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와 내 인생/세훈
고등학교 입학 시는 우대생
대학시절에는 1년에 전국대학마다 1명씩 총15명을 선발한 한미재단 장학금 수혜자로
장마와 한해가 휩쓸고 간 그 세월 학부를 마쳤으며,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에서도
장학금혜택의 영예를 안아 환중에 계신 장인어르신께 전달해 화제였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모교 의과대학 초창기에
생화학교실로 발령받아 김창세교수님과
고광삼교수님 그리고 본인은 주마다 세포학원서로 세미나를 계속했다.
7남매 중 장남으로 조교봉급으론 생활난이니
중등계로 진출 내자를 만나 결혼 이후
목포여고 재직 시 석사과정에 입문
목포고등학교에서 박사학위과정 중에 모교로 스카웃되다.
20여일간 사양했으나 은사님은 이용재교장님과 전화 통화로
마무리하고 대학원진학으로 인한 사표 후 고교 제자 졸업반을 위해
후임자와 인수인계 마치고 대학모교로 재 진출 결정의 대학 강의준비는
효소학과 일반 생물학을 정리하며 후임자를 기다려야 했다.
28년 전 호남의 고교 교사 중 박사과정이 유일하다는 선발배경이며,
모교의 교육대학원생의 박사1호라는 점에서 은사님은 선택하시어
박사학위 취득 전까지만 전임강사대우와 1~2학년 지도교수로 출발 왜 이렇게
선택되었는가를 헤아려보니 1986년 403명교수 중 80번째 박사순위라는 점이다.
이렇게 대학 교수님들이 그만큼 안일한 생각에
자기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니 학위 없으면 승진을 없애는
인사 원칙에도 불구하고 거의 잠자고 있는 태만한
지방대학교수들의 참상이었으니 일선 중등교사에게 기회가 오게 되었으리.
함평여고시절은 초등학교 동창회 발족 후 모교 삼향초등학교 정원에 동창회기념비(3m높이)
목포여고 재직 시 중고교 총동문회가 10여년간 김흥수교수와 재단과의 갈등으로 마비상태
고12회 손광희친구와 고 최한웅친구와 3인이 동창회를 발족하여
15회와 협력하여 총동문회부활로 목포시민회관에서 윤성민 장관님 전남대학교 위인선교수님의 특강으로 고조화
대학으로 옮기면서 본부 동창회를 떠나 재광문태동문회 역시 마비되어
빈통장커녕 회칙마저 오리무중상태 수석부회장에 이어 고 강혁 회장 모시고
제일 오피스텔에서 새로운 회장 선출에서 10회와 15회 선후배사이를 투표하자는
분위기를 못 마땅한 나머지 10회 선배가 사퇴하므로 무질서한 모습으로 보였다.
당시 박광태 시장님과 함께 1,760만원의 기금을 당일 확보하는데 성공은
어쩜 동문회가 잘 되면 참여하지 않고 불안할 때만
다시 부활시키는 구원투수역할이 내 임무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대학 동창회도 수석부회장 겸 제4대 조선대동문장학회장(초대 박관주님 2대 문창식교장님 3대 고창현총장)을 맡아
장학금 위치보존 재판에서 독립당사자 참가신청인으로써 변호인 없이
변호인을 준비한 원고 피고를 폐하게하는 판결의 진기록 중심역할은 동문장학회 역사의
기록물로 지울 수 없을 사례라고 원로 선배님의 칭송이 뇌리를 스쳐 간 그날들…
이제 홀홀히 작년 여름부터 지금 가을까지 대밭아래 바가지로 떠먹는 옹달샘의 집터
7대 보존가옥을 리모델링하는 세월은 벌써 7순이 다가오는 내년에는
구지뽕나무 단감 대봉 대추 매실 무화과 보리수 살구 앵두 오디 왕복분자며,
화초목류는 고수나물꽃 동백 백목련 불두화 수국 설구화 이팝나무가 날 반겨 주리라.
2013.10.13.