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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1일 성령강림절후 27번째, 추수감사절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305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눅17:11-19절(신124쪽)입니다.
제목: 우리의 감사에 대하여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감사할 조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공기와 물과 햇빛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단 1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아침에 먹었던 음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롬1:21). 이는 이렇게 소중한 것들이 주어지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구원받은 신자라는 표지입니다. 즉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것 중에서 하나가 감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범사에 감사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치유를 받은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였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라고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탄식하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감사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더욱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11)였습니다(9:51; 13:22). 이것은 예수님이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즉 구약에서 모든 언약에 따라 메시야의 사명을 다 이루시기 위해서 골고다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구속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12).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요4장)처럼, 의도적으로 그들을 만나신 것 같습니다.
문둥병자들은 그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12)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는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레13:45-46). 그들은 사람들이 모르고 그들에게 접근하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이적으로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긍휼히) 여기소서’(13)라고 외친 말은 당시만 해도 불치의 문둥병자인 자신들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의 긍휼에 근거하여 치유를 구하는 간청입니다.
그들의 간청에 맞지 않게 예수님은 그저 간단하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굉장한 기적이나 능력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지 이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문둥병이 치유된 후에 하는 절차로 문둥병이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음을 검증받기 위한 것입니다(레14:2).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아직 치료되지 않는 상태로 제사장에게 갈 정도로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제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14).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제사장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모두가 깨끗하게 나은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문둥병자들은 아직 눈으로 증거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과정에서 치유의 기적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입니다. 새 언약의 복음에 따라 우리에게는 완전한 치유인 몸의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이 말씀에 대하여 믿음으로 계속 걸어가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기적, 즉 문둥병으로부터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11)라는 말씀에 근거한 복음의 약속입니다.
치유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너무나 기뻤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보는 사람, 뛰면서 춤을 추는 사람, 감격하여 우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을 치유하신 예수님께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치유된 자신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급하게 달려갔습니다. 치유를 확인받은 후에 자신의 가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그 기쁨도 감격도 감사도 조금씩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한 사람, 사마리아인은 돌아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치유함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왜 이 한 사람만 돌아왔을까요? 돌아온 그의 행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하여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16)을 돌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고, 치유하신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16)는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이신 왕’이요, ‘하나님이신 주님’으로 인정하였다(18)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은 다른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으로만 알고, 순간적으로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음을 입고 예수님께 돌아온 한 명의 문둥병자는 자신의 치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으로 알았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는 것도,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도 뒤로 미루고 먼저 예수님께로 돌아와 그의 발아래에 엎드리었고 그에게 감사한 것입니다. 즉 그에게는 구원을 받을 참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문둥병자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19)고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이적의 믿음으로 문둥병에서 치유를 받았지만, 사마리아 문둥병자처럼 구원을 받을 믿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문둥병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가 되시며, 그리스도로서 왕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구원하신 주님을 모시고 계속 살면서 구원에 감사하고 범사에도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기적과 이적을 추구합니다. 많은 목사가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의 직접적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런 영적 경험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랬다고 해도, 그것들이 복음의 선교와 전도를 위한 하나의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구원을 받을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런 영적 체험이 악한 영의 미혹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받을 믿음’과 ‘구원받지 못할 믿음’을 구별하였습니다. ‘구원받지 못할 믿음’은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그리고 기적적 신앙입니다. ‘역사적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머리로만 아는 믿음입니다. ‘일시적 신앙’은 일시적으로 믿다가 환란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사라지는 믿음입니다. ‘기적적 신앙’은 치유를 받은 아홉 명의 문둥병자처럼 오직 기적과 이적에만 관심 두는 믿음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구원받지 못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믿음’은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문둥병자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왕이 되심을 알고 그를 믿고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을 참된 믿음의 시금석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신뢰입니다. 만약 이것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큰 이적의 영적 경험을 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 아홉 명의 문둥병자에 대해 탄식하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18)으로 인정하십니다. 즉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자신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는 행위를 하나님, 주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의 참된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18절에서 ‘사마리아인’이라 하지 않으시고, 그를 ‘이방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도적으로 그를 유대인과 선명하게 대조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가 단지 한 명의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시고 장차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오히려 많은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드리며 자신에게 나아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 죽임은 언약 백성인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사역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속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에 대해서 탄식하셨습니다(17). 이것은 자신의 치유에 대한 그들의 감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일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처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언약 백성인 그들에 대하여 탄식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질병이 치유된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만났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확증을 받고 가정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치유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인처럼 영원한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생과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 감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시면서 탄식하신 것입니다(17-18).
성도 여러분, 이 치유함을 받은 사마리아 문둥병자처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참된 믿음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항상 영원히 감사,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구원받은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골2:6-7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히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세워져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기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에 있는 말씀들은 다 구원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받는 수동태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결과로 넘치게 감사하라는 우리가 하는 능동태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열매는 오직 감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구성은 첫째는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둘째는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그리고 마지막은 우리의 감사에 관하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항상 우리에게 문둥병 치유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생로병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으로 오신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빌4: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서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약속의 말씀은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먼저 모든 염려와 생각을 주님께 맡기는 긍정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이는 천지가 흔들려도 주님께서 새 언약대로 우리에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신 방법으로 이 모든 것을 사용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은 신자인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방법입니다.
‘레나 마리아’가 쓴 '내 인생의 악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손으로 쓴 것이 아니라, 발로 쓴 책입니다. 그녀는 1968년 스웨덴에서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신자인 그녀의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로 확신하고 그녀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습니다.
레나는 하나밖에 없는 오른발로 수영과 십자수, 요리와 피아노, 운전, 성가대 지휘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3살 때부터 수영을 시작해서 스웨덴 대표로 세계 장애자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대학에서 음악과를 졸업한 후 복음송 가수로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은혜로운 찬양과 간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레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에 가능했다"며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가장 기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긴 적이 없고, 오히려 그 장애가 믿음과 더불어 오늘날 자신을 있게 했다고 고백합니다. 정말 그녀는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비결을 아는 사람,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잘되고 형통할 때 감사가 우러나오는 줄 알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인생과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진정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깨달음의 깊은 세계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그때 평안과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감사가 없는 곳은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도 시인 ‘타고르’는 “행복은 감사와 비례 한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구원의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시며, 진정으로 평안과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찬송 592장을 부르시면서,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 같이) 축도(주기도문)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