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회주사(懷州祠) 부지를 희사한 백당공(栢堂公)
백당공은 아버지 월암공(月庵公) 휘 형량(馨良)과 어머니 수원백씨(水原白氏)의 3남 중 장남으로 1907년(丁未) 안양에서 출생했다. 그의 휘는 대환(大煥), 초휘는 황(煌), 자는 여방(汝方), 호는 백당(栢堂)이다. 입향조 서계(書溪) 휘 백순(伯純)의 문명을 이어 문장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공은 대대로 문명이 드높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히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주변에서는 글 잘하고 예의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평판을 받았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문감(文鑑)'이라 불렀다. 이 말은 곧 글의 거울이라는 말이니 그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백당공의 문중활동도 매우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즉 현존하는 여러 기록으로 보아 1936년(丙子)의 백산재 중수는 물론 1974년(甲寅)의 장동 시조공 단소이전과 하산사 신축 그리고 사월재 신축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는 향년 72세를 1기로 1979년(己未)에 타계했다.
1) 회주사에 밭 600여평을 헌납하다
다산등(茶山嶝)에 자리 잡고 있다. 15세 통선랑 휘 덕룡(悳龍) 할아버지께서 누대의 생활터전인 장원봉 밑에서 나오셔서 사셨던 곳이다. 그 후 18세 습독공(習讀公) 휘 유형(由亨) 할아버지가 당신의 묘소가 있는 자리에 정자를 짓고 영천(靈川) 신잠(申潛)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과 종유하며 지냈던 곳이다.
그리고 지금 백산재(栢山齋) 강당자리에는 언제부터 옮겨지었는지 모르나 초가지붕의 다산재(茶山齋)가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너무 낡아 무너질 지경에 이를 때인 1936년(丙子)에 회은공 (晦隱公) 휘 원량(元良)이 자기 집 사랑채를 옮겨지어서 오늘에 이른다. 그 때까지도 장천종중 소유의 토지와 건물이었다.
평화가 장흥위씨의 성지로 본격 개발된 것은 1975년(乙卯)이다. 이때 장동 하산재에 있던 시조공 단소를 옮겨 하산사를 짓고 강당 외삼문과 제기고(祭器庫) 계단 등을 갖추고 소유도 도문중으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그 때 백당공은 자신의 소유 토지 561평을 문중에 희사해 유용하게 사용하게 한 것이다.
만일 그 토지가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신실과 강당만 있을 뿐 자동차 한대도 주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시조공사적비도 세울 자리가 없어 참으로 옹색한 성지가 됐을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모선지심은 후손 모두에게 여러 가지로 이로움을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화운재(花雲齋) 중건상량문을 짓다 (편제록p.178)
화운재는 안항공(顔巷公) 휘 덕후(德厚)의 묘각이다. 1955년(乙未)에 옛 재각을 헐고 중수했다. 재목은 가까운 산에서 베어 쓰고, 인건비 등 제반비용은 안항문중에서 조달했다고 백당공은 중수기에서 적고 있다. 그런 화운재가 지금 관리를 하지 않아 쓰러져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차라리 매도하거나 이건했으면 어떨까.
3) 사월재 상량문과 팔경시를 짓다 (편제록p.79, 86)
사월재는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에 있는 재각이다. 관북입조 휘 자공(自恭) 할아버지의 배위 수원백씨 할머니의 묘각으로 쓰기 위해 후손들이 60여년간 건축비를 모았다는 사실은 의재공과 계암공의 모선사실록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공이 지은 상량문에서는 1966년(丙午) 3월 봄에 재각을 상량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사월방 팔경을 노래했다. 옛날 선비들의 눈은 요즘 사람들에 비해 시적 감각이 달랐을까. 그때의 어른들은 어떤 곳에서나 시를 읊었다. 선인들은 어려웠던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보다 훨씬 여유롭고 풍류가 있었던 것이다. 유사들은 만나기만 하면 글을 짓고 살았으니 얼마나 멋있는 삶을 살았던가.
4) 연화단(蓮花壇) 사실서(序)를 쓰다 (지장록p.1060)
능주파는 위씨의 종파이지만 후손이 영체(零替)하여 재각하나 갖추지 못한데다 묘소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단을 마련, 공이 1945년(乙酉)에 단소를 마련하는 사실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첫댓글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은 안양면 월암리 태생입니다.
公은 1936년 본향 평화리 회주도문중에 600여평을 희사, 1955년 관산읍 농안리 소재 안항공 묘각 운산재 이축, 1966년 용산면 계산리 소재 사월재 건립, 1975년 하산사 건립과 다산재에서 백사재로 작명 등 중요 문중사를 주도하였습니다.
사진 : 백당공 영정
본향 관산읍 농안리 소재 안항공 묘각 운산재 전경 및 액호입니다.
1955년 찬(撰)한 운산재 중건상량문 입니다.
본향 용산면 계산리 소재 사월재 내 사월재 팔경을 1966년 찬(撰)하였습니다.
1977년 본향 회주사 백산재 내 하산사기를 찬(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