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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한 캐나다장로회의 용정 제창병원
어린 시절부터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 “프린세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어느 날 꿈처럼 아련하고 신비로운 그 세계가 뜨거운 감동과 함께 나의 삶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 환상적인 무대가 다름 아닌 1895년 6월 24일 소래에서 사망한 캐나다선교사 맥켄지가 자신의 한국선교 비전을 마지막으로 밝히고 떠나온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요, 그의 한국선교 후원을 책임진 목사와 교우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맥켄지의 유지를 받들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 그리어슨, 던칸 맥레, 푸트 세 사람 다 그 지역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파송하고 후원한 메리타임 지역의 교회들이 바로 “프린세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한 노바스코샤와 뉴브런스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1)
한국에 온 초기 캐나다 선교사들이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이 나에게 묘한 감회를 일으켰다. 나의 신앙의 뿌리 일부가 태평양 건너에 있는 그들에게 잇대어 있다는 것 그리고 120여 년 전의 그들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에게 빚을 주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아름다운 곳에서 온 아름다운 사람들의 헌신을 “섭리”의 눈으로 보며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 123년이 되는 해에 작은 글로서나마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특별히 용정에 제창병원을 세워서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인술을 베풀며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해준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묵상하며 졸필을 들었다.
캐나다장로회의 한국 선교 시작과 10년의 역사
캐나다장로회 매리타임 연회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맥켄지 (김세, William JOHN McKenzie) 죽음 이후였다. 실제로 메리타임 연회의 선교위원회는 1893년 10월, 맥켄지가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를 초청하여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들었으나 그의 선교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26일 그는 트루로 지역 교회 성도들의 격려와 위로를 받으며 밴쿠버로 떠났다. 그리고 11월 12일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왔다. 그는 일기에 “하나님, 이제부터는 한국이 내가 받아들일 땅이 되게 해주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에 머물며 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삼킬 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큰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내 유골을 그들과 함께 썩게 하소서.”라고 자신의 심정을 기록하였다.(2)
그는 선교사 모펫의 소개로 1894년 1월에가 황해도 장연군 송천 (솔내)에 와서 거주하며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한국인과 동일한 수준의 열악한 초가집에 거주하며 조선식 허술한 식사와 모국 캐나다와 다른 한국 기후에 시달렸다. 그러나 성도들과 함께 노동하며 교회 건축을 하고 남녀학교를 세우며 교육과 목회를 겸하여 섬기는 중에 과로로 말라리아 열병과 일사병에 걸렸다. 그는 고열과 망상과 불면에 시달리다 6월 24일, 소래교회 건축봉헌을 하루 앞둔 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 감동을 받은 캐나다장로회 총회 해외선교위원들이 위원회로 모였고 그들은 “한국 선교 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계획을 해외선교위원회 동부 분과가 연구하여 다음 회의에 보고하도록 ”하는 발의를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3)그리하여 캐나다장로회 총회 의사록에 “한국”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맥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장로회 총회가 한국선교에 대한 안건을 다음해로 미루면서 매리타임 지역교회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시들해졌다. 그 후 소래교회 신도인 서경조가 사인을 하고 소래교회 성도들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캐나다장로회에 도착하여 어느 잡지에 실리자 ‘선교사를 기다리는 현지교우들의 간절한 호소’에 메리타임 지역교회들은 다시 한국선교를 거론하며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897년 2월 23일 해외선교위원회 정기모임에 참석한 캐나다장로회 여신도회해외선교회(WFMS) 대표가 한국 선교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한국선교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공론화되었다. 그러자 총회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선교 문제를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에서 가부를 결정하도록 위임하였다.
3년에 걸친 기도와 찬반토론 끝에 1897년 메리타임연회에서 111대 25로 한국선교를 가결하였다.
1898년 2월 해외선교위원회는 그리어슨 (구례선,Robert Grierson)과 푸트(부두일, William Rufus Foote)의 지원을 받아들이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 4월에 던칸 맥레(마구례,Duncan M. McRae)를 세 번째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서 1898년 7월 20일에 메리타임을 출발하였다. 8월 14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으며 24일에 나가사키에서 히고마루 호를 타고 9월 8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도착한 1898년 9월은 조선장로회사기에 의하면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4)로 분류되고 있는 시대이다.
그들은 10월에 미국 북장로회, 호주장로회, 미국 남장로회로 구성된 장로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등록하여 캐나다장로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공의회에 의해서 부산과 원산 두 지역을 선교지로 제안을 받았다. 그들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인 게일, 펜윅, 하디가 활동하였던 원산을 선교지로 택하였다. 그들은 원산에서 캐나다장로회선교사회를 조직하고 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회로부터 세워진 교회와 사무 일절을 인수인계 받았다.
푸트는 원산, 그리어슨은 성진, 던칸 맥레는 함흥(5)에 선교지부를 열어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99년 9월 역시 매리타임의 여신도들의 지원을 받는 트루로 출신의 루이스 맥컬리가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 선교부의 귀중한 인력이 되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선교사들의 지원 보강 요청에 따라 1901년 10월 로브목사(업아력, A.F. Robb)와 그의 부인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메리타임지역 여신도들은 자력으로 1901년에 케이트 맥밀란(Kate McMillian), 1903년에 제니 로브 (Jennie Robb), 1905년에 캐서린 메어(Catherine Mair)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해외선교위원회는 1906년에 영(L. L. Young)박사를, 1907년에 로스목사(A.R.Ross)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10년 동안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조선의 사회적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권서인들, 조선어 교사들, 조사들과 함께 함경남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그 지역의 먼저 구원받은 성도를 찾아 그들과 함께 협력하여 지역사회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도시를 중심으로 성경공부반과 여성을 위한 성경공부반도 따로 운영하였으며 농한기에 계절 성경학교를 열어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였다.
특별히 1907년에 헤이그밀사사건 실패와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으로 법률제정권, 행정권, 관리 임명권을 상실한 조선인들의 절망감, 자기 비하와 국권 상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집단적 인 회개와 통성기도로 나타나 부흥운동으로 결집되었다. 성진, 함흥, 원산 등에서 교회는 절망에 빠진 한국인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였다.
1907년에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원산, 함흥, 성진에서도 나타났고 그 결과로 캐나다장로회 선교회 산하 교회와 성도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1899년 미국 북장로회로 부터 선교지역을 넘겨받을 때 총 14개 교회가 있었는데 1909년에는 134개의 교회로 늘어났다. 세례자 수는 63명에서 1,141명으로 늘어났고 총 교우 숫자는 308명에서 5,594명으로 증가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 숫자는 1899년에 선교사 부인을 포함하여 5명이었고 1909년에 선교사 부인과 여자 선교사를 포함하여 14명에 불과하였다.
1899년 당시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산하에 한국인 전도자는 1명도 없었으나 1909년에는 87명이 되었으며, 신학생도 1명도 없었으나 1909년에는 9명, 고등학생도 1명도 없었으나 1909년에는 11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초등학생은 15명에서 721명으로 늘어났다.(6)
선교 병원이 성진, 원산, 함흥에 세워졌으나 폭발적인 부흥으로 인하여 의사들조차도 순회전도에 밀려서 의료행위를 병원이 아닌 지방 순회전도활동에서 할 정도였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선교활동을 시작하는 처음부터 선교사 인력난에 시달려 해외선교위원회에 선교사 인력 지원을 거듭 거듭 요청하였다. 그러나 캐나다장로회 총회 동부분과 해외선교위원회는 자신들만의 힘으로 새로운 선교사를 파송할 경제적 여력이 없어 서부 분과에 선교사 파송 건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캐나다장로회와 남감리회 선교부의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 분할에 대한 합의
장로회연합회와 감리회본부가 1900년대 초기 10년 사이에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일은 선교현장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양 선교부가 선교 지역 분할에 동의를 한 것이었다.
캐나다 선교부와 남감리회 선교부는 함경도와 강원도 인접 지역에서 서로 겹쳐 있었다. 그들은 상회의 결정에 따라 교파적 경쟁을 피하기 위해 오랫동안 토론과 숙의 끝에 선교지역을 조정하였다.
캐나다장로회는 원산 이남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하고 27개 교회, 97명의 세례자들, 171명의 초신자들과 약 1,000 여 명의 신자들을 감리회 선교부로 이전하였다.
감리회 선교부는 기존의 선교 지역에서 함경도 원산의 이북 지역과 독원과 안변지방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지역으로 인정하였다. 그 지역의 교회는 1개였고 교인은 20명에 세례자는 3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산을 양 선교부의 공통 선교 지역으로 정하였다.(7)
감리교 선교부는 함경도 지역 분할을 조정하는 중에 두만강 너머에 있는 북간도를 감리회 선교부 지역으로 양해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그러나 감리회 선교부의 양해 사항을 몰랐던 그리어슨 선교사는 함경북도에 인접한 북간도가 당연히 캐나다장로회 구역으로 분할 된 것으로 이해하고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한 성도들의 요청에 따라 북간도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감리회 선교회에 그 지역에서 철수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감리회 선교부가 철수하지 않자 그리어슨 선교사는 북간도 선교를 포기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이전해 줄 5개 장로교회 명단을 감리회 선교부에 보냈다.
그런데 엉뚱한 반전이 일어났다. 1909년 6월 29일자로 감리회 선교부가 종전의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게 북간도 지역을 캐나다 장로회에 구역으로 인정하고 감리회 선교부를 철수하겠다는 통고해 온 것이다. 그로서 북간도 지역 선교지 분할의 문제는 끝이 났고 북간도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지가 되었다.
캐나다장로회는 인력난에 시달리면서도 북간도를 위하여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1909년 가을 그리어슨 선교사는 곧 바로 자신의 조사인 김계안을 용정 상주 전도사로서 파송하여 북간도선교에 전념케 하였다.(8) 또한 그 자신도 1909년 12월에 맥리어드 선교사를 동반하고 용정과 간도에 있는 5개 교회를 순방하였다.
1911년 2월에는 조사 이동휘를 북간도에 보내어 1개월 동안 부흥사경회를 주도하게 하였다.
선교사 로브 (업아력)는 캐나다장로회 해위선교위원회에 “25만 명의 복음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있는 한반도의 북쪽 지역은 거주 선교사를 필요로 합니다. 선교부의 지국이 가응한 빨리 그곳에서 열려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해외선교위원회 서부 분과가 한국에서의 활동에 협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9)
푸트는 해외선교위원회 서부분과의장인 맥케이 (R.P.Mckay) 박사에게 “만약 우리가 그 지역에서 선교를 하지 못한다면, 다른 선교부들이 그 지역을 주장하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다른 선교부들이 말하고 있다” 고 강력하게 한국선교 협력을 촉구하였다. (10)
해외선교위원회 동부분과의 제안과 현지 선교사들의 절박한 요청을 받아들인 서부분과는 1909년에 한국 선교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캐나다장로회 총회의 허락을 받았다.
캐나다장로회 서부분과의 선교사 파송과 용정 선교지부 확정
서부분과는 한국 선교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선교사 파송을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에 맥리어드(J.M.Maclad) 목사가 성진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그리어슨 선교사와 함께 함경도 북쪽 지역과 북간도지역을 순회하였다.
1910년 봄에 맥리어드 선교사는 회령에 거주지와 의료 활동을 위해 부지를 구입하였다.
1910년 성탄절에 맨스필드(T.D.Mansfied) 박사 부부가 한국에 도착하였다.
1911년 2월에 바커(A. H. Barker) 목사 부부가 도착하였다.
1911년 3월에 맥리어드 목사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1912년 1월에 바커 선교사는 회령에 11에이커의 땅을 추가로 구입하였다.
1912년 2월, 맥도널드 (D. A. Macdonald) 목사 부부가 도착하였다.
서부분과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개척자들인 동부분과 선교사들로부터 함경도 북쪽지역의 8개 도시와 간도와 훈춘지역을 선교지로 할당을 받았다. 그 곳에는 이미 44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912년 4월에 서부분과 선교사들이 용정에 선교지부를 열 것을 결정하였다.
1912년 가을 서부 분과에 속한 맥퍼슨 스코트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바커, 맥도날드, 로브 선교사와 함께 간도를 방문하였으며 용정에 선교지부를 열 것을 확정하였다.
1913년 6월 6일,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바커 선교사가 용정으로 이사를 하였다.
1913년 연합선교위원회 (11)는 프록터(S.J. Proctor)목사와 부인, 스미스(E. M. Smith)양, 맥에른(E.B.McEachem)양, 커크(J.B.Kirk)양, 맥퍼레인(M.E.McFarlane)양을 파송하였다.
1914년에 프레이저 (E.J.O Fraser)목사와 부인,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목사와 부인. 에드나 크뤽샌크 (Edna Cruikshank)양, 모드 맥키넌 (Maud Mackinnon)양, 맥도날드(D.W.McDonald) 여사를 파송하였다.
1914년 동부분과 출신 푸트 선교사가 원산에서 용정 선교부로 이주하였다.
1916년에 선교위원회는 마틴 (민산해 의사, S. H. Martin)박사와 그의 부인을 파송하였다. (12)
캐나다선교부가 용정을 선교지부로 결정한 것은 당시 용정에 치외법권이 보장되는 영국의 조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1913년에 일반 중국인과 중국 관리 그리고 일본인이나 일본 경찰들이 출입할 수 없는 조계지 내에 26에이커의 땅을 선교 부지로 구입하였다.
중국인들은 그 땅을 <영국더기>라고 불렀으며 용정수원지 동쪽 근교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 260미터 정도의 언덕이었다. 지금은 일대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영국더기>는 해체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선교사들은 안전이 보장 되는 그 안에 선교부 건물, 동산교회 교회당, 제창병원, 은진중학, 성경학원, 명신여자학교, 명신여자중학교를 세워서 1941년 위만주국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수 당하는 때 까지 30여 년 동안 조선인 선교로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한 캐나다장로회 용정 제창병원
용정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용정 뒤십자거리 성경서원 뒷마당에 있는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전도처소 겸 약방으로 사용하며 내부 관계자들을 진료하였다. 1913년 선교사 바커는 캐나다 해외선교부 결정에 따라 용정에 선교병원을 지었다. 병원은 30여 평(100여m²) 정도의 “ㄱ”형태의 작은 건물로 의사 1명, 약제사 1명, 간호사 3명, 사무원 1명의 규모에 의료설비도 보잘 것 없어 간단한 진찰과 치료 밖에 하지 못하였다. (13)
그 후 1916년 11월에 캐나다 선교부는 “ㄷ” 자 형태의 병원 건물을 신축하여 1918년 30개의 병상을 갖춘 현대식 병원으로 면모를 과시하였다. 진료 과목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과를 두었고 원장은 외과의사인 마틴 (민산해 의사, S. H. Martin)박사, 간호장은 영국인 노은혜 선교사가 맡았으며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이익걸, 최관실, 정창성, 강덕희, 김영 (14)등을 의사로 초빙하고 수술실과 X레이 촬영실 등을 갖추어서 연변일대에서 최고의 병원이 되었다.
제창병원이 재 개업할 당시 연변에는 훈춘의 <러시아병원> 연길의 <독일천주교병원>, 일본인이 세운 용정의 <자혜병원>과 <도립병원>이 있었으나 전자의 두 병원은 신도가 아니면 봐주지 않았고 후자의 두 병원은 진료비가 비싸서 일반 서민들이 이용하기 어려웠다.(15)
그러나 캐나다선교부가 세운 제창(濟昌)병원은 이름 그대로 빈민을 널리 치료하며 구제하는 인술(仁術)을 시행하는 병원으로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였다. 그들은 환자를 신앙이나 빈부로 차별하지 않았으며 환자들을 소중하게 다루었으며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의료비를 면제해주거나 수술 후 또는 퇴원 후에 천천히 갚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리하여 제창병원은 인술을 행하는 사랑의 병원으로 널리 알려져 개원 후 2년 만에 해마다 1,2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가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어 병실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만주에 일본괴뢰국인 위만주국이 세워지면서 병원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일제는 1941년에 철수령을 내려 캐나다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그 후 2년 동안 의사 허상훈 장로가 맡아 병원을 운영을 하였으나 1943년에 문을 닫았다.
제창병원은 개원한 30년 사이에 민중병원으로서 가난한 조선인 환자들을 질병과 고통에서 구하기도 하였지만 의료실습과 훈련을 통해 많은 의료 전문 인력도 양성하였다. 연변지역 조선인 첫 세대 의사에 해당하는 임병호, 이옥룡, 마춘산, 박정극, 김경호, 주의권, 조성극, 구정서, 임윤정 등이 제창병원에서 양육된 의사들이다.(16)
제창병원은 어느 선교 병원과 다른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계지라는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10여 년 동안 부상당한 조선 독립군들과 활동가들을 치료하였으며 독립 운동가들에게 은신처와 모임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제창병원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문을 닫았고 그 일본의 패망으로 회생할 기회가 잠시 주어졌지만 동북삼성에도 공산주의 국가가 들어서는 바람에 역사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제창병원은 결코 역사에서 사라질 수 없는 병원이다. 제창병원은 처음부터 조선인 디아스포라들과 함께 고락을 함께한 캐나다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병원이었고 처음부터 인술을 실행한 병원으로 북간도 조선인들에게는 희망과 평화, 휴식과 치유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요, 선교사들의 보호 속에서 울분을 터뜨리며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독립운동”, “조선 독립”을 마음껏 논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캐나다장로회는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는데 특별히 조계지 안에 있는 제창병원은 북간도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마음 놓고 모일 수 있는 비밀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의 독립운동을 희석시키며 모르는 체 하기 일쑤인 연변의 사가들이 제창병원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창병원은 독립운동가들과 단체 또는 사건과 가로세로로 깊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 제창병원은 용정 <3.13 만세 시위>와 관련되어 있다.
3월 7일에 조선국내의 3.1운동 소식과 함께 33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달되자 김영학, 강백규 등 연변지구 독립투사들은 비밀회의를 열고 3월 13일에 용정에서 조선독립축하회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고 <독립선언서>와 대회 개최 <통지서>는 비밀리에 제창병원 지하실과 국자가 활판소에서 등사하여 연변 전 지역에 전달하였다. (17)뿐만 아니라 대회 연설이 끝난 후 중국군 보병 제2 퇀장 맹부덕이 용정 간도총영사관으로 몰려가는 시위대를 향해 사격하여 순식간에 13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48명이 부상을 당하자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은 즉시 병원(제창병원)으로 옮겨졌다. 부상자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치료 중에 4명이 사망하였다.
병원은 17명의 순국열사들을 위하여 추모 빈소를 마련해 주었으며 17일에 수천 명의 추모자들이 병원에 모여 순국열사들의 영구를 메고 용정 동남쪽 합성리에 있는 공동묘지에 열사들을 안장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렇듯이 제창병원은 북간도 무력 독립 운동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용<3.13만세 시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둘째 제창병원 지하실은 <간도국민회>의 활동, 토의, 연락장소가 되었다.
<간도국민회>는 본부는 일본영사관을 피해 본부는 연길현 하마탕에 두고 중부와 동서남북부에 5개의 지방회와 그 산하에 지회를 두었다. 각 지역의 목사와 시찰회의 순회 목사들이 각기 지회 회장을 맡았다. 국민회는 단체와 구성원의 안전과 비밀의 보장을 위해서 비밀 아지트를 치외법권 지역인 제창병원에 두어 토의와 행사, 연락장소로 사용하였다. (18)
셋째 제창병원은 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간도국민회> 산하의 <철혈광복단>의 성원인 윤준희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군사부장이며 철혈광복단원인 김하석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에 대한 강력한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한상호, 임국정, 박웅세, 김준 등과 상의하여 군자금을 강제 징수할 대상으로 친일 지주를 찾다가 “조선은행 용정파출소”에서 서기로 일하는 국민회 회원인 전홍섭을 만났다. 전홍섭은 길회선 자금이 용정으로 온다는 사실을 탐지하여 철혈광복단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였다.
1920년 1월 4일, 동량어구에서 일본 조선은행권 탈취에 성공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 등 4명은 블라디보스토크 떠나 1월 24일 신한촌의 채성하 집에 은신하였다.
일제는 조선인 은행직원인 전홍섭을 회령에서 체포하였으며 첩자를 통하여 윤준희와 최봉설 등이 제창병원 내에서 전홍섭과 여러 차례 접촉한 사실을 확인하고 1월 10일 새벽에 와룡동마을을 포위, 수색하여 최봉설의 부친 최병국과 동생 최봉준을 체포하였다. (19)
이렇듯 제창병원은 독립투사들, 열혈청년들의 만남과 연락 장소가 되었다.
넷째 제창병원은 1920년 일제가 조선인마을에 들어가 저지른 대학살의 잔악상과 죄상을 전 세계에 폭로하였으며 일본군의 학살과 방화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일제는 용정 <3.13만세시위> 후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무장독립운동단체들에 의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보복하기 위하여 독립운동단체의 근거지가 되는 마을 특히 간도국민회 지회가 있는 마을에 들어가 교회, 학교, 가옥을 방화하였고 크리스천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국더기> 용정선교부의 수석 선교사인 푸트와 제창병원 간호부장 엠마 엠 페르소프와 제창병원 원장인 마틴 (민산해)이 세계 언론에 알렸으며 일본 정부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20)
제창병원은 인술의 봉사뿐만 아니라 일본의 폭력과 군대의 불의한 민간 학살에도 정의의 목소리를 높여서 조선인의 억울함과 분노를 대변하였고 상처를 싸매주며 위로하였다.
제창병원은 실로 북간도 크리스천들의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과 함께 용정의 <3.13 만세시위>, <만세시위 부상자 치료와 순국열사 장례식>, <간도국민회>, 철형광복단의 <15만원 탈취사건>, <경신대학살>의 시련과 고통을 묵묵히 겪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졌을 때 탄압과 간섭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941년에는 강제로 추방을 당하였고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북간도 선교를 시작하고 용정에 선교지부를 열고 절망에 빠진 디아스포라 조선인들을 섬긴 선교사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구례선, 매길도, 박걸, 박혜란, 부록도 부부, 부두일 부부, 민산해 부부, 서고도 부부, 배례사 부부, 노아력 부부, 기애시. 맹혜련, 반부련, 육장안 부부, 부례수 부부, 백훈 부부, 배의도, 업배시, 안도선. (21)
그리고 배후에서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나눔과 섬김의 손길이 되어준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수많은 캐나다교회의 교우들을 그려본다.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조선인들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준 매리타임의 여신도회원들이 그립다.
인술(仁術)과 독립운동 지원을 동시에 펼친 그들이 있어서 북간도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의 기운이 하늘로 충천하였다.
2021.4.4. 주일
우담초라하니
미 주
1)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78쪽
2)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81쪽
3)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90쪽
4)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64쪽
5)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37쪽, 던칸 맥레는 함흥지역을 맡았지만 함흥 사람들이 외국인들에게 지나치게 배타적이어서 1905년에야 함흥에서 거주을 시작함.
6)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136, 137쪽
7)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150,151,152쪽
8)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390쪽
9)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153쪽
10)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153쪽
11) 연합선교위원회: 1915년에 캐나다장로회 서부분과와 동부분과가 하나로 통합되어 이름을 연합선교위원회로 바꾸었다.
12)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65, 166쪽
13) ⎾룡정문사자료 2집⏌, 78쪽, ⎾연변문사자료 8집⏌, 129쪽
14) ⎾룡정문사자료 2집⏌, 78쪽
15) ⎾연변문사자료 8집⏌, 130쪽
16) ⎾연변문사자료 8집,⏌, 131쪽
17) 양소전, 김춘선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164쪽
18) 김택 주필 외 ⎾길림조선족⏌, 660쪽, ⎾연변문사자료 8집⏌, 124쪽
19) 룡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80돐기념문집⏌, 247쪽,
20) 김연옥 번역 ⎾조선군사령부간도출병사⏌,299~ 315쪽,
21) 서굉일 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239, 240쪽
참고도서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양소전, 김춘선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김택 주필 외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5
룡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80돐기념문집⏌,연변인민출판사,1999
김연옥 번역 ⎾조선군사령부간도출병사⏌,경인문화사, 2019
서굉일 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고려글방, 1997
호이전 주필 외, ⎾연변문사자료 8집 종교사료전집⏌,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1997
김규철 편집 ⎾룡정문사자료 2집⏌,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1988
헬렌 F. 맥레 저 ⎾팔룡산의 호랑이⏌, 한신대학교출판부, 2010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개척⏌, 민족출판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