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다리의 유래
일명 ‘덕진이 이야기’로 전해지는 덕진다리의 유래는 대종사께서 자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양산 김중묵의 《인과의 세계》에도 소개되었다. 범산 이공전 종사가 ‘대종사 사용하셨던 예화’를 말할 때 자주 소개하는 이야기다. 《인과의 세계》에 소개된 내용을 인용한다.
신라시대 전남 영암에 관철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3천석이나 짓는 부자였지만 어찌나 성질이 고약하고 욕심이 많던지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욕심이 얼마나 많은가 하면 가을에 소작인들이 폐농하여 소작료를 조금 감해달라고 하면 “다른 사람은 농사를 잘 지었는데 왜 그대만 농사를 잘못 지어 그러느냐.
그렇게 농사 지으려면 논을 내놓으라.”고 야단을 칠 정도였다.
그 바람에 소작인들은 논을 뺏길까봐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풍구쟁이를 시켜 곡식을 풍구질하는데 쭉정이 하나 없이 깨끗하게 풍구질하게 하니 소작인들이 한 섬을 가져가면 한 두말 축나는 일이 예사였다.
억울한 소작인들은 “죽어서 구렁이나 되라,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욕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관철이가 시감을 앓게 되었다.
시감이란 감기 비슷한 증세로 열이 오르는 병이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다려 먹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의사가 감기인줄 알고 약에 인삼을 넣었기 때문이다.
열체질에 인삼이 들어가니 죽고 말았던 것이다.
관철은 청의동자의 안내를 받아 어디로 가게 되었다.
한참 가니 시퍼런 강물이 있고 그 강물 위에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동자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그 다리를 건너니 거기가 저승이라고 했다.
저승에 온 관철은 동자의 뒤를 따라 재판정에 갔다.
재판정 안에는 염라대왕이 위의를 갖춰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에 수많은 판관들이 앉아 있었다.
관철을 본 염라대왕께서 “너는 아직 올 때가 아닌데 왜 왔느냐, 어서 나갔다가
8년 후에 오너라.”고 하였다. 관철이 나오다 생각하니 집에서 가지고 간 여비를 다 써버리고 없었다.
그것을 걱정하니 염라대왕께서
“네 창고에 가면 거기에 돈이 있을 것이니 거기 가서 가져가라.”고 하였다.
안내를 받아 자기 창고에 가보니 커다란 창고 앞에 ‘관철지고’라 쓰여 있었다.
‘아 여기에도 내 창고가 있구나’ 싶어서 기쁜 마음으로 창고 문을 열어 보니 안은 텅 비어 있고 오직 주춧돌 세 개와 볏짚 다섯 다발이 덩그렇게 놓여 있지 않은가?
주춧돌 세개는 사촌이 집을 지을 때 좀 도와 달라고 하자 다른 것은 아까워 주지 못하고 겨우 주춧돌 세 개 준 것이고, 볏 짚 다섯 다발은 이웃집 가난한 여자가 어린애를 낳고 굶주리고 있을 때 다른 것은 아까워 주지 못하고 땔 것 하라고 주었던 것이다.
결국 돈이 하나도 없으니 가지고 갈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창고에서 돈을 빌려가기로 하고 옆의 창고를 보니
‘덕진지고’라 쓰여 있는데 그 창고 안에는 금, 은, 돈, 식량 할 것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부자이기에 이토록 돈이 많을까’ 생각하면서
노자를 좀 얻어 가지고 돌아오다가 지난번에 건넜던 외나무다리에 이르러 깜작 놀라보니 자기 집에 누워 있었다. 죽은지 이틀만에 되살아난 것이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니 꿈도 같고, 도깨비에게 홀린 것도 같아 이상하였으나
너무나 역력하고 신기하여 그 뒤 덕진이라는 사람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곳을 헤매며 덕진이를 찾았으나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전주 어느 산모퉁이를 지나게 되었다.
해는 지는데 배는 고파오고 다리는 아파 쉬어갈 곳을 찾았다.
그때 마침 주막이 있어서 그 집에 들어가 술과 음식을 청했다.
주인이 “덕진아 손님 왔다.”하면서 덕진이를 부르지 않는가?
귀가 번쩍하여 덕진이를 보니 지지리도 못생긴 노처녀였다.
너무나 못났기 때문에 시집갈 생각도 단념하고 먼 일가뻘 되는 이 주막집에서
밥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윽고 밥상 차려오는 것을 보니 깨끗하고 정성스러웠다.
식사를 끝낸 관철은 덕진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덕진이는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고는 구정물에 들어간 밥풀, 무 조각, 나물 건더기 등을 조리에 받아서 꽉 짜더니 그것을 버리지 않고 자기 밥 반 그릇을 덜어 비벼서 먹었다.
얼마 후 길을 가던 손님들이 “덕진이 있소.”하며 찾아오면 마치 친오빠나 친동생같이 정성스럽게 상을 차려 손님을 대접했다.
이 주막에서는 손님들에게 밥을 파는데 돈을 3전 내면 밥을 큰 그릇으로 한 그릇 주고, 2전 내면 작은 그릇에 밥을 담아 주었다.
그런데 키는 크고 건장한 손님이 돈이 없었던지 2전 짜리 밥을 달라는 말을 듣고
덕진이는 자기가 조금 전에 남겨 두었던 밥을 더 담아서 상을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손님들이 벗어놓은 감발(양말이 없는 때라 발을 감는 베)을 깨끗하게 빨아서 여기저기 널었다가 새벽길을 떠나는 손님들이 신고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밤늦게 찾아오는 손님도 반갑게 맞이하여 극진히 대접했다.
이를 본 관철은 속으로 크게 깨달았다.
‘나는 3천석이나 받는 부자이지만 지금껏 누구에게 밥 한 그릇 주어본 일 없고,
돈 한 푼 준 일도 없고, 남 못 할일, 속 짠 짓만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덕진이는 저토록 알뜰하게 복을 지으며 살고 있으니
저승 창고에 돈이 가득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한 관철은 덕진이에게 저승이야기를 하면서
덕진이 창고에서 빌려왔던 돈을 내 놓았다.
그러자 덕진이는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극구 사양했다.
결국 돈을 주지 못한 관철이는 덕진이가 다리를 하나 놓는 것이 평생 소원인 것을 알고 그 돈에 얼마를 더 보태 덕진이가 살던 주막 옆에 ‘덕진교’라는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덕진다리는 석물마저도 일부분만 남게 됐다.
2001년 덕진네를 기리기 위해 옛 덕진다리가 있던 자리에 석물을 보태
석교(石橋)일부를 복원하였다.
전남 영암군 덕진면에 전해오는 덕진다리 이야기도 조금 다르기는 하나 내용은 대동소이 하다...
덕진은 영암군 2읍 9면 중의 한 지명이다. 그 이름은 영암 뿐 아니라 전주에도 있다.
영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중의 하나가 덕진나루다.
신라시대 덕진이라는 여인의 애틋한 고향사랑의 전설과 함께 덕진교라 불리는 이 다리는 영암의 관문이다. 현재의 덕진교 아래 강 옆에는 덕진여인의 공덕비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