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_ 이실비
조명실 / 이실비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또보겠지 떡볶이 집에서
묻는 네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상하지 충분히 안타까워하면서 떡볶이를 계속 먹고 있는 게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게
괜찮니?
그런 물음들에 어떻게 답장해야할지 모르겠고
겨울이 끝나면 같이 힘껏 코를 풀자
그런 다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코를 흘리고 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손톱을 벗겨내는 속도를 이기길 바랐다
다정 걱정 동정
무작정
틀지 않고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초록색 비상구 등만
선명히 극장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지옥이라면
관객들의 나란한 뒤통수
그들에겐 내가 안 보이겠지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잊지 않고 세어 본다
【심사평】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 작품
당선작으로 이실비의 ‘서울늑대’와 ‘조명실’을 선정했다. 능숙하고 절묘한 이미지 배치와 전개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시란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울늑대’는 늑대가 되어 서울을 달리는 “두 덩이의 하얀 빛”을 통해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부터 드넓은 도시의 이미지까지 아우르며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냈으며, 식당에서의 대화가 극장 조명실의 독백으로 전환되는 ‘조명실’은 죽음과 사랑, 불안과 고독 등을 극장 뒤편의 그림자 이미지로 모아 그것을 묵시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추출하는 데 성공해 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자다. 당선자는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앞으로도 자유롭게 이 세계를 유영하기를 바란다. 본심작을 포함해 뛰어난 투고작이 많았다. 머지않아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시에 대한 우리의 열의가 있는 한 시는 끊임없이 우리 삶과 더불어 이 세계와 대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소연·박연준·황인찬 시인
개인적 시 감상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철학적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의 불완전한 존재.
신처럼 모두 다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동물처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지식에 대해 목마른 존재이다
2.스토아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인생은 연극론.
인생은 극작가인 신의 뜻(제우스)에 따라 각자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이다.
3.실존주의 철학자 까뮈의 부조리철학.
인간의 이성은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증명되지 않는다.인간과 세상의 사이에 발생하는 부조화가 바로 부조리이다.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의미가 찾아지지 않은 세상 사이의 지점에 부조리가 놓여있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단번에 뛰어오르는 비약(leap)이 종교와 철학이다. 어떤 이는 종교와 철학에 기댈 것이고 어떤 이는 자유의 바다에서 무한히 사유하고 탐색할 것이다.
4.염세주의철학자인 쇼펜하우어의 인생 지옥론
세계는 지옥이다.이 세상은 어디나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삶은 고통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인간은 욕망하는 데서 오는고통에 신음하거나, 권태로움에서 오는 고통에 신음하기를 반복하며 매 순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인간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등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이다.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이유와 근원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의지라고 보았다.그가 말하는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고생명의 원리이자 에너지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의지라면, 그래
서 모든 인간이 의지의 작용에 떠밀려 산다면, 본질적으로 나와 타인은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내적 원리에 의해서 추동하는 존재이다.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그저 의지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표상의세계에서 나와 타인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의지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존재라고 보았다.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먼저 '나 자신'이라는 틀에 갇힌 개별화의 원리 극복하는 데 있다. 여기서부터 동일성에 기반한 연민이 가능해진다.
조명실 / 이실비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또보겠지 떡볶이 집에서
묻는 네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보조화자가 그 사람 죽은 거 알아? 하고 묻는다. 화자는 또보겠지 떡복이 집에서라고 대답한다. "또보겠지 떡볶이집"은 홍대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핫한 가게인데 웨이팅 지옥이라고 한다. 떡볶이도 매운데 이것은 천국의 맛과 지옥의 맛을 동시에 선사한다.또보겠지 떡볶이집은 고유명사일 수도 있고 또한 죽은 사람을 또보겠지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죽은 사람이라도 기억에 조명을 쏴서 다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대화의 내용은 슬플 것이나 묻는 사람의 얼굴은 아름다울 수 있다. 죽음을 환기한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인간 세상은 지옥이다. 각 연마다 이 등가성의 이미지를 변주하기 위해 또보겠지 떡볶이집의 이미지를 사용)
(암울한 현실에서 죽은 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현실에서 산자의 사랑을 대비한다)
이상하지 충분히 안타까워하면서 떡볶이를 계속 먹고 있는 게 너를 계속 사랑하고 있다는 게
(인간은 죽음을 슬퍼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생을 영위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은 우주의 법칙이므로 죽음은 죽음대로 슬퍼하고 삶은 삶대로 영위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먹고 사랑하는 행위는 이상할 수 있다)
괜찮니?
그런 물음들에 어떻게 답장해야할지 모르겠고
(이렇게 삶과 죽움이 뒤엉킨 비합리적인 상황을 직면한 화자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곤란할 것이다.원래 인간이 그런 존재이므로)
(불안한 현실에서 안부를 묻는 물음에 자신있게 답을 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제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냥 사는 것일 뿐이다)
겨울이 끝나면 같이 힘껏 코를 풀자
그런 다짐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이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존재이다. 희망이 있으므로 겨울을 버틸 수 있다.)
(코를 푸는 행위는 시원하게 불합리하고 불안한 과거와 이별한다는 의미이다)
아직도 코를 흘리고 있다
(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겨울이다)
(인간은 아직 미성숙한 어린아이이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손톱을 벗겨내는 속도를 이기길 바랐다
(생명이 죽음을 이겨내길 바랐다)
다정 걱정 동정
무작정
틀지 않고
(화자는 이 불합리한 인간 세상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서로에게 다정하고 걱정을 하며 동정하면서 이 추운 세상을 살자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왜하고 의문을 품어야 한다.)
어두운 조명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화자는 '어두운 조명실' 즉 세상 안에서 세상을 사유한다)
초록색 비상구 등만
선명히 극장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초록색 비상구는 앞 문장의 봄과 대응해 볼 수 있다.희망이라고 볼 수도 있고 까뮈가 말한 부조리한 세계의 비약(종교, 철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지옥이라면
(이 세계는 전쟁, 질병, 환경오염/기후변화, 시기질투 등 온갖 악으로 가득차 있다)
관객들의 나란한 뒤통수
그들에겐 내가 안 보이겠지
(관객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뒷모습이다. 나란하다는 것은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고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인간이지만 내가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헤쳐가기도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보고 있다
(화자는 같은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그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
잊지 않고 세어 본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아픔을 세어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1. 메시지
주제: 불안한 현실을 암울한 지옥(극장 내부)으로 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조명
2. 이미지
- 떡볶이집에서의 대화, 계절과 시간, 극장 내부 등 총 세 장면을 배치한다.
-각 연마다 지옥의 이미지를 변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