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를 깼다
김정옥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섬찟하다. 순간의 찌릿한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다. ‘새해 벽두부터 무슨 일이람.’ 오늘 두 딸네가 올 텐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올해 아홉수에 들었으니 불길한 운을 예시라도 하려는 것일까.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설날 아침에 접시를 깼다. 사기 조각이 사방으로 튄다. 날카로운 쪼가리에 손을 베일세라 조심조심 수거에 들어갔다. 조각들이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양 구석구석에 숨어 있었다. 사금파리가 귀퉁이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찾아달라고 표를 내는 것 같아 오히려 고마웠다. 날카로운 조각들을 줍는데 어른들 말씀이 머리를 스치며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예전부터 그릇을 깨뜨리면 안 좋은 징조로 여겼다. 그래서 그릇을 깨면 하루 종일 조심하며 지냈다. 가족 모두에게 매사 주의하라고 이를 정도였다. 화성의 사진을 지구로 찍어오는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죽음을 예시하는 장면이 나올 때는 접시를 깨거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깨진다. 오래전에 본 영화 모정慕情에서는 여주인공이 실수로 사진틀을 깬다. 그 순간 애인이 한국전쟁에서 종군기자로 일하다가 죽는다. 이 영화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접시가 깨지는 것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불길한 생각에 방정맞은 생각도 든다.
연예인들의 이혼 얘기가 나올 때 파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부부 사이가 나빠서 헤어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거울이 깨진 것에 가정 파탄을 비유한 걸 보면 깨진다는 의미가 더욱 불운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살다 보면 깨는 것의 연속이다. 꿈을 깨기도 하고, 분위기를 깨기도 한다. 쪽박을 깨기도 하며 산통을 깨기도 한다. 흥정을 깨기도 하고 우정을 깨기도 한다. 규율을 깨기도 하고 금기를 깨기도 한다. 이렇듯 깬다는 것은 우리가 생활하는 데 안 좋은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살면서 깨뜨려야 좋은 것도 수없이 많다. 작은딸 결혼시킬 때 함 들어오던 날이다. 함진아비 없이 사위가 혼자 지고 왔다. 예로부터 함 들어올 때 바가지를 깨는 풍습이 있다. 박 바가지는 구하기 어려워 집에서 쓰던 플라스틱 바가지를 현관에 내놓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첫아들 낳으라는 기원과 바가지 깨지는 소리에 귀신이 물러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위가 ‘와자작’하고 힘차게 밟은 소리에 귀신이 놀라 달아났는지 첫아들도 낳고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다. 깨뜨려서 기분 좋았던 추억 한 자락이다.
깨라고 있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다보면 기록을 깼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운동 경기에서 기록은 그 성적이나 결과의 가장 높은 수준을 말한다. 특히 육상선수는 0.01초라도 단축하어 본인 신기록을 세우려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깨는 것이 최상의 목표이다.
글을 깨우칠 나이가 되었는데도 글을 잘 모르면 아이 머리가 늦게 깬다고 한다. 발달상태가 늦은 아이들에게 하던 말이다. 늦게 트인 아이들이 나중에 공부를 더 잘하는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 머리가 깬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간다는 뜻이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고정관념이 깨지는 시대다. 헐렁한 남자 옷을 여자가 입기도 하고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남자가 즐겨 입는다. 이른바 개성 시대다. 남녀가 하는 일에도 구분이 없다. 남자들이 부엌일하고 육아 휴직도 하며, 간호사가 되기도 한다. 여자들이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도 하고, 대형 버스도 운전한다. 고정관념은 마음껏 깨지고 부서져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재수 없는 일, 불길한 일을 징크스라고 한다, 시험 보는 날 미역국을 먹으면 떨어진다. 문지방을 밟으면 복이 달아난다. 그릇을 포개 놓으면 부모님이 한꺼번에 돌아가신다. 밤에 손톱 깎으면 귀신 나온다. 아침에 여자가 남자 앞을 가로 지르면 재수가 없다. 이런 징크스들은 일종의 일인용 고정관념이다. 징크스가 깨져야 삶이 자유로워진다.
독일에서는 예비 신랑 신부가 본식 전에 가까운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즐긴다고 한다. 이 파티에서 폴터아벤트polterabend라는 것은 ‘접시 깨기’라는 말로 초대한 지인들이 가져온 오래된 도자기 컵과 그릇을 던져 깨뜨리는 풍습이다. 이는 신혼부부에게 다가올 어떠한 액운도 물리치며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깨뜨려서 액운을 물리친다는 것은 같은가 보다.
모든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온전한 새가 될 수 있다. 넓은 세상으로 비상할 수 있는 발판이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이다. 이처럼 알을 깬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말이다.
‘새해 벽두에 큰소리가 났으니 오던 불운이 물러갔겠지.’ ‘반짝이는 사금파리가 사방으로 튀었으니 도처에서 반짝반짝하는 특별한 일이 나에게 생길지도 몰라.’ 라고 거꾸로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접시 깨기의 역설적 해석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불길한 것은 모두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릇이 깨지는 것은 순전히 부주의 때문이다. 모든 물건에는 생명이 있어 이제 명이 다 돼서 깨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 아무 일도 아니다. 공연히 수선을 떤 것 같아 겸연쩍다.
요모조모 따져서 생각해보니 깨진다는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깨짐으로써 목표를 이루고, 깸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삶이 자유로워지며 행운도 가져다주니 말이다.
내가 깨야할 것은 무엇일까. 접시를 깰 것이 아니라 문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깨달아야 하리라. 연후에 새가 알을 깨고 푸른 하늘을 날듯 내 인생의 막바지에서 비상의 날개 짓을 서슴지 않으리라.
( 2019. 2 )
첫댓글 선생님,
깨지다에 대해 格物致知하셨어요.
그리고 결국 새가 알을 깨고 하늘을 나는군요.
자연에서 우주로 날아올라가네요
깨치다의 부정적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로 돌아서는 수필의 반어적 미학이 드러나 보이는 작품입니다.
이제 선생님의 작품이 문단에 날아오를 차례로 보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변변찮은 글을 큰 의미로 보아주셔서 한 껏 격을 높여 주셨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축하해요.
이선생님 말씀처럼 이제 김선생님이 높이 날고 있네요.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영광이지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많이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셨네요. 열심히 쓰겠습니다.
비상하실거여요ㆍ선생님
어쩌면 벌써 비상하신건 아니신지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모임득 선생님 읽어 주시고 답글 달아 주셔서 갑사합니다.
깨져야 좋은 것들이 많네요. 역시 생각을 바꾸니 좋은 일이 생깁니다. 푸른 하늘을 날고 계신 김정옥 선생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순옥 선생님 답글로 격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도 불행도 모두 마음의 장난질입니다.
모든게 마음만 바꾸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더 높이 비상하소서.
회장님, 읽어 주시고 답글 달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설날 아침 접시를 잘 깨셨네요
수필적 철학을 낳았으니 좋은 일이 있겠어요 높이 높이 날고 계시는 선배님 응원합니다
김숙영후배님, 응원 감사합니다. 접시를 잘 깬 것 같아요. 덕분에 글감도 생겨 한편 엮었으니까요. 읽어주고 답글 달아줘서 고마워요.
선생님 저는 지금도 그릇을 잘 깨며 살고 있어요. ㅎㅎ
평소 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숭례선생님, 읽어 주시고 답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