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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말씀/마태복음 23:1-39
요절/마태복음 23:26, 찬송가/187장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제목만 보면, 무슨 내면정화와 같은 분위기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무엇이 올바른 신앙생활인가를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유를 통해서, 또 논쟁을 통해서 이를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입니다. 내용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지적하며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즉 올바른 신앙생활을 왜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이를 제대로 안하면 심판이라는 것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장, 섬기는 자가 되라(1-12)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회당 앞자리에 마련되어 있는 높은 의자에 앉았다’는 것이며 동시에 ‘모세의 권위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모세처럼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면 성경선생이요, 목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고 지키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들이 말만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합니다. 제가 이렇게 된 이유는 저의 부모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라 라고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모님의 삶의 궤적과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면서 영향을 받아, 나도 모르게 부모님처럼 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이 아닐까요? 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거꾸로 였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혹자는 최고의 학문이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세상학문이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연구하고 가르치니 멋져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지식만 있고, 입만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무거운 짐’은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세부규칙인, 장로들의 유전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를 ‘율법의 울타리’로 여겨서 철저하게 가르치고 지키게 했습니다. 이것을 모아놓은 것이 탈무드입니다. 보통 율법의 10배가 넘습니다. 그만큼 제약이 많고 부담이 큽니다. 그런데 그 많은 것을 지키게 하고는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합니다. 소위 립서비스 신앙입니다.
또 이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했습니다. 경문은 말씀을 적은 두루마리를 담은 가죽상자를 말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이 경문띠를 손목에 매거나 이마에 붙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큼지막하게 상자로 만들어 이마에 붙이고 다닙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말씀을 앞세우라는 구절이 있기에, 내가 얼마나 말씀을 앞세우는 사람인가? 그래서 이렇게 큰 경문 띠를 이마나 손에 붙이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또 옷술도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옷에 붙이는 파란실로 만든 장식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아주 길게 만들어 늘어뜨립니다. 즉 옷술이 5-10cm만 되어도 되는데 이것을 30-40cm 아주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가? 자랑하며 다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하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요란스럽게 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말씀을 앞세우고, 경건한 백성으로 살면 되는데, 내가 얼마나 말씀을 앞세우는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가? 좀 날 좀 봐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경문을 크게 하고, 옷술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앞세우고, 경건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이들의 관심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내 신앙을 얼마나 인정해 주고 있는가? 거기에 관심이 쏠리고, 거기에 맞추어서 나도 액션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나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도 중요합니다. 모임에서 ‘인싸’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여름 수양회에서 한 자매 목자님이 ‘험난한 인싸의 길’이라는 시를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아싸로 주변을 빙빙 돌면서 사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인싸가 되는 것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관심이 하나님보다도 오직 사람에게만 있으면 뭔가 삐꺽 거리고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큼지막 하게 경문띠를 하고, 옷술도 길게 늘어뜨렸는데,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 왜 그러고 다니냐?” 는 반응이라면, 사람들의 인정이 원하는 대로 없기에, 마음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기보다,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사람의 인정을 구하면 뼈저린 자기기만과 거짓된 이중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해야 하기에,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사람들에게 얽매인 피곤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도 속이고, 다른 사람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는 거짓과 위선이 가득 찬 생활을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잔치의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시장에서는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합니다. 대접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할 수만 있으면 높임 받고 인정받고 세움 받기만을 좋아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타이틀에 관심이 많아, 사람들이 자신들을 ‘랍비’, ‘아비’, ‘지도자’라 불러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의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 하늘에 계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지도자라고 칭함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과 방향이 내가 아니라, 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높여서 내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높아질까요? 사람들이 저 사람은 대단한 랍비야! 하며 존중하며 높일까요?
11,1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말씀은 흔히 ‘섬기는 리더쉽’을 말할 때 많이 등장합니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당연히 높은 자리에 앉기 원합니다. 또 큰 자로 인정을 받기 원합니다. 그것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그 높은 자리에 걸맞는 인정과 보상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내 돈을 내고 차를 사던 사람이 자리가 높아지면 회사에서 차가 나옵니다. 그것도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좋은 차가 나옵니다. 차 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실의 위치도 달라지고, 사용 면적도 달라지고, 영향력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누구나 당연히 올라가고 싶고, 큰 자로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이런 방식에 익숙하다보니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경쟁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눈치를 보고 따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쟁하느라 지치고 피곤해서 좀 쉬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데, 교회에서도 그러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듭니까? 무엇보다 이런 신앙생활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알맹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리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섬기는 것, 자기를 낮추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단지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라는 것일까요? 내가 선배인데, 후배들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섬기는 것일까요? 내가 선배이고 목자인데 예배 후에 의자 정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고 낮추는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것도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오는 단어중의 하나가 ‘섬기는 리더쉽’에 관한 것입니다. 예전, 한 대학에서는 우리 대학의 인재상은 ‘섬기는 리더쉽’이다. 이런 인재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말은 멋있는데, 그 섬기는 리더쉽이 뭐냐?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섬기는 리더쉽’이라고 하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내려놓고 어떤 봉사나 섬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비슷하게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이 정말 그런 뜻일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섬기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인정만 받고자 폼만 잡는 바리새인들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방향이 섬기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었을까요? 이들의 문제가 단지 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자기를 낮추지 않는 높은 마음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들의 관심과 모든 생각과 행동의 초점이 자신들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해도 자기 영광, 자기 인정입니다. 율법을 지켜도, 율법을 가르쳐도, 시장에 나가도 잔치 상에 앉아도 모든 것의 중심이 바로 자기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가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그 시대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서기관이요, 바리새인입니다. 유대교의 핵심이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제대로 해야 유대교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뿐입니다. 이런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예수님은 섬기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섬기는 것일까요? 남들이 어질러 놓은 것을 치우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 준비를 위해 홀 청소를 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섬김에 있어서 그것이 내 인정과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같이 의자를 치우고, 같이 쓰레기를 치우며 같은 일을 해도,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섬기는 일을 많이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큰 자가 되기 위해서 섬기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송하지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섬김과 낮아짐은 그 마음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섬김이고, 진정한 낮아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고 내가 크고 내가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통해 일어서고 나를 통해 성장하고 더 크고 빛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그것을 위해 내가 자신을 드리는 것이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뇌 과학자들은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밖에 없다.” 무슨 말입니까? 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살 때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때, 내가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내가 높아지고자 애쓴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 때, 높아지게 됩니다. 이 섬김의 좋은 예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섬김입니다. 또 우리 목자님들이 후배들을 말씀과 기도로 섬기는 것도 이런 섬김의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이 섬김의 핵심은 예수님의 섬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하나 감당하지 못했던 우리를 예수님은 구원해 주시고 키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예수님처럼 나를 드려 누군가를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커피 좋은 것이라며 계속 마시라고 준다면 이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진정한 섬김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알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섬김이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말하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그래야 우리 모임이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서로 인정받고자 하고, 서로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있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폭망입니다. 루터나 칼빈이 다시 나와 새로운 종교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섬김, 진정한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큰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장,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13-36)
13절부터 예수님은 신앙생활에 실패한 그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하나하나 지적하시며 화가 있다고 저주를 하십니다. 그런데 한 두 개가 아니라 일곱 개입니다. 7은 성경의 완전수입니다. 철저히 실패한 이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13). 외식은 가면을 쓴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생활이 연기인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이들을 예수님께서 저주하시는 이유는 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말만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만 들어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가까이서 겪어보니 믿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복음을 떠납니다. 즉 외식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 다 때우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로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람을 얻으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즉 이들은 이교도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고자 열심히 선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얻으면 자신들보다 더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만들어, 더 지옥자식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눈먼 인도자라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맹세를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지만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그들의 종교가 타락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안 지켜도 돼! 하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맹세한 것을 안 지키면 금을 성전에 갖다 받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전의 지도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 금을 차지하게 됩니다. 얼마나 종교 장사를 하고, 얼마나 종교가 타락 했으면 이 정도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관심 갖고,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을 구할 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의 본질이 철저히 세속화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들에게 왜 화가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집에서 간단하게 기르는 약초나 채소입니다. 이를테면 집에서 기르는 상추나 고추, 토마토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꼬박 꼬박 십일조로 드리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집에서 상추, 고추를 좀 기른다고 십일조로 가져오면 사람들이 대단히 경건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긍휼이나 믿음은 잘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것들은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도 드려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하셨습니다. 사소한 것은 잘 지키면서, 정말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하면 드러나는 외모도 깔끔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을 깨끗하고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은 잘 드러나 보이지만 속은 깨끗한지 더러운지 잘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감추고 살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만 폼 나게 하고 속으로는 전혀 하나님에게 관심 없 이 살 수 있습니다. 또 속에 온갖 추하고 악한 것을 그대로 갖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속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속이 어떻게 깨끗해집니까?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온갖 더러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속이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더러움을 고백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해주고자 자신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그 피를 믿을 때, 깨끗해집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것은 시작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에 대한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처음에는 복음으로 새롭게 되었는데, 내 생각과 관심이 사람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의 평가, 사람들의 이야기에 내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점점 빠져 나가고, 복음의 감동과 은혜가 점점 줄어들고, 점점 다시 추한 자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잡아야 할 올바른 방향은 사람의 인정이나 평가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내 속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겉도 깨끗해집니다. 내면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신을 가꾸어갈 때, 사람이 달라 보이고 품위가 있고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겉과 속이 결코 따로 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겉만 가꾸고자 하다보면 화가 있습니다.
그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가 회칠한 무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순례자들이 자칫 무덤을 만지거나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덤에 회칠을 하였습니다. 회칠은 흰색페인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칠해 놓으면 속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가 썩어가지만, 겉모습은 하얗고 깨끗하게 빛나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겉은 폼 나지만 그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또 이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선지자의 무덤을 관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면서, 자기들 같으면 이렇게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너희들은 더 할 놈들이라고 하시면서 이들이 할 못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들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입니다. 또 앞으로 일어날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이 보낸 자들을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따라 다니며 박해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고 야고보를 죽이고, 사도 바울을 돌로 치고 따라 다니며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아벨 때부터 사가랴 때까지 구약 전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이들은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행한 악에 따른 심판과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대로 이들은 역사상 온갖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들을 내세우던 이들은 위선자가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화가 있다!하시며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주로 끝냈을까요?
3장,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7-39)
37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더나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는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탄식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은 화려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고, 또 자신들도 그런 인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 시대의 갑이고, 인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초라해 보이고, 약자입니다. 그들은 성공한 자들이고, 예수님은 루저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이들은 철저히 무너지고 실패하고 있습니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완전히 부패하고 썩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볼 때,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탄식하시며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크고 화려하면 그것이 갑이고 그것이 진리이고, 그것을 성공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겉으로 그럴듯한 신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다 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주님의 탄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와 상관없다고 모른척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래도 나는 구원을 받으니 되었다고 여겨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니라, 그 속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봐야 할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내 생각과 관심과 방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왜 내가 힘든가? 그리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품고 돕고자 하셨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초청을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완전히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철저한 심판만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철저히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출발은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들은 거룩한 뜻 가운데 생긴 모임입니다. 바리새인의 경우, 우리 조상들이 말씀을 안 지키다 망했으니까 우리는 말씀을 철저히 지키자. 이런 거룩한 뜻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거룩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조금씩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있다 보니까 조금씩 조금씩 각도가 벌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그쪽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말씀을 사랑하고 공부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이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뜨거운 경고가 됩니다. 우리도 나를 세우고자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자 하면 우리도 똑같이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보다 하나님을 구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나 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고자 하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섬기면 행복한 신앙생활, 건강한 신앙생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를 통해 누군가를 세우는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끊임없이 내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또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