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 / 이남옥
스페인은 3, 4월이 우기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걷는 동안은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쾌청한 날씨로 축복받는 날들이었다. 간만에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엄청 추워져서 오슬오슬 떠느라 몸살기가 나고 다리도 팍팍했다. 오늘도 이어서 비 소식이 있었다. 물집 때문에 고생하는 남편은 여느 날처럼 걸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하늘을 살피니 잔뜩 찌푸린 구름으로 가득하여 있었다. 서둘러 삶은 감자와 우유로 요기하고 바게트를 조금 뜯어 먹은 다음 혼자 길을 나섰다.
더러 따로 떨어진 적은 있었지만 온전하게 혼자 걸은 것은 처음이었다. 머나먼 외국에서 완전한 나만의 시간이란 놀라운 경험이었다. 열 개 정도의 아기자기한 마을을 말없이 걷는 동안 온 감각이 되살아나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유난히 더 아름답게 가슴으로 들어왔고 풀 한포기에도 향기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그러느라 다른 날에 비해서 훨씬 긴 거리였지만 지루한 줄 몰랐다. 28.5km를 걷는 동안 수많은 개울과 다리를 건너며 저절로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오래되어 부서지고 허물어진 집터를 지나며 내 안의 잡다한 욕심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진 빈 자리에는 나도 모르게 ‘나’란 멋진 동무가 생겼다. 그리고 이곳에서 까페 콘 레체라 부르는 또 다른 벗이 행복을 얹어 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는 아침 여덟 시 이전까지 떠나야 하고 같은 곳에서 1박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아침은 상당히 분주하다. 우리처럼 체력이 달리고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은 더 빨리 일어나야 뭐라도 먹고 길을 나설 수 있다. 아침에는 주로 빵이나 우유, 삶은 달걀과 감자에 절임 올리브를 반찬 삼아 먹었다. 스페인의 감자는 참 부드럽고 맛있다. 바게트는 엄청나게 싸서 식비를 줄일 수 있고 여섯 개 들이 달걀을 사면 두 끼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채소 중에는 파프리카와 상추가 맛있었다. 가져간 튜브 타입 고추장을 바르면 재료에서 나오는 달콤한 맛과 고추장의 매콤한 맛이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바게트에 하몽을 넣고 고추장을 발라 먹는 것도 괜찮았다.
아침은 간단하게 해결하지만 점심은 기회가 되면 그곳에서 메뉴 델 디아라고 부르는 세 가지로 나오는 요리로 체력을 보충했다. 그것은 전채요리, 본식, 후식인 셈인데 첫 번째는 수프와 빵 종류이고 두 번째는 감자튀김과 고기 종류가 포도주와 곁들여 나온다. 세 번째는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로 입맛을 마무리하는 메뉴이다. 가격은 주로 12유로였다. 뭘 먹어야 할지 말이 통하지 않아 골치 아플 때 좋았다. 스페인은 농업이나 축산업이 발달해선지 음식 재료가 다양했다. 수산물도 풍부해서 오징어와 문어, 새우가 들어간 요리가 많았다. 하루 일 중 오늘은 어디서 잘까, 무얼 먹을까 생각하는 게 거의 전부라 음식이 만족스러우면 그걸로 그날의 로또에 당첨된 거였다.
여유 있는 저녁이면 그곳의 특징적인 요리를 맛보려고 순례자 친구들과 몰려가기도 했다. 쌀을 주재료로 만든 빠에야도 먹어 보고, 병아리콩과 돼지고기 등을 넣고 탕으로 끓여낸 코시도 마드릴레뇨나 문어를 오래 삶아낸 뽈뽀 등을 맛보았다. 채소를 된장국처럼 끓여낸 갈리시안 수프는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안주로 먹는 핀초나 타파스 등은 세월 따라 많은 게 잊힌다 해도 가끔씩 떠오를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약 9Km쯤 걷다가 쉬었다. 길 양쪽으로 바가 있었는데 일부러 아무도 없는 건너편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실내장식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탁자에 작은 들꽃을 꽂아 둔 자리에 앉아 까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돌아서면 배고프고 먹고 나도 허기지는 순례길이었다. 기초 체력이 없어 밥심으로 버텨 내느라 더 그랬나 보다. 그런데 이걸 한 잔 마시고 나면 힘이 불끈 솟아나서 남은 거리는 거뜬히 소화해 낼 수 있었다. 까페 콘 레체는 커피 추출기에서 빠른 속도로 에스프레소를 뽑아 우유를 많이 넣은 음료다. 보통 1.2유로로 당시 한국 돈으로는 약 1,600원이었다. 하루 일과가 너무 단조롭다 보니 이걸 주문하는 일이 기대되고 행복한 일이 되었다. 집집마다 맛이 다르고 장소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를 마신다. 펄럭이는 비옷을 입은 순례자들이 안개비 속으로 사라질 때 가슴이 뭉클하다. 그들이 품고 있을 열정과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부엔 까미노!’ 따뜻해진 온기를 안고 나도 문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소소한 것으로 날마다 마법 같은 일을 즐길 수 있다니 참 단순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