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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014년 11월 16일 / 요한계시록 2:1-5, 3:14-22
계 2:1-5 /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보내라. “이는 교회를 순회하며 오른손으로 그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들어 주시는 분의 말씀이다. 2) 나는 네가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해 온 것도 보았다. 또 네가 믿음의 형제인 척하며 죄 짓는 자들을 눈감아 주지 않고, 사도라고 스스로 떠들어대는 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 그들이 가짜인 것을 가려낸 사실도 알고 있다. 3) 너는 나를 위해 고난을 견디었으며 낙심하지 않았다. 4)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계 3:14-22 /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 15)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어느 한쪽이면 좋겠다. 16) 그러나 너는 미지근하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다. 17)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충고한다. 불로 제련된 순금을 내게서 사라. 그것만이 네가 참다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흰옷을 내게서 사라. 그래야 너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네 눈을 치료하려거든 내게서 안약을 사라. 그러면 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훈련과 징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무관심한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벌할 수밖에 없다.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보좌에 나를 함께 앉히신 것처럼 나도 내 보좌 곁에 그를 앉게 하겠다. 22)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으라.'
1. 첫 사랑,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 2:4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 - 본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을 나타냅니다. 처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입니다.
①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즉 형제사랑을 의미(행 20:35; 엡 1:15).
②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있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막 12:29).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어느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버렸느니라 - 부정 과거로 단회적 행동을 나타내어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敎理的)으로 칭찬할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
계 2:5 /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여기에서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명령어를 사용하여 제시하십니다. 이러한 세 가지 명령은 에베소 교인들을 보호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단호한 명령이며 권고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달라진 이유) - 이것은 죄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계속하여 생각하고 회상하라’는 의미입니다(눅 15:17-22). 에베소 교인들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인해서 상실하게 되었는가를 상고해야만 합니다.
회개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마 3:2; 눅 15:20).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에베소 교인들은 특별히 회개하여 돌아가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닌 그들이 가졌던 처음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가지라’에 해당하는 말은 ‘행하다’는 의미를 가진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지금 즉시 행하라’는 말입니다(마 3:8).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즉시 처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사랑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홅기리라 –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외면했을 때 초래할 결과에 대한 진술입니다. ‘내가 네게 임하여’에 해당하는 말은 회개치 않을 경우 맞게 될 현재적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 곧 시몬 베드로, 쌍둥이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제자 두 사람이 함께 있었을 때에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시몬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겠소.” 하고 나서자 “좋습니다. 같이 갑시다.” 하고 모두들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와 자신들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제자들은 착잡한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른 체 옛생활인 어부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새벽녘에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게. 그러면 많이 잡힐 테니.”라고 말씀하시자 누군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하고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물속에 뛰어들어 바닷가 언덕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배에 남아 있던 제자들도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약 90미터 정도 떨어진 언덕에 닿았습니다. 그들이 언덕에 닿아 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물어 보셨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가 죄송한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번 더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근심이 생겨서 “주님, 주님은 제 진심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먹이라.”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22).
베드로가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마 26:33)라고 장담하였지만 작은 소녀 앞에서 3번씩이나 부인하여 기가 죽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디베랴 바다에 물고기를 잡으려고 갔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첫 사랑(눅 5:11 /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을 회복케 하시며 베드로로 하여금 앞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눅 24:49 / 이제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니 너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성령이 오셔서 하늘의 능력을 채워 주실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거의가 다 기꺼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카타콤 / 네로 시대를 비롯하여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성도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지하에 있는 무덤인 곧 카타콤에서 은밀히 모였습니다. 카타콤의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터널형 통로를 사방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고, 2-5층 등 여러 층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벽에는 약 700만 명에 이르는 성도들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후 성도들은 무려 250년 동안이나 박해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이어왔습니다. 자식에서 손자로, 또 손자의 자식에서 그들의 손자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오며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믿음을 지켜온 비결이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렇게 고통스런 생활을 오랫동안 지켜낸 비결은 ① 부활에 대한 소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러한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② 성도의 교제로 지하무덤에서 평생을 살면서도 서로를 향한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서 그러한 고통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타콤의 한 무덤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벽에는 “사랑했던 당신들 때문에 나는 63세까지 살 수 있었소!”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같은 신앙의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의 자유가 그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죽음과 우리나라에서도 믿음의 선진들이 피를 뿌렸고, 아직도 이 땅위에는 이런 순교적인 각오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내보내 주겠다는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죽도(대막대기)로 맞을 때마다 ‘할렐루야 아멘!’으로 일관하여 일본순사들의 분노를 더욱 끓어오르게 하여 결국 죽도로 심한 매를 맞아 내장이 다 파열되어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안이함에 머물러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가졌던 첫 사랑을 가지십시다.
■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갑이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의 총독은 폴리갑이 노령이기에 황제를 두고 맹세를 하면서, “지금이라도 당신이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폴리갑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86년 동안이나 그를 섬겼으나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제 와서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이신 주님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응답을 하고는 폴리갑은 기쁜 마음으로 화형을 당해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가장 사랑한 제자의 본이 아니겠습니까?
2. 이제부터라도 뜨거운 신앙을 하라
연탄재 시인으로 알려진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 모두에게는 뜨거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을 뜨겁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대충대충 살다가 의미 없이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뜨거움에 대한 간절함이 안도현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있습니다. 단지 안도현 시인이 시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보다는 열정적이고 뜨거운 신앙을 갖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아쉬움을 갖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이 그렇게 뜨겁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신이 나고 흥이 나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니의 배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인들은 항상 신앙이 타성에 젖은 것 같은 느낌을 느낄 때가 많아서 좀 뜨거워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소아시아에 있었던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신앙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모습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계 3:16).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는 단순히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미지근한 신앙을 뜨거운 신앙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를 찾으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외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 어떤 분이 ○○교회에 왔는데, 그분은 어떤 연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다니던 교회를 떠나 잠시 동안 신앙생활을 중단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면서 이런 저런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자훈련이 있는지, 새벽 기도회는 하는지, 금요 기도회는 하는지, 가족 수련회를 하는지, 부흥회 계획은 있는지.’ 그분의 말만 들으면 모든 훈련과 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려는 듯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분은 겨우 주일 예배만을 참석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참여를 권유했지만,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종종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배우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성경공부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찬양에 뜨거웠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분들을 보면 예배 시작 전 마다 함께 부르는 찬양시간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배 시간에도 마음을 모아 찬양하는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뜨겁게 기도 좀 했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자주 합니다. 기도원에도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주일예배만 참석할 뿐,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이 소원을 말하는 것만 들으면 정말 뜨거운 신앙생활을 위해 갈급한 분들 같지만 펴놓은 멍석에는 올라오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연탄재가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연탄은 그저 자신에게 있는 상황 속에서 불을 피웠을 뿐입니다. TV에서 선전하는 신비한 건강식품을 구해 먹으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정성스럽게 마련한 밥을 때에 따라 적당하게 섭취하고, 꾸준히 매일 매일 운동을 해야 건강해집니다. 고액의 족집게 과외를 받아야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공부해야 할 분량을 착실하게 공부해 나갈 때 실력이 느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아침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 매일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예배만이라도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을 통해 믿음은 커갈 수 있으며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뜨거워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기회들을 다 흘려버리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식당에 쓰여 있는 말처럼, 어머니가 해주신 밥이 최고의 보약입니다.
바쁘다고 밥 먹는 것을 거르거나 바쁘다고 꾸준히 운동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결국 몸이 망가지게 되어 있듯이, 이런 저런 핑계로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각종 집회들(금요 기도회,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구역예배)만이라도 제대로 참석해야 바라는 소원대로 뜨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1. 이제부터라도 회개하여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 나치스당 거두인 히틀러의 심장 역할을 한 ‘괴링’이 범법자로 사형을 선고받는 시간 직전에 그의 부인이 면회를 왔는데, 감옥에서 예수님을 알게 된 ‘괴링’이 성경책을 들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 이름이 요한계시록 중 어디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야 하겠소.”라고 하며 부인에게 집에 돌아가거든 어린 딸과 함께 교회에 나가라고 했답니다. 이처럼 ‘괴링’은 우편 강도처럼 감옥 안에서 회개하고 사형받기 직전, 이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합니다.
계 3:19-22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훈련과 징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무관심한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벌할 수밖에 없다.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보좌에 나를 함께 앉히신 것처럼 나도 내 보좌 곁에 그를 앉게 하겠다. 22)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으라.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주석가는 이 구절을 보고, “신약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유명한 모습, 위대한 모습, 죄인들을 향한 애절하고 사랑스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향하신 애끓는 마음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릴까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의 문을 두드릴 때는 무엇인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에 관여시킨다는 것은 삶의 내 자유가 박탈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구속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주시려고 오셨는데,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함인데 말입니다.
요 1:10-12 /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사람들이 마음 문을 굳게 잠그고 문을 열 기색을 보이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주기만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문전박대를 당하면 그 집에 두 번 다시 가기 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전박대를 당하시면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은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을 굳게 잠가놓은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 때문이며, 내 멋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두드리고 계십니다.
구약 아가서 5:2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밖에서 온 밤을 새워 찬이슬에 맞아서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신부가 안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다시 옷을 입고 나가서 문을 열어 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체하고 있다가 문을 열었는데 그때는 이미 신랑이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찾아다녀도 성안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모하는 심정을 말하며 찾아 다녔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두드릴 때에 즉시로 마음문을 열어야 됩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조용한 시간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각성을 하게 됩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 초라한 모습을 가지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도 하게 됩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역경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좋은 일만이 아니고, 실패한 자에게,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아내에게나 남편에게 버림을 당할 때,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에 이런 역경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삶과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각성을 일으키십니다. 이렇게 문을 두드릴 때에 음성을 듣고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면 주님께서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실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로운 영적 사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그네처럼 우리 마음에 잠깐 왔다 가시는 분이 아니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이 마음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무엇을 애통한고 회개합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예수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찾아오셨지만 나는 멸시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멸시를 받으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 주님께 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서 마음을 치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인데, 그 교회에는 두 가지의 큰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미지근한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열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비신자 같습니다. 주님은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하셨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미지근합니다. 교회에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주어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미지근하게 신앙 생활한 것 용서해 주십시오.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라며 회개해야 합니다.
②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입니까? ‘나는 부자라 부유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돈도 많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에 살며, 좋은 자가용도 타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의 복을 영적인 복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본다고 하면서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입니다. 값비싼 옷으로 단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벌거벗은 자입니다. 부자라고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는 가난뱅이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와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뉘우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마음 문을 여는 것입니다.
▶ 보십시오.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눅 18:11-12). 오히려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기도 결과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8:14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이제라도 회개하며 경건한 신앙생활로 돌아가십시오.
① 칭찬을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베풀거나, 기도하는 일는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경건한 신앙으로 돌아가십시오(마 6:1).
②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면서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묵묵히 실행하십시오(마 23:2-4).
③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랍비, 스승, 지도자’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마 23:11).
④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마 23:23).
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잔속을 깨끗이 닦아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마 23:26). 위선하는 사람들은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 같아서 겉은 좋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위선과 죄가 있습니다(마 23:28).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경건해지기 위하여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자기의 소원을 풀어달라는 과부처럼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2.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 옛날에 어떤 부자가 돈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도 없고 별로 웃어볼 만한 일이 없어 하루는 말을 타고 여행을 가는 도중에 앞을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옷은 남루하여 산에 안개 두른 듯 했는데 즐거운 듯이 춤을 춥니다. 가까이 가서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춤을 추고 있습니까?”라고 물은즉 거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짓지 않고 사람으로 지은 것이요, 둘째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요, 셋째 지금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 없으나 내가 죽으면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좋아서 춤을 춥니다.”
▶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저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1-3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3)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하늘의 도성 즉 천성(天城)입니다. 아름다운 천성(天城)을 사모하는 이는 천성(天聖)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해지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소망을 천국에 두면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히 11:10-16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 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감사에 차고 넘쳤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었기에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축복기도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별세의 능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자신에 대하여서도 이미 십자가에 죽었고, 오직 하나님께 대한 소망만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는 목적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며, 사는 가치가 가장 보람됨을 알았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결코 세상부귀영화를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핍박을 받되 매를 맞는 것도 감사요, 순교를 당하여도 기뻐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자굴에 들어가면서도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나중에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황제 네로가 초대교회 성도들을 처형한 후에 오히려 미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왜 저들은 죽어가면서도 웃고 살까? 기독교인들은 무엇인가 틀리다.” 그들은 자기를 저주하며 욕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고,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 기도를 잊지 않았으며, 사형장에 끌러가면서도 찬송하였고, 죽어가면서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천국과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1만6984명.’ 1945년 해방 이후부터 2006년까지 북한 정권에 의해 박해 받고 순교를 당한 사례 761건을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다 발각돼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숫자입니다. 이 숫자는 책이나 문서로 정리된 것만을 수집한 결과이기 때문에 더 많은 순교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믿음을 지키다 잡혀 순교한 경우가 7,419명으로 1953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5,742명이 순교를 당했으며,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다 체포된 경우도 159명, 21명은 성경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으로 믿다가 순교한 경우는 209명, 가족으로 순교한 경우는 143명, 한 지역이나 동네에서 가족이 아닌 타인과 모인 공동체는 6677명의 순교자가 발생합니다. ‘1953년에서 1972년까지가 가장 박해가 심했던 시기’라며 ‘단일교회가 아닌 연합체 또는 조직화된 교회에서의 순교자도 8,628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1995∼2006년 발생한 1,358명의 순교자 중에는 부모가 나이가 많아 자신들이 죽기 전 자식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그들의 자녀들이 순교를 많이 당했으며 또한 탈북했다가 북한으로 돌아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도 340명이나 되었고, 이들 가운데는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중국에 머물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가 사역하다 순교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 1974년 11월 30일 함경남도 신흥군 - 3명의 성도 인민재판 후 25톤급 프레스로 압축 사망 당함. 1977년 8월 19일 자유를 찾아 임진강으로 월남한 이영선씨의 진술 요약.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74년 11월 30일이었다. 오전 11시에 신흥군 안전부로부터 갑자기 공설운동장에 집합하라는 지시에 따라 학생이건 노인이건 하나같이 영문도 모르는 채 어리둥절하며 지시에 따랐다. 그러나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인민재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숙덕대더니 그 추측을 빗나가지 않았다. 오후 2시 쯤 되자 짐칸을 포장으로 둘러 친 트럭 한 대가 오더니 이어서 안전원들이 데려와 세 명의 노인을 트럭에서 끌어 내렸다. 역시 그들의 인민재판이 시작되었다. … 세 노인은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걸음을 놓을 때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노인이 하늘을 우러러 뭐라고 간절한 기도를 시작했다. 기력이 모자라는 지 아니면 목이 쉰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노인의 기도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 노인의 기도가 끝나자 다른 두 노인들도 ‘아멘...’하고 입을 모았다. 그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 청년들이 노인들 앞으로 나와 입에 재갈을 물렸고 중앙 재판소에서 내려왔다는 지도원이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동무들! 어버이 수령 김일성 동지의 유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기 위해 전체 인민이 하나같이 단결해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종교를 믿는 악독한 자들이 우리 공화국에 존재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아직 저 반동 종교인들이 남아서 지하활동을 펴왔다고 하니 저자들은 어버이 수령 김일성 동지의 교시를 귀담아 듣기보다는 종교라는 아편에 중독되어 저들만의 쾌감을 즐겨 왔던 게 분명하오! 그렇다면 저들의 골통속에 과연 뭣이 들어 있는지 이제부터 우리 다 같이 관찰해 봅시다.” 그의 연설은 처음부터 지극히 잔인하고 선동적 발언이었다. … 세 노인들은 그 날 신흥군 상원천리의 한 집에서 은밀히 집회를 갖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검열단에 의해 성경책을 빼앗겼고 체포되기까지 했다. 재판소 지도원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 속에 끼어있던 사복 안전원들의 선동구호가 이어졌고 주민들도 웅성웅성하더니 차츰 구호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안전원들이 달려들어 세 명의 노인들을 끌어다 철판 위에 눕히고 머리를 압축판 쪽으로 끌어넣었다. … 재판소장이 구령을 외쳤다. ‘작동 준비~ ’ ‘작동!’ 구령과 함께 안전원이 스위치를 누름과 동시에 25톤급 소형 프레스가 서서히 작동했다. 압축판이 노인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노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두개골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뇌수와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런 참상을 목격한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고, 나 또한 치가 떨려 옆 동료를 끌어안았다. 상당수의 부인들은 울기까지 했다. 그런데 중앙 재판소에서 내려온 그 지도원은 “종교의식 가진 자, 그러한 자와 결탁한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이 자들과 똑같이 처벌받게 될 것이오.”하고는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3. 어떻게 해야 내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는가?
마지막으로 문을 여는 성도들은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주님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문을 열고 ‘주님 성령으로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라고 청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기도를 안 했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3:17에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20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입니까? 주님이 내 안에 오시는 날에는 알리라고 하십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그들의 마음속에 임하실 때에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때 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미약하고 비굴한 삶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야 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시고 주로 말미암아 내가 사는 삶이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죽지를 못합니다. 나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내가 깨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불행스런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따지고 보면 내가 깨어지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성령으로 감동하시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완전히 깨어지면 내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 누구입니까? 종은 주인의 말씀에 예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왜 순종해야 합니까? 무능한 자를 능력 있는 자로, 쓸모없는 자를 필요한 자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없었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을 그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6:20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능한 우리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능한 것은 온전한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순종이 있을 때에 주님께 쓰임 받는 능력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셔서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 가운데 살게 됩니다. 즉 선한 행실가운데 산다는 말입니다. 빛 가운데 살면 예수께서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어두움에 행할 것인가 빛 가운데 행할 것인가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내가 계속적으로 함께 있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에베소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문제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당시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믿음을 잘 지켰고, 바른 교리를 수호했고, 악한 이단사상으로부터 교회를 지켰습니다. 너무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과정에서 에베소 교회가 가장 중요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했습니다.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실제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방언도 하고, 병도 고치고 예언도 했고, 능력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성경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혹시 이런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 안에서 형제를 사랑으로 감싸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랑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아노 실력의 80%는 연습으로 됩니다. 그러나 100%가 되기 위해서는 피아노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술이든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에 전문가가 되고 그 일에 성공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기술도 중요하고 재능과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철저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80%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들이 다 변화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강한 용사가 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주님의 일을 자기 자신의 일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슈퍼우먼이 될 수 있고, 한 남자가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슈퍼맨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원리,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기 전에 사랑을 구하십시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기 전에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목회의 원리도 이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목회가 재능이요 능력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설교하는 것도 실력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목회는 사랑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실력은 두 번째입니다. 능력도 두 번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전도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방법이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전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 사역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주의 일의 일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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