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3,20-35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예수님은 7 절의 호숫가에서 카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1,29)으로 다시 가셨다는 뜻일 것이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병을 고쳐 주기를 간청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니 예수님은 식사하실 시간도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뒤의 31 절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다. 넓은 뜻으로 같은 고향 사람들을 뜻할 수 있고, 글자 그대로 친척들을 뜻할 수도 있다.
‘소문’은 예수님의 여러 활동과 기적에 관한 소문을 가리킨다.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나섰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말하는 것을’ 이다. 즉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쳤다’는 것은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는 뜻으로 결국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불안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행위를 미친 사람의 행위로 인식하여 그런 소문을 낸 것이고, 친척들은 그 소문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뜻에 대한 당신의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친척과 가족들과 긴장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 마리아조차 아들 예수님이 특별한 소명이 있음을 들어왔지만(루까 1,26-38)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정신적 상태를 의심했고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미쳤다’는 말은 정신병에 걸렸다는 뜻과 어떤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뜻과 어떤 신비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는 말이다. 친척들이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이 구절은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을 세밀히 살펴 예수님의 범법 사실을 알아보도록 보내진 사람들일 것이다. 여기서 ‘내려온’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처형한 적대적인 도시였다.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율법학자들은 사악한 무리들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온 유대 지방에 퍼져 중앙에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라는 말은 ‘예수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뜻이다. 당시 사람들은 마귀 두목의 이름으로 ‘사탄’이나 ‘베엘제불’을 사용했던 것 같다. 베엘제불은 열왕기 하권 1 장 2 절의 ‘이크론의 신 바알즈붑’에서 온 표현일 것이다.
베엘제불은 가나안 신의 이름인 셈족어 ‘바알제불’의 음역이고, ‘집주인’, ‘파리들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모두 이교 제의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집주인’이란 종교의식의 주인을, ‘파리들의 주인’이란 귀신의 격하된 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베엘제불’을 귀신들의 왕 곧 ‘사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바리사이인들의 비난은 곧 예수님이 사탄이라고 모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비난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렸다는 것입니다. ‘마귀 우두머리’는 어둠의 세력 가운데 최강자, 또는 마귀들의 통치자란 의미로서 결국 사탄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마태 4,1-11 참조). 한편 베엘제불이 귀신, 마귀들의 세계를 통치한다는 사실은 정통 유대교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선, 악을 포함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안에 있고 하느님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욥 1,16-12 참조).
그런데 간혹 구약 외경이나 쿰란 공동체의 기록을 보면 선, 악의 세계가 구분된다는 사상이 발견된다. 특히 신구약 중간 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이방문화와 접하면서 이원론적 사고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이웃나라에서 유입된 유사 치료적 마술이 있었는데, 이 마술에서는 악령 축출자가 자기에게 속한 악령의 힘을 이용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말씀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이적을 행하심으로 마치 유사 치료적 마술 치료자인 것처럼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하는 자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었다(요한 7,20-21;8,48;10,20).
어쨌든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율법학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하느님의 인도로써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오히려 성령의 능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베엘제불 그리고 사탄과 결탁한 자로 매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써 알아보지 못한 잘못도 저질렀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거룩하신 성심을 보고도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이 침해당할까 봐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의 활동의 동기와 목적, 능력의 근원까지를 고의적으로 모독함으로써 구원의 유일한 성령의 활동을 부인한 셈이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영원히 스스로 거부한 셈이다(마태 9,1-34;15,14). |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신다. 여기서 ‘비유’란 예수님의 교육법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으로서 심오한 진리 옆에 평범하고 쉽게 체험 가능한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해에 도움을 주게 하는 것이다.
비유는 우리가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진리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가정’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신다. 사탄이 예수님을 통해 다른 사탄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자살 행위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은 명백히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악령 퇴치나 치유의 이적은 하느님 나라 건설과 연결이 되어 있다. 마귀 무리들은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온전히 장악하지는 못한다. 마귀는 여러 가지 파괴와 전쟁, 고통과 질병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또한 우리의 삶과 세상의 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손길로 모든 악을 제거해 주실 것이다. |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예수님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두 가지 예를 통해서 설명하신다. 한 나라 안에서 국민들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구절의 ‘나라’는 ‘왕국’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왕국이 튼튼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왕과 신하와 백성인 일치가 되어야 함은 자명한 것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믿지 못하고 파괴적인 성향을 띠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에 적용되기도 하지만, 사탄의 나라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감 있게 적용된다. 그것은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집안의 분란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집’이란 어떤 건축물을 뜻하지 않고 혈연적인 가족 구성원들의 집합체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나라’라는 집합체보다 더 결속력과 동질성 면에서 뛰어나다. 이 두 번째 비유를 통해서 어떤 공동체이건 분쟁이 있으면 스스로 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4 절과 25 절의 결론에 해당된다. 요약하면 사탄의 왕국도 역시 분쟁을 하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사탄의 왕국은 스스로의 내분으로 인해 멸망할 조짐은 없었고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왕국이 지속될 것이다(요 12,30-31; 2 데살 2,8). 바로 그런 이유로 예수님의 귀신 축출은 사탄의 내분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오직 사탄의 적대자요 심판자로서의 권세 있는 활동에 해당하는 것이다. |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여기서 ‘힘센 자’는 막강한 힘을 소유한 약탈자나 도적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자로서 본문에서는 사탄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힘센 자의 재물은 사탄이 소유하고 관할하는 그 밑의 마귀들 내지는 사탄에게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다.
그리고 ‘묶어 놓은 뒤에야’는 사탄과 그 휘하의 마귀들을 축출하는 일과 사탄의 왕국을 황폐화시키는 가리킬 것이다. 이 힘센 자를 묶어 놓는 장면은 유대 문헌들에 자주 등장한다(요한묵시 20,2; 외경 에녹서 10,4-5; 레위의 유훈 18,12). 본 구절에서 암시된 힘센 자를 결박할 분은 사탄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당산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
예수님은 사탄을 결박시키고 그 사탄에게 결박당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병을 고쳐 주시고, 악령을 퇴치하시는 일을 통해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은 결코 사탄과 협력 관계가 아니라는 것과 당신을 현실적으로 사탄의 세력을 파괴해 가고 계시며, 당신은 사탄보다 더 강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을 묶어 놓고 사탄의 집에서 재물을 터는 분이시다. 여기서 사탄에게서 빼앗은 재물은 예수님께서 질병이나 마귀에게서 해방시킨 사람들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권능이 있기 때문에 사탄보다 더 힘이 센 분이기 때문에 사탄을 섬길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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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말씀의 진실성을 엄숙하게 강조하고 선언하기 시작하신다. ‘모든 죄’는 문자적으로 ‘모든 죄스런 행위’를 뜻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뜻한다. 즉 예수님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개개인의 죄와 말에 대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또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을 지니신 구원자 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모욕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뜻이 이 구절의 의미이다. |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은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독하고 거부하는 사람이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원을 계획하셨으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사업을 실현하시고 성령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이끄신다. 따라서 사람은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 이심을 신앙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이것을 부인하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르고 부인할 수 있을지라도 성령의 활동을 부인하는 것은 고의적인 일이고 또 회개를 거부하는 일이며(이사야 63,10; 사도행전 5,3; 에페 4,30; 1 데살 5,19)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구원,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을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사실은 그 자신이 스스로 버림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라는 말은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라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일시적인 죄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악의 행위로 발생하는 고질적이고 뿌리깊은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용서를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심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 스스로가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하느님의 용서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의 은총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가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죄로 인해 마음의 가책을 받는 자들은 결코 그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 |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어떤 범죄라 할지라도 회개가 있고 하느님께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와 선행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또 최후의 심판 때 모든 악과 마귀들의 활동이 소멸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성령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이적을 모독하는 것이 곧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런 사람들은 악의 편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고 악에 머물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불행한 사람들을 악의 세력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 주셨다(마태 12,22; 루까 11,14).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성령과 함께 당신의 능력을 행하셨지만, 율법학자들은 그것을 사탄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그 사람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마음의 자세에 의해 판가름이 난다. 즉 예수님의 진리를 따라가는 것과 성령의 인도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 깊은 적의와 반복적이고 의지적으로 반항을 함으로써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선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는 데도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당신이 편견과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며,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이와 같은 죄를 범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전부터 우리를 용서하셨고, 언제든지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용서도 거부하는 것이다. 즉 거저 주시는 용서를 스스로 받지 못하는 것이다. |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때’는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이 논쟁을 하고 있을 때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형제들’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다. 마태오복음 13 장 55 절을 보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는 형제들만 언급하고 있는데, 뒤의 32 절을 보면 누이들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친형제나 사촌 형제나 모두 그냥 형제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을 사촌 형제로 해석한다.
복음서나 다른 어떤 기록에도 예수님의 친형제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암시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 예수님이 외 아드님이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종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인하고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예수님 외에 다른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고,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는 고백은 성모 마리아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동정녀가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시기에 동정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낳으신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언제나 처녀’이시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다.
‘밖에 서서’라는 말은 집 밖에 서 있다는 뜻도 있고, 모여 있는 사람들의 밖에 서 있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지, 들어가기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만나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을 부른다. |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었다. 마태오복음의 기록에 따르면(마태 12, 47) ‘사람들’ 대신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장면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바깥 사정을 전해 듣고 군중을 헤집고 들어가 예수님께 어머니 마리아가 오셨다는 것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가족들이 당신을 왜 찾는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즉 예수님은 영적인 가족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집이나 가족까지 버리는 복음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말씀하셨다(10,28-30). |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는 구절은 ‘그들이 왜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란 말이냐?’라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이 일을 계기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즉 인간관계가 아니라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가 즉,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 등이 이 지상에서의 인간적 관계성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를 낳았다고 부모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또한 인간 공동체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사람으로 자라고 성장하고 또 사회 안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질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헌신하고 공헌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어떤 부모들은 낳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고 부모의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들이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신앙의 중요성과 신앙이 그 아이의 인격에 미치는 거룩한 영향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도 부모이기에 무조건 자신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의 선한 모습과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 그리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가족 구성원이고 더 성장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며, 세속적인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선하심을 전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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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이 구절의 뜻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면서 복음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시며 친밀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아마도 예수님의 주위에는 12 제자들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지칭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특별한 위치를 뜻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어떤 기준을 떠나 먼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로 인정받은 것이다.
즉 그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예수님과 깊은 영적 가족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심해서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 누이, 어머니 즉 예수님의 참 가족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의 보편성을 일깨워 준다. 그 영적 가족의 가장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가족이라는 육체적 인연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다. 다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을 초월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가족이나 친척들이 예수님의 일을 간섭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위해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고, 거기에 당신 자신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가족에 우리가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가족처럼 사랑을 주고받게 되고, 영적인 관계로 이어지게 된다. 이 영적인 가정이 육적인 가정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 더 큰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십계명은 인간적 가정을 꾸리지 않는 성직자, 수도자에게도 해당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한쪽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두 가지는 차원이 다른 것일 뿐, 대립하거나 갈등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사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또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 종교가 다른 가정이 상당히 많이 있다. 종교의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고지식하게 신앙을 고집하다가 가정을 파탄 시키는 것을 예수님은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상대방 배우자가 교회를 모독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며, 우리의 믿음을 거짓된 믿음으로 우리가 믿는 것을 거짓으로 또는 허황된 이야기로 폄하하여 신앙인을 대한다면 문제는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지혜롭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의 가정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에 머물 수 있도록 본인 스스로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이 감화를 받고, 예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가정과 믿음을 모두 지키는 지혜, 융통성, 노력이 필요하다.
또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 열성에 차이가 있는 경우, 예를 들면 아내가 너무 성당 일에만 몰두해서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을 남편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은 우선 남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가정이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함께 가야 한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 걸음이 느린 사람에게 맞춰주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