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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45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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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수(高手)와 하수(下手)의 차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눈을 크게 거슬리게 하는 광경이 있었으니,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과 강도들의 소굴이 된 것이었습니다.
대축제를 앞두고 순례차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 연중 가장 큰 대목에 크게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은 성전 구내까지 들어와서 상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분노로 가득찬 예수님께서는 그간의 온유하고 다정다감했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상인들을 쫓아내셨고, 환전상들의 좌판을 엎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하고 속화된 성전을 본래의 장소, 기도하는 집, 주님의 집, 구원의 장소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군중들은 박수를 쳤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에 큰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운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 복음 21장 23절)
고수(高手)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내를 알아 차리시고 즉답을 피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크게 당황시키는 명질문을 한 가지 던집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의 날카로운 질문 앞에 하수(下手)인 그들은 무척이나 당황해 합니다. 서둘러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합니다. 다들 고개를 맞대고 수군수군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혼자이시지만, 다들 당대 내놓으라 할만한 지도자들과 석학들 여러명에
당당히 맞서십니다. 예수님의 공격앞에 쩔쩔 매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통쾌합니다. 예수님의 깊은 내공을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운명은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을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그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 모르겠소.”(마태오 복음 21장 27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것이라면 예수님의 권위 역시 하늘로부터 온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존재의 신비와 당신 권위의 원천에 대해서 적대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잠시 후, 때가 되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될 것인데, 미리 그들에게 알려주는 일 자체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탁’하고 놓으신 결정적 묘수(妙手) 앞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하수 적대자들의 동요와는 달리, 여지를 남겨 두시는 여유있는 고수(高手),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돋보입니다.
적대자들은 분명 예수님의 권한이 사탄에게서 유출되었으리라 의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에게 요한 세례의 유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시며,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해가십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적대자들이 스스로 물러나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습니다.
지혜와 경륜으로 가득한 예수님은 당신 특유의 대화방식을 통해, 당신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고 말씀하시며 행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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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죽옷을 원한다면 두렁이를 벗어라>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입니다. 고향인 폴란드의 슐레지엔으로 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려했던 대로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말도 빼앗겼습니다. 강도가 물었습니다.
“숨긴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가거라.”
무사히 강도들 틈을 빠져나와 한숨을 쉴 때 바지춤에 비밀히 감추어둔 금덩어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는 너무나 무섭고 정신이 없어서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물을 때 없다고 대답했는데 가다보니까 이 금덩이를 숨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받으십시오.”
강도에게 숨겼던 금덩어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빼앗은 물건과 말을 내주면서 엎드리더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당신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비록 강도일지라도 진실할 수 있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묻습니다. 올바른 대답을 들으면 수긍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해는 마음의 뜻 다음에 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이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리 올바른 말을 들어도 절대 설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뜻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물으면서도 그분의 답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변화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내시기 위해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감추려하기 때문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라고 하자니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 그냥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이미 변화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을 가리기 위해 두렁이를 입은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자기를 가리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말은 칼과 같이 자신을 찌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패와 칼을 들고는 대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아야합니다. 하느님께 내 자신이 솔직해지는 방법은 규칙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나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그분도 솔직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슴에 기댄 요한에게만 당신을 배신할 제자가 가리옷 유다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모두에게 알려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장해제하고 당신께 더욱 깊이 안기는 사람에게만 당신의 진리를 들려주십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가죽옷을 바란다면 나를 가리는 나뭇잎부터 떼어내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효봉 스님이 있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판사였는데 어떤 사람의 판결에서 사형선고를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이 오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판사직을 사임하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벗어던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느님도 당신의 깊은 속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면 진실과 다른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서 절대 나가지 않도록 먼저 주의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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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들 안에서 모든 위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엑세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도 똑같이 하셨다.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시편 9,11-12).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신명 6,16)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시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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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에서는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예언자인 이방인 점쟁이, 발라암의 신탁을 들려줍니다. 발라암은 모압의 임금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메시아의 축복을 들려줍니다. 주님의 영에 이끌려, 야곱에서 나온 임금이 이스라엘과 많은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교회 전통은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 예언이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분으로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정통 교리를 지키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자신의 불신 때문에, 그리고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늘에서 오는 신비에 겸손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 놓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은, 비난을 일삼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권한을 조용히 부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그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참예언자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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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권한>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이 이야기는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한은 하늘에서 온 권한이다.”, 또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한 말에서 ‘이런 일’이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마태 21,12-13)과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마태 21,23)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라는 말은, 겉으로는 “당신의 스승은 누구인가? 로마정부가 당신에게 권한을 주었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최고의회가 당신에게 권한을 주었는가?” 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자격도 권한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가?”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말은, “당신은 진짜 예언자인가? 진짜 예언자라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알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아무 권한도 없는 가짜 예언자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뒤의 27장을 보면,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라는 말이 나오는데(마태 27,63), 그들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에 관한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 하시는데, 당시에는 질문에 반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흔히 사용되던 논쟁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문을 하신 것은 답변을 회피하신 일이 아니고, 사실은 간접적으로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문에는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믿는다면 요한의 증언을 믿어야 하고, 요한의 증언을 믿는다면 나를 믿어야 한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는 질문은, “요한이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의논하는 것은, 그들이 신념 같은 것은 없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나 보는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을 믿으면 믿는다고 대답하면 됩니다. 아니면 어떤 이유로 안 믿고 있으면 안 믿고 있다고 대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진짜 예언자인지, 가짜 예언자인지, 요한의 회개 선포와 세례가 하느님의 지시에 의한 일인지, 아닌지,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의 말은, 뒤의 말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라는 말은, 사제들과 원로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안 믿고 있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안 믿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그들은 군중의 여론이 무서워서 “사람에게서 왔다.”는 말을 못합니다. 만일에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을 던질 것입니다. 여기서 “군중이 두렵소.”라는 말은,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만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은, 그들이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속으로는 하지 않는 사이비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특히 명색이 사제라는 자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제는 ‘사제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군중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무서워서, 속마음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왔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한 것 같은데, 그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을 안 믿고 있음을 당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공공연하게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가 아니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를 부정하는 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모르겠소.” 라고 대답합니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상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에 관한 일은, 믿고 받아들이든지, 안 믿고 거부하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선택 사항은 없습니다.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논쟁이 어떻게 끝났든지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논쟁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한은 곧 하느님의 권한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권한은, 사람을 살리거나 살리지 않을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살고 싶으면(생명을 얻고 싶으면) 예수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 순종은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 하는 복종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기꺼이 실천하는 것, 그것이 곧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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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네긷토회 왜관수도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땅의 권위는 어느 정도 다스리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하늘의 권위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하지 못합니다. 물을 다스리는 사람은 이쪽 물을 저쪽으로 수로를 만들어 옮기며 넉넉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보내주고 받지만 하늘의 물을 이곳저곳으로 공평하게 내리게 하거나 날씨를 조정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일은 서로 의논하여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고 힘을 나눌 수 있지만 하늘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 바꾸거나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저렇게 변경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훈과 가르침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고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생각의 힘으로 바꿀 수 있지만 진리이시고, 선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모님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절대적 순종이 요구됩니다.오늘 복음에 주님의 권한은 하늘부터 온 것이지만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심으로 주님의 권위를 들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수련 때 장상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배워 알고 있지만 장상이 하느님의 권위를 따르지 않은 권위는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 외 인간의 모든 권위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사형제도는 인간의 법이라서 하느님의 생명을 중시하시는 뜻에 위반되니 폐지를 주장합니다. 인간의 생명, 생존권, 완전성에 위배되는 법이나 관습은 도전을 받고 양심을 거스르는 법도 도전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법을 반대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법을 모르고 반대를 위한 반대는 찬성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에 반대는 두 손 들고 반대합니다.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결정한 일을 황공무지로 소이다 지당 하나이다, 하지 않고 아니면 아니다 라고 말을 하는 용기가 팔요 합니다.
어떤 판결을 고등 법원까지 가고 헌법 재판까지 갈 수 있는 제도는 참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법에 모두가 순종하여 정의로운 세상,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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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두 가지>
마태오 21,23-27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두 가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지 않는 것은
공감입니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는 것은
도발입니다
물어야 할 것을
묻는 것은
겸손입니다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진실입니다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거짓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현명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과시입니다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비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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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삶은 예수님처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지상생활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시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어떻게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관습에 순응하시면서 두루 뭉실하게 사셨을까요? 적당히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럭저럭 좋은 평판 유지하셨을까요? 분노하는 일도 없고, 모든 일에 그냥 참으셨을까요? 아니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죄인들의 존엄과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쫓겨난 병자들을 안으셨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을 하셨습니다. 불의한 권력자가 되기보다 모든 이를 섬기는 낮은 자가 되라 하셨고, 몸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급기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빌미 삼아 인간 권력이 야합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돈벌이에 눈 먼 이들이 가난한 순례자를 착취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성전을 쓸어버리셨습니다. 성전에서 전횡을 일삼는 이들의 권위에 맨 몸으로 도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든 이를 살리는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탐욕과 죄악의 우상을 내던지고 사람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거룩한 세상, 제 살 길 찾아 흩어진 이들이 하나 되는 일치와 평화의 세상, 억압과 착취 없는 살 맛 나는 세상을 여는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기존의 체제와 관습에 안주하려는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이들의 존립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중차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전까지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예의주시하던 이들은 성전 정화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예수님께 맞설 것인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이들은 어리석게도 예수님께 맞서는 쪽을 선택합니다. 자신들의 아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지만 하느님을 섬기고 백성을 사랑하는 참된 지도자라면, “도대체 우리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새 삶을 살도록 이끄셨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그릇된 질문에 맞서 지혜롭게 되물으심으로써, 그들과의 타협을 거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의 극렬한 대립을 전하고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 이 세상은 과연 어떻습니까? 정치권력과 자본이 마치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무소불위의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인간이 일개 도구나 수단처럼 다루어집니다.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온갖 차별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불의가 정의로 둔갑하고, 거짓이 진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한 가운데서 진리와 정의의 최후의 보루이어야 하는 교회와, 목숨을 바쳐 양심을 따라야 할 그리스도인은 ‘침묵으로 세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힘차게 외칠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선택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종교인들이 무슨 권한으로 세상일에 관여하는가?”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욱 당당히 “나는 권력과 자본이 아니라, 오직 생명과 정의의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믿는다.”고, “나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만을 따라 걷는다.”고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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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주님의 권한으로….>
엄마하고 딸이 심하게 말다툼하고 있었습니다. 말다툼은 생각 외로 오래됐고, 딸이 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을 하자, 참다못한 아빠가 와서 딸에게 한마디 합니다. ‘야, 임마! 네가 뭔데, 나도 사랑스러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내 마누라에게 큰소리치면서 그렇게 대드느냐?’라고 말하자, 아빠 말을 들은 딸이 엄마에게 더는 말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엄마에게 심하게 반항하거나, 말다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 권한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런 후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다니시며, 병자를 고쳐주고,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을 보고 대하는 분이 아니라, 그 속마음을 보고 측은해하시는 분이시고, 배고픈 군중들을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처럼 대해 주시며, 빵의 기적으로 배부르게 먹여주시고 남겨주셨던 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한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돌보아주고, 치유해 주기 위해 받은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그리고 권한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전해주며,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받은 사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권한 즉, 하느님의 권능으로 저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이들에게도 큰소리로 꾸짖을 것입니다.
“야, 너희가 뭔데, 나도 사랑스러워 함부로 대하지 않는 내 자녀에게 큰소리를 치면서 대드느냐?”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한으로 지금 고운님들에게 이런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 마르코 복음 16장 17-18절에 보면….“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 시편 91편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네.'"
전능하신 주님을 끝까지 믿고 따르면,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도 의심 없이 믿고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진실하신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성모님께서 마중 나오신 듯, 우리 고운님들도 묵주 알 한올 한올에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감사도 새기고 다듬어 오시는 주님을 향한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저는 말씀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묵주 알 한올 한올 새기며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의 빛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미 주님의 권한으로 보호를 받고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고운님들이 누군가를 기억하면서 묵주 알 한올 한올에 새기며, 그들도 주님의 자비로 보호를 받는 은총 충만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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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47)
♧♧ 시편 67편 2절….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셀라.
*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저희’는 3절의 ‘만민’과 대조되는 말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고...’라는 말은 어여삐 보시어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하느님의 얼굴...’이란 ‘하느님의 얼굴의 빛’으로 하느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비추어 달라.’라는 말은 하느님의 특별한 호의와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이 구절은...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을 사제가 간구하는 기도의 한 전형적인 말씀입니다.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 시편 67편 3절….
"그리하여 세상에 당신의 길이, 만민에게 당신의 구원이 알려지게 하소서."
* 당신(주님)의 길...
하느님께서 온 누리를 향해 세우신 구원의 계획 내지는 무엇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인가를 하느님께서 계시해주신 모든 말씀을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에서 이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구약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만민에게 당신의 구원이 알려지게 하소서...
이 구절은... 2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2절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당신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특별한 축복과 은총으로 베푸시어 세상 만민이 이스라엘 야훼 하느님께 참 구원이 있음을 알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이 세상 만민에 사제들의 나라(탈출기 19장 6절. 참조)로서 이방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의 길을 선포할 사명과 책임이 있으니, 이를 감당하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이 2가지 해석은...모두 하느님의 구원은 구약에 선택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만민에게 열려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이 세상 만민에게 선포되는 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편,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사제들의 나라로 선택하신 하느님은 오늘날 당신께 충실한 이들(교회)을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시고 땅 끝까지 당신의 증인이 디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마태오복음 28장 19-20절. 사도행전 1장 8절. 참조) 따라서 종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하듯, 저희도 구원자이시요,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적극 순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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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와 해외, 성당이든 일반 회사이든 가리지 않고 다니며 강의를 한 지 벌써 19년이 되었습니다. 강의했던 곳에 또 가서 강의하는 때도 있지만 대부분이 새로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찾는 곳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함과 동시에 부담도 많이 느끼게 됩니다. 누구는 19년 동안 강의를 했으면 이제는 강의하는 것이 익숙하겠다고 하지만, 항상 처음 시작할 때에는 여전히 설레고 긴장도 많이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마 강의할 때 나쁜 짓을 많이 하라고, 자신을 바꿀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시간 가는 대로 대충 살라고 말하겠습니까?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특히 주님 마음에 드는 삶에 대한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힘이 담기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고, 부담감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배 신부님께 이런 부담감을 이야기했더니, “그러면 하지 마!”라고 쉽게 말씀하십니다. 힘들게 살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살라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때는 신부님 말씀처럼 강의를 더는 하지 않을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편하고 쉬운 길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강의를 통해 변화되는 나 자신을 보면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쓰시려는 것을 나의 편함만을 생각하면서 막아서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투정 부리지 말고 긍정적 효과를 바라보면서 더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안 하면 쉬운 일, 반대로 하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는 용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위대한 기적이라 불러도 좋은 일들을 이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기적을 많이 보고, 또 많은 대화를 했어도 주님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구원할 예수님이 앞에 있어도 눈을 감고 있고, 그분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기에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길은 절대로 쉽지도 또 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 자신에게 필요한 길이고, 가장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길이기에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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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한 방송국에서 방청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제작진은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팀과 함께 20대와 4~50대 방청객 각 100명을 스튜디오에 초대해서 소문 전파 실험을 했습니다.
심리학 강의를 들으러 온 줄로만 아는 방청객들에게 따로 사전고지 없이 ‘어느 연예인이 자살했다’라는 부정적인 소문과 ‘어느 연예인이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로 했다’라는 긍정적인 소문을 전달하고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를 지켜보았습니다.
실험 결과, 20대는 구성원 81%가 소문을 들었고 86%가 소문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소문은 구성원 중 18%만 들었다고 대답했고, 이 소문을 전달한 이들도 4%에 불과했습니다. 4~50대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나쁜 소문 84%, 좋은 소문 16%의 비율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이 더 빨리, 더 멀리, 더 넓게 퍼져 나갑니다. 인터넷에 소위 ‘가짜 뉴스’라는 것은 다 나쁜 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쉽게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소문을 전달하는 사람이 될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의적인 소문은 한 번에 3명을 죽일 수 있다. 소문을 내는 사람, 소문을 듣는 사람, 소문에 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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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활하면서 비밀번호를 만들게 됩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비밀번호가 필요합니다. 은행 업무에서도 필요합니다. 회사나, 집으로 들어갈 때도 비밀번호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비밀번호는 기억하지만 어쩌다 사용하는 비밀번호는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참 난감합니다. 분명 내 공간이고, 나의 자리인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어려운 세대는 난감합니다. 저도 그런 편입니다. 인증번호를 보낸다고 하고, 보안 프로그램을 새로 깔아야 한다고 하고,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하라고 하고, 특수문자를 꼭 넣어야 한다고 합니다. 남들은 5분도 걸리지 않는 일이, 1시간씩 걸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도용을 막고, 나의 정보를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비밀번호입니다.
1985년의 기억입니다. 저는 신학생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여름 행사를 위해서 천마산으로 답사를 하러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기려면 짐을 다시 정리해야 하고, 번거로웠습니다. 그냥 머물면 편하기는 하지만 자칫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 모든 교사가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머물 것인지, 이동할 것인지 저에게 결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산행을 많이 했던 경험이 있어서 제게 결정하도록 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신학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제가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머물렀는지, 자리를 옮겼는지 지금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가 결정을 내렸고, 교사들은 저의 결정을 존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권한보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 주었습니다.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도록 하였습니다. 아픈 이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밤을 새운다고 하였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권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말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이 한 일을 먼저 보고 싶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있는 삶이었습니다. 율법이라는 잣대로 자신들은 지고 가지 않는 짐을 타인에게 지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욕망과 재물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편협된 교리와 율법의 ‘틀’로 가두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거대한 권력의 비리와 부패를 눈감아 주었고, 오히려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권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나라는 비밀번호를 누르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권한이 있는 사람이 가는 곳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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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의 사람>
-경계인境界人-
참으로 믿는 사람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성령파에 속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제1독서 민수기의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이, 오늘날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 대표적 인물일 것입니다.
성령파에 속하는 성령의 사람은 경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계인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분은 아마 토마스 머튼일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참되 수도승은 경계인이자 주변인이 되어야 한다 했으며 사전을 찾아보니 그 뜻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계인; 주변인과 같은 말로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요즘 참 감명깊게 읽은 책이 ‘최명길 평전’입니다. 아마 한국 5천년 역사상에서 가장 참혹한 전란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이어 계속됐던 16-17세기 조선시대일 것입니다. 병자호란전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은 참으로 치열했습니다. 여기서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자 충신忠臣이 최명길이며 그에 대한 어느 학자의 평에 공감했습니다.
“누구는 최명길을 ‘선택적 원칙주의자’라고 정의했지만 나는 그를 ‘경계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경계인은 누구 편에도 서지 않는다. 한쪽에 서면 대립적인 두 당사자를 동시에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경계에 서는 것은 한쪽에 수동적으로 갇히는 게 아니라 경계에서 자기로 살아가는 자이다. 이 점에서 쇠락해가는 명과 떠오르는 청을 냉철히 관찰하면서 선택적으로 시의적절하게 대응해 나간 최명길이야말로 진정한 경계인이다.”
우리식으로 말해 참으로 깨어 있는 분별의 지혜를 지닌 성령의 사람이 경계인입니다. 우리 수도자의 수도복은 경계인의 표지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더불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택한 ‘공명지조共命之鳥’란 말마디도 의미심장했습니다. 사자성어 조사에 응답한 1046명의 교수 가운데 347명(33%)이 공명지조를 택했다 합니다.
“공명지조는 불교경전에 나오는 상상속의 새로 ‘한몸에 두개의 머리를 가져 목숨을 함께 하는 새’를 가리킨다. 서로가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상은 공멸하게 되는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불경에 따르면 이 새는 한 머리는 낮에 일어나고 다른 머리는 밤에 일어난다. 한 머리가 몸을 위해 항상 좋은 열매를 챙겨 먹자 다른 머리는 이에 화가 난 나머지 어느 날 독이든 열매를 몰래 먹어 버렸고, 결국 두 머리가 모두 죽게 되었다.
새는 좌우로 난다. 좌우의 공존이 둘다 사는 길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상징적으로 마치 공명조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서로를 이기려고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사라지면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한국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에 이 사자성어를 택한 동기이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참 신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분별의 지혜를 지닌 성령의 사람, 경계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얼마전 6세기 가자의 수도승 발사누피우스의 ‘성령을 고수하라(Cleave to the Spirit)’는 내용도 새롭게 떠오릅니다.
“좋으신 하느님께 위로자 성령을 보내 주십사 기도하자. 성령이 오실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고 우리에게 신비를 계시하실 것이다. 성령께 인도되도록 하라. 마음에 속지 말고, 분산되지도 마라. 낙심이나 우울을 정신 안에 허용하지 마라. 성령은 눈을 밝히고, 마음을 떠받쳐 주고, 지성을 들어 올린다. 성령은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고, 힘과 겸손, 기쁨과 의로움, 인내와 온유,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고 부여한다. 하여 너는 확고한 바위를 지니는 것이다. 성령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바람도 비도 강물도 바위 위에 세워진 건물을 무너뜨릴 수 없다. 형제여, 성령이, 성령의 기쁨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온전한 진리로 안내하도록 간청하자.”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은 하느님의 영이 내리자, 성령의 사람이 되어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라 하며 그가 받은 4번째 신탁을 통해 귀한 진리를, 메시아 예수님 탄생을 예언합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무지의 편견에 사로 잡힌 적대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누가 이런 권한을 부여했는지 이의를 제기할 때, 성령의 선물인 분별의 지혜로 되치기 하며 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립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이미 물음에 답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르겠소.” 무책임하게 대답하자 예수님 역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대답하며 참으로 지혜롭게 이들의 예봉을 무력화하며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듭니다. 이 또한 성령의 사람, 경계인만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답변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성령파에 속한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인 경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사람, 경계인이 되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 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106,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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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눈에 들어야한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21,25)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진대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답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고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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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오시는 분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파견되셨는가?' 하는 물음을 대면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말하자면 '자격' 논쟁이지요. 한낱 떠돌이 설교가인 목수 출신 가난뱅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중심지인 성전에서 공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물음일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레위 지파나 아론 가문이 아니십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시지요.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도, 어느 계보를 잇거나 소속이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그 흔한 타이틀조차 없으시지요. 이런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마도 무자격자에 가깝겠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요한에게 해당하는 답이 곧 예수님께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나 예수님 모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존재들이기에 모든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권한"을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려 제도화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세속화하고 권력화해서 거머쥔, 곧 사유화한 "권한"에 줄을 대지 않은 모든 행위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매한 민중을 교란시킬 수 있는 도전일 뿐입니다.
"모르겠소."(마태 21,27)
사실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모르겠습니다"라는 인간의 고백은 피조물로서 참으로 솔직하고 진실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종교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그만큼 겸허하거나 진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답을 모르지 않는 그들이 모른다는 답을 택합니다. 답을 고르다 보니 자기들이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걸 안 게지요. 그래서 불리한 답을 하느니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모르실 수 없으니, 혹 모른다고 하시면 거짓말이 될 겁니다.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용서, 치유와 기적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씀, 실행된 말씀"이십니다. 굳이 언명체계를 통해 답하시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언으로 답을 하신 겁니다. 사실 그 답은 묻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상태였을 겁니다.
제1독서에는 발라암이라는 이방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을 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민수 24,5)
그런데 그는 저주를 내리라는 모압 임금의 채근(採根)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보내며 도리어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민수 24,4)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이방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별"은 모압을 물리친 다윗 임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까지도 암시합니다. 먼먼 구약시대 초기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방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신 것이지요.
발라암도 모압 임금도 참 당황스러웠겠지요. 발라암을 부른 모압 임금은 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되려 적에게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고, 발라암 역시 부탁받은 바를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발라암은 후일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만(민수 31,8) 적어도 그는 제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전한 성경 속 인물로 남습니다. 그로써 그의 예언자적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주신 것만을 전하십니다. 그 말씀이 당신께 해가 되어 돌아온다 해도 굽히지 않으시지요.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모른다"고 발뺌하는 종교 지도자나 원로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모든 권한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용서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고 바람입니다. 사실 세상에 마련된 제도와 조직, 소속과 권한은 세상의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니 존중해야 하고, 그것이 신적 질서와 맞닿아 있다면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목도(目睹)하면서도 그 앞에서 자격부터 따지는 모습은 영역 다툼이나 밥그릇 싸움처럼 치졸해보여 낯뜨겁습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를 제 식대로 조작할 때, 하느님 말씀에 자기 본위를 섞을 때 권한은 힘과 빛을 잃습니다. 모르는 것 같지만 대하는 사람들이 다 느끼지요. 그럴수록 인간적인 힘과 제도를 보완하고 치장하며 권한을 강화하려 해도 "하느님의 영"(민수 24,2)이 퇴색된 권한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뜻을 점점 더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권한을 받은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선포하고 이루시는 "어질고 바른"(화답송)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나요? 혹 성당에서나 그 권한과 질서를 믿고 따르다가, 집과 직장과 모임과 관계 안에서는 철저히 세상 이치를 추구하는, 분열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다가 혹 오시는 주님 앞에서 누구들처럼 "모르겠소" 하고 발뺌하게 되지는 않을는지요...
성탄을 향해 더 깊고 진하게 무르익어가는 이 기다림의 시기에 권한 논쟁이 던지는 화두에 진솔하게 머무르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이사 24,16)는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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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사랑이 불가능할 것 같은 볼품없는 상황에서도
사랑이 불가능할 것 같은 볼품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분에 넘치게 사랑하신다. 그분은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을 하신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우리에게 유익한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실제적이다.
우리가 약하고, 죄인이며, 부서지기 쉽고, 불행하며, 추한 모습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어리석은 방식으로 사랑받는다. 하느님은 이처럼 사랑하신다! 사랑이 불가능할 것 같은 볼품없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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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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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6-27)
<거짓말쟁이들은 자기한테도 거짓말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께서는 “나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진실을 안다. 너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사악하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안다. 그것은 내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그것을 말해 주지 않겠다.’ 거짓말쟁이들은 속일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자기한테라도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도 순수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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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착각>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
세례자 요한이 세례 베푸는
모습을 보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중립을 지키십니다.
하느님이 해준 거면 증명해 보라고 억지 쓰는
사람들에게 에너지 소비하지 마세요.
"수녀님 하느님 봤어요?
왜 그러고 살아요?"
질문하는 사람 그 자체가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신천지 신문을 수녀에게 버젓이 내밀며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 하느님이 계신다는 ᆢ
하느님보다 나은 존재가 없어
증명할 방법도 온전치 않고 해봐야 어리석음이니
사는 모습으로 보여야 합니다. ~~
신적인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
"안다는 착각에 속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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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 23)
기다림은 사랑을
동반하지만
교만은 언제나
착각을 동반합니다.
기다림을
사라지게 하는
한결같은 착각과
교만입니다.
우리를
더욱 아프게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하느님께
함부로 어색한 권한을
언급합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요한 세례자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높입니다.
이와같이
소중한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관계는 없습니다.
참된 권한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힘은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권한의 진위
여부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이
더 소중합니다.
기다림도
권한도 세례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권한은
끊어진 길을
여기에서 다시
이어줍니다.
사랑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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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의 권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못마땅할 때면 언제나 권한의 출처를 예수님에게서 묻게 되는 교만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먼저 부패한 우리정신과 마음을 정화시키십니다. 권한은 정신과 마음에서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한 가운데로 내려오는 겸손한 권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써 당신의 권한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권한은 논쟁을 통해 얻거나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참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빠져버린 권한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권한은 자신의 길을 기쁘게 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관계의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현존이 예수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는 사랑의 삶이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힘을 우리가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재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관계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권한은 더욱 빛나는 현존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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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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