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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부터 받은 42.195㎞ 마라톤 풀 코스
전남 여수시 여서동 현대건설아파트 109동 1003호 임 진 택 “선생님, 저 해냈어요. 꼴찌에서 일곱 번째래요. 그래도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어 기뻐요. 선생님도 병마와의 싸움에서 꼭 이기실 거에요. 전 선생님의 굳센 의지를 믿어요.” 지난해 5월 1일 제자 송대건 군이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하고 내게 건넨 환희에 찬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만큼은 비록 암 환자였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피와 땀이 베인 마라톤 풀코스 42.195㎞ 완주라는 스승의 날 선물로 인하여 암 투병에 활력을 얻었고 투병의 의지를 굳게 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린 7년 전, 1999년 봄 여수고등학교에서 만났다. 그 때 나는 1학년인 대건의 일어수업을 담당했다. 대건은 가끔씩 교무실로 나를 찾아와 학교 생활과 진로 문제에 관하여 상담을 요청하고는 했다. 당시 담임을 맡고 있지 않았던 터라 단독으로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점점 마음 깊은 곳에 담고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대건이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순천고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짧은 만남을 접어야 했다. 이듬해, 그가 고교 2학년이던 5월 14일 전화가 왔다. “선생님 내일 스승의 날이고 해서 찾아뵙고 싶은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교직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 오고 있던 터라 그런 날이 되면 장성한 제자들이 여기저기서 자리를 마련하여 초대하곤 했는데 고교생 제자가 찾아오겠다는데 뿌리치기도 그렇고 선약을 취소하기도 난감했다.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어쩐지 대건을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헬렌 켈러의 기도’ 몇 구절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을 시켜준 나의 선생님 애니 설리번을 찾아가겠다.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 모습을 내 손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모습, 그리고 그의 아리따운 몸가짐을 몇 시간이라도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겠다.” 그랬다. 설리번 선생님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의 캄캄한 영혼을 비추는 사랑의 빛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에 교직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떠올렸던 그 기도가 생각났을까. 다른 제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건과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5월 15일, 우린 동네 삼겹살 집에서 만났다. 아는 사람들이 나를 보더니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오늘 같은 날 왠일로 이런 곳에서 학생하고 단둘이 있습니까?” 그럴 만도 했다. 대건은 그 때 나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자신 때문에 근사한 자리를 물리치고 평범한 삼겹살 집에서 함께 하고 있는 나를 비로소 발견한 것 같았다. 그 후 해년 마다 대건을 날 찾아와 카네이션을 꽂아주었다. 그 때 만난 그 소년은 어지간한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되었고 그에게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보니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대건아, 내가 어쩌면 이렇게 힘들 때 너와 함께 있는지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난 너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정신적 방황을 많이 했어요. 고교에 진학하긴 했어도 희망이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생일이었는데 어떻게 아시고 책 한 권을 선물해주셨습니다.” “난 전혀 기억이 없는데 그런 일이 있었어? 책 한 권 가지고 부끄럽구나.” “아닙니다. 책도 책이었지만 속지에 써 있었던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가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자기 발전에 노력하고 대한민국을 빛낼 큰 사람이 되라’고 적어놓으셨더군요. 처음 드리는 말씀인데 세 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자랐고 아버지의 침체로 인하여 늘 꿈이 없이 지냈습니다. 그 때 주신 선물과 말씀으로 용기와 희망을 품고 고교 생활을 잘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린 그렇게 만나 숱한 사연을 만들며 각별한 사제의 정을 키워나갔다. 암에 걸리고 보니 힘이 사라져버린 나를 외면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건은 수술로 잘려나간 장기를 이식해 주려고 시도하는 등 내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를 썼다. 2005년 5월 1일 광주광역시 5.18국립묘지에서는 항쟁 25주년 기념 제 5회 5.18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송대건 군이 그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3년 전인 2003년 5월 15일 담도암, 췌장암, 신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에 있는 나에게 부활의 의지를 굳게 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다음으로는 곧 다가올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특별한 선물을 하겠다고 했다. 암 발병 전 나는 6개월 동안 마라톤에 빠져있었다. 처음엔 살을 뺄 목적으로 가볍게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마라톤은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렸고, 하루도 달리기를 빼먹은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어쩌다 술을 마신 날도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정이 넘어 집을 나서 새벽 두 시까지 연습을 할 정도로 마라톤에 집착했다. 그런 훈련을 바탕으로 두 달 반 동안 하프코스를 1시간 30분대에 네 번이나 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게 무리가 되었을까 풀코스 첫 도전 3일을 앞두고 암이 발병했던 것이다. 그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는데 대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대신 완주를 함으로써 투병 중에 있는 내게 힘을 주고 싶어했다. 날이 갈수록 학생은 교사에게 대항하고 학부모는 멱살까지 잡는 등 함부로 대하는 세태를 감안하면, 그의 생각과 행동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명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사를 접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고 암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그 갸륵한 마음에 기쁜 마음 그지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완주에의 길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어서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나의 건강회복을 위해서 수술로 사라진 여섯 군데의 장기까지 떼어주겠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매달리기까지 했던 그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대건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나의 경험으로 비춰 볼 때 그는 5킬로미터의 건강 코스도 무리일 것 같았다. 바로 앞 주 5일 동안 중간고사로 잠을 거의 자지 못한데다가 2주전 연습삼아 뛴 하프코스에서 오른쪽 발목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다시 출전 포기를 권유했는데 그의 뜻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다만 무사히 완주하기만 바랄 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최악의 몸 상태에서도 대건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오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 웃을수록 나는 속으로 울었다. 암으로 인하여 85㎏이었던 몸이 55㎏으로 줄어 볼품 없고 힘을 잃어버린 못난 스승을 위해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는가. 누가 스승은 없고 선생만 있다고 했던가. 어느 누가 학생만 있고 제자는 없다고 했던가. 교권 수난의 와중에서 대건의 마라톤 선물을 접하고 보니 사랑과 존경에 기초한 진실한 사제관계야말로 우리 교육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암으로 인하여 어떤 순간에는 좌절하고 자주 패배감에 젖어있기도 했는데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에서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자부심도 느끼게 해주었다. 마라톤 풀 코스, 42.195킬로미터, 105리를 달리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목이 타오르고 발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을 것이며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5시간 이상을 견뎌야만 하지 않는가. 우린 설레임과 두려움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선전을 기원했다. 드디어 출발 시각인 9시가 되었고 힘찬 출발신호와 함께 대건은 머나먼 42.195킬로미터의 고단한 여정 속으로 들어갔다. 더불어 햇살도 급속도로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항쟁 추모탑으로 가서 참배하고 묘역을 둘러보았다. 1980년 5월 18일, 대학 2학년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광주 금남로에서의 전남대생 600명 시위에 직접 참여하였으나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여러 해 동안 자책하기도 했었다. 자괴감을 떨쳐버리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 2003년 5월 18일 항쟁 23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 풀코스에 첫 도전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대회를 3일 앞두고 암이 발병하여 그 꿈을 접어야 했다. 나는 암에 걸린 이후, 그 이전에 추구했던 꿈과 욕심을 버렸다. 그렇지만 꼭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라톤 풀코스 완주였다. 어지간히 몸이 회복되면 다시 뛰어 보리라는 꿈을 혼자서 조심스럽게 품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던 대건은 대신 달려 내 꿈을 이뤄주겠다고 했으니 어찌나 자랑스럽고 고마운지 아무리 눈물을 참으려 해도 눈물이 멈춰지질 않았다. 사람들이 바라보면 얼른 고개를 숙이고 화장실에 가서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그렇게도 잘 가던 시간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몇 세월이 지난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시간은 12시 30분이 되었다. 나는 암에 걸린 후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식사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 준비해간 바나나, 마른 김, 누룽지, 땅콩 등이 든 비닐 봉지를 꺼냈다. 초조한 마음으로 속속 도착하는 건각들을 주시하며 눈물을 반찬 삼아 점심을 먹었다. 조금은 별난 나의 모습을 주목하던 사회자가 급기야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습니까?” “예,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제 시간에 식사를 해야만 하거든요. 그래서 부득이 하게 이렇게 먹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당뇨에요?” “아닙니다.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누가 출전했습니까?” “예, 저의 제자가 저의 쾌유를 기원하는 뜻에서 풀코스에 출전했습니다. 어린 제자는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는데 이렇게 혼자 점심을 먹고 있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참 훌륭한 제자를 두셨군요. 어디 학교 출신 누굽니까? 들어오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방송으로 격려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것까지 없습니다. 내세울 만한 일이 못된다면 참가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출전했습니다. 친구들에게나 출전 사실을 알려 응원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뜻을 실천하고 싶다며 함구를 부탁하더군요. 메달을 받아 스승의 날에 여수로 오겠다면서 저도 힘들다고 못 오게 했는데 겨우 허락을 얻어 오게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널리 알려서 젊은 사람들이 본받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도 보셨듯이 오늘 출전자들 중에서 20대가 제자 외에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 쉽고 편한 일들만 추구하는데 듣고 보니 제자 분은 너무나 장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인간관계가 참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제자의 사랑으로 인하여 이미 암을 극복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따금씩 대오에서 떨어져 나온 주자를 실어 나르는 차들이 들어왔다. 먹을 것을 그대로 들고 달려가 대건이 있는지를 살폈다. 아주 띄엄띄엄 주자들은 힘겹게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는데 대건은 여전히 보이질 않았다. 다섯 시간이 지나면 교통 통제를 풀기 위해 낙오자 회수버스가 동원되는데 거기라도 탑승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사력을 다해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뜸해짐과 동시에 시간은 드디어 출발한 지 다섯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마중을 나갔다. 한참을 나갔는데도 대건은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회수 버스마저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에 타고 있기를 바라고 다시 결승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미련을 버릴 수 없어서 뒷걸음으로 초조하게 걷고 있는데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송대건이었다. 저 멀리서 완만한 오르막을 거의 걷다시피 하며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초조감에 나도 거의 탈진 상태였지만 있는 힘을 다해 대건을 향해 소리쳤다. 대건아! 힘내라. 다 왔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대건이 나를 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짓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달려가서 부축해주고 싶었는데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온몸이 벌겋게 그을려 있었고 하체와 운동복에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반바지에 허벅지가 쓸려 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인간한계의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오직 나의 쾌유를 기원하며 백 오리를 달려온 대건은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드디어 결승선을 통과했다. 실로 5시간 20분 50초 동안의 비장한 사투를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암으로부터의 쾌유와 내가 달리지 못한 풀 코스 완주에의 염원을 풀어주었고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스승의 날 선물을 안기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그것은 암 수술 때 잘려나간 장기를 모두 이식 받은 것보다 더 값지고 고귀했으며 순결한 선물이었다. 피와 땀으로 완주한 대건의 42.195킬로미터는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강력한 함암제였고 내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대건을 힘껏 안았다. 그렇게 한없이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그를 더 이상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서 갈증을 풀어주고 물을 끼얹어 주어야했다. 대회 본부에서 지급 받은 도시락은 바싹 말라 있었고 완주 기념 메달마저 바닥나고 없었지만 우리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완주 기념 목걸이였고 그가 나의 탁월한 암 치료제였으며 스승의 날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배 많이 고팠지? 미안하다. 너도 안 기다리고 나 먼저 먹어버렸다. 선생님, 잘 하셨어요. 달리면서도 제 시간에 맞춰 점심 드시기를 바랐어요. 많이 힘들었지? 어서 먹어라. 예, 무척 힘들었어요. 고비가 많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만 두고 싶었어요. 또 다시 마라톤을 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다짐도 했어요. 그런데 자꾸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결승점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선생님이 꼭 나으셔야 하기에 이를 악물고 달렸어요. 그리고 스승의 날 선물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대건은 완주자 272명 중 266등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1등이나 다름없었다. 6년 전 내가 그에게 베풀었던 티끌 같은 배려를 몇 만 배나 크게 되돌려주었다. 그는 암으로 인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선 나에게 큰 희망이 되어주었다. 대건은 숱한 고비를 넘기고 마라톤 풀 코스를 기어코 완주해 냈다. 그 사실은 늘 죽음과 싸워야 하는 나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와 살아나야 하는 당위성 그리고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나를 위해 달렸다. 22년의 교직 생활 동안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우린 두 손을 굳게 잡았다. 항쟁 추모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강하고 좋은 사람들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자고 한 다짐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대건은 절뚝거리는 다리를 애써 숨기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구로 떠났다. 나는 그가 떠난 후에도 눈물을 삼키며 거기에 서 있었다.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우린 설리번 선생님과 헬렌 켈러와 같은 세기의 사제는 아니더라도 어느새 교실을 뛰어넘어 인생의 길고 긴 여정에서 고통을 나누고 힘이 되는 동지가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