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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따돌림의 역학
<더 헌트>(토마스 빈터베르그, 드라마, 15세, 2012)
집단 따돌림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한국에서 “왕따”라 불리는 현상은 집단 따돌림을 말한다. 특정 집단 혹은 또래 집단 내에서 둘 이상의 사람이 한 사람을 따돌리고 무시하는 일이다. 일본에서는 “이지메”라고 하는데, 일본어는 “이지메”는 행위만을 지칭하는 데에 비해 한국어 “왕따”는 따돌리는 일과 그런 일의 피해자 모두를 가리킨다. 한국과 일본에서 왕따 혹은 이지메를 당한 청소년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까지 하게 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 되었다.
이런 집단 따돌림은 정도와 빈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세계적인 현상이다. 중세에는 마녀사냥이 있었지만, 대체로 당대의 종교적이나 도덕적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해 공동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혹은 공동체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이뤄졌다. 법적으로는 추방의 형태로 이뤄졌는데, 다수의 경우에는 특정 거주 지역을 제한해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유대인 거주 집단인 게토가 대표적이다. 퀘이커 교도 같은 일부 극단적인 종교공동체는 스스로를 다른 공동체와 구별하는 의미에서 특정 지역의 범위에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집단 따돌림을 유발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런 따돌림은 당대의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다른 형태의 문화를 갖고 있을 때 일어났다. 그러나 수도원 같이 다수가 속하는 종교의 부패를 비판하거나 종교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워진 공동체는 따돌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집단 따돌림이 제도적으로 뒷받침 될 때는 추방이나 게토 같은 형태로 나타나나,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개 군중 심리에 따라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제도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할 때 집단 따돌림은 다분히 군중심리적인 이유로 일부 집단 혹은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다.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이기에 훨씬 더 섬뜩한 일들을 야기한다.
궁금한 점은 이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상이 일어나 확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군중심리가 작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다. 그 밖에 단순히 가해자 개인의 불량한 성향으로 돌릴 수 없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어떤 생각에서 이런 집단 따돌림에 연루되는가? 피해자는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가? 한 공동체 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어쩌면 집단 따돌림의 역학관계를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런 질문 자체를 고민하도록 돕는 영화가 우리의 손으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간혹 탈북자나 다문화 가정 혹은 범죄자의 가정 그리고 사회적인 약자들이나 성적 소수자들이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는 장면은 많았어도 그 관계를 밝혀낼 만한 영화는 없었다. 한국 영화 가운데 <무산일기>(박정범, 2011)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장철수, 2010)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특별한 주목을 끌만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필자가 영화의 공공신학적인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한 모델로 삼아 다뤘기 때문에 관련된 글이 담겨 있는 책(“신학적 미학과 기독교 영화미학”, 도서출판 자우터, 2012, 261-270)을 참고하면 좋겠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깊은 성찰로 이끌어줄 영화가 덴마크에서 만들어졌다. <더 헌트>다. 영화를 대하기 전에 먼저 덴마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필자에게 결코 낯설지 않은 나라인데, 청소년 시절에 내가 가장 즐겨 읽고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던 키에르케고르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신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것을 기독교인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그는 국가종교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은폐하며 살아가는 덴마크 기독교인들을 향해 비판의 칼날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 때문에 그는 가족은 물론이고 종교공동체에 의해 집단 따돌림을 받고 결국 외롭게 살다 거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런 전통 때문이었을까? 집단 따돌림에 대한 깊은 성찰을 대하면서 단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감독의 개인적인 능력만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단순히 감독 개인의 능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시각과 인식에 기초해서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전에 나온 덴마크 영화 <인 어 베러 월드>(수잔 비에르, 2011)와 <로얄 어페어>(니콜라이 아르셀, 2012)에서 집단 따돌림을 다루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지금까지 마음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학교에서, 후자는 왕궁에서 일어난 집단 따돌림을 다루었다. 세 명의 감독에게 공통적으로 현실을 보는 남다른 시선을 볼 수 있었다면, 이것은 문화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거나 혹은 시대정신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니 덴마크의 사회문적인 인식과 시각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필자의 생각이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먼저 영화의 내용을 살펴본 후에 집단 따돌림의 역학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보자.
영화 이야기
“사냥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헌트>는 한 사람이 갑자기 마을 공동체에 의해 마치 사냥감으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야기하는 그런 이야기다. 내용은 이렇다. 중학교 교사였던 루카스(매즈 미켈슨 분)는 이혼 후에 고향에 있는 유치원 선생으로 지낸다. 영화의 초입 부분에 고향 친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장면은 마을의 친밀한 성격을 암시해주고 또 그의 귀향이 결코 실수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루카스는 비록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고향 친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이 문제로 전처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지만 아들의 마음은 이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지내는 중이었다. 게다가 미국 출신의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루카스는 고향에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준비를 잘 다져가고 있었다.
그가 다니는 유치원엔 죽마고우로 지낸 테오의 딸 클라라(아니카 베데르코프 분)가 다니고 있다. 방향이 같으니 자주 동행하였고, 루카스는 클라라를 자신의 딸처럼 여기며 돌본다. 부모가 베푸는 사랑이나 관심에 비해 색다른 것을 루카스에게 느낀 클라라는 그에게 친밀함을 서슴지 않고 보인다. 심지어 남녀가 구분되어 있는 유치원 내 침실에서 루카스에게 달려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정성을 다해 선물을 준비해서 건네주기까지 한다. 물론 아빠의 친구로서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루카스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루카스는 클라라의 건강한 정서를 위해 그녀의 호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 클라라는 그것을 거절당했다는 표시로 받아들인다. 그리곤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를 비난하면서 오빠가 집에서 장난삼아 보여준 포르노 장면을 루카스와 연관 지어 말한다.
문제는 바로 이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치원 원장은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클라라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루카스의 행위를 아동 성추행으로 단정한다. 유일한 이유는 어린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순수성에 대한 편견은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도록 작용했고, 급기야 클라라가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포함한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커져가는 문제에 대한 어린 아이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클라라를 설득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전문 상담가의 상담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에 대한 증거를 찾는 일에 불과했다. 학부모 회의가 소집되고 사안은 마을 전체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카스의 전처와 아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루카스는 이제 궁지에 몰린 것이다.
죽마고우로 지냈던 친구들도 루카스보다는 아이의 말을 믿었다. 결국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린 루카스는 마을에서 식료품도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곤고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루카스에 대한 비난은 루카스를 찾아온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아버지를 신뢰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진실을 밝혀보려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심지어 루카스와 늘 동행하였던 반려견마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루카스를 이해하고 협조해준 사람은 아들의 대부(代父)인 친구 한 사람뿐이었다.
한편, 아이들의 진술과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안 경찰은 결국 루카스를 무혐의로 풀어주었지만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의 따돌림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전에 가졌던 자신들의 확신이 잘못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적인 따돌림을 통해 경찰의 발표와 무관하게 그 확신을 고수했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클라라의 아버지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사실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상상력의 결과라고 생각할 만한 정황이 많이 밝혀진 상태에서도 신뢰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크리스마스 전야에 드리는 예배에서 아이들의 찬양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에 루카스는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을 폭발해, 교회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일 년이 지난 후 루카스의 아들은 성년식에서 사냥총을 선물 받았다. 아마도 덴마크 전통에서는 성년이 되면 기념으로 사냥총을 선물 받는 관습이 있었던 것 같다. 루카스는 아들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슴을 사냥하러 숲으로 가는데, 루카스는 자신이 누군가의 사냥감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비록 빗나갔지만 루카스에 대한 사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더 헌트>는 장르적으로는 드라마이면서도 오히려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매우 잘 연출되었다.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입증해주고 있지만 루카스로 분한 매즈 미켈슨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과정에서 각진 얼굴을 통해 표현되는 고뇌와 분노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내기 힘들 것으로 생각할 정도다. 피해자가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매우 잘 표현해내었다. 물론 아역 클라라로 분한 아니카 베데르코프가 보여준 연기 역시 혀를 두를 정도다.
집단 따돌림 현상의 역학
이 영화를 통해 필자가 군중심리적인 현상으로서 집단 따돌림의 역학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보았던 이유는 몇 가지 점에서 확인된다. 먼저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점을 기술하여보자.
첫째, 사건은 아주 작은 일 혹은 거짓에서 촉발된다. 물론 사안이 중대한 것일 수도 있고 또한 큰 일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안과 관련되었을 때에 민감한 반응은 비교적 보다 쉽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동 성추행이었다. 이것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매우 민감한 사회문제이다. 둘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편견을 사실로 인정하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이 사실보다 더 중시되는 것이다. 셋째, 편견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다시 말해서 그것이 정의감의 표현으로 보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여부의 확인이 아니라 편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넷째, 사안의 심각성이 대중에 의해 널리 인식되어 있는 만큼 더 많은 사례를 확보함으로써 대중적 인지도와 심각성을 확인한다. 영화에서 유치원 원장은 유치원 교사회의를 통해 그리고 학부모 회의를 소집하여 이 일을 수행했다. 언론매체에서 떠도는 사실들이 결코 소문만은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가까운 곳에 사는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다섯째,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현은 정의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비례한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의 분노는 그들이 아동 성추행에 대해 얼마나 조심하고 있고 또 분노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분노한 만큼 자신은 그 같은 범죄행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섯째, 무혐의 처리가 되어 사실에 대한 번복이 이뤄졌을 때, 사람들은 피해자가 당했던 아픔과 고통은 무시하고 앞으로 잘 지낼 것만을 염두에 둔다. 게다가 일부는 여전히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까지 기술한 부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사실과 거짓 사이에서 사람들은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편견, 정의감 등이 확인되고 또 소문으로만 듣던 일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는 일로 인해 일어나는 흥분과 분노 등의 감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클라라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과 분노가 진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실의 편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지는 법이다. 왜냐하면 분노는 자신의 정의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단 따돌림의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수의 생각과 감정이나 느낌을 다수라는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집단 따돌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국가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어떤 집단 따돌림이든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수의 의견이고 소수는 언제나 무시된다. 그래서 다수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회는 소수를 정죄하게 된다. 또한 진실보다는 이미지와 편견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더 큰 비중이 실리는 것이다.
성경이야기의 사례
성경은 거짓증거를 막기 위해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내세어 사안의 진실성을 확보하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을 악용한 이세벨의 꾐에 빠져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불법적으로 빼앗았다. 진실을 위한 방편이 거짓을 위한 도구로 악용한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고소하는 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그들은 군중심리를 이용했다. 군중들은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대로 따랐고, 군중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빌라도는 사안의 진실을 밝히려 했고, 또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빌라도마저 손을 씻으며 군중의 편에 서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거짓증거가 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단 따돌림 현상의 본질은 진실이 아닌 허상, 곧 이미지와 편견과 거짓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성경이 거짓증거라고 말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언제나 진실의 편에 서도록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적이고 힘의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을 선호하는 현대사회에서 진실을 분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을 가진 자와 함께하는 것이 사회적인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판단이 쉽게 서지 않을 때 권장할 만한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다면, 소수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한 긍휼을 잊지 않는 것이다. 소문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겪을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적으로 다가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정의감을 불사르고 분노하는 일은 결과가 밝혀지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 이전에 분노하고 자신의 감정과 편견에 사로잡혀 미움을 표현하는 것은 결국 진실이 아니라 자신 곧, 자신의 정의감을 불사르거나 혹은 자신은 그런 일과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
최근에 일어나는 일련의 언론 보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면 좋겠다. 검찰과 언론은 혐의 사실을 마치 사실로 인정하듯이 발표하고 보도한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 혹은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다. 이런 태도가 대개 개인에게는 집단 따돌림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여기에 불필요하게 연루되지 않으려면 옳고 그름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판단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어떤 고통 속에 있는지에 대한 공감적인 긍휼의 마음을 품고 보살펴야 한다. 설령 나중에 사실로 밝혀진다고 할 때, 그때 우리가 그와 함께 있으면서 위로를 했던 것 때문에 당하게 될 비난은 그렇게 크지 않다. 크다 하더라도 오히려 성경적으로 옳은 일을 한 것이다.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혀 광장으로 끌려나온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라. 정죄 받을 수밖에 없는 정황에서도 예수님은 긍휼의 마음을 놓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다. 이것을 기억하고 행한다면, 집단 따돌림에 우리가 연루되지 않고도 정의의 편에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 1:1)
집단 따돌림은 희생양 메커니즘
이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집단따돌림을 통해 무엇을 원한 것일까?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을 사회에서 배척함으로써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영화와 우리 사회 그리고 성경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은 혐의가 있는 한 사람에게 사회가 금기시 하는 죄를 전가하면서 사회 밖으로 몰아낸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의를 재확인하면서 강조하고 또 자신이 그 정의의 편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결국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 한 사람을 무고하게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발터 부케르트가 “호모 네칸스(Homo necans)”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사냥하는 인간”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부케르트가 고대그리스종교와 신화를 연구한 결과로 나온 책 “Homo Necans: the Anthropology of Ancient Greek Sacrificial Ritual and Myth”에서 주장하는 중심 주제다. 그는 고대인의 사냥의식을 바탕으로 동물희생과 인간희생의 연관관계를 밝혀내었다. 그 결과 그는 음식을 얻는 수단이었던 사냥이 인류의 진화의 문화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동일한 해에 출판된 “폭력과 성스러움”의 저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비슷한 주장을 제시하였다. 지라르는 인류문화에 대한 발생학적인 연구를 통해 기원과 메카니즘을 나름대로 규명하는 미메시스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문화의 기원에 폭력적인 요소가 있는 까닭은 인간관계가 본질적으로 모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갈등의 뿌리에는 모방적이고 폭력적인 경쟁이 잠재해 있고, 인류는 욕망의 충돌로 공멸하지 않기 위해, 즉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인 희생제의를 고안해내었다고 한다.
사회가 지켜야 할 기본 양심 혹은 정의가 문제로 제기되었을 때, 혹은 그것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을 때, 혹은 그것을 위배하는 사례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사회를 지키기 위해 거의 폭력에 가까운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더 헌트”를 통해서 우리는 부케르트와 지라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현상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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