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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장 영광과 교만 (6)
며칠 후, 정나라 대부 공숙(孔叔)은 성문을 열고 나가 신정성을 포위하고 있는 제환공 앞으로 나가 나무 함을 하나 바치며 무릎을 꿇었다. 제환공(齊桓公)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공숙(孔叔)은 대답 대신 나무 함의 뚜껑을 열어보였다.
"아니...............?"
제환공(齊桓公)은 숨을 들이켰다. 함 속에는 사람의 목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제환공은 놀라서 공숙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공숙(孔叔)이 공손한 어조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것은 신후(申侯)의 목입니다. 지난날 우리 주공께서 수지를 몰래 떠나온 것은 모두 다 신후의 꾐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주공은 지난날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간악한 이중 첩자 신후(申侯)를 참하여 신으로 하여금 패공께 죄를 청하게 하셨습니다. 바라건대 패공께서는 우리 정나라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다시는 초와 수호(修好)하지 않겠습니다."
비로소 제환공(齊桓公)은 정문공이 공숙을 보낸 뜻을 알았다.
".......................!"
제환공은 박쥐와 같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정문공(鄭文公)의 소행을 몹시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수지 회맹에서의 정문공의 배신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배신으로 인해 초성왕(楚成王)은 소릉에서의 불가침 조약을 간단하게 깨뜨리고 현(弦)나라와 허(許)나라를 단숨에 집어삼키지 않았던가.
아마도 제환공(齊桓公)은 곁에 서 있는 관중이 눈을 꿈벅거리며 신호를 보내지 않았던들 크게 호통을 쳐서 공숙을 쫒아버렸을지도 몰랐다.
"중보(仲父)는 무슨 할말이라도 있소?"
"그러합니다."
"말해보시오."
"옛말에 '가까이 있는 자는 예(禮)로써 오게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자는 덕(德)으로써 붙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숙(孔叔)은 예를 아는 사람입니다. 정문공의 소행이 비록 괘씸하다고는 하지만, 그 밑의 신하들이 이렇듯 예를 알고 있다면 아직 나라의 근본은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이 점을 어여삐 여겨주셨으면 합니다."
제환공(齊桓公)이 어찌 관중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그는 잠시 함 속에 담긴 신후(申侯)의 머리를 내려다보다가 공숙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의 체면을 보고 이번 한 번은 용서하겠소. 앞으로는 주왕실의 안정과 천하의 안녕을 위해 정(鄭)나라도 온 힘을 쏟아주길 바라오."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해서 제환공(齊桓公)은 신정성의 포위를 풀고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했다. 제나라와 초나라가 소릉에서 불가침 조약을 맺은지 3년 후인 BC 653년(주혜왕 24년, 제환공 33년) 봄의 일이었다.
그해 7월, 제환공은 또다시 중원 제후들을 소집했다. 태자 정(鄭)이 주왕실의 후계자임을 재확인하기 위한 회합이었다.
- 장소는 영무.
영무는 노(魯)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 동쪽 일대이다.
그런데 회맹일이 가까워오자 제환공(齊桓公)에게 항복한 바 있던 정문공은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주혜왕으로부터 받은 밀서가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나의 뜻은 왕자 대(帶)에 있노라.
앞일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은 제환공을 후견인으로 둔 태자 정(鄭)이 유리하지만, 주혜왕의 뜻대로 왕자 대(帶)가 왕위를 계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문공으로서는 패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정문공(鄭文公)은 나름대로 묘책을 짜내었다.
'주혜왕의 뜻에도, 제환공의 뜻에도 거슬리지 않는 것.'
그는 아들인 세자 화(華)를 영무 회맹에 대신 보내기로 마음을 정한것이었다.
이를테면 '양다리 작전'이었다. 다행히 진(陳)나라 군주인 진선공(陳宣公)도 자신의 세자를 대신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환공에게는,
- 몸이 아파서.
라는 핑계를 둘러대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자 화(華)가 뜻하지 않은 말썽을 일으킬 줄이야.
말썽의 소지는 이미 진작부터 싹트고 있었다.
정문공(鄭文公)은 정부인과 후궁에게서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아들은 세자 화(華)와 동복동생인 공자 장, 그리고 천첩 출신의 후궁 소생인 공자 난(蘭)이었다. 문제는 세자 화(華)가 이복동생인 공자 난(蘭)을 시기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