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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27회 : 황금칼의 왕국, 제7가야 다라국 (2001.9.8.)
방송일: 20010908 조회수 : 4730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황금칼의 나라, 제 7 가야 다라국-
프롤로그-----
강항공)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 길게 흐르는 경남 합천,
고분항공) 지난 1985년, 합천군 쌍책면의 작은 야산에서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줌인) 고고학계를 뒤흔든 옥전 고분군이 그것이다
사진) 이곳에서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와 금동제 유물, 그리고 구슬과 옥등 모두 2000여점의 유물이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수습되었다.
칼) 그 중에 특히 눈길을 끈 유물 하나-
그것은 칼이었다.
완연한 용과 봉황 문양을 가진 용봉문 환두대도,
이 황금칼의 나라를 찾는다.
ST1------>>(옥전 고분군의 위치와 유물의 의의)
MC등장 (고분과 유물 사이로)
네, 고분과 유물,
이들은 그 자체로 기록이요 역사입니다.
더구나 문헌기록이 부족한 시대, 고분과 유물의 가치는 더욱 커집니다.
그동안 우리 고분에 대한 숱한 발굴이 있었고 그만큼의 흥분도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발굴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적지의 훼손과 도굴로 영영 역사를 잃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동)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옥전 유적지,
2000여 점의 유물이 그야말로 쏟아지듯 나왔습니다.
거의 완벽한 상태의 유물들이 역사의 빛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고고학계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지도등장 이쪽을 보시죠.합천군 쌍책면의 옥전유적지입니다.
인근에는 합천읍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의지류인 황강이 흐릅니다.
옥전고분군은 그야말로 산과 강 으로 둘러싸인 작은 야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산사진 고분이 발굴될 당시의 옥전과 그 주변 사진입니다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들판이요 야산입니다.
이동 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우리의 고대사가 묻혀 있 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수습된 2000여 점의 유물,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여백을 메워줄 증거물이었습니다
발굴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국내외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는 옥전고분군, 먼저 그 현장으로 갑니다.
VCR1---->>>
합천댐) 지난 1988년 완공된 합천댐,
이 댐은 황강 상류 협곡을 막아 거대한 합천호를 만들었다
댐 건설로 황강 상류지역에는 대규모 수몰 지역이 발생했고 그리고 수많은 유적지가 잠겼다.
물) 댐 건설 전, 합천 거창 지역의 수몰예정지에 대한 유적지 지표조사와 발굴이 있었다.
둘 걷고) 당시 발굴조사 팀의 일원이었던 경상대 박물관팀은 1985년 여름,
합천 댐 하류 지역에 대한 자체 조사를 벌였다.
황강을 따라 내려가며 강 유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벌였고
팬) 그 조사 과정에서 이곳의 옥전 고분군을 발견했던 것이다.
사진) 발굴은 1985년부터 91년까지 6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갑옷) 모두 111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에서 토기와 비늘갑옷, 옥과 금동제 유물등 2000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인터뷰) "굉장히 화려한 물건이 나와서..그런 상황이죠"
신문) 발굴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량발굴이었던 옥전 고분군,
당시 언론은 이 발굴을 연일 대서특필했고 고고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트레킹) 당시 수습된 유물들은 4세기에서 6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시기는 가야시대였고 옥전은 당시 가야 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옥전고분의 출토품들은 가야의 유물인 것이다.
항아리) 토기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옥전 고분의 토기들은 가야 시대 다른 지역 토기의 특징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
투구) 함께 수습된 말투구 역시 가야시대의 것이며
갑옷) 철제 갑옷과 투구 역시 가야 시대의 유물로 판명되었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유물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현장) 그렇다면, 1500여년 전의 유물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대량 발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 "무덤의 형태가...구조가 달랐다..포기를 해버렸죠"
CG) 가야시대 대부분의 무덤이 돌 뚜껑인데 비해 옥전의 고분은 목재로 뚜겅을 덮었다.
그것이 무너져 고분의 형태가 왜곡되는 바람에 도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M3) 지금은 말끔히 복원된 고분군들,
그들의 정중앙에 있는 것이 M3호분이다.
이 무덤이 특히 주목받는 까닭,
줌인) 그것은 이 무덤에서 수습된 특별한 칼 때문이다.
타이트) 용과 봉황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큰 칼...그 칼이 한 무덤에서 넉자루나 발견된 것이다.
그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인터뷰) "도대체 한무덤에....복수로 발견된 것...없잖습니까?"
박물관내부)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용봉문 환두 대도,
그중 한자루가 지금 국립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칼자루) 칼 자루 양쪽에는 용이 새겨진 금판이 붙어 있으며 손잡이는 가는 은실로 촘촘히 감겨 있다.
고리) 그리고 손잡이 끝의 둥근 고리안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뚜렷하다.
C.G) 합천 옥전고분군의 용봉문 환두대도,
이 황금칼은 옥전 유전지가 예사로운 땅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ST2------>>용봉문 환두대도란?
용봉환두대도)
MC 등장 네, 옥전 고분군에서 발굴된 칼입니다.
수많은 유물 중에서도 학계에 큰 충격을 던진 유물이라고 합니다.
환두대도돌면) 칼의 이름은 용봉문환두대도, 용봉문 환두대도라, 이름이 약간 어렵군요.
자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자세히 보시죠. 칼의 손잡이 끝에는 고리가 있습니다.
그 둥근 고리안에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바로 용과 봉황입니다.
그래서 용봉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환두, 이것은 둥근 머리, 즉 둥근 고리모양의 머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대도는 글자 그대로 큰 칼, 통상 60센티미터 이상이면 큰 칼, 즉 대도로 분류한다고합니다.
용봉문 환두대도, 어떻습니까? 이제 칼 이름이 입에 좀 익습니까?
그럼 이칼에 대해 좀더 알아볼까요?
용봉문환두대도는 용이나 봉황만 장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한마리가 고리안에 장식된 것은 단룡식이라 하고 봉황 한 마리가 새겨진 것은 단봉식이라 명명합니다
또 용두마리가 좌우대칭으로 그려져 있으면 쌍룡식 용, 봉황, 쌍룡, 용과봉 장식의 모든 칼을 통틀어
용봉문환두대도라고 합니다.
용봉문 환두대도, 굳이 풀이하자면 '용봉문양 둥근고리자루 큰칼' 정도가 될까요?
이동) 자, 그렇다면 이 칼은 어디에 사용했을까요?
칼이라면 당연히 무기입니다.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칼로 전투를 했을까요?
화려한 장식과 금 도금을 한 이 칼로 전투를 했을까요?
그리고 이 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일반 병사들 누구나 이 칼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볼수록 궁금증이 더합니다.
화려한 용봉문환두대도,
합천군 옥전의 작은 야산에서 나온 이 칼에 얽힌 비밀, 그것을 풀기 위해 먼저 백제의 무녕왕릉으로 갑니다.
VCR2---->>>>
무녕왕릉) 지난 1971년, 백제의 무령왕릉이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무령왕의 실체를 확인하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유물들) 무령왕릉은 발굴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어 백제 유물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다.
칼) 무령왕릉에서도 용봉문환두대도 한자루가 발견되었다.
칼은 무령왕의 허리 옆에 놓여 있었다.
용봉문 환두대도는 왕의 칼이었던 것이다.
내부) 신라에도 같은 모양의 칼이 있다.
천마총, 호우총, 식리총에서 각각 한자루씩, 모두 석자루의 용봉문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
몸체) 호우총에서 수습된 칼은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용) 그러나 고리를 장식했던 용 문양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천마총) 천마총에서 출토된 용봉문환두대도,
고리줌인) 이 칼의 고리 장식은 봉황 문양이다.
박물관) 그렇다면 이들 용봉문 환두대도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을까?
계단칼) 삼국시대 사용되던 다양한 칼들이다.
소환두대도) 아무 문양없이 둥근고리만 가진 칼은 소환두대도라 한다
삼엽환두대도) 고리 안에 인동초 문양이 장식된 것은 삽엽환두대도,
삼루환두대도) 고리 세 개가 합쳐져 하나의 고리를 이룬 것은 삼루환두대도이다
C.G) 이들은 시기에 따라 나뉘는데
제일 먼저 소환두대도로부터 삼엽환두대도, 그리고 삼루 환두대도로 발달해왔다.
가장 늦은 시기, 용봉문 환두대도가 나타난다.
인터뷰) " 5세기대 초기에는 3루 환두대도가 최고...나타나게 됩니다"
분포CG) 최고지배자의 칼이었던 용봉문환두대도는 모두 40여점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의 도굴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고 현재 학계에 보고된 것은 16자루에 불과하다.
그중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이 일곱자루이다.
책) 그렇다면 옥전고분군의 칼은 다른 지역의 칼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경북과학대 구자봉 교수의 도움으로 제작 기법상의 차이를 살펴보기로 했다.
설명) " 칼 코가 있어야 됩니다..요 부분이...
스틸) 칼 몸체와 손잡이가 만나는 곳의 처리를 비교해 보았다.
옥전칼) 옥전 칼은 손잡이가 칼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칼코둥이가 있는 반면
두 그림) 무령왕릉 칼은 그것이 없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틸업) 다음은 고리와 문양의 결합 방법 비교, 무령왕릉 칼은 고리와 문양을 한 주물로 만들어낸 이른바 일체형
이다.
줌인) 반면 옥전 칼은 고리와 문양을 따로 만들어 끼운 것인데, 고리에 문양을 끼우는 방식도 다양하다
CG) L자형은 고리에 L 자로 홈을 파고 문양을 끼운 것이며,
11자) 이른바 11자형은 고리에 11자의 홈을 파고 문양을 접합시켰다.
CG) (보고)
용 문양) 반면 신라의 호우총 칼은 고리에 홈을 파지 않고 끼우는 이른바 무형상좌형이다.
지도) 신라와 백제의 칼과는 다른 제작기법을 가진 옥전고분군의 용봉문 환두대도,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인터뷰) "옥전 고분군...자체 제작했을 가능성.."
팬) 신라와 백제의 영향을 벗어난 옥전 고분군의 독자적인 용봉문환두대도,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인터뷰) "아주 최고급 무기가...정치적 독립...군사외교를 했다"
현장) 독자적으로 왕의 칼을 가졌던 옥전 고분군, 이곳에는 독립적인 정치 집단이 있었다.
즉 또하나의 가야 왕국이 있었던 것이다.
ST3---->> 옥전에 가야 왕국이 존재했다?
칼과 MC 합천의 옥전 고분군, 그 주인은 왕을 상징하는 칼을 가졌다!
그것도 독창적으로 제작한 왕의 칼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왕국이 존재했을 것이다!
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이 화려한 용봉문환두대도에서 만들어 낸 가설입니다.
과연 이 가설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이동) 합천군 옥전의 용봉문환두대도는 5세기 말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이 시기라면 합천은 가야의 영향 아래 있던 땅입니다.
자, 가야, 가야라...
네, 여러분은 가야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혹시 신라의 속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삼국시대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토기 몇 개만 유물로 남기고 사라진 별 볼일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더 멋있게, 아직은 우리 역사에서 베일에 싸인 신비의 왕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책에서 가야를 찾아보았습니다.
서기를 전후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생겨나 562년 대가야연맹체가 신라에 복속될 때까지 이 지역에 존재하던
다양한 정치집단이다 라고 되어 있더군요. '다양한 정치집단'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보통 사람들에게 가야를 물으면 이른바 6가야 중의 몇 개만 들먹이다가 맙니다.
이쪽을 보시죠.
지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6가야입니다.
금관가야는 김해, 아라가야는 함안, 소가야는 고성, 고령가야는 진주, 대가야는 고령, 성산가야는 성주...
이런 식으로 알고 있고, 이렇게 배웠습니다..
지도보며 자, 그렇다면 심각해집니다.
우리는 용봉문 환두대도에서 합천의 옥전에는 왕국이 있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라면 합천주변은 이웃 고령의 대가야나 함안의 아라 가야등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옥전에 왕국이 있었다?
이동 자, 과연 옥전에는 가야의 또다른 왕국이 존재했을까요?
만약 존재했다면 그 왕국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우리가 세운 가설에 대해 옥전의 고분들한테
물어봅니다.
VCR3--->>
항공) 옥전 고분군에는 현재 18기의 봉분이 복원되어 있다.
현장) 발굴 대상이던 111기의 무덤은 다양한 고분 형식을 보여주었다.
즉 가야시대의 묘제가 총 망라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대체적으로 보면...있는데"
CG) 가야의 묘제는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목곽묘) 가장 이른 시기 목곽분이 조성되는데 이는 규모가 작고 목재로 뚜겅을 덮는 원시적인 묘제이다.
수혈식석곽묘) 다음으로는 수혈식 석곽묘인데 4개의 벽을 쌓고 덮개돌을 덮는다.
횡구식석실묘) 다음 횡구식 석실묘는 세 벽을 쌓아 석실을 만들고 입구는 밖에서 돌로 막는 형식이다.
마찬가지로 덮개 돌을 사용한다.
횡혈식석실묘) 횡혈식 석실묘 역시 돌로 방을 만들고 한쪽 벽에 길다란 길을 낸다.
필요에 의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항공) 옥전의 고분은 시기에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성되어 왔는데 대형 고분이 나타나기 이전 시기,
아주 특별한 무덤이 하나 발견되었다.
가는길) 옥전 23호분이 바로 그것인데,
옥전 23호분은 목곽묘가 조성되어 있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설명) "여기 이런 나무들이..자리입니다 요렇게"
트레킹) 23호분은 발굴 이후 다시 덮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사진) 그러나 23호분은 평면면적이 33.1 평방미터로 보통 8평방미터이던 다른 목곽분에 비해 4배 이상 큰 규모
였다.
바닥돌) 바닥에는 관을 받치는 바닥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으며
흙과돌) 관을 놓았던 주변에는 흙과 돌이 엉켜 있는데
CG) 이들은 목곽 시설을 보강한 흙과 돌이다.
옥전 고분에서는 처음 보이는 구조이다.
인터뷰)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는...들어오게 되는데"
유물) 그리고 23호분에서는 그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장경호) 모양과 크기가 다른 신기종들이 23호분에서 대량 수습된 것이다.
줌인) 다양한 금동제 유물들도 이 시기에 처음 나타났다
말띠) 말띠 드리개와, 금동제 화살통...
관모) 그리고 금동장 관모까지. 이들은 돌발적인 유물이었다.
이동) 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는 23호분의 유물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박물관) 김해 부산 지역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옥전 23호분과 닮은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토기비교) 두 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받침대에 낸 창까지 같은 모양이다.
접시) 접시 역시 섞어 놓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고,
말투구) 말 투구 역시 닮은꼴이다.
갑옷) 철판 갑옷과 철제 투구는 한 사람이 사용한 것처럼 똑같은 모양이다.
무덤) 옥전 23호분의 묘제는 동래 복천동 고분과 같은 형식인데, 이들은 옥전고분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인터뷰) "23호분과 같은 지배자...선진집단...했다"
현장) 김해 부산지역의 선진 문화집단이 옮겨와 형성되었다는 옥전고분군,
이런 이동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인터뷰)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에 아닌가?"
전쟁) 학자들은 그것을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에 의한 남정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 남부지방에 대한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공격으로 김해의 금관가야는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낙동강) 그때 김해 부산 지역의 일부 세력들이 낙동강을 거쳐 황강을 거슬러 올라와 옥전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현장) 서기 400년 이후, 김해지역의 선진 문물을 가졌던 세력들이 이주해오면서 이제 옥전에는 체계를 갖춘
정치집단이 들어서게 되었다.
ST4---->> 옥전 왕국은 과연 제대로 된 국가였나?
자료화면
왕건중
대야성을 둘러싼
양측의 공방과 전투 보인다
MC 멀티로 보고
있다가 네, 익숙한 장면이죠?.
드라마 태조왕건의 전투 장면들인데요, 여기에는 대야성을 둘러싼 신라 백제의 치열한 각축전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대야성이 어딥니까? 바로 옥전고분이 있는 합천 아닙니까?
지도확대)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는 왜 합천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까요?
여길 보시죠.
옥전이 있는 합천입니다.
바로 여기,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황강이 흐릅니다.
동에서 서로, 혹은 서에서 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물길의 중심에 바로 합천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옥전은 대야성으로 이어지는 물길의 길목에 있었습니다.
이동) 그렇다면 의문이 더 생깁니다.
주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차지하기를 노리는 요충지, 그 요충지 좁은 지역에 왕국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용봉문대도 용봉문환두대도와 출자형 왕관, 그리고 금동제투구등, 비록 왕을 상징하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출자형 왕관 이들이 과연 제대로 된 나라였을까요?
MC이동 국가가 국가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 그것은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옥전 왕국은 강대국들의 각축 속에서도 독자성을 유지한 왕국이었을까요?
그야말로 작고도 강한 가야의 강소국이었을까요?
옥전왕국의 경제 군사 외교력을 평가해 봅니다.
VCR4--->>>
강) 길게 흐르는 황강을 따라 강 양쪽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런 농경지가 옥전 왕국을 가능하게 한 하나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업 이외에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없었던 것일까?
설명) "..여 돛단배 큰기 있어갖고...옛날에는...이곳입니다 가장 큰 나루터였습니까?"
백로) 옥전 고분군 앞에는 70년 대까지만 해도 나룻배가 다니던 흔적이 있다.
수로의 기능을 가졌던 황강,
이 강이 옥전 왕국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쌍책면이죠? 적포라고... 요지였습니다"
항공) 옥전 왕국과 낙동강 최대의 포구는 황강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즉 옥전 지역은 좋은 교역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옥) 그렇다면 옥전 왕국은 무엇으로 교역을 했을까?
옥전 고분에서는 옥과 구슬제품이 유난히 많이 나왔다.
돌고) M2호분과 M4호분에서는 천 여점이 넘는 구슬제품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그대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세련된 가공품들이었다.
항공) 이렇게 쏟아져 나온 옥과 구슬은 이 유적지의 상징이 되고 이름이 되었다.
주민) " 예 지금 요서..구슬이 많이 튀어 나왔어..그래서 옥전이라고"
C.G) 1500여년 전, 옥의 가치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귀중한 재물로 여기던 옥은 당시 경제력의 척도가 되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인터뷰) " 그렇기 때문에...귀중한 것을...풍족한 사회"
옥) 옥전고분군에서는 이러한 옥을 직접 생산한 흔적이 나왔다
찌꺼기) 구슬을 가열하여 제품을 만들고 남은 찌거기와
옥흔적) 옥을 가열한 찌꺼기가 발견되었다.
돌) 그리고 당시의 숫돌에는 옥을 갈아 제품을 만든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인터뷰) "이것은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겠습니다"
옥) 옥의 대량 생산과 좋은 교역 조건, 옥전왕국은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경제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수장고) 당시 옥전 왕국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M3호분에서 발견된 121개의 도끼 모양 쇳덩이,
철물) 이들은 완제품 도끼가 아니다. 다른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중간 소재인 것이다.
이들을 묶어서 화폐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M 3호분에서 이런 주조철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연구실) 도끼 모양 주조철에서 샘플을 채취하여 분석에 들어갔다.
현미경) 전자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자 철의 단면입자가 매우 고르게 분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장음) " 요 심도...상당히 고운 것으로..."
인터뷰) "주조가 상당히 잘됐다...주조 제철 기술 발달...있습니다"
단야구) 실제로 제철에 사용했던 단야구들도 발굴되었다 집게와 망치,
그리고 숫돌까지 나와 옥전왕국의 활발한 철 제품 생산을 말해주고 있다.
야로이동) 그렇다면 옥전의 철은 어디서 왔을까?
현장) 합천군 야로면,
옥전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곳은 조선 시대 3대 철광산의 하나였다.
산) 오래 전부터 철광석이 생산되던 야로는 1500년전 당시에는 고령의 대가야 세력권에 있었다.
작업) 옥전왕국은 이곳의 철광석을 수입했을 가능성이있다.
현장음) "이거는 무엇입니까?"
두 지역의 철성분비교는 경상대학교 공동 실험실습관 허보영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통안) 야로에서 제철 찌거기를 수거하여 옥전 주조철과의 성분 비교를 시도했다.
분석) 특수 엑스 선 촬영을 실시하여 그 반응으로 철의 성분을 비교분석하기로 했다.
설명) " 네 옥전에서...시료를.. "
모니터설명) "옥전에서.."
다음CG) 분석 결과, 옥전 철성분과 야로 철성분의 가장 큰 차이는 티타늄의 유무에 있었다
인터뷰) "고 시료 두 개를 분석해본 결과는...볼 수가 있습니다"
항공) 이로 미루어 볼 때 옥전은 독자적인 철 생산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옥과 철을 바탕으로 한 옥전의 경제력은 그들의 왕국을 유지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고령뜨면) 더구나 옥전은 대가야와 인접해 있었다.
CG)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각축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인터뷰) " 고때..대가야..한반도 남부의 군사적 요충지... 겁니다"
전쟁)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 작은 왕국 옥전이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군사력이 있어야 했다.
박물관) 고대 전사와 무기 특별전이 열리는 부산의 복천 박물관, 가야 기마병의 복식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틸업) 가야 시대, 철제 갑옷과 철제 마구를 갖춘 기마병은 당시 가장 강력한 정예부대였다.
투구) 옥전에서 출토된 말투구,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유물이다.
C,G) 말투구는 현재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모두 14개, 중국에는 단 한개,
일본 열도에는 단 두 개 밖에 없는 유물이다.
그런데 옥전에서 무려 6개가 출토되었다.
옥전왕국에도 기마병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터뷰) "가야 집단 속에서는... 소국에 비해서 무장력... 않는다"
로만글라스) 옥전왕국의 국제감각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있다 신라 이외의 지역에서는 옥전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된 로만그라스,
이는 신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말해준다
연판) 금제 관못과 연판장식은 백제계 유물이다. 백제와의 교류 흔적인 것이다
투구) 투구는 고구려의 그것과 닮아있어 고구려와의 교류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다.
인터뷰) "역시 낙동강에 접하고...됩니다"
고분) 황강 유역의 옥전 왕국
이들은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왕국을 지켜나갔다.
ST5---옥전왕국의 국명은 무엇인가?
MC 등장 네, 탄탄한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주변국의 세력을 이용한 적절한 외교, 합천의 옥전에는 분명히 가야왕국이 존재했습니다.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서 500 년이상 존재했던 다양한 정치집단이라면 합천의 옥전에도 분명히 가야의 정치
집단이, 그것도 국가적 조건을 제대로 갖춘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환두대도 화려한 용봉문 환두대도, 왕관 최고 권력자가 사용하는 출자형 관모,
마구 그리고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말투구와 구슬 경제력을 상징하는 수많은 옥과 구슬 유물,
옥전 왕국은 찬란한 문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동 그런데 뭔가 허전하지 않습니까?
나라가 있었다고 하고, 강력한 왕국, 그것도 좁은 지역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왕국이 있었다 하는데도
우리는 허전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명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설이 정설이 되기 위한 마지막 조건, 바로 나라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옥전의 모 가야왕국이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나라 이름, 그것을 찾기 위해선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옥전
왕국의 나라 이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양직공도) 그래서 우리는 양직공도라는 중국측 기록에서 그 단초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 양직공도는 6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양나라의 사신도인데요 여기에는 당시, 양나라와 교류하던 백제와 그
주변 국가들의 나라 이름이 몇 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옥전왕국의 나라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요? 보시죠!
VCR5----------->>
양직공도) 이 문서를 주목한 까닭은 다라라는 나라 이름 때문이었다.
다라교) 옥전 고분에서 약 1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는 같은 이름의 다리가 있다.
마을) 그 다리 건너에는 다라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다라리는 옥전 유적지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있다
인터뷰) "우리가 나고 나서 장 다라...있었습니다..."
이동) 그렇다면 양직공도에 나오는 다라국이 옥전 지역일까?
또다른 실마리를 찾아 나섰다.
합천읍) 합천읍은 옥전에서 황강 상류쪽에 있다 자동차로 20여분 거리,
대야성) 합천은 삼국시대의 대야성이다
대야뜨면) 대야와 다라 사이의 음운학적인 연관을 따져 보았다.
인터뷰) "삼국사기 대량주...있죠"
CG) 나라 이름과 그 위치가 정확했던 다른 가야에 비해 다라는 중국과 일본의 기록으로만 남아있었다.
결국, 옥전 왕국이 기록에 보이는 그 다라국인 것이다.
토성으로) 그렇다면 다라국의 중심은 어디였을까?
옥전 유적지 근처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설명) "지금 이 부분...성들이 있었던...단애부가"
사진) 그것은 토성의 흔적이었다.
발굴 직전의 사진에서는 토성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다
인터뷰) " 이 자리가 다라국의 생활 유적...있습니다"
위치) 토성은 옥전 고분군의 바로 아래에 있다.
다라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인터뷰) "최소한 200년...자기 이름을 ...있습니다"
용봉 ) 용과 봉황 문양이 선명한 용봉문 환두대도, 이 황금칼을 가졌던 나라, 그것은 다라국이었다.
제7 가야, 다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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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엔딩
옥전유적지 배경
MC등장 네, 경남 합천의 황강가 나즈막한 야산, 그곳에는 작지만 강한 가야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이름은 다라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덩그런 무덤 몇 개만 복원되어 있을뿐 그야말로 썰렁하기 그지없습니다.
들러보며) 이곳에서 잃어버린 왕국 다라국의 숨결을 느끼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동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라국의 무덤만 일부 열어 보았을 뿐입니다
그 주변의 생활유적은 아직 손도 못대고 있습니다
다라국의 도성이 나오고, 기록이 나오고, 용봉문환두대도를 만들던 공방이 나오고,
교역하던 배가 나오고, 사람살이의 흔적이 나올 때 비로소 1500년 전의 가야왕국 다라국은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국은 우리 고대사와 가야사를 한층 구체화시켜 일본의 고대 한반도 지배설 따위를 간단히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환두대도보고) 오늘, 우리는 용봉문 환두대도로부터 출발하여 옥전 유물이 가진 비밀을 풀면서
다라국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6가야 외에 분명한 실체를 가진 제7의 가야왕국 다라국이었습니다.
이제 그 다라국의 완전한 부활이 우리 앞에 숙제로 남겨졌습니다.
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