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대속죄일의 행사
중요성과 준비
나팔절 축제와 함께 시작되는 가을 절기들의 절정은 티스리 월(Tishri) 제10일의 대속죄일이었다. 이 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 제도의 요지요 최대의 경축일이었다. 또한, 민족과 개인의 생사가 걸린 운명의 날이기도 하였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레위기 23장 27~32절). 이토록 엄숙하고 중대한 날의 예배 행사는 그만큼 복잡하고 또한 미묘한 데가 있었다. 신약 시대와 랍비들의 시대에 행해진 대속죄일의 행사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제7월[티스리 월] 초하루에 전국적으로 울려 퍼진 나팔 소리는 대속죄일이 열흘 후로 다가왔음을 온 백성에게 상기시켰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그 달 3일 곧 대속죄일이 되기 7 일 전에, 그 해의 대제사장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부터 성전 경내의 자문실(Counsellors' Chamber)로 거처를 옮겨서 한 주일 동안 원로 제사장들의 안내와 조력을 받으면서 대속죄일의 행사를 위한 준비를 한다. 하루 전날인 9일 아침에는 원로들이 대제사장을 성전 동문에 세우고, 당일에 잡을 제물들을 그 앞으로 지나가게 함으로써 그 날의 봉사에 익숙하게 한다. 그리고, 9일의 저녁부터 대제사장은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도록 성경을 읽고 풀이하면서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첫 번째 지성소 출입
당일의 아침이 되면, 대제사장은 먼저 손발을 씻고 옷을 벗고 욕조에 내려가서 몸을 잠그는 목욕을 한 다음, 평소에 입는 대제사장 의상인 황금 예복을 입는다. 그러고는, 다시 손발을 씻고 매일 드리는 아침 번제를 드린다. 이 때에 그는 제물을 절개하기만 하고 나머지는 다른 제사장들이 처리했으며, 피를 뿌리는 일과 분향은 대제사장이 친히 하였다.
아침 번제가 끝난 다음, 대제사장은 손발을 씻고 옷을 벗고 욕조에 내려가서 몸을 물에 잠그고 올라와서, 이번에는 그 날만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 둔 백색 예복 곧 “거룩한 세마포 속옷… 세마포 고의… 세마포 띠… 새마포 관”(레위기 16장 4절)을 착용하는데, 이것을 “거룩한 옷(상동) 또는 ”성의“(32절)라 한다. 이것을 입고는 다시 손발을 씻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이 날을 위해 준비된 수송아지(레위기 16장 4, 6절)에게로 간다. 이 수송아지는 대제사장 자신과 그의 권속을 위한 속죄 제물(6절)로서 드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성전의 현관과 번제단 사이에서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얼굴은 성전쪽 곧 서쪽으로 돌린 채 서 있고, 대제사장은 두 손을 그 위에 얹고, 자기와 권속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문에는 “여호와”라는 성호가 세 번 일컬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복되도다, 그 이름이여! 그의 나라의 영광은 영원무궁하리로다 !”라고 화창하면서 엎드려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어야 한다.
기도가 끝나면, 대제사장은 “완전한 자”(the Perfect)와 “부가의 장”(the Chief of the Father's House)을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대동하고 번제단의 동쪽으로 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와서 그 곳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염소(레위기 16장 8절) 앞에 선다. [“완전한 자”는 대제사장에 버금가는 이로서 성전 봉사의 최고 책임자이고, “부가의 장”은 제사장들의 24 반차(역대상 24장 1~19절) 중 각 반차의 세분된 그룹인 부가의 우두머리이다.] 두 염소 앞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다. 그 한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다른 제비에는 “아사셀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레위기 16장 8절). 이 두 개의 제비가 들어있는 상자는 때때로 금으로 만든 항아리로 대체되었는데, 이 항아리를 “칼피”(Calpi)라고 일컬었다. 대제사장은 이 “칼피”안에 두 손을 넣어 제비를 뽑아,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가 뽑힌 염소는 그 목에다 주홍색 줄을 매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가 뽑힌 염소는 그 머리[뿔]에 주홍색 줄을 맨다.
이렇게 한 후에, 대제사장은 두 번째로 수송아지에게 와서 다시 두 손을 그 위에 얹고 고백 기도를 드린다. 이번에는 자기와 권속뿐만 아니라 모든 아론의 자손 즉 제사장단을 위한 죄의 고백과 함께 용서를 구한다. 회중은 전과 같이 화답하며 얼굴을 땅에 댄다. 그는 이제 그 수송아지를 잡고 피를 그릇에 받아서, 그것이 응고되지 않도록 흔들고 있을 사람에게 건네 준다. 그리고, 그는 향로를 들고 번제단 위로 올라가서 불씨를 취하고, 두 웅큼의 향을 향그릇에 담아 지성소로 들어간다(레위기 16장 12, 13절). 그의 평생에 처음으로 들어가는 두렵고도 떨리는 걸음이다. 지성소에 놓여 있는 “기초석”(Shetiyah=법궤가 없어진 다음에 대신 갖다 놓은 돌) 위에 향로를 놓고 향을 수북하게 얹은 다음, 향연이 지성소를 채우는 것을 보면서 휘장 밖 성소로 나와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이 때 드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다 :
“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시여 ! 당신께서 기뻐하시오면, 오늘과 이 해 동안에는 우리가 포로로 잡혀 가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하오나, 오늘이나 이 해에 우리가 혹 포로로 잡히는 일이 발생한다면, 율법이 계발된 그곳으 로 가게 하옵소서.
“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시여 ! 당신께서 기뻐하시오면, 오늘과 이 해 동안에는 궁핍이 우리에게 이르지 않게 하옵소서. 하오나, 궁핍이 우리에게 와야 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박애적인 행위의 너그러움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게 하옵소 서.
“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시여 ! 당신께서 기뻐하시오면, 이 해는 저렴, 충만, 교역과 상업의 해, 곧 풍부한 비와 햇빛과 이슬의 해가 되게 하옵시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서로 도움을 요구하지 않을 해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여행을 떠나려는 자들의 기도를 듣지 마옵소서.[ : 여행자들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할 것이므로]. 그리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관하여, 그들을 대항하여 아무도 자신을 높이며 나서지 않게 하옵소서.
“오, 주 우리 하나님,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시여 ! 당신께서 기뻐하시오면, 샤론의 주민들의 집들이 그들의 무덤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 샤론의 골자기의 지형 때문에 홍수나 사태의 위험이 늘 있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향을 사르고 성소에서 위와 같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 회중은 밖에서 묵도를 하고 있다(누가복음 1장 10절). 기도가 끝난 다음 그는 즉시로 성전 뜰로 나와, 긴장과 조바심으로 기다리고 있는 회중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안심시킨다. 이것이 당일의 첫 번째 지성소 출입이다.
두번째 지성소 출입
첫번째 지성소 출입을 마친 대제사장은 곧 수송아지의 피를 흔들고 있는 사람에게로 와서 그 피 그릇을 받아서 재차 지성소로 들어간다 . 이번에는 이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기 위함이다. 지성소의 법궤(또는 기초석) 앞에 선 대제사장은 한 번은 위로, 일곱 번은 아래로, 숫자를 세면서 피를 뿌린다(레위기 16장 14절).
그러고는, 휘장 밖으로 나와서 성소에 마련된 스탠드에다 피 그릇을 올려 놓는다. 이것이 이 날의 두번째 지성소 출입이다.
세번째 지성소 출입
두 번째 지성소 출입에서 나오는 대제사장에게 사람들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가져 온다. 그는 그것을 잡아서 그 피를 그릇에 받아서는 지성소로 들어가서 전과 같은 요령으로 피를 여덟 번[위로 한 번, 아래로 일곱 번] 뿌린다(레위기 16장 15절). 그러고는, 휘장 밖에 있는 스탠드에 그 피 그릇을 얹어 놓고, 조금 전에 갖다 놓은 수송아지 피 그릇을 들어서 이번에는 휘장에다 동일한 방법으로 여덟 번 뿌리고, 이어서 염소의 피를 또 여덟 번 뿌린다. 그러고 나서, 그는 수송아지의 피를 염소의 피에 부어서 섞고, 그것을 다시 수송아지의 피 그릇으로 부어서 고루 섞이게 한 다음, 그 피를 분향단에 가져 가서 그 위에 있는 네 뿔에 한 번씩 바르고, 그 향로의 위에 일곱 번 뿌린다. 남은 피는 바깥 번제단의 서쪽과 남쪽 바닥에 쏟아서 배수로를 통하여 기드론 강으로 흘러들게 한다. 이것이 이 날의 세 번째 지성소 출입이다.
이렇게 한 다음, 대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전과 비슷한 방법으로 온 이스라엘을 위한 고백 기도를 드린 후, 미리 지정된 사람에 의하여 그 염소를 광야의 무인지경으로 보낸다(레위기 16장 10, 20~22절). 거기서, 그 염소는 줄로써 바위에 연결된 채 언덕받이를 굴러 내리면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당한다.
네번째 지성소 출입
이러는 동안,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율법 두루마리를 읽는다. 주로 레위기 16장과 23장 26~32절을 읽는다. 그 후에, 그는 축복 기도[8 축복]를 드린다. 이 축복 기도는 (1)율법을 위하여, (2)성전 봉사를 위하여, (3)감사를 위하여, (4)죄의 용서를 위하여, (5)성전을 위하여, (6)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7)제사장을 위하여, (8)기타 일반적인 사항을 위하여 드려지는 기도이다. 뜰에서는 다른 대제사장들이 번제를 드리고, 진 바깥에서는 제물의 나머지를 태운다. 대제사장은 다시 손발을 씻고, 백색 예복을 벗고 목욕을 한 다음, 황금 예복을 입는다. 다시 손발을 씻은 그는 매일 드리는 저녁 번제를 드린다. 그러고 나서, 그는 또 손발을 씻고 목욕하고, 다시 백색 예복[성의]으로 갈아 입고 손발을 씻은 후, 지성소로 향한다. 종일 타고 있는 향로와 향 그릇을 도로 가져 나오기 위함이다. 이것이 이 날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지성소 출입이다.
향로와 향 그릇을 가지고 나온 대제사장은 다시 손발을 씻고 목욕하고 다시 황금 예복으로 갈아 입고는 저녁 분향을 하고 등대를 간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속죄일의 예배 행사를 필한 대제사장은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는 일 주일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거리에는 등불 행렬과 축제가 있고,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친지와 친구들이 함께 모여 속죄와 구원을 경축하는 성대한 잔치가 베풀어진다. 이 잔치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대속죄일의 의미
죄의 용서와 처리
대속죄일에 행한 모든 제사 절차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취급하시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예시 또는 표상이다.
먼저 이 날에 드린 수송아지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권속을 위한 속죄제”(레위기 16장 6, 11절 참고)로 드린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다음에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음을 뜻한다. 이어서 드려진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8, 15절)였다. 그런데, 이것은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16절) 속죄하는 제사였다.
따라서, 대속죄일의 양대 제사는 두 가지의 뚜렷한 정결 사업, 곧 제사장과 백성 등 사람을 정결케 하는 일과, 지성소와 회막 등 사물을 정결케 하는 일을 그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른바, 부정은 사람과 사물로부터 공히 제거되어야만 했다. 둘 다 정결 또는 성결케 되어야 했고(레위기 16장 16, 19, 30절), 둘 다 속죄되어야 했다(11, 16, 18, 30, 33, 34절). 백성을 위한 정결 예식은 지나간 한 해 동안 뉘우치고 용서받은 죄와 허물들을 그 날에 모두 결산하고 청산하는 재확인의 예식이었고, 성소를 위한 정결 예식은 매일의 봉사를 통하여 회막과 단으로 옯겨져 있는 백성의 모든 죄와 부정을 궁극적으로 처분하는 예식이었다. 연중 매일 드린 각종 제사는 죄인에게서 죄를 용서하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그 죄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부터 성소로 옯겨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평상시의 제사들은 죄의 전가를 통한 죄의 용서를 이루는 것이었다. 반면에, 대속죄일의 제사는 성소로부터 죄를 제거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날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의 제사는, 성소로 이전된 죄를 정결케 함으로써 죄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대속죄일 아침에 황소[송아지]의 피를 지성소 안의 속죄소 위에다 뿌린 것은 대제사장과 온 백성의 죄가 지성소로 전가됨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정결케 되고 성소는 더럽혀졌다. 그러므로, 송아지의 피는 죄인의 죄를 나르는 역할을 함으로써 죄를 함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다음에 드려진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염소의 피는 성소로 전가된 모든 죄를 다시 다른 곳으로 옯겨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없애 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염소의 피는 죄를 씻어 주고 처분하는 효험을 가진 것을 상징하였다. 물론, 두 짐승의 피 자체는 모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장 19절)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능에 있어서 하나는 운반, 다른 하나는 정결의 의미를 각각 담당하였다.
앞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대속죄일의 제사는 연중 행사의 절정으로서 사실상 개인과 민족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연례적으로 거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구속 역사의 마지막 절정이 어떻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유월절로부터 시작하여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그리고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로 이어지는 연례 절기와 축제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개인적으로 및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구속사의 단계들이다. 이중에서, 대속죄일은 지상 역사의 마지막 국면을 표상하는 것이다.
성소의 정결과 다니엘 8장 14절
성소의 정결에 관한 예언과 표상,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적 실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불가불 다니엘 8장 14절로 갈 수밖에 없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
이 예언은 선지자 다니엘이 바벨론에 있는 동안에 본 이상들 가운데 주어진 것으로서, 열국의 흥망 끝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즉 죄가 씻겨지고 처분되는 역사적 과정이 있을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나서 그 뜻을 알고자 애쓰고 있는 중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에게 와서 예언을 해석해 준다(다니엘 8장 15~27절). 그러나, 그 중요한 예언 기간인 “2,300 주야”의 시발점에 관해서는 아직 일러주지 않는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다니엘은 문제의 핵심이 되는 “2,300 주야”의 시발점에 관한 구체적인 예언을 듣게 된다(9장 20~27절). 이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25~27절).
우리가 성경의 예언을 해석할 때에는 하루[1 일]를 1 년으로 계산해야 하는 것이 성경상 원칙이다(민수기 14장 34절 ; 에스겔 4장 6절 참고). 따라서, “2,300 주야” 즉 2,300 일은 실제적으로 2,300 년을 뜻하고, 그것의 기산점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다니엘 9장 25절) 이므로, 이 때를 찾아내면 2,300 년 기간의 끝을 아는 것은 문제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간 후에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샤 제국이 시작된 것이 BC 539년인데, 그 이듬해인 538년에 대왕 고레스(Cyrus)는 조서를 내려 유다 백성은 돌아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고 하였다(에스라 1장 1~4절 ; 역대하 36장 22, 23절). 이 때, 약 5만 명의 유다인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사마리아인들의 반대와 방해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에스라 2~5장). 그로부터 약 20 년이 지난 뒤인 519년에 두번째 조서가 다리오 1세(Darius 1 Hystaspes)에 의하여 내려져서 성전 재건이 이뤄지게 되었다(6장 1~15절). 그러나, 이 두 번에 걸친 조서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조서이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조서는 아니었다.
두번째 조서가 내린 지 62 년 후인 457년에 또 하나의 조서 곧 세번째 조서가 내려졌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는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1 Longimanus)의 조서였다(에스라 7장 11~26절). 그러므로, “2,300 주야”의 가산점은 BC 457년이다. 이 해로부터 2,300 년을 계산하면 그 기간의 끝이 AD 1844년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 해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입게 되었다. 여기서, “성소”라 함은 지상에 있는 건물이 아니라 천상적인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844년 [더욱 구체적으로는 그 해의 대속죄일인 10월 22일]에 인간의 구속 역사의 마지막 국면인 역사적 대속죄일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이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늘에서는 죄를 취급하고 처리하는 사업 즉 “성소 정결”의 실체적 역사가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대속죄일의 행사가 그랬듯이, 사람들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조사요 엄숙한 심판이다. 그래서, 이것을 흔히 “조사 심판”(Investigative Judgment) 또는 “재림 전 심판”(Pre-Advent Judgment)이라고 일컫는다.
“2,300 주야”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 기간들 중에 가장 길면서 동시에 맨 마지막 국면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그 기간의 끝인 1844년은 대단히 중요한 연대가 아닐 수 없다. 1844년은 역사적으로 대속죄일의 행사가 시작된 해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역사가 최후의 장면으로 진입한 해인 것이다. 이 최후의 장면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마태복음 24장 36절 참고).
다니엘 9장의 “칠십 이레”[70 주일]에 관한 예언은 그 시발점이 BC 457년이고 그 끝은 490년 후인 AD 34년이다.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다니엘 9장 25절) 곧 69 주일 되는 해인 AD 27년에는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가 등장하리라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예언의 시계는 이토록 정확하여 틀림이 없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사단
염소 두 마리
대속죄일의 행사와 그 의미가 중대한 만큼 그 날에 드려진 제물도 중요했다. 이 날을 위하여 준비된 제물들 중에 수염소 두 마리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1 년을 주기로 하는 제사 제도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두 마리의 염소는 외모, 크기, 가격에 있어서 같은 것이어야 했고, 가능하면 같은 날에 같은 곳에서 사 오게 했다. “아론은…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위기 16장 6~10절).
그 두 마리의 염소 중에 “여호와를 위하여”라고 적힌 제비가 뽑힌 쪽의 염소는, 특별한 속죄물로서 성소에 전가되어 있는 모든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갔다. 이것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히브리서 9장 12절)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귀중한 표상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 마리의 염소 곧 “아사셀을 위하여”라는 제비가 뽑힌 염소는 과연 무엇이며 무엇을 표상하는 것인가?
“아사셀을 위하여”
“아사셀”이란 용어는 성경에 오직 4 번만 사용되었다(레위기 16장 8, 10, 26절). 성경 밖의 문헌으로 BC 2 세기에 기록된 위경인 “에녹서”에는 “아사셀”이 악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의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아사셀”의 어원과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과 주장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사셀”의 어원을 히브리어 “아잘”-“제거하다, 분리하다, 떠나가다”-로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학자들과 유대인들은 “아사셀”이 하나의 인격적이면서 초인간적인 악한 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의미는 “제거될 또는 제거할 자, 떠나갈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의 경우, “여호와”가 인격적인 존재이시므로, “아사셀”도 그에 대응하는 인격적인 존재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아사셀”이 “여호와”와 상반 또는 대립되는 위치에 있음을 고려하면, “아사셀”은 다름아닌 사단(Satan)을 가리키는 것임을 쉬 알게 된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는 “아사셀”이 상징하는바 실체인 사단이 져야 할 책임과 형벌, 그리고 그가 당할 운명을 표상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아사셀”을 영어 성경에서 흔히 “scapegoat"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escapegoat"(도망하는 염소)에서 첫 글자[e]를 약해 버린 것이다. 이 단어에서 이미 “goat"(염소)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마치 한 염소가 다른 종류의 염소(scapegoat)를 위하여 제비 뽑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이것은 흠정역(KJV)의 번역자들이 "아사셀"의 어원을 "에즈"와 "아잘"로 보고, 그것에 맞춰서 "도망가는 염소"라는 의미의 단어를 ”scapegoat"로 만든 데서 유래된 듯하다. 그러나, “에즈”는 수염소를 가리키는 경우가 전혀 없고 오직 암염소를 가리킬 때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사셀”의 어원으로서는 부접합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scapegoat"라는 단어는 비단 신학적인 용어로만 아니라 일상적인 단어로서 꽤 자주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단어는 성경에 의도된 원래의 뜻과는 매우 다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scapegoat"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대신해서 비난을 받거나 벌을 당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항간에 쓰이고 있다. 이것을 우리말로 흔히 “속죄양”이라고 번역하여 영어에서와 같은 의미로 통용하고 있는 것을 이따금씩 본다. 이러한 용례는 그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 원래 의도된 뜻과는 상거가 먼 것이다. 특정한 단어에 대하여 왜곡된 개념을 가진 이들은 그 단어를 성경에서 대할 때 성경의 가르침 또는 신학적 문제를 곡해하기가 십상이다. 폐일언하고, “scapegoat”라는 영어는 “아사셀”을 매우 서툴게 번역한 단어이고, 그로 인한 오해와 오도는 심각할 만큼 크다. 왜냐하면,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가 죽는 것은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보응으로 죽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죄의 창시자와 사주자
“아사셀”의 어원과 그것이 사용된 문맥에 비춰볼 때, 그것이 사단을 표상하는 것은 명백하다. 한 학자는 대속죄일의 두 염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된 진술을 제공하고 있다 :
“피를 흘린 첫 염소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를 가리켰다. 피 를 흘리지 않은 둘째 염소는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아무런 몫을 담당하지 않았 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잇따라 오는 죄의 최후적 및 총체적 멸절을 가리켰다. 두 염소를 통하여 배우는 바는 죄를 위한 제물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것은 , 사단을 상징한 둘째 염소의 전적인 격리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의 추방과 죄의 멸절이다”(Edward Heppenstall, Our High Priest,79).
다른 한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 “속죄죄가 희생 제물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켰고, 대제사장이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죄의 창시자인 사단을 표상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무인지경으로 보내져서 다시는 이스라엘의 회중에게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와같이, 사단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앞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이며, 그는 죄와 죄인이 최후의 멸망을 당할 때 그 존재가 아예 없어질 것이다”(The Great Controversy, 422).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속죄에 담당하는 몫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고 무인지경으로 간 죄는 죄된 인간의 구원이나 속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대속죄일의 행사에서 죄인의 정결과 화목케 하는 일이 다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뚜렷하게 나타나는 점에서도 분명히 이해된다(레위기 16장 22절). 사단은 모든 죄의 창시자(originator)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유혹한 장본인 곧 죄인들이 지은 모든 죄의 사주자(instigator)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엄청난 죄과에 대하여 형벌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속죄의 죽음이 아닌 형벌의 죽음
사단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볼 때 마땅한 일이다. 성경은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시며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시편 94편 23절) ;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7편 16절)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남을 범죄하도록 사주하고 유혹한 일에 대하여도 사단이 받을 형벌이 적지 않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잠언 28장 10절).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죄를 지은 사람들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단의 죽음은 온전히 형벌로서의 죽음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에스겔 18장 20절). 거기에서 대속, 화목, 속량 등의 의미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죄의 삯”으로서의 “사망”(로마서 6장 23절)이 있을 따름이다.
의인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므로, 그들은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죄 자체에 대한 책임은 죄의 장본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악인들의 죄에도 사단은 근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사단의 사망의 이유요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당하는 죽음이 상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