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의 선물 -아웃 오브 아프리카-
불현듯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미세먼지가 많은 오늘 같은 날이다. 영화를 선택하려고 채널을 찾는 중에 명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여든두 살에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의 주름진 얼굴이 화면에 가득 하다. 배우로서의 성공이 그에게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해주었지만 죽음이라는 인간이 가는 종점은 피할 수 없었구나 생각하니 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그는 훌륭한 할리우드스타였으며 감독으로서도 영화계에 남긴 업적은 실로 크다. ‘스팅' '내일을 향해 쏴라'등 여러 작품에서 빛을 발했지만 내가 잊을 수 없는 영화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년)이다. 주인공 데니스가 카렌에게 준 세 가지 선물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다.
덴마크 여성작가 블릭센 카렌(1885~1963)의 자서전이 시드니 폴락 감독을 만나 작품성이 뛰어난 수작으로 탄생한 영화다. 카렌의 필명은 아이작 디네센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에 명보극장에서 길게 줄서서 표를 산 기억이 난다. 극장에서 나오며 친구가 투덜거렸었다. 뭐 그런 남자가 있냐고, 사랑한다면 곁에서 늘 함께해 주는 게 옳은 일일 텐데 여행만 다니는 매몰찬 남자라고 했다. 그때는 나도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다시 보았을 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남자의 자유로운 사고가 오히려 매력 있게 느껴졌었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독신 여성 카렌( 메릴 스트립 분)은 오랫동안 꿈꾸고 기대했던 아프리카 케냐로 와서 결혼을 하고 커피농장을 하며 열성적으로 살아가지만 남편의 재산 탕진과 불륜으로 결혼생활을 계속하지 못해 헤어지고 만다. 사냥 중에 자신을 사자로부터 구해 준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 분)를 알게 되고 그가 섬세하고 배려 깊으며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남자란 걸 알게 되면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장엄한 아프리카의 푸른 대초원은 모차르트의 선율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데니스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카렌에게 선물을 한다. 선물 하나하나에 그의 깊은 마음이 담겨있다. 카렌은 아프리카에서 꿈을 이루자며 청혼하지만 그는 결혼이라는 구속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구속받기 싫어하며 구속하기도 싫어하는 자유인이었다. 그즈음 커피농장조차 화제로 인하여 도산되고 아프리카를 떠나기로 결심한 카렌에게 여행에서 다시 돌아와 바래다준다고 약속을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결국 카렌은 결혼 실패와 사업 실패,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연인마저 잃고 아프리카를 떠나게 된다는 줄거리다.
카렌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프리카는 그녀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언제나 변함이 없다. 자연도 바람도 태양도 그대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데니스가 남기고 간 세 가지 선물인 만년필과 나침반과 축음기가 있다. 만년필엔 둘만의 추억을 쓰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으리라. 아마 그리움도 번져 나오리라. 카렌은 그 만년필로 사랑과 아프리카에서의 추억을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소설을 완성하여 독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데니스를 살아 있게 했다. 나침반은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라는 뜻이리라. 또 살아가는 방향을 잃고 갈피를 못 잡을 때 자기의 마음을 헤아리며 삶의 지표로 삼기를 원한 선물이었으리라. 마지막 선물인 축음기에서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풍광과 추억과 환희로웠던 음률들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그의 애정과 배려가 세 가지 선물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화면을 채우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가장조 2악장은 잔잔한 그들의 사랑과 비운의 종말을 예고한 듯하다.
1986년도 겨울에 처음 상영하고 10년쯤 후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느낌은 그때마다 달랐다. 지금 보니 또 새로운 감동이 밀려온다. 연륜이리라. 경험의 눈이 달라진 것이리라. 미처 보이지 않던 카렌의 억척같은 삶이며 열정이 아름다움과 용기로 내 품에 들어오자 나도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위안을 받았다. 데니스가 주었던 세 가지 선물의 의미도 새롭게 왔다. 자유를 구가하면서 자신을 위한 삶을 개척하기를 바라는 진정한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
카렌에게 주었던 세 가지 선물이 다시 내게로 전해진 것 같아 살그머니 가슴에 손울 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