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한이형 라우린!시오(1799〜1846)
o 회장. 양반
o 1799년 충청도 덕산 출생. 이후 경기도 은이 교우촌으로 이주함
o 1846년 우포도청 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천주교에 입교한 뒤 한결같이 교리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예수 그리 스도를 따르는 육화(肉化)의 영성을 쌓다가 순교를 통해 종말(終未)의 영성을 완성한 이들은 아주 드물다. 그들은 박해기의 교회를 지탱해 주 는 모퉁이 돌이었고,때로는 교우들이 끈질기게 신앙의 줄기를 이어갈 수 있는 고리가 되어 주었다. 한이형(韓雇形) 라우렌시오 회장도 그들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충청도 덕산의 양반집안에서 태어난 라우렌시오는 ‘병심’(Pieng Sim)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성품이 강직한 데다가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천주 교리를 접한 것은 만 열세 살 때였는데 , 어린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기 드물게 열심 한 하느님의 종이 되 었 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을 하며 이전의 죄를 통회하거나 그리스도 의 수난을 마음에 되새기곤 하였다. 또 주일과 파공(罷I) 축일에는 어 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공소로 가서 본 분을 다하였다.9'
만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교우 처녀를 아내로 맞이한 라우렌시오는 그 녀와의 합의 아래 고향을 떠나 경기도 은이 교우촌(현 용인시 처인구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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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순교자 행적』,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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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남곡리)으로 이주하였다가 비신자들이 가까이에 있는 고향에서는 참 믿음살이를 영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교리의 가르침대로 박 애심을 발휘하여 가난한 이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으며,“선행 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일은 바로 주님의 口1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라고 말하곤 하였다.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맞 이하였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언제고 자기의 옷을 내주었 다. 이러한 그에게 애긍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그는 이렇 게 대답하였다.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워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넉넉한 이자와 함께 모두 돌려받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100>
그는 아무리 농사일이 바쁜 때라고 하더라도 파공(罷工)날 오후에는101) 연장에서 손을 놓았다. 밤이 되면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기도와 묵상 을 빼놓지 않았으며 , 사순 시기 동안에는 반드시 단식재를 지켰다. 그의 훌륭한 교리 지식과 덕행, 모범적인 생활은 교우들 사이에서 뛰어났으 며, 모든 교우들이 그의 말이라면 기꺼이 따를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범은 복음 전파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낳았다.102>
이 와 같은 라우렌시오의 모범은 1837년에 입국하여 교우촌을 순방하 던 앵베르(L. Imbert,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눈에 띄었다. 즉시 주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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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페레을 주교 보고서〉, 919쪽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62, 김 도로테 아의 증언 : 회차 66, 정 바르바라의 증언 : 회차 68, 임 루치아의 증언.
100)『순교자 행적』,20쪽.
101)당시의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주일 파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오부터’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102)『순교자 행적』, 20〜21쪽 :『기해 • 병오 재판록』,정 바르바라의 증언 및 임 루치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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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은이 공소 회장에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고, 그는 이후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에 이르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면서 병오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기원 마티아를 앞세운 포교 들이 은이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들의 목적은 앵베르 주교의 복사 이재의 토마스를 체포하는 데 있었고, 그래서 토마스의 숙부인 마 티아를 먼저 체포한 뒤에 그를 앞세우고 토마스가 있을 법한 은이 교우 촌으로 들이 닥쳤던 것이다. 그때가 1846년 7월 (음력 ) 무렵 이 었다. 그러 나 토마스는 그곳에 없었고, 한이형 라우렌시오 회장 가족과 몇몇 교우 들만이 그곳에 있었다.103)
포교들은 이내 그들 모두를 체포하였다가 우두머리로 지목된 라우렌 시오 회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놓아주었다. 그런 다음 라우렌시오 회장의 옷을 벗겨 대들보에 매달고는 배교를 강요하면서 교우들이 간 곳을 대라 고 매질을 하였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이번에는 다리를 묶고 다리 사이 에 깨진 사기 조각들을 끼워 넣은 다음 굵은 밧줄로 다리를 감고 앞뒤로 잡아당기며 톱질을 하였다. 이내 라우렌시오 회장의 다리에서는 피가 나 고 살점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그는 입술을 깨물고 모든 것을 참아 견 디며 밀고를 거부하였다. 게다가 포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기까지 하였 다. 그러자 포교들도 놀라워하면서 놓아준 신자들에게 “너희들도 천주학 을 하려면 적어도 이놈과 같이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후 포교들은 라우렌시오 회장을 서울 우포도청_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포교들이 그의 다리를 보고는 말에 태우려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런 다음 상처로 인해 신발조차 신을 수 없는 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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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75,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 : 회차 101, 이 마 리아의 증언.
104)우포도청에서 한이형의 처형 사실을 보고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일성 록』, 1846년 8월 1일) 그가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옥살이를 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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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리가 넘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 아를 올라가 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함이었다.
포도청에 이르자 다시 문초와 형벌이 이어졌다. 그러나 라우렌시오 회 장은 자신의 믿음에 굳건하였고, 온갖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스스로 되뇌곤 하던 “천주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타당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직접 실천하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특별히 포도대장의 명에 따 라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1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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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순교자 행적』.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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