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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방을 쓴다. 2024년 12월 3일 한국에서 발생한 불법 계엄과 그 이후 탄핵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인 헌법과 헌재마저 부정하려 드는 정치인, 정부 관료, 법조인 등이 야기한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다른 무엇보다 정치, 관료, 사법 기득 권력의 강고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견고함을 느끼고 있다. 한편으로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에 대해 생각하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보수保受가 기존의 것들을 지키려는 쪽이라면 진보進步는 바꾸려는 쪽이라고 받아들인다.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기존의 것들에 대한 인식과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받아들인다. 사회적 약속이나 가치, 정치경제 체제와 같은 것들을 둘러싼 문제라고 받아들인다. 법, 민주주의, 윤리와 같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모종의 약속들이 있겠고 인권이나 평등과 같은 가치들이 있겠다. 그들 사회적 약속이나 가치들은 지키면서도 바꾸어 나가야 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지키려는 보수와 바꾸려는 진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무엇을 지킬 것이며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신들의 기득 권력만을 지키려 할 때, 지키려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일 뿐일 때, 그들을 보수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한, 기존의 것들을 바꾸려는 방향이 자신들의 기득 권력 유지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일 때 그들을 진보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보수라면, 진보라면 자신들의 기득 권력을,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사회의 약속이나 가치들을 지키거나 바꾸려 할 때, 그들을 보수나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경제 체제의 유지와 변화를 둘러싼 좌파와 우파의 구분에서 우파도 좌파도 빈곤과 침략 전쟁과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파가 빈곤과 불평등을 양산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실을 부정하겠다면, 좌파들이 그러한 현실을 바꾸는 방식을 두고 대립한다면 그렇다면 우파든 좌파든 현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체제의 무엇을 왜 지키려는지 어떻게 바꾸어 갈 수 있을지 그 내부와 기존 상태에 대한 분석과 종합을 통해 내부 모순과 한계를 드러낼 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거나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포데모스: 포퓰리즘이면 어때!?
'좌파-당-운동'에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정당들의 중심에 스페인의 포데모스 Podemos가 있다. 변화를 일으키는 만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다. ‘정보화·자치·청년’이라는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는 당이라고 할 수 있다.
포데모스 창당 전부터 이 당의 이념을 준비하는 무대가 ‘인터넷 방송’이었다는 사실이 시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 변화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변화의 흐름에 편승한 ‘좌파포퓰리스트’ 당이라는 문제도 제기된다. 하지만 그들이 좌파 당으로서 성과를 내면서도 문제시되는 근본 이유는 포퓰리즘 populism이 아니라 ‘운동론’의 문제일 것이다. 과연 그들은 문제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에서 박석삼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포퓰리즘’은 그 자체가 논란거리라고 쓰고 있다. “카스 무데가 포퓰리즘을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한 이래 비교정치학계에서는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을 포퓰리즘의 틀로 분석하는 것이 대유행이다. 그런데 현시기 유럽의 수많은/대부분의 좌파당들이 포퓰리즘을 채택하였다든지, 포퓰리즘이 좌파당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유럽 22)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박석삼은 “좌파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에 대한 체계적 반론이 아직 없다”(유럽 22)고 쓰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은 포퓰리즘의 틀로 파악할 이유나 가치가 없고, 현시기 유럽 좌파당들의 성장에 포퓰리즘이 기여했다는 주장은 Podemos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용되기 어렵다”(유럽 22-23)고 주장한다. 어쨌든 포데모스의 경우 포퓰리즘이 그들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에 대해서 좀 더 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정병기에 따르면 포퓰리즘의 문제는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남발하며 카리스마적 권위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대중추수주의”의 포퓰러리즘 popularism의 문제이며, “포퓰리즘의 핵심은 사회를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로 보고 엘리트에 대항해 인민(국민)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반대 개념은 엘리트주의”인데, 포퓰리즘 전체를 배격한다는 것은 포퓰리즘의 반대 개념인 엘리트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과 포퓰러리즘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구분의 기준은 결국 ‘무엇을 하는 정치냐’ 일 것이다.
“민주주의 질서에서 정치인은 (…) 자유의지를 가진 독자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이며, 이들이 국민의 피노키오가 아니라 특권층과 기성세대의 꼭두각시가 된다면, 그것이 주는 실망감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다. 자유의지가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새롭고 젊은 정치가 실현될 때 새로운 시대는 도래할 것이다.”
장석준은 최근의 한국의 우파가 ‘여성·장애인·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혐오정치’를 하고 있는데 그는 이를 우파 포퓰리즘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가 던지는 물음은 ‘좌파’는 ‘혐오의 정치’에 맞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추수하는 포퓰러리즘이 아니라 대중들이 호응할만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 좌파들이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하고 대중들이 호응할만한 보편적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석준은 ‘혐오의 정치에 맞서는 연대가 모습을 갖추려면, 우선 사회운동 안에서 경제적-조합적 단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 고 진단한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처음에는 정당이라기보다는 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느슨한 전국적 네트워크였다. 창당 이후 2018년 기준으로 당원이 51만 명에 육박한다. 사회노동당 당원 수의 2배다. 이 중 절반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가입한 당원이다.
포데모스는 가히 정보화 시대의 진보 정당이라 부를만하다. 또한 각 지역에 기존 정당의 지역조직에 해당하는 ‘서클’들을 1,000여 개나 조직했다. 이들 서클은 별도의 대의기구 없이 모든 당원이 참여하는 ‘시민총회’를 통해 운영된다. 그래서 ‘운동형 정당’을 넘어선 ‘정당형 운동’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포데모스의 경제 대안을 정리한 <민중을 위한 경제대안>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을 판단하는 요소일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핵심 원인은 불평등의 엄청난 확대이며, 이로부터 금융, 경제 및 정치 위기가 비롯됐다. 그 중심에는 자본(금융자본의 헤게모니 아래 있는)과 노동 사이의 갈등이 있다. 이로 인해 임금이 하락하고 실업이 증가하며 사회보장 지출이 삭감됨으로써 내수가 급감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인상과 고용 확대를 통해 내수를 증가시키고 사회보장 지출과 공공투자(특히 사회적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를 확대함으로써 불평등의 확대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금융 공공성을 확대해서 가계와 중소기업에 신용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단축하고 정년을 인민당과 사회노동당이 도입한 67세에서 65세로 돼돌려야 한다. 이는 자본에 맞서 노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동시에 성별 불평등을 반드시 해소해야 하며, 이는 고용을 확대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상의 정책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재원은 국가 예산 구조의 변경과 탈세 방지를 통해 마련한다.” 이들은 선명한 진보적 정책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포데모스에게는 ‘과연 좌파가 맞느냐’는 의문이 따라다니기도 한다.(세계 490-492)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좌파 전통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 같은 이들의 생각과 말, 행동 때문이다.
포데모스는 ‘자본주의’보다는 ‘78년 체제’(프랑코 사망 후 민주화 체제)를 더 자주 언급하고 ‘자본’ 대 ‘노동’이 아니라 ‘카스트 대 서민’의 대립 구도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인민당뿐만 아니라 사회노동당까지 ‘정치 카스트’라고 싸잡아 비판하며, 양당이 정치를 독점하는 78년 체제를 전복해야만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간층부터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를 아우르는 ‘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세계 495)
박석삼은 ‘노동자를 호명하지 않는’ 포데모스의 포퓰리즘 문제를 운동론의 차이보다 전략의 차이로 파악한다. 포데모스는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에 기초하여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니라 인민과 기득권층의 대립을 축으로 하는 포퓰리즘 전략을 능동적으로 채택한 당이다. 따라서 다른 좌파당들과는 달리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이상을 공유하지 않는다.”(유럽 62)
또한,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따라 노동과 자본 혹은 좌우의 대결이 아니라 인민과 특권층 Caste의 대립 즉 상하의 대립으로 나누고 여성, 생태 등 다양한 요구를 등가의 연쇄로 묶어 급진민주주의를 추구한다”(유럽 121-122)고 말한다. 그리고 박석삼은 “좌파가 대중에게 호소할 때 인민을 호명하고 낡은 기득권층을 비난하고 그들을 인민에게 대립시키는 것은 좌파 정치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인민을 호명하면서 엘리트나 기득권층에 대립시키는 포퓰리스트적 시도란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고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좌파라면 당연한 시도다. 이런 이유에서 인민을 앞세운 좌파의 정치와 투쟁을 따로 떼어내어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유럽 120)는 입장이다.
“좌우의 분단과 상하의 분단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좌우의 대립에서의 지배계급이 상하의 대립에서 기득권층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좌파가 제도, 구조, 체제를 중시하는 반면에 포퓰리스트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상층을 장악한 인적 집단을 중시하는 것이고, 이것은 대자적 인식과 즉자적 인식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유럽 121-122) 그런 점에서 박석삼은 ““포퓰리즘의 가장 높은 형태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라클라우(2005)의 주장은 당연하고, 이때 포퓰리즘과 좌파 사상과의 관계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유럽 121-122)고 주장한다. “2차 대전 직후 동구와 동북아시아의 공산당 정권이 모두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제시하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착취받고 억압받는 비노동자 계급(주로 농민이나 빈농)과의 연대인데, 이런 연대는 마르크스주의나 좌파의 사상과 전혀 충돌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는 좌파의 기본적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즉 착취받고 억압받는 모든 세력을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단결시키고 제국주의나 지배계급과 투쟁하는 것을 좌파적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라고 한다면 좌파의 사상과 전략에 대한 무지 또는 억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유럽 119-120)고 덧붙인다.
박석삼이 언급한 급진민주주의자들인 라클라우와 무페는 “대의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에서는 누가 어떻게 다양한 사회 집단들을 ‘인민 people’으로 구성하는지가 정치의 요체라고 주장했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정치의 필연적인 형식이며, 단지 어떤 방향과 내용의 포퓰리즘인지, 즉, ‘우파’ 포퓰리즘인지 ‘좌파’ 포퓰리즘인지 문제일 뿐이다”(세계 496)고 주장한다.
과거에 좌파 정당이 노동계급을 강조한 것 역시 ‘노동자’ 담론을 바탕으로 인민을 구성하려던 전략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민을 구성하는 전략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이라면, 78년 체제에 결탁한 세력들을 고립시키면서 이에 반대하는 다양한 집단들을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78년 체제의 양대 정당과 겹쳐 있는 기존의 ‘좌파/우파’ 틀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포데모스의 고민의 출발점이다.”(세계 496)
결국, 노동계급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하지만 정치적인 전략에 따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들 스페인의 현실에서는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의 경우는 한국이 처한 현실에 맞게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그곳의 현실에 맞게 그 지역의 ‘극단적 중도파’에 맞설 수 있는 그곳의 ‘노동자인민’을 결집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포데모스는 사회의 다양한 진보적 요소들의 결합과 연대를 통해 총선에서 ‘양당 독점 구도 해체’라는 약속을 어느 정도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포데모스는 여전히 여러 도전 속에 있다고 여긴다. 그런 도전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창당 초기에 보여준 젊고 열정적인 사회운동과 함께하는 혁신적 정당이라는 기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포데모스 다수파의 입장은 과거 사회주의 교리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 논쟁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의 전환 덕분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치적 가능성들이 열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세계 479)
변화한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탄생한 그들의 현실성은 분명 변화를 이끌 역동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혁−혁명’, ‘갈등−모순’, ‘불평등 해소−자본주의 전복’ 등. 현실이 그러하듯, 진보 운동 역시 개혁하다 혁
명하고, 혁명해도 개혁해야 하고, 갈등하며 해소하거나 해소 못해 모순에 이르거나, 불평등을 해소하다가 해소되지 못한 불평등이 폭발하여 자본주의 전복에 이르게 되고 그랬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지만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가 진보를 결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연대하며 평등하게’ 운동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그들이 ‘좌파-당-운동’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혹은 ‘좌파-당-운동’에 어떤 해악이라도 끼치게 될까라는 것이다.
ㅣ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각자가 자신에게 해야 할 이 물음이야말로 의미 있어 보인다. 그 물음에 따라 자신이 살고 싶은 사회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실 개입을 통해 바라는 사회를 실현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사회를 실현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이 현실의 변화에 따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달라진 현실에 맞춰 또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그 물음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사회의 실현 여부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인다.
그 물음으로부터 현재 어떤 사회인가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이 살고 싶은 사회를 그리며 실현해 가게 될 것이다. 인식한 현실이 어떤 사회이든, 실현된 사회가 어떤 사회이든 그 사회를 토대로 자신이 살고 싶은 사회로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의미 있어 보인다.
맑스와 엥겔스가 150여 년 전에 연구를 통해 제시한 오래된 미래인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 그들의 연구를 이어받은 ‘탈성장 코뮤니즘’(사이토 고헤이)이나 ‘풍요로운 평등사회’(홍승용)를 구현하려는 바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하는 상태로부터 시작해서 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의식적으로’ 실현한 만큼의 사회를 살게 될 것이다.
쿠바인들 역시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사회를 실현해 왔다. 그들이 지향하며 만들어 온 평등한 사회의 모습에서 ‘독점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며 의료·교육·주택의 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습은 의미 있어 보인다. 그 보다 그들 사회에서 더 의미 있어 보이는 것들은 쿠바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서 간 자들을 참조하지만 추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쿠바의 길’을 가고 있다”, “복지와 인권에 대한 이상을 심각한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은 단순히 경제 체제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부와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새로운 사회는 거대한 인민의 잠재력의 개발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다”, “혁명 과정을 통해 자신들을 변화시켜 나갈 것이고, 이것이 또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제도들과 사회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웃, 더 크게는 지역사회가 가족의 사회 자본에 영향을 미친다”, “경쟁은 타인을 발로 차서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서로 도우며 자신을 갈고닦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혁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의식 혁명도 뒤따라야 한다”, “새로운 사회정책을 유아기부터 철저히 가르치면 아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육원 때부터 시작한다면 그 아이의 인생에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으며, 쓰면 쓸수록 많아지고 늘어나는 개인들이 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자본, 그 ‘사회 자본’을 누리며 살아간다”, “주택문제에 대해 직업, 식량, 건강, 교육이 연결되어 있다는 ‘포괄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오직 참여민주주의, 즉 민중이 나라의 정치적ㆍ경제적 사안들에 일상적으로 꾸준히 개입하는 것만이 민주주의를 보장한다”, “‘계속되는’ 특징, ‘창조적이지 않고 상상력 없는 것에 반대되는 ‘혁신성’, ‘자신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쿠바니아’를 제2의 천성으로 삼고 있다”, “모든 쿠바인은 정치가가 아니라도 어떤 경로로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중앙혁명정권이라고 하는 권위를 가지면서 지방분권화로 주민자치를 진행하고 있다”, “워크숍의 구성원들은 지역과 친숙한 이들이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쌓아간다”. “맨 밑바닥에서부터 토론 문화를 소중히 키워나간다”,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채택한 범주들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큰 관심사 중 하나다.”
쿠바인들이 살며 채워온 시간과 공간은 우리와 다르지만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가 그들처럼 살아야 할 이유도 그들처럼 살지 말란 법도 없다. 쿠바인들만 아니라 지구의 또 다른 그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어떻게 지구의 시공간을 채워갈 것인지 어떤 생산방식. 어떤 국가.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공통의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지,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위기’와 ‘전환’의 시대라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늘 그렇지 않았나. 늘 변화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는 ‘우리’의 몫일 수밖에 없지 않나. 오직 우리의 힘과 분투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쟁취한 그것과 새로운 것을 쟁취할 가능성의 존재인 자기 자신을.
ㅣ코뮤니즘
코뮤니즘 communism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유로 하여 모든 사람이 계급으로부터 해방되고 누구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이론 및 사상”이다.
코뮤니즘이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상태는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 Utopia’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현실에 그와 같은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를 바라는 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이나 영화에서 자주 그려지곤 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상태가 더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코뮤니즘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사람이 맑스와 엥겔스다. 하지만, 그들이 강조했던 것은 ‘이상 사회’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폭로’다. 그들이 쓴 [자본론]이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알고 있다.
맑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받는’ 사회는 ‘높은 단계’의 이상적인 사회라고 봤다. 그는 ‘현재의 상태를 부단히 지양하는 운동’을 강조했다. 그와 같은 이상적인 사회로 가고 싶다면 더더욱 ‘지금, 여기’가 어떠한 상태인지 ‘관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그에 기반한 운동을 통해서 더 나은 상태의 사회로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엥겔스 역시 유토피아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과학적 사회주의를 강조한다. 엥겔스가 생시몽, 푸리에, 오언과 같은 천재적인 사람 몇몇이 세우려고 했던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이유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엥겔스도 맑스처럼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주의적인 상태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고 했을 때, ‘불가능한 꿈’은 코뮤니즘과 같은 이상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러기 위해서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했듯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운동을 통해 변화시켜가는 것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 그가 강조했던 것도 ‘사태 자체’에 대한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였다.
코뮤니즘과 같은 이상 사회가 나쁘다거나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애초에 지금보다 나은 이상 사회를 꿈조차 꾸지 않는다는 것이 더 나쁘고 더 문제적으로 보인다. 지금과는 다른 지금 보다 나은 이상 사회를 바라지 않는 이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여기‘에서 기득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 이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 사회를 바라는 이들에게 논란이 되는 것은 어떻게 그런 사회로 가느냐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우선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사태 자체에 대한 충실함일 것이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