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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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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너는 신이 아니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에제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8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주 하느님의 말이다.’”
복음<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30)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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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18 05:06
- 보상이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바라는 것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 추종에 실패하고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자
베드로 사도는 의기양양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이 말에 저는 당신은 아내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느냐고
바오로 사도가 1코린토 9장 5절에서 하듯 딴죽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주님께서 버려야 할 것으로 말씀하신 집, 형제나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와 토지를 버렸다고 강변할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너무도 뻔뻔하다면 베드로 사도를 딴죽 걸고 저를 강변하겠지만
뻔뻔하기는 해도 그럴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기에 강변할 수 없습니다.
강변하기에는 우선 제가 진정 모든 것을 버렸는지가 양심에 걸립니다.
집, 형제나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와 토지는 분명 버렸지만
이것들 말고는 제가 다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게 필요한 것은 다 갖고 있고 넘치게 소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유로움, 편안함, 편리함까지 소유하고 있으니
어떻게 제가 모든 걸 버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집, 형제나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와 토지만 버렸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진정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보다 더 저를 강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이름 때문에 집, 형제나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와 토지를 버린 사람”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토지나 집을 진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설사 토지나 집을 진짜 버렸을지라도 그것을 주님 때문에 버렸는지.
부모와 자식과 아내를 버리긴 하였지만 그것도 진정 주님 때문인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버린 것인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인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버린 것인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버린 것인지.
한때, 그러니까 처음 수도 생활을 택할 때
나는 내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온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고,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게 주님을 사랑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며,
그런 생각을 가끔 갱신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갱신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갱신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살지 못했기에 갱신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베드로 사도처럼 보상으로
“그러니 저는 무엇을 받겠습니까?”하고 감히 여쭐 수 없습니다.
저뿐이 아니라 마르코와 루카 복음에도 이 말은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 사도가 채근하여 보상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거고,
그리고 현세 보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보상에 대해선 일체 주님께서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보상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나 따를 수 없는 주님 추종이 허락된 것, 그것이 이미 큰 복이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즉시 행복인데
내세건 현세건 무슨 다른 미래의 복이 필요하겠습니까?
보상이란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만 바라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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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9,23-30
어제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떠난 뒤,
주님께서는 ‘부의 위험’을 더 또렷이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는 부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니라,
‘붙들고 의지하는 마음’이 그만큼 무겁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놀라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러자 오늘 복음의 심장과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성 대 바실리오는
이 말씀에서 ‘희망’을 봅니다.
어제 청년이 끝내 놓지 못한 그 ‘내려놓음’조차,
내 의지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열면,
그분께서 ‘낙타를 바늘귀로’ 지나가게 하시듯
우리 마음의 집착도 풀어 주십니다.
바실리오는 부와 가난에 관한 가르침에서,
재물은 ‘움켜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와 나눌 때’ 비로소 참된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눔은 ‘잃음’이 아니라, 무거움에서 풀려나는 ‘자유’입니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무엇을 받겠습니까?”
주님의 답은 놀랍습니다.
버린 사람은 도리어 ‘백 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은 ‘잃는 셈’이 아니라
‘백 배로 돌려받는 셈’입니다.
다만 그 셈법은 세상과 거꾸로여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반전을 거칩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평화를 줍니다.
하나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뢰의 평화,
다른 하나는 ‘백 배의 보상’을 향한 인내의 희망입니다.
내려놓음은 단번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더딘 길 끝에 ‘백 배’가 기다립니다.
성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그 일은
바로 ‘기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그분 앞에 내려놓는 것 ―
그것이 성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다 해내려 애쓰며 지치지 않는가?
나는 안 되는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가?
내가 ‘마음에 두는 중심’은 재물인가, 하느님인가?
나는 ‘백 배의 보상’을 향한 인내의 희망을 품는가?
주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소서.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당신께 맡겨 드리게 하시고,
제가 도는 중심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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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언자들의 소명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언자들의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 마음의 변모와 자유였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히브리 예언자들
예언자들의 소명
2026년 8월 17일 월요일
예언자의 사명은 눈에 잘 보이는 옛 질서의 현실을 넘어, 하느님께서 새롭게 일으키시는 현실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활력을 주는 힘은 희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은 이미 소유한 것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곧 주실 은총 때문입니다.
- 월터 브루게만(Walter Brueggemann), 예언자적 상상력(The Prophetic Imagination)
1980년에 리처드 로어 신부는 히브리 예언자들에 관한 강연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언자들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희망의 상상력에 대해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길러 주고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은 우리의 체제를 뒤흔드는 이미지와 말씀을 전하며, 우리가 아직 전체를 다 보지 못했음을 알려 줍니다. 예언자들은 단순히 사회 변화를 위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변모와 자유에 관심을 두며, 그 자유로운 마음에서 "들으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우리 안에 새로운, 해방된 의식을 일깨워 주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자유로움 한가운데에서 예언자들은 약속을 심어 줍니다. 그것은 대안적이고 새로운 비전이지만, 그 약속은 온전히 성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만족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도록 부르십니다. 이는 하느님이나 예언자들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약속의 희망으로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와 힘은 바로 그 약속, 그 꿈, 그 비전—곧 지금을 넘어 다가올 가능성입니다. 예언자는 그것을 알고, 하느님께서도 그것을 아십니다. 탈출 사건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에 그 약속을 심어 주셨고, 모세는 그것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이 약속들은 거짓이 아닙니다. 참된 것이지만, 우리가 기대하거나 바라는 방식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조금 더 앞으로 부르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참된 새로 태어남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더 깊은 생명의 약속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나는 길을 걷습니다.
굳건히 자리 잡은 지배 문화는 참된 약속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 보존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체제는 더 많은 돈과 더 나은 삶을 위한 물질주의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약속을 내세우며, 우리에게 끝없는 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을 채우고 넓혀, 자기 자신을 넘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참된 약속을 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의 마음을 힘 있게 하고 넓혀 주며,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생명력과 존재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 약속은 권위를 우리 안에 심어 줍니다. 결국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며, '이 시간이 끝날 것'이라는 덧없음에 대한 유일한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를 더 깊은 생명의 체험으로 이끌어 줍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를 "부활"이라 부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최근에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성경의 새로운 위대한 주제들』이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이는 제 삶을 변화시키는 체험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히브리 성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그리스도교 성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자 하시는 이야기이며, 그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드러납니다.
— Clare R.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Prophets (Catholic Charismatic Bible Institute, 1980), audio recording.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lentin Walter,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흐르는 물이 바위를 끊임없이 깎아내듯,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부름이 메아리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한,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평화의 은총이 함께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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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8.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을 버리고, 잃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이가 아니다!"
2026.08.18. 05:23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예수님과 부유한 젊은이와의 대화 이후, 제자들과 군중에게서 일어난 반응을 묵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강렬합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영적 나태에서 흔들어 깨우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복음 속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반복하신 가르침입니다. 곧, 재물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가진 이들도 사랑하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재물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불의하게 얻어진 것이라면, 혹은 이웃을 돌보지 않고 이기적으로 소비한다면, 마음을 닫아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든다면, 그것은 구원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 사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배시키려는 인간적 집착이 무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아뢰어야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제 마음을 변화시켜 주소서! 제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저를 당신에게서, 사랑에게서, 진정한 삶(생명)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해 주소서!"라고요….
서기 79년에 있었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한 폼페이의 대재앙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 오늘날 나폴리 근처에 있던 고대 로마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약 4~6미터 두께의 화산재와 부석에 묻혀 파괴되었습니다. 끔찍한 폭발은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도시 전체를 화산재 속에 파묻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당시 사람들의 마지막 자세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사람들이 죽음의 순간 어떤 자세로 있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수년 후, 폼페이 외곽에서 건물을 짓던 인부들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산재 속에서 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마도 폭발을 피해 달아나려 했지만 뜨거운 화산재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한 듯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 여인의 손에 보석이 단단히 쥐어져 있었고, 그것들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석은 그 사람의 것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유함"과 연결지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돈이나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집착하고 있는가?"
그런 집착들은 대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이 '내'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일 수도 있고, '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에 맞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집착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어도 옳은 것이라는 집착이 '내' 정신을 지배하는 한 말입니다!
이런 지혜롭고 아름다운 격언이 있습니다.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을 버리고, 잃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입니다.…
부유한 청년이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슬퍼하며 떠난 뒤, 베드로가 나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우리 모두에게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마태 19,28). — 주님, 당신의 시선은 그 '날', 곧 영광의 날을 향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 인류의 충만함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답게 변모될 것입니다. 우리의 죄나 어둠마저도요! 적어도 우리가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다시, 또다시 잃을 수 없는 분, 잃어서는 안 되는 분을 향해 시선을 두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그분이 손을 내미시는 곳으로 향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이들은 사람의 아들과 함께 앉을 것이다… 그들이 버린 것의 백 배를 더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8-29 참조).
집착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약속된 미래는 기쁨과 생명의 충만, 곧 하느님 당신의 존재성 안에 포함되는 충만함이요 영원한 복락입니다.
— 감사합니다, 주님. 저를 그날로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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