 소아마비를 고치셨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프리먼의 한 쪽 다리는 다른 쪽 다리보다 너무 짧아서 교정용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전히 그는 걷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먼은 목사였다. 그는 목회를 시작할 때 침례 교인이었고 심지어 교리적으로 정통적인 『구약 선지서 서론』이라는 훌릉륭한 교과서도 썼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프리먼은 신유 은사에 매료되어 은사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뒤로 갈수록 더 과격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는 인디애나주 클레이풀에 '믿음 성회(Faith Assembly)' 라는 이름의 교회를 새로 개척했는데 이 교회는 회원 2천 명 이상으로 성장했다. 집회는 프리먼이 '영광의 헛간' 이라고 부르는 건물에서 열렸다. 교회 회원이 아니면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프리먼과 믿음 성회 신도들은 의학적 치료를 완전히 경멸하고 현대 의학은 고대의 마법 내지 흑마술의 연장이라고 믿었다. 의사의 처방에 따르는 것은 자신을 귀신의 영향에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프리먼은 믿었다. 프리먼의 교회에서는 임산부들에게 병원 분만실에 가지 말고 교회에서 지원하는 산파의 도움을 받아 집에서 출산하라고 말했다. 많은 산모와 아기들이 그런 가르침에 따르다가 목숨을 잃는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또 실제로 그 동안 최소한 90명 이상의 신도가 병원에 가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미국 전역에서 프리먼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이에 대한 통계를 낼 수 있다면 실제로 몇 명의 사망자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믿음 성회에 소속된 어느 신도 부모는 그들의 열다섯 살짜리 딸이 의학적으로 치료 가능한 병으로 사망하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10년 징역 판결을 받았다. 프리먼 자신도 이 사건에서 살인을 방조하고 유도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84년 12월 8일에 프리먼은 한쪽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데다 폐렴과 심장마비까지 곁치는 바람에 사망했다.
호바트 프리먼은 잘못된 신학 때문에 소아마비로 인해 자신의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꽤 분명하게 눈에 띄는 그의 육체적 장애와 그의 가르침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면 "나는 이미 고침 받았다."는 것이 돌아오는 대답의 전부였다. 궁극적으로 그는 분명한 육체적 결함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다가 목숨을 잃는 대가를 치렀다. 의학으로 쉽게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의무감으로 자신을 서서히 죽이고 있던 질병에 대한 치료를 거부했다. 결국 프리먼은 자신의 가르침의 희생양이었다.
프리먼 혼자만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에 무릎을 꿇은 이른바 신유 은사 신봉자는 아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몇 번의 신유집회를 이끈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 2차 세계 대전 이후 신유 부흥의 아버지 월리엄 브래넘은 1965년에 자동차 사고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엿새 동안 고생하다가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그를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유명한 천막 부흥회 부흥사이며 신유 은사 신봉자인 앨런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고쳐 왔다고 주장한 그 세월동안 남몰래 알코올 중독과 싸우다가 1970년에 간경화로 사망했다 캐스린 쿨먼은 1976년에 심장 질환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거의 20년 동안 심장병과 사투를 벌였다.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의 누이이며 신유 은사 신봉자였던 루스 카터 스테이플턴은 신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의학적인 암 치료를 거부했다. 그녀는 1983년에 암으로 눈을 감았다.
심지어 존 윔버조차 만성적인 심장 질환과 싸우고 있다.
그의 저서『능력 치유』는 '존 윔버의 개인적인 짧은 글' 과 함께 시작된다.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1985년 10월에 라는 3주 동안 영국에 머물며 런던, 브라이턴, 세필드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나 한 사람만 빼고.지난 2년 동안 나는 네 달 내지 다섯 달마다 가벼운 가슴 통증을 겪었다. 나는 이 통증이 심장과 관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무도, 심지어 아내 캐럴까지도 내 상태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더 이상 아내에게 병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아내와 함께 길을 걷다가 가슴 통증 때문에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거의 여행 기간 내내 무척 피곤했다. 나중에 의사들이 심장 마비로 의심한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종합 진단을 받아본 결과‥‥‥가장 크게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났다 심장을 크게 손상되었고 심각하게 손상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단 결과를 보면 내 심장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혈압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비만과 과로가 겹쳐서 생긴 이 심장 질환 때문에 나는 언제든 죽음을 맞을 수도 있었다.
윔버의 말에 따르면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기다린 것처럼 너도 병 낫기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의사들의 지시를 들어라." 그 때 이후로 윔버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윔버는 결국은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다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완전히 나아서 더 이상 육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쓰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쓰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 윔버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한다.
왜 그토록 많은 신유 은사의 주요 옹호자가 정작 자신은 병 치료가 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까? 신유 은사 신봉자인 찰스 캡스의 딸이며 자신도 신유 치료자인 애넷 캡스(unnette Eapps)는 『당신의 몸과 감정에서 저주를 몰아 내라』라는 책에서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이른바 '신유 치료자' 도 나중에는 병을 앓거나 죽는다는 사실에 실족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그 모든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면 왜 그 부흥사는 병이 걸렸죠? 왜 그 사람은 죽었죠?'
이유는, 그와 같은 집회에서 일어난 신유가 성령의 특별한 나타나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을 발휘하는 일과는 다른 문제다‥‥‥‥신유의 은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복음 전도자도 자신의 몸에 신적인 건강과 신적인 치유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스스로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왜 그런가? 신유의 은사는 섬기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유 은사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역하는 가운데 신유 은사가 나타나는 모습을 다양하게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 치유받기 위해즉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 자신의 믿음을 발휘해야 했다. 지금껏 여러 번 몸의 병으로 고생했지만 내 몸은 건강하지 않아도 사역할 때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나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을 통해 내 병을 고침 받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놀랍게도 만일 신유 치료자가 병이 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에 어딘가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른짓는다. 신유에 대한 관점은 종종 신유 치료자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해 보인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모든 병을 고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때로는 우리의 연약함속에서 성취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어떤 이들은 병을 죄와 동일시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여전히 왜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지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병을 마귀탓으로 돌린다. 어떤 이들은 자기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특별한 신유의 능력은 없고 단지 사람들에게 믿음의 길을 보여 주는 일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사람들은 병자에게 손을 대거나 기름을 붓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선포·를 하거나 신유를 위해 기도만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럴 로버츠는 사역 중에 언젠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전통적인 의학과 신유를 조화시킬 대형 병원을 세우도록 명하셨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에 직면하자 하나님이 병원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셨다며 말을 뒤집었다. 나는 최근에 그 병원 부지에 찾아가 보았다. 잡초만 무성하게 자란 부지 한가운데 일체식 구조지만 사실상 텅 빈 건물 앞에 기도하는 손을 새긴 거대한 조각상 하나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것은 성취되지 않은 신유의 약속을 보여 주는 기념물이었다.
신유와 은사주의 운동은 함께 성장해 왔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 찰스 폭스 파럼은 신유가 모든 참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확신을 중심으로 오순절 신앙 체계 전체를 전개해 나갔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 케니언, 월리엄 브래넘, 캐스린 쿨먼, 오럴 로버츠,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런드, 프레드 프라이스, 제리 사벨, 찰스 캡스, 노블 헤이스, 로버트 틸턴, 베니 힌, 래궈 리 등은 모두 자신들의 집회에서 신유를 간판으로 내걸어 왔다. 존 베르톨루치 신부나 프랜시스 맥넛 같은 가톨릭 은사주의자들도 그들의 선례를 따라 은사주의의 신유에 대한 강조를 로마 가톨릭 전통의 자연스런 확장으로 보았다 제3의 물결 지도자들과 그 중에서도 특히 존 윔버는 자신들의 레퍼토리에서 신유를 핵심적인 요소로 삼았다.
신유 치료자들의 주장과 방법은 별난 것부터 괴상망측한 것까지 다양하다. 몇 년 전 나는 우편물로 어느 신유 사역을 하는 은사주의 지도자에게서 '기적의 기도용 천'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런 메시지가 씌어 있었다.
이 특별한 기적의 기도용 천을 베개 밑에 넣고 오늘 밤 그 베개를 베고 주무십시오. 아니면 목사님 몸이나 사랑하는 가족의 몸에 붙여도 됩니다. 아픈 부위에 붙여서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천을 녹색 봉투에 넣어서 내게 다시 보내십시오. 이 기도용천을 간수하지 말고 내게 돌려 주십시오 그 천을 가지고 밤새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기적의 능력이 강물처럼 흘러 나갈 겁니다. 하나님은 목사님을 위해 더 나은 것을 준비해 두고 계십니다. 바로 목사님의 필요를 채워 줄 특별한 기적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기도용 천을 보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비상한 기적을 행하셨다. 그래서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로' 나갔다(행 19:12).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바울과 그 밖의 사도들은 유일무이한 능력을 받았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들외에 다른 누군가가 손수건을 보내면 신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케네스 해긴은 내가 개인적으로 한 번도 듣도 보도 못 한 방법을 사용해서 병을 고친다는 한 신유 치료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씩 침을 뱉곤 했다. 그는 자기 손에 침을 뱉고 사람들에게 문질렀다. 그것이 그가 신유 사역을 하는 방법이었다‥‥‥머리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는 손에 침을 뱉어 그 사람의 이마에 문질린다. 배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는 손에 침을 뱉어 그 사람의 옷과 배를 문질렀다. 무릎이 안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는 역시 손에 침을 뱉어 그 사람의 무릎을 문질렀다. 그러면 사람들이 전부 다 낫곤 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이에 못지않게 기상천외한 온갖 수법이 매일 기독교 TV에 줄줄이 등장한다. 오럴 로버츠는 '겨자씨 믿음 헌금' 이란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개인적인 기적이나 신유를 위해 일종의 계약금조로 그에게 바쳐야 하는 돈이다. 로버트 틸턴은 정기적으로 그와 비슷한 수법을 고안해 낸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헌금이 액수가 더 많고 더 큰 희생이 따를수록 기적도 더 커진다는 감언이설로 특별한 신유와 물질적 기적을 약속한다. 팻 로버트슨(Pat Roberson)은 방송 카메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마치 시청자들의 안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순간 병이 낫고 있는 시청자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베니 힌은 최근에 트리니티 방송국에서 생방송 중에 동료 신유 치료자이며 토크쇼 진행자인 폴 크라우치를 고쳤다. 힌이 자리를 가득 메운 방청객에게 '기름부음'을 행하자 크리우치가 앞으로 나와 오랫동안 앓아 온 귀울림 증세가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간증한 것이다. 신유에 대한 환상적인 주장들과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은 광적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의 실제적인 증거는 눈에 띄게 드물다.
나는 가는 곳마다 기적과 신유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은사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일까? 이러이러한 신유의 기적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사방에서 혼란과 의문과 모순이 난무한다.
성경을 공부해 보면 세 가지 범주의 영적인 은사들이 나타난다.
에베소서 4장에는
첫째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범주가 나온다. 이들은 그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로 묘사된다.
둘째로, 지식, 지혜, 예언(권위를 지닌 설교), 가르침, 권면, 믿음(또는 기도), 분별력, 구제, 기부, 행정, 원조 등 장기간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은사들이 있다(롬12:3~8; 고전 12:8~10, 28을 보라),
셋째로, 일시적인 표적으로서 은사가 있다. 이런 은사들은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말씀을 확증하거나 뒷받침할 목적으로 특정한 신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었다. 이런 일시적인 표적으로서의 은사에는 예언(계시적 예언), 기적, 신유, 방언, 방언 통역이 포함되었다.
표적으로서의 은사에는 유일무이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이란 사도들에게 사도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를 말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으로 기록된 이후에는 이러한 표적으로서의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고 그 결과 사라졌다.
무엇이 성경적인 기적의 은사였는가?
기적과 신유는 둘 다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하기 위해 주어진 비상한 표적으로서의 은사였다. 기적에는 신유가 포함될 수도 있고 신유 은사를 가진 이들에 의한 치유는 모두 기적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 두 은사는 서로 겹친다.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한 사람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세 가지 유형의 기적, 즉 치유(여기에는 궁극적인 치유인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기적도 포함된다), 귀신 쫓아내기(이 기적은 종종 치유를 가져왔다), 자연의 기적(빵과 물고기를 한없이 많아지게 하시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며 물 위로 걸으시는 등의 기적)을 행하셨다.
복음서들은 이 세 가지 범주에 각기 속하는 예수님의 기적들로 가득하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인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21:25). 이 모든 기적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이 사실임을 알려 주는 표적이었다(요2:11; 5:36; 20:30~3;행 2:32를 보라).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된 이후 사도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성경에 기록하는 사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는 기적을 행할 능력을 주셨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 외에 누군가가 자연의 기적을 행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내용은 없다. 사도들은 결코 양식을 창조하거나 바다를 잠잠하게 하거나 자기 스스로 물 위를 걷지 않았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셔서 베드로를 도와 주셨다. 성경에 베드로가 그런 체험을 다시 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앞에서 기적에 대해 다룰 때(5장) 지적한 바와 같이 기적을 행할 능력은 오로지 사도들 및 그들과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졌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하신 간단한 약속은 마태복음 10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성령이 임하고 교회 시대가 시작될 때도 사도들은 그 두 가지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계속해서 나타냈다. 사실 사도들은 그런 기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12:12).
따라서 기적의 능력은 그 범위가 제한되었고 사도적인 사역에만 국한되었다. 사도들에게 사명을 받은 어떤 이들은 사도들처럼 기적적인 은사로 사역했지만(빌립과 같은 경우 행 8:6~7) 그런 능력은 보통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막16:20;히 2:3~4). 예리한 신학자인 B. B. 워필드는 기적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확히 관찰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적 교회나 사도 시대 그 자체의 문제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히 사도들에 대한 확증이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자인 사도들에 대한 보증서의 일부였다. 따라서 그것의 기능은 명백히 사도적 교회에만 국한되었고 사도적 교회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기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dunamis)는 문자적으로 '능력'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약 115회 발견된다(이 단어의 동사형은 209회 발견된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능력 행함'(문자적으로는,'강력한 역사에 힘을 불어넣음)이라는 표현에서 기적의 은사를 뜻하는데 사용된 단어다.
뒤나믹스(dunamis)는 복음서 곳곳에서 "능력"으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로 '능력'의 은사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패턴을 제공하셨다. 예수님은 생애와 사역 전체에 걸쳐 사탄과 대결하셨고 자신의 뒤나미스, 즉 능력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눅 4:13~14, 36; 6:17~18).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 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는 모습을 발견한다(마태복음 8, 9, 12장 마가복음 5, 6, 7장. 누가복음 9장을 보라). 어떤 경우든지 예수님의 능력의 은사는 사탄의 왕국과 싸우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은사는 귀신을 쫓아 내는 능력이다. 사도들도 바로 그 일을 했고 빌립도그 일을 했다(행 8:6~7).
그러므로 사도들의 기적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일에만 국한되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는 일을 넘어 자연의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어떤 이들의 주장은 사도적 선례조차 없다. 더구나 그런 주장은 기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된 목적, 즉 새로운 성경의 계시를 확증하는 일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능력의 은사를 가지고 악한 영들을 쫓아 내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2장 10~11절, 에베소서 6장 11~18절, 디모데후서 2장 25~26절, 야고보서 4장 7절, 베드로전서 5장 7-9절의 가르침을 따르는 방법으로 악한 영들을 상대한다. 이 모든 구절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기적의 은사는 치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질병은 사탄 내지 귀신의 영향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질병-보편적인 문제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이래 질병은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 수천 년 동안 질병과 고통을 경감시킬 치료법에 대한 연구는 온 인류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다. 그러나 병과 죽음은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을 고통에 빠뜨렸고 궁극적으로는 정복했다. 에녹과 엘리야만이 죽음을 피했다(창5:24;왕하 2:11). 그리고 예수님만이 죽음을 정복하고 영광 가운데 부활하셨다. 이 세 사람과 정상적인 평균 수명 안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태어난 수많은 사람은 모두 다 병으로나 상처로나 그 밖의 딱함으로 인해 결국 죽음을 맞았다. 아무도-심지어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예외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내가 내게 주어진 은사 외에 단 하나의 영적인 은사를 더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신유의 은사를 구할 것이다. 내게 병을 고칠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해 보았다. 나는 병실에서 소중한 자녀가 백혈병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우는 부모 곁에 있어 보았다. 친한 친구가 수술이 불가능한 땀에 걸려 죽어 갈 때 그와 함께 기도한 적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병원응급실에서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일 때 곁에서 무력하게 지켜만 본 적도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은 십대들도 보았고 맥박은 뛰고 있는데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도 보았다. 친한 친구가 심장 이식 수술이 성공적이지 못해서 수술 후 얼마 못 가 눈을 감는 모습, 수술 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친구들의 모습도 보았다. 질병과 상처로 영구히 불구가 된 사람들을 나는 안다. 가슴 아프게도 기형아로 태어나는 아기들도 본다. 사람들이 절단 수술과 그 밖의 비극적인 상해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운 적도 있다. 이런 수많은 일을 겪으며 나는 말 한마디, 손길 한번, 명령 하나로 사람들을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신유의 은사가 있다면 얼마나 짜릿하고 보람이 있을지 생각해 보라! 아픈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으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서 전세계에서 질병이 창궐하는 지역에 보내는 것도 멋진 일일 것이다. 그들은 군중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암, 결핵, 에이즈, 그 밖에 수많은 질병을 고쳐 줄 것이다.
왜 은사주의 신유 치료자들은 그런 일을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왜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 그들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 섬기러 보내지 않을까? 그러면 그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에 있는 병원과 요양소부터 먼저 찾아가고 그 뒤에는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찾아갈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픈 사람들을 고칠 수 있는 기회는 무진장 널려 있다. 은사주의자들이 자주 주장하듯이 그런 기적이 불신자들에게 확신을 주려는 목적의 표적과 기사라면 그와 같은 사역이 그 목적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유 치료자들은 자신들의 천막이나 텔레비전 스튜디오 밖으로 좀처럼 나오는 법이 없다. 그들은 항상 통제된 환경에서만 준비된 방식대로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은사를 발휘하는 듯 보인다. 왜 우리는 신유 은사가 병원 복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소식을 좀처럼 들을 수 없을까? 왜 더 많은 신유 치료자가 인도나 방글라데시의 거리에서 자신들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수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나환자 수용소나 에이즈 환자 수용 시설에 가지 않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그런 은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유의 은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한 일시적인 표적으로서 은사였다. 그러한 확증이 이미 이루어진 뒤 신유의 은사는 사라졌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으시지만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한히 더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마10:28). 우리는 설령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마음대로 치유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도들도 예수님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었다. 사도들도 온갖 신유의 기적을 행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들은 감옥에 갇히고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까지 당했다. 구원은 육체적인 치유를 체험하거나본다고 해서 오는 것이 따니다. 구원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온다(롬10:17)
그러나 신유의 은사는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나 이교도들이나 똑같이 주장해 왔다.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신유의 능력을 주장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의 유골, 십자가의 파편, 또는 심지어 마리아의 젖병과 더불어 신유를 행하는 사람들을 자랑해 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의 가톨릭 성지인 루르드는 수많은 기적의 치유가 일어난 곳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메주고레에는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1500만 명의 사람이 다녀갔다. 그들은 1981년에 그 곳에 사는 여섯 명의 아이에게 나타났다는 동정녀 마리아의 유령에게서 기적이나 치유를 체험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동양의 영매 치유자들은 '무혈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장기 위로 손을 흔들며 주문을 외운다. 그러면 사람들이 낫는다고 한다.
주술사들과 무당들도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한다. 신비술사들은 병 고치는 마술에서 가짜 기적을 일으키는 데 흑마술을 사용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창시자 메리 베이커 에디는 텔레파시를 통해 사람들을 고쳤다고 주장했다. 사탄은 언제나 거짓 치유를 통해 사람들을 손아귀 안에 쥐고 흔들어 왔다.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강신술 영매 출신의 래피얼 개슨(Raphael Gasson)은 이렇게 말했다. '사탄에게 이 놀라운 능력의 은사를 받은 강신술사들이 요즘 너무너무 많이 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는 강신술 '치유 집회' 에서 일어나는 기적적인 치유를 분명히 목격했다고 증언할 수 있다.
기독교 계열, 특히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에서도 치유의 능력에 대한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 보라. 아마 밤낮에 관계 없이 아무 때나 원격 치유를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녹화된 프로그램이어도 상관 없다.
나는 목사님께 아내의 암을 기적으로 고침 받았다고 말한 어떤 남자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부인은 지금 어떠세요?"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요? 병 고친 지 얼마 만에요?" "일 년 만에요."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흔하다. 케네스 허긴은 대규모 신유 집회에서 청력 상실이 완전히 고쳐졌다는 어느 목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집회가 끝날 때쯤 그분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청기를 다시 꼈다."
은사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기적과 치유에 대해 "이보다 더할 수 있느냐?"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보여 준다. 어느 인기 있는 은사주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한 한 목사는 자신의 신유 은사가 이런 식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했다. "오전 예배 시간에 주님은 내가 어떤 환자들을 고칠 수 있는지 말해 주십니다. '암 환자 세 명, 허리 안좋은 사람 한 명, 두통 환자 두 명을 고칠 수 있다. ' 뭐 그런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발표하면서 저녁 예배 때 믿음을 가지고 나오면 누구든지 자기가 그 날밤에 고침 받을 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신유 은사 자세히 들여다보기
신유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방법과 행동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지만 그들의 예배에서 무언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넘어지고 '성령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다 나았다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일들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신유 치료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유 치료자들이 언급하는 대부분의 '증거'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들의 증거는 추측이거나 주관적인 견해다. 딱 한 사람, 복음주의자는 아니지만 의사인 월리엄 놀런은 신유 치료자들의 주장을 검증해 보았다. 놀런은 『신유: 기적을 찾는 의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특별히 자신이 자세히 연구한 캐스린 쿨먼과 관련해서 은사주의 신유 치료자들에 대한 항목을 포함시켰다. 놀런은 어느 신유 예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마침내 다 끝났다. 아직도 단상 위로 올라가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지만 다섯 시가 되자 찬송가 한곡과 마지막 축도와 더불어 쇼는 막을 내렸다. 쿨먼은 단상을 떠났고 청중도 청중석을 떠났다.
쿨먼과 대화를 나누러 돌아가기 전에 나는 몇 분 동안 휠체어에 앉은 환자들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절망적일 만큼 아픈 환자들은 모두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 신장의 암이 척추와 엉덩이에까지 퍼진 사람, 내 도움을 받아 청중석까지 돌아갔고, 고침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빌린 휠체어를 타고 단상에 올라가 청중에게 보여 주던 그 사람은 이제 다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의 '치유' 는 히스테리적인 것일 뿐이었지만 극도로 짧은 시간에 사라졌다.
나는 복도에 서서 가망 없는 환자들이 힘없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부모들이 지체가 부자유한 자녀를 엘리베이터에 태울 때 그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았다. 쿨먼도 나와 함께 그 광경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집회 중에 몇 번이나 자신의 '막중한 책임감'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고침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지' 에 대해 호소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정말 그들을 얼마나 자주 쳐다보았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활액낭염과 관절염에서 '나은' 사람들의 기쁨이 다리가 오그라든 사람, 저능아 자식을 둔 사람, 간암에 걸린 사람이 아무 변화 없이 자리를 뜰 때의 고통을 상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정말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전혀 모르고 충분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의학적인 치유의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우리 몸의 자기 치유 능력부터 따져 보자. 캐스린 쿨먼은 이렇게 자주 말한다. "내가 고치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나를 통해 고치시는 거죠." 나는 쿨먼이 이 말을 계속 반복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첫째, 환자가 차도가 없으면 캐스린 쿨먼의 잘못이 아니라 성령의 잘못이다. 둘째, 그녀는 치유에 대해서 도무지 아는게 없다. 그래서 일단 책임을 성령에게로 넘기고 나면 누군가 그녀의 치유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난 잘 모릅니다. 성령님이 다 하시는 일이니까."
놀런 박사는 계속해서 은사주의 신유 치료자뿐만 아니라 의사도 암시를 통해 종종 손을 얹거나 얹지 않거나 간에 환자에게 영향을 주고 질병의 증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치유는 기적이 아니라 환자 자신의 자율 신경계가 기능을 발휘하는 데서 비롯되는 결과다. 놀런은 또한 신유 치료자든 의사든 모든 치료자는 어느 정도 암시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놀런은 자신도 환자에게 약이나 주사를 처방할 때 꼭 그 환자에게 24시간에서 48시간 내에 몸 상태가 나아질 것이라고 말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 환자에게 불확실한 메시지를 던질 때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놀런이 지적하는 대로 특별히 몸의 기능적 장애와 관련된 문제일 경우 낙관적인 태도가 큰 힘을 발휘한다.
놀런 박사는 기능성 질환과 기질성 질환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기능성 질환이란 완벽하게 양호한 기관이 기능 이상을 일으키는 질환인 반면, 기질성 질환이란 기관 자체가 병이 들거나 장애가 있거나 물리적으로 손상되거나 심지어 기능이 상실되어 나타나는 질환이다. '전염병, 심장마비, 담석, 탈장, 디스크, 각종 암, 골절, 선천성 기형 , 열상'등은 모두 기질성 질환에 속한다. 신유 치료자들은 기질성 질환을 치료할 수 없다고 놀런은 주장한다.
어느 잡지에 실린 글에서 놀런은 쿨먼이 '심인성 질환' -마음과 관계된 질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팔이 아픈 것은 기능성 질환이고 팔이 오그라들었거나 아예 없는 것은 기질성 질환이며 팔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인성 질환이다. 놀런은 이렇게 말했다.
나처럼 온갖 문헌을 찾아보라. 그러면 신유 치료자가 담석이나 심장 질환이나 암이나 그 밖에 다른 심각한 기질성 질환을 고쳤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환자들의 소화 불량, 가슴 통증, 호흡 곤란이 일시적으로 해소된 예는 분명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런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병이 고쳐졌다는 증거로 해석하려는 신유 치료자나 신자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환자에 대한 기록을 계속 추적해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면 언제나 그 '치료'라는 것이 순전히 증상에만 관련이 있고 일시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인 질환은 그대로 남아 있다.
신유 치료자가 심각한 기질적 질환을 치료하려고 덤비면 환자에게 말로 표현 못할 고통과 불행을 안겨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때때로 신유 치료자들은 환자들이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효과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몇 년 전, 내가 설교 시간에 이 장에서 소개한 많은 내용을 전한 뒤에 한 젊은이가 내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은 그 메시지가 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모르실 겁니다. 저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심각한 두통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저를 위해 기도하면서 제 병이 다 나았다고 말했고 실제로 두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후로 두통이 다시 생겨서 저는 마치 제가 하나님의 치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는데 오늘 아침에 목사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자유로워졌어요. 이제 병원에 가 봐야겠습니다." 진작 의사에게 찾아갔으면 두통의 기질적 원인을 찾아 내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신유 치료자들을 믿어온 많은 사람은 틀림없이 놀런 박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항의할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니까 아마도 기적을 안 믿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의 연구는 얼마나 객관적이었는가? 놀런 박사는 쿨먼 본인이 '고쳐졌다. '고 간주한 암환자들의 명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그녀가 보낸 명단에 있는 총 여덟 명의 암 환자 모두에게 협조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내 연구에 협조하겠다고 밝힌 유일한 환자는 쿨먼에게서 전립선암을 고침 받았다고 주장한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상황에 대한 완벽한 보고서를 보내 왔다. 전립선암은 호르몬요법에 매우 민감할 때가 많다. 암이 퍼지면 방사선 치료에도 극도로 민감할 경우가 많다. 이 환자는 수술, 방사선, 호르몬 등 광범위한 치료를 이미 받았다. 또 캐스린 쿨먼에게도 '치료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치료-이 경우는 치료가 아니라 일시적인 증세 완화일지도 모른다-된 것이 쿨먼 덕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반인이건 의사건 그의 보고서를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어떤 종류의 치료가 실제로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는지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쿨먼이 이
환사의 상황에 의존해서 성령이 자신을 통해 암을 '치료'했음을 입증해야 한다면 그녀는 매우 절망적인 긍지에 빠질 것이다.
놀런 박사는 캐스린 쿨먼이 치유했다는 82명의 사례에 대해 그녀가 제공한 이름을 이용하여 추적 연구를 했다. 그런데 82명 중에서 23명만이 답변을 보내고 설문에 응했다. 연구 끝에 놀런이 내린 결론은 이른바 신유 사례 가운데 단 한 건도 진짜로 인정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캐스린 쿨먼의 의학적 소양 부족은 중대한 문제다. 나는 그녀가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나 의식적으로 부정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내 생각에 그녀는 자신의 집회에 와서 치유를 요구하는 수천명의 아픈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기질성 질환에서 고침 받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다. 또한 나는 그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본다(내 연구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노골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어서 유감이지만) 무지가 문제다. 쿨먼은 심인성 질환과 기질성 질환의 차이를 알진 못한다. 그녀는 최면술 기법을 사용하지만 최면술과 암시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자율 신경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언가 안다고 해도 분명히 자신의 지식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쿨먼은 자신의 사역이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기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위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부정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 왔다.
더 최근에는 '놀라운 랜디'로 유명한 전문적인 마술사인 제임스 랜디가 신유 치료자들의 주장을 검토하는 책 한 권을 썼다. 랜디는 1986년에 "투나잇 쇼"라는 프로그램에서 텔레비전 전도자 피터 포포프의 속임수를 폭로한 사람이다. (포포프는 하나님으로부터 청중들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얻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의 구체적인 설명은 믿기 어려울 만큼 정확했다. 그러나 그는 글지 귓속에 감춰진 수신 장치를 통해 아내에게서 받은 정보를 그대로 따라서 말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그의 아내는 집회가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과 격의 없이 나눈 대화를 통해 수집된 정보를 질문 카드와 커닝 페이퍼를 보며 줄줄 읽어 주었다.
랜디는 기독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하고 공정하게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랜디는 수십 명의 신유치료자에게 진짜 신유의 '직접적이고 검증 가능한 증거'를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책에서 최소한 딱 한 번이라도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도록 단 한 건의 기적 치유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단 한사람의 신유 치료자도 그에게 자연적인 건강 회복이나 심신증적인 개선이나 명백한 속임수로는 설명할 수없는 의학적으로 확인된 신유를 단 한 건도 제시하지 못했다. 랜디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원리적으로 말해서 오늘날의 신유는 이전에도 그랬지만 단순히 '마술'에 불과하다. 신유 치료자들은 마술과의 어떤 관련성도 완강히 부인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그러한 정의의 모든 필요 조건을 충족시킨다. 그 안에는 마술의 모든 요소가 다 있고 그 내용은 마술과 똑같다.
물론 많은 신유 치료자는 자신들이 하는 주장에 대해 대충 얼버무린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신유의 능력이 있다는 자신의 주장조차 부정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고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고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쇼맨십과 허장성세와 교묘한 속임수는 그들의 말을 뒤집는다. 이들이 병을 고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왜 희망에 부푼 사람들이 그들의 집회에 몰려올까? 왜 그들은 자신들의 집회에서 고침 받았다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할까?
우리가 들어본 적 있는 신유의 사례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중에 어느 것이라도 진짜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산산이 부서진 뼈들이 고쳐진 사례는 어디 있는가? 신유 치료자가 자동차 사고를 당한 사람의 찢어진 얼굴이나 부서진 두개골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어 보았는가? 말기 환자가 나은 일은 어디 있는가?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의 팔다리가 다시 생겼다거나 사지가 마비됐던 사람이 지금은 정상적으로 생활한다거나 하는 사례는 어디 있는가? 반면에 우리가 대개 보는 것은 상상 속에서 고쳐진 가상의 병인 듯하다. 오늘날의 자칭 신유 치료자라는 이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자기가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기적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
그들 중에 많은 이는 솔직히 말해서 사기를 치고 있고 그들이 보여 주는 신유는 분명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수천 명의 똑똑한 사람이 계속해서 그들의 집회에 참석한다. 왜 그럴까? 병이 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병은 사람들을 보통 때는 하지 않을 광적이고 극단적인 일도 서슴없이 하도록 몰고 간다. 평소에는 조리 있고 명석하고 균형 잡힌 사람들이 비이성적으로 변한다. 사탄은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사탄은 이렇게 말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욥 2:4).
가장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경우는 치료가 불가능할 만큼 기질적으로 아픈 사람들의 경우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는 전혀 아프지 않다. 그들은 심신증이나 일종의 사소한 기능성 질환을 갖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의심이 너무 많아서 자기가 기적이라고 믿는 것을 봄으로써 믿음을 키우기 위해 집회마다 쫓아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다. 어느 누구의 믿음도 실제로 강건해지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질병도 실제로 고쳐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을 실망시켰거나 자신이 하나님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하며 위안도 받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진다.
은사주의자나 비은사주의자나 신유에 대해 들은 말 때문에 많은 혼란과 죄책감과 마음고생을 경험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나 믿음 부족이나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 때문에 고침 받지 못했다고 느끼면 질병의 고통은 가중되기만 할 뿐이다. 사람들은 신유가 가능한데도 자신들이 고침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거나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판단한다. 이렇게 신유 치료자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황폐함이 남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병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초자연적 치유에 대한 모든 주장을 그 가운데 일부가 거짓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에 의한 극적이고 기적적이며 직접적인 개입은 극히 드물며 치유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소위 신유 은사가 있다는 이들에게는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참된 치유는 기도의 결과로 찾아올 수도 있고 대부분의 경우 단순한 자연적 치유과정을 포함한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회복 작용을 촉진하시고 병자를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건강하게 회복시키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의학적 예상을 뒤집으셔서 병자가 정상적으로는 몸이 쇠약해지는 질병에서 회복되게 하신다. 그와 같은 치유는 기도왁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의 결과로 찾아오며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 치유 사역을 위한 특별한 기름부음, 자기가 한 일로 '주장' 할 수 있는 치유, 기타 전형적인 신유기법은 사도 시대 이후에는 아무런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병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병을 고치신다. 그러나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의 시대에 일어난 치유와 오늘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직접 우편으로나 해외의 부흥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치유' 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어떻게 고치셨는가?
오늘날 주장되고 있는 치유 은사와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비교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수님은 사도적 은사의 본을 보이셨고 수많은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 시대에 세상은 질병으로 가득헌다. 의학 수준은 조잡했고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불치병이 훨씬 많았다. 역병이 도시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자신의 신성을 보여 주시기 위해 질병을 고치셨다. 어떻게 고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지닌 여섯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나 접촉 한 번으로 병을 고치셨다.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하인을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 하인은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6~7절).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그의 집에 가서 하인을 고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수 있다며 예수님을 만류했다(8절).
예수님은 특별히 이 백부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로마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에 놀라셨다. 그래서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러자 그 즉시 하인이 나았다(13절).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시기 전에도(요한복음 5장) 무리 중에 병든 사람들을 거의 하루 종일 고치셨다.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았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수친 명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 명을 고치시든지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을 고치셨다. 연출도 없었고 특별한 환경도 없었다.
예수님은 한 번의 접촉으로도 병을 고치셨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장25~34절에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졌는데도 병이 나은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예수님은 즉시 고치셨다.
백부장의 하인은 "그 즉시" 나았다(마8:13).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곧' 나았다"(막5:29).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명을 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순간적으로 고치셨다(눅17:14). 그리고 또 다른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눅5:13).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던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3.5:9) 심지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도 눈을 씻으러 가야 하긴 했지만-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기적을 두 단계에 걸쳐 행하셨지만-즉시 고침을 받았다(요 9:1~7). 이 치유의 기적도 앞의 예들에 못지 않게 순간적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점점 나아졌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점진적인' 치유를 행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즉시 병을 고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기적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자연적 치유 과정에 불과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완전히 고치셨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회당을 떠나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다 베드로의 장모가 거기서 고열로 앓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 가까이에 서서 열병을 꾸짖으셨고 그녀는 그 즉시 나았다(39절). 실제로 그녀는 일어나 그들의 수종을 들었다. 회복기 따위는 없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뜨거운 물에 꿀을 좀 타서 마시라든가 몇 주 푹 안정을 취하라고 조언하시지 않았다. 증세에 아무 변화가 없는데도 '믿음으로 고쳐졌다고 주장'하도록 자극하시지도 않았다. 그녀는 즉시 나았고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치유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렇게 즉시 완벽하게 고치셨다.
넷째,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오늘날의 신유 치료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실망한 사람들이 다시 휠체어를 타고 긴 행렬을 이루며 집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비행기나 방송 스케줄 때문에 신유 집회나 프로그램을 정해진 시간에 끝내시지 않았다. 누가복음 4장 4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강조는저자). 누가복음 9장 11절도 그와 비슷한 예를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 예수님은 기질성 질환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요통, 가슴 두근거림, 두통, 기타 눈에 안보이는 가벼운 질환을 고치며 팔레스타인 지방이곳저곳을 다니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저는 다리, 오그라든 손, 앞 못보는 눈, 중풍 등 가장 명백한 종류의 기질성 질환을 고치셨다. 전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기적적인 치유였다.
여섯째,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누가복음 7장 11~16절은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한 도시에 계실 때 한 과부가 외아들을 장사하러 나가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신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을 만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그 죽은 청년은 벌떡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5장 22~24, 35~43절에 나오는 회당장의 딸도 다시 살리셨다.
반면 오늘날 신유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이나 장례 행렬이나 묘지 앞에서 시간 낭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한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사람들이 가끔씩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은 성경의 예들과는 전혀 다르다. 병실에서 맥박계가 멈춘 환자가 되살아나는 것과 죽은 사람이 장사된 지 나흘 뒤에 무덤에서 걸어 나오거나(요한복음 11장을 보라) 관 밖으로 나오는(누가복음 7장을 보라.)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수님의 기적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백한 부활이다. 오늘날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들은 풍문으로 별다른 증거도 없이 그런 주장을 한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기적의 역사를 하찮은 일로 만들어 버리는 죄를 짓고 있다. 왜 지금껏 텔레비전에서 행해진 기적들은 오로지 아무런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는 그런 기적밖에 없는가?
어쨌든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기적들을 거의 다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대개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행하셨다는 점에 주목하라.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는 확실한 은사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시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귀신과 질병을 쫓아내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시는 방법이었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준다. 또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한다고 말했다(요 20:30~31)
사도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는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신유 은사의 기준을 세우셨다. 오늘날의 신유 치료자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수준의 능력으로 사역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신유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 모두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셨다(눅9:1~2). 후에 예수님은 이 은사를 70명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시고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도록 파송하셨다(눅10:1-9). 신약에서 이들 외에 병 고칠 능력을 받은 다른 사람도 있는가? 그렇다. 사도들과 가까운 몇몇 동역자, 즉 바나바(행15:12), 빌립(8:7), 스데반(6:8)도 이 은사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사가 교회에서 닥치는 대로 사용되는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신유 은사는 그리스도, 열두 사도(및 바울),70인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과 가까운 동역자들과만 관련이 있는 은사다.
사도행전 3장은 신유 은사가 사도들의 말씀 선포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어떤 불구자가 그들에게 구걸을 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l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 3:6).
그 순간 그 불구자는 자기 발로 일어서서 걸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곧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오랜 세월동안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이 불구자를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잡아 모인 무리에게 그들이 본 광경에 놀라지 말라고 말했다. 그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 전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말과 치유의 기적이 청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평생 메시아를 열심히 기다려 온 유대인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베드로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 보라. "너희들이 몇 달 전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너희들의 메시아다. 그분을 믿어라."
우리는 이 메시지가 1세기의 유대인에게 얼마나 충격적인고 불쾌하게 느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유대인에게는 메시아가 일반 죄수들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한마디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유대인은 메시아가 능력과 영광 가운데 오셔서 팔레스타인을 손아귀에 쥔 가증스런 로마인들의 속박을 일소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베드로가 이 불구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을 듣는 청중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사람이동요하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사도행전 4장 4절에 따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
교회는 오순절에 태어났다. 새로운 시대가 왔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말씀 선포에 도움이 될 기적의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치유의 기적이 지닌 여섯 가지 특징이 사도들의 신유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들은 말 할 마디, 손길 한 번으로 병을 고쳤다. 사도행전 9장32~35절에서 베드로는 중풍으로 병상에 누운 지 8년이나 된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쳤다. 베드로는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런데 그 즉시 애니아의 병이 나았다(34절).
사도행전 28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안수로 병을 고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멜리데 섬의 유력자인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영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열병과 이질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바울은 환 자를 보러 가서 그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여 병을 고쳤다(8절).
사도들은 병을 즉시 고쳤다.
성전 문 앞에 있던 앉은뱅이 거지는 즉시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행 3:2~8), 어떤 치료나 추가적인 재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거지는 평생을 불구로 지내다가 한순간에 나았다.
사도들은 병을 완전히 고쳤다.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불구자의 이야기에서, 또한 9장에 나오는 애니아의 부친이 고침 받은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9장 34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라는 말은 이 사실을 가장 통찰력 있게 보여 준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신유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모든 신유도 완벽헌다. 점점 낫는 일도 없었고 증상이 재발한다거나 차도가 느리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없었다.
사도들은 어느 누구라도 고칠 수 있었다.
사도행전 5장 12~16절은 사도들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으며 사람들이 사도들을 높이 칭송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병자에게 덮일까 바랐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도 모여 병든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다(행5:16).
사도행전 28장 9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고치자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예외가 없었다.
사도들은 기질성 질환을 고쳤다.
사도들은 기능성 질환, 징후적인 질환, 심신상관적 질환 따위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성전 문에 앉아 있던 사람은 40세쯤 된, 날 때부터 불구인 사람이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는 전염에 의한 기질성 질환인 이질을 앓았다.
끝으로, 사도들은 즉시 사람을 살렸다.
사도행전 9장 36~42절은 베드로가 도르가(다비다)를 어떻게 되살렸는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42절에 주목해 보라.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여기서도 우리는 기적이 복음의 메시지에 신뢰감과 영향력을 더해 주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20장 9~12절에서는 유두고라는 청년이 높은 데서 떨어져 죽자 바울이 그를 되살려 냈다. 반면 오늘날에는 온갖 주장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유 사역에서 이런 여섯 가지 특징을 보여 주지 못한다.
마지막 요점을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 따르면 기적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 은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신유 치료자들은 마음대로 병을 고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릴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신유 은사가 없다. 그들은 이런 말로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 이처럼 반복되는 실패의 책임은 하나님-또는 치유를 구하는 사람-에게 떠넘겨진다.
신유의 은사는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 병을 고치신다.
신유 은사는 교회 초기에 사도적 공동체가 복음 메시지의 권위를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어진 기적적인 표적으로서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이후 이러한 표적들은 사라졌다. 기적적인 표적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오직 사람들이게 복음 메시지의 유효성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강력한 표적으로서만 신유은사를 사용했다.
빌립보서 2장 25~27절에서 바울은 병세가 매우 위독한 자신의 좋은 친구 에바브로디도를 언급한다. 바울은 이전에 신유 은사를 보은 주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간단히 고치지 않았는가? 아마도 신유 은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바울이 자신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신유 은사를 악용하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됐든 에바브로디도를 고치는 일은 신유 은사의 목적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신유 은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표적이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고 말한다. 왜 바울은 자기와 절친한 그리스도인 친구 한 사람을 병든 채로 남겨 두어야 했을까? 왜 그를 고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신유 은사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딤전 5:23;고후 12:7을 보라.)
신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기적적인 표적으로서의 은사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완벽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영구적인 방법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는,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만일 그 말이 맞는다면 우선 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이 들도록 허락하시는가?
신자들도 죄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 이 세상에서 왜 우리만 그런 고통을 면제받는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건강하다면, 만일 완벽한 건강이 속죄의 보장된 유익이라면, 수백만의 사람이 구원을 받으러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동기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질병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은사주의의 신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에 호소함으로써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추론에 대해 답변할 때가 많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나는 은사주의자들에게서 그런 식의 천편 일률적인 말들을 끊임없이 듣는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부인의 아들은 암에 걸렸는데‥‥‥‥‥내 친구의 어머니는 관절염이 너무 심해서 거동도 못했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은사 치료자라도 기질성 질환을 포함해서 진짜로 입증 가능한 순간적 치유의 사례를 보여 주지 못하니까요." "어떤 은사 치료자도 치료받기 위해 오는 모든 사람을 다 고치지 못하고 수백 명의 환자가 집회에 올 때 모습 그대로 아프거나 불구인 채로 집에 돌아가니까요.' "어떤 은사 치료자라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지는 못하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이외의 어떤 증거도 필요로 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니까요." "은사주의의 신유는 속죄와 구원에 대한 미심쩍은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까요." "은사주의에 대해 글을 쓰거나 가르치는 이들은 사람들이 병들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은사 치료자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들이 신유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는 비약하거나 근거가 없거나 너무 과장된 경우가 많으니까요." "믿음 있는 사람들은 병원에도 많이 있는데 은사주의자들이 병을 고치러 병원에 간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은사주의자들의 신유는 대부분의 경우 의심할 여지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은사주의자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병들고 죽으니까요," "신유를 둘러싸고 온갖 혼란과 모순이 벌어지니까요.' "나도 한가질문합시다.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건 분명히 성경적인 신유 은사가 아닙니다!"
치유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신유의 은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원하시는 때에 고치신다. 내 인간적인 지혜로는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싶은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여느 목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서 가장 비극적이고, 설명이 불가능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고통의 사례들을 목격해 왔다. 사랑하는 사람들 회복을 위해 그들의 가족과 함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결국 응답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은사주의 목회자들도-만일 그들이 정직하다면-똑같은 경험을 해 본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은사주의 설교자들과 치료자들과 지도자들은 고침 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해서 전형적으로 어떤 설명을 하는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식의 설명은 친절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병에 걸리는가?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들은 병에 걸리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간과해선 안 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병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출애굽기 4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 말씀은 아주 단순하고 직접적인 말씀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생각은 좀 불쾌해 보인다. 사랑의 하나님이 누군가가 고통당하기를 원하실까? 왜 하나님은 사람을 귀머거리나 벙어리나 맹인으로 만들려 하실까?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는 우리의 유한한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음을 거듭해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불구자와 병약자를 만드셨다. 장애를 가진 아기가 매일 태어나고 있고 많은 아이가 선천적인 기형 상태로 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지속되는 병을 앓고 있다. 우리의 인간적인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어떤 병은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누가복음 13장11~13절은 예수님이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시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나님은 사탄이 나름의 이유로 누군가를 병들게 하도록 허용하실 수도 있다. 그 고전적인 성경적 실례가 바로 욥이다(욥기 1장을 보라).
어떤 병은 죄에 대한 징계다.
민수기 12장에서 우리는 미리암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문둥병에 걸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뒤로 그녀는 회개해서 병이 낫는다. 신명기 28장 20~2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죄를 지으면 역병으로 그들을 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열왕기하 5장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탐욕 때문에 문둥병에 걸린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
우리는 병이 들 때 하나님께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삶의 모든 영역을 점검해 봐야 한다.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아픈 사람에게 조언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삶 속의 죄에 대해 묻거나 비판하는 일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를 점검하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성경적 원리를 악용해서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죄를 비판하기가 너무 쉽다(참조 요 9:1~3).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병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런 경우만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병은 반드시 개인적인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병 고침을 받지 못 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매정하고 잔인하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이 범한 잘못을 피할 필요가 있다(참조. 욥42:7~8).
하나님은 믿음있는 모든 사람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는가?
하나님은 모든 신자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분명히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사실에 못지 않게 하나님이 병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도 긍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병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병을 앓는 동안에도 하나님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으로 인해 병을 고치신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의 원어는 야훼 로페카인데 이는 '너희를 고치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병들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으로 인해 병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21:22; 요 14:13~14; 16:24;요일 5:14). 이는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침받기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인해 병을 고치신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질병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도처에 다니셨다. 예수님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입증하실 수도 있었지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마 8:17) 고통과 고난을 덜어 주는 자비로운 방편을 선택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앞에서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대해 논의하면서 지적한 대로(4장을 보라) 이 시대에 모든 병에 대한 치유가 속죄의 일부로 보장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대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의 치유 방식을 확인시켜 주고 우리에게 현재 이 세상의 질병과 연약함에서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해방을 보증한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에서는 어떤 질병이나 죽음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병원에 가야 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분명히 병을 고치신다고 가르치지만 더불어 그리스도인도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이사야서 38장은 히스기야 왕이 병으로 죽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왕이 심히 통곡하며 하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주목해 보라.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사38:21). 하나님이 치유를 허락하셨는데 왜 찜질약이 필요했을까? 하나님은 여기서 한 가지 원리를 제시하셨다. 즉, 아프면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일과 의사에게 찾아가는 일을 둘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와 같은 생각을 확증해 주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물론 예수님은 여기서 죄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은 의학적인 치료가 하나님의 뜻과 양립한다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우리는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이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기적으로 고친 뒤에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으러 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8절에서 바울이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치유한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치유를 뜻하는 일반적인 말인 반면, 9절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치유한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는 의학적인 치료를 뜻하는 말이며 영어 단어 therapeuric( '치료법의' )은 이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아마도 바울은 기적으로 병을 고쳤고 의사였던 바울의 동료 누가(골 4:14)는 의학적으로 병을 고쳤을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선교팀인가!
원리는 분명하다. 우리는 아플 때 기도해야 하고 유능한 의사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며 전심으로 완벽한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한다. 결국 역경은 이 땅에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약1:2~4; 벧전 5:10) 영원한 천국에서는 우레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롬8:18;벧전 1:6-7).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생존해 있는 택함 받은 이들을 제외하면) 궁극적으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질병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주권적인 뜻과 의향에 따라 병을 고치신다. 우리에게 그 밖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