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브이 뉴스: (1992.8.24) 대한민국과 중화인민 공화국은 오늘 40여 년에 걸친 단절과 적대의 벽을 허물고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내레이션: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중국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 수립을 선언한다. 한국전쟁에서서로 총구를 겨눈지 39년만에 양국이 손을 맞잡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노태우/대통령: 우리 정부는 중화인민 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내레이션: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 한국과 중국의 전격적인 수교는 양국의 미래는 물론, 동아시아의 미래를 바꾼 대사건이었고 그 배후에는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을 천명하며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중국의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이 있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81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30년전 한중수교가 수립된 그날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았는데요. 이때는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가 놀랄만한 뉴스였어요.
허준/방송인: 제가 정말 정확하게 기억하는데요. 직전에 한 6년 동안 반공웅변대회에서 항상 학교에서 1등을 했어요.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호국영령들을 위해~ 이런 식으로 그리고 반공포스터대회 반공글짓기 대회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 직후 마치 솜 사탕이 물에 빠지듯 반공 글짓기 반공웅변 대회가 싹 사라졌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이시원씨를 향해) 명동 자주 나가시나요?
이시원/배우: 가끔 가죠.
최태성: 명동에 가면 거기 중국대사관이 있잖아요. 중국 대사관 자리가 원래 대만 대사관 자리였어요. 중국하고 수교를 하면서 중국측이 요구를 한 거예요. 대만과의 관계를 끊어달라. 그래 가지고 대만 대사관이 폐쇄가 되는데 대만 국기가 내려올 것 아네요. 많은 대만 화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안 그러겠어요~ 내려오는 장면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그때 주한대만대사가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이제 대만의 국기는 내려간다. 그러나 그 국기는 우리의 가슴에 걸겠다.
김지훈/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북한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북한하고 중국은 혈맹이라고 오랫동안 해왔는데 그것도 혁명 1세대 동지였던 덩샤오핑 시대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죠.
이시원: 민간인들도 여행을 시작하게 하려고 정부에서 교사들을 뽑아서 단체로 중국에 관광을 보내기도 했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갔다 오셨어요. 그래서 그 전만해도 되게 공산당 무섭고 뿔 달린 거 아냐 이런 느낌이었는데 거기도 사람 사는 게 다 똑 같더라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최태성: 정부가 그런 목적으로 보낸 것이라서 제대로 관광하고 오신 거네요.
최원정: 공산국가 인식개선 위해 사람들을 보낸 거죠. 한중의 미래를 바꿔놨던 그날 한중수교가 가능했던 게 바로 덩샤오핑 덕분이죠. 오늘 권순우 기자님이 나오셨다는 얘기는 여기에 경제에 관련된 얘기가 많다는 얘기예요.
권순우/삼프로TV팀장: 역사적인 사실들을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은 새롭게 보이는 측면들이 많아요. 덩샤오핑이란 인물이 중국의 역사, 그 안에서도 경제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점이 굉장히 많은 인물입니다.
김지훈: 1978년 12월에 중국 공산당이 제11기 3중전회라고 하는 회의를 열었고요. 그 회의에서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혁개방 그리고 현대화 노선을 걷고 과거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길로 경제발전으로 크게 노선전환을 시작한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죠. 그래서 우리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덩샤오핑은 중요한 인물이고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는데 기본적인 플랜을 마련했던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150센치미터 남짓의 작은 키, 정말 한 눈에 봐도 왜소해 보이는 체구입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덩샤오핑을 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죠.
최태성: 근데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등신대가 실제 덩샤오핑의 키 맞아요?
이광용: 제작진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최원정: 이광용씨의 키를 제가 아는데요.
이광용: 152센티미터?
최원정: 180센티미터 정도 되니까
이광용: 오늘 진행 잘 하시는데요.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중국을 완전 바꿔놓은 이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꿈은 뭐였을까요?
최원정: 상식적으로 인민을 배불리 게 하는 거?
이광용: 그 꿈은 어느 정도 실현했어요. 그런데 덩샤오핑 마음 속에 있던 또 하나의 간절한 꿈이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중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 한번 진출하는 것~
최원정: 캐스터 라고 너무 축구 중심으로 얘기를~
이광용: 월드컵 앞두고 있어서 홍보 필요한 것 맞습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축구에 진심이었던 것도 맞아요. 축구 해설계의 작은 거인~
한준희: 저는 역사저널 그날에 이 따금씩 나오는 한준희입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도 KBS와 함께 할 축구 해설위원 한준희입니다. 덩샤오핑은 축구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이구요. 덩샤오핑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를 축구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덩샤오핑과 저의 공통점은~? 작은 키, 축구를 좋아한다. 두번째 까지는 나왔어요. 그런데 세번째 공통점은 뭘까요?
이광용: 아내를 사랑한다?
한준희: 덩샤오핑이 어떻게 했는지 제가 몰라가지고~
허준: 선수출신이에요? 두 분 다 학생시절에 선수였으면?
이시원: 아니면 식습관이 비슷한가요? 커피 크루앙즈 치즈 양식을 좋아한다?
최원정: MBTI가 같다?
한준희: 유학파 라는 겁니다.
허준: (덩샤오핑 이력서) 저기 유학이라고 써 있어요.
한준희: 그렇죠, 유학파라는 건데 (프랑스, 소련 유학), 제가 학부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지금 예체능에 종사하고 있는 아주 전인적인 인간아닙니까? 인문학을 종사할 때 박사과정을 위해서 제가 미국 유학을 갔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덩샤오핑도 보시다시피 1920년에 프랑스 유학을 떠났는데 여기에서 축구를 많이 좋아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유명한 에피소드 중에 하나가 1924년에 파리 올림픽이 열렸는데 덩샤오핑이 파리 올림픽 축구를 보기 위해서 전당포에 옷을 맡기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광용: (스튜디오 사진) 이 사진이 바로 파리 유학 당시 덩샤오핑입니다
허준: 귀공자 같죠?
최태성: 저 겉 옷을 전당포에 맡길려고?
이광용: 이 옷이~ 이 시기에 덩샤오핑의 경험이 물론 축구를 좋아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이후 덩샤오핑의 삶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돼요. 유럽은 자유분방 하잖아요. 거기서 지내면서 느꼈던 것들이 향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만드는데도 아주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준희: 저는 덩샤오핑 보다 또 짧은 기간 미국에 있었는데 미식축구나 야구만 보고 온갖 채널을 뒤져서 축구를 엄청나게 봤거든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많은 축구를 본 것이 지금 오늘날 이 자리에 서 있게 되는 많은 자양분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마도 덩샤오핑도 프랑스에서 있었던 시기가 이 사람의 인생에는 굉장히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광용: 1920년대 말이 유학이지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철강공장, 장화공장, 자동차 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구요. 그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렇게 덩샤오핑은 1925년 21살 때 정식으로 공산당원이 되구요. 1926년 모스크바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왕성하게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김지훈: 서구의 문물을 보고 프랑스 라든가 당시 소련의 발전상을 봤던 덩샤오핑은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구요. 반면에 마오쩌둥은 이 사람이 활동했던 곳은 중국 국내, 중국의 농촌이라든가 중국의 도시들이 있겠지만은 보고 있는 시야라든가 이런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마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어떤 나라를 실제로 실현시킬 것인가 여기에 비젼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광용: 이제 정말 축구 이야기 시작할 거예요.
한준희: 중국이 월드컵 본선에 오른 적이 딱 한번 있습니다.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 그 당시 우리와 일본이 공동개최를 했었기 때문에 사실은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중국이 다른때 보다는 약간 어드밴티지가 있었죠.
권순우: 그렇게 축구를 잘 하는 나라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에게 우스개 소리로 14억명 중에 축구 잘하는 사람 11명 뽑는데 그렇게 어렵나?
이시원: 이번에 예선에 떨어지지 않았나요?
이광용: 일찌감치 떨어졌죠.
한준희: 중국이 국가대표 축구는 여전히 부진하고 기대치에 매우 미달하고 있었지만 클럽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2016년 1월, 2017년 1월에 중국슈퍼리그가 전세계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계 최고 이적료 총합 기록을 2년 연속 세웁니다.
이광용: 가장 비싼 선수가 중국축구로 몰려들었던 시기죠.
한준희: 그 이야기는 뭐냐하면 2016년 1월과 2017년 1월에는 중국 프로축구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보다 돈을 많이 썼다는 얘기예요.
이광용: 그때 중국 리그에서 뛰었던 선수들 중에 여러분들도 알만한 이름이 많아요.
최원정: 누가 있죠?
허준: 드룩바
한준희: 역시 허준 선생이 축구를 좀 알아요.
허준: 요즘에 헤딩 슛 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헤더 라고 해야 됩니다.
한준희: 그것도 정학한 표현이에요. 월드컵을 앞두고 좋은 깨알 같은~ 드록바 선수를 말씀하셨는데 드록바 선수가 십여년 전에 중국에서 받았던 연봉이 246억원 이라고 해요. 십여년 전에~ 그러니까 유럽보다 더 많은 연봉을 주고서 정말 유럽과 남미의 유명한 선수들을 많이 데려 왔는데~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라든가 헐크 오스카 야니 카라스코 비첼 펠라이니 등등 중국 땅을 밟았던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유럽, 남미의 슈퍼스타들이 거의 50명~ 100명, 100명 이상도 될 수 있을 것 같애요. 근데 중국 축구 리그가 요즘은 그렇게 못합니다. 이미 그 시절이 지났어요. 이게 2018년, 19년 쪽으로 넘어 오면서 전체적으로 중국의 경제상황이 바뀌었죠.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대출정책이 바뀌고 하면서 그 축구단을 운영하던 많은 재벌들이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축구단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요즘의 중국 슈퍼리그는 그렇게 까지 활발하지는 않습니다.
이광용: 저희가 말씀드린대로 덩샤오핑이 축구에 진심이었던 게 사실은 중국이 축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키우는데 분명히 도움을 준 거잖아요.
한준희: 중국 축구의 역사를 예전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중화민국이라는 명칭이 있지 않습니까. 중화인민 공화국이 탄생한 이전이 중화민국인데 1931년에 중화민국이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FIFA 가입을 1948년에 했으니까 우리보다 훨씬 빨랐던 거구요. 그런데 여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1949년에 중화인민 공화국이 출범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화인민 공화국이 나온 이후에도 피파는 중화민국의 연을 끊치않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중화인민 공화국 입장에서는 우리는 피파랑 놀지 않겠어. 피파랑 절연을 할래~ 국제 축구연맹과 절연을 하게되면 축구적으로는 하등의 좋을 게 없고 그것은 국제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하고 축구적인 퇴보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시원: 고립이 되니까
한준희: 고립이 돼죠. 그래서 그때 부터는 사실 중국 축구의 성장이 완전히 정체되고 퇴보기로 접어든데다가 결정적으로 치명적으로 1966년에 뭐가 있었지요?
이시원: 문화대혁명이요.
한준희: (감탄) 어~ 그걸 여섯 분 중에 이시원씨만 알고 계시네요.
일동: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이에요.
한준희: 문화대혁명이 있었잖아요. 문화대혁명은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는 오락으로 치부가 되는 거죠. 오락으로 간주가 되면서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가 거의 열리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어요.
최원정: 코로나 19로 축구를 1~2년 경기를 못보는 것도 답답해 했는데 무려 10년이나 중단된 사태~ 두 사람은 말만 들어도 너무 답답하고 끔찍하죠?
한준희: 저는 다른 직업을 하고 있었겠죠.
이광용: 이런 문화대혁명 시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암흑기가 있었는데 하지만 중국 축구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습니다.
-------------(동영상), 중국의 한 축구장, 인민들의 뜨거운 박수와 함께 등장한 사람은 바로 덩샤오핑, 실각한 지 일년 만에 1977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요. 그는 복권 후 곧 정치행보로 축구관람을 선택할 만큼 축구에 진심이었습니다. 중국대표팀과 홍콩대표팀의 친선경기를 참관한 후 덩샤오핑은 선수들까지 접견하면서 앞으로는 해외로 나가 선진축구를 배우고 중국의 축구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시원: 퍼포먼스를 이런 식으로 한걸 보면 나름 자기가 좋아했던 건 확실하긴 한 것 같애요.
이광용: 무대가 축구장이었잖아요.
허준: 관객들의 얼굴을 보면 정말 기다려왔다는 얼굴 표정이에요.
이시원: 다시 축구를 한다.
김지훈: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의 축구가 시작되고 새로운 시대가 이제 열리고 있다는 것을 중국 사람들도 느끼고 있었던 거죠.
최태성: 역사적인 장면이네요.
한준희: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월드컵이 열립니다. 아르헨티나 월드컵부터 중국에서 최초로 국제적인 축구대회에 실황중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덩샤오핑의 영향이겠죠. 그리고 이제 1979년에 마침내 중국이 피파에 가입을 하게 돼요. 그때부터는 중국 축구가 본격적으로 다시 국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금조금씩 성장한 결과가 나중에 2010년도에 슈퍼리그에서 돈을 많이 쓰고 그런 결과가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입니다.
권순우: 제가 오늘 한준희 위원님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이걸 정말 진지하게 여쭤볼려고 하는데요. 한국 축구의 카타르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최원정: 16강 진출 가능한가요?
한준희: 제가 KBS에서 조추첨 행사 때부터 지금까지 말씀 드린 우리의 16강 진출확률은 30%였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5% 올랐습니다. 오늘은 35%라고 말씀을 드리겠는데 이게 사실 선수의 부상을 우리가 기뻐할 수는 없지만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우루과이에서 아주 중요한 수비수가 얼마전 A매치 기간에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아서 아마 월드컵에 나오기가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광용: 대한민국 같으면 김민재 같은 선수가~
한준희: 바르셀로나의 로날드 아라우호 라는 선수인데 이 선수가 김민재 선수처럼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는 수비수고 뛰는 위치도 손흥민 선수와도 맞닥 드릴 수 있는 선수였는데 이 선수가 월드컵을 정상적으로 소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애서 지금 현재로서는 35% 정도의 가능성이 있다 말씀을 드립니다.
이광용: 한준희 위원의 예측이 맞을지 사실 키가 되는 경기가 우루과이이거든요. 11월 24일 밤 10시 KBS와 함께 해 주시고요. 한준희 해설위원이었습니다.
최원정: 덩샤오핑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 제가 지금 준비한 겁니다. 뭘까요?
최태성: 오뚜기 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뭔가요? 이게 넘어질 듯 하면서 안 넘어지는 것 오뚜기 이게 바로 덩샤오핑의 별명입니다.
이시원: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 라고도 하지만 그만큼 넘어질 일이 많았다는 거거든요.
김지훈: 덩샤오핑은 1920년대부터 중국혁명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여러가지 고난도겪어요. 1930년대에 첫번째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때 마오쩌둥 하고 같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당에서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때 약간 억울하게 실각을 하는 일이 있었죠. 그렇지만 그거는 오래 가지는 않았구요. 두번째는 1968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초기에 실각을 하죠. 실각을 해 가지고 장시성으로 가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 저우언라이 총리가 76년 1월에 죽게 돼요. 추도사를 하는데 그 언저리에 많은 사람들이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에 있었구요. 그래서 1976년 4월 5일에 톈안문에서 저우언라이 총리 추도를 하면서 거기서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4인방을 비판하는 시위대가 일어나게 됐고 (장칭,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훙원) 그런데 당시 4인방은 바로 이 시위의 배후에 누가 있느냐 그것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해가지고 그때 세번째 실각을 하게 됩니다.
최태성: 문혁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덩샤오핑의 큰 아들이 대학생이었거든요. 대학생이었는데 홍위병들이 아들한테 덩샤오핑이 잘못한 거 빨리 자백하라고 강압적인 압박을 엄청 준 거예요.
최원정: 아들한테 왜?
최태성: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가지고 건물에서 떨어져 가지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최원정: 이 정도면 정치적 탄압도 받는데다가 가정도 풍비박산이 난 건데 이 와중에 다시 일어난다고요?
김지훈: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정통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1920년대 혁명운동했고 그 이후에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을 같이 만들고 그 다음에 중국군대에서의 경력도 가지고 있었어요. 이런 배경이 아마 이 사람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봅니다.
최원정: 실권과 복권을 왔다갔다한 역경이 있었던 거예요.
김지훈: 그래서 중국에서는 보통 오뚜기라고 하지 않고 삼락삼기(三落三起), 세번 추락과 세번 다시 일어났다. 1976년 9월 9일에 마오쩌둥 주석이 죽게돼죠. 그리고 그 이후 한 달도 채 안되 가지고 4인방은 체포가 됩니다.
최태성: 드디어 문화대혁명이 끝났네요. 바로 이순간이 사실상 문화대혁명이 끝났다 라고 할 수 있죠.
최태성: 4인방이 딱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덩샤오핑이 마오타오주를 가지고 오라고 해 가지고 무려 27잔을 마셨다고 그래요. 그리고 이제 정말 됐다 나는 다시 일어난다.
최원정: 마오타오주가 처음 나왔을 때가 미중회담 때 낙슨과 마오쩌둥이 만났을 때 마오타오주가등장했잖아요. 이게 뭔가 중국 역사에 물줄기가 바뀌는 그 순간에 나오는게 마오타오주인데~
권순주: 마오타오란 술은 워낙 상징적인 술이다 보니까 굉장히 중요한 정상회담에 등장하는 술인거 같애요. 소련의 스탈린이라든지 북한의 김일성 같은 우방 지도자들에게도 마오타오를 많이 선물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마오타오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사랑은 엄청나게 커요. 얼마나 크냐~그 좋은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십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오타오주는 기타모다 라는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데 여기 싯가 총액이 한 때 500조가 넘었어요. 500조 이면 그 당시 삼성전자 싯가 총액보다 더 컸어요.
허준: 사실은 4인방 때도 그랬었고 그 이전에도 그랬고 마오는 왜 덩샤오핑을 죽이지 않았는지 라는 생각이 드는데~
김지훈: 마오는 용인술에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덩샤오핑 하고 자신하고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오랜 혁명동지이기도 했고 같이 고생한 많은 경험도 있었고 그리고 이 사람이 실무적으로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정치적으로 잠깐 서로 틀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이후에도 중화인민 공화국과 중국 공산당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최태성: 중국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얘기를 했대요. 왜 우리도 태종 이방원이 한 일 중에 제일 잘 한 거? 세종 등극시킨 것~
이시원: 세자를~
최태성: 마오쩌둥이 1949년 이후 중화인민 공화국을 설립한 후 제일 잘 한일~ 덩샤오핑을 살려준 거~
이시원: 아까 영상에서 중국인들이 덩샤오핑의 복권을 엄청 환호하고 있었잖아요. 근데 그게 다시 축구하게 되어서 그런 거 같지는 않아요. 어떻게 해서 덩샤오핑이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었나요?
권순우: 마오쩌둥이 이끌었던 대약진운동이라든지 문화대혁명 같은 경우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아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1978년에 중국의 인구가 9억 6천명 되는데 그중에 농민이 한 8억명 정도가 됐다고 그래요. 그 8억명 중에 3분의 1 정도 되는 2억 5천만 명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지도자가 누구냐 라고 했을 때 등소평을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인 것 같애요.
최원정: 지금 경제이슈 경제지표에 따라서 지도자의 지지율이 달라지잖아요. 내가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게 하고 나서는데 어찌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김지훈: 또 하나는 중국은 당시에 대학입시라든가 이런 게 다 중단됐어요. 그래서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1년에 대학생들을 다시 뽑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뽑았냐 하면 추천제로 뽑았습니다. 그러니까 입시가 없구요. 그러다 보니까 소학교 졸업한 사람들, 중학교 졸업한 사람들, 학력격차도 심하고 불균형한 사람들이 막 들어오니까 수업의 질도 떨어지고 대학 교육이 난맥상을 보였는데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농촌에 가서 농사짓고 힘들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대학 입시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개혁을 하면서 중국의 대학교가 정상화됐고요.
권순우: 교육정책의 경제적 효과를 보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 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교육을 정상화시켰다는 것은 그 이후 개혁개방 정책을 할 때 이 정책을 가지고 무언가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정책도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전방위적으로 개혁 개방에 힘을 쓴 것인데 등소평의 개혁개방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친구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 친구들이 없으면 설명이 안돼요. 고양이 두 마리를 모셔왔습니다.
최태성: 흑묘백묘를 얘기하실려고?
최원정: 네~
권순우: 고양이가 쥐를 잡는데 검은 고양이가 잡으면 어떻고 하얀 고양이가 잡으면 어떠냐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라고 해서 시장경제의 전면적인 도입을 이야기했어요. 그거는 우리의 어떤 정치 사상적인 걸 흔드는 게 아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 위한 방법에 불과 하다 라고 고양이 얘기를 한 건데요. 제가 진지하게 취재를 많이 해봤는데~ 수의사분들께 취재를 해보니까 검은 고양이가 좀 더 잘 잡더라.
이시원: 쥐를? 왜냐면 검은 고양이는 검으니까 은폐가 쉽잖아요. 그래서 더 잘 잡는 거 아녜요?
최원정: 길거리에 흰 고양이가 거의 없거든요. 확률적으로 수가 많은 검은 고양이가 유리한 게 아닌가?
이시원: 흰 고양이는 대부분 집 나온 고양이들이니까 사냥에 익숙하지 않아서?
최원정; 그래서 뭘 취재하신 거예요?
권순우: 제가 항상 진지하게 사실만 이야기 하다가 즐겁게 할려고 그냥 한번 던져 봤는데 이시원님이 잘 받으셨어요.
허준: 사실은 그 말 속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들어오면 어떠냐. 우리가 공산주의인데 다들 먹고 사는 거는 자본주의로 해도 되지 않겠냐 이런 말이잖아요. 말이 안 돼죠. 그럴려면 이게 정치사상도 바꾸어야죠.
김지훈: 덩샤오핑은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냐면 중국이 경제발전을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서도 시장경제, 시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시장경제는 가능하다. 그래서 시장경제라는 요소를 경제에서 수용하면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게 됩니다.
권순우: 경제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자원이 한정적이에요. 그러면 이 자원을 그냥 똑 같이 풀어놓는 것이 좋을 것인가 아니면 좀 더 효율적인 것에다 몰아주는 것이 훨씬 더 성장을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예전에 우리나라도 못살던 시절에는 집안에 공부 잘하는 맏이가 있다 그러면 나머지 형제들은 학교를 안 보내고 큰 애 하나 잘 되면 우리 가문이 일어난다. 자원을 몰아주는 측면이 있잖아요.
최태성: 저 때만 해도 그랬어요. 그래서 제 동생은 대학교에 못 가고 여상 갔어요.
권순우: 큰 사람이 잘 됐는데 잘 베풀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있는 거지 자원을 한쪽으로 집중시킨 것은 경제적 효율성인 측면에서 굉장히 유일한 방식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그 당시 덩샤오핑은 先富論이란 걸 내세웠는데요. 선부론하면 어떤 것이 떠 오르세요?
이시원: 일단 누구 하나든 잘 살고 보자! 이런 느낌인데요.
권순우: 그렇죠,
허준: 아버지가 먼저다.
최원정: 누군가 부유해지면 나머지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론이죠?
권순우: 공산주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누군가 먼저 하나가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거죠. 억지로 끌어내려서라도 이걸 평등하게 맞추어야 되는 건데 그게 아니다. 먼저 잘된 사람이 있으면 먼저 가게 둬라 그래서 선부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됩니다.
이시원: 근데 그렇게 따지면 누가 먼저 부자가 싶지 않겠어요?
허준: 그게 바로 자유경쟁이고 시장경제예요.
최태성: 자본주의라는 거죠.
권순우: 그걸 거시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건 경제 용어인데요. 억압적 금융이라는 말을 써요 돈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게 아니라 강제로 돈을 특정부분에 몰아주는 (금융억압-정부가 금융시장에 개입해 시장을 억압하는 현상), 금융을 몰아주는 걸 얘기하거든요. 우리 예전에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에 저축해라 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으셨을 거예요. 왜냐면 국가적으로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개개인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끄집어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은행에다 돈을 모우 게 되겠죠. 그 은행에 있는 돈을 특정 대기업에 몰아주는 거예요. 그래야 큰 공장도 만들 수 있고 물건을 만들고 수출을 해서 달러를 벌어오게 해라. 요런 것들이 억압적 금융경제 정책인데요 이것을 중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활용을 하게 되면서 그럼 어디다 몰아줘야 될 것인가 교역이 많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에다 몰아줘야 됩니다.
최원정: 그게 어딜까요?
권순우: 생각해 보면 중국이라는 대륙이 있을 때 서양과 교류를 할 수 있는 남부의 해안 도시들, 광저우, 상해~ 그래서 등소평은 1979년에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면 4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을 했고요. 1984년에는 상하이, 광저우 등 14개 연안 도시를 해외에 개방을 하게 돼요(베이하이, 잔장, 광자우, 푸저우, 윈저우, 닝보, 상하이, 난퉁, 롄윈강, 칭다오, 옌타이, 톈진, 친황다오, 다롄), 그러면 국내적으로 자원을 몰아 준 것도 있고 해외 자본도 해당 지역에 본격적으로 유입이 되면서 그때부터 중국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최태성: 저 중에서도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도시로 딱 떠오르는 게 있지 않습니까. 상하이~ 정말 이 상하이는 개혁개방을 통해 가지고 상징적으로 급격하게 발달했던 항구도시로 볼 수 있는데 (상하이 1987-상하이 1998), 87년도의 모습이구요. 10년 뒤 98년도의 모습인데 아마 상하이를 가면 98년 이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저기 야경이 유명해요. 상하이는 중국에서 부촌 중에서도 부촌으로 우뚝 선 도시입니다.
이시원: 상하이가 이렇게 화려하고 건축물들이 아름답다고 해서 대학생 시절 가봤어요. 근데 길 하나 차이로 여기는 휘황 찬란한데 저기는 다 쓸어져가고 폐허고 엄청나게 차이가 크더라구요.
권순우: 되는 쪽에 몰아 준 겁니다 (가능성이 있는 쪽에 몰아 준 결과),
허준: 그런데 여기서 얘기는 先富論~ 누가 먼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여기부터 부자로 만들고, 다음엔 이쪽을 부자 만들면 되잖아 라고 말은 했는데 지금도 우리는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나 먼저 부자 되고 다음도 여기고 계속 얘기만 부자고~ 지금 이 상황이잖아요?
권순우: 중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중국 내륙을 중심으로 보면 해안 도시들이 성장한 게 맞죠. 그런데 글로벌한 걸로 보면 중국이란 나라가 그만큼 성장했냐 우린 더 성장해야 된다. 그러면 좀 더 개혁개방 되어 있고 발전된 곳에다 자본을 몰아주자 이런 식의 어떤 흐름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 이게 결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나타나게 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폐해, 양극화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부자도 엄청 많아요. 최근 자료에 따르면 개인자산 10억 달러 이상(1조 4천억원) 보유한 사람이 ①중국 1133명, ②미국 716명, ③인도 215명, ④영국 150명으로 ①위가 ②~④위를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최태성: (급격한 개혁개방의 그림자) 이 사진 한 번 보세요
이시원: 이게 말하는 대륙의 FLEX
최태성: 이게 이제 푸얼다이(富二代) (푸얼다이-부모에게서 막대한 부를 물려받아 호화생할을 하는 재벌 2세), SNS를 통해 금수저들이 부를 자랑하는 푸얼다이~
최원정: 다른 건 다 이해되는 데 명품 차에서 내려서 쓰러진 여자 모습과 명품 물건들
최태성: 넘어졌다는 얘기죠, 쓰러진 여자 자랑 할려고 (가방을 쏟았더니 명품천지.jpg)
이시원: 저거 여러가지 버전을 딱 열었더니 돈 다발이 쏟아지는 사진도 있고
허준: 저걸 보면 같은 백인데 색깔이 다른~ (명품백 수집은 색깔별로.jpg)
최원정: 강아지는 뭐예요?
허준: (우리집은 강아지도 유저.jpg)
최태성: 우리집 애완견이 있는데 애완견이 너무 예뻐가지고 워치로 다 채워줬어~ 발이 네개거든~
이시원: 저런 푸얼다이가 있는 반면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잖아요. 이런 빈부의 차이들이 계속 느껴지게 되면은 박탈감이 되고 이게 또 다른 불만을 얘기할 것 같애요.
권순우: 배 고픔이 조금이라도 해소가 되고 나면 배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도시에는 중복부자라든지 부자들이 생겨나게 되고 공산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던 농민들은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 되고 이러다 보니까 여기에 인플레이션 이라는 게 발생하게 되는데 (인플레이션-화폐 가치가 하락하여 물가가 전반적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제현상), 물가가 올라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이 물건을 사야 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나는 아직 가난한데 물가가 너무 올라서 난 힘들어 그런 것들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거구, 1988년도에 물가가 이미 전년대비 연간 19%에 달할 정도로 높은 물가수준이 되었어요.
김지훈: 중국 같은 경우에는 계획경제였습니다. (계획경제-집권적 중앙계획의 통제에 의하여 재화의 생산-분배-소비가 계획되고 관리되는 국민경제), 모든 물품을 국가가 결정하고 공급을 하고 가격을 정하게 돼죠. 그러다 보니까 국영상점에서 공급하는 원래 가격이 있고 그러나 실제로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암시장이 존재하게 됩니다. 권력을 쥐고 있다 하게 되면은 국영상점이라든가 정상적으로 공급되는 가격에 물건을 확보해 가지고 그것을 암시장에 팔게 돼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축재를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개방을 했으면 왜 경제만 하지 정치적으로도 민주화가 필요한 게 아니냐 라는 의견들이 나오게 돼죠. 그렇지만 당시의 덩샤오핑의 생각은 정치적인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최태성: 그러니까 정치, 경제 이런 사회적 모순들이 계속 쌓이다가 결국은 터지잖아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989년 4월 톈안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죠.
------------이광용/아나운서: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앞에서 시위진압에 나선 중국인민 해방군의 탱크 앞을 맨 몸으로 막아선 한 남자,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일명 탱크맨의 사진은 30년이 넘게 지난 오늘까지도 천안문 사건의 상징으로 또 더 나아가 국가 폭력에 저항의 상징으로 전 세계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한 정치인에 대한 추모로 시작되어 (후야오방 前공산당 총서기) 정치개혁과 민주화 요구로 까지 이어졌던 천안문 시위, 하지만 그후 중국에선 천안문 사건을 상징하는 숫자 1989.6.4 등은 금기시 되고 있구요. 소셜 미디어에서도 사용 할 수 없고 검색을 이 숫자를 통해서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이렇게 까지 강력한 금기의 대상이 된 천안문 사건, 대체 33년 이전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동영상),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문 광장에 20만 무장병력이 투입됐다. 약 두 달간 이어진 천안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에 참여한 인민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상황~
일동: 아~!! 총소리가 막 들린다
이광용: 무차별 발포까지 이루어지자 혼비백산한 시위대 사이에선 사상자가 속출합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와 자유,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던 평화 시위대를 유혈진압한 인민해방군, 지금 보고 계신 이 장면들 모두 군 통수권자이자 중국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의 명령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민간인 사망자만 800명 이상 부상자는 1만 4천여 명에 이르는데요. 비공식적인 희생자는 더욱 많을 수 밖에 없겠죠. 계엄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간 자리, 시위대의 눈물은 이제 중국에서 잊혀가고 있습니다.
최원정: 다시 보니까 너무 먹먹하다.
허준: 너무 심각하다.
최원정: 지금 할 말을 잃었어요. 다시 보니까 너무 충격적인데요.
허준: 저 때 당시 대한민국은 사실 얼마 안 있어서 올림픽 축제가
최원정: 88년 이후니까
허준: 다들 이제 잘 살아보세, 우리는 이제 발전할 꺼야 이러고 있었는데 저런 끔찍한 일이 옆 나라에서 있을 거라고는 저 나이 때 전혀 몰랐어요.
이시원: 영상으로 보니까 더 끔찍한 것 같애요.
허준: 지금 이거 시위대 진압 명령한 게 덩샤오핑이잖아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한테 도망다니고 굴욕당하고 자기 아들의 하반신 마비가 있었던 바로 덩샤오핑 이잖아요. 그런데 인민을 이런 식으로 진압해요?
김지훈: 덩샤오핑 같은 경우에는 문화대혁명에서 큰 고초를 겪었죠. 홍위병들의 활동도 보고 거기에서 피해를 입었죠. 그리고 자기 아들도 하반신 마비가 되었고 그런 어려움이 왔습니다. 그런데 1989년 6월에 다시 문화대혁명 당시와 유사한 시위를 보게 되었고 거기서 일부 연구자들은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게 된 것이 과거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허준: 시위대를 홍위병으로 본 건가?
이광용: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게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사회주의 건설, 둘째 프로레타리아 (인민민주) 독재, 셋째 공산당의 영도, 그리고 넷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강력하게 견지하는 것~
최태성; 철저히 사회주의 하겠다.
이광용: 쉽게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개혁 개방정책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흔드는 어떠한 사상, 주의도 덩샤오핑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허준: 경제적으로 열심히 개혁 개방해 줄 테니까 돈 벌어 대신 모든 권력을 갖는 건 우리 공산당이야.
이광용: 이 천안문 사건이 덩샤오핑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주게되는데요. 이 네 가지 기본원칙에 따라서 천안문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던 덩샤오핑, 결국 인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급물살을 타던 개혁개방 분위기도 급속하게 냉각되는 데요.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감이 중국 내에서 있구요. 급기야 개혁파와 보수파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결국은 1989년 11월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삭직을 사임하면서 실각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1992년 1월, 덩샤오핑은 중국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도시순방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자신이 개혁개방정책을 펼쳤던 선전과 상하이 도시 등을 차례로 시찰하였는데요. 과감한 개혁개방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한 등소평,
덩샤오핑: 개방해야 합니다. 더 빨리 개방해야 합니다.
내레이션;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개혁 개방을 역설한 남순강화는 이후 중국에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져온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권순우: 저는 이 모습이 덩샤오핑이 천안문 사태라는 큰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인 입지가 좁아졌을 것 아녜요. 당시 정치적 사상은 경제적 측면과 분리된다고 애기했는데 그로 인해 큰 사고가 난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베이징 정치권을 상대로 한 일종의 정치적 승부수 같은 느낌을 받아요. 내가 진짜 잘못된 것인지를 인민들에게 물어보겠다. 우리의 개혁개방이 중국이라는 나라를 좀 더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라고 얘기하면서 오히려 국민적인 지지를 확인한 기회라고 봐요.
최태성: 천안문 유혈 진압을 한 상황 때문에 서방권에서 엄청난 민주주의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고 마침 그때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권 국가들이 우르르~ 무너졌잖아요. 그러니까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굉장히 위기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도 저렇게 휩쓸려 가는 것 아냐.
김지훈: 당시에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개혁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고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과연 1978년 시작했던 개혁개방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있었던 것이고 덩샤오핑이 남쪽을 돌아다니면서 연설을 했던 것은 개혁개방은 계속 되어야 된다 라는 의지를 표명을 하였고 그것이 나증에 중국 공산당의 방침으로 다시 굳어지게 돼죠 (1992년 10월 제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중국 공산당의 방침으로 결정),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1989년도 이후에 약간 소강상태에 있었던 개혁개방을 다시 한번 92년도에 밀고 나가야 된다는 걸 장조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원정: 개혁개방의 약효가 떨어지니까 노구를 이끌고 부스터 샷을 주입한 거예요. 근데 이게 의외로 반응이 좋았던 거죠?
김지훈: 맞습니다. 그래서 한중간 수교가 됐고 이런 것들도 결국 중국이 선진국들과의 제재를 피해서 당시 중진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해가지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할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와중에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거죠.
최원정: 지금 중국은 G2 세계 초강대국이라고 봐야 돼죠? 근데 덩샤오핑이 당시 이런 걸 예견했는지 뭐했는지 굉장히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는데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보고 얘기 나누어 볼까요.
----------------(동영상), 1974년 미국 뉴욕, 유엔 총회에 참석한 덩샤오핑은 중국이 세계 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덩샤오핑/유엔총회: 만일 중국이 어느날 낯빛을 바꿔서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 패권국가를 자처하며 곳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 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한다.
이시원: 야~ 미래를 읽은 건가요?
최태성: 지금 주석한테 한 말 아닌가?
허준: 후임 주석에게 전하는 말?
이시원: 그러니까요
최원정: 국제사회에서 적이 많찮아요. 적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짜 새겨들어야 할 말인 거 같애요.
허준: 저기 지금 딱 나온 말이 일대일로나 소수 민족탄압이나 여러가지 일들이 사회제국주의 모자 하나 주시면 씌워야 될 것 같은데, 지금 이런 상황 아닌가?
이시원: 만약 중국이 정말 덩샤오핑의 이 말을 새겨 들어서 변한다면 세계 곳곳에 퍼진 반중정서가 반의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권순우: 통계적으로 조사를 보더라도 중국에 대한 어떤 비호감도가 글로벌 평균으로 70%까지 올라갔어요. 싫어하는 사람은 70% 라는 데 왜 그런지에 대한 분석을 할 때도 이 덩샤이핑의 유훈을 지키지 않았다는 분석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어요.
김지훈: 등소평은 개혁개방 노선을 100년 동안 변치 않게 하고 그 다음에 강대국들과의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면서 차근차근 힘을 더 키우고 도광양회 라고 하죠.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 칼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키워라. 그런데 그 이후에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 유훈을 잘 지키고 있는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애요.
최태성: 등소평 같은 경우에는 특정인의 권력장악을 막기 위해서 예를 들면 특정인이 주석을 3번 연임할 수 없게 한다. 이런 규정도 만들고 연령제한도 두고 이런 걸 만들어 두었는데 오늘 방송 당일 10월 16일, 향후 중국의 5년을 결정지을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시진핑, 제가 볼 때는 연임, 이거는~~
이시원: 이번 공산당의 수장이 되는 사람이 새겨들었으면 좋겠어요.
허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두명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잖아요. 현재의 중국은 마오쩌둥의 노선과도 다른 상황이고 덩샤오핑의 노선과도 다른 노선인 거잖아요.
김지훈: 공산주의자들이 정반합을 이루어야죠 (정반합-변증법 논리의 삼단계-곧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모순되는 다른 주장인 반(反)이,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에 통합되는 과정),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그러면 결국 正이 마오가 있었고 反이 등소평이 있었고, 合을 시진핑이 하겠다 할지도 모르죠.
최원정: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시리즈로 마오쩌둥, 덩샤이펑을 맞쳤는데요. 다음 주에는 중국 공산당의 현재 리더 시진핑 이야기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81회 누가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는가? ② 덩샤오핑 에서 정리)
①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 공화국은 오늘 40여 년에 걸친 단절과 적대의 벽을 허물고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전쟁에서 서로 총구를 겨눈지 39년만에 양국이 손을 맞잡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 정부는 중화인민 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하기로 했다.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 한국과 중국의 전격적인 수교는 양국의 미래는 물론, 동아시아의 미래를 바꾼 대사건이었고 그 배후에는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을 천명하며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중국의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이 있었다.
② 북한도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북한하고 중국은 혈맹이라고 오랫동안 해왔는데 혁명 1세대 동지 덩샤오핑 시대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경제의 관점에서 보자. 덩샤오핑은 경제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인물이다. 1978년 12월에 중국 공산당이 제11기 3중전회가 열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 현대화 노선을 천명했다.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덩샤오핑은 중요한 인물이고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는데 기본적인 플랜을 마련했다. 덩샤오핑은 1920년에 프랑스 유학파다. 말이 유학이지 1920년대 철강공장, 장화공장, 자동차 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 노동자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③ 덩샤오핑은 1925년 21살 때 공산당원이 된다. 1926년 모스크바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공산당 활동을 시작한다. 서구의 문물을 보고 당시 소련의 발전상을 봤던 덩샤오핑은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반면에 중국 국내 농촌과 도시들 생활을 보는 시야가 부족했던 마오쩌둥과 사회주의 건설과정 비젼에서 차이가 있었다. 1966년에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있었다. 문화대혁명은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는 오락으로 치부하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추국가 발전하지 못하였다.
④ 덩샤오핑은 1920년대부터 중국혁명에 참여를 했다. 중간에 여러가지 고난도 겪었다. 1930년대에 첫번째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때 마오쩌둥 하고 같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당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그때 약간 억울하게 실각을 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거는 오래 가지는 않았다. 두번째는 1968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초기에 실각을 한다. 실각을 해 가지고 장시성으로 가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 저우언라이 총리가 76년 1월에 죽게 되어 추도사를 하는데 그 언저리에 많은 사람들이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그래서 1976년 4월 5일에 톈안문에서 저우언라이 총리 추도를 하면서 4인방을 비판하는 시위대가 일어나게 됐고 당시 4인방은 바로 이 시위의 배후에 바로 덩샤오핑이 있다 해가지고 세번째 실각을 하게 된다.
⑤ 문혁 때 덩샤오핑의 큰 아들이 대학생이었는데 홍위병들이 아들한테 덩샤오핑이 잘못한 거 빨리 자백하라고 강압적인 압박을 엄청 줘서 힘들어 건물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정통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1920년대 혁명운동했고 그 이후에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을 같이 만들고 그 다음에 중국군대에서의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이 부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을 보통 오뚜기라고 하지 않고 삼락삼기(三落三起), 세번 추락과 세번 다시 일어났다고 한다. 1976년 9월 9일에 마오쩌둥 주석이 죽자 4인방이 체포가 되고 드디어 문화대혁명이 끝났다.
⑥ 마오는 왜 덩샤오핑을 죽이지 않았는가, 마오는 용인술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덩샤오핑 하고 노선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오랜 혁명동지였고 같이 많은 고생한 경험도 있었고 실무적으로 매우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중화인민 공화국과 중국 공산당을 위해서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을 했다. 중국 사람들 중에서도 마오쩌둥이 제일 잘 한일은 덩샤오핑을 살려준 것이란다. 덩샤오핑이 어떻게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었나. 마오쩌둥이 이끌었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었고 아사를 하게 만들었다. 1978년에 중국의 인구가 9억 6천명 되는데 그중에 농민이 한 8억명 정도가 됐다. 그 8억명 중에 3분의 1 정도 되는 2억 5천만 명이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우리한테 희망을 줄 수 있는 지도자로 등소평을 떠올렸다.
⑦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인 1971년에 대학생들을 다시 뽑기 시작하는데 추천제로 뽑았다. 입시가 없고 소학교 졸업한 사람들, 중학교 졸업한 사람들, 학력격차도 심하고 불균형한 사람들이 막 들어오니까 수업의 질도 떨어지고 대학 교육이 난맥상을 보였는데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농촌에 가서 농사짓고 힘들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대학 입시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개혁을 하면서 중국의 대학교가 정상화됐다. 교육정책의 경제적 효과를 보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교육을 정상화시켰다는 것은 인재를 양성한다는 측면에서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⑧ 우리가 공산주의인데 먹고 사는 거는 자본주의로 해도 되지 않겠냐. 그럴려면 정치사상도 바꾸어야 한다. 덩샤오핑은 중국이 경제발전을 하기 위하여 시장경제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가능하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우게 된다. 그 당시 덩샤오핑은 先富論이란 걸 내세웠다. 누군가 부유해지면 나머지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론이다. 공산주의는 누군가 먼저 하나가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거다. 먼저 잘된 사람이 있으면 먼저 가게 둬라. 그게 선부론이다.
⑨ 거시경제적인 측면에서 억압적 금융이 있다. 강제로 돈을 특정부분에 몰아주는 금융이다. 중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활용을 하게 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서양과 교류를 할 수 있는 남부의 해안 도시들, 광저우, 상해~ 그래서 등소평은 1979년에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면 4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을 했다. 1984년에는 상하이, 광저우 등 14개 연안 도시를 해외에 개방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국내적으로 자원을 몰아 준 것도 있고 해외 자본도 해당 지역에 본격적으로 유입이 되면서 그때부터 중국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상하이가 발전한 건 先富論의 결과다.
⑩ 중국이 성장했냐 우린 더 성장해야 된다. 그러면 좀 더 개혁개방 되어 있고 발전된 곳에다 자본을 몰아주자 이런 식의 어떤 흐름이 나타났다. 이게 중국에서 나타나게 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폐해와 양극화 현상이다. 실제로 부자도 엄청 많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개인자산 10억 달러 이상(1조 4천억원) 보유한 사람이 ①중국 1133명, ②미국 716명, ③인도 215명, ④영국 150명으로 ①위가 ②~④위를 합친 것보다 많다. 중국에 이제 푸얼다이(富二代)가 생겨났다. 반면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다. 빈부의 차이들이 박탈감이 되고 불만을 얘기한다. 배 고픔이 조금이라도 해소가 되고 나면 배 아픔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⑪ 개혁개방을 했으면 왜 경제만 하지 정치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덩샤오핑의 생각은 정치적인 민주화를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정치, 경제 이런 사회적 모순들이 계속 쌓이다가 결국은 터진다. 그게 1989년 4월 톈안문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문 광장에 20만 무장병력이 투입됐다. 약 두 달간 이어진 천안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에 참여한 인민들을 무차별 발포까지 하였다. 중국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의 명령이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민간인 사망자만 800명 이상 부상자는 1만 4천여 명에 이른다. 비공식적인 희생자는 더욱 많을 수 밖에 없다.
⑫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4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사회주의 건설, 둘째 프로레타리아 (인민민주) 독재, 셋째 공산당의 영도, 그리고 넷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강력하게 견지하는 것, 철저히 사회주의 하겠다. 쉽게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개혁 개방정책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흔드는 사상, 주의도 덩샤오핑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경제적으로 열심히 개혁 개방해 줄 테니까 돈 벌어 대신 모든 권력은 우리 공산당의 소유다.
⑬ 천안문 사건으로 덩샤오핑은 인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급물살을 타던 개혁개방 분위기도 냉각되었다.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감이 중국 내에 있다. 개혁파와 보수파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1989년 11월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하면서 실각되었다. 1992년 1월, 덩샤오핑은 그의 나이 88세. 자신이 개혁개방정책을 펼쳤던 선전과 상하이 도시 등을 시찰하였다. 개혁개방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한 등소평,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남순강화는 이후 중국에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져온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⑭ 당시 정치적 사상은 경제적 측면과 분리된다고 했는데 그로 인해 큰 사고가 났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베이징 정치권을 상대로 한 일종의 승부수다. 내가 진짜 잘못된 것인지를 인민들에게 물어보겠다. 천안문 유혈 진압을 한 상황 때문에 서방권에서 엄청난 민주주의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때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권 국가들이 해체되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위기였다. 1978년 시작했던 개혁개방을 계속할 것인가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갈림길에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은 계속 되어야 된다. 1989년도 이후에 소강상태에 있었던 개혁개방을 92년도에 밀고 나가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⑮ 결국 중국이 선진국들과의 제재를 피해서 당시 중진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해가지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할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였다. 지금 중국은 G2 세계 초강대국이라고 한다. 근데 덩샤오핑이 당시 이런 걸 예견했는지 뭐했는지 굉장히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는데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1974년 미국 뉴욕, 유엔 총회에 참석한 덩샤오핑은 중국이 세계 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만일 중국이 어느날 낯빛을 바꿔서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 패권국가를 자처하며 곳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 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한다.
ⓐ 등소평은 개혁개방 노선을 100년 동안 변치 않게 하고 그 다음에 강대국들과의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면서 차근차근 힘을 더 키우고 도광양회 하라고 하였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 유훈을 잘 지키고 있는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 등소평은 특정인의 권력장악을 막기 위해서 주석을 3번 연임할 수 없게 하는 규정도 만들었다. 그런데 지난 10월 16일, 향후 중국의 5년을 결정지을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3연임되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두명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현재의 중국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노선과도 다르다. 공산주의자들이 正反合을 이루어야한다. 결국 正이 마오가 있었고 反이 등소평이 있었고, 合이 시진핑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