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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99. [역경의 열매] 이만수 <1-15> 고깃집 둘째 아들 손야구 ‘찜뽕’에 빠지다
어릴 적 충분한 영양보충 덕분에 튼튼… 군인 출신 아버지는 권투선수 권유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왼쪽)이 1977년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에 발탁된 후 부친 고 이창석 안수집사, 모친 장삼순 권사 등과 가족사진을 찍었다.나는 1958년 9월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줄곧 자랐지만 본적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66번지로 돼 있다. 부모님은 이북분이다. 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는데 의무상사였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6·25전쟁 때 홀로 남한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명절 때만 되면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4남매에게 늘 군인정신과 승부욕을 강조했다. “절대 거짓말 하지 마라. 안되면 되게 하라. 무조건 1등이 되어야 한다. 최고가 아니면 시작도 하지 마라. 정리정돈 철저히 해라. 지금부터 30분 뒤 점검하겠다. 실시!”
올해 81세인 어머니는 평양 출신이다. 덩치도 크고 생활력도 강해 여걸 스타일이었다. 집안 형편이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대구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일시불로 받은 연금으로 대구 동문동에 정육점을 차렸다.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는 집안 살림도 하면서 정육점을 운영했다. 지금처럼 절단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기에 아버지는 고깃덩어리를 통나무에 올려놓고 도끼로 내리치곤 하셨다. 집에 가면 언제나 비릿한 고기 냄새가 났다.
그때는 끼니도 잇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육점을 운영한 부모님 덕에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사골국을 끓여 4남매에게 먹였다. 제일 싫었던 것은 선짓국과 소의 위인 ‘양’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선지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양을 먹지 않으려고 도망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매일 고기와 사골국을 먹었으니 얼마나 힘이 좋았는지 모른다. 훗날 내가 포수를 하면서 상대 선수들과 부딪혀도 끄덕 없었던 것도 이때 쌓았던 체력 덕분이다. 성장발육이 왕성한 유년기 때 영양보충을 충분히 해야 평생 밑천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덩치가 크고 힘도 좋아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친구들은 우리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만수야, 오늘 니 뭐하노. 느그집에 놀러가도 되나.” 올 때마다 삼겹살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친구들이 올 때마다 풍족하게 고기를 내오셨다. 도시락 반찬도 항상 고기였다. 점심시간만 되면 항상 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렸다. 어머니는 영양공급이 부족해 얼굴에 버짐이 핀 주변 친구들에게 그렇게라도 고기를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처음부터 야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취미삼아 일주일에 2∼3회 유도 도장을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권투선수가 되길 바랐다. 아버지는 새벽 4시에 나를 깨워 권투도장으로 끌고 가셨다. “만수야, 니는 권투를 해야한데이.” 링에 올라갔다. “퍽퍽.” 상대선수의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 지는 절대 권투 못합니더.”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것은 운동회와 손야구 개념인 ‘찜뽕’이었다.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1등이었다. 야구가 뭔지는 몰랐지만 고무공을 손으로 쳐내고 전력 질주하는 찜뽕의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박동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60명의 학생들에게 탑 모양을 그리라고 했다. “여러분, 정성스럽게 쌓은 탑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노력하면 언젠가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어요.” 집 앞에는 제일감리교회가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만수 <1> 고깃집 둘째 아들 손야구 '찜뽕'에 빠지다
* [역경의 열매] 이만수 <2> 선배 몽둥이찜에 '최고 선수 될끼다' 오기 생겨
* [역경의 열매] 이만수 <3> 매일 4시간만 자고 새벽별 보며 연습
* [역경의 열매] 이만수 <4> 청룡기 대회서 홈런 한방… 일약 스타로
* [역경의 열매] 이만수 <5> 대식가인 나에게 금식기도원에 가자니…
* [역경의 열매] 이만수 <6> 야구 헬멧·배트에 십자가…뱟팀 선배 전도하다 뺨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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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이만수 <15·끝> 야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 꿈꾼다
약력=△1958년 서울 출생 △대구상고, 한양대 졸업 △82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99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2011년 SK 와이번스 감독 △한국야구위원회 프로야구 20년 통산 포지션별 최고스타 포수부문, 라오스 국민훈장 수상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인천 은혜의교회 안수집사
***[역경의 열매] 이만수 <2> 선배 몽둥이찜에 ‘최고 선수 될끼다’ 오기 생겨
중학교 때 친구 따라 얼결에 야구 시작… 교회 주차장서 훈련하다 교회 친숙해져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두번 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1973년 대구중학교 2학년 시절 전국중학교 문교부장관기 대회에서 참가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대구중앙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집 앞에 있는 대구제일감리교회에 총 6번 갔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 가면 빵과 노트, 연필을 줬다. 그런데 대구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회는 날씨가 궂을 때마다 찾는 중요한 곳이 됐다. 사정은 이렇다.
대구중은 야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입학했을 때 학교 스피커에서 이런 공지가 나왔다. “너그들 중에 야구하고 싶은 사람 있나.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은 운동장으로 집합하길 바란다. 이상.”
당시 나는 방과 후에 유도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야구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훗날 청와대에서 고위직을 지낸 동급생 안모가 다가왔다. “니는 야구 안 할 끼가. 니 나랑 야구 안할래.”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얼떨결에 운동장에 모였다.
1972년 그렇게 유니폼도 없이 야구선수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배트를 잡은 건 아니다. 선배들이 친 공이 담을 넘어가면 주워오는 일부터 했다. 그때는 야구공이 귀하던 시절이다. 공을 잃어버리면 찾을 때까지 주변을 헤맸다. 주전자에 물을 떠서 나르는 것도 일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3학년 선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합. 이것들이 미쳤나. 요즘 1학년 새끼들이 군기가 빠졌네. 도대체 와 카는데. 한명씩 나와.” ‘팍 팍 팍’, 선배는 나무 배트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니는 뭐꼬.” “네, 이만수입니데이.” “엉덩이 대라.” “퍽” 한대를 맞고 바닥에 쭉 뻗었다. 별이 번쩍거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4대를 모두 맞고 나니 엉덩이 살이 찢어졌다. 눈물이 났다. 태어나서 그렇게 세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동문동 집까지 절뚝거리며 갔다. 오기가 생겼다. ‘그래, 나는 앞으로 10년 뒤 최고 선수가 될 끼다. 그리고 10년 뒤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끼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는데 양반다리가 되지 않았다. 팬티가 피에 젖어 들러붙어 있었다. 눈치가 빠른 어머니가 몰랐을 리 없었다. 잠든 사이 엉덩이 상태를 확인한 것이다.
이튿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내 오늘 고마 도끼 들고 학교 간다, 마.” 직업군인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펄쩍펄쩍 뛰셨다. “아부지, 내가 우리나라 최고 야구선수가 될 끼니까, 조금만 참으이소.”
그때 부모님 앞에서 다짐한 게 있다. 최고의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새벽 4시에 기상을 하고 밤 12시에 잔다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 일어나 수성못과 앞산 충혼탑을 거쳐 집까지 뛰어오면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매일 그렇게 뛰다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매일 학교에서 훈련을 하고 집에 와서도 밤늦게 스윙 연습을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집 앞 대구제일감리교회로 향했다. 교회 승합차 주차공간이 있었는데,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기에 충분했다. 비나 눈이 올 때 훈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교회 문턱을 자연스럽게 넘었다.
주한미군방송(AFKN) 채널에선 메이저리그 야구 중계방송이 나왔다. 입이 딱 벌어졌다. 고교 아마추어 야구가 흥행하던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대학생이던 누나는 일본과 미국의 야구 관련 도서를 구해 선물해줬다. ‘그래, 내 언젠가 메이저리그에 간다. 반드시 간다.’
이를 악물고 남들보다 2배 이상 연습을 한 것 같다. 그래도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2학년 때 유급을 했다. 당시 야구부에선 실력을 향상시킨다며 1년 유급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야구를 정말 잘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할 수 있는지 조언을 듣고 싶었다. 어느 새벽, 당시 3학년이었던 장효조 선배 집으로 뛰어갔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3> 매일 4시간만 자고 새벽별 보며 연습
인기 포지션 투수에 흥미 못느껴… 대구상고 1학년 때부터 4번타자 활동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가운데)이 1976년 대구상고 2학년 재학시절 동료 야구부 선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띵동. “장효조 선배, 저 이만숩니다.” “야이, 미친 자슥아. 지금이 몇신데 일로 오노. 다음에 날 밝을 때 온나. 응.” 눈을 비비고 나온 선배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선배들을 찾아가 괴롭혔다.
새벽 연습에 나갈 때면 항상 별이 반짝거렸다. 제일 반짝이는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속으로 되새겼다. ‘저 별처럼 야구계의 스타가 될 것이다.’ 지금은 야구장갑이라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배트를 들고 스윙연습을 하면 물집이 생겼다. 계속 연습하다보면 물집이 터지고 살이 짓무르면서 뼈가 허옇게 보이기도 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면 연탄재에 문질렀다. 연습하다보면 세균에 감염돼 고름이 나오기도 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안자고 연습을 하니 연습량이 점점 쌓여갔다. 실력이 출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공을 치는데 저 멀리 쭉 뻗어나갔다. 대구중학교 감독님이 어느 날 나를 호출하셨다.
“만수, 니 투수하고 싶지 않나.” “감독님, 저는 투수보다 포수가 좋습니다.” 다들 투수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나는 투수에 별 흥미가 없었다. 하루에 200개 이상 공을 던지면 팔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투수가 팔을 보호하기 위해 얼음찜질도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1974년 대구중 3학년 때는 투수로서 전국중학교문교부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때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2학년 때 유급을 했으니 중학교 4학년 때 상을 받은 셈이다. 부산 토성중 최동원 선수가 이름을 날리던 시대였다.
대구중 졸업반이 되자 부모님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경북고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나는 경북고보다 야구 역사가 긴 대구상고에 가고 싶었다. 당시 대구에선 경북고와 대구상고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두 학교가 맞붙는 경기가 열리면 연고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동문들이 몰려나와 모교를 응원했다. 감사하게도 대구야구협회는 대구상고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나를 대구상고에 배정했다.
입학식부터 구타가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엉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두터운 슬라이딩 팬티 사이에 오징어를 넣어 누빌 정도였다. 때릴 때 퍽퍽 소리가 나면 때리는 선배들의 기분도 좋고 아프지도 않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팬티 사이로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바람이 통하지 않다보니 여름에 35도를 넘나드는 대구 날씨에 땀이 빠지지 않아 곤욕을 치렀다. 사타구니에는 심한 습진이 생겼다.
나는 대구상고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동했다. 포수를 하다가 공에 맞아 손가락이 으스러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아 곪았고 두 달간 병원치료를 받았다. 그래서 3월말부터 열린 대통령배 고교 야구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다행히 5월부터 열린 제30회 청룡기 야구대회에는 참석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서울 동대문야구장과 축구장은 한곳에 있었다. 밤에 경기를 한다고 했다. “뭐라꼬. 밤에도 야구경기를 한다고. 희한하네.” 태어나서 처음 야간경기를 치르게 됐다. 야간경기가 어떤지 궁금했다. 마침 동대문축구장에서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차범근 선수가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야, 이게 낮이고 밤이고. 환하네. 진짜 멋지데이.’ 축구장은 정말 대낮처럼 환했다.
드디어 시합날이 됐다. 타석에 섰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달처럼 크게 보였다. ‘땅!’ 홈런이었다. 2만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도는데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4> 청룡기 대회서 홈런 한방… 일약 스타로
밤에도 타이어 300번씩 치며 훈련… 남동생 소개팅으로 첫사랑 만나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왼쪽 두 번째)이 1980년 아내 이신화씨(왼쪽 세 번째)와 함께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서 한양대 야구부원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청룡기 대회에서 홈런은 쳤지만 대구상고는 그만 1회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 자슥아. 오두방정 떨지 마라. 팀이 졌는데 즐겁더나. 니는 좀 맞아야겠다.” 그날도 선배들의 몽둥이 찜질이 있었다. 태어나 처음 출전한 고교 야구대회에서 홈런을 치고 나니 맞아도 기분이 좋았다.
청룡기 대회 사상 처음으로 고교 1학년짜리가 홈런을 쳤으니 일약 유명스타가 됐다. TV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다들 라디오로 고교 야구경기를 청취했다. 내 얼굴은 모르지만 ‘대구상고 이만수’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로 팬레터가 쇄도했지만 아버지가 교장선생님께 신신당부해놓아서 모두 소각했다고 한다.
밤에 연습할 때는 불빛이 없으니 전봇대 밑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말뚝을 세우고 하루에 버스 타이어를 300번씩 쳤다. ‘팡, 팡, 팡.’ “이 노무 자슥아. 잠 좀 자자. 니 누꼬.” “네, 이만숩니더.” “어, 그래? 잠 좀 자고 하그라.”
고교 2학년 때도 성적이 최고였다. 고교 3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돼 일본 가고시마에 가서 대표팀 연습에 참여했다. 야구의 전설인 장훈 선배가 최연소자라며 나에게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등을 선물해 준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백인천 선배도 봤다.
1977년 드디어 대구상고가 인천 동산고를 상대로 결승전을 치러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지프를 타고 동대구역부터 시내 한 바퀴를 돌아 학교로 왔다. 전교생이 나와 환영을 해줬다. “장하다. 역시 우리 아들. 이래 할 줄 믿었다.” 누구보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셨다.
대학 진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빨리 고교를 졸업하고 제과점에서 여학생들과 빵을 먹는 게 소원이었다. 1978년 한양대에서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우리 집도 대구 정육점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꿈같은 대학생활이 시작됐지만 문제는 여자친구 하나 없었다는 것이다. 꽃피는 4월 축제 때 3일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머니의 조언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야야, 니는 어떻게 여자 하나 없이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노. 응?”
어느 날 고등학교 1년 선배이지만 나이는 나와 같은 김시진 선수가 단아하게 생긴 여대생을 데리고 왔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녕…하세요. 지는 이만수라고 합…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이신화라고 해요.” 미소가 아름다웠다. ‘저렇게 청순하고 예쁜 대학생이 여자친구라면 소원이 없겠다.’
그해 10월 19일이었다. “형, 그 누나 남자친구 없대.” “진짜가.” “응.” 남동생의 소개로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신화씨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첫사랑과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됐다. 우리 집은 서울 둔촌동 주공아파트였다. 신화씨의 집은 장안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한강다리를 넘어 장안동까지 뛰어가면 1시간이 걸렸다. 신화씨는 7남매 중 막내였다. 그렇게 1시간 동안 데이트를 하고 다시 둔촌동까지 뛰어왔다. 눈이 올 때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녀가 손을 쬐면 나는 스윙연습을 했다. 행복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만수씨, 저랑 사귀려면 조건이 하나 있어요.” “먼데?” “교회에 나가야 해요.” “에이, 그럴 시간 있으면 연습을 한 시간이라도 더 하겠다.” “그럼 더 이상 우리 만남은 계속될 수 없어요.” “머라꼬?”
울며 겨자 먹기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갔다. 조용기 목사라는 분이 설교를 하는데 말이 따발총처럼 빨랐다. 교회라는 곳은 무척 신기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딱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5> 대식가인 나에게 금식기도원에 가자니…
여자친구 따라간 기도원서 성령 체험, 프로야구 출범 1호 안타·1호 홈런 기록
1984년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의 이만수 감독. 이 감독은 84년 KBO 정규리그 홈런, 타율, 타점, 장타율 등 4개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만수씨, 우리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가요.” “머라꼬?” “이제 만수씨도 성령님을 직접 체험해야 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세숫대야만한 냉면 그릇에 라면을 2개씩 넣어 먹고 밥을 산만큼 떠서 푹푹 말아먹을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 그런데 금식기도원에 들어가자니, 앞이 막막했다.
“신화씨도 알지만 내는 밥 안 묵고는 하루도 못 버틴데이. 어트케 안 될까?”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 마침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해 마음이 허전한 상태였다. ‘그래, 기도원에 가서 장래 길이나 열어달라고 기도나 해보자.’ “그래, 가자. 고마.” 그렇게 경기도 파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산리금식기도원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유명 부흥사들이 복음의 순수한 메시지를 전했다. 설교를 듣다보니 10년 넘게 야구선수로 살아왔던 삶이 필름처럼 주르륵 지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예수의 실존 앞에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강단에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주님의 초청 앞에 망설이고 계신 분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늘 죄인인 당신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을 구주로 모시겠다고 결단하신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뭐해요?” 신화씨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알았다, 고마.” 그렇게 주린 배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것이었다. ‘야, 이 느낌은 도대체 머꼬?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화씨 말이 진짠가 보네. 오, 주님!’
그때부터 내 삶은 확실히 변화됐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야구연습을 할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감사가 넘쳤다. 스윙연습을 하다가 배가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 신기하게 말끔히 나았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더.’ 주님과의 첫사랑은 신화씨와 데이트만큼 달콤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대구가 연고였던 내가 갈 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81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해 3월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첫 개막전이었다. 마운드에는 MBC 청룡의 이길환 투수가 서 있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세요.’ 타석에 들어가기 전 기도를 드리고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공은 빨랐지만 내 눈에는 뚜렷이 보였다. 중학교 1학년부터 쌓은 내공을 보여줄 때가 됐다. ‘땅!’ 공이 멋지게 좌측 라인으로 쭉 뻗어 나갔다. 프로야구 1호 안타였다. “와아∼”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웅장한 폭포 한가운데 서 있는 듯 했다.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엔 유종겸 투수가 마운드에 섰다. 공이 정확하게 나를 향해 파고드는 게 보였다. 힘껏 밀어 쳤다. ‘따앙!’ 공이 쭉쭉 뻗어가더니 담장을 훌쩍 넘었다. 한국야구사에 남은 프로야구 1호 홈런이었다. 그렇게 나는 프로야구 개막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
결혼은 같은 해 10월 16일 대구 궁전예식장에서 했다. 야구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많은 인파가 몰리다보니 경찰까지 출동했다. 예식장이 팬들로 가득차 일가친척은 들어오지도 못했다. 부모님도 바리케이드를 넘어 겨우 예식장에 들어온 뒤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다. “만수야, 결혼식이 이게 머꼬. 친척들은 하나도 못 들어왔다카이.” 신혼집은 대구 황금동 경남아파트에 마련했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6> 야구 헬멧·배트에 십자가…뱟팀 선배 전도하다 뺨 맞아
구단 단장 “기도한다고 야구 잘합니까” 불교집안 장효조 선수 훗날 교회 출석
1984년 스포츠 용품점 앞에 선 이만수 전 감독(왼쪽). 이 감독은 84·85년 2년 연속 KBO 골든글러브 포수상을 수상했다.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고 나니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야구 헬멧과 배트에 매직으로 검은색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1년에 절반은 원정 경기를 다녔기 때문에 주일날 호텔로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때론 후배 선수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사찰에서 합숙훈련을 할 정도로 불교세가 셌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말이다.
“야야, 주일 아침이다. 빨랑 일나라. 교회 예배드리러 가구로.” 잠자리에 든 후배들은 눈을 비비며 불평을 쏟아냈다. 소문은 단장의 귀까지 들어갔다.
“이만수 선수, 기도한다고 야구 잘합니까. 일요일에 후배 선수들이 푹 잘 수 있도록 좀 놔두세요. 경기 성적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기도를 하고 야구경기를 뛰면 보이지 않는 힘이 도와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적당히 좀 하시죠.” “예, 걱정 마이소.”
놀라운 것은 그렇게 전한 복음이 수십년 뒤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효조 선배였다. “선배님, 이번 주일날 교회 가입시다.” “뭐라꼬. 이 자슥 미친나.” 장 선배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곧바로 날아왔다. “자슥아, 어디 전도할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하나. 치아라.”
그 다음 주에도 또 전도를 했다. “내는 죽어도 교회 안 나간다. 알겠나.” 이번엔 반대쪽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알고 보니 장 선배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러니 예수님의 ‘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 효조 선배는 독종이구만. 하나님의 뜻이 없나보다.’
20여년이 흘러 2006년 SK 와이번즈 수석코치로 일할 때다. “만수야, 내다.” “아이고, 효조 선배님 아니십니까. 진짜 오랜만입니데이.” “만수야, 내 교회 나간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이번에 목사님이 된데이.” “예?”
사정은 이랬다. 내겐 형수가 되는 장 선배의 부인은 시집오기 전에 교회에 다녔다. 결혼해서 교회에 나간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성경을 불태우면서 교회 나가면 쫓아내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한다. 형수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남편 몰래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신앙훈련을 시켰다. 결국 그 아들이 목사안수까지 받게 됐고 장 선배도 형수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됐다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아, 비록 복음을 전하다가 뺨을 맞긴 했지만 그것이 훗날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작은 씨앗이 됐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언젠가 세우신다. 우리는 그저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 깨달은 것은 우리가 복음의 열정으로 아무리 뜨겁게 예수님을 전해도 하나님의 신적 개입이 없다면 그 누구도 주 앞에 나올 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훗날 후배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에 선배님이 주일 아침마다 후배 선수들을 교회로 끌고 나가셨잖아요. 그때 은근히 ‘나는 왜 안 데려 가시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복음의 씨앗을 계속 뿌리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그 복음의 소식을 들으려했던 것이다.
1982년 시작된 삼성 라이온즈 선수생활은 97년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구계에선 30세만 넘어도 노장 취급을 받았다. 32세는 ‘폐물’, 33세는 ‘시체’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39세였던 나는 후배들에게 40세까지 선수생활을 하는, 프로정신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주변의 눈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구단에서 호출이 왔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7> 은퇴 후 ‘첫 한국인 메이저리그 코치’ 새 도전
영어학원 등록해 하루 6시간씩 공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눈물로 기도
이만수 감독이 1999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A 코치 시절 보스턴 레드삭스의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기 위해 야구장을 방문했다.“이만수씨, 언제까지 야구할 겁니까. 후배들 생각도 해 주셔야죠.” “예?” “이제는 노장이 되셨잖아요.” “….”
야구는 9회말 2아웃에서 시작하는 멘탈(mental) 게임이다. 야구공을 배트로 맞추거나 글러브로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점과 점이 정확하게 만나야 한다. 조금만 잘못 생각해도 점은 빗나간다.
구단 고위층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야구 ‘헐크’로 불리다가 3시간 넘게 벤치에만 앉아있으려니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음료수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젊었을 때 경기를 치르고 벤치에 돌아오면 항상 음료수가 부족했는데, 그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평생 야구를 했는데 이제부턴 뭐하노.’ 두려움이 엄습했다. 평생 야구선수 생활을 할 것 같았는데 닥쳐온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방출된 야구선수에 불과했다. 정신적 충격이 컸다. 가슴 저 밑에서 쓰라린 고통이 치밀어 올라왔다.
‘국내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치가 되자.’ 인생의 처절한 쓰라림은 또 다른 도전의식을 심어줬다. 사실 야구를 위해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지만 늘 불안했다. 통산 1449게임에 5034타석을 뛰었다. 625득점에 252개의 홈런, 861타점, 1276안타라는 기록도 세웠다.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하고 최고 타격 3회, 최고 타점 3회 수상 등의 영광도 안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매년, 매달, 매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계속됐다. 기록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최고의 선수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래, 고마 선수생활을 내려놓자.’ 눈물이 핑 돌았다.
1997년 결단을 하고 대구 동성로 영어학원부터 등록했다. “헬로우, 마이네임 이즈 이만수. 왓츠 유어 네임?” 하루에 6시간씩 영어공부를 하려니 머리에서 쥐가 났다. 스무살 어린 친구들과 영어를 배우려니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 북극성을 보며 품었던 미국 메이저리그 입성의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98년 초 미국 현지 에이전트를 통해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프로야구팀 코치연수의 길이 열렸다. 이 팀은 미국 마이너리그 싱글 A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가족을 모두 한국에 놓고 떠나려니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게다가 아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보, 내 걱정은 말고 당신 일만 생각해요. 미국에 가서 탁월한 야구지도자가 돼 주세요.” “그…래.” 아픈 아내의 손을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만큼 눈물로 기도한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주님,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더.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산지를 주신 것처럼 내한테도 길을 좀 열어 주이소. 주님!’
그해 3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41세의 나이에 접한 미국 야구는 확실히 달랐다. 한국에서는 ‘이만수’ 하면 다 알아줬지만 미국에선 내 이름은 고사하고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야 이 자슥아, 88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라고.” “오우, 사우스 코리아∼” 미국인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던 이만수는 세상이 붙여준 이름 석 자에 불과했구나. 그동안 환호하고 나를 영웅처럼 대접해주던 것은 허상이었던 거구나.’ 낯선 땅에서 자신을 돌아보니 내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한국에선 감독과 코치가 선수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미국은 확실히 달랐다. 어느 날이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운동장에 서 있는데, 누군가 내 뒤통수를 퍽하고 치는 게 아닌가. “아니, 어떤 놈이고!”
***[역경의 열매] 이만수 <8> 모멸감 느낀 美 코치생활 눈물로 시작
나를 두고 심한 장난에 하나님 원망 “절대 포기하지 마라, 힘 내라” 음성
이만수 감독이 1999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A 코치 시절 메이저리그 경기 후 보스턴 레드삭스 팀의 마스코트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뒤를 돌아보니 197㎝짜리 거구가 서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는데 이번엔 192㎝짜리 거구가 달려와 내 몸을 밀쳤다. 2m 정도는 나가떨어진 것 같다. “브라보!” 이 장면을 지켜보던 10여명의 선수들이 박수를 치며 키득거렸다.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 고마 야구 때려 치아뿐다.” 한국에서 사실상 방출되다시피 해서 미국에 왔는데, 이런 수모까지 당하니 야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졌다. 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다. ‘만수야, 절대 포기하지 마라. 힘을 내라.’ ‘주님, 아픈 아내를 한국에 두고 왔는데 제가 이걸 꼭 해야 합니까.’ ‘그래.’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구의 선수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은 나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감독과 선수가 농담도 하고 스킨십을 하는 등 스스럼없이 지낸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키 작은 코치가 농담 한마디 않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니 가까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 A팀 3루 작전코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어를 잘 못하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렛츠 고(Let’s go)’ 정도였다. 경기가 시작됐는데 5회까지 우리 팀과 상대팀의 스코어가 0대 0이었다. 지루함이 느껴졌다. 150여명의 관중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임마, 이렇게 치라고. 쳐!” “이 자슥아, 더 세게 못 쳐.” 어차피 관중 가운데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래, 그거야. 화끈하게 하자고.” 야구장은 내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타석에 선 선수에게 배트를 휘두르고 뛰는 모습을 보여줬다. 관중의 눈은 투수나 타자가 아닌 내게 쏠렸다.
7회가 시작됐다. 주심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와? 니는 또 와 카는데.” “겟 아웃 오브 히어(Get out of here).” 운동장에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코치로서 제정신이 아닌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음식도 안 맞고 언어도 안 되는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자슥아 내 간다. 나가면 되지. 근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기고. 응?” 무료하던 관중들은 볼거리가 생겼는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동양에서 온 키 작은 코치가 펄쩍펄쩍 뒤면서 한국말로 외치니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모양이다. 관중석의 웃음소리가 조소처럼 느껴졌다.
우리 팀의 마코 감독이 뛰어왔다. “만수, 장난이었다. 2회만 더 코치해 달라.” “뭐라꼬? 내를 두고 장난을 쳤다고. 이 자슥들이.” 경기를 끝내고 호텔에 들어와 짐부터 쌌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만큼 울지는 않았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1시간 넘게 엉엉 울었다.
“주님, 이게 하나님의 뜻 맞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우는데 깊은 내면에서 출애굽기 14장 10∼14절 말씀이 떠올랐다. 홍해에 가로막힌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의 공격 앞에 놓인 절체절명의 장면이다. 그 상황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짐 보따리를 풀고 이튿날 운동장으로 나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기분이었다.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벤치룸이 시끌벅적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팀 제너럴매니저인 데이브가 와 있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단장과 같은 개념이었다. 데이브가 나를 호출했다. “당신이 리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역경의 열매] 이만수 <9> ‘땅∼ 땅∼’ 치면 홈런… 백인 코치 입이 ‘쩍’
마이너리그 전체에 소문 퍼져… 덕택에 트리플 A팀으로 옮겨
이만수 감독이 2004년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시카고 화이트삭스 팀에서 불펜코치로 일하던 시절, 가족과 함께 시카고 셀룰러필드 경기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데이브 단장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자, 악수 좀 합시다. 감사합니다.” “예?” 메이저리그 단장이 동양 출신 말단 코치를 찾아와 악수까지 청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그날 야구장에 있었던 150여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사무실로 메일을 넣었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당신 팀의 3루 작전코치야 말로 진정한 프로입니다. 1회부터 9회까지 팀의 승리를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는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신 팀의 감독과 코치는 팀이 곤경에 처했을 때 리 코치처럼 소리를 치거나 격려해 준 적이 있습니까. 그런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팀에서 스타가 됐다. 미국의 야구는 한국과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최고 수백억원의 연봉을 받는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마이너리그라고 우습게 봐선 안 된다. 내가 활동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만 해도 자체 야구장이 8개나 있었다. 마이너리그 선수만 150여명이었고, 코치는 30명이 넘었다. 마이너리그팀 전체를 이끄는 총감독 닉이 팀원 전원을 호출했다.
“리, 당신이 한국의 ‘베이브 루스’였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사흘 뒤에 150명 선수 앞에서 홈런을 한번 쳐보십시오.” “예!”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변에 한 명은 꼭 상대를 깔보는 얄미운 사람이 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A팀도 마찬가지였다. 백인 코치가 하나 있었는데 한국야구를 아주 우습게 봤다. “리, 한국 야구장은 리틀 야구장과 같다며. 네가 홈런을 친다고? 오우, 어떻게 너처럼 작은 선수가 홈런을 칠 수 있겠어.” 이번 기회야 말로 촐랑거리는 백인 코치의 콧대를 꺾고 대한민국 야구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훈련을 마치고 실내연습장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주님, 제발 도와 주이소! 여기서 제가 홈런을 하나도 못 치면 한국야구는 억수로 망신을 당합니데이. 하나님도 망신을 당하실 수 있습니더.”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쿵쾅 쿵쾅’. 한국시리즈 결승전보다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선수 150명은 물론이고 30명의 코치와 구단 직원들까지 총출동했다. 마운드의 백인 선수가 씨익 웃었다. ‘주님만 믿습니데이.’ 초구가 빠르게 날아왔다. “땅∼” 공은 저 멀리 날아가 펜스를 맞고 떨어졌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 다음엔 홈런이었다. ‘땅, 땅, 땅.’ 10개의 공 가운데 6개를 홈런으로 날렸다.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닉 총감독이 입을 열었다. “리, 오늘은 바람이 세게 불어 공이 담장을 넘어간 것 같습니다. 내일 한 번 더 시범을 보이십시오.” “오케이!”
이튿날도 10개의 공 중 7개를 홈런으로 만들었다. 닉 총감독은 놀란 표정이었다. “코치와 선수들, 앞으론 리의 타격에 대해 묻지 마십시오.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더. 고통 가운데 포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니 이런 기쁨을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더.’ 분명 하나님은 나를 미국까지 보내신 이유가 있었다.
소문은 마이너리그 전체에 퍼졌다. 덕택에 199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A팀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같은 마이너리그라고 해도 싱글A팀과 트리플A팀의 실력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쉽게 말해 메이저리그 바로 아래가 트리플A이고 세 단계 아래가 싱글A다. 첫 출근을 하자 게리 워드라는 타격코치가 나를 불렀다. “리, 한국에서 홈런을 좀 쳤다고. 여기선 선수들에게 타격을 가르치지 마라. 너의 임무는 1루 작전코치일 뿐이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10> “헬프 미, 리” 타격교습 애원하는 선수들
개인교습 해준 선수들 실력 ‘쑥’… 마침내 마이너리그 우승 차지
이만수 감독(오른쪽)이 1999년 겨울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교민행사에서 금일봉을 받고 있다.흑인 야구선수 출신인 게리 워드의 눈치를 보며 1루 작전 코치에만 집중했다. 미국 켄터키 주로 원정경기를 갔을 때다. 호텔에서 쉬고 있는데 도미니카 선수가 왔다. “리, 나 좀 도와줘. 메이저리그에 있다가 마이너리그로 떨어지니 가족을 먹여 살리기 너무 힘들어. 한국에서 홈런왕이었다고? 플리즈….”
“내는 워드와 약속을 해서 절대 안 된다.” “리, 플리즈.” 애처로운 눈빛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니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오케이.” “니 이것 좀 봐라.” 도미니카 선수에게 노트북을 보여주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적어온 야구일기 파일을 열었다. 매일 25명 선수들의 몸 상태와 타격자세, 장·단점, 안타유형 등을 기록한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손짓 발짓을 하며 타격 폼을 지도했다.
타율이 1할을 겨우 넘기던 그는 2개월 만에 3할 대 타자가 됐다. 승부욕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남달랐다. 자세만 약간 교정했는데도 금세 효과가 나타났다. 몇 개월 뒤였다. “똑똑.” 또다시 노크소리가 났다. 키가 196㎝인 체드 모톨라였다. “헬프 미, 리.” 모톨라는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리, 네가 도미니카 친구를 도와줬다며. 나도 좀 살려줘.” “아, 그 자슥 말하지 말라니까.” “리, 나는 미국인이다. 절대 말 안할게.” “알았다. 일나라.”
“자 봐라. 자슥아. 니는 키도 큰 놈이 배트를 들고 도끼로 나무 찍듯이 아래로 내리 꽂으니 공이 땅볼이 되는 거야. 이렇게, 골프 치듯 퍼 올리라고. 알았나. 글카고 너 플레이보이냐. 여자 너무 좋아하지 말그라.” “오, 예스.” 모톨라의 실력도 몰라보게 향상됐다. 훗날 삼성 라이온즈 용병으로 한국에 왔던 틸슨 브리또도 그렇게 개인교습을 해줬던 선수다. 소문은 금세 워드의 귀에 들어갔다.
“리, 나 좀 봐야겠다.” 워드의 두툼한 입술이 실룩거렸다. “처음에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뭘.” “마늘냄새 나는 동양 놈이 건방지게…. 또다시 내 영역을 침범했다간 넌 끝이야.” 손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모멸감마저 느껴졌다. “알았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파란 하늘을 보니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고국을 떠난 지 벌써 2년이나 됐다. 동양인이라고 멸시천대까지 받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아내가 잠결에 받았다. “여보.” “어머, 웬일이세요.” “당신, 미국 안 들어오면 내 콱 죽을끼구마. 어트케 할끼고.” 갑자기 아내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무슨 일 있죠. 다른 생각 마세요. 아이들이랑 최대한 빨리 갈게요. 절대 엉뚱한 짓 마세요!” 10일 만에 아내와 두 아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족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족을 이루도록 디자인하신 이유가 다 있었다.
1999년 9월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내가 속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A팀은 30개 마이너리그 팀 중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펄쩍펄쩍 뛰며 승리를 만끽하는데 워드가 성큼 다가왔다. “리.” “머가 또 불만이고.” “미안하다. 네가 코치를 너무 잘해서 내 자리를 뺏는 줄 알았다. 내가 오해했다.” “머라 카노. 자슥아.” 우리는 얼싸안고 그간의 앙금을 풀었다. 비록 마이너리그지만 미국 야구를 체험하고 팀의 승리도 경험했으니 이제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고국으로 가는 꿈에 젖어 있는데 2년 전 나를 소개했던 에이전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만수야.” “와.” “니 메이저리그 들어가고 싶나.” “자슥아, 장난치지 마라.” “니 메이저리그 코치 됐다.” “머라꼬?”
***[역경의 열매] 이만수 <11> 한국인 첫 메이저리그 코치 되자 아내 눈물
못살게 굴던 게리 워드가 적극 추천… 전속 리무진 등 마이너리그와 대접 달라
이만수 감독(왼쪽)이 2001년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시절 선발투수였던 짐 파케 선수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여보, 내 메이저리그 코치 됐다. 한국 최초데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정말 축하해요.” 두 아들도 내가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코치가 됐다는 사실에 얼싸안고 야단이 났다.
이튿날 메이저리그 소속 의사가 집에 왔다. 소변과 혈액을 검사하고 몸 상태를 일일이 체크했다. 내가 어떻게 메이저리그 코치로 발탁됐는지 궁금해졌다. 훗날 얘기를 들어보니 게리 워드가 나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단장님, 마이너리그팀 코치 중에 만수 리가 있습니다. 이 친구 실력이 아주 좋습니다.”
‘냄새 나니 저리 가라’며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워드가 나를 추천한 것이다.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도 내가 체드 모톨라와 틸슨 브리토 등을 남몰래 도왔던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매일 선수를 어떻게 지도하고 그 선수의 실력이 어떻게 향상되는지, 팀워크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수치화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불펜코치 생활이 시작됐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01년 창단됐으며, 부임 당시 월드시리즈 2회, 아메리칸리그 6회, 중부지구 리그에서 3회 우승한 역사 깊은 구단이었다. 홈구장은 4만4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에스 셀룰러필드였다.
메이저리그는 마이너리그와 확실히 달랐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에서 크리스천 코치와 선수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 인도자와 장소까지 마련해 줬다. 이동할 땐 전용기만 이용했다. 내 자리는 선수들 좌석 앞쪽 비즈니스석이었는데, 사실상 특급좌석이었다. 구단 소속 승무원도 상냥했다. “리,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Man-Soo Lee.’ 각 좌석마다 이름표까지 붙어 있었다.
검은색 상의에 찍혀있는 흰색 SOX 글씨와 MLB 마크가 훈장처럼 느껴졌다. 내 등번호는 59번이었다. ‘오직 구원을 위하라는 뜻이구나. 주님, 저에게 이런 과분한 자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더. 주님 영광 높이는 데 힘쓰겠습니데이.’
경기를 마치고 미국 시카고 미드웨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내리니 검은색 리무진 수십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봉을 수백억원씩 받는 선수들을 위한 배려였다. ‘특급 선수들은 확실히 다르군.’ 나는 차가 없었다. 구단 관계자에게 “노란 택시나 한 대 불러 달라”고 했다.
“리, 무슨 이야기냐. 너의 차도 저 밑에 있다.” “뭐라꼬. 내한테도 리무진을 준다고.” 번쩍거리는 리무진을 타고 일리노이 주 작은 마을에 들어서니 동네가 들썩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가 근처에 산다는 것 자체가 빅뉴스였던 것 같다. 그것도 동양인이 말이다. 사람들이 리무진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난리가 났다. 이웃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인사를 받느라 진땀이 났다.
메이저리그 코치 생활은 행복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연어가 산란기 강을 거슬러 다시 고향을 찾듯이 말이다. 마침 2003년 한국 유명 구단에서 배터리 코치 제의가 들어왔다.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구단주인 제리 레인스도프를 찾아갔다. 그는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도 맡고 있었다.
“한국에 가서 미국의 선진 야구를 전수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리는 내가 내민 사표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격려해줬다. 집과 자가용을 팔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신문에서 이런 뉴스가 나왔다. ‘OO구단, 이만수 코치와 계약 없던 일로’.
***[역경의 열매] 이만수 <12> 화이트삭스, 마침내 월드시리즈 결승전에
한국 코치직 사라져 한때 미아 신세… 단장 배려로 복귀, 팀 위해 최선
이만수 감독(가운데)이 2005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 후 이구치 다다히토 선수(오른쪽)와 함께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코치를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내놓은 상태에서 철석같이 믿었던 한국 모구단의 코치 자리가 안개처럼 사라졌다. 후임 코치는 이미 선임됐다.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어졌다.
2003년 12월 겨울은 혹독했다. 집도 조만간 비워줘야 하고 설상가상 의료보험도 끊겼다. 타던 차도 조만간 넘겨줘야할 판이었다. 집 앞 작은 한인교회가 있었는데 새벽마다 아내와 눈물로 부르짖었다.
“하나님, 우짭니까. 미국 구단에는 사표를 냈고 한국 구단에는 자리가 없어졌습니더. 하나님.” 간절히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었다. 막막했다. 이러다가 국제 미아가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속이 타들어갔다.
15일째 새벽제단을 쌓은 어느 날이었다. “하나님, 제발 도와 주이소. 하나님….” 가슴 저 밑에서 평안함이 밀려왔다. ‘출애굽기 14장 10∼14절.’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A팀 3루 작전코치로 1998년 미국에 처음 도착해 인종차별과 문화적 차이로 고통스러워할 때 주셨던 말씀이었다. 앞은 홍해, 뒤는 바로의 군대로 꼼짝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5년 만에 주님은 같은 말씀으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아, 주님. 감사합니더. 감사합니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됐다. 그때부터 불안감이 싹 가시고 평안함으로 충만했다. “따르릉.” 오후가 됐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만수야, 좋은 소식이 있다.” 나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끈 에이전트였다. “뭔데.” “니 불펜코치로 다시 컴백하게 됐데이.” “머라꼬.” 사표를 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내 사표를 반려한 것이다. 훗날 알고 보니 한국 프로야구 복귀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가 캔 윌리엄스 단장의 귀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 저런, 리가 한국에 못 들어가게 됐다고. 그 친구 실력 있는 코치인데, 팀으로 다시 부릅시다.” 할렐루야! 1개월 만에 나는 다시 불펜코치로 돌아왔다. 눈물이 났다. 후임자까지 채용한 상태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 주님 찬양합니더!” 아내와 나는 얼싸안고 감격의 기도를 드렸다.
감사함으로 2004년 메이저리그 경기에 임했다. 나를 신뢰해준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감독과 6명의 코치, 25명의 선수들이 일치단결한 결과는 2005년 나타났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월드시리즈 결승전에 진출했다.
미국 이베이 사이트에서 결승전 티켓이 800만원에 팔렸다. 티켓을 산 80대 할머니가 TV에 나왔다.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비싼 티켓을 사게 됐습니까.” “나는 아버지 때부터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응원했습니다. 이번에 승리하면 8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겁니다. 내 생애에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요. 티켓이 1000만원이었어도 구입했을 겁니다.”
상대팀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였다. 2005년 10월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와 텍사스 주 휴스턴을 오가며 경기가 열렸다. 우리 팀은 1차전부터 3차전까지 잇달아 승리하며 우승의 고지에 다가서 있었다. 10월 26일. 지금도 휴스턴 미닛메이드 파크에서 열린 마지막 4차전 경기를 잊을 수 없다. 9회말 투아웃 1대 0의 상황이었다. 2루까지 진출한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총력을 다해 역전을 노리고 있었다. “땅!” 땅볼이었다. 투수의 키를 넘긴 공을 신인 유격수 후안 유리베가 낚아채 1루로 던졌다. 1루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잡아냈다. “아웃!” “와아∼”
***[역경의 열매] 이만수 <13> ‘선진 야구’ 전수, 원대한 꿈 안고 SK로
감독된 후 정규시즌 6위 초라한 성적… ‘이만수 물러나라’ 플래카드 나붙어
이만수 감독(맨 오른쪽)이 2005년 10월 29일 미국 시카고 다운타운 거리에서 열린 시카고 화이트삭스 우승 카퍼레이드에서 환호하고 있다.4전 4승. 한국인 코치가 최초로 맞이하는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그동안 미국에서 고생했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극소수의 코치만이 손가락에 낄 수 있는 전설적인 반지였다. 대구중학교 시절 주한미군방송(AFKN) 통해 보던 그 반지를 30여년 만에 끼게 된 것이다.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88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자 시카고 시내에 170만명의 인파가 몰려나왔다. 카퍼레이드를 하는데 고층 빌딩에서 떨어지는 형형색색의 종이가 꽃가루처럼 느껴졌다. 나와 아내, 두 아들이 리무진 버스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야, 대단하데이. 주님이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시는 갑다.”
2006년 10월 정규 시즌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SK와이번스입니다. 코치님, 저희 팀이 지금 급한 상황입니다. 저희 팀을 맡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만, 미국에서 조금 더 야구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코치님.” “죄송합니다.”
미국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데다 이제 미국생활도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아내가 대화를 엿들었던 모양이다. “당신 미국야구 배운 다음에 한국에 가서 전수하겠다고 안 그랬어요.” 뜨끔했다. “으응. 꼭 지금 한국에 꼭 들어갈 필요가 있나.” “여보, 미국이 아무리 좋아도 이방인일 뿐이에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요.”
며칠 후 큰아들이 대화를 하자고 했다. “아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가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호출에 군말 없이 왔잖아요. 아빠가 맡고 있는 코치 자리는 아빠가 없어도 미국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아빠가 한국에 안 들어가면 선진야구를 누가 가르쳐줘요. 아빠 아니면 한국야구는 최소 30년 이상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아들의 말 한마디가 안주하려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 자슥이, 알았다.”
안정적 자리를 박차고 한국에 들어간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또다시 아내와 함께 10일간 특별기도에 들어갔다. 설교말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기도 중에 말씀이 떠올랐다. ‘출애굽기 14장 10∼13절.’ 1998년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A팀 3루 작전코치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2003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사표를 내고 한국 코치 자리가 돌연 취소됐을 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알았습니더. 주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더.’ 백기투항을 했다. 그렇게 그해 10월 SK와이번스 수석코치로 들어오게 됐다.
한국에 오니 고난이 시작됐다. 그동안 자유분방하지만 철저한 통계와 분석 중심의 미국야구에 익숙해진 나는 권위적인 일본식 야구와 비슷한 한국야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마디로 미국야구와 한국야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떠오르는 생각을 속으로 삭혀야 했다. 집 앞 교회에서 눈물로 새벽기도를 드리는 게 일상이 됐다. ‘주님, 안정적인 미국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이게 뭡니꺼. 주님, 좀 도와 주이소.’ 주님은 자칫 교만해질 수 있는 나를 그렇게 철저하게 순종 훈련의 자리로 이끌어 주셨다.
2010년엔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을 거쳐 2011년 8월부터 감독대행을 맡게 됐다. 그해 11월부턴 감독을 맡게 됐다. 그러나 성적이 신통치는 않았다. 2013년 10월이었다. 정규시즌에서 6등이라는 초라한 성적이 나왔다. 내 인생에서 6등은 해본 적이 없다. 야구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붙었다. ‘이만수는 물러나라.’
***[역경의 열매] 이만수 <14> 성적 부진 스트레스… 매일 새벽 눈물로 기도
감독 사임 후 야구 불모지 라오스로… 조선에 야구 소개한 선교사 된 심정
이만수 감독(왼쪽)이 2013년 7월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홈런을 치고 들어온 최정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2013년 10월말 아내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인천 문학야구장에 들어서는데 SK 와이번스 팬들이 온갖 욕을 늘어놨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소리쳤다. “야 임마, 니가 감독이냐.” 며느리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그렇게 욕을 왕창 얻어먹던 시절 라오스에 야구를 전수해 달라는 현지 사업가의 부탁이 있었지만 나중에 해주겠다고 약속만 했다. 성적부진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로 잠을 못 이뤘다. 매일 새벽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팀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2014년에는 정규시즌 5등을 했다. 평생 들을 만한 욕을 감독으로 재직하던 3년간 몽땅 얻어먹은 것 같았다.
구단주의 점심식사 호출이 왔다. “저희는 김용희 감독 체제로 가기로 했습니다. 감독생활이 끝나면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보통 일방적으로 통보하는데, 구단주는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예, 야구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22가지나 있습니다. 야구해설 재능기부 야구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라오스에 야구협회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려면 야구 재단이 필요합니다. 재단 설립을 좀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나중에 재단이 정상궤도에 오르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감독직을 사임하고 경기도 광주 광림수도원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줄 깜짝 선물로 동유럽 여행권도 준비했다. “이신화씨, 그동안 내 때문에 고생 많았제. 이제 고마 내랑 동유럽 가자.” “여보, 동유럽은 언제든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재능기부는 한번 약속을 못 지키면 끝까지 못해요. 전에 약속한 게 있잖아요. 라오스로 가세요.” “아이고, 알았다. 마.”
2014년 11월 12일. 감독 은퇴 후 1주일 만에 떠밀리다시피 라오스로 향했다. 사실 나는 라오스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현지에 도착해서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걸 알고 놀랐고, 야구팀이 하나도 없다는 데 한번 더 놀랐다. 운동장이라고 해봐야 잡초가 듬성듬성 있고 여기저기 움푹 파인 공터일 뿐이었다. 모래바람까지 부니 황량한 광야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맑았다. 야구를 전해주러 온 한국 손님을 맞기 위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마 그때의 심정은 1904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조선 땅에 야구를 처음 소개할 때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 사회주의 국가에서 스포츠로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이들과 땀을 같이 흘리면 생명의 복음은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현지 사업가가 야구선수 지망생을 불러 모았다. 처음엔 20명도 안 됐지만 동네를 다니며 홍보하자 45명이 왔다. 대부분 너덜너덜해진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것도 없는 아이들은 맨발이거나 타이어 고무 같은 것으로 얼키설키 만든 걸 신고 있었다.
노트북으로 한국과 일본, 미국 야구를 보여줬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자슥들아. 이게 야구라고 하는 기라. 느그들 이런 야구 하고 싶제.” “네!” 목소리만큼은 우렁찼다. 한국 프로야구단에서 쓰다 남은 배트와 야구공, 얼룩진 트레이닝복을 나눠줬다. 아이들과 땀 흘리며 뒹굴다보니 금세 친해졌다. 산들바람이 부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다.
“만수야, 내가 너를 최고의 자리까지 인도하고 많은 인기를 누리게 했던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단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에 있었다. 내 노력, 내 열심이 아니었다. 결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구나.’
***[역경의 열매] 이만수 <15·끝> 야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 꿈꾼다
체육발전 공로로 라오스 총리상 받아… 어려운 유소년 돕기위해 재단 설립
이만수 감독(뒷줄 오른쪽 다섯 번째)이 지난해 9월 라오스 비엔티엔에서 라오J브라더스 선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선수들이 한국에서 가져온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2014년 11월 36명의 라오스 청소년을 불러 모았다. 남자 24명, 여자 12명이었다. 팀 이름은 라오J브라더스였다. “니 꿈이 뭐꼬.”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겁니다.” 잘 못 먹어서 그런지 다들 키가 작고 야위었다. 결손가정 출신은 물론 고아도 많았다. ‘그래, 내 야구를 통해 대구중학교 시절 품었던 북극성의 꿈,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이식시켜주고 싶구마.’
먼지가 풀풀 날리는 동네 사설 축구장을 빌려 주 2회 3시간씩 훈련했다. 돈이 없다보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운동장을 빌렸다. 그 외의 훈련은 현지 한인 사업가가 만들어 놓은 야구센터에서 했다. 말이 야구센터지 실내야구장 만한 크기였다. 그곳에서 14명이 먹고 자며 공부와 야구를 병행했다.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5개국에서 유일하게 야구가 없던 나라다. 그런 나라에 야구를 가르쳐줬으니 그 자체가 뉴스였다. 어느 날 라오스 국영TV 기자가 찾아왔다. “왜 하필이면 라오스입니까.” 기자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 우리 라오스 청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년에 4번 정도 감독 겸 구단주로서 라오스에 들어가서 10∼20일 동안 청소년들을 직접 지도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야구를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했다. 아무래도 동양인이다 보니 쉽게 통하는 면이 있었다.
2016년 여름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야구부원들을 대상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데 라오스에서 국제전화가 왔다. 라오스 현지 사업가였다. “구단주님, 라오스 국무총리상을 받게 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와, 정말요?”
그해 10월 라오스 정부로부터 체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훈장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이런 말을 건넸다. “여보, 당신 프로야구 시절 구단주가 되는 게 꿈 아니었어요.” “어, 맞다. 내 힘들고 어려울 때 구단주가 된다고 했재.” “당신 지금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잖아요?” “어, 맞네.” 하나님은 34년 만에 삼성라이온스 선수시절 품었던 꿈을 이뤄주셨다.
라오스 교육체육부 장관이 나를 불렀다. “감독님, 뭐가 필요하십니까.” “연습을 위한 야구장이 필요합니다.” 라오스 정부는 흔쾌히 수도 비엔티엔의 와타이 국제공항에서 남쪽으로 20㎞ 떨어진 락십혹 지역의 땅을 무상으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할렐루야!’
이후 이곳에 야구장 4개와 숙소 및 훈련장을 건립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야구장이 건립되면 라오J브라더스의 전용구장이 될 뿐만 아니라 한국 초·중·고·대학부 동계훈련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스는 11월부터 4개월간 건기인데다 그 기간 기온도 25℃여서 야구 훈련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물가가 무척 싸다.
모든 서류를 갖춰 한국의 관계부처에 제출했다. 지금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허가만 기다리고 있다. 조만간 수많은 라오스 청소년들의 꿈이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2016년 4월 국내외 어려운 유소년 야구선수와 라오스 선수를 돕기 위해 사단법인 헐크파운데이션을 설립했다. 법인은 철저히 시민들의 기부로 운영된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야구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출애굽기 14장 10∼14절을 주신 하나님은 그 꿈을 언젠가 이뤄주실 것이다. 그때까지 쉼 없이 달려갈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절대 포기하지 마라(Never ever give up)’는 철칙을 붙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