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으라(출2:1-10)
요게벳은 갈대상자를 물에 띄우면서 아이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내어 맡겼다. 이때 하나님에 대해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분명 요게겟은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하는 이 아이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이 아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삼아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 근거를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에 나와 있는 갈대상자를 보라 이 상자는 노아의 방주와 같이 히브리어로 테바라고 한다. 이 테바는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데 사실 크기면에서는 완전한 차이가 난다. 노아의 방주는 많이 크지만 갈대상자는 대단히 작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방주에 탄 사람이나 갈대상자에 탄 아이는 절대로 혼자서 방향을 조정할 수 없다. 그리고 움직이는 방주의 속도와 갈대상자의 속도도 조절할 수 없다. 그리고 너무 세다보면 멈추고 싶을 것인데 멈출수도 없다. 왜 그런가 방향을 조절하는 키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삶의 키를 온전히 요게벳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가 여러분은 삶의 키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의 키를..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의 키를.. 여러분의 인생의 미래의 키를 하나님께 드리며 맡기고 있는가
우리 진정한 주인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다. 우리 인생의 키를 내가 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할때 놀랍게 인도하신다. 우리 인생의 키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란다.
5절에서6절을 보면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가 더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은 돌보심을 위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바로의 딸이 등장을 하는 데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강에 내려간다. 내려가는 순간 갈대상자가 보였다. 아기가 우는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을 들었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 불쌍히 여기게 하는 그 마음은 물론 좋은 마음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씀상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불쌍히 여기고 그 아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잠언서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7절에서 9절을 보면 하나님의 돌보심이 나오는데 환경을 세밀하게 이끌어 가신다.
내용을 보면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갈대상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때를 맞추어서 바로의 딸에게 찾아간다. 그리고 이 아기에 대해서 유모를 부르겠다고 애기한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의 눈치가 빠른 것 같다. 그래서 유모를 부르러 가는데 놀라운 것은 유모가 누군가 바로 친엄마를 데리고 온다. 이 아이의 진짜 엄마를 데리고 온다. 너무 놀랍지 않는가
분명 바로 공주에 의해서 키움을 받겠지만 실질적으로 친엄마의 손에 의해서 키움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세밀한 흔적들이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미세하게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건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과딸이라는 귀한 신분을 바꾸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자녀가 된 것은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케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의 노예라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의 자녀라는 아들의 신분으로 바꾸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여러분을 돌보시며 인도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환경을 세밀하게 이끌어 가실 뿐만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도록 인도하시며 보호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세상과 타협하시 말고 오직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인생을 맡기는 주의 자녀가 되자 그럴때 모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주님은 여러분을 돌보시고 인도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