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주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들은 귀가 있는 자들이 듣게 하려고 하신 것이며 또 동시에 사모하며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비유를 깊이 생각하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일명 오병이어 곧 떡 다섯개와 작은 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외에 오천명이상이 먹는기적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서 어떤 의미를 얻어야 할까요?
그것은 먼저 세례요한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해줍니다. 비록 그가 비참하게 헤롯왕과 그 아내 헤로디아의 손에 헛되게 죽은 것같아도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즉 작은 떡과 고기가 나눠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생명을 공급받은 것처럼 세레요한의 희생적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세례요한의 죽음과 오늘 의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죽음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태도를 버리고 그 가치로운 죽음에 합당한 존경과 경외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러 온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에 작은 떡과 고기가 떼어져서 그들이 생명을 공급받은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대적 희생적 죽음을 하심으로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깊고 영원한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이 "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라는 말씀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신과 우상을 버리고 오직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분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풍성한 삶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축사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결과를 본문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이는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와같이 예수님의십자가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의 삶을 풍성케 합니다. 여기서 풍성한 삶을 산다는 말은 세상현실에 눌려 사는 위축되고 무기력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사는 살아있는 자의 삶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하나는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이 생명과 풍성의 길을 여셨지만 이 진리를 사람들이 받아 경험하게 하는 것은 바로 제자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19절은 이렇게 그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19-20절. 그러니 이 생명과 풍성의 진리의 도구가 바로 우리 즉 예수님과 그 말씀을 먼저 믿고 받은 제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문명과 문화를 누리고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생명을 잃고 영적 배고픔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는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은 두려움과 낙심등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의 길을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의 희생적 죽음으로써 친히 여셨습니다. "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장 20절.
그러므로 누가 이 생명과 풍성의 진리를 이들에게 전해야 할까요? 내가 주님께 먼저 떡을 떼어 받고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눠주는 제자는 어디있습니까? 그는 바로 예수님과 그 말씀을 먼저 믿고 받은 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6장 8절에서 이렇게 우리를 찾습니다.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에 이사야는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찾는 것은 받은 생명의 떡을 떼어 나누는 내가 속히 그리고 계속해서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