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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사도바울 일행이 아테네를 떠나서 그 다음 사역지인 선교지인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아테네는 학문과 철학, 예술의 중심지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의 부가 축적이 됐고 사람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발칸 반도 남쪽에 있는 이 도시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는 그래서 번영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물질적 번영은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이게 축복의 어두운 면이에요. 어려울 때 힘들 때는 우리가 성실하게 열심히 살지만 모든 것을 갖췄을 때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 도시는 심각한 방탕에 빠졌고 그 결과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풍요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도 하지만 우리의 삶과 사회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종교적으로도 타락했습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곳을 가보면 지금도 옛날 이 시대에 구도시가 있고 또 신도시가 있는데 구도시는 사람이 살지 않고 흔적만 있습니다. 아주 넓은 벌판에 옛날 도시가 흔적이 있고 거기서 바라보면 마치 일본의 후지산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산이 하나가 우뚝 솟아 있어요.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멀리에서도 보일 만큼 어떤 신전이 존재합니다. 그 신전은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었어요. 아프로디테 비너스라고도 하고 또 이 서방 세계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붙여지는 고대 근동 사람들이 섬기던 여신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섬기는 그 신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이 땅에 풍요와 다산을 주는 그게 축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역할을 하는 신들이었습니다.
아프로디테신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스라엘 땅의 바알과 아세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렇게 그 신들을 애지중지한 것은 그들이 물과 태양과 비를 내려줘서 농사를 짓고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이 땅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섬겼어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수천 명의 신녀들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느냐 그 제사를 드리러 그 산꼭대기까지 올라온 그 지역의 남성들, 그리고 거기가 항구였거든요. 그래서 전 세계로부터 오는 그 항구를 통과하기 위해서 하룻밤 머무는 사람들과 를 맞이해서 창녀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근데 이게 종교적 의미가 있었어요. 바알과 아세라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신들 또는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런 성적 문란한 관계를 하고 나면 우리가 자녀가 태어나듯이 우리에게 그런 다산과 풍요라는 복이 주어진다 이렇게 믿었어요. 그래서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매우 음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돈도 있고 화려한 삶이 보장되면서 거기다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서신을 읽어보면 특히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 문제를 사도바울이 아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얼마나 문란했는지 예수를 믿은 사람들조차도 그걸 벗어나지 못해서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곳은 한마디로 복음이 아니고는 도대체가 희망이 없는 도시, 그냥 이대로 가면 이렇게 살다가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도시, 그것도 모르고 이 사람들은 세상을 즐기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복음이 전해진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불같이 부응하기 시작했어요. 역설적입니다. 사도바울은 나중에 로마 교회를 향해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그랬어요. 죄를 많이 지으라는 게 아니고 죄를 확실하게 진 사람은 확실히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빨리 마음을 열고 용서의 주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적당히 적당히 잘 사는 사람은 예수 믿기가 어려워요. 적당히 율법을 지키고 적당히 도덕적으로 살고 적당히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요. 왜 나는 용서받을 일이 없다. 내가 남에게 잘못한 것도 없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구원 용서 그런 게 필요하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죄를 짓다 보니까 사람이니까 자기들도 양심이 있었겠죠. 이렇게 살면 안 될 텐데 이게 인간이 할 짓이 아닌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복음이 전해지자 그들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이 교회가 아주 놀랍게 부응합니다. 거기다가 막 성령의 역사까지 일어나니까 가장 은사가 교회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렇게 세워졌고 이 교회는 초대교회에 아주 중요한 교회가 됐어요. 사도바울이 여러 번 이곳을 방문을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세 번이나 써요. 그게 고린도전서 후서 그리고 그 사이에 또 썼던 것이 분실됐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 그리고 이곳에 머물면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카 전후서와 갈라디아서를 써요.
그러니까 이 고린도 교회는 초대교회의 아주 중요한 교회였어요. 그러면서 문제도 많은 교회였어요. 그러니까 교회의 문제를 다루려면 고린도전서를 다루면 돼요. 교회에 있는 문제가 다 고린도서에 있는 거예요. 그런 교회가 오늘 사도바울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번 주와 그리고 다음에 한 번 더 고린도교회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만난 2명의 동역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도착하자 두 명의 동역자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1절 2절에 보면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아달리아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해 아달리아는 이탈리아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탈리아 로마로부터 온 거예요. 여기서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납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예요. 바울이 아테네 사역을 하면서 아주 지쳤어요. 사역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들고 여러 가지 환경이 힘들어도 복음을 전할 때 딱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변화되면 힘을 얻어요.
그런데 이 아테네에서는 이게 무슨 절벽에다 얘기하는 것 같고 받아들이지는 않고 논쟁이 붙은 거예요. 논쟁하고 말씨름 하다 보니까 그러면 여러분 얼마나 피곤합니까? 말씨름하고 나면 에너지가 다 빨리는 거예요. 그래서 말 너무 많이 하고 논쟁을 많이 하면요. 에너지가 다 빠져요. 바울이 그런 경험을 했어요. 아주 어떻게 보면 끔찍한 결혼을 경험을 한 거예요. 그리고 고린도에 왔을 때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는데 야 이대로 계속 사역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도 만만치 않은 지역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예요. 아굴라와 브리슬라 길라라는 사람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그곳으로 이 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살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동역자 마음에 맞고 뜻이 맞는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여정에 그런 사람들을 준비해 놓으셨어요. 우리가 알아봐야 되고 또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라고 했어요. 본도 본도가 어디냐 하면 아나톨리아 반도 지금의 트르키의 저 북쪽 지방입니다. 거기에 와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우리 같은 사람들이죠.
디아스포라 코리안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로마까지 진출을 한 거예요? 이탈리아까지 진출을 한 거예요. 디아스포라도 여러 지역에 살다가 여러 각자 다른 지역에서 인생을 마감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티르키의 땅에 살다가 이탈리아 당시 로마가 최고의 제국이었으니까 그 본토까지 가서 살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야말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디아스프라잖아요. 이 시대에 로마가 어디겠어요? 최고의 핵심 도시 그것도 모르고 살아요. 파리입니다. 파리 동의하시면 아멘하고 하라고 할 수 없고 파리가 그런 도시예요. 뉴욕 이렇게 나오려고 한 사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가 좋은 여기가 중요한 데예요. 전 역사와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라고 그중에서도 팔고 하나님이 여기로 우리를 보내셨어요. 세상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몇십 년 만에 있는 올림픽을 우리가 있는 바로 여기서 벌어지잖아요.
여기서 그렇죠 하여튼 브리스 길라는 그런 사람이 변방에서 살다가 끝날 뿐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거기서 누군가를 또 사랑하게 됐어요. 그 대상이 브리스길라입니다. 브리스길라는 어떤 사람이냐? 로마 여인입니다. 로마 시민권자예요. 이 사람의 본래 이름은 브리스가 브리스 길라라고 하는 것은 브리스가의 애칭이라고 해요. 당시 로마 귀족들은 이런 애칭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이방인이 와가지고 프랑스 귀족 딸을 만났다 이거예요.
여러분 별로 가능성이 없으니까 감동이 없으신 것 같은데 엄청난 출세예요. 지금 피지배 국가의 사람이 그것도 조국을 떠나서 디아스포라로 있던 사람이 로마에 가서 로마에 귀족의 딸과 결혼을 했어요. 큰 출세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고린도를 떠나게 돼요. 파리에 잘 정착해서 이제 길이 쫙 열렸는데 어느 날 추방당한 겁니다.
왜 추방을 당했느냐 하면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가 황제가 됐는데 이 사람이 정치를 하다 보니까 아주 심각한 민족이 하나가 있어 그게 그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 이 사람들은 그냥 로마가 다스리면 그대로 굴복하면 되는데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거 전 세계의 이 전 세계에 나라도 잘 뺏기고 반란도 잘 일으키는 민족이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유대인이고 하나는 한국 사람이고 우리도 많이 뺏겼잖아요. 몽골이 오고 일본이 오고 와서 지배를 많이 했지만 뺏기기도 잘 뺏기지만 이게 되찾기도 잘 찾습니다. 막 그 의병들이 일어나고 말이죠. 가만히 있지를 않아 우리는 당할 때는 당하더라도 그 끝까지 저항을 하는 아주 특별한 민족이죠.
중국은 일본이 점령하면서 난징에서 30만 명을 죽였다잖아요. 그래도 꼼짝 못하고 있었어요. 그 많은 숫자.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죽지는 않았지만 이게 나라를 반란을 일으킨 거죠. 일본이 볼 때는 그래가지고 막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막 던지고 그러니까 도시락이 무서운 거예요. 그런 저항을 한 민족이 우리 민족인데 아마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했던 것 같아요.
이 유대인들은 그러니까 황제가 볼 때도 이걸 이 본토에 놔두면 안 되겠다 아주 심각하다. 그래서 추방 명령을 내린 칙령을 내려서 추방하게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그래서 이제 브리스킬라 아굴라도 고린도로 온 겁니다. 그리스 땅으로 온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그 황제가 죽자 본토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거기 살아요.
그래서 로마서 16장 3절에 보면 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 브리스 길라와 아골라에게도 무난하라 로마서를 쓸 때쯤에는 거기 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짧은 기간에 추방돼서 와서 고린도에 왔다가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돼서 에베소까지 가서 사역을 하다가 본토로 돌아갑니다. 짧은 기간 인간적으로 보면 야 잘 되려다가 이게 망했네. 너무 억울하잖아요. 여기서 체류증 잘 받고 10년짜리 받았는데 갑자기 코리안 추방령이 내려가지고 제가 17년 만에 체류증을 받았거든 17년 만에 10년짜리를 받았어. 매년 두 번에서 세 번을 프레디 내 프레펙듀라는 앞에 풀에만 나와도 막 너무 힘든 거예요. 너무 체류증이 안 나오면 난 언제든지 간다. 그냥 그렇게 했어요. 생각을 하나님 뜻이 아니니까 간다. 그러기까지 마음을 먹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10년짜리를 어떻게 받았어요? 제가 17년 만에 그런데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 얼마나 억울하고 야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브리스 길라가 아울라가 그런 상황으로 고린도에 갔는데 인간은 이해를 못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이거예요. 좋은 일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만 불행해 보이는 일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바울을 만나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고 이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말이죠. 놀라운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인생에서 어떤 일을 만나고 역사에서 어떤 일을 만날 때 빨리 성급하게 판단할 필요가 없어요. 조금 더 묵상하고 간주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그 시야를 열어야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파리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직장으로 공부하러 자식 교육을 위해서 또는 여행하다가 갑자기 여기가 좋아서 머문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냥 우연히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별거 아니에요. 그러나 내가 의도는 하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그런 관점으로 생각하고 기도해 보세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두 사람을 만나고 이 두 사람은 바울을 만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들은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어요? 실패한 것 같아 보였는데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파리 선한교회에서 만났어요. 목사로 성도로 만나고 또 우리 집사님들 또 형제 자매님들이 만나요. 다 뜻이 있습니다. 좋은 동역자가 서로 간에 돼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다가 주님 앞에 가면 그 인생이 가장 잘 산 인생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제 브리스 길라 아굴라를 통해서 사역을 시작을 하는데 바울의 사역은 자비량 선교 사역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감히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라 천막 만드는 기술이 바울에게도 있었고 이 아굴라에게도 있었어요.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기술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첫째는 율법을 배워야 돼 철저하게 배웁니다.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천막 만드는 텐트 만드는 그런 기술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딱 만나서 이게 또 통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천막을 지으면서 거기서 나온 그 물질로 생활을 하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웁니다.
이걸 현대 그 선교학에서는 비즈니스 에스 미션 미션으로서의 비즈니스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거예요. 목적이 또 바뀌면 안 되죠. 미션 에즈 비즈니스 비즈니스를 위한 선교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적이 돈 버는 것이다. 그러면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되는 거예요. 바울은 이게 그래서 비즈니스 애즈 미션 이걸 뱀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제 이번 주부터 비즈니스 애즈 미션 뱀 스쿨 파리가 이제 이번 한 주간 동안 파리에서 열려요. 우리 젊은이들도 기회가 되면 이런 학교에 가보시면 좋아요. 거기서 거기서 감동을 받고 하나님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가 된 이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 1차 대회 때 형제 자매가 들어갔다가 부르심을 받고 이 비즈니스 선교사가 돼서 지금 이슬람권으로 갔습니다. 어디라고 얘기하면 이게 이제 유튜브 타고 넘어가니까 안 되고 하여튼 그래가지고 지금 사역을 너무 잘하고 있어요. 비즈니스를 하면서 하나님 비즈니스를 축복하셔가지고 그걸 통해서 또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어요. 그렇게도 될 수 있고 또 여러분들 중에 나는 교수 음악가 나는 레스토랑을 한다 뭐 직장인 뭐든지 관계없습니다. 그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해서 쓰여지면 되는 거예요.
근데 공부를 하셔야 돼요. 이 학교가 좋은 게 뭐냐 하면 여러분 기회가 되면 내년에 많이 가시기 바랍니다. 겁나가지고 나 선교사들은 선교사 아프리카 가라 그러면 어떡하나 이래가지고 아무도 그런 건 안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안 해요. 자기들이 결단하는 거예요.
근데 가서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는가 내가 이 직장생활, 내가 이 사업과 학업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인가 그리고 각 분야에 미국과 한국에서 각 분야에 이미 그 분야로 성공한 비즈니스맨과 교수 학자들이 와서 거의 멘트맨으로 일주일을 같이 보내면서 그 미래를 컨설팅하고 또 비전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이런 시간들을 갖는 거예요. 좋은 멘토가 되는 거예요. 저는 그게 한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렇게 그 설계를 하고 사는 사람하고 그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지 하고 그냥 막 사는 거하고는 또 달라요.
하여튼 이 비즈니스 애즈 미션은 바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근데 바울이 왜 여기서 자이랑 선교를 했을까? 바울은 모든 순간 자비량 선교를 했을까 그런 건 아닙니다. 왜 했을까요? 돈이 떨어진 거예요. 막막한 거예요. 도움을 받을 데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좋은 일을 하다가 사역을 하다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재정이 빵꾸가 나면 어떻게 돼요? 아이고 이거 하나님 뜻이 아닌가 봐 하고 접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나를 그 분야로 부르셨어도 어려움이 올 때가 있어요. 그때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하면서 진행을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한 거예요. 돈 떨어졌다고 사례비가 적다고 생활하기 어렵다고 접고 제가 가버려 선교사가 그런 재정이 조금 어려우면 다 접고 가버려. 그럼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지도 않아요. 그걸 넘어가야 됩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진행하다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요.
바울이 그런 거예요. 지금은 자비량 선교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경우에 자비량한 건 아니에요. 빌립보교회 같은 교회에서는 후원을 받았어.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그 후에도 바울을 계속해서 후원했어요. 그래서 어떤 자비량 선교 라든가 이런 어떤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시켜서 그 프레임을 가지고 어떤 그 규칙을 만들면 안 됩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을 해야 돼요. 어떤 사람들은 이게 맞으니까 나는 가령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면서 내가 가령 목회를 하는데 사례비를 안 받는다. 그건 자기가 선택할 수 있어요. 그러면 이게 이제 정상이니까 나머지 목회만 하면서 사례비를 받는 사람은 저건 가짜다. 요즘 유튜브에 보면 그런 희한한 사람들이 나와가지고 정신 나간 소리들을 합니다. 각자가 선택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바울은 오히려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고린도전서 9장 9절 이하에 모세 율법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도를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염려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니라.
그래서 저 같은 목회자 우리 목사님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선교비를 받고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아멘도 없으시네. 정말 그래요 그래서 받을 때 떳떳하게 받아야 돼요. 떳떳하게 그리고 그 정당한 사례를 제공할 때도 생색내면 안 됩니다. 그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고난이.
다만 사도바울은 이 고린도라고 하는 곳에서 이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길을 선택한 겁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나는 사례로 살지 않겠다. 그래서 자비량으로 자기 생계를 유지하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고난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베드로처럼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한이 없겠느냐 바나바도 아마 자비량을 한 것 같아요.
나머지 사람들은 다 대가를 받고 일을 했어요. 또 12절에 보면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 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 18절에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것이로다.
바울은 받을 권한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받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 때문에 복음 전하는 길에 장애가 생긴다. 다른 데서는 떳떳하게 받고 감사하게 제공을 하는데 고린도는 안 그럴 가능성이 많았다는 부자가 더 한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여기 진짜 부자들이 많이 사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그 생활을 도우면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은 그걸 안 할 가능성이 많다는 거 이런 지역이었어요. 그래서 그랬고 또 하나는 다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상이 없다.
저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으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 약간 좀 겁도 나요. 하나님 나라 갔는데 우리 저 집사님들은 황금 모자 쓰고 있는데 나는 개털 모자 쓰고 있는 거 아닌가 이분들은 다 헌금하면서 교회 봉사하고 헌신하는데 목회자인 나는 사례를 받으면서 일을 하잖아요. 그러면 나중에 가가지고 정말 거기 가면 창피한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제 마음이 가끔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나 원칙은 일한 대가를 받고 일을 하도록 그래서 이 교단 법에도 대신의 목회자는 목사가 되면 두 가지 직업을 가질 수가 없어요. 원래는 굶어 죽더라도 목회만 해라 이거예요. 아직도 그런 상태입니다.
근데 너무 지금 목회자가 많이 나오고 교회는 어려워지고 그러니까 생활이 어려우니까 그 법을 어기고 몰래 택시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 친구들 중에도 있어요. 다 해외에 나가서 유학까지 하고 들어와서 살 길이 없으니까 택시 운전을 해요.
요즘 한국 가서 여러분 뭐야 부르는 거 있죠? 술 마시고 부르는 거 대리 그 대리 부르면 좀 점잖아 보이는 분은 다 목사라고 보면 돼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그래서 지금 법을 바꾸려고 합니다. 두 가지 일도 하면서 생활을 하도록.
근데 이제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다 보면 이 영적인 일은 기도하고 성경 보고 사람을 만나고 이래야 되는데 다른 일에 에너지가 쏟아지면 이게 집중을 못합니다. 이제 악순환이 올 거예요.
근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 그렇게 합니다. 선교사들은 조금 또 다르죠. 상황이 하여튼 지금 사도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자비량 목회를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제 바울은 회당에 가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4절에 보면 날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어요. 언제나 그렇습니다. 여기는 안 될 거야. 여기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나님이 준비하셨어요.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거예요. 순종해서 가면 항상 놀라게 됩니다. 브리스기라 아굴라가 있었네. 고린도 교회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마음을 이미 준비해 놓으신 거예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전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저 사람이 예수 믿을까 믿습니다. 준비한 사람 믿어 그런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어요. 그리고 이 교회가 크게 부응했을 때 초대교회에 매우 중요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놀라운 일은 사실은 동역자를 만난 겁니다.
좋은 동역자 동지라고도 할 수 있어요. 동지 뜻을 같이 한 사람 이런 사람 하나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저도 교회 개척하고 21년 됐지만 지금까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진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거예요.
우리 교회에 정말 말 없이 또는 아주 열심히 함께 협력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그러다가 가신 분들 제가 이렇게 따져보니까 우리 교회 등록했다가 계시다가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신 분들까지 유학생들까지 하면 몇천 명이 됩니다. 한 3천 명은 될 것 같아요. 거의 그런 분들이 오셔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함께하고 기도하고 떠나서도 지금도 떠나서도 지금도 우리 기도 방에 들어와가지고 10년 20년 동안 기도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이 좋은 동역자입니다. 그게 힘이 돼서 저도 사역을 하고 우리 모두 여기서 주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프랑스에 좋은 단어들 많아요. 프랑스는 불어는 참 멋진 언어입니다. 그래서 똘레랑스 그러면 관용 이런 그런 의미인데 굉장히 우아해 보이잖아요. 똘레롱스 근데 제가 프랑스어 중에 좋아하는 단어가 하나는 똘레랑스 이건 종교 개혁에도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까마라드라는 단어예요. 깨마라드 학교에서 친구들을 꾀마라드라고 하죠. 우리 번역에는 오늘 설교 제목에 꼴레그 이렇게 됐는데 까마라드라는 표현이 있어요. 직장에서 동료들 그리고 전쟁터에서 생명을 같이 하는 생사를 같이 하는 전우들을 까마라드라고 합니다. 생명을 같이 하는 거예요. 운명을 같이 하는 거 바울이 그런 동지를 만났어요.
여러분도 그런 동지를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동지가 돼야 돼요.
뒤에 몽끼마라든 옆에 계신 분들 한번 보면서 우리는 좋은 동역자입니다. 그렇게 일을 감당하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