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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오십견, 관절염/ 만성난치질환/ 체질진료/전통 장침
제22강 여시바위골 水雲
1. 여시바위골의 수운
동학은 경상도의 것이다. 동학은 최초 발생에 있어서 전라도와 무관하다. 동학은 경상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의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이 땅의 경상도인은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경상도 사람은 19세기 말기에 한국의 혁명을 이룩했고, 21세기 오늘에도 동학의 정신을 다시 살려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는데 앞장 서야 할 사람들이다.
동네 목욕탕에 갔더니, 둘러 앉아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노대통령한테 부탁할 이야기를 나한테 했다. 나하고 노대통령하고 관계가 없고 만날 일도 없고, 무관하다고 했는데도, 그런 말을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당이나, 노대통령이 잘못하면 나까지 욕먹게 생겼다. 세상은 이렇게 연관이 되어있는 것이니 정치를 잘 해주길 부탁한다.
요새 민노당의 약진이 있었다. 과거 민노당 사람들 중에 위장취업한 사람들도 있었다. 배운 지식인들이 노동 일선에 가서,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고, 그들을 대변했다. 그렇게 고생했던 사람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다가 이제야 국회의원이 되는 시대가 왔다.
우리나라 위장취업 제1호가 누구일 것 같은가? 바로 최수운이다.
21살부터 31세까지 10년 동안 그야말로 대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인(商人)이 되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민중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거기서 역사의 갈 길을 발견하고, 우리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고, 그러면서 고민하고,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최수운이다. 어떤 의미에서 위장취업 제1호이다.
1844(21세)~1854년(31세)
水雲이 장사꾼으로 팔도를 유람하여 백성의 고통을 체험하고 국제정세를 파악한 시기
10년을 방황하다가 31살 때 용담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이 집에 앉아서 도를 닦는다고 하니 좀 이상한 놈이다, 정신이 돈 놈이 아니냐고 해서 고향에 있기가 괴로웠다.
예수도 고향에서 선지자 대접을 못 받았다고 한다. 고향에 가면 어릴 때 생각만 하고 괜히 윽박지르기만 해서, 나도 어릴 때 동창들 만나기가 싫다. 만나면 옛날 말만 한다. 상황이 변했는데, 대접 여부를 떠나서 무례한 짓이다.
수운도 그랬던 거 같다.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니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졌고, 당시 경주 용담골에 있는 촌부들과 수준이 달라졌을 것이다.
천하를 주유하다시피 해서 세상 물정을 알게 된 최수운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무너져 가고, 세계판도가 바뀌고 있는 판에, 옛날 생각만 하고 자신을 멸시하는데 견디기가 어려웠다.
울산의 태화강 상류에 있는 유곡(裕谷)의 여시바위골(狐岩谷)로 갔다. 왜 거기를 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부인이 울산 박씨였기 때문에 그 동네랑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만 한다.
수운은 여시바위골로 가서 3칸짜리 집을 사고 밭 6마지기를 붙여먹으면서 살았다. 수운은 거기서 공부만 했다. 그 동네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거기서 1년 살았다.
2. 을묘천서
울산으로 이사 간 다음해가 을묘(乙卯)년인데,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다.
을묘천서(乙卯天書)
을묘년(1855) 최수운이 여시바위골에서 천서를 받았다고 하는 신비로운 사건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하는 동학에서는 유명한 사건이 생긴다. 동학에서는 신비적으로 묘사를 하고, 특히 천도교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신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늘 그 신비를 완전히 풀어주겠다.
수운(水雲)이 떠안은 문제가 거대한 문제라서 공부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가보니깐, 아주 잘생긴 스님 한 분이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누추한 곳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그 스님이 말하길, 동네 사람들의 말에 학식이 높고 도를 닦으면서 고민을 많이 하시는 선생님이 계시다고 해서, 자신이 안고 있는 아주 괴로운 문제가 있어서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깐, 자신은 금강산 유점사의 스님이라는 것이었다.
小僧在於金剛楡岾寺矣.(소승재어금강유점사의)
자신이 도를 깨우치려고 애를 써도 안 되어서 100일 기도를 했는데, 기도가 끝나고 난 어느 날, 홀연히 탑 위에 책 한 권이 있었다고 했다.
忽覺視塔前(홀각시탑전) 有一卷書在於塔上(유일권서재어탑상):
그 책을 자신이 들여다보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고 한다.
收以披覽(수이피람), 則世之稀罕之書也(즉세지희한지서야)
그래서 그 책을 해석해 줄 사람을 찾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스님이 등에 메고 다니는 배낭에서 책을 꺼내 놓았다.
先生披覽(선생피람), 則於儒於佛(즉어유어불), 之書文理不當(지서문리부당), 難爲解覺(난위해각):
수운 선생은 그 책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유교에 있어서도 불교에 있어서도 그 책의 문리가 풀리지 않았고, 해석하기가 난감했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
제2대 교조 최해월을 평생 모시고 다니던 지식인 참모 姜洙의 작품
해월 선생을 모시고 다니던 강수라는 분의 <도원기서>라는 책이 있다. 그 도원기서에 그 내막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수운 선생은 보건데 지금은 해석이 잘 안 되나, 한 사흘만 고생하면 어떻게 풀어보겠다고 한다. 한문을 워낙 잘하는 분이니깐, 그 내용이 제대로 된 한문이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스님은 물론 그러라고 하고, 사흘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한다.
이 <천서:天書>라고 하는 책은 이상한 암호책이 아니라, 확실한 한문으로 쓰여진 보통 책이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후, 스님이 온다. 이제 좀 푸셨냐고 묻자, 수운이 말하길, 다 풀었다고 한다.
答曰 : 吾己知知.
그러니깐 그 스님은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한다.
僧百拜謝禮(승백배사례), 欣喜無地以言曰(흔희무지이언왈) : 此書眞可以生員主所受也(차서진가이생원주소수야), 小僧只爲傳之而已.(소승지위전지지이이), 如此書行之(여차서행지):
‘아, 그러시다면 이 책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내가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고, 이 책에 쓰여진 대로 실천하고 훌륭한 삶을 사십시오. 이 책은 주인인 당신을 만났으니 저는 가겠습니다.'
謝退下階(사퇴하계), 數步之內(수보지내), 人忽不見(인홀불견),
이렇게 말하고 스님이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 못가서 스님이 싹 없어졌다고 한다.
신비하게 그려진 거 같지만, 신비적인 기술은 아니다. 스님이 빨리 갔을 수도 있다.
先生心常神異(선생심상신이), 乃知神人也(내지신인야),
수운 선생은 마음이 굉장히 이상해져서, 신인(神人)임을 알았다고 한다.
其後, 深深透理(기후심심투리), 則書有祈禱之敎(즉서유기도지교):
그 후, 그 책을 열심히 들여다봤다고 한다. 그 책에 ‘기도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한다.
3. 천서의 정체
이것을 두고 천서를 받았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계시의 책을 받아서 수운의 종교적 체험의 출발이라고 한다. 그래서 을묘천서(乙卯天書)를 해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최수운의 신비로운 체험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나는 <을묘천서>가 무언지 안다. 내가 갖고 왔다. 천도교 사람들이 들으면 난리날 일이다.
이 <도원기서>를 저술한 분은 ‘강수’라는 분인데, 최해월을 평생 모셨던 대 지식인이다. 나는 ‘강수’ 선생에 대해서 굉장히 존경심이 있는데, 강수 선생은 대학자이며, 어설픈 사람이 아니다. 그가 기술한 것을 보면 딱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제1포인트 : 於佛於儒(어불어유), 文理不當(문리부당),
첫 번째 포인트는 유교적 논리로도, 불교적 논리로도 그 문리가 통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제 2포인트 : 書有祈禱之敎(서유기도지교)
두 번째 포인트는 기도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은 어떤 책이냐? 하늘에서 내려온 책이며, 수운이 본 이후에 다시 하늘로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을묘천서가 뭔지 알 수 없다고, 신비롭게 기술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을묘천서>는 바로 내 손에 있는 <천주실의>라는 책이다.
<천주실의>는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 쯤 쓰여진 것이다.
天主實義(1596년)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가 유려(流麗)한 한문으로 기독교 핵심교리를 해설한 획기적 명서(名書)
이태리 예수회의 선교사가 어렵게 중국에 와서 포교를 하기 위해서 유교경전을 깊게 공부한다. 그 당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다.
마태오 릿치(Matteo Ricci, 1560~1601)
중국이름은 이마두(利瑪寶) 중국포교를 위하여 유교경전을 깊게 공부했다. 그는 유교를 추켜세우면서 불교, 도교를 논박했다.
마태오 리치라는 분은 엄청나게 공부를 한다. 그리고 엄청나게 고등한 유교적 언어에 의해서 천주에 관한 실제적 진리를 토론하는 글인 <천주실의>라는 책으로 썼다. 이 책은 굉장한 책이다.
이 분은 이 책을 쓰기 전에 동양의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보다 앞서 <천주실록>이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것 가지고는 당시의 중국인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완전히 유교적인 논리를 가지고 기독교 전파를 위해 <천주실의>를 새로 썼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당신들이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라는 것이라고 한다.
유교경전의 上帝 = 기독교의 데우스(God)
진짜 중국의 전통은 천주에 대한 믿음이 있는 문명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굉장히 유려한 한문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이 사상은 토머스 아퀴나스의 토미즘이라는 가톨릭의 기초적인 것이다.
<천주실의>는 희랍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철학적 논리와 인식론을 유교 경전화한 굉장히 난해한 책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굉장한 대작이다.
내가 보기로는 <을묘천서>라는 책은 <천주실의> 아니면 <천주실의>와 비슷한 류의 책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단적인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최수운이라는 사람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면 바로 이런 <천주실의>와 같은 것이 깊게 들어가 있고, 서구문명의 모든 총체적인 논리가 압축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최수운은 종교적 체험을 하기 전에 이미 서구문명의 모든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울산 여시바위골에서 가졌다는 이야기다.
수운은 기독교라는 세력의 강점을 다 파악했다. 천주실의와 같은 이러한 서구문명의 이론서를 깊게 터득하게 되면서, 이렇게 서양 종교가 강력하게 우리 민족에게 전파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가슴 속에 들어온 것은, 서양종교와 맞먹을 수 있는 우리 나름대로 서양 종교를 상쇄할 수 있는 종교적인 역량이 없이는 도저히 새로운 물결을 이끌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서양 사람들은 하나님을, 천주를, 상제를 가르친다. 그럼, 나도 상제(上帝)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상제를 체험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에 기도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 해결에서 종교적 체험으로 그 문제해결의 방향을 틀게 되는 계기가 <천주실의>에서 주어졌다.
이 책은 하나님을 기도해서 만나면 끝나는 책이라는 것이다.
수운은 이 책을 통해 서양문명의 핵심을 파고드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깊게 통찰하게 된 수운은 이것이 좋기는 하지만, 신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억누르는 그런 수직 구조 속에서는 인간이 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주자(朱子)와 퇴계(退溪)가 리(理)를 가지고 인간의 도덕을 빙자해서 사람을 죽여 온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느님도 좋지만, 지금까지 주자학에 억눌려 백성들이 신음했는데, 조선민족이 또다시 하느님한테 억눌리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과 평등을 이야기하지만, 이 하느님은 거꾸로 인간 위에서 군림하면서 저 하늘 꼭대기에 앉아서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이 기독교 이론인데, <천주실의>란 그러한 신의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었다.
4. 최수운의 구도
문제는 이 핵심적인 하나님을 자신이 만나면 끝난다는 것이다. 최수운은 하느님을 자신이 직접 만나기 위해, 기도하러 다니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도를 닦으려면 명승지에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人傑은 地靈이라 勝地에 살아보세
明氣는 必有名山下라. - 몽중노소문답가 -
인걸은 지령이라는 말은, 땅의 영험스러운 기운이 있어야, 인걸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울산에서 조사를 해본다.
울산, 부산 지역의 최고 명찰은 통도사다.
통도사
원시승가 스투파중심사찰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천하제일명찰
통도사에 가면, 대웅전처럼 되어 있는 금강계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뒤에 가면 실제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 있다. 통도사는 불교의 원래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 아주 대단한 사찰이다.
수운이 통도사를 간 것은 아니고, 통도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내원사가 있다. 내원사로 들어가는 계곡은 천하의 명승지이다. 백담 계곡에 못지않은 곳이다. 정말 아름답다.
수운이 을묘천서를 받은 그 다음해에 수소문 끝에 그 곳을 찾아간다.
내원암
최수운이 1856년 4월부터 47일간 수도한 곳
그래서 내원암에서 49일 기도에 들어간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이틀을 못 채운 47일째 되던 날 나온다. 경주로 가서 상을 치루고 1년을 지내다가 아무래도 이틀을 못 채워서 도통을 못했다고 생각해서 다시 기도처를 찾는다.
수소문을 해서 이번에는 내원암으로 가지 않고, 내원암 바로 못 미쳐서 있는 속칭 원효굴로 갔다.
내원암이 위치한 산을 천성산이라고 한다. 원효굴은 천성산(千聖山)에 있다. 원효대사가 중국에서 데리고 온 스님 천 명을 가르쳐서 전부 성인이 되었다는 산이다. 천성산은 그렇게 영험스러운 산이다. 산세가 대단하다.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굴이 있는데, 그것을 원효굴, 적멸굴이라고 한다. 수도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서 보니, 온돌방을 만들고 초가를 지었던 것 같다. 굴 옆에 세 사람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식수가 나오고 있었다. 수운은 그 꼭대기에서 49일을 지냈다.
나도 거기에 가서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그 양반이 거기에서 무엇을 얻으셨을까?
이 양반이 거기에서 49일 동안 혼자서 밥을 지어먹으면서 도를 닦았는데, 그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최수운이라는 사람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이 양반이 하는 말이, 도통했다는 것이 결국 점보고, 사람들 병이나 고쳐주어서 돈 버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산에 가서 도통했다는 것은 다 그런 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도통했다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수운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9일 동안 치열하게 수도를 했지만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면서, 춥기만 하고 배만 고팠다고 한다. 수운은 도통을 해보았자, 점이나 쳐주고, 병이나 고쳐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하산을 한다.
수운은 내려와서 다 때려치우고, 그냥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10년간 벌어온 돈도 다 떨어졌던 모양이다. 아들 둘도 낳고 딸도 낳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장사를 하기에는 나이가 들어서 못하고, 철점(鐵店)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철점(鐵店)
철광석을 용해해서 순수한 철을 얻는 용광업
용광로에 광석을 넣고 장작을 때는 것인데, 이게 불을 붙이면 15일 동안은 고온이 유지되어야만 돈이 되는 일이었다. 주문도 많아야 하고, 날씨도 좋아야 한다. 인부 10명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사업으로 그게 돈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철점을 하기 위해 자기 논 6두락을 저당하여 동네사람들한테 자금을 모았다. 같은 땅을 일곱 명에게 저당 잡혔다. 수운은 장사도 한 사람이라 수완도 있어서 벌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철점 사업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철점사업은 대개 2~3년 하면 망하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결국 망했다.
일곱 사람의 채권자가 빚 독촉을 해왔다. 일곱 사람의 채권자들과 재판을 했는데, 여섯 마지기의 땅을 팔아 일곱 사람에게 순서대로 주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땅을 팔아서 순서대로 주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한 푼도 못 받았다. 할머니는 매일같이 수운의 집에 와서 행패를 부렸는데, 어느 날 화가 난 수운이 내젓는 팔에 쓰러져서 죽어버렸다. 기록상에는 죽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긴 죽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깐 그 노파의 아들 셋과 사위 둘이 달려와서 고소하겠다고 하였다. 수운은 사정을 말하고, 자신이 당신들 어머니를 살려내면, 빚 독촉을 안 하겠느냐고 다짐을 받았다. 승낙을 하자, 그는 닭 꽁지 털을 하나 뽑아 와서 그 할머니의 콧구멍에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하더니 살아났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런 후에 가족과 보따리를 싸서 다시 용담으로 돌아왔다. 이때 용담가라는 아주 아름다운 가사가 쓰여진다.
<용담유사:龍潭諭詞>
수운이 한글로 쓴 가사 8편
동학의 경전은 <용담유사>라는 한글 가사와 <동경대전>이라는 한문으로 된 것이 있다.
동경대전(東經大全)
수운이 한문으로 쓴 동학의 경전
이 양반이 대단한 학식을 소유한 분이었는데도 한글로 된 4자의 판소리조 가사를 써 놓았다. 이 가사가 아주 아름답다.
내가 동학의 경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동학의 경전은 '득도(得道)를 해서 만천하(滿天下)에 나의 교리를 선포하노라'는 사기(詐欺)가 없다. 자기의 산 체험담을 써놓은 것이 동학의 성경이다.
신약성경도, 4복음이라는 것도 예수 일생의 체험기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사도 바오로’가 교회로 보낸 편지들이다. 성경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이것도 이 양반의 진솔한 자기 이야기다.
5. 용담유사(龍潭諭詞)
▶ 不遇時之 男兒로서 허송세월 하였구나
때를 만나지 못한 남아로서 이렇게 내 인생을 허비했다는 말이다.
▶ 人間萬事 行하다가 遽然四十 되었구나
내가 온갖 짓을 다 해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덧 40이 되었다는 것이다.
▶ 사십평생 이뿐인가 無可奈라 할길없네
내가 40대가 되어서도 이 모양 이 꼴로 할 일도 없고, 방법이 없는 놈이 되었다는 것이다.
▶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山이로세 左右山川 둘러보니
不孝한 이내마음 그아니 슬플소냐
불효하다는 생각밖에 드는 게 없다는 말이다.
▶ 烏鵲은 날아들어 嘲弄을 하는듯고
松柏은 울울하여 靑節을 지켜내니
까마귀와 까치는 조롱하는 듯 울어대고, 소나무, 잣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찼는데 그 나무들은 푸른 절개를 아직도 지키고 있더라는 말이다.
▶ 불효한 이내마음 悲感悔心 절로난다
슬프고, 후회스런 마음이 절로 생긴다는 것이다.
▶ 가련하다 이내부친 餘慶인들 없을소냐 -용담가-
옛말에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 했다. 아버지 때 선(善)을 쌓았으면, 여경이 있을 것인데, 나는 훌륭한 아버지 밑에 커서 왜 여경도 없는 한심한 놈이 되었느냐고 자탄한다.
그렇게 수운은 음력 10월, 지금으로 보면 11월에 용담에 돌아온다. 얼마나 춥고 쓸쓸했겠는가? 추운 겨울에 돌아와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니 젖어서 타지는 않고 연기가 나서 콧물과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용담에 살면서 시를 하나 쓴 게 있다.
▶ 道氣長存邪不入(도기장존사불입), 世間衆人不同歸(세간중인부동귀).
[도의 기운을 오래 보존하면 사특한 것이 들어오지 않는다. 세간의 중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
도(道)의 기운을 앞으로 내 몸에 오래 보존하게 되면 사특한 것이 나에게 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도를 깨우치기 전에는 세간의 중인들과 더불어 함부로 놀지 않겠다.
수운은 ‘나는 여기에서 무언가 깨우치기 전에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도통하겠다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는 짓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0년동안 고생고생 해봤지만,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6. 용담의 수운
수운의 원래 이름은 제선(濟宣)이었는데, 제우(濟愚)로 바꾸었다. 제우(濟愚)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제선(濟宣) → 제우(濟愚)
자(字)도 도언(道彦)이었는데 성묵(性黙)으로 바꾼다. 근원적인 침묵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도언(道彦) → 성묵(性黙)
호(號)를 그때 수운(水雲)이라고 짓는다. 운(雲)은 하늘의 상징이고, 수(水)는 땅의 상징이다. 하늘땅에 가득 찬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수운이라는 호를 짓는다.
수운(水雲)
땅의 물과 하늘의 구름
수운은 용담에 앉아서 도를 다시 닦기 시작했다. 그 당시 모습을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양녀가 나중에 증언을 한 걸 보면, 리얼한 기록이다.
밤늦게 계신가 보면, 아직도 책을 읽고 계셨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주무시는지 보면, 등잔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항상 책을 보셨다고 한다.
양녀가 버선을 지어드리고, 하룻밤을 지나고 보면 버선의 코가 이지러졌다고 한다. 산에 가서 절을 했는지 뭘 했는지 버선코가 다 닳아서 솜이 삐져나왔다고 한다.
수운은 무언가 치열하게 나름대로 용맹정진을 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뭔가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새로운 삶의 체험을 기다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과연 어떠한 결론이 나왔느냐? 다음 시간으로 넘어간다.
7. 포덕문
다음 주 강의를 들으면 알겠지만, 수운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의 이야기를 아주 진솔하게 써놓았다. 그것이 동경대전 직후에 쓴 포덕문이라는 것이다.
布德文
1861년 7월 중순작
자기가 깨달은 것을 선포한다는 글이다. 자기가 깨달은 과정을 써놓았는데, 도통했다고 하면 대단할 거 같은데, 너무도 담담하고, 너무도 진솔하게 소박한 이야기들이 쓰여져 있다.
원래 이 사람은 종교를 개창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수운이라는 사람의 문제의식 속에서는, 사회적 구원, 인간의 새로운 삶의 방식과 우리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는 사회개혁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 했다. 사회개혁을 하려는 사람들은 난(亂)도 일으키고 혁명도 했다. 그 당시 난도 많이 일어났다. 수운은 그러한 난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서학이라는 기독교도 접하게 되었다.
<천주실의>를 읽으면서 서양의 모든 이론을 접하게 되고, 거기에서 도저히 사회적 개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생각이 근원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 삶의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몰라서 고민했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대항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 민중에게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대안이어야 했다. 종교가 아니면서도, 종교 이상의 종교적 가치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면 안 되겠다. 이것이 이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이었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깨달았던 바를 담담하게 써놓았다. 그 명문을 다음 시간에 함께 읽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