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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소금강 逍遙山(2)
- 위 치 :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소요동)
- 위 치 : 587m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5. 3. 12. 08:00 ~
2. 나 들 목 : 소요산관광지원센터주차장 원점회귀
3. 참석인원 : 26명(새내기 2명)
4. 등산코스 : 소요산관광지원센터주차장 - 일주문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칼바위능선 - 나한대 - 의상대(정상) - 공주봉 - 주차장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국 ➠ 소요산광광지원센터주차장
▶ 거 리 : 103km
▶ 소요시간 : 1시간50분(다음지도)
- 다녀온 길 : 팔미교차로-하천교차로-서파교차로-일동교차로-만세삼거리-신장삼거리-박석고개사거리-대전삼거리-소요산광광지원센터주차장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20 김 현 자
6. 날씨상항
◆ 주간날씨 전망
- 2015. 3. 9. (월요일) 18:00 발표 서울. 경기지역 날씨전망은 기압골의 영향으로 15일에는 비가 오겠으며, 그 밖의 날은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어 가끔 구름 많겠다고 전망하였다. 기온은 평년(최저기온 : -2 ~ 1도, 최고기온 : 9 ~ 14도)로 전반에는 비슷하거나 조금 낮겠고, 후반에는 비슷하거나 조금 높겠으며 강수량은 평년(강수량 : 1 ~ 2mm)과 비슷하겠다고 하였으므로 산행환경은 “이상 없음” 이었다.
◆ 오늘의 날씨
7. 활동상황
○ 08:00 --- KBS춘천방송국 앞 출발(38선휴게소 경유)
○ 10:05 --- 소요산관광지원센터주차장 도착
○ 10:15 --- 단체기념사진 촬영 및 일정안내
○ 10:18 --- 들머리진입
○ 10:21 --- 요석공원
○ 10:25 --- 요석공주별궁지
○ 10:26 --- 매표소
○ 10:36 --- 일주문약수터
○ 10:37 --- 일주문
○ 10:40 --- 원효폭포, 원효굴,
○ 10:43 --- 108계단, 공주봉갈림길
○ 10:45 --- 해탈문, 원효대
○ 10:48 --- 추담선사부도탑
○ 10:52 --- 자재암경내, 대웅전, 나한대, 청량폭포
○ 11:25 --- 하백운대
○ 11:49 --- 중백운대
○ 12:10 --- 상백운대
○ 12:12 --- 칼바위정상
○ 12:18 --- 칼바위초입
○ 12:22 --- 칼바위안내도
○ 12:35 --- 점심식사
○ 13:02 --- 선녀탕갈림길
○ 13:46 --- 나한대
○ 13:57 --- 의상대(정상)
○ 14:24 --- 공주봉
○ 14:36 --- 일주문, 주차장갈림길
○ 14:46 --- 헬기장
○ 15:15 --- 주차장도착
○ 15:30 --- 버스 내 하산행사
○ 15:40 --- 주차장 출발
○ 18:00 --- KBS춘천방송국 앞 도착(광명휴게소, 에덴스포츠타운휴게소 경유)
Ⅱ. 지역특성
<정상에서 본 상봉암동일원 전경>
1. 지역유래
- 소요산이 위치한 상,하봉암동은 법정동이고 소요동은 행정동이다. 마을 앞 쪽에 커다란 바위산이 있으며 그 바위산 중에 황새의 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바위를 황새바위라 불렀으며 부엉이가 자주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그 남쪽을 윗사야위, 북쪽을 아랫사야위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이 바위가 새바위 즉, 봉암(鳳巖)으로 불린 데서 마을을 상,하봉암동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2. 소요산 살펴보기
<소요산관광안내도>
- 산림청선정 100대 명산
- 한국의 산하 선정 인기명산 100 중 38위
- 한수 이북 최고 명산
- 경기의 소금강
- 1981년 국민관광지 지정
- 소요산은 경기도 동두천시 동북방 소요동에 위치하고 동두천시청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5km가량 지난 곳에 있는 수도권 최고의 단풍 명산이다. 화담 서경석, 양봉래,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요산은 규모는 작지만 산세가 특이하다. 소요산은 산세가 그다지 장쾌하고 웅대하지 않지만 형상미의 극치를 보이듯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 하고 심연의 계곡은 오묘한 정취를 발산하며 산 정상인 의상대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 나한대, 공주봉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봉우리가 원형을 이루고 있어 산행의 들머리와 날머리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봄철은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고 여름철에는 오염되지 않은 계곡에서 한낮 더위를 피할 수 있으며 가을 단풍은 봄철의 꽃 같다고 할 정도의 그 화려함으로 유명하여 예로부터 경기의 소금강(금강산)이라 일컬어졌다. 소요산 등산코스는 아래와 같이 4개 코스가 있다.
등산코스
▶ 제1코스 : 일주문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선녀탕 - 자재암 - 일주문 -
관광지원센터 (거리 5.71㎞ / 1시간30분 소요)
▶ 제2코스 : 일주문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칼바위 - 선녀탕 -
자재암 - 일주문 - 관광지원센터 (거리 6.53㎞ / 2시간 소요)
▶ 제3코스 : 일주문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칼바위 - 나한대 -
의상대 - 샘터갈림길 - 구절터 - 일주문 - 관광지원센터
(거리 7.04㎞ / 3시간30분 소요)
▶ 제4코스 : 일주문 - 자재암 -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 - 칼바위 - 나한대 –
의상대 - 공주봉 - 구절터 - 일주문 - 관광지원센터
(거리 8.19㎞ / 4시간 소요)
Ⅲ. 산길여정
<소요산등산안내도>
- 소요산은 최근 2011. 2. 24 다녀온 후 4년여 만에 다시 찾은 산이다. 2009년도부터 수도권 내에 있는 명산을 시리즈로 엮어 탐방을 마친 이후 수도권 내 같은 산 같은 코스를 반복하여 찾은 유일한 산으로 기억된다. 동두천시에서 제공하는 등산정보에 의하면 제1코스에서 제4코스까지 4개의 등산로가 있다. 4개 기본코스의 소요시간이 짧게는 1시간30분에서 길게는 4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 중에서 제4코스가 소요시간 면이나 소요거리 면에서 하루일정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코스로 판단되었기에 2011. 2. 24일에 이어 또다시 같은 코스를 선정하였다. 다만 하산 길 공주봉 구간 중 일주문. 주차장갈림길에서 현장 상황에 따라 일주문방향 보다는 주차장으로 곧바로 하산하는 길을 염두에 두고 안내준비를 마쳤다.
- 소요산관광지를 개괄하여 살펴본다. 소요산광광지에는 신라시대 고승인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설화가 서려있는 요석공주별궁지와 상징아치 연리지문, 조선 초 태상왕 이태조가 별궁을 짓고 지냈다는 행궁지 등 유적이 산재해 있다. 특히 원효대사가 고행 수도하였다는 것과 관련된 지명인 자재암, 원효폭포, 원효굴, 원효대, 청량폭포 등 명소들이 많다. 그리고 주변 관광시설로는 안보교육의 산실인 자유수호평화박물관, 관광객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건강오행로 등의 볼거리와 산채, 떡갈비, 초계탕 등을 소재로 한 먹거리가 풍성하여 탐방객들의 즐거움을 더해 주고 있다. 또한 가족단위 단체 캠핌 등을 위한 야영장이 2009년부터 개방되어 자연체험의 장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관광지 입구에는 넓은 주차공간과 더불어 편의시설이 확보되어 있고 전철1호선이 소요산역까지 운행되기 때문에 춘천에서 지하철을 이용한 당일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 수도권에서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명산인 소요산이란 이름 덕분에 은근히 차고 넘치는 분위기 조성을 기대했었는데 평년작 수준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빠른 길 찾기 정보에 따라 10:00경 목적지 도착을 예상했었는데 예상시간대에 무사히 안착하여 일상을 열었다. 넓은 주차장에서 단체고객은 우리 일행 분들이 유일하였다.
<요석공원>
10:21 요석공원 경유
- 주차장 한편에 있는 대형 소요산관광안내도 앞에서 오늘일정에 대한 보충설명과 함께 단체기념사진을 남기고 들머리에 들었다. 소요산은 소요산역이 있는 소요동일원이 산행의 들머리가 된다. 입구에서 주차장과 상가를 지나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요석공원으로 진입한다. 요석공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소요산등산로안내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안내판, 야외음악당, 요석공주별궁지, 소요산매표소, 일주문약수터, 일주문을 연이어 지나면서 원효폭포와 원효굴 앞 속리교 앞에 이르렀다.
- 우리 일행 분들이 거쳐 온 요석공원을 살펴보고 넘어간다. 1999년도에 문을 열었다. 동두천 소요산 국민관광지 안에 옛 전설을 기려 조성한 요석공원은 총 8백여 평의 규모에 각종 조각품 및 모형고인돌과 함께 소요산 단풍나무, 철쭉 등 1천여그루가 식재되었다. 요석공원은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과 함께 이곳에 와 별궁을 짓고 원효대사의 넋을 기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공원에서 매년 10월 소요단풍제, 왕방산국제MTB대회, 동두천 락 페스티발 행사가 열린다.
- 여기서 원효와 요석공주의 설화를 소개한다. 스님께서 일찍이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보자마자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그 후에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요석공주와 관련된 사료와 내용들이 많지 않아 그의 인물적 성격을 파악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한다.
<요석공주별궁지>
10:25 요석공주별궁지 경유
- 소요산관리사무소 동쪽 약 20m 지점에 한자로 ‘요석공주별궁지(瑤石公主別宮址)’라는 작은 비석이 세워진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요석공주가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소요산에서 아들 설총과 함께 기거하던 터라고 한다. 요석공주는 소요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던 원효를 따라와서 수행처 근처에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기거하며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소요산 자재암에는 원효와 요석공주가 관련된 곳들이 많다. 소요산의 여러 산봉우리 중 하나가 바로 공주봉(公主峰)이다. 공주봉은 요석공주를 위해 원효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표지석이 있는 자리가 정확한 별궁지가 아니라고도 한다. 그 예로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바위골짜기 평평한 터에 두 군데의 옛 궁터가 있다. 예로부터 요석공주의 궁터라고 전한다.” 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소요산기」에는 요석공주 궁지는 “원효폭포에서 서북쪽 80장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주문>
10:37 일주문 경유
- 일주문에 이르기 전에 매표소를 경유한다. 매표소에서는 문화재관리비 명목으로 어른 개인 1,000원, 어른 단체 900원을 징수한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무료입장할 수 있는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한다. 말만으로 통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모자를 벗어 시원한 머리통을 과시하고 그냥 통과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당당하게 국가공무원증(경로우대증)을 제시한다. 오늘도 현장에서는 외관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인 듯 싶었다. 모자를 벗을까? 말까? 를 놓고 망설이다가 신분증을 제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배낭에 수납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제시하려는 순간 고맙게도 그냥 들어가세요. 라는 허락이 떨어지는 바람에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본인의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에서 낌새를 알아차렸을 듯싶었다.
- 매표소에서 10여분 남짓 올라가면서 소요산자재암이란 현판이 붙은 일주문을 경유하였다. 여기서 일주문의 의미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원래 지붕을 가진 일반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일주문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건축양식의 특징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일주문의 경지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위치이다. 다만 단호한 결심과 실천 의지를 보이면서 구도자로서의 길을 시작하는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주문을 기준으로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생사 번뇌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원효폭포>
10:40 원효폭포, 원효굴 경유
- 원효폭포와 원효굴 앞 속리교를 건너면서 왼쪽으로 원효폭포 그 맞은편으로 원효굴, 원효굴 암벽 위로 원효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원효성사가 폭포 우측 석등(石燈)에 앉아 고행수도 했다는 전설이 연유하여 예부터 이 폭포를 원효폭포라고 불러오고 있다. 원효폭포는 갈수기인 탓에 빙폭이 녹아내려 가냘픈 물줄기가 이어진 실폭 정도에서 만족야만 했다. 속리교를 건너면서 소요산등산종합안내도 설치지점에 이른다. 이 지점은 자재암과 공주봉 방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여기서 진행방향 왼쪽 108계단을 따라 오르면 자재암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난 계곡 길을 따라 오르면 남쪽 능선 위 공주봉을 거쳐 소요산의 정상인 의상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지점에 일주문 0,1km, 공주봉 1,3km, 자재암 0,35km, 중백운대 1,4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이 지점 오름 구간에 나무데크 108계단과 해탈문이 설치된 것이 예전과 비교되었다.
<108계단>
10:43 108계단 경유
- 108계단은 예전에 없던 시설물이다. 나무테크로 된 108계단을 올라 마지막 계단을 벗어나면서 해탈문을 빠져나간다. 해탈문에서 곧바로 원효대로 이어졌다. 108계단을 거쳐 해탈문을 체험한 것을 계기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는 108가지 번뇌에 대하여 살펴본다. 108번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해석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중생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의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또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과 관련이 되어 6 x 3=18에 다시 18을 더해서 36이 된다. 거기에 36개의 번뇌가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기 때문에 36 x 3=108이 된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늘 느끼게 되는 108가지의 느낌을 의미한다. 실제 인간의 번뇌가 108가지라기 보다는 그만큼 많다. 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듯싶다. 불교에서는 108개의 알로 염주를 만들어 돌리면서 삼보를 생각하면 108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하며 혹은 본래적 자신의 마음인 일심의 회복을 강조하기도 한다. 비단 염주뿐만 아니라 종종 절에서 행하는 특수한 기도법인 '108배' 또한 바로 이 108가지 번뇌를 순환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오늘 체험한 108계단에도 108번뇌의 의미가 내포되었을 것으로 본다.
- 또한 불교에서 해탈문(解脫門)은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는 세 가지 선정(禪定)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선정에는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작해탈문의 세 가지가 있다. 오늘 모두님들께서 108계단을 올라 해탈문을 통과하였으므로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다. 더욱이 해탈문을 빠져나오면서 해탈문 중앙에 매달린 종을 치신 분들은 해탈의 경지가 배가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효대>
10:45 원효대 경유
- 원효대는 원효굴 암벽 상단에 위치한다. 원효대사가 수도 한 곳이라는 전설이 서려 있어 원효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절벽 위 반석 주변으로 목재 난간으로 된 안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공주봉 분기점에서 부터 108게단, 해탈문, 원효대를 거쳐 자재암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나무테크 계단, 전망대, 추담선사 부도탑, 해우소 등이 설치되어 있어 편의를 제공한다.
- 원효(元曉)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 원효는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스스로 실계(失戒)를 한 후 자신을 소성(小性)거사, 복성(卜性)거사라 칭했다. 그리고 화엄경의 진리를 담은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렸는데 이는 자재암의 창건설화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요석공주는 홀연 떠나버린 원효를 찾아 아들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공주는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산위에 올라 원효가 정진하고 있는 원효대를 향하여 절을 올렸는데, 그 때 절을 올렸던 곳이 공주봉이란다. 또 소요산 정상은 의상봉인데 이는 훗날 사람들이 원효와 함께 수행했던 의상대사를 모셔온 셈이었다. 원효대사가 머물자 소요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연 식수가 부족했다. 온통 바위산이라서 수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원효가 선정에 들어 물줄기를 찾아내 바위틈을 꿰뚫고 물이 나오게 했다. 사람들은 이 우물을 ‘원효정(元曉井)’이라 불렀고 지금 나한전 옆에 있는 원효샘이다. 만병통치의 약수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지만 스님들이 수행에 게으름을 피우면 금세 물줄기가 가늘어졌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이곳은 예전에 물이 없어서 승려들이 깃들지 못했는데 원효가 살고부터 단물 방울이 바위굴에서 솟아났다네. 라는 시를 지어 원효를 기렸다. 고려시대에도 원효와 관련된 이야기가 소요산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법보신문 중에서>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혼란한 시기에 생존하였던 원효(元曉 617 -686)는 의상과 더불어 당나라에 유학하려 두 차례(34세, 650년 및 45세, 661년)나 시도하였으나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깨닫고 혼자 되돌아와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왕성한 저술, 선교활동을 펴, 그 사변력, 통찰력과 문장력에 대한 명성이 항간에 자자하였다. 그는 광대들이나 쓰는 무애박을 치고, 무애가를 부르며, 무애춤을 추며, 광대, 백정, 기생, 시정잡배, 몽매하고 늙은사람들 사이를 방방곡곡 떠돌며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고 거문고를 켜며 무수한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코흘리개 아이까지도 부처에 대해 알게 되었다.
- 김춘추의 둘째누이인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첫 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고 홀로 되었는데 불심이 깊었던 공주는 인격이 고매하고 화랑시절 백제전투에도 참가했던 원효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는 667년 문무왕 7년경(51세) 부왕인 태종 무열왕의 과부공주인 요석과 만나 얼마 후 설총을 낳고 이후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라 하며 무애의 보살행을 행하였다 한다. 결혼 전 원효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누가 자루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이를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다는 원효의 결혼에의 관심으로 보는 견해도 많지만 새 시대의 지평을 열어보이리라는 사상사의 선언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자재암(自在庵)전경>
- 10:52 자재암 경유
- 현대식 해우소를 지나면서 자재암 경내에 이르렀다. 자재암이란 편액이 걸린 부속건물을 지나 비닐로 전면에 포장이 쳐진 대웅전이 있고 바로 옆으로 석굴에 위치한 나한전이 있다. 여기서 아주 물맛 좋은 샘이 솟아나온다. 원효 샘물이라고 불린다. 이 샘물이 소요산을 찾는 산객들의 부족한 물을 보충하는 급수원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한다. 이 물은 최고의 차 맛을 내기로 유명하여 이곳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담론과 산책을 유도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 앞에는 높이 20여 미터의 청량폭포가 있다. 이 폭포 역시 가뭄 탓으로 건폭에 만족해야만 했다.
- 자재암은 동두천시 평화로 2910번길 406-65에 위치한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25년 (974)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重建)했다. 전통사찰 제80호,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된 자재암에는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1994.10.17)『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密多心經若疏)』언해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 판본은 현재 보물 제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책이나 서울대학교본에 없는 전이 붙어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훨씬 양호하다. 저지(楮紙) 목판본이며 목판본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것인 듯 표지가 없다.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는 1994년 10월 17일 보물 제 1211호로 지정되어 소요산 자재암에 소장된 문헌이다.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약소에 송나라 중희의 현정기를 붙여 편찬한 주석서인데 세조10년(1464)에 금강경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발간하였다.
-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상백운대안내판>
- 12:10 상백운대 경유
- 소요암까지 오는 동안 이러저런 자료를 챙기며 소요하다 보니 후미 중 후미 신세가 되었다. 소요암에서부터 하백운대까지는 탐방로 대부분이 급사면 계단길로 이어졌다. 일부 구간은 계단 폭이 높아 불편함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아마도 지난겨울 트레킹 수준의 손쉬운 코스에 숙달되다 보니 몸 상태가 그 수준에 적응돼 있는 것이 원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백운대 정상에 이르면서 휴식중인 선발팀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선발팀을 먼저 출발시키고 현위치에 대기하면서 후미 팀과 합류하여 동행하였다.
- 11:25에 하백운대 정상을 경유하였다. 하백운대 정상에는 해발 440m, 자재암 0,65km, 중백운대 0.4km를 알리는 이정표, 하백운대안내판, 119구급함, 구조신고 안내판, 야생동물보호구역안내표주 등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하백운대에서부터는 낮은 오르내림의 능선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백운대, 상백운대, 칼바위능선,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을 비롯하여 상봉암동일원이 한 눈에 조망된다.
- 하백운대안내판에 하백운대는 소요산 백운대 능선의 제일아래 봉우리로 이 위로 중백운대와 상백운대를 거쳐 의상대와 공주봉으로 이어지는 말발굽모양의 등산로가 이어진다. 소요산은 일찍이 절묘한 산세와 수려한 계곡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단풍으로 작을 금강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양사헌, 이율곡, 성혼, 허목 등 당대의 문인, 학자, 시인들이 이 산을 찾으며 그 절경을 노래하였다. 이산에 머물며 수행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이렇게 노래하였다고 안내하고 있다.
길 따라 계곡에 드니 봉우리마다 노을이 곱다.
험준한 산봉우리 둘러섰는데
한줄기 계곡물이 맑고 시리다.
- 11:49에 중백운대 정상을 경유하였다. 중백운대 정상에는 해발 510m와 상백운대 0.5km, 하백운대 0.4km를 알리는 이정표, 중백운대안내문 등이 세워져 있다. 중백운대에서 잠시 오르면 상백운대 0.3km, 덕일봉 0.7km, 중백운대 0.3km를 알리는 이정표, 선녀탕 1.0km, 상백운대 0.25km, 중백운대 0.3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근거리 어간으로 연이여 나온다. 이 지점이 덕일봉이나 선녀탕 방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하백운대에서 중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큰 부담 없는 능선 사면길이다.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로 가는 길 역시 경사가 완만한 밋밋한 길이지만 능선 남쪽은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다. 중백운대에서 530봉에 이르러 북쪽 능선을 따라 감투봉에 올랐다가 능선길을 따라 신북 온천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 중백운대안내판에 중백운대는 소요산의 일주문 왼편 백운대 등산로의 상백운대, 중백운대, 하백운대의 중간 봉우리로 푸른 산과 붉은 단풍 그리고 흰 구름이 어우러지는 명승이기에 이를 중백운대라 이른다. 고려 말의 고승이자 해동불교의 법조인 태고 보우선사는 백운암의 노래라는 시에서 이곳의 절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고 안내하고 있다.
소요산 위의 흰 구름은 떠오른 달과 함께 노닌다.
맑은 바람 불어오니 상쾌하여라.
기묘한 경치 더욱 좋구나.
- 상백운대에 이르면서 중간그룹과 합류하였다. 상백운대 정상은 헬기장크기의 작은 안부로 이루어 졌다. 상백운대 정상에는 경기도소방재난본부에서 설치한 산불. 산악사고시 긴급연락처 119와 현위치 1-8(상백운대)를 알리는 안내표주가 있다. 정상 안부 한 구석지에 學生淸道錫弘之墓가 자리하고 있다, 상백운대에서 선녀탕이 있는 계곡으로 곧바로 내려갈 수도 있고, 칼바위능능선과 나한대를 거쳐 정상인 의상대까지 갔다가 공주봉을 경유하여 만나는 갈림길에서 일주문이나 주차장방향으로 곧바로 하산할 수도 있다. 상백운대에서 칼바위능선 방향으로 2분여 남짓 지나면서 상백운대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상백운대 정상 안부일원에서 점심식사를 할 요량이었지만 때마침 살랑거리는 바람기가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부담스러움으로 작용하였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다음 장소를 물색하기로 하고 칼바위능선으로 향했다. 칼바위능선 접어들면서 점심식사중인 선발팀과 합류하였지만 같은 장소에 밥자리를 펴기에는 현장의 여건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 상백운대안내판에 상백운대는 소요산 일주문에서 오르는 왼편 등산로를 백운대라 부르며 이를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로 나눈다. 산세의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단풍과 청량한 하늘 전체에 유유히 흐르는 구름이 어우러져 문자 그대로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상백운대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왕자의 난으로 실각한 이후 이 곳 소요산아래 행궁을 짓고 머물며 불교 수행에 힘썼는데 그는 자주 이곳 백운대에 올라 경치를 즐기며 동시에 자신의 회한을 달랬다고 안내하고 있다. 그가 백운대에 올라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 온다.
넝쿨을 휘어잡으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흰구름 가운데 암자하나 놓였네
내나라 산천이 눈아래 펼쳐지고
중국땅 남강조차 보일듯 하이
<칼바위능선안내판>
12:12 칼바위능선 진입
- 칼바위능선에 접어들어 현장의 상황을 접하면서 왜 이름이 칼바위능선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해서 감이 잡혔다. 그러나 위험구간은 어김없이 우회길이 개설되어 있어 안전산행에 도움을 줬다. 이 정도의 난이도는 지금까지 산행을 통하여 수 없이 체험한바 있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상백운대를 출발한지 약 12분 남짓 경과하면서 칼바위능선 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칼바위능선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칼바위능선 약0,5km를 통과하는데 약 10분 남짓 걸렸다. 칼바위능선을 경유하여 선녀탕입구 갈림길을 코앞에 둔 지점 사면 안부에서 중간그룹과 후미그룹 일행 분들께서 함께 점심식사를 마쳤다.
- 칼바위능선안내판에 칼바위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기고, 크고 작은 편마암들의 바위라는 의미로, 상백운대에서 시작하여 선녀탕 입구 하산로까지 약 500m 가량 연속으로 이어진 조금은 긴장되는 구간이다. 수려한 소요산의 절경을 한층 더 뽑내 주는 칼바위는 그 기세나 산세가 웅장하고 노송과 함께 절경을 이루며 뒷 편으로 소요산지맥과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 칠봉산이 연결되어 마치 용의 등처럼 동두천의 동북쪽을 휘감고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 점심식사를 마치고 13:00을 넘기면서 선녀탕갈림길에 도착하였다. 칼바위능선과 나한대 어간 능선안부 선녀탕갈림길에는 상백운대 0.7km, 나한대 0.6km, 선녀탕입구 0.8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 갈림길은 의상대를 경유하지 아니하고 하산하는 마지막 분기점이다.
- 여기서 회장님을 비롯한 중간그룹 일행 분들을 나한대 방향으로 먼저 출발시키고 난 후 낙오자 한 분과 합류하기 위해 현 위치에 머물렀다. 낙오자가 현 위치에 당도하는 대로 총무님을 비롯한 김 영 만님과 함께 선녀탕방향으로 하산시킬 요량이었다. 낙오자의 현 위치를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낙오자의 모습은 도무지 나타나지를 않았다. 세월아 네월아 어찌나 뜸을 들이는지 급기야는 김 영 만님께서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가 하산 중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내려오는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김 영 만님께서 낙오자는 제가 모시고 선녀탕 방향으로 하산하시겠다면서 먼저 출발하시라는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총무님과 동행하여 나한봉으로 향했다. 여기서 상당시간을 지체한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정상을 코앞에 두고 그냥 하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낙오자의 하산시간대 이전에 하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일정운영에 도움 주신 김 영 만님에게 감사드린다.
<나한대안내판>
- 13:46 나한대 경유
- 나한(羅漢)은 불제자 중에서 번뇌를 끊어서 인간과 하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미 생사를 초월하여 더 이상 배울만한 법도가 없게 된 사람으로서, 불교의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聲聞)의 네 가지 과(果)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 의 성자(聖者)를 이른다. 나한대란 이름은 자재암 나한전과 무관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한대는 의상대 다음으로 높은 봉이다. 선녀탕갈림길에서 0,6km에 불과하지만 급사면 구간이기 때문에 속도를 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나한대에서는 하백운대에서 칼바위능선에 이르는 전 구간과 의상대를 비롯한 공주봉일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지점에서 바로 코앞에 의상대 정상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도토리 키 재기 하듯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나한대는 해발 571m이다. 여기서 의상대 0.3km, 상백운대 1.2km, 금송굴 0.7km이다.
- 나한대안내판에 나한대는 소요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571m)로 오른편에는 의상대와 공주봉이 위치해 있고 왼편에는 선녀탕 하산로 칼바위와 상백운대가 위치해 있다. 나한이란 의미는 불교를 수행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르는 명칭으로 신라시대 원효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초에 나옹 등 여러 고승들이 수행하였던 장소이고, 특히 조선 태조가 이 절에 머물며 절의 면모를 일신한 이후 자재암이 크게 번성하자 절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봉우리들을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부르는 중에 이곳을 나한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소요산 정상석(의상대)>
- 13:57 의상대 정상 도착
- 逍遙山은 거닐 소(逍), 서성거릴 요(遙)자를 쓴다. 逍遙란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거닐며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이름에서 풍기는 맛이 먹고 놀기에 딱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하백운대에서 나한대를 거쳐 이곳까지 오는 동안 옛 선인들께서 이곳을 거닐면서 소요하기 딱 좋은 곳이기에 소요산이란 이름이 붙었구나 하는 느낌이 앞섰다.
- 의상대 정상에는 정상표석과 함께 의상대안내판, 의상대 해발 587m, 공주봉 1.1km, 나한대 0.3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의상대에서는 동두천 시가지와 멀리 남쪽으로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의상대는 동두천의 명산인 소요산의 주봉으로 해발 587m이다. 마차산을 바라보았을 때 앞으로는 동두천시의 상. 하봉암동이 바라다 보이며 그 건너편으로 파주의 감악산이 보인다. 뒤편으로는 소요산지맥과 국사봉, 왕방산, 해룡산, 칠봉산이 마치 용의 등처럼 휘감아져 보인다. 이름의 유래는 조선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며 자재암을 크게 일으킨 후 자자암을 둘러싼 소요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으로 불렸는데 자재암을 창건한 원효의 수행 동반자인 의상을 기려 소요사의 최고봉을 의상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 또한 소요산에서는 매년 9월 9일 산신제를 지낸다. 생기와 복덕을 기리어 화주인, 화덕 1인, 헌관 1인, 축관 1인 총 4인을 선택하여 돼지를 잡고 신곡 신과를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제문도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동두천문화원>
<공주봉안내판>
- 14:24 공주봉 경유
- 공주봉이란 이름은 정겹게 받아들여졌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공주봉에 이르면서 회장님을 비롯한 중간그룹일행 분들과 합류하였다. 아마도 뒤쳐진 본인과 총무님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진행속도를 조절하였을 것으로 여겨졌다. 공주봉은 오늘 일정상 마지막 여섯째 봉우리다. 주변 전망이 나한대나 의상봉 못지않았다. 동두천 시가가 의상대에서 보다 더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정상 안부에는 공주봉 해발 526m, 의상대 1km, 일주문(구절터) 1km를 알리는 안내판, 구절터 1km, 샘터갈림길 0.5km를 알리는 이정표, 공주봉안내판 등이 즐비하다. 특히 넓은 나무테크 마루 쉼터가 산상 무대를 연상케 하였다.
- 공주봉에서 10여분 남짓 내려오면서 일주문과 주차장방향 갈림길에 이르렀다. 바로 이 지점이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강조했던 지점이었다. 여기서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가면 일주문까지 1,2km, 왼쪽으로 가면 주차장까지 1,4km이다. 언 듯 보면 주차장 방향이 더 멀어보인다. 그러나 일주문에서 요석공원을 거쳐 주차장까지 가는 거리를 감안하면 여기서 주차장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이 지름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2011. 2. 24일에는 여기서 오른쪽 일주문 방향으로 진입하여 하산한바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왼쪽 주차장 방향을 염두에 뒀었다. 예정했던 대로 여기서 주차장 방향으로 진로를 선도하였다.
- 그러나 주차장까지 0,8km를 남겨두고 애를 먹었다. 탐방로는 전형적인 육산 길 그대로이었지만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일부 일행 분들께서 무릎통증을 호소하시면서 절절매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일정안내준비를 하면서 염두에 뒀던 샛길을 체험했다는 점에서 마지막 구간에서의 고통을 상쇄하고 만족할 수 있었다. 후미기준 하산예정시간을 10여분 상당 지체하였다. 오늘일정 8,19km/5시간이라는 보통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 일상을 갈무리 하였다.
- 공주봉안내판에 공주봉은 소요산 일주문에 들어서서 우측능선으로 오르면 첫 번째 만나는 봉우리로 해발 526m이다. 이 공주봉은 자재암을 둘러싸고 말발굽모양으로 펼쳐지는 등산로의 우측 첫 봉우리가 되며 이 공주봉을 지나면 소요산의 최고봉인 의상대와 만나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소요산에 자재암을 창건하고 수행하던 원효 스님을 찾아온 요석공주가 산 아래 머물면서 그 남편을 사모했다고 하는데 이 공주봉의 이름은 요석공주의 남편을 향한 애끊는 사모를 기려 붙여진 명칭이다. 공주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구절터가 남아있어 이들의 고귀한 사랑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자료출쳐 : 동두천시, 한국의 산천, 법보신문>
Ⅳ. 특기사항
- 오 경 희 부회장님 마파두부안주 협찬
- 강 기 석님 인삼막걸리 협찬
- 윤 승 기님 에덴스포츠타운휴게소 얼음과자 협찬
Ⅴ. 산행을 마치고
- 오늘은 나들목이 다중이용시설인 공용주차장이라는 점과 바람기 많은 현장의 기후상황을 감안하여 버스 내에서 하산행사를 치렀다. 한 순배 돈 다음 서둘러 현장을 출발하였지만 일상갈무리 행사는 귀로 내내 한동안 이어졌다. 버스 내 비좁은 통로를 반복하여 왕래하는 과정에서 인정이 넘치는 버스 내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주님의 마술에 걸려들고 말았다. 독하게 마음먹고 사양했어야 했지만 이미 스스로 즐기는 수준까지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아침에 대문을 나서면서 오늘은 주님을 멀리하고자 굳게다짐을 했었건만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오늘 아침 경춘 국도에서 서파교차로 방향으로 진입하여 요상하게 생긴 술잔을 접하면서부터 전례에 없던 복분자주 파티가 열렸었다. 모두산악회 역사에 새로운 선례를 남기는 심상치 않았던 이상 징후가 본인의 주관 하에 벌어지면서 오늘 일상이 결코 심상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었는데 그 예감이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 여파가 2차 안착식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일상정리를 하는 이 순간에도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 오늘 원효와 요석공주의 얼이 서린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에서 모두님들과 동행하면서 함께 즐길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일정운영에 협조해 주시고 도움 주신 모든 분들이 있어 행복했던 일상이었다고 자부해 본다. 특히 선녀탕갈림길에서 낙오자와 합류하는 과정에서 동행하여 마음써주시고 봉사정신을 발휘해 주신 김 영 만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모두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