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의 끝은 어디인가?
예배당의 피아노 소리가 멈추던 날
청년 시절, 교회 예배당의 피아노 건반 위로 흐르던 선율과 함께 찾아왔던 그 자매와의 만남은 참 따뜻하고 설레는 기억이었습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조금씩 깊어지던 어느 날, 자매는 조심스럽게 학벌을 물어왔지요.
그저 평범한 대화일 뿐이라 생각하며 졸업한 대학을 이야기했을 때,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리던 자매의 얼굴빛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몇 번을 되물은 끝에 돌아온 대답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혔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SKY 출신이시라, 내 배우자도 무조건 SKY 출신이어야 한대."
집안의 기준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우리가 쌓아온 짧은 감정은 너무나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받은 채, 저는 매주 주일마다 교회에서 그 자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잔인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하지만 저를 가장 깊은 절망과 분노로 밀어 넣은 것은 얼마 뒤에 들려온 소문이었습니다. 그 자매가 교회 안에서, 그것도 저의 절친한 친구와 교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그 친구의 학벌이 결코 저보다 낫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를 버린 이유가 고작 '학벌'이라더니, 왜 나보다 더 나을 것 없는 내 친구인 걸까?"
그 순간, 실연의 아픔은 걷잡을 수 없는 모욕감과 배신감으로 뒤바끄였습니다. 기준의 모순 앞에서 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만 같았고, 도대체 왜 나의 연애는 이토록 비참하고 끝이 안 좋은지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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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이별 뒤에 숨겨진 인간의 심리
왜 수많은 인연의 끝은 이토록 잔인하고 아름답지 못한 걸까요? 그것은 이별의 순간에 인간의 가장 취약한 심리적 방어기제와 감정의 비대칭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 '기준'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책임 전가
자매가 내세운 '부모님의 SKY 기준'은 어쩌면 이별의 진짜 이유를 감추거나,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기제였을지 모릅니다. 이별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부모님의 완고한 기준' 탓으로 돌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모순된 핑계는 남겨진 사람에게 '학벌 때문에 거절당했다'는 깊은 수치심과 깨진 기대에 대한 분노만을 남겨주었습니다.
• 비교가 가져온 자존심의 붕괴
실연보다 더 아픈 것은 '비교'입니다. 나보다 학벌이 좋지 않은 친구를 선택한 자매의 모습은, 제가 믿었던 이별의 이유를 거짓으로 만들며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차라리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 만났다면 덜 억울했을 텐데"라는 본전 심리와 거절의 상처가 뒤엉키면서, 슬픔은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변질된 것입니다.
• 피할 수 없는 공간이 주는 감정의 과부하
매주 예배당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상대와 새로운 연인의 모습을 강제로 마주해야 했던 환경은, 이별을 받아들이는 속도를 강제로 늦추는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감정이 정리되기도 전에 계속해서 자극을 받으니, 마음의 상처는 아물 틈 없이 매번 새롭게 터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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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끝, 그 너머에 찾아올 고백
누구나 한번쯤 실연을 겪습니다. 그 당시에는 세상이 다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또다시 거절당할까 두려워 새로운 만남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픔 뒤에 내 자신의 성숙과 성찰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모진 겨울을 견뎌낸 나무가 더 깊은 뿌리를 내리듯, 상처를 통과한 영혼은 비로소 타인을 더 깊이 품을 수 있는 단단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고백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때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으로 인해 내가 이렇게 변했다고, 내 내면의 변화가 있었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이죠. 실연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더 가치 있는 사랑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아픈 준비기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