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론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세계의 모습에 관해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에 따르면 시간·공간의 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식은 조금 전의 인식과 다른데, 우리는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식을 참된 인식 혹은 학적 인식이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인식이란 불변적인 인식일 것이다. 여기에 반해 파르메니데스는 세계를 불변하는 실재로 보고 있으며 이런 세계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포착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영향하에서 플라톤은 우리의 참된 인식 혹은 학적 인식은 불변하는 존재 즉 실재에 대한 인식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실재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는 포착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개념에 대한 그의 고찰과 쉽게 연결된다.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모든 논의는 궁극적으로는 일반개념에 의거해 있다. 예컨대 ‘사랑은 좋은 것이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많은 종류의 사랑과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논의하는 ‘사랑’과 ‘좋음’은 일반개념이다. 이 명제에 대해서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비록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사랑과 좋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들의 의견이 불일치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논쟁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개념에 대한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이때 도덕적 개념이라든가 기하학의 개념들이 기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좋음에 대해 정의를 내렸을 때 그 정의가 올바르냐 그르냐 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은 절대적 좋음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좋음에 따라서 평가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야만 논쟁자체가 가능하다. 또한 유크리드 기하학에서 다루고 있는 절대적 직선의 개념은 연필로 그려진 직선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이나 직선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많은 것들은 변화한다. 예컨대 가을이 되면서 나뭇잎은 단풍으로 물들게 된다. 그러나 변화는 푸른 잎으로부터 붉은 잎으로의 변화인 것이지 푸름 그 자체가 붉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때 푸름 그 자체나 붉은 그 자체, 그리고 우리가 내린 정의의 올바름과 그름의 평가기준으로 삼아졌던 일반개념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초시간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초시간적인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포착될 것인가? 구체적인 사물들과 그것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감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부정확하며 때로는 잘못되기조차 한다. 여기에 반해서 일반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감각적 능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인 능력에 의거한다. 예컨대 수학자들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 직각과 같다’고 하는 것을 증명할 때, 그들은 우리들의 감각에 의해서 보여진 구체적인 삼각형의 측량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다루고 있는 삼각형은 구체적인 삼각형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상으로서의 삼각형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삼각형을 다룰 때 감각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거하는 것이다. 기하학자는 위치는 갖지만 크기를 갖지 않는 점, 길이는 갖되 넓이는 갖지 않는 선, 길이와 넓이는 갖되 부피를 갖지 않는 표면과 같은 대상의 증명에 관심을 가지는데, 이런 대상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는 만나질 수가 없다. 예컨대 기하학자는 이런 경우에 혹은 저런 경우에 존재하는 원이나 삼각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크기나 모양의 차이와는 상관없는 원이나 삼각형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론적 측면에서만 접근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일반개념이 불변하고 초시간적이며 지성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감각에 의해서 마주치게 되는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실재에다 형상(eidos)혹은 이데아(idea)라는 용어를 부여한다. 만약 이러한 이데아들이 감각적 사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감각에 의해서 만나게 되는 세계 즉 감각계 혹은 현상계 혹은 가시계는 일상적인 개별물들 예컨대 나무, 산, 강, 사람, 별 등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이데아계 혹은 초감각계는 개념대상 즉 이데아들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이다. 전자는 감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세계인 반면에 후자는 우리의 지성에 의해서 인식되는 세계이다. 이때 당연히 나타나는 문제는 이 양세계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감각계의 개별물들 간의 관계를 모방과 분유(分有)에 의해서 설명한다. 이데아는 본성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물질적 사물들은 이데아에 비해 열등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물과 이데아간에는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즉 개별물들은 이데아를 모방하고 있다. 그런데 개별물들은 정신적인 요소 뿐 아니라 물질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한에서 그 모방은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유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이데아가 개별물 속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이데아와 개별물 간의 관계는 사물과 그것의 그림자에 비유되고 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개별물들이 이데아에 비해 열등하다는 사실로부터 플라톤은 자연의 변화를 목적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현상적 세계의 존재자들 즉 개별물들은 불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해지기 위해서 완전한 존재자인 이데아를 보다 닮으려고 노력한다. 즉 개별물들은 이데아를 목표로 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즉 현상의 세계는 목적인 이데아를 향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에 의하면 현상적 존재자들은 이데아와는 영원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감각계의 존재는 그자체 감각적인 것이고 감각적인 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변화하는 세계와 파르메니데스적인 변화하지 않는 세계를 함께 논의하고 양자의 견해를 종합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데아들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물을 수 있다. 이데아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이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들이 일반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 상관하는 개념대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일반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개념대상 즉 이데아에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상세계란 전적으로 이데아의 세계의 질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말’이라는 일반개념을 고찰해 보자. 이때 말이라는 개념은 동물이라는 개념의 하위개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동물의 형상은 말의 형상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형상은 다른 형상을 분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개념들 간에 위계질서가 있듯이 형상들 상호 간에도 위계질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러한 위계질서에서 가장 우두머리에 있는 것이 바로 선(善)의 이데아이며, 바로 이러한 선의 이데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목적과 방향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