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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06. 02 17:23: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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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소연 |
제목 | 비문작성관련 |
안녕하세요? 삼현파 71대손입니다. (항렬자가 '종'자 이면 71대가 맞죠? ^^) 이번에 납골당을 마련해서 비문을 만드는데, 비문에 들어갈 가문과 관련된 글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여기에 도움을 청하니 도움 많이 주셨으면 합니다. 대략 300자 정도 되면 좋겠구요, 시조인 김수로 왕과 관련있는 내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문의 흐름을 간략하게 보여도 좋을것 같구요. 내용이 너무 짧아서 힘들다는 것도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운영자 ] | 참고 안녕하세요 김소연님! 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질문글 중 “삼현파 71대손 종자 항렬”을 아래의 삼현파 항렬표에 근거하여, “삼현파 23세(차례) 종(鍾)자 항렬”로 바로 잡습니다. 삼현파의 정식 명칭은 판도판서공 휘관파(版圖判書公 諱管派)입니다. 71대손이라고 하는 것은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의 71대손을 의미하나 이는 아주 정확하지 않은 것이므로 삼현파 중조(中祖)로부터의 세수로 환산하여 통일합니다. 2001년간 신사보(辛巳譜,대동보)의 삼현파 항렬표 16세 顯(현)○, 17세 再(재)○, 18세 ○圭(규), 19세 昌(창)○, 20세 ○斗(두), 21세 容(용)○, 22세 ○坤(곤), 23세 鍾(종)○, 24세 ○洙(수)泰(태), 25세 相(상)東(동)○, 26세 ○煥(환)熙(희), 27세 廷(정)在(재)○, 28세 ○鎬(호)鎭(진), 29세 永(영)汶(문)○, 30세 ○根(근)杓(표), 31세 炳(병)炅(경)○, 32세 ○埰(채)基(기), 33세錫(석)銘(명)○, 34세 ○洪(홍)淳(순), 35세 柱(주)桂(계)○ , 36세 ○夏(하)烈(열) 自判書公十六世로 起顯字(판도판서공으로부터 16세에 현자) 본 홈 운영자는 비문 작성 전문가가 아니라 비문을 작성하여 드리지 못하는 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보첩을 살펴보면 높은 벼슬을 하였던 조상묘에만 비석을 세웠고, 비문을 족보에 기록하였습니다. 벼슬을 하지 아니한 조상에 대한 비문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장묘문화(葬墓文化)도 바뀌어 가족 또는 소문중 단위의 납골묘를 만드는 것이 대중화 되었고, 납골묘 앞에 간단한 비석을 세우는 것도 일반화되어 가고 있으나, 비문을 어떻게 쓰야 할 지가 문제인 것이고, 비문을 작성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납골묘비에 대한 홈 운영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묘비 전면에는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 / 000문중 봉안당비“ 등으로 납골묘가 어느 씨족의 납골묘인지를 나타내어야 할 것입니다. 납골묘비 뒷면에는 성씨(姓氏)와 시조(始祖), 중조(中祖), 입향조(入鄕祖) 또는 입도조(入島祖), 소문중의 내력 후손에 관한 사항을 300자 내외로 함축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문 글씨도 누구나 읽어 볼 수 있게 한자와 한글을 병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음은 홈 운영자가 억지로 작성한 소문중의 납골묘 비문을 소개하니, 이를 님의 소문중 또는 가족묘 비문 작성에 참고 자료의 일부로 활용되었으면 합니다. 아래 내용은 약600자의 내용입니다. <전면>( 2줄로) 金 海 金 氏 金 寧 君 諱 牧 卿 派/ 諱 昌 祿 後 裔 楊 川 奉 安 堂 碑 <후면> 金海金氏始祖(김해김씨시조)는 駕洛國首露王(가락국수로왕)이고 中祖諱牧卿(중조휘목경)은 高麗朝三重大匡金寧君(고려조삼중대광금녕군)이시다 五世諱孝源(휘효원)은 朝鮮朝文科兵曹參議(조선조문과병조참의) 八世諱世華(휘세화)는 禮祖判書(예조판서) 十一世忠壯公諱大壽(충장공휘대수)는 宣武原從功臣贈戶曹參判(선무원종공신증호조참판)이다. 十四世諱千靖(휘천정)께서 靑巖古旨柿木洞(청암고지시목동)에 터를 잡으시니 入鄕祖(입향조)시며 十七世諱昌祿(휘창록)께서 이 곳 楊川里(양천리)에 후손들을 蕃盛(번성)하게 하셨다. 時代(시대)의 變遷(변천)에 따라 宗會決議(종회결의)로 이 곳 楊川里(양천리) 새안골 明堂(명당)에奉安堂(봉안당)을 마련하였다. 本堂(본당)은 先塋(선영)일 뿐 아니라 후손들도 장차 永眠(영면)할 聖域(성역)이 될 것이니 忠孝之家(충효지가)의 矜持(긍지)를 가지고 宗事(종사)를 議論(의논)하고 敦睦(돈목)하여代代孫孫(대대손손) 繁昌(번창)할지어다. 西紀 2004年 4月 日 金海金氏金寧君派十七世諱昌祿門中 (김해김씨금녕군파17세휘창록문중) 다음은 가락국왕릉비문(駕洛國王陵碑文)입니다. 王姓金氏 生於漢光武建武十八年 始建國 號駕洛 薨於獻帝建安四年 壽一百五十八 葬納陵 首露 史稱王名 因以爲王號云. 梁大通四年國亡 傳世九<十> 歷年四百九十一. 王有子十人 感后言 賜后姓者二 東方之許 本原于此 王之世 治臻淳尨 邦人追思王以報德 至今冬至日 祀用太牢 以后配焉. 葬後千有餘載 逮皇明萬曆庚辰 後孫許曄 爲方伯 修墓 備床砌 壬辰 倭寇掘發 鄕人改封之. 後庚辰六十七年丙戌 積以遺紹 而忝按道 又加封 植碑于墓前 維月若日工告 迄功 實丁亥仲春也. 床若砌 亦皆新焉 以安于樽所者 卽前日陳牲石也. 同察幼學穆 省峴察訪崙. 進士{山/兼}. 新寧縣監坵. 幹其事 噫 煌煌公德 浹民骨 入民耳深 一片石 不足爲輕重 在子孫報本之誠 又安得不爾 丁亥二月 日, 立 後孫 通政大夫 守慶尙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許 積謹識 外裔 幼學 全 滎謹書 왕의 성은 김씨이며, 후한의 광무제 건무 18년(A.D.42)에 탄생하여 처음 나라를 세우시고 이름을 '가락(駕洛)'이라고 하셨다. 후한의 헌제 건안 4년(199)에 돌아가시니, 당시 나이는 158세이셨다. 납능에 장사를 지냈다. 수로는 사서에서 왕의 이름을 칭한 것인데, 이것이 왕을 뜻하는 호칭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양나라 중대통 4년(532)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왕위가 9대손까지 이어졌으며 도합 491년간 나라가 유지된 셈이었다. 왕은 아들을 열 분 두셨는데, 왕후의 말에 감명을 받고 두 아들에게 왕후의 성을 하사하였으니, 우리나라의 허씨 성은 이로부터 근원한 것이다. 왕이 다스리시는 동안 정치는 몹시 순박하면서 넉넉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왕을 추모하면서 그 덕을 깊고자 하여, 지금까지 동짓날이면 큰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왔고, 왕후에게도 함께 제향을 올려왔다. 장례를 치룬 후 천여년이 흐른 명나라 만력(萬曆) 경진년(1580:선조 13)에 이르러, 후손인 허엽(許燁)이 관찰사가 되어서 능묘를 보수하고 상석(床石)과 섬돌을 갖추었다. 임진년(1592)에 왜구가 능을 파헤치자 고을 사람들이 다시 봉분을 쌓아올렸는데, 경진년(1580) 이후 67년째가 되는 해인 병술년(1646)에 이 사람 허적이 왕의 후손으로서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봉토를 더 쌓아올리고 능 앞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 해 모월 모일에 시작한 공사는 이듬해인 정해년(1647) 2월에 완성하였으니, 성석과 섬돌을 모두 새로 만들었으며, 제수용품 보관소에는 바로 전날 희생(犧牲)에 쓴 돌을 안치하였다. 같은 성씨인 유학(幼學) 허목(許穆)과 성현(省峴) 찰방(察訪) 허륜(許崙), 진사(進士) 허겸(許謙), 신녕현감(新寧縣監) 허구(許坵)가 이 일에 간여하였다. 아! 왕의 빛나는 공덕이 백성들의 뼈에 깊이 사무치고 백성들의 귀에 길이 들어갔다. 한 조각 돌에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쓰기는 부족하지만, 자손들이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정성을 어찌 적어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해(인조25년;1647) 2월 일 건립 후손 통정대부 수경상도관찰사 겸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허 적 삼가지음 외예 유학 전 형 삼가 씀 다음은 탁영 김일손 선생님의 묘비문입니다. 濯纓先生墓碣銘(휘 일손) 燕山世戊午士禍 至今談者 必哽涕而濯纓金先生 爲之首 先生天固生之也 旣生而又殺之 天曷故焉 噫 先生文章節義 迫隘宇宙 東褊之所不能容則先生 可无及乎 盖先生 爲史官 嘗取其師佔畢金公 吊義帝文 載國史 又於史 直書李克墩醜行 克墩掌史事 見而啣之 遂引諸不逞 亟持義帝文而曰是不敢作 是不敢書 俱大逆 遂按佔畢公 禍其瘞 先生亦身棄東市 爲世大戒 豈不悲哉 然先生之死 固已動神明而激耳目矣 及 中廟改玉 首洗寃枉 褒寵赫然 顯廟朝儒臣 又白其事實 特擧貤典 士大夫誦慕 日星河漢 不可梯及而彼鼓掌相慶 自快私意者已皆爲螟䘌爲孤 蠱鬼誅於无窮 鳴呼 非天意 詎至此乎 先生金海人 諱馹孫 字季雲 爲文章 下筆千百言 奔放雄博 讀者皆呿舌 華人目之曰此 韓子也 少從佔畢公學 又與金文景{敬}鄭文獻 友善 常伉厲奮發 有遠大之慕 成化丙午 魁生員 幷中進士第二 冬又闡大科 自翰苑 歷華踐 卒官吏曺正郞 間爲養補{輔}晋州學 以質正官 赴京師 己又 賜暇湖堂 選隸綱目校讎廳 聲譽出等夷 諸名公 皆折節相下 奸黨 己多側目者 及禍作 一時士流 坐先生鉤黨 死徙殆盡 先生死時 年三十五 所著詩文 經禍散佚 只若干卷 行于世 曾祖諱湑 縣監 祖節孝先生 諱克一 不仕 喪親廬墓 誠感猛獸 事載郡誌中 是生執義孟 執義公 生三子 伯駿孫 仲驥孫 並登一榜 仲先夭 伯官直提學 先生其季也 娶禮安金氏尾孫女 无嗣 直學公 有子大有 號三足堂 經術才行 大爲靜菴諸賢所獎 擧賢良科 拜正言 至北門變起 廢斥歿世 鳴呼 小人之不懲前禍又何甚也 學者卽先生所居淸道郡 爲建祠 幷與節孝三足二公而享享祀之 三世俎豆于光 有耀 先生之道豈无所來而亦豈无所傳哉 雖先生與三足公 其世俱不幸而報施之必於後者非在斯歟 先生葬 在本郡上北先墓側 歲久無顯刻 過者皆齎咨太息 今上乙巳 尹君鳳九宰是邑 慨然曰是 余之責也 遂與邑士 謀將伐石樹徑 觀察使兪公拓基亦樂聞而相其役 後人之爲先生寄慕者至此而益无憾矣 余竊念先生 秉直觸邪 不攝不撓 雖其心百死靡悔而只是畢齋之文意義 有不可知者 先生 又必載之史乘何也 此不免後來之起疑也 抑其間 自有權度 非淺識所可論歟 惜不及先生之世而講質也 尤庵宋文正 嘗論此曰豈定哀微辭 非聖人達權則不可法而秉史筆者 惟直是職歟 噫 此可謂知先生微意而爲 後世之堯夫也歟 鳴呼 此不可與不知者道也 銘曰 桑榟翳然 是惟先生之宅里 丈五 先生是埋 數架 先生是祠 巀嶭乎道之山 湯湯乎道之水 將先生與俱永存兮 其死也異乎人之死 崇禎紀元戊辰後再丁巳六月 日 嘉善大夫禮曺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藝文館提學尹鳳朝撰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鎭商書 資憲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大邱都護府使兪拓基篆 참고; 원문임술보, 해석문; 1995년 삼현파보 탁영선생묘갈명 병서 연산조 무오사화에는 목이 메이고 눈물 흐름을 깨닫지 못하니 탁영 김선생이 더욱 참혹 했었다. 선생은 하늘이 내신 인재어늘 내면서 문득 죽인것은 무슨 까닭인고. 참으로 선생의 문장절의는 우주간을 메꾸고 남을 것이어늘 좁은 나라가 능히 알아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선생이 사관이 되어 그 스승 점필재 김공의 조의제문을 취해 국사에 실었고 또 이극돈의 추행을 격렬이 비판했더니 극돈이 이를 보고 혐의해서 무뢰배를 모아 의제문을 공박하되 이것은 감히 짓지못하고 감히 쓰지 못할글이니 모두 대역 이라하고 드디어 그 죄를 물어 점필공을 부관참시하고 선생도 저자에 버려서 세상을 뜨게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그러나 선생의 죽음은 진실로 신명도 슬퍼하리만치 크나큰 충격이었다. 중묘조에 이르러 먼저 그 원통함을 풀어 포상이 융숭했고 현묘조에 유신들이 또 그 사실을 진정해서 두터운 은전을 내렸으니 사대부들이 사모하기를 태양같이 우러러 하되 어둔골목에서 손뼉치고 좋아하던 무리는 이미 요귀 악령으로 여호밥이 되였으니 어찌 하늘의 보복이 아니랴. 선생은 김해사람이라 휘는 일손(馹孫)이오 자는 계운이니 문장을 의논하면 천백길의 폭포수 쏟듯 웅장하고 광박하여 읽는이 정신이 황홀하니 화인들도 지목해 한퇴지의 문장에 비하더라. 일찍이 점필공을 좇차 배우고 또 김문경 정문헌공으로 벗삼아 서로 겨루어 분발해서 원대한 포부를 길렀다. 성화 병오년에 생원에 올라 진사를 그쳐 대과해서 한림으로부터 청직을 내리고 이조정랑으로 마쳤으되 때로는 진주에 도임해서 교화를 바로잡고 경사에 올라가면 호당(湖堂)에 거해 강목(綱目)을 교정하니 명성이 뛰어나고 여러 명공들이 다 사양해 굽히되 간당중에 시기하는자 많더니 화가 일어남에 한때 선비들이 선생에 휩쌓여서 죽고 귀양간 이 하다하니 선생의 시년이 35세였다. 지은 시문이 환란에 없어지고 약간 책권이 세상에 남았을 뿐이다. 증조 휘서(湑)는 현감이요 조부 절효선생은 휘극일(克一)이니 벼슬을 사양하고 어머니 묘소를 지킬제 지성을 맹호도 감복했으니 사실이 군지에 실렸다. 이분이 집의 맹(孟)을 낳고 집의 공이 아들 셋을 두었으니 맏이 준손(駿孫)과 다음 기손(驥孫)이 함께 과거했으나 기손은 일찍죽고 맏이는 직제학이요 선생은 그 셋째이다. 예안김씨 미손의 따님을 취했더니 자손을 두지 못했다. 직제학 공은 아들 대유를 낳았으니 호는 삼족당이다. 경술과 재분이 정암같은 현인들의 권장을 받아 현량과에 올라 정언을 배했더니 사화가 일어나 불우하게 세상을 마쳤다. 슬프다! 소인들의 화를 빚어냄이 이같이 심하도다. 학자들이 선생의 옛터 청도군에 사당을 세워 절효 삼족 양공과 함께 향사하니 3세 공적이 더없이 빛나고 선생의 도가 이제 옴이 있거던 어찌 전함이 없으랴. 비록 선생과 삼족공이 함께 불행했으되 그 보응이 이제야 돌아왔도다. 선생의 묘소가 본군 북쪽 선영에 있으되 세월이 흘러도 표석이 없어 지나는 사람 탄식을 금치 못하더니 금상 을사년 윤군 봉구가 이 고을에 부임해서 탄식해 이르되 이는 나의 책임이라 하고 드디어 고을에 통문해서 돌을 깍아 묘도를 이룩할새 관찰사 유공 척기가 또한 찾아 협조하니 후인이 선생을 사모하는 정 이제야 한이 없도다. 내가 그윽히 생각건대 선생의 서릿발 같은 붓은 간사에 부딪혀도 흔들리지 않고 백번 죽어 후회없을 줄 믿거니와 다만 점필재 글에 의의가 자세치 못하거늘 선생이 어찌 반드시 사책에 실어야 했는가? 이 후세에 의혹을 자아낸다. 물론 그 새에 사정이 있는 것을 나에 천식으로 따질바 못되거니와 선생의 세상에 있어 질문하지 모함이 애석한 일이다. 우암 송문정공이 의논하기를 사람의 그윽한 마음은 성인의 달관이 아니면 짐작치 못하려니와 사필을 잡는자는 오직 곧게 쓰는 것이 직책이라 하니 이것은 선생의 숨은 뜻을 알아낸 후세의 명언인가? 무식한 나로서는 추측 수 없는 일이다. 새겨 이르노니 산천이 아늑하니 선생의 고향일세. 저 높은 봉분은 성생의 무덤이요 두어칸 집은 선생의 사당일세. 우뚝한 청도산과 흐르는 청도물이 선생과 길이 함께하리니 그 죽음은 오히려 남보다 생색이 더하네. http://kimheakim.com.n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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